독일이 백남준을 최고 예술가로 받들고,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칭송한 건, 그가 첨단의 하이테크와 현대미술을 결합하고, 6개국어를 하는 글로벌 지구촌 시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결국 그가 선사시대에 대한 인류학적인 성찰과 함께 동서양 고전에 대해 누구보다 능통했고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유를 기반으로 인류의 평화 공동체를 성취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남준은 결국 'TV'를 'INTERNET'로 바꾸는데 성공함으로써 지구촌을 하나로 만들었다. 결국 베이스(소통과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아래 2007년 백남준 추모 1주기 독일 뒤셀도르프 시 당국에서는 그에 대한 오마주로 시내 모든 전차버스에 백남준 사진을 붙이고 운행하게 했다>
그는 왜 독일에서 신화가 됐나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나 다음 주 특강(?)
백 백이 보내드리는 백남준 이야기 8번째 김, 3월말까지 3분1
올 12월 말, 상하이에서 동아시아 비디오아트 선구자들 김구림 백남준 김순기 오노 요코 구보타 등이 전시가 열린다.
<위사진> 백남준 사후 추모 1주년 기념 때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녔다. 백남준 신격화하다. 신과 싸우는 예술가. 그러나 신과 너무 맞서지 마라!!!! <굿 아니디어 백남준 시민들에게 알리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죠 뒤셀도르프 시의 각별한 배려다>
https://www.youtube.com/watch?v=VVT3_zcC5jw&t=27s
그는 왜 독일에서 예술신 되었나.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나. 사진 아래 인용구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백남준을 신의 라이벌로 보고 있다. "너무 완벽하면 신도 화를 낸다" 이 말을 인용하다. 그를 간접적으로 신격화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 교수였던 백남준을 뒤셀도르프 시(의회)는 2007년 1월 29일 추모 1주년을 맞아 그를 애도하면서 어떻게 온 시민들에게 알릴까 고민하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다. 바로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대형 광고판처럼 붙이고 다니게 했다. 이곳 시민들 그를 기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래 인용문(“WHEN TOO PERFECT LIEBER GOTT BÖSE!)을 통해 백남준을 신격화하다
[1]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 받았나 <위사진> 백남준 사후 1주년 기념 때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녔다. 백남준에게 독일은 가장 오래된 고향이고, 라인 강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젖줄이었다. 백남준은 라인 강 물결에서 TV주사선을 봤고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고 노래했다. 예술과 TV를 오묘하게 결합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www.youtube.com/watch?v=Z4hw_0RrLJw
부인 '시게코'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칭송을 받았고, 웬만한 카페에 가도 '마에스트로' 오셨다며 융숭하게 대접했고 또한 독일인은 백남준을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주는 모든 미술상을 다 받았다.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그외 일본에서 미술계 노벨상 교토상 수상(Kyoto Prize in Arts and Philosophy) 존 케이지도 이상을 받다. 김대중도 때 큰 상(2000년 금관문화훈장) 받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내가 이런 좋은 상을 탈 줄 알았다면, '백'씨 대신 '천'씨 성을 타고나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더 만들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다./
사실 독일 사람들이 백남준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
독일에서 줄 수 있는 모든 예술상을 다 받았어요. 희안하죠.
그중 가장 큰 상은 역시 괴테상이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갔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많지만 최근 취재한 독일작가 '알프레드 하르트' 씨의 대담에도 그 단초가 보인다.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해 독일미술을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그는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내가 생각할 때 백남준이 독일에게 환영을 받은 건 바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개 손도 모자란다는 '천수관음보살'처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며 새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리라.
[인트로 2] 제가 기자라 필드에서 경험한 일화 소개하고자 합니다.
몇년 전인가 취재한 적이 있는 독일 작가 원래 음악 전공인데
사운드 아트를 하는 작가로 부인은 한국분이고요
'알프레드 하르트' 씨와 대담 중에
왜 백남준은 독일에서 그렇게 인기가 높은가 하고 물어봤어요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 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그래서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 아트'를 창안해
독일 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독일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아날로그와 디지털)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그에 대한 극찬이다. 요즘 양혜규가 백남준을 따라잡기에 바쁘죠.
백남준&에로스에서 언급하겠지만(한국에서 백남준의 에로티스즘과 맑시즘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디오 비너스(Video Venus 1978)' 이 퍼포먼스는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1978년 6월3일-4일까지 이 대학교 조각가 여학생인 '자니스 거이(Janice Guy)'가 누드모델로 참여하여 이루어지다(Video Venus life performance starring Janice Guy) 첫수업 굉장히 중요하죠. 고민했겠죠. 백남준 Performance 대가 이것보면 백남준 천재다. 여기서 주제는 쌍방소통 특히 음악과 인간의 몸 소통을 추구한 것이다. 이 백남준의 제자는 나중에 독일 아헨 미술대학교 교수가 되다.
백남준 뒤셀도르프 예술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제자를 존중한 그가 일방적 수업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과 공동으로 현대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시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해프닝아트에 '성(性)'을 가미한 수업을 하고 선보이다. <수업의 주인은 교수가 아니고 학생이다. 참여와 소통의 철학이 여기에>
백남준은 이미 11년 전인 1967년 샬럿 무어먼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선보이지만 (뉴욕 미술계를 뒤흔들어놓는) 센세이션 일으켰다. 그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르죠 업그레이드 된 것이다 . 자신보다 25살이 어린 같은 대학 제자 '자니스 거이'와 함께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면 '누드비너스'가 음에 맞춰 몸이 연주하는 퍼포먼스. 오감을 최대로 확장시키며 뒤틀린 우리 내면을 확 풀어주는 최고작.
이런 작품을 백남준이 교수가 되기 전부터 무척하고 하고 싶었지만 모델료가 너무 비싸 못 하다가 드디어 좋은 기회를 통해 천지인 하나이듯, 자연과 인간과 음악이 하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 그의 제자와 함께 이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다.
여기 '섹스아트'에 깔린 백남준의 철학은 바로 말 이전의 몸으로 하는 예술이 진실하다고 보는 것이죠. 인간과 신이 직통이었는데 모든 게 문자화되면서 그 소통은 단절. 그래서 백남준은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적 생명이 넘치는 영매 즉 '미디어'를 통해 이를 회복하려고 했고 여기서 '인터미디어 샤먼'과 '디지털 샤먼'의 진면모를 보여준 것이죠.
http://egloos.zum.com/seulsong/v/4077796
<비디오는 현대의 종이> -백남준. 종이는 죽었다는 같은 맥락이죠.
<백남준과 도이치란트, 독일이 백남준의 예술적 파르나스 고향이죠. 지난번 백해영 갤러리 전시 제목이었죠>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했단다. 백남준 보는 독일인 시선이다. 백남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제로 나갔다. 자세한 것은 아래 본론에서 그의 패션은 헐렁이 단추를 잠그지 않아
"새로운 언어를 만든 사람은 항상 50년을 앞서 간다" -앙리 마티스. 백남준을 두고 한 말인가.
<추가> 1974년 백남준 어떻게 인터넷을 예언했나: 그는 이 보고서(1974년)에서 백남준은 노동시간 단축, 인종차별 몰락, 환경오염 대안을 위한 미래의 '광역 통신 네트워크' 언급
2018년 상하이 전시. 1960년대 백남준 ''TV부처'를 90년대 네온아트 형식의 'TV 부처'로 더 업그레이드시키다. 제목은 'BLUE TV'(부처) 기술제작: 이정성(제작시간 충분 너무 좋았다)
<리뷰(Review)> 지난 번, 제로-플러스-마이너스아트 (랜덤하게 뒤섞임)
[1기] 제로 시대 영(0)에서 다시 시작한 예술운동 1957년 시작한 독일 제로미술운동과 참여 두 명(하인츠 마크, 피네 작가)의 독일 미술가 창안, 61년에 못 그림으로 유명한 (워커 작가)가 여기에 합류, 한편 백남준의 서양음계 무력화하는 무음악(A Music) 백남준은 모두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백남준의 무예술 이런 말을 했어요. "현대예술은 예술을 하지 않는 예술이다" 무목적
백남준은 왜 카라얀을 경멸했나? 카리스마를 강조, 일방적 권위적 예술의 독재. 동양의 장자개념 도입 예술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 그래야 유소유가 된다. 장자의 '무용지용. 무용지물이 유용지물이다. 예 Performance -Internet
그리고 1960년 대 초 독일에서 이런 플럭서스 미술운동이 자리를 잡게 되었나. 무소유 돈을 벌지 않는 미술, 무권력-무권위(Non Puissance No Power) 예술. 바로 나치 악몽 경험
이런 미술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서구의 합리주의, 과학주의, 통계주의 등 허구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서구의 성상파괴행위. 유럽인 중산층 고급문화의 상징 코드인 피아노 파괴. 이 역할에서 두 명의 빅 스타는 바로 백남준과 보이스. 이것을 깨달아서 독일이 지금 가장 잘 산다.
백남준이 1961년 독일 쾰른에서 '괴짜들'이라는 대중 참여 포퍼먼스에서 스타가 되다.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무소유' 뭔가? 백남준은 법정스님과 다른 무소유주의자.
인간은 몸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전혀 무소유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무소유의 개념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그런 좁은 의미보다는 많은 재산을 가져도 무소유로 살 수 있는 넓은 의미도 있다. 즉 자신의 재산을 주변에 없는 사람에 조금이라도 나눠주는 사람은 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소유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주의. 인간존재의 회복이 가능하다.
백남준의 최고 재산은 정보와 지식이다. 이것을 인터넷을 만들어 인류에게 공짜로 나눠주기 아낌없이 그의 재산을 인류에게 선물하려 했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무소유주의자이다. 그가 무소유주의자(진정한 맑스쟁이)가 된 것은 바로 동서남북 온 인류가 전쟁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평화롭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백남준이 1970년에 <비디오 코뮌> 발표, 비디오 아트의 본격화, 여기 주제가 담긴 작품이다. '코뮌(Commune)'이란 공존하는 인류의 평화공동체를 말한다.
백남준 관련 사진가가 많은데 독일사진가로는 이분이 유명하다.
"백남준은 그 인간 자체가 예술품이다" - 만프레드 레베 박사(Manfred Leve 1936-2012) 1959년부터 플럭서스 운동을 하면서 백남준 전시를 촬영하다. 그는 독일미술의 대가들인 '보이스, 폴케, 리히터' 등 도록을 출간. 2007년(1주기) 국현 과천 백남준 사진전에 참가
[2기] 플러스 시대: 비빔밥 시너지 아트: 융합, 통섭, 원융합일, 인터 미디어, 한 예를 들면, 시(poem)에서 악의 미학(evil art)을 창시한 보들레르와 미술(art)에서 언짢고 낫선 날 것의 반예술(bad art)을 창시한 뒤샹은 서로 상통하는 면이 있다.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상징시와 뒤샹의 오브제 아트를 비비다. TV부처(동서융합) TV정원(문명과 자연융합) 일원론의 힘(?)
[3기] 마이너스 시대: 플러스 미학에서 제로 미학으로 결국 마이너스 미학으로 이민가다. 이어령 전문화부 장관의 백남준 증언, "뭘 남기려고 해" 역설의 표현, 세속을 초월한 도통한 사람. "내 작품 다 없어져도 상관없어. 내 정신만 잘 기리면 되는 거야". 무소유적 발상이죠. 그러나 관객이나 애호가 입장에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죠. 백남준은 모든 면에서 특별하다.
"-1000%로 만족하고 살아라" -백남준 유언. “예술은 사유재산 아니다” -백남준. 백남준 뉴욕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백남준 작품 소장자는 이 말을. 그런 면에서 백남준 작품은 이우환이나 김환기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
<컬렉터> 여러분이 백남준 작품을 소장할 때, 그것을 회화나 조각처럼 재산(돈)이나 물질로 보다는 백남준 작품을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백남준의 독창적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소유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대박이 터질 수도 있다. 백남준 목적이나 의도 가지지 마라
<인터넷 강국, 세계가 기대>
세계인을 위해서 마이너스 (전쟁방지 세계 평화)즉 고유 한국인의 활약과 활력을 기대한다" 동남아시아 포함) : K-팝, K-드라마와 K-방역, K-푸드 바탕으로 바닥을 치고 쇠퇴하는 구미 문명의 대안으로 남북 함께 하는 <K-문명>을 만들다. 예언자 시인 타고르가 "코리아는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는데 이게 그냥 한 소리가 아니다.
====>
01 <인트로(Intro) 재스퍼 존스와 백남준, 비교 나름 둘다 다 멋이 있죠.
상하이 하우호텔 갤러리 아트숍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미국국기 볼 수 있다
위에는 Jasper Johns라는 이름 보인다. 흔들리듯 펄럭이는 듯 국기가 활기차고 경쾌하다. 미국지도가 깔려있다. 백남준 이걸 전자아트, 네온아트로 변형시키다. <현대유화 특징 mobility>
백남준 이걸 전자아트, 네온아트로 변형시키다. 물감페인팅과 전자페인팅의 차이를 알겠죠. 이 작품을 백남준 미국워싱턴 국립미술관 스미소니언 기증하다. 제목 전자초고속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Electronic Superhighway: Continental U.S., Alaska, Hawaii” arranged 336 televisions and 575 feet of neon tubing
How Korean artist Nam June Paik predicted meme culture in 1974-In 1995, 63-year-old Korean artist Nam June Paik created a sculpture that would become one of his most celebrated and recognisable pieces.
2018년 1월 19일 도착 백남준 요셉보이스 2인전 하우갤러리(아래설명) 윤재갑 관장 초대 지금 발표하는 사람은 뒤셀도르프 관장 백남준 전문가 다 모였죠. 이정성, 김남수이 보이네요
<인트로(Intro) 클린턴과 백남준 2> 바지사건 등등
<백남준이 1974년 록펠러 재단에 기금 신청, 예언한 인터넷(전자초고속도로) 프로젝트 제출. 이 아이디어를 클린턴이 '정보초고속도'로 이름을 살짝 바꿔 미 대선 공약에 써먹다. “Bill Clinton stole my idea!” In 1993 for the Venice Biennale, Nam June Paik initially proposed to title his exhibition in the German Pavilion Electronic Super Highway: “Bill Clinton stole my idea!” His brash claim comes from a 1974 document commissioned by the Rockefeller Foundation, in which Paik proposed connecting Los Angeles and New York with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이가를 언급했다. 전자상거래 앱의 다양하 활용 등등 “multi-layer to broadband communications networks, such as domestic satellites, wave guides, bunches of co-axial cables, and fiber-optics. The expenses would be as high as the moon landing, but the ripple effect ‘harvest’ of byproducts would be numerous.”
<인트로(Intro) 전위예술-실험예술 추가 2>
지난번 백남준, 예술은 "사람들 어떨떨 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거기에 더 추가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1) 신화를 파는 예술(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무모한 시도를 하다보면 미래에 가능한 예술이 된다). 2)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 무제한의 자유 3) 무목적적 실험 4) 규칙이 없는 게임(스포츠와 다르다), 그래서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내가 좋은면 그게 최고작품이죠). 5)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정치가 반발자국 앞서간다 -김대중 예술가는 10발자국 앞서간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백남준
-모든 창조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
우리 청소년들 실패하더라도 다시 여러 번 도전하는 모험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순회전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게 아니고,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만들어 주려고 이런 고생스런 쇼를 한다고.
<인트로(Intro), 백남준과 조선일보 3> <백남준 형(백남일)은 1952년 망할 뻔한 조선일보를 살려주다> 아래는 조선일보 기사. 대한민국이 다 모든 분야에서 백남준 가문에 빚지고 있다
두 분이 나눠 읽어보시죠.
“1952년 4월 머잖아 누적되는 부채를 감당 못해 신문사가 문을 닫거나 소유권을 남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었다. 고민 끝에 방일영은 친구인 백남일(백남준 형)을 찾아갔다. 백남일은 방일영의 제일고보(경기중고) 동창이었는데, 그 당시 태창방직 사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재력도 있고, 신문사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아는 친구였다.
방일영의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백남일은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자금을 돌려주겠노라고 했다. 상세한 이야기나 조건도 없었다. 무이자로 현금 5억환을 빌려주겠으니 조선일보 부흥에 쓰라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인트로(Intro), 백남준 뉴욕 유언 4> <“여러분, 일 많이 하고 잘 노세요”>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10/06/2004100670339.html
2004년 10월 6일 뉴욕에서 조선일보 정재연 기자가 백남준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 백남준 왈 "난 바보야!" 이제 절대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선문답 같죠. 천진(天眞, 하늘의 진실)의 신이 된 것이다. 이제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죠? "연애" 많이 하셨잖아요 "아직 부족해!"
“책 하나 쓰고 싶어. 내 자서전. 영어로 쓸거야.”
백남준 “여러분, 일 많이 하고 잘 노세요(놀기 강조)”- 6일 미국 뉴욕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를 가졌죠. 한국·미국 취재진 4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남준 죽을 때까지 Performance 그의 에너지원이었다.
<인트로(Intro), 인류학 1> 백남준은 1963년부터 1993년까지 모든 전시에서 굿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굿은 현대화하면 지구촌 축제가 된다. 1963년에는 소대리가 등장했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에는 최고의 미모를 갖춘 이탈리아여성을 북방몽골족 일파인 타타르 로봇에게 재로 바치했다. 아래 심사 위원 전원일치로 황금사자상(독일제)을 받다. 사진: 이정성
인트로(Intro), 인류학 2, 김순기: 봉주르, 백남준 -사유재산반대 노마드적 삶의 향식>
김순기(서울대 대학원 재학 중 장학생 프랑스 유학) 재불작가의 탁월한 비디오 작품 <봉주르, 백남준> 1982년 백남준 예술론에 대해 다양하게 묻는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여기서 보면 백남준의 사상의 광맥은 무궁무진. 아니 광활하다. 남준에게 묻는다. 중국과 몽골의 차이는 뭔가? 중국은 농경문화 정착민이 산다. 그래서 땅에 집착한다. 그러나 노마드는 땅에 집착하지 않는다. 백남준은 가장 오래된 문서는 바로 '납세기록'이라고 말한다. 글이란 결국 '납세기록=사유재산'을 말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이런 시대 이전을 동경했다.
그런 면에서 사상적으로 노마드를 계승한다. 그러나 백남준 디지털 노마드다. 정착민은 종이에 글로 기록하고, 노마드는 머릿속에 글 없이 기록하다. 김순기 작가는 인터뷰 작가.
우리 <남도 창>은 후자에 속한다. 머리속에 다 기억한다. 소유물이 필요없다. 글의 음악이 아니라, 말의 음악인 것이다. 일종의 구술(암기)문화다. 언제나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유목적 예술인 셈이다. 가지고 다니는 데 무게가 전혀 없다. 춤과 노래가 마찬가지다. 역시 백남준 탈영토(나라 크기 중요하지 않다)주의가 나온다. 21세기는 그럼 면에서 영토가 작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가장 경쟁력 있는 예술은 무게가 없는 춤 같은 예술(무소유 예술장르) 뿐이다. -백남준. 소프트웨어의 소프트웨어인 무게 없는 음악, 무용, 샤머니즘 춤 사위 등 시간 예술 뿐이라며 이를 전승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다> 백남준의 직접 육성을 들어보자.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예술은 음악, 무용, 무당 등 시간예술뿐이다. 무게가 없는 예술만 전승 발전시킬 수 있다. -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부록" <관객> seulsong.tistory.com/1074
김순기 작가와 프랑스 세계적인 철학자 '자크 데리다' 인터뷰 장면. 김순기가 데리다보다 프랑스어를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 "침묵이야말로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 -데리다"
<오마이뉴스> omn.kr/807a
<인트로(Intro), 인류학, 등자 6>
기마민족에게 '등자(말 자유자재로 조정)' 발명은 혁명이었다. '스키타이 단군' 스카타이가 스키타이 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말을 쏘는 자 즉 '궁수'라는 말도 있다. 인공지능의 발견과 비슷하죠. 말(Horse)=인터넷, 말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등자>, 흉노가 발명한 것이다.
흉노시기부터 '신격화된 하늘'=텡글리라고 하는데 '텡글리' 단군의 어원. 그러니까 단군은 '천자'. 백남준의 작품명은 스키타이 단군. 스쿠터는 스키타이에서 왔다. 고조선, 고구려, 몽골이 다 기마민족이다. 싸이의 막춤도 여기서 나온다. 전기치유(專氣致柔: 기를 집중시켜 몸을 부드럽게 한다), 동양의 운동은 서양처럼 몸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인트로(Intro), 인류학 '굿론' 추가> 뒤죽박죽, 여러분 정리해야.
굿은 '예술의 원천(시원지)'. 'GOOD'이다. 이것은 '가장 미니멀한 총체예술(Integral ART)'이다. 여기에 음악, 미술, 춤, 시, 노래, 퍼포먼스, 오페라, 콘서트, 미사곡 등 들어 있다.
거기에 백남준은 '청동거울' 대신 'TV거울'을 집어넣고 칼·방울·징 대신 피아노를 끌어들이다. 여기는 백남준의 중요 개념인 Objets Sonores(소리나는 오브제), 즉 동서양의 소리가 나는 모든 오브제(악기)가 총집결되다. 샤머니즘의 꽃은 '굿'이다.
전통굿과 다른 '전자굿'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같다. 마을의 공동귀신(공공의 적)을 쫓아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불러오는 제례. 마을 확대하면 지구촌 되고, 굿은 현대화하면 지구촌 축제 된다. 그는 샤머니즘을 죽어가는 것도 살려내는 살림과 부활의 예술로 본 것이다.
<인트로(Intro), 작품 첫 전시 추가 및 수정 08> -모조품
개념미술제시 14개 아니라 16개 세종문화회관 김남수 선생 일부 해설함
<백남준 첫 전시 추가 수정> 모조품
[백남준 첫 전시에서 서양미술의 목을 쳐버리다]
도살된 소머리: 1963년 전시장 입구에 백남준은 도살된 소머리를 걸었다. '이영철' 선생의 또다른 인류학적 해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면서 대기 중이던 구청 직원이 출동하여 한 시간만에 떼어냈지만 기록사진이 널리 유포되어 그에 대한 궁금증이 적지 않다. 몇 가지 추론
[1] 소머리를 베어 나무에 걸어두거나 땅에 묻어 행위는 몽골 알타이계 샤머니즘에 기원한 것이다 소머리는 굿이나 제사의 제물이다 [2] 소머리는 얼굴이 검고 뿔은 초생달 형태라 흔히 달로 상정되어 왔다 -엘리아데의 종교 형태론 달은 위성아트를 상징하고 달은 또한 불교가 말하는 불성 부처상 즉 달이다 다시 말해 위성아트로 연결된다. [3] 소머리를 베어버리는 행위 그것은 아나키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를 머리를 없애버리는 즉 무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을 부정하는 적극적 의미도 담겨 있다 아나키즘은 어떤 틀에도얽매이지 않는 그 어떤 규정도 거부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자유다. 그의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위한 자유이며 자기를 위한 위반이다.
================
10 <인트로(Intro), 백남준 스승>
<보들레르(회화적)와 백남준, 존 케이지(음악적)와 백남준>
질문: 백남준은 보들레르에게서 뭘 배웠나?
대답: 백남준의 모든 감각을 종합하는 다원 예술 혹은 총체예술(Integral Art)에 영감을 준 보들레르> "보들레르, 그는 머리를 녹색으로 염색하고 목에 보아를 두르고 돌아 다녔다. (세계 최초로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프리랜서 문인이자 미술평론가였다) 그는 지구 상 최초의 펑크. "천재이면서 방랑자 깡패[불한당] 시인. Quand tout le monde veut être aimé, lui ne craignait pas d'être détesté" 이 남자는 못말리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받고 싶어할 때 그는 미움을 받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l’homme était insupportable. Charles Baudelaire ne respectait rien, ne supportait aucune obligation envers qui que ce soit. 아무도 존중하지 않았고 어떤 의무감도 없었다. 최악의 광기를 주변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 마약과 환각에 빠져 산 댄디였다.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황폐화시키는 아름다움(악 미학)을 포착해 그걸 시를 쓰는 것 외 아무런 야망도 없었다.
나의 생애를 보면 유라시아적이다. 미국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과 가장 유럽적인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80년대 이것이 충돌했다. 그래서 구파발(구라파보다는 구파발)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히 두 가지를 클로스오버, 다양한 레이어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충돌할 것도 없다. 바로 멀티미디어와 다른 인터 미디어다.역시 나는 한국에서는 백남준, 서양에서는 보들레르에 가장 관심이 많다. 평생 공부거리다.
반면 존 케이지:<백남준 인터뷰> 질문(독일미술가인데 인터뷰 진행자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음악이 당신의 삶보다 항상 높은 경지라고 말하지요?
대답(백남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가정일 뿐이죠. 내가 음악을 느끼고 들을 때 늘 영적인 상태에 들어갑니다. 하모니 혹은 순수함 혹은 카타르시스 등 단 내가 아름다운음악을 들을 때만 그래요. 그리고 명상 훈련자도 그렇지요. 선불교는 예술을 촉진시키죠. 예쁜 예술이 아니고 삶의 방법을 창조하는 시도를 해야 해요. 명상 훈련자도 이 방법을 쓰면서 명상과 관조 연습을 하죠. 아침부터 밤까지 순수함 그리고 하모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요. 내가 이런 삶의 연습을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작곡을 할 이유가 없겠지요. 나는 늘 존 케이지에게 묻습니다. 왜 작곡을 하는지? 그도 역시 답을 못하죠. 여러 번 물었죠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그의 스승인 쇤베르크에게 작곡가가 되기로 약속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작곡한 것이 아름답지 않고 의미가 없고 그래도 상관 없이 작곡을 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런 방법이 선불교적인 면에서 의미가 없지만 실존주의 개념에서는 말이 된다고 봐요. 존 케이지는 당시 선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했어요.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책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어요. 하하하! 나는 존 케이지에게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예술을 구별하지 못하면 작곡은 더더욱 할 수 없다고 대답했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연에서 예술을 이끌어 올리는 확실한 연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게 아닌가요.
11 <인트로(Intro), 새로운 도전 비디오 이후 :레이저 아트>
남정호 기사, 백남준의 레이저 아트에 대해 잘 요약하다. <동시변조, 천지인, 태극무늬>
백남준, 세계미술의 중심지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현대화된 확대된 <전자 산수화>를 21세기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구성. 그래서 전자폭포도 등장한다.죽음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승천(초록 레이저 광선이 지그재그로 천장에 닿아 하늘과 딸이 하나되는 만나는 멋진 순간, 노자는 하늘과 땅이 떨어지면 죽음,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면 생명이라고 했죠. )을 보여주다. 태극무늬까지 들어가네요!
<결론>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1977)
그는 축제 주의자 감각적 쾌락주의자다. "카타르시스, 순간의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극도의 전자적 충동,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직접 접촉 예술,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인공 신진대사, 다매체 다방향 상응(Correspondence) 등등."
12 <인트로(Intro), 백남준과 김구림>
[백남준과 김구림] 두 분이 뉴욕에서 만났을 때 백남준 왈 "김구림 선생님, 오래 사셔야 합니다. 실험예술은 인정을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요"
김구림 선생님의 초기 획기적 영상작품 <24분의 1초>는 세계적 수준이다. 테이트모던에 소장. 15 60년대 말, 한국이 초기 산업화에 들어서면서 속도에 치여 인간의 <소외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고한 문명비평적 비디오아트(김구림 24분의1초)가 나왔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게다가 보들레르적 권태의 문제도 이슈로 삼았다는 점은 모던하다.
한국사회가 야만인 것은 이런 분이 학력이 없다고 지금도 왕따를 시킨다. 그 어떤 갤러리도 에이전트도 없어 개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학력이 그렇게 대단한가.
<사실 서울대가 대학!> 국제철학자대회가 일본보다 먼저 서울에서 열렸는데 한국철학을 발표한 인물이 없다. 서울대가 서울대 역할을 하려면 이런 한국철학자 한 명은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도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이라고 정말 말도 안되다. 그러면서 학력이 없다고 첨단의 실험 예술을 추구한 전위작가를 사회적으로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가
대중지성시대에 일류대학이라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 차리리 연구소를 많이 만드는 것이 낫다. 우리나라는 21세기 학문의 학문인 인류학 사전 조차 없다.
13 <인트로(Intro), 17세기말 바니타스 대표작> 슈퍼리치 행복 길: 그림 사는 것
<부자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내 자랑이 아니라 그게 아무것도 아니다 어려서 깨달았다. 부자의 쓴맛(바니타스 vanitas). 17세기 말 네덜란드 풍경화 전성시대에 최고 부자들 그림에 왜 해골(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이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있다>
1960년 초 마산(신마산 제일여고 근처)에 2채 집이 있었다. 아래는 윗집이다. 400평 정도. 전형적 일본고급저택이다. 정원도 일본식 일제시대 일본 장교가 살았나. 다다미집이고 멀리 바다가 보인다. 전망이 좋다.
그리고 위 사진은 아랫집 마산 300평 짜리. 집 입구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 그리고 동생과 찍은 사진. 이회장보다 훨씬 큰 700평짜리 집에 살았다. 서울로 치면 100평 윗집은 일종의 별장. 큰집 살면 가장 나쁜 점이 바로 청소다. 일하는 사람이 도와줘도 그렇다. 어머니 말씀.
14 <인트로(Intro), 백남준 유럽 가보니까 다 쓰레기야>
[1992년 백남준과 김용옥 인터뷰 중 일부내용] "내가 가서 보니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인상파도 독일의 작곡가들도 다 쓰레기야" - 백남준 독설
<누가 읽어주세요>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거 없는 거야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 같았어. 난 여태까지 일본 무서워해본 적 없거든 일본에서 음악공부 좀 하다가 질력이 나서 ...진짜 음악공부 해봐야겠다고 본고장으로 가자해서 경박한 나라는 안 가고 독일 찾아갔거든 그래서 독일에가서 보니깐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그것뿐이 아니야 미술도 그래. 난 예술에 그 유명한 그림들 일본 놈들이 근사하게 인쇄해놓은 것으로만 봤잖아. 그래서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고 동경했지. 그런데 직접가보니깐 허름한 캔버스위에 나달나달하는 페인트 형편없더라고 뭐 인상파다 르네상스 예술이다. 루벤스다 하는 것 직접 보니깐 형편이 없었던 비싸다고 하니깐 대단하게 보였던 거야. 난 정말 실망했고 이따위 것 가지고 내게 그렇게도 동경했던가 하구 말이야. 박물관에 멍하니 앉아있었어.
작곡가도 말야 그 대단한 독일이라는데 쓸 만한 몸에 4-5명밖에 안 되더라고 4-5명 정도는 탑이었어. 그러나 나머지는 어차피 쓰레기 아냐 그러니깐 난 용기가 나더라고. 우선 4-5명밖에는 안 되는가. 내가 낄 자리도 아직 많겠고 생각이 들었고 또 못겨두 어차피 시원찮은 놈들뿐인데 그 시원찮은 놈들 속에 내 시원찮은 이름 하나 더 끼어 넣는 들 죄송할 게 없잖아. 피차 마찬가진데. 그래서 난 곧바로 작곡 행세를 해버린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굵게 놀았지. 그러니까 내가 독일에서 작곡가가 된 것으로 훌륭한 작곡가 때문이 아니라 나쁜 작곡가들이 하도 많아서 자신감이 생겼던 것 뿐이지. <결론 자신감 회복>
https://www.youtube.com/watch?v=RiS4tGrYT5U&t=4s
=======> 본론 독일은 백남준의 영원한 예술적 고향
[백남준&도이치] 그는 왜 독일에서 신 혹은 신화가 됐나
<본론(Body)02> <위사진> 백남준 사후 1주년 기념 때 뒤셀도르프 시 전차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녔다.
백남준 독일에서 가장 명성 높은 미술대학(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교수 * 백남준 사후 1주년 기념 행사 뒤셀도르프/ 아름다운 라인 강이 내려다보이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는 1773년 처음 학교 문을 열었다. 백남준이 여기서 교수였지만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학교다. 리히터, 폴케, 워커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 받았나. 백남준에게 독일은 가장 오래된 고향이고, 라인 강은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젖줄이었다. 백남준은 라인 강 물결에서 TV주사선을 봤고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고 노래했다. TV의 오묘한 결합 '비디오아트' 탄생.
부인 '시게코'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독일에서 예술가에 대한 최고 존칭인 '마에스트로' 칭송을 받았고, 웬만한 카페에 가도 '마에스트로' 오셨다며 융숭하게 대접했고 또한 독일인은 백남준을 "독일에서 공부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자랑스러운 독일제 작가"라고.
이 사람 백남준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대표로 출전시키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창시자. 독일에서 세계적 명성이 높은 국제미술행사를 창안한 사람.
Klaus Bußmann(1941년생)이라는 분이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처음 창안한 사람으로 백남준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처음에 이 도시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저항과 반대와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끈기 있게 시민들을 설득했다(아래 2번째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맘 안 드는 전시야 안 가면 되지만, 길거리 조각은 안 볼 수도 없고…”
<관련 블로그> seulsong.tistory.com/931
<왜 백남준 독일미술의 신(?)>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갔다. 그런데 그는 왜 독일에서 베토벤처럼 존경을 받았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많지만 최근 내가 취재한 독일작가 '알프레드 하르트' 씨의 대담에도 그 단초가 보인다.
나의 질문: 백남준은 왜 독일에서 인기? 음악적 미술이라고 그런가?
"음악적 미술은 조금 설명하기 힘들고 하여간 백남준 삶과 음악이 하나였고 그의 비디오작품을 편집한 것을 보면 비트음악과 속도감, 리듬감, 중시한 건 매우 음악적이에요. 그리고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유럽미술을 주도했지만 2차 대전 이후 미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요.
독일은 늦었지만 1970년대 '보이스'와 동양에서 온 최대응원군인 백남준이 혜성같이 느닷없이 나타나 경계를 벗어난 탈아트 즉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아트'를 창안 독일미술을 세계적 위상으로 끌어올렸어요. 그러니 백남준은 독일미술의 슈퍼아트스타죠. 그는 독일만 아니라 세계미술을 바꾼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다빈치' 같은 예술가죠"
===> 내가 생각할 때 백남준이 독일에게 환영을 받은 건 바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전쟁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으로 굉장한 심적 압박과 정신적 충격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공황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개 손도 모자란다는 '천수관음보살'처럼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고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며 새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
백남준은 독일에서 주는 유명한 예술상은 다 받다 <아래사진> 주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백남준 연구자 김순주 선생이 백남준이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독일에서 받는 '예술상'을 목록화하다 / 백남준은 1989년 2회 '쿠르트 슈비터스(K. Schwitters)'상, 1991년 '고슬리 황제반지(Goslar Kaiser Ring)'상,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독일대표) '황금사자상', 1997년 '괴테 상', 1998년 독일 구겐하임개관(1997년) 후 '토머스 크렌스(T. Krens)'상, 2001년 8회 '빌헬름 렘브루크(W. Lehmbruck)'상 등 독일 최고예술상은 다 휩쓸었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추신> 그외 일본에서 미술계 노벨상 교토상 수상(Kyoto Prize in Arts and Philosophy) 존 케이지도 이상을 받다. 김대중도 때 큰 상(2000년 금관문화훈장) 받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내가 이런 좋은 상을 탈 줄 알았다면, '백'씨 대신 '천'씨 성을 타고나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더 만들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다.
============> "(뉴욕 이후)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 하고 싶다" -2000년 이후
백남준 말기 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이 뉴욕에서 서서히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준 말년에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유언처럼 남겼다는데 중국의 시대를 미리 읽고 예견한 것인가!!/
세계 미술시장 중심, '뉴욕'에서 '상하이'로: 세계 미술의 중심이 뉴욕에서 서서히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준 말년에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유언처럼 남겼다는데 중국 시대 미리 읽고 예견한 것인가!!
[미술시장] '뉴욕'에서 '상하이'로 세계의 중심축이 바뀌나 두고 볼 일.
백남준 돌아가시진 10여년 만에 2018년 1월 19일 상하이 백남준&보이스 전시
지금 세계 미술의 중심이 뉴욕에서 서서히 상하이로 이동하고 있다. 백남준 말년에 "이제는 상하이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고 유언처럼 남겼다는데 중국의 시대를 미리 읽고 예견한 것인가!!/
===>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년 5월 12일-1986년 1월 23일)는 독일의 예술가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하며 ‘사회 조각’이라는 확장된 예술개념을 통해 사회의 치유와 변화를 꿈꾸었다. 백남준과 절친 관계였다.
2층에 올라가면 '보이스는 플럭서스의 영혼(soul), 백남준은 플럭서스의 마음(heart)'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두 사람이 이 운동에서 큰 몫을 했다는 소리다. 이 선언문에는 "부르주아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말해 고급과 저급 따지는 문화 엘리트주의와 그런 속물근성을 없애려 한 것이다.
하여간 백남준과 보이스는 서로 다르면서 같았다. 우선 별명이 닮았다.
독일에서 백남준의 별명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스스로 문화깡패)'였다면, 보이스는 '서구 미술판을 깨는 문화갱단'였다. 백남준은 서구인이 성상 같은 바이올린을 개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또한 서구인이 고급문화의 상징으로 여기는 피아노를 불태우거나 때려 부쉈다.
보이스도 마찬가지다. 백남준과 상통했던 그는 백남준 첫 전시장에 와서 피아노를 도끼로 부셔버렸다. 백남준은 그 전시에서 서양미술의 상징인 뮤즈를 욕조에 처박아 살해했다. 이들은 서구문명을 살해하려고 결심한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보이스의 상징은 '도끼'다. 서구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이곳 평론가로부터 '신야만인'이라고 불렸다.
보이스의 또 다른 상징은 도끼와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토끼다. 그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온순한 토끼와 가까운 친구처럼 소통했다.
보이스는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현대미술을 더 잘 이해한다"라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하지만 우리는 토끼 하면 달이 떠오른다. 2층 요셉 보이스 전시장 여러 요셉 보이스 초상화 사진(무제) 중 하나. 20세기 서구문명의 파괴자로 자처한 그가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문명의 구원을 샤머니즘에서 찾다 보이스의 퍼포먼스 "나는 나 자신을 고립시키고 절연시켜 코요테 외에는 미국에 관한 어떤 것도 보지 않기를 원했다(1974)"를 재구성한 사진이다-하여간 서구 속 비서구였던 보이스는 서구의 야만문명을 치유하려고 스스로 야생늑대가 된다. 그는 인간이 야생동물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선견자(voyant)'였다. 이런 점에서 "무릇 늑대의 세계에서 더 진보한 게 별로 없다"고 한 백남준 말이 납득이 된다.
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01/2010110102027.html
<생략> 소통론 예술: 백남준 철학: 현존하는 최고철학자 'J. 하버마스
이렇듯 현대문명의 구원을 샤머니즘에서 찾았다. 좀 어리석게 보이나 그 놀라운 생명력이 합리성에 미쳐버린 서구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철학자 'J. 하버마스'가 제창한 '공론장이론(public sphere)'도 결국 소통이 인류의 난제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셔먼은 죽은 자마저도 산 자와 소통하게 하는 신통력을 발휘한다.-보이스가 샤머니즘에 빠진 건 남다른 체험 때문이다. 2차 대전 중 독일공군으로 출전했다 전투 중 타타르족이 사는 부락에 추락했다. 이 사람들은 샤먼의 전통치료법으로 그를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이후 보이스도 펠트나 기름덩어리 등을 활용하는 '온기조각'을 창출하게 된다.
이들을 더 유명하게 한 건 동서를 넘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꽃 피웠기 때문이다. 우연이었지만 그 자체가 예술이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휴먼네트워크'였다. 백남준은 보이스 사후에도 그런 우정을 살려내기 위해 1990년 서울 현대갤러리 뒤뜰에서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을 벌렸다. 이번에 그 사진들도 소개된다.
보이스는 스스로를 '문화 깽단'이라고 했고, 백남준은 스스로 '문화 깡패'라고 했다. 두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도 확실하게 통한다. 보이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Performance 로 실현하다. 백남준과 보이스가 이렇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만행을 봤기 때문이다. 보이스는 이런 서구문명의 과오에 대해 처절하게 고해성사했다.
윤재갑 관장은 개막식 전에 열린 세미나에서 요셉 보이스는 서구예술가 중에서 가장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평했다.보이스가 진지한 편이었다면 백남준은 유머의 귀재였다.
이는 그가 독일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징표다. 백남준은 명실공이 독일 '명예이주예술가'였다. 그래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그가 독일대표미술가로 나갔다.
**보이스 백남준 환상적 융합작용 독일 미술을 세계수준으로 유라시아 작가로서의 시너지 최대효과/ 그런데 백남준 연구자 장 폴 파르지에 백남준 한 수 위로 보다 장문의 텍스트를 보내오다 <관련블로그> seulsong.tistory.com/964
요세프 보이스, 신간 <우리가 혁명이다>라는 책이 나왔다.
요셉 보이스의 생애
‘사회 조각’ 확장된 예술개념 통해 사회의 치유와 변화 꿈꾸다. 백남준과 절친
<19세 고졸, 22세 비행기추락, 26세 대입, 29세 작가데뷔, 32세 첫 전시, 40세 교수, 46세 독일 학생당 창립, 50세 자유국제대학 창립, 51세 직접민주주의 조직 창립, 58세 녹색당 등 참여하다>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년 5월 12일-1986년 1월 23일)는 독일의 예술가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하며 ‘사회 조각’이라는 확장된 예술개념을 통해 사회의 치유와 변화를 꿈꾸었다. 백남준과 절친 관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이스는 1940년에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에 입대하여 폭격기 부조종사로 복무하였다. 1943년, 그가 탄 JU-87기가 러시아 크림 반도에서 격추되었다. 보이스는 그의 저서에서 의식 불명 상태에 있던 자신을 유목민족인 타타르족(Tatar)이 발견하여 구조하고, 동물의 지방과 펠트 천으로 감싸 치료해주었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 진위여부가 논란이 되기도 한다.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1947년 뒤셀도르프 미대에 입학하여 조각을 공부. 1950년대 초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1953년 부퍼탈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61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조각과 교수로 임명. 그 후 플럭서스(Fluxus) 운동에 참여 1963년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그의 첫 행위 예술(Performance)인 《플럭서스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이 행해졌다. 그는 사회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1967년에 학생을 대변해주는 독일 학생당(DSP)을 창당, 1972년 카셀 도큐멘타 5(Documenta V)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 조직’이라는 사무실을 내 100일 동안 민주주의, 예술에 대해 강연과 토론하였다.
1979년 유럽 의회에서 녹색당 후보로 출마. 1971년 뒤셀도르프 미대 안에 자유 국제 대학(FIU: Freie Internationale Universitaet)을 설립 1972년에도 낙방한 학생들의 입학 허가를 사무실을 점거하며 시위, 결국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97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보이스의 대규모 회고전이 1986년 1월 23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였으며, 이듬해인 1987년 그의 아들인 벤젤(Wenzel)이 마지막 7000번째 나무를 심으며 프로젝트가 완성
<왜 보이스, 샤머니즘 신뢰했나> <결론: 유라시아 전성기, '샤머니즘 아트' 번성>
예술관:제2차 세계대전 중 보이스가 겪은 죽을 뻔한 경험은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행기에서 추락하여 의식을 잃은 보이스를 타타르족이 발견하고 동물의 지방과 펠트 천으로 그를 치료해주었는데, 이 지방과 펠트는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재료가 된다. 타타르족은 상처를 치료하고 몸에 온기를 촉진시키기 위해 동물의 지방(비계)을 그의 몸에 발랐고, 추위로부터 열을 보존하기 위해 펠트 천을 덮어주었다. 즉 보이스의 작품에서 지방은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상징하고, 펠트는 에너지를 보존하는 따뜻함을 상징한다. 보이스는 이러한 소재들을 사용하여 예술로서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 보이스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하며 미술의 민주화를 옹호하였다. 주요 작품: 약 50개의 설치 작품이 있으며, 70여 회의 퍼포먼스가 행해졌고, 130번 이상의 개인전이 열다.
[1] <지방 의자(Fat Chair)>, 1964. 낡은 의자 위에 삼각형으로 잘린 지방 덩어리를 올려 놓았다. 지방은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기온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한다. 보이스는 지방이 가진 변화와 전환의 특징을 치유와 생명의 의미와 연관시켰다. 그는 지방이 녹아 형태가 변하는 것을 통해 냉기에서 온기로, 정형에서 무정형으로, 규칙에서 불규칙으로, 억압된 상태에서 자유롭고 에너지 넘치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였다. [2]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1965. 얼굴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 쓰고, 양쪽 발에는 각각 펠트와 쇠로 밑창을 댄 신발을 신고, 죽은 토끼를 품에 안고 약 세 시간 동안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을 토끼에게 설명한 퍼포먼스이다.
[3]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고 아메리카는 나를 좋아한다> 1974.
보이스는 스스로를 '문화 깽단'이라고 했고, 백남준은 스스로 '문화 깡패'라고 했다. 두 예술가는 그런 면에서도 확실하게 통한다. 보이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Performance 로 실현하다.
미국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보이스는 펠트 천에 싸여 들것에 실린 채 구급차를 타고 르네 블록(René Block) 갤러리로 향하였다. 갤러리 바닥에 건초더미, 펠트 천, '월스트리트 저널' 등을 깔아 놓고, 그곳에서 코요테와 3일 동안 생활하였다. 보이스는 커다란 펠트 천을 두른 채 지팡이만 내놓고 코요테와 대화를 시작하였고, 코요테가 보이스에 익숙해지자 펠트 천을 벗고 코요테와 함께 창 밖을 바라보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3일이 지난 후 보이스는 갤러리에 도착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외부와 일체 접촉하지 않은 채 미국을 떠났다. 이 퍼포먼스에서 코요테는 아메리카를 상징. 코요테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던 동물이었는데, 백인들이 아메리카를 점령하며 코요테를 비천하고 교활한 동물로 낙인 찍는다. 따라서 보이스에게 코요테는 잃어버린 아메리카의 참모습, 아메리카 땅이 겪은 정신적 충격을 상징한다. <THE END>
===> 추가 1974년 백남준 어떻게 인터넷을 예언했나: 그는 이 보고서(1974년)에서 백남준은 노동시간 단축, 인종차별 몰락, 환경오염 대안을 위한 미래의 '광역 통신 네트워크'를 언급
백남준 80년대 초반 그가 50대 들어서면서 활동은 눈부셨다.
[1] 1982-1983년 퐁피두 백남준 회고전 때 프랑스언론인과 인터뷰 아주 시니컬한 기자를 만났으나 재치와 유머로 죽사발 만들다 [2] 1982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미디어아티스트 김순기가 백남준과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 방문 [3] 개인 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국가나 할 수 있는 그랜드 프로젝트인 전자오페라인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 작품을 가난한 백남준이 혼자서 시도 했으니 그 행사 후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 돈 문제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고민하는 모습 [4] 1982년 백남준 회고전 때 김홍희 선생이 백남준으로부터 사인 받는 모습 김홍희 선생은 그의 남편 천호선과 함께 1981년 10월 12일 키친아트센터 창립 10주년 행사에 백남준을 처음 만나다. [5] 1984년 김홍희 선생 독일비스바덴에서 열린 백남준 전시 <TV 로댕> 전시 때 백남준 만나 직접 작품 설명을 듣다.
1995년 백남준 박영덕화랑에서 선보인 전자로봇(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끝내고 전자공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운이 좋게 진공관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일본 전자공학자 '우치다 히데오'를 알게 되었고 또 그의 소개로 전자공학자 '슈야 아베 '도 만났다. 백남준과 아베 슈야 함께 이 로봇을 완성하다. 아베는 그후 백남준 전자작업설치 협업자가 되었다. 여기에 드는 제작비 $2400였는데 그 돈은 백남준의 형이 대다. 이 로봇은 그렇게 해서 1964년 태어나다) 퍼포먼스. 사진 저작권 천호선
백남준을 만난 사람들 대부분 미술이나 혹은 예술 관련자로 변화시키다. "나는 백선생을 통해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인식하고 아방가르드 예술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와의 만남은 나의 인생과 가치관을 바꿔놓은 내 생애에 한 획을 그은 운명적 사건이었다" -천호선 문화행정전문가.
천호선 선생은 1993년 세계 전위아트의 선구자인 플럭서스 예술가들 초대해 일본보다 먼저 서울에서 공연을 하게 했다. 또한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에 뉴욕 한국문화원장을 하면서 김금화 뉴욕 공연을 성사시켜 요즘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당시 한국정부는 이를 반대했지만 간신히 설득해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그 공연 이후 김금화는 무속인으로 처음 대한민국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백남준유튜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남준&축제론] <10강> "나의 환희는 거칠 게 없어라!" (0) | 2020.12.02 |
---|---|
[백남준&독일책] <09강> 24시공연, 24시점 관계(?) (0) | 2020.11.17 |
[백남준&도이치] <08강+> 그는 왜 독일에서 신화가 되었나 (0) | 2020.11.05 |
[백남준&비빔밥] <07강> 제로, 플럭서스, +- 융합미학 (0) | 2020.11.03 |
[백남준&미디어] <06강> 제2의 인터넷이 나와야 한다 (0) | 2020.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