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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위성쇼] <15강> 84-86-88 : '우주오페라'

[백남준&위성쇼] <15> I984-1986-1988-2000년 우주오페라  '위성아트'로, 동서 하나 되다 <작성중> 15번째 백남준 강좌 Abstract and Keywords : 위성아트, 우주오페라, 은하계가 캔버스 
https://www.youtube.com/watch?v=Y7yB7e2GGnI&t=3s 

1991년 백남준 프리벨맨(Pre-Bell Man) 디지털시대, 전형적 인간 기마상으로

[백남준&사이버] <16> 사이버(네틱스) 디지털 세상 노마드시대 
[백남준&사기론] <17> 교란미학의 창시자로서의 백남준
<<리뷰>> 2021년, 시공간의 주인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1991년 가장 백남준다운 패션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자만심, 자존감도 아니고 자부심 혹은 바로 자신감

그의 자신감/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그는 멜빵 패션 언제나 작업이 가능한 복장/해맑은 미소/천진의 얼굴/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그에게는 돈이 안 보인다./권력을 말할 것도 없고/명예도 우습다.단지 창조하는 자의 기쁨만을 즐긴다/그의 눈빛에는 경쟁자가 없다.앞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Voyant)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세계를 보고 있다혹은 멀리 보는(Tele-vision)자이다.다른 말로 비저너리(Visionary)다. 3천년 대를 내다보고 있다/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3천년대가 종종 나와서/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나는 불행하게도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그는 보지 못했다. 내가 너무 근처에서라도 보는 영광을 누려야 했었는데 하여간 이 사진을 보니/오늘 나의 맥 빠진 기운이 조금은 나아진다. 기분을 살려주는 멋진 작품이다/그는 정말 예술을 제대로 파는 문화 보따리 장사꾼이다 seulsong.tistory.com/1101

1969 비디오합성기 발명

1968년 백남준 작가는 보스턴에있는 WGBH-TV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방송국에서 공영 텔레비전의 모든 관습을 뒤집는 작업을 개발했다.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그의 프로그램은 아방가르드 공연의 영상과 대중 문화에 대한 언급이 섞인 추상적인 전자 이미지의 환각적인 콜라주였으며, 종종 건조한 음성 해설로 구성되었다. WGBH가 백남준의 첫 방송 제작과 비디오 신디사이저의 발명을 포함하여 많은 '최초'의 현장 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작품에 대한 장학금이 거의 발생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논문은 백남준이 WGBH에 참여하는 모습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 미발행 보관 문서와 방송국 제작자와의 대화에서 발췌 한 것이다. 백남준의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 인 1970년 4시간짜리 Video Commune에 특히 초점을 맞춘 백남준의 작업 전체를 다루면서 백남준이 방송 텔레비전의 뚜렷한 특성과 다른 미디어에서 표현한 예술적 목표를 어떻게 조화 시키려고했는지 보여준다. 아래 이스그로의 글

Marina Isgro

68년 당시 "금지를 금지하라" "상상력에게 모든 권력을" "행복을 사지 말고 쟁취하라" "선거는 아무것도 못 바꾸니 투쟁은 계속된다" "바리케이드는 거리를 막지만 새 시대를 연다" 등 기발한 표어가 난무했다. 그 시절은 암울했으나 문화는 풍요로웠다.

<<오늘 본문>비디오 코뮌 Video Commune : WGBH-TV, Boston 백남준 <테이트 모던 미술관 글 저자는 최근 미국 에서 백남준으로 박사를 받은 큐레이터 이스그로>>https://www.tate.org.uk/research/publications/tate-papers/32/video-commune-nam-june-paik?fbclid=IwAR3jOXgodwNhl9qtSWoZz_bnXpd8ZnfYKooHMceBkFnLd2-wqLvAzElVShI

 

Video Commune: Nam June Paik at WGBH-TV, Boston – Tate Papers | Tate

In the late 1960s and early 1970s, the video artist Nam June Paik created his earliest works for broadcast at the Boston public television station WGBH-TV. This article demonstrates how Paik’s approach to the medium evolved during his time there, as he s

www.tate.org.uk

백남준발명가정신 1965

Nam June Paik in 24 Stunden 1965. Photo by Dorine van der Klei. 발명가 과학자로서의 백남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발명의 정신을 이어가다.
<1>1963년 TV등장 <2>1964년 비디오 등장 <*>1968년 유럽 혁명기
<3>1969년 비디오 합성기 발명 <4>1970년 위성아트 비디오 코뮌 <5>1973년 글로벌 그루브
<*>1974년 TV부처와 정원 성공 <*>1978년 뒤셀도르프 교수 <*>1982년 '휘트니' 회고전 성공
<6>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7>1986년 바이바이 키프링 <8>1988년 손에 손잡고
<9>2000년 호랑이 살아있다 ** 유롭울 한 단계 높인
68혁명은 주동자 없는 시위로 정치보다는 성 혁명이었고 삶을 바꾸는 문화혁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50년대 호황으로 여성의 대학진학이 높아져 60년대 사회진출이 많아졌다. 그리고 기존 결혼에 저항해 독신 여성이 급증했고 이혼율도 높다졌다. 피임약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동성애 등 성의 금기도 많이 깨졌다.

<<리뷰>> 2021년, 시공간의 주인, 어떻게 백남준 같이 사나? [1] 1991년 백남준 가장 백남준다운 패션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자만심, 자존감도 아니고 자부심 혹은 바로 자신감 이 세상에서 시공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잘 놀면 '영원한 지금(eternal now)'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

[2] 이 세상에서 시공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잘 놀면 '영원한 지금(eternal now)' 속에 시(공) 간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장자의 관점이다. 영원한 지금이 중요하다. 백남준 왈 "현재가 유토피아다. 이게 핵심-포인트다(Jetzt ist: Utopia Das ist Wichtig)". 다시 말해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모든 시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백남준은 미래를 사유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데도 현재를 가장 사랑했다.

잘 놀다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다. 해저 속 깊이 잠수한 '사유자' 그를 아무도 터치하지 못한다. 장자처럼 나비처럼, 빈 배처럼 '영원한 지금'을 살아보면 어떨까.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 하면서 '영원한 지금' 속에 사는 것이다.

<1> <가장 잘 나가는 한국 철학자가 드디어 백남준을 공부 강신주, 장자의 소통론으로 백남준 설명, 백남준의 소통론을 장자의 비유로 풀다> 피리는 속이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바람과 만나야 울림이 생긴다. 피리와 바람 이 둘이 같이 있어야 연인처럼 떨림이 온다. 이것이 진정한 소통의 첫 단계이다. 소통이란 생각의 벽을 트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피리 즉 사람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타존재(마주침 미학)가 될 때 진정한 공감과 울림과 떨림과 파동이 오는 것이다.

<2> 백남준과 장자 '제물론'을 보면 생각이 같다. 장자는 사물, 자연, 기계도 같다고 본다. 백남준 생각도 그렇다. 과거, 현대, 미래도 같다. 시비와 판단에서 벗어나라. 대립구조과 사슬에서 벗어나라. 일체의 고정관념을 버려라. 얽매임에서 벗어나라. 말, 글 그 자체도 의심하라. 문자주의에 빠지면 어리석다. -라캉, 장자, 루소. [라캉] 상징계 벗어나 '실재계'로 가라(말, 나이 감옥 빠지지 마라, 있는 대로) 서양에서는 루소가 좀 그렇다.

[3] [백남준, 인류공존과 지식과 정보를 공유를 추구하는 공화주의자 그리고 인터넷주의자] 백남준은 진정한 지구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창안하다. 공화국(La Publica) 뜻은 다 같이 가는 것, 모든 것이 우리 재산, 우리가 소유하는 것 '공동재산'이라는 뜻이라고. 공화국에 살수록 역사에 관심이 높다. 모든 일이 나의 삶과 연관성이 높기에

[4] [나는 공자보다는 맹자의 위민 사상을 선호, 그것은 백남준의 인류애 통한다] 인: 측은지심, 의: 수오지심(옳지 못한 것을 부끄러움), 예: 사양지심, 지: 시비지심. 맹자는 임금이 가볍게 봤기 때문에 군주들 싫어했다. 왕(군주) 중심의 정치를 반대하고 신하(백성)와 함께 하는 왕도정치(인의정치)를 강조했다. 발음이 비슷해 혼돈. 조선은 왕이 함부로 하지 못했다. 맹자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맹자에 따르면 왕도정치는 인(仁 : 사랑)과 의(義 : 올바름)를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이다. 패도정치는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 권세와 무력을 쓰는 정치 맹자는 그런 방식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백남준&시간론]
[1]<"어떻게 시간의 주인으로 마음대로 가지고 사나" 백남준의 5차원 삶 시공간 인간  5차원 사기론: 시간도 역시 불가능한 되감기를 가능하다는 사기론 "당신이 나의 TV를 보게 된다면 제발 30분 이상 비켜 보기 바란다. 눈을 4분의 3 감고 –백남준 백남준

백남준 데스마스크 1993년에 베니스 출품작 중 하나이다. 시간이 주제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살기위해서다 -말로

[2] 종형화된 시간을 벗어나 빗나간 시간을 말하다. 백남준은 현실을 절실하게 느끼지도 그렇다고 과거와 미래로 도망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시간여행을 권유한다. -김남수 전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

[3] <사건울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예술>내 작품은 그림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그것은 단지 시간예술입니다. (1962년 롤프 예를링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962년) 백남준은 시간을 잘게 나누는 방식의 예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흐름 그것을 통째로 강렬하게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삶의 공기를 낯설게 호흡하는 거기에 최대의 쾌락과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다. <2부 본문에서 더 자세히>

[인트로] <<백남준(1932~2006)과 김창열(1929~2021)>> 물방울과 전자빛의 만남

<사진> 비디오를 붓으로, 물방울을 혼으로 변형시킨, 백남준과 김창열 <아래> 김창열 물방울 연작 '회귀(Recurrence) SHP3000(1993년) 'SH08002(2008년)'

[1] 그들은 엇비슷한 세대로 1969년 백남준이 김창열을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시키는 것을 계기로 가까워졌다. 이때부터 김창열은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어릿광대 같은 백남준의 광기와 구도자 같은 김창열의 열정으로 넘치는 두 사람이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보니 서로에게 응원의 손짓을 보내면서 눈빛이 단번에 통하는 것 같다. 백남준의 천진무구한 웃음과 김창렬의 과묵한 표정이 음양의 조화처럼 멋진 하모니를 이룬다. 김창렬의 물방울, 모든 물질의 근원이자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젖줄을 주는 어머니로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이 세상에서 물보다 두루 이익을 주는 것이 없다는 비유가 떠오른다.

[2] 그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물방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파리의 가난한 아틀리에에서의 어느 날이었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또 마음에 안 들어 유화색채를 떼어내 재활용하기 위해 캔버스 위에 물을 뿌려놓았는데 물이 방울져 아침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며 물방울을 만났다." 또한 김창열은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자신과 예술에 대한 정체성을 찾으려 누구보다 고심한다. 바로 그때 이 세상의 모든 번뇌를 깨끗이 씻어줄 것 같은 물방울이야말로 자신에 맞는 오브제라 생각한다. 또한 물방울이 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와 같은 동양적 세계관을 잘 상징하기에 이에 몰입한다.

<<백남준: 미학&시학>>
[1] 비디오 철학자, 미디어 사상가로서의 백남준, 총체적 아티스트 혹은 총체적 피아노(예술가) 같다. 관계미학-니콜라 부리오(1965-)] 작가와 관객이 쌍방형 관계를 맺기 즉 미술가는 '기획자'가 되어 사람들이 일정 형식의 (공동)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뒤에서 관객이 작품에 대한 인식과 관계를 맺도록 돕는다

[2] 시와 비디오 POEM=SOUND=IMAGE=DANCE(PERFORMANCE)=PHILOSOPHY=SCIENCE=
건축=INTER[MULTI]-MEDIA> '시(詩, 언어 사찰)'가 모든 예술의 기초가 되는 이유는 뭔가? 왜냐하면 시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음악(sound 시에 리듬과 운율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이고 미술(image 시에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이고 무용(시에서 dance & movement 언어의 춤이 발생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이고 철학(philosophy 시에서 삶의 향연과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면 시가 아니다). 건축가 집을 짓듯이 언어적 구조주의 건축(architecture)적 요소가 없으면 시가 아니다)이고 과학(science 시가 과학 정신을 바탕으로 한 첨단의 미래 비전이 반영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는 멀티-미디어이면서 동시에 인터-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에도 詩가 필요하다. <Political poetry> brings together politics and poetry. According to "The Politics of Poetry" by David Orr, poetry and politics connect through expression and feeling, although both of them are matters of persuasion

백남준에게 미술은 음악이다

<<배남준: 예술론&인생론>>

<1> 백남준 예술이란 사람들 얼떨떨하게 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감탄사 "아!"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힘들게 왜 등산을 하겠는가? 왜 모나리자를 보려고 루브르를 가겠는가?

[나의 인생론 혹은 예술론] 듣기 읽기 말하기 쓰기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쓰느냐(창조하느냐)에 인생이 결정된다. -나의 생각이지만 백남준의 삶이 그랬다. 연애도 그렇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지금(eternal now)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철학과 연애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건 우주와 인간을 묻는 것이다.

<2> <내 삶은 세계적 사건이다. 내 신체가 움직이면 이게 다 포퍼먼스> 한국인은 멋과 가무와 예술을 좋아한다. 삶은 사물인가 사건이다. 삶이란 사건이다. 세계적 사건이고 우주적 퍼포먼스다. "현재가 유토피아다((Jetzt ist: Utopia Das ist Wichtig)" -백남준. <신체가 존재다> 몸이 일어나서 마음이 되고 마음이 일어나서 몸이 된다. 그런 면에서 몸은 마음이고, 마음을 몸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하지 않는 것이다. 바퀴 가운데가 비워있기 때문에 바퀴 살이 돌아가다. 유가 있는 것은 무가 있기 때문이다. 무위는 유위에서 나온다. 무용이 유용이다. '없다는 (아이들) 업다=업으면 아이가 없네'에서 나왔다.

<<백남준 이야기론>>

<1> 아래 1993년 4월 12일 정보고속도로(The Info Highway) Bringing a revolution in entertainment, news and communication Eine Data-Base 클라우스 부스만-프로리안 메츠너 1993년
<2> 백남준은 1964년 전자 초고속도로라는 인터넷 개념을 발명했고 이 프로젝트로 록펠러 예술기금을 받다. 그리고 30년 후 1993년 이런 개념을 주제로 베니스비엔날레 작품화했고 그것으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이제 백남준의 후손인 우리들은 차세대 인터넷, 제2의 인터넷을 발명해야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러면 한국이 세계1위국가가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21세기 들어서면서 이런 개념을 받아들여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것이다.
<3> 모든 사상가와 성인이 다 도 즉 길을 이야기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로마가 유럽을 지배한 것은 당시 최고의 마차고속도로가 있었기 때문). 멀티미디어(다양한 매체 미디어와 고속도로)=도(道)=예수 왈, 나는 길(way)=노자 왈, 도(tao)=칭기즈칸의 초원고속도로와 병참제=백남준의 전자초고속도로=인터넷=디지털아트=사이버네틱스 아트

<4> The Old Highway(12세기 몽골의 초원고속도로) -> The New Highway(20세기 초 자동차고속도로) The Electronic Super Highway(20세기 말 전자초고속도로) 백남준은 1964년 전자초고속도라는 인터넷 개념을 발명했고 이 프로젝트로 록펠러 예술기금을 받다. The Old Highway(12세기 몽골의 초원고속도로) -> The New Highway(20세기 초 자동차고속도로) The Electronic Super Highway(20세기 말 전자초고속도로) 

그리고 30년 후 1993년 이런 개념을 주제로 베니스비엔날레 작품화했고 그것으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이제 백남준의 후손인 우리들은 차세대 인터넷, 제2의 인터넷을 발명해야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러면 한국이 세계1위국가가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21세기 들어서면서 이런 개념을 받아들여 한국이 인터넷 강국이 된 것이다.

[5] 백남준 60년 전인 1974년에 이미 TV 쇼핑과 인터넷 쇼핑, 전자 팩스 화상 전화, 의료 상담, 바이오 커뮤니케이션 전자 여론조사, 전자투표, 전자 도서관 검색, 자동차 네비게이션 등 수많은 것 예언

<6> 노자는 무위자연을 발명하다. 노자의 영감을 받은 것인가? 백남준은 무음악(a-music)을 발명하다. 백남준의 무음악은 그의 스승인 쇤베르크의 무조음악(atonal music 12음계음악)과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7>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 백남준의 '새로운 야만인(바이올린 부수고 피아노 파괴)',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이런 건 대가들로서 서로 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류의 진정한 에로스 회복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의 풍경, "끊임없이 자기의 영토를 떠나는 자만이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탈영토주의 이런 건 백남준 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 '탈영토제국주의'나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와 통한다.

<<백남준의 말>><1> 백남준 식민지 시절의 학교에서 한국어를 쓸 수 없었던 쓴맛에 대한 기억 하나: 우리는 일본 선생에게 밀고자가 되어야 했다. 백남준 식민지 시절의 학교에서 한국어를 쓸 수 없었던 쓴맛에 대한 기억 둘: 영국 사람들 공포정치로 아일랜드 1000년 식민지로 다스리다. 아일랜드어 없애는데 1000년이 걸렸다. 아일랜드 질겼네요. 그러나보니 문학이 발달했다.

(출간 종수에 따른) 아일랜드 소설 작가 순위 7명스타 : 대런 섄 (46) 제임스 조이스 (41) 오스카 와일드 (31) 브램 스토커 (18)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14) 오언 콜퍼 (9)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8) 존 코널리 (5) 레너드 위벌리 (5) 사무엘 베케트 (4) 세실리아 아헌 (4) 조지 버나드 쇼 (4) 데릭 랜디 (3) 마이클 스콧 (3) 칼럼 매캔 (3) C. S. 루이스 (2) 켄 브루언 (2) 콜럼 토빈 (2) 존 반빌 (2) 메리언 키스 (2) 셰이머스 히니 (2) 엠마 도노휴 (2) 피아더르 오 길린 (2) 등등 지천에 깔려있다.

<2> 백남준은 1932년 학교에서 모국어 쓸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백남준의 에세이 중에 이런 시절의 비애를 고백한 글도 남겼다. 그는 분단시대 대구사건(1946년 10월 1일 당시 우리나라는 미군정시절. 박정희 형 사회주의자 박상희가 주도해 대구에서 일으킨 미군정을 반대하는 시위) 이 시위에서 박상희는 불행하게도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 이 시위에 백남준맨 앞줄에 서는 행동대장(경기 중학교 투쟁위원)으로 참가. 그는 당시 14살 경기중 학생이었을 뿐. 다행히 목숨은 부지했다. 백남준의 2명의 교우는 월북했다. 부친은 일제식민지 시절 거상(거대재벌)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해방 후 5당회의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한국정치의 거물인 박헌영, 여운영 한민당과 한독당 대표 등의 모임의 장소로 자택을 제공하기도 했다.

<3> 백남준의 미디어 비판 그리고 백남준은 우리 시대에서 불쾌한 것은 정보의 입출력에서 균형감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통계에 의하면 우린 매년 4만 가지 광고를 봐야 하지만 그중에 40개 광고방송에서 선전하는 상품만 구매할 뿐, 우린 그렇게 정신병원 소파에 누워있는 금붕어"라며 시청자가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돼 볼모로 잡히는 걸 늘 못마땅해했다.

[참고] <한국언론 9대 뉴스> [1] OECD 37개국 중 한국 경제성장 1위 실제 중국1위 그러나 OECD 아니다 [2] 영국 문화 소프트 파워 1위 독일, 2위 한국, 3위 프랑스, 4위 일본. [3] 한국정부가, 2억7천 명 인구 가진 인도네시아 FTA 체결 [4] 정은경, 봉준호 뉴욕타임스 100인 [5] 109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게 신용등급 유지 [6] 한국, 전자정부 1위 [7] 국가 경쟁력 8위. 2단계 올라감 [8] 코로나 방역능력 3위: 뉴질랜드 1위 봉쇄 때문, 타이완 2위 봉쇄 때문, 봉쇄 안하고도 3위 [9] 주가 상승률 세계 2위 

WHO 한국 경제 코로나 다잡다 고맙다는 전화가 왔다.

<4> 백남준은 1963년 첫 전시 포스터에 16개 예술개념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내용 없는 시간은 가능한가(Is the TIME without contents possible)?> 시간문제에서 1960년대 초부터 "서로 관계가 없는 여러 동작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성(시간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는 아직 녹음기가 없었던 시대였다. 백남준으 비디오매체로 이것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백남준은 멀티한 시공간성(multi temporal and multi spatial)을 평생 관심을 두었다. 이게 위성아트가 되다.

<5> 백남준에게 1863년이 중요하다. 프랑스 최고 전성기. 왜냐하면 1983년 전화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전화 전에는 말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그리고 서양미술사에서 1863년은 마네가 처음 인상주의를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인상파를 발표한 후 100년 후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백남준 첫 전시를 열었다.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 -백남준. 만약 백남준이 미국에서 앤디 워홀처럼 유럽에서 이민자의 후손이었다면 앤디 워홀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벌써부터 잃어버렸을 것이다.

<6>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 대한 후기 1963-1964> "영원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Der Ewigkeitskult ist di langste Krankheit der Menschkeit)" -백남준. 평생과제 모든 예술가들의 로망이 내 작품이 영원히 오래 오래 남는 것. 그러나 백남준은 이 마저 부정. "뭘 그렇게 남기려고 해!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남기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 즉 내일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치열한 삶의 방식으로 살았던 것이다.

<7> <정보가 석유를 대신>

40년 전 한국은 정보시대 빛을 발할 것임을 예언하다. 앞으로는 두뇌 파워(brain-power)가 오일 파워(oil-power)를 이길 것이다. 탈영토제국주의를 언급하다. 앞으로 정보사회는 영토의 크기와 그렇게 중요한 시대가 아닐 것이다. 그는 한국인의 최고두뇌와 인터넷의 가장 빠른 속도와 그런 소통능력을 통해 세계에서 최고의 정보와 지식을 공급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다. 그걸 통해 바로 전 세계를 호령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다. 전쟁이나 침략의 방식이 아닌 완벽하게 평화의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온 라인의 영토에서는 지식과 정보 수집능력이 많을수록 인터넷 속도에 빠를수록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8> 미국 예일대에서 바빌로니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무려 스무 명이 넘는데 왜 전화를 논문의 주제로 삼은 박사는 한 명도 없는가? -백남준. [평] 전화는 전선을 통해 가장 빠르게 소통을 하는 전기초고속도로가 아닌가 베니스는 왜 최고의 도시인가? 자동차가 없기 때문이다. -백남준. 이것이 없었다면 인터넷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백남준: 성애-황홀경-주이상스-여성시대>>

<1> <백남준에 황홀경은 내가, 내가 아닐 때다. 남이 존재를 이루도록 할 때이다. 사르트르의 생각과 같다> 백남준에게 있어 황홀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자리, 즉 내가 내 자신을 극복하려는 순간에 찾아온다. 새롭게 내가 태어나는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심지어 TV도 인공위성도 장난감일 뿐이다. 백남준은 혁명가들이 원하는 경건주의나 엄격주의와 다르게 그는 유쾌함과 즐거움 그리고 인간의 유치찬란한 행복을 추구한다. 백남준 엘리트주의나 순수주의를 멀리하고 늘 즐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백남준의 유토피아는 신석기 시대 그때는 소유(사유재산 발명되기)이전의 사회로 독점이 없는 공동체사회로 돌아가려 한다. [약간의 주, 인류는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나고 독점사유사회가 발명이 된다] 백남준이 말한 "나의 TV는 신석기 시대를 닮았다"의 해설이다 -강신주 아래는 백남준 글 원본과 그에 대한 해설 등이 조금 보인다. 백남준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핵심 즉 나를 밖으로 내던질 때(être pour autrui) 황홀이 온다는 의미(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Sartre)를 파악했죠.

<2> 백남준에게 있어 황홀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자리, 즉 내가 내 자신을 극복하려는 순간에 찾아온다. 새롭게 내가 태어나는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심지어 TV도 인공위성도 장난감일 뿐이다. 백남준은 혁명가들이 원하는 경건주의나 엄격주의와 다르게 그는 유쾌함과 즐거움 그리고 인간의 유치찬란한 행복을 추구한다.

백남준 엘리트주의나 순수주의를 멀리하고 늘 즐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백남준의 유토피아는 신석기 시대 그때는 소유(사유재산발명) 전의 사회로 독점이 없는 공동체 사회로 돌아가려 한다. [약간의 주, 인류는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나고 독점사유사회가 발명이 된다] 백남준이 말한 "나의 TV는 신석기 시대를 닮았다"의 해설이다. 강신주 아래는 백남준 글 원본과 그에 대한 해설 등이 조금 보인다. 백남준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핵심 즉 나를 밖으로 내던질 때(être pour autrui) 황홀이 온다는 의미(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Sartre)를 파악했죠.

<3> <예술은 무엇보다 형도 중요하지만 색이 더 중요하다. 색의 예술화에 능수능란한 작가가 세계 최고가 된다. 왜냐하면 색이란 최고의 절정이고 황홀경이고 가장 높은 단계의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주이상스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드물다. 미술이 이것을 경험하게 한다면 대성공이다. 프랑스 저명한 성 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그래서 "색정은 죽었다(Il n'y a pas de rapports sexuels)"고 선언. 뒤샹은 이걸 시도했지만 실패했지만, 백남준 이런 시도에서 성공하다.

[색 혹은 색채] 무엇인가? 동양에서 색은 색정을 말한다. 섹스를 말한다. 일종의 생명 에너지를 뜻한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엘랑 비탈'이다. 그리고 동양에서 색은 시간을 말한다. 색동옷을 때때옷이라고 하는데 시간마다 우주만물의 색채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색이란 뭔가 현상적인 것을 말한다. 공은 진리를 말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백남준에게 색은 뭔가 그에게도 색은 섹스이고 시간이고 그리고 비디오아트이다.

[4] 과거에는 에로티시즘(색의 기운생동)을 육체적인 것으로 한정했는데 현대에 와선 삶 전체와 연관시킨다. 우리 몸속에 정신과 영혼이 담겨진 것이다. 하긴 생명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진화할 수 없고 멸종할 것이다]

<백남준과 여성시대>

<1> 백남준은 음악(Action Music)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되려고 했다. 그런 주제로 작곡한 것이 바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였다. <2> 백남준이 만 30살인 1962년 가장 관심을 둔 스타는 바로 마릴린 멀로였다. 백남준은 누구보다 유치원 시절부터 성의 촉이 예민한 작가였다. 백남준 원래 미국을 싫어했는데 이 미녀 때문에 미국이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의 모든 사진을 속옷 없이 찍은 것이다.

<아래> 백남준 1962년 작품 마릴린 2번.

<3> 지금은 양의 시대 말기에 속한다. 이제 음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페미니즘은 우리시대의 톱 논쟁거리다. 물론 페미니즘은 100가지 1000가지가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남성의 비인간화를 막아주는 남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인간주의 휴머니즘 운동이다. 그런데 페미니즘에서 한 가지 큰 문제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것조차 흑백논리에 속하는 이분적 남성적 논리로 여성문제 문제를 풀려고 하기에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통합적 정음정양 음양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노자적 여성주의 논리가 필요하다.

[백남준과 여성주의]
[1] 전쟁 시에는 남성들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일상 시에는 여성들이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돈은 남자가 번다고 하지만 자식을 먹고 살리는 키우고 돌보는 것은 모든 것이 여성의 몫이다. 그래서 그 짐이 무거운 것이다. 결국 여성이 애를 낳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리는 역할이다. 그래서 살림(사람을 살린다)이라고 하지 않던가. 수력발전소(태음여왕시대:평화시대)->화력(태양대왕시대: 전쟁시대) 발전소->원자력 발전소(환경위기, 코로나시대).

[2] <백남준과 여성주의, 곰과 단군신화> 단군신화 곰과 범 여성의 인내성이 결국 승리하다. 남성의 공격성이 승리하지 못한다. 세계문명사를 봐도 그렇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승리한 것은 결국 문명에서 여성이 승리한다는 메타포. 백남준과 음악, 무소유주의와 평화] 예술에서 무엇보다 '음악(머리 속에 가지고 다닌다)'이다. 철학에서 무엇보다 양이 아니고 '음(달 여성주의 평화주의 인류공존주의)'이다 [문화의 기적] 문화는 기본이 음(비영리)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기적처럼 무한대 플러스가 되어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주체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이 오는 것. 그래서 작가들 작업을 하는 것 아닌가.

 

[3] 백남준: 노자(여성적)와 공자(남성적) <노자 쪽> '한이 있기에'-해원: '신'-바람 -신명의 에너지를 멋 예술로 승화되어야 완성되는 것이다. 창조할 때 신이 되는 것이다 모든 축제는 창조에서 온다.] [4] 피카소: 남성중심, 뒤샹: 남성반 여성반, 백남준: 여성중심/God Father & Great Mother/God Good Gut]

<<미국에게 주는 충고>> 미국인 이만열 교수(백남준과)의 예

[이만열 교수가 어제(1월10일)기사. 내용 현실적, 합리적/최근 한국인들은 한때 익숙했던 미국의 정치 및 학술 기관들이 예전같지 않다는것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버드 교수들이 COVID19에 대한 비이성적 논쟁을 세우는것과 미국 워싱턴 D.C.의 정치인들이 가장 저속한 수준에서 비열한 게임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은 실망하고 혼란스러워한다]

http://www.koreait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980&fbclid=IwAR2HJLksfKSrWwI3w4dEShNQqfsKvmD25P1ZD97x8Cc6XpYR8b3ZTChCdPM

 

한국인, 실학(實學)의 의미 재발견 - 미국 의존적 사고방식 버려야 - Korea IT Times

최근 한국인들은 한때 익숙했던 미국의 정치 및 학술 기관들이 예전같지 않다는것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버드 교수들이 COVID19에 대한 비이성적 논쟁을 세우는것과 미국

www.koreaittimes.com

<1> <미국이 유럽 지성에서 지적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 미국의 부모들부터 독서를 해야 한다. 미국에는 촘스키 외 철학자나 미국민의 정신적 스승이 없다> 트럼프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철저하게 반지성주의자들(백인 남성 저학력자 층 요즘 특히 아시아 중남미 이민자들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이 상당히 높은 사람들). 20년 마다 반지성주의 광풍이 일어난다.

반지성주의 대표적 사건이 바로 메카시즘이죠. 지식인놈들 다 빨간 사고에 물들었다고 비판. 음모론이 자주 등장한다. 미국 대중이 반지성주의 좋아하는 것은 골치 아픈 내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급이 낮은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방송매체에 중독되어 있다. 그들은 메시지가 이해하기 쉽고 간단해야 좋아한다. 3S 우민화정책에 너무 길들어져 있다. 미국 반지성주의의 원조는 미국 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귀족 출생이 아닌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그리고 인디언 대학살의 장본인. 영미전쟁에서 대승 미국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영웅)'이었다. 일종의 대중영합주의 귀재. '뉴욕타임스'는 지식인만 읽는 신문이다. 발행부수 극히 적다.

그나마 최근에서 '뉴욕 타임스'도 반지성주의 가는 면을 보인다. 미국인 중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이들은 전문적 지식인 미워하고 반엘리트 정서가 강하고 미국은 처음부터 반유럽주의, 반귀족주의다. 어설픈 지식과 정보에 물든 대중주의 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 대표가 바로 복음주의 목사 등등 미국인은 지성인과 지적 능력을 구별하지 못한다. 일본 반지성주의도 미국 반지성주의와 많이 닮았다. 아베가 장기 집권했던 이유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HyvkDkMAM

<2> 미국의 반지성주의(남탓주의)는 20년마다 돌아온다. 트럼프는 그렇지 않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반지성주의자들이다. 그런데 반지성주의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기파다. 일본도 반지성주의자가 미국 못지않다. 반지성주의자는 지식이 전혀 부족한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음모론이 나오는 이유다. 대중은 애매모호한 것을 참지 못한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아무리 세계적 수준의 지식이 있는 지성인이라도 미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학계나 대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대신 미디어와 할리우드 스타들이 미국사회를 좌우한다.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보듯 20세기 프랑스 사회의 심판자 역할을 한 사르트르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같은 혹은 독일의 하버마스 같은 국가의 정신적 기둥이 되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지성인이 있어도 미국에서는 맥을 못 춘다. 가까운 곳에서 예를 들면 이만열 교수 같은 지성인도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새로운 전시의 전시와 도전>>

<1> [롯데전시와 호크니] 전시에서 프랑스 노르망디로 작업실 옮기다. 로롱 갤러리에서 <나의 노르망디>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2020년 12월 23일까지 열었다. www.galerie-lelong.com

<<백해영갤러리 전시 2021년 1월 13일부터 [김강용&권오봉 2인전]>

[1] 김강용 작가 <극사실회화가 첨단 현대추상 되다>

작가 김강용은 1950년 정읍 출신으로 반세기 극사실 회화에 깊이 빠져 살았다. 초기 잠시 구상을 하고 50년간 극사실주의 그림을 하다보니 결국은 구상화가 아니라 포스트모던하고 미니멀한 추상화가 되다. 참 묘한 역설이다. 그의 작품 경향은 광역의 단색화에 속한다. 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요약해 본다. 그의 회화 세계가 구상이냐 추상이냐라기 보다는 그의 회화가 그림이 되어야 하는데 마침내 그 경지에 도달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그의 회화는 추상과 구상을 구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림에서 경계가 없어졌고 그야말로 그림이 되고 아트가 되었다. 물론 페인팅이다.

김 화백은 1970년대 중반에 모래 회화를 도전하다. 재료의 차별성로 회화의 무궁한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건축을 닮았다.  그의 모든 그림은 모래하는 점에서 시작한다. 그는 자연이 만든 특히 바다의 파도가 만든 점 즉 모래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강릉에서 모래를 가져다가 모래벽돌회화로 만든다. 손으로 하는 그의 작업은 하나의 포퍼먼스다. 마치 광화사가 미쳐서 작업을 하는 것 같다.

미술의 정신은 변형(TRANSFORMATION)에 있다. 그의 모래가 갑자기 꽃으로 보인다.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는 보이지 않는 음악을 미술로 그리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점선면 기호가 들어가고 결국에는 음악의 미술인 추상화를 발명한다. 물론 거기에 괴테의 색채론을 응용한 색채를 추가시켰다. 김 화백은 그런 보이지 않은 인간의 정신을 자연의 육체인 점 다시 말해 모래로 그려 낸다.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그렸다기 보다는 아상블라주에 가깝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적으로 극사실 구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추상화가 되었다.

김 화백은 자신을 벽돌을 그린 것이 아니고 벽돌의 그림자 즉 실루엣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림의 본질에 추구한 셈이다. 눈속임(trompe l'oeil)이라고 결국은 착란의 미학이다. 이수균 평론가는 그는 벽돌을 그림으로써 김강용의 벽돌은 실재 벽돌의 ‘리얼리티’를 품고 있지만 벽돌의 재현이나 그림자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추상적 존재로 탈바꿈시켰다고 평했다.

그는 물방울로 바위를 뚫듯 그런 창작태도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의 단순한 패턴 속에는 지루하고 단순하게 보일 정도로 유사한 벽돌그림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 무한한 변주가 일어난다. 많은 변화를 내포한다. 그 속에 창조적 파격을 숨겨져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사물이 주는 환상적 황홀 세계에 도취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국 화담 서경덕이 말하는 '격물치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의 벽돌은 이수균 평론가의 말대로 진실과 허구의 구별이 모호한 시대에 그의 회화 한편에는 왠지 슬퍼 보이는 것과 함께, 따사로운 인간의 정이 부드럽게 연민의 미소가 띠고 있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모래 차갑고 딱딱한 물질이 하나의 그리움 같은 진짜 그림이 되는 것은 50년간 작가의 각고의 수행과 구도의 결과물로 보인다. 2021.01.10 아트 저널리스트 김형순

 

[2] 권오봉 작가 <내면의 격정이 담긴 파동의 회화>

“그의 미술은 급소를 정확히 찌를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누구나의 머릿속에 있지만, 아무도 감히 보려 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미술이다.” 기억일 수도 몽상일 수도 있는 장면을 거침없이 그려내는 권오봉은 미술 특유의 힘을 믿고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작가다. 대구 출신의 작가는 변두리에 터를 마련한 후, 몇십 년 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모서리와 유머 그리고 승화된 욕망에 대한 가시 돋친 여행을 선보인다. 시골의 쉬이 지는 태양, 지극히 현실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작가는 오로지 그리는 것에 집중하며 보는 이의 심장에 린치를 가한다. -정일주 편집장

작가 권오봉은 1954년 대구 출생으로 17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미술의 무한한 가능성과 그 심연의 깊이를 탐구한다.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음악이다. 20세기 현대미술은 무엇보다 음악이어야 한다. 음악으로 그리는 미술이다. 추상화는 더욱 그렇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다 보면 추상이 될 수밖에 없다. 서양화가 중 칸딘스키의 발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의 오래전부터 추상적 요소가 많다. 생략의 기법도 즐겨 사용한다. 산수화에 사람은 보이지 않게 그렸다. 그만큼 그림을 보는 이에게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의 회화의 추상적 요소가 강한 것은 그의 그림을 악보와 같다. 그 속에 신비한 기호가 숨겨져 있고 말할 수 없는 격정이 담긴 파동과 시공간을 초월하는 리듬감이 그득하다. 거기에 숨결소리의 들려오고 그것이 우주순환의 원리를 닮았다 천지인의 소통을 촉진시킨다.

지나온 삶의 흔적을 남기려 하는 것인가 뭔가 작가의 숨겨진 심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그것이 매우 비밀스럽고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가의 붓질은 자유분방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감정의 기억을 오래 두고 그릴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회화의 기법에서 막힘이 없다. 마치 무희가 제 마음껏 현대댄스를 추는 것 같다. 

반면 그는 역시 동아시아 미술의 근간이 되는 서예라는 전통예술의 요소가 놓칠 수 없다. 한 획에 담긴 먹의 농담 효과는 매우 효과적으로 살린다. 한 번의 붓질로 사물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이런 서예정신을 현대회화로 다시 풀어낸다. 전통과 현대가 신묘하게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청자에 비유하면 활력이 넘치는 분청사기(粉靑沙器) 같다. 흑회색 은은함 멋이 살아 있다. 작가는 체질적으로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선호하는 것 같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늬처럼 오 작가의 회화도 그렇다. 그것이 그를 더 자유롭게 하는 모양이다. 그림에 고양된 정신세계를 불어넣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명에서 벗어난 원시적인 몸이 들어간다. 여기서 몸은 마음이기도 하다. 정신세계와 마음세계는 좀 다르다. 정신이 관념으로 빠지기 쉽다면 마음은 몸이 될 수 있기에 더욱 빛난다.

그의 회화는 프랑스의 설치작가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와
하얀 캔버스 위에 드라마틱하게

순간을  전달하는 독특한 회화 언어를 구사한 미국의 낙서화 '사이 톰블리'연상시킨다. 나는 그의 회화는 무미술이라고 부른다. 작위성이 배제된 무위미술이다. 마이너스가 플러스가 되는 미술이다.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추상이든 구상이든 그림이 되는 것이다. 40년간 그의 작업을 그림이 되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다. 그림은 그 누구도 규정할 수 없다. 스스로 만들어간다. 피카소 풍이 있고, 폴록 풍이 있고, 라우센버그 풍이 있듯이 작가의 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무상의 노력으로 40년간 진행 중이다.

그의 작품은 생성 중이다. 완성된 것은 없다. 그의 원초적 몸짓으로 선사시대의 그림의 원형을 찾아가려 한다. 무심한 낙서 같은 그의 붓질은 자신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다. 삶이라는 하나의 여행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전 세계를 여행한다. 작가는 모던 아티스트답게 작가의 심정을 개입시키는 것을 절제한다. 지성을 담으려고 한다. 거침없이 뻗어가는 선의 에너지는 동양회화의 정신인 기운생동으로 치닫는다. 그는 오브제 아트와 설치아트를 혼합한 형석의 모던한 미술에도 도전한다.

그의 미술은 무엇보다 음악이지만 부수적으로 몸이 따라오고 다시 말해 퍼포먼스가 녹아들어가 있다. 그렇지만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회화의 정신 즉 새 생명의 잉태한다. 아무도 그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주만물 속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라는 소우주 속에 담는 것이다. 80년대 말부터 그의 회화는 보다 더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심경을 드러낸다. 사이 톰블리의 극점을 보인다. 매우 매혹적인 회화.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회귀하는 면모를 보인다. 어떤 선순환의 카테고리로 돌아온 것이다. 일종의 귀향이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된 귀향이다. 이 시기에는 더욱 광풍이 분다. 거친 폭포도 보인다. 뭔가 쏟아지는 그림이다. 그의 회화의 매력은 무한한 가능성의 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2021.01.8. 아트 저널리스트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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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우주쇼 전자오페라로서의 위성아트 https://www.youtube.com/watch?v=FUg-KCBn5dg&t=118s 

'소통과 참여'는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소통의 반대 '소외' // 참여의 반대 '고립(낮은 단계의 착취)'

<1>1963년 TV등장 <2>1964년 비디오 등장<*>1968 유럽 혁명기(아래사진)
<3>1969년 비디오 합성기 발명<4>1970년 위성아트 등장 비디오 코뮌
<5>1973년 글로벌 그루브<*>1974년 TV부처와 정원 성공<*>1978년 뒤셀도르프 교수
<*>1982년 '휘트니' 회고전 성공<6>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7>1986년 바이 바이 키프링
<8>1988년 손에 손잡고<9>2000년 호랑이 살아있다

<1> 맥루언 지구촌 글로벌 개막

[1] 이를 통해 백남준은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맥루언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인 '참여와 소통'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누구나 즐기는 '댓글' 같은 게 백남준이 상상한 '참여와 소통'의 '에스페란토(국제어)'였다

[2] 이런 정신은 백남준이 60년대 가담한 '플럭서스' 운동과도 상통한다. 플럭서스 즉 영어로 'FLOW(흐른다)' 소통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인데, 백남준은 이런 발상으로 '인터넷' 없는 시대에 기술과 예술을 융합해 국경·인종·언어는 뛰어넘는 '인터페이스' 세상을 만들려 했다.

[1]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2년 후 '86아시안게임'을 맞아 '바이 바이 키플링(1986)'로 이어졌고, 4년 후 '88서울올림픽' 때에 맞춰 '손에 손잡고(1988)'가 나오면서 위성오페라 3부작이 완결된다. 백남준은 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브랜드가치가 전무한 한국의 위상을 높이면서 한국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2]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생방송'인 또 다른 이유를 추론해 보면 그건 바로 방송이 오웰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권력자에 의해 정보가 임의로 조작되고 왜곡·굴절되는 것을 최소화하자는 상징적 조치였고, 쌍방형 미디어로 소수인 '빅 브라더'가 대다수 사람을 지배하는 도구로 악용하려는 걸 막자는 주도면밀한 의도가 깔려있었다.

'굿모닝 미스터오웰'의 내용에서 동구권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굿 장면'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할애되는데 이는 백남준이 동서 간 정보결핍으로 발생하는 오해를 제거하고 서양이 동양을 사회문화적으로 깔보는 일을 없애려는 사전조치였다.

또한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맑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 주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호령하며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칭기즈칸'이 됐다.

[3] <1984년>"당신과 보이스가 인공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 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야심작을 성사시키려 인사들을 두루 만났고 그 중 미국방송(WNET) 프로듀서인 '캐럴 브란덴버그'도 있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 다짜고짜 하는 말이 내년 1월 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TV쇼를 하겠다고. 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그 짧은 시간 내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죠.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채널(FR) 3TV와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어요. 나는 영락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 됐어요." /1984년 백남준이 비행기 안에서도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는 모습. 2014년 방송된 <KBS 파노라마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 백남준2편 : 디스토피아를 넘어서> 의 한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중계여부가 결정되자 백남준에게 이번엔 제작비 40만 달러가 문제였다. 록펠러재단에서 17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자 아이디어를 내 케이지, 보이스, 커닝행, 긴즈버그가 만든 판화를 만들어 팔아 7만 달러를 충당했다. 이밖에도 서울 원화랑 정기용 사장이 4만 달러를, 프랑스방송과 KBS 등에서도 협찬했다.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 백남준은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래서 대중예술가와 고급예술가를 번갈아 등장시켜 동급으로 놓았고 '대중 쇼' 방식을 취했다. 이 난제는 누구도 풀기 쉽지 않은데 백남준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춤, 노래, 코미디, 퍼포먼스 등을 융합하며 탈장르를 시도했다.

<4> 거울을 들고 있는 1969년 미디어학자 맥루한(M. McLuhan)의 모습 백남준은 1967년 <신동아> 12월 호에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라는 제목으로 60년대를 읽은데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인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와 미디어의 권위자 '마셜 맥루한'을 한국독자에게 소개한다. 지난번 기사에서 위너는 길게 맥루한은 짧게 소개했지만 이번엔 맥루한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마셜 맥루한(M. McLuhan 1911-1980)은 캐나다 출신의 언어학자, 미디어학자로 우리시대 고전이 된 <미디어의 이해> 를 1965년에 냈고, 그의 탁월한 미디어이론은 정보기술혁명시대의 앞길을 예견해 단번에 그를 세계적 명사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그의 저서에서 맥루한은 '지구촌'이란 처음 말을 썼고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도 했다. 이는 미디어가 그걸 만든 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미디어와 그 기술은 '인간의 확장'내지 눈·코·귀 같은 '인간신체의 확장' 혹은 '우리자신의 확장'과 '우리의 감각·사고·기억을 확장한다"고 봤다. 맥루한은 언어학자답게 히틀러를 독일 영웅으로 만든 보다 집중적인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로, 산만한 TV는 '차가운 미디어'라고 명명하며 미디어를 분류했다. 또 그는 인류역사를 '구어문화·필사문화·인쇄문화·전자문화'로 구분하면서 전자시대에는 지구촌이 미디어로 하나의 부족이나 공동체가 되는 시대가 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5> 유럽에서는 68년 20세기의 분수령이 된 '5월 혁명(Mai 68)'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미디어의 발달로 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인가. 이 결과로 권력을 쟁취하진 못했지만 프랑스에선 대학 운영에서 교수와 학생이 반반씩 참여하는 교육민주화를 이뤘고, 노동계도 보다 개선된 최저임금보장 등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6> 이상사회 '텔레토피아' 여는 비디오혁명 :백남준아트센터에는 '메모라빌리아'라는 백남준의 '뉴욕 브룸거리 작업실'을 전시용으로 재현한 것이다. 예술혼을 불태우며 백남준이 이룬 비디오혁명의 현장을 한 눈에 보는 것 같다. 손때 묻은 전자부속품에서는 작가의 체취마저 느껴진다. /백남준은 "일방형 소통은 독재"라고 했고 1972년 '빙햄턴(Binghamton) 편지'에서는 "비디오 소통 혁명은 공간 대 공간, 혹은 평원 대 평원을 넘어 거침없고 혼선 없이 상호 소통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했다. 그는 세상과 어떤 장애도 없이 쌍방적으로 소통하는 게 바로 시대정신의 골자임을 비디오작품으로 강변했다. /50여년 밖에 안 되는 비디오아트는 이렇게 시각미술에서 기존의 물성개념을 벗어나 전자매체를 통해 시간을 서술하는 신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정착시켰다. 서양미술사에서 대상의 본질만 남기고 모든 걸 없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회화의 죽음을 상징하는데 이런 위기에서 미술을 구한 것이 바로 비디오아트다.

또한 이 혁명은 '기동성(움직이는 전자회화)'과 '즉시성(리얼타임)'이 특징이다. 붓이나 물감대신 TV로 표현하는 예술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패러다임이 엄청나게 바뀌는 시대에 맞게 인식을 넓혀주고, '텔레토피아'라는 이상사회의 단면도 제시한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1974)에서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가고 예술의 시대가 왔다. 68혁명 이후 바리케이드시대는 지났다. 다른 사람이 헬리콥터나 위성을 소유하는 상황에서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제는 저항운동도 예술적이라야 한다"며 우리시대는 예술가가 진정한 혁명가 천명

백남준의 제자 '빌 비올라'도 비디오아트에 대해 "비디오는 단순히 기록이나 녹화를 위한 도구가 아니고 세상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변형의 장치이다. 나와 세계 사이를 매개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7><백남준의 80년대 성공기&전성기>

[1] 1978년부터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다. 이어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발표하여 전세계에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 1988년 제3편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를 연달아 발표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독일관 작가로 초청된 백남준은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 올란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이 마비된 백남준은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국내외에서 다양한 전시를 열었다.

[2] 같은 해 독일 <포쿠스 Focus>지가 선정한 올해의 100대 예술가에, 1997년에는 독일 경제 월간지 <캐피탈 capital> 이 뽑은 세계작가 100인 가운데 8위에 올랐다. 1999년에는 미국 아트뉴스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의 작가에, 2000년에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2006년에는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으로 뽑혔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가 된 것은 단순히 당시로서 새로운 매체인 비디오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인 시간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체의 특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단지 미술의 조형 매체만이 아닌, 철학과 사회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매체로 활용하기 시작하여, 첨단기술매체와 인간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 상상하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8>시대를 성찰하고 문명도 비평하는 TV
백남준 I '쿠베르탱 Coubertin)' 여러 개 모니터, 철재, 네온, DVD 플레이어결합, 2004, 150×120×285cm 소마미술관 소장.

[1] 백남준은 쿠베르탱처럼 인류공동체를 꿈꾸는 사람을 좋아했다. 현재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어린이갤러리)에서 2014년 3월 25일부터 8월24일까지 이 작품이 전시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봤다면 백남준은 TV를 오감을 갖춘 인간의 연장으로 봤다. 백남준에게 TV는 회화이자 조각이고, 언어이자 기호이었고 또한 한 시대를 성찰하고 문명도 비평하는 지성인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예술이란 원래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닌가. 백남준은 TV를 오브제가 아니라 신경계가 작동하고 혈액이 순환하는 생명체로 봤기에 거기에 기와 혼을 불어넣어 그런 기계마저도 사람과 하모니를 이루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었다.

백남준은 또 전자예술을 기술을 쓰되 기술에 예속되지 않는 '반기술적 기술'방식과 미디어 사이의 경계를 넘는 인터미디어 방식 그리고 비선형적인 사이버네틱스이론으로 결합한 방향으로 진화시켜나갔다. 그러면서 TV가 돈벌이로만 악용되자 "TV가 우리 삶을 공격할 때 이젠 우리가 거기에 반격할 차례다"며 이에 반발했다.

<2> "TV 코뮌으로 하나 된 지구촌 건설 염원"'비디오합성기' 발명으로 새 도약

[1] 백남준이 60년대 후반 TV매체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이 상호공존 속 인종과 국경을 넘어 어떤 소통방식을 통해 인류공동체를 구현하려 했는지 알아보자 - 기자 말 60년대 세계격변기에 꽃핀 '비디오아트' 백남준 I '자석 TV' 1965. 뉴욕 캐널 스트리트 작업실에서 백남준이 자석으로 변형된 TV화면을 보는 모습 ⓒ 피터 무어 에스테이트/VAGA, NYC 백남준 에스테이트. 백남준아트센터소장. 이 작품은 TV외부에 자석을 놓고 관객이 그걸 움직일 때마다 다른 형태의 추상패턴이 보이도록 고안한 것으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참여 TV'가 된다백남준 I '자석 TV' 1965. 뉴욕 캐널 스트리트 작업실에서 백남준이 자석으로 변형된 TV화면을 보는 모습 ⓒ 피터 무어 에스테이트/VAGA, NYC 백남준 에스테이트. 백남준아트센터소장. 이 작품은 TV외부에 자석을 놓고 관객이 그걸 움직일 때마다 다른 형태의 추상패턴이 보이도록 고안한 것으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참여 TV'가 된다

1969 비디오합성기 발명

[2] 1969년 백남준은 록펠러재단과 보스턴 공영방송(WGBH-TV)의 지원을 받아 9년에 걸려 '영상마술사'라 불리는 비디오합성기 신디사이저(Paik-Abe Video Synthesizer for WNET TV Channel 13, 미국 MIT소장)를 아베(1932-)와 공동 개발한다. /

백남준이 이를 발명하는 지난한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달마의 고행에 비유했을까. 달마가 9년 동안 부동한 자세로 좌선하느라 배설물이 다리를 녹여 좌상의 부처가 되었듯 자신의 신서사이저 발명도 9년 동안의 'TV 배설물'의 축적이라고 했다. /이는 비디오아트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 형태와 색채를 무한히 변형시키고 다양한 추상화로 변주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전자터치방식으로 새 이미지를 창조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킨다는 의미가 강하다. 백남준 말대로 "다빈치처럼 정확하고, 피카소처럼 자유롭고, 르누아르처럼 현란하고,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고, 잭슨 폴록처럼 강렬하고,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인" 그림도 다 가능해졌다. /

1969년엔 '보스턴공영방송'에서 백남준 외 앨런 카프로 등 6인과 함께 '매체는 매체다(30분)'를 발표해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TV방송에서 터부시 하는 사회비평이나 에로티시즘까지 다루면서 대중취미가 아닌 보다 예술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밖에도 '전자오페라 1번' 등을 발표한다.

[3] 1969년에 백남준은 하워드와이즈갤러리에서 '창조적 매체로서 TV'라는 제목으로 무어만과 함께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도 공연했고 또한 관객이 TV앞에 설치한 카메라로 자신을 비춰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관객이 직접 조절할 수 있게 하는 '참여TV'도 선보인다. 날로 그의 예술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갔고 결국에는 이를 증명하듯 미국에서 처음으로 그의 '참여TV'가 팔려나갔다.

[3] 1969년 미국에서는 TV전성시대를 맞아 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안방에까지 전해지면서 반전운동은 극에 달한다. 반면 그해 7월 20일에는 미국의 우주비행사가 인류최초로 달에 착륙하여 첨단우주과학의 승전보를 알리는 인류역사의 신기원을 이룬다. 1960년대 백남준의 실험적이고 전위적 전자아트는 이런 유럽의 68혁명과 미국의 과학혁명이라는 맥락에서 태어난 것이다. 휘트니미술관이 편저한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 1950-2000)> 를 보면 "비디오아트는 60년대 미국의 반체제문화 속 세 가지 경향 즉 뉴 테크놀로지 통해 확장된 지식에 대한 유토피아적 욕망과 반전운동과 주류텔레비전의 제도적 권위에 대한 반항심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3> 비디오합성기, 비디오아트에 날개 달아주다 /보스턴 공영 TV방송국에서 백남준에서 기능에 대해 설명하는 '아베 슈아' 그리고 이 방송 프로듀서 '프레드 바직'. 왼쪽에는 백-아베 비디오합성기(1969-1972). 2014년 3월 백남준문화재단 국제심포지엄에서 찍은 사진

<3> '비디오(TV) 코뮌', 본격적 가상 인터넷 시작

[1] 비디오합성기로 만든 첫 작품 20011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비디오(TV) 코뮌' 중 첫 장면을 찍은 것 백남준은 '보스턴 공영방송'에서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드디어 1970년에는 비틀즈, 조지 해리슨 음악과 함께 자막도 없이 통째로 4시간짜리 일본방송 등을 내보내 동서양간 균형감 있게 문화를 주고받은 장을 마련하며 'TV실험을 위한 비디오 코뮨(Video Commune: Beatles from beginning to end_An experiment for TV)을 생방송한다. 여기서 백남준은 전자색채와 피드백도구를 활용해 색채의 폭발력이 가히 초현실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움직이는(kinetic) 리듬감에 변화무쌍한 추상이미지도 연출해 뉴미디어아트라는 새로운 영역과 그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는다. 문화민주주의자인 백남준은 TV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비록 군사용이거나 정치권력과 경제이득 의도였다 해도 이를 뒤집어, 보다 교육적이고 철학적이고 예술적 도구로 활용해 TV를 인간화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맥루한처럼 전 인류의 다양한 문화가 보다 평화롭고 평등하게 상호 공존하게 되는 인류공동체를 꿈꾸었다. 백남준이 이런 사고를 하게 된 배경은 그가 어려서 겪은 식민지경험이나 한국전쟁 같은 분단의 아픔을 다른 나라사람이 알 리 없고, 홍콩, 일본, 독일 등에서 유학할 때 체감한 텃세라는 게 결국 국가 간 정보교환의 부족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번역 없이도 소통이 가능한 춤과 음악 같은 콘텐츠가 작품에 단골메뉴로 쓴다. 2011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열린 '비디오(TV) 코뮨전'에 전시장면 그러면서 백남준은 공영방송이 오히려 국가주의를 강조해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을 낳고 타문화에 대한 무지로 세계평화를 위협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서구사회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단절과 불통을 가능한 해소하려했다. 이에 대해 1970년 '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공동시장'이라는 글에서도 백남준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TV공영방송이 자국의 문화만 소개하고 상이한 문화를 알리는데 편협함을 보인다면 세계평화는 위협받을 것이고 […]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한 것은 근본적으로 아시아에 대한 정보부족에서 온 것이다"이라고 지적한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도 이에 대해 "백남준의 이런 철학은 '해원상생(解寃相生)', 즉 원한을 풀고 서로 살자는 뜻일 것이다. 백남준이 바라는 세상은 세계적 차원의 상호이해, 투명하고 전쟁 없는 사회, 서로 연대하는 사회, 지구촌을 향 행복한 꿈이 어우러지는 그런 이미지세계는 현대의 만다라 풍경 같다"라고 해석했다

1971년 

[2] TV와 비디오 등 뉴미디어 시대 도래 미국 '타운 홀 바가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1968 백남준은 1960년대 후반 뉴욕 보니노 갤러리, 하워드와이즈갤러리 등에서 '소리의 시각화를 시도'하는 비디오아트와 행위음악 등을 다각적으로 실험한다. ▲ 미국 '타운 홀 바가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1968 ⓒ 피터 무어 에스테이트/VAGA, NYC 백남준 에스테이트. 백남준아트센터소장. 백남준은 1960년대 후반 뉴욕 보니노 갤러리, 하워드와이즈갤러리 등에서 '소리의 시각화를 시도'하는 비디오아트와 행위음악 등을 다각적으로 실험한다. [3] 그리고 백남준은  '종이 없는 사회(the paperless society)'1970대 발표한라는 글에서 "철학이 수세기 동안 유지해왔던 헤게모니를 되찾으려면 양피지 문헌학 대신 지금 같은 전자공학상황(모니터)으로 노출돼야 한다"며 오늘날 인터넷신문을 예고했다.

<4> 1973년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전 세계가 함께 노는 '맘판 놀이굿'
1970년에 선보인 '비디오 코뮌'의 완결판으로 그 내용과 기법에서 훨씬 더 업그레이드됐다. 제목에 '글로벌'이 들어가 있는데 그냥 제목만이 아니라 실제로 세계 55개국에서 방영되었다./기존의 회화가 구도와 색채, 형태가 중요하다면 이 전자회화는 빛과 소리,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간예술에 시간적 요소가 더해진다. 그리고 백남준은 지금은 누구나 다 익숙한 '글로벌' 개념을 도입한다. 이와 함께 "앞으로는 'TV가이드'가 맨해튼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워질 것'이라 주장하면서 'TV케이블시대'도 예견했다./'글로벌 그루브'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와 지식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다다익선'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킬 만큼 영상의 양과 질이 풍부해 '이미지천국'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 선가 당시 미국에서 백남준은 미디어에 대한 신비주의와 과대망상, 지구촌에 대한 환상에 빠진 작가라는 좀 생뚱맞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글로벌 그루브', 

1974년 백남준은 자신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글로벌 그루브'가 뭔 뜻이냐고 묻자 "70년대 글로벌 음악축제로 세계 모든 나라가 케이블 TV로 연결될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미리 예견한 일종의 상상적 경관"이라고 말했다. 풀어 말한다면 '지구촌시대 전 인류가 함께 모여 즐기는 환희의 만판놀이'라는 뜻이 된다./여기에서 활용되는 기법은 화면을 왜곡하는 것뿐 아니라 두 개의 영상을 혼합하여 뒤섞는 것이나, 백색광을 넣어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조합하는 것, 출력한 걸 재구성해 피드백효과를 주는 것 등 다양하다. 또한 그 속도감은 요즘 봐도 엄청나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도약하는 시발점이 된다. 여기에 그의 관심, 기법, 특성, 신념, 철학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콘텐츠는 마치 종잣돈 혹은 원금과 같은 역할을 해 나중에 그의 대표작인 '굿모닝 미스터오웰'이나 '바이 바이 키플링'과 '다다익선' 등에 단골메뉴로 재활용된다./

백남준은 이 작품의 콘텐츠에 전 지구적으로 편향된 민족주의 경향을 없애고, 국가 간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를 극복하려고 번역이 필요 없는 춤과 음악을 가능한 많이 넣는다. 예컨대 서양의 록음악과 탭댄스는 물론이고 미국 인디안 나바호족 북소리, 일본 오키나와 전통음악, 재미무용가 이선옥씨가 선보인 한국 전통춤 등이 그것이다.

<5> 시공간 뛰어넘어 쌍방소통하는 '정보아트'백남준

비디오아트의 신기원 또한 백남준은 경계 없는 굳건한 공존의 지구촌이 되기를 갈망하며 인종문제, 세대갈등 등을 지구촌의 공동이슈로 다룬다. 어떻게 하든 국가 간 문화차이를 이해시키고 그 경계를 넘어 지구촌 사람 누구나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려 한다.<4>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TV첼로(1971)'를 연주하는 샬럿 무어먼이 보인다. 현란한 색채오 변화무쌍한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지구촌 다문화 실어 나르는 축제의 장/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이 작품에 나오는 부분부분을 모음곡처럼 편집한 것이다.

<6>그런데 '글로벌 그루브'에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관객도 이런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마치 작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된 이런 콘텐츠를 자기 나름의 서사로 재구성해 다르게 구상해 보라고 권고하는 것 같다. 여기서 백남준은 '동양의 정보를 서양에 제대로 전달해 동서양이 한 가족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다. 독일 록 연주, 페테르부르크 음악, 빈의 재즈 오케스트라, 브라질 삼바 춤, 예루살렘 콜테 마마 무용에 중국의 베이징무술과 한국의 사물놀이, 일본의 전통 음악 등이 소개된다. 초대형 작품을 하다 보면 항상 돈과 사람이 문제가 된다. 백남준은 손수 삼성을 찾아가 1천 대 TV 지원을 약속받고 나니 설계자 선정이 또 남았다. 마침 백남준 경기중학교 후배인 건축가 김원이 발 벗고 나서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백남준은 국내에 거주하지 않아 지구 반대편에서 2년간 손발을 맞춰가며 고생한 끝에 완성했다.

<7> 뉴욕 10년, 비디오혁명으로 미국 미술계 강타. 뉴욕미술계 기린아로 부각(1971-1974), 백남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생활 10년 만에, 중년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그루브' 등 획기적인 비디오작품을 발표해 뉴욕미술계의 지축을 흔들다

백남준은 마흔 줄로 들어서는 70년대 뉴욕미술계에서 작가로서의 자리매김이 시작된다. 특히 1967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성과 에로티시즘의 금기를 깬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공연으로 (나중에 선고 유예가 났지만) 샬럿이 체포·구금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로써 두 사람은 예술의 자유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된다. 백남준은 1967년부터 록펠러재단의 지원 하에 4년여만에 '슈아 아베'와 함께 1001가지의 영상편집이 가능한 비디오합성기를 내놓았다.

그 기술로 1970년 '비디오 코뮌'을 발표했다. 1971년에 전자아트전이 열린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오노, 레넌, 아베 등과 함께 찍은 백남준 사진에서도 그만의 작가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백남준은 미국대중문화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었고 그런 감각과 친화력으로 갤러리나 동료작가로부터 호응과 지지를 많이 받았다. 백남준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1963년 독일에서 충격적인 '첫 전시'를 연 지 10년만인 1973년 '글로벌 그루브'를 선보였다. 

<5>1983년은 첫 '위성아트' 위한 폭풍전야 
[1] 50살이 된 1982년 백남준은 이렇게 뉴욕과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전 지구적으로 충격을 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런 면에서 1983년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와 같은 해라 할 수 있다./백남준은 이미 'TV'를 예술화했지만 이번에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예술을 상상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 백남준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케이지를 찾아가 그들 설득한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막을 이용우 미술평론가가 글로 남겼는데 그걸 여기 소개한다.

 

[2] 백남준은 <예술과 통신> 전시 도록(현대화랑 1995)에 '별들의 랑데부'라는 글에서 '칠월칠석'에 황소를 끄는 총각 별 '견우'와 베를 짜는 처녀 별 '직녀'가 여름밤 꿈 같이 만났듯 동서가 그렇게 랑데부하는 이야기로 번안했다고 밝힌다. 이런 전설은 백남준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백남준은 50대 초반인 80년대 전반기에 19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과 1982~1983년 퐁피두센터 회고전, 1984년 위성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을 연이어 발표해 전성기를 맞는다. 뉴욕, 파리에 이어 서울에서도 세계적 작가로 떠오르다.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인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진실로 난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실험미술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인데 마침 뉴욕 보니노갤러리가 운 좋게 그를 받아줘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당시로는 상업성이 없는 실험미술인 전자예술(Electronic Art)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6>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 감시와 처벌 사회 대안 <굿모닝 미스터오웰> 

[1]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왜 생방송인가?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왜 백남준은 화면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이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을까? 1987년 그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에베레스트나 알프스빙벽에 도전하는 이유가 위험한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열정 때문이 아닌가. 프로메테우스와 콜럼버스 이래, 이런 열정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라고 대답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게 아방가르드 정신인데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작가적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미래의 빛(A Satellite)'이라는 뜻이 담긴 '위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미래를 사유하는 자로서 경계 없는 지구촌을 그려왔다.

<2>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감시와 처벌 사회 대안 공동체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에 소개된 그의 사진과 그의 어록(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한 것임.

[3] 미술사에 유래 없는 기념비적 사건 '2천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년 11월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우여곡절 끝에 1984년 1월 1일 뉴욕(정오), 샌프란시스코(오후 3시), 파리(오후 6시)를 동시에 연결해 한국, 일본,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 11개국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이는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위성오페라 쇼로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4] 이 프로젝트는 뉴욕에 있는 '공영방송(PBS/WNET)'이 주관했는데 당시 방송제작자 중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거라 긴장했고, 뉴욕과 파리의 위성을 잇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화면이 자주 끊겨 환희와 실망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시청률이 초반에는 7%까지 올라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위성 쇼는 뉴욕의 사회자인 플림튼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을 만날 시간이네요. [...]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TV는 우리의 뇌를 먹지요, 하지만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봐요, 당신은 좀 틀렸군요"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5] 이 작품명은 영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1946년부터 2년간 쓴 차용한 것인데, 이 내용은 1984년에 되면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겨있다.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그의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하긴 오웰의 예측이 다 틀린 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편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첨단미디어기술'이 개발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쌍방소통이 가능할 거로 낙관했다. 그러나 오웰은 '인터넷-SNS시대'가 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했다.

[6] 백남준은 프로젝트 방영 후에도 빚 갚느라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개인파산을 전제로 부채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1984년 6월 귀국했을 때 만난 유치원친구 이경희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는 데 조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려 했으나 그런 한국 돈은 쓸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

[7] 위성아트는 멀티 공간, 멀티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백남준] 굿모닝 Mr. 오웰, '견우와 직녀'에서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아직 좀 멀었다.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우리의 설화인 '견우와 직녀'에서 영감을 받았다. 위성아트의 상상력은 어디서 왔나? 

[8] 김홍희·천호선 부부 현장에서 참관기 독일 '비스바덴미술관(1984.07.02~1984.12.08)'에서 열린 백남준 전을 보러 온 김홍희·천호선 부부에게 백남준이 자신의 작품 'TV로댕'을 직접 설명해주는 모습. 가운데가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남편 천호선 씨는 사진에 찍히지 않았다. 끝으로 백남준이 퐁피두센터 앞에서 이 작품을 총지휘할 때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과 그의 남편 '천호선'씨가 어떻게 보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1980년 김 관장의 남편은 당시 뉴욕 한국관공보관이었고 두 부부는 거기서 우연히 전위무용가 '커닝햄'의 후원회장인 '툴' 여사를 알게 돼 그 소개로 백남준을 만난다. 마침 뉴욕 '키친'에서 열린 백남준 전위예술을 보고 전율을 느낀 김 관장은 적지 않은 나이에 미술사 전공자로 변신한다. 1983년 말 남편이 마침 덴마크공보관으로 발령이 나 유럽에 거주했고 그래서 1984년 첫날 퐁피두센터에서 백남준이 총 진행하는 걸 다 볼 수 있었다. 그 추억을 김 관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한다. "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된 후라 운 좋게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년 1월 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 본부에서 교통정리하듯 뉴욕이나 파리에서 온 화면을 내보내지고 받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편집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졌어요.

<7> 1986년 동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에 반발
[1] '바이 바이 키플링'은 영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시인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이니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라고 한 노래에 반발하며 만든 작품이다

1986년 바이바이 키프링

[2] 뉴욕에서는 미국의 팝 작가 '해링', 프랑스 조각가 '아르망'이,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건축가 '이소자키', 패션디자이너 '이세 미야케'가, 그리고 한국의 고싸움, 사물놀이, 정경화와 정명훈의 연주 장면, 황병기 가야금 연주와 한강 노들강변이 소개됐고, 아시안게임 마라톤경기가 최초의 여성 마라톤주자의 해설로 중계됐다. 백남준도 이 프로그램에 등장해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와 지구본을 주고받는 게임을 보여주며 지구는 평화의 터전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두 작가의 인연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침 그해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 포함 2인전이 기획돼 그는 작가를 모색 중 30년 후배인 강익중을 추천했다. 백남준은 자신이 독일에 있으면서도 휘트니미술관 관계자에게 "난 괜찮으니 강익중에게 더 좋은 자리를 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팩스를 보낼 정도로 그를 배려했다.

[3] "동은 동, 서는 서가 아니라 지구는 하나다" 50대 후반기, '정보아트' 꽃 피우다 (1985~1989)백남준은 80년대 후반기 '전자오페라' 3부의 완성과 함께 정보 지식 시대에 걸맞은 하이테크(첨단기술)와 위성 아트를 결합해 '정보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을 꽃피우다.
 백남준은 동은 동이고 서는 서가 아니라, "동이 서이고 서가 동이 될 수 있다"는 동양의 일원론적 철학에 근거해 서구인이 가지는 아시아·아프리카를 미개국으로 보는 문화 제국주의적 관점을 한방에 날려버리며 이에 대한 고별을 선언했다.

위성오페라 '3부작'으로 지구가 하나임을 증명 '바이 바이 키플링'에서 '제국TV' 안에서 얼굴을 내민 백남준. 1985-1986. 차도르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건 동서 문화의 불통으로 서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이슬람문화권을 말할 수도 있고, 이슬람문화권의 여성의 억압을 상징할 수도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중에 근접 촬영한 전시물 위성오페라 '3부작'을 만든 백남준의 의도는 '마르코 폴로 이후 동서가 동시에 볼 수 있고, 시공간 개념을 넘어 동서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1부 '굿모닝 미스터 오웰', 2부 '바이 바이 키플링', 3부 '손에 손잡고'로 마무리된다.

[5] 1986년 사건 중 백남준의 절친한 지기인 보이스가 1월 23일 타계한 일은 뺄 수 없다. 백남준은 그에 대한 오마주로 모자를 쓴 보이스를 '로봇'으로 만들고, 1985년 일본에서 공연할 때 같이 찍은 사진으로 병풍을 제작해 거기에 '보이수(普夷壽)'라는 이름도 써 넣었다. 1990년에는 보이스 '추모굿'도 벌였는데 이는 다음 기사에 소개한다.19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 때를 맞춰 나온 '바이 바이 키플링'은 1986년 10월 3일 서울, 뉴욕, 동경을 연결해 위성으로 방영됐다. 한·미·일 3국이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해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위성 쇼 사회자는 86아시안게임의 의미와 88올림픽 게임 그리고 한국이라는 개최국의 의미를 같이 소개했다.

<8> 다양성을 찬미한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

[1]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맞아 백남준은 예술과 스포츠도 맛있게 칵테일 할 수 있다며 인류 공존의 정신이 담긴 '손에 손잡고'를 선보였다. 위성아트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소통을 이루는 매체'임을 알린 것이다. 여기선 구소련의 작품도 소개해 이념을 넘어 지구를 하나로 감싸는 '참여TV'의 단면도 보여줬다. 백남준은 당시 스타급 연예인과 예술가 100여 명을 그것도 1월 1일 한 곳에 모으는 초능력을 보였다. 뉴욕에선 '앤더슨, 긴즈버그, 무어먼, 케이지, 커닝햄' 등이, 파리에선 '사포, 보이스, 삭스, 팅겔리, 생팔' 등이 출현했다. 백남준은 전설적 전위무용가 '커닝햄'을 14년 만에 방송에 출현시켰고, '보이스'도 6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손에 손잡고

[2]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백남준전 때 벽에 게시된 68자료와 사진과 표어. "상상력에게 모든 권력을"이라는 표어가 퍽 인상적이다. 창의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간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지겠죠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백남준전 때 벽에 게시된 68자료와 사진과 표어. "상상력에게 모든 권력을"이라는 표어가 퍽 인상적이다. 창의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간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지겠죠 

[3] 또한 1988년 10월 26일 제24회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높이 18.5m, 지름 7.5m의 거대한 철골에 1003대(10월 3일 개천절) TV 모니터를 설치한 총 7단 규모의 철골 구조로 만든 기념비적인 백남준 작품 중 하나인 '다다익선'을 선보였다. 부인 시게코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을 구상할 때 러시아혁명시절 구성주의 작가이자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디자인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에서 착안해 제목을 '타틀린을 위한 헌정'으로 붙이려 했으나 이 제목이 한국에서 말썽의 소지가 있자, 보다 함축적인 뜻이 담긴 '다다익선'으로 작품명을 바꾼다.'다다익선'이라는 제목은 민주 사회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정보 사회에서 TV·신문·잡지·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해석도 가능해 잘 어울린다

<9>"한반도에 아직 호랑이는 살아있다" 

백남준 왈 "한반도에 아직 호랑이는 살아있다" 이 작품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남북 대치라니 답답하다. 종전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만 생기고 한반도 평화가 더 가까이 올 것인데 갑갑하다. 백남준은 "드디어 호랑이가 제대로 운다"라고 좋아했다. 백남준은 우리가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지만 아직 우리는 기죽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다.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 여기서 호랑이는 백남준 자신을 말한다.

이 위성 아트는 새 천년 첫날, 전 세계 77개국 방송망 탔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도 많지만 백남준은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는 남북의 사람들은 아직도 기죽지 않았다>를 1999년 자정 12월 31일 자정부터 2000년 1월 1일 위성 아트로 선보였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여기서는 약소국이라는 한국의 강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0년] 모바일아트', '네온(빛) 아트', '레이저아트'로 발전된다. 그 자신이 이런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는 건 "중심만 보려는 농업중심의 중국과 달리 선사시대부터 우랄 알타이와 시베리아에서 네팔, 한반도, 라플란드 등에까지 말을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더 멀리 있는 지평선을 보려고 한 유목중심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다"이라고 좀 엉뚱하고 재미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영화, 사진 등 올드미디어가 아닌 텔레비전, 비디오 등 뉴미디어로 주류미술계를 능가해 인류문화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알린다. 이런 미디어아트는 훗날 '

백남준의 전자아트는 이렇게 성격상 세상을 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여러 나라의 풍부한 문화나 예술, 동서양의 철학과 과학 등 다양한 정보를 담았다. 그래서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을 '정보아트(Information Art)'라고 지칭하는가 보다. /

그리고 백남준은 우리 시대에서 불쾌한 것은 정보의 입출력에서 균형감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통계에 의하면 우린 매년 4만 가지 광고를 봐야 하지만 그중에 40개 광고방송에서 선전하는 상품만 구매할 뿐, 우린 그렇게 정신병원 소파에 누워있는 금붕어"라며 시청자가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돼 볼모로 잡히는 걸 늘 못마땅해했다. 

 두 작가의 인연은 휘트니미술관 '2인전'에서 1994년에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강익중 2인전'이 열렸을 때 두 작가의 모습. 부자(夫子)처럼 많이 닮았다. 다익선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태어났다. 

2009년 2월 6일 강익중 작가는 백남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의 바깥 벽면에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까지 들리는 음향을 부착하고 3×3인치 패널로 만든 '삼라만상'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두 작가가 극적으로 만나면서 기운생동하는 멀티 아트의 대장관을 연출했다.

<기타사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