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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어록집] <16강> 남준 남긴 말 그리고 받은 '상'

<수상내역> 1981-2001 독일에서 주는 모든 미술상 다 받았다. 그밖에 베니스 교토상 등 많은 상을 받다

*2001 제8회 빌헬름 렘브루크상, 독일 두이스부르크시
2000  내셔널 아트 클럽 어워드(National Arts Club Award) 수상
2000 금관문화훈장
1998  교토상 수상
1998  미국 뉴욕주지사 예술상
1998 아메리칸 필름인스티튜드 인디펜던트 필름 앤드 비데오상
1998 미국 아티상
*1998 독일 윌리 그로망상
*1997 괴테 하우스, 괴테 메달(Goethe-Medaille für Kunst und Wissenschaft) 수상
1996 호암상 수상
1996 제1회 월간미술대상 큐레이터 부문
1995 제5회 호암상(예술부문)
1995 제6회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국제부문 예술문화상)
*1993 45회 베니스 비엔날레(XLV Venice Biennale) 황금사자상(Golden Lion) 수상
1992 유네스코 피카소 기념상(UNESCO Picasso Medal) 수상
*1991 카이저링 상(Goslarer Kaiserring) 수상
*1989 쿠르트 슈비터스 상(Kurt Schwitters Prize) 수상
*1981 베를린 미술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 Berlin), 빌 그로만 상(Will Grohmann Prize) 수상

백남준 이야기 <백남준&친구들> Abstract and Keywords : 위성아트로 우주적 '참여와 소통' 넓히다 
백남준 이야기 <백남준&어록집> Abstract and Keywords : Future is Now&현재가 유토피아 https://www.youtube.com/watch?v=PVt21ZDr-Hc&t=2211s 

seulsong.tistory.com/1228

 

[백남준] 그의 어록집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위 세계 일류(탈영토제국주의)가 되면 조국이고 뭐고 없다고" -1994년 백남준 인터뷰 중에서.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이 참으로 멋지다. 내가 정치가가 되었다면 감옥을 갔을 것이고 내가 사업

seulsong.tistory.com

prenjp.ggcf.kr/njpack/saying

 

어록 | 백남준아트센터

어록 | 백남준아트센터

prenjp.ggcf.kr

백남준의 명언 "미래가 지금이다"

<지난 월요일> 본문 우주쇼 전자오페라로서의 위성아트 계보한 '소통과 참여'는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소통의 반대 '소외' // 참여의 반대 '고립(단절과 공포)'

백남준, 1988년 이런 글을 썼다. “비디오는 누가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동재산이다. 비디오는 작품의 독점에 바탕을 둔 체제로 작동하는 예술 세계에서 힘들게 버텨내고 있다. 현금을 내고 사가는 작품, 순전히 과시하고 경쟁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예술세계에서 말이다.”

<15> [백남준&위성쇼] I984-1986-1988-2000년 우주오페라 '위성아트'로, 동서 하나다 <16> [백남준&어록집] 그는 이렇게 말했다. <17> [백남준&사이버] 사이버(네틱스) 디지털 세상 노마드시대 <18>[백남준&돈철학] 인간이 돈의 주인되는 삶<19> [백남준&사기론] 세상을 교란시키는 미술: 백남준[백남준&사이버] <17> 사이버(네틱스) 디지털 세상 노마드시대 [백남준&사기론] <18> 교란미학의 창시자로서의 백남준
[백남준&돈철학] <19> 돈의 주인으로 사는 삶의 예술(Savoir Vivre) [백남준&뉴욕행] <20> 1964년 미국전성기에 뉴욕 도착 50년만에 백남준 만나다

<백남준 이야기(에피소드)> 인트로

 2017년 5월 23일 베를린 사진

[1] 2017년 5월 23일 베를린에 갔을 때 미테 지역에 있는 독일 국립미술관(신관과 구관) 옆에 미술전문서점이 있었다. 앞으로 기차타고 가 보세요. 그 주인이 내가 백남준 책을 찾으니까 하는 말이 "백남준은 한국보다 외국에서 훨씬 더 유명하죠". 라는 뼈아픈 말을 나에게 건넨다. 나는 너무 창피했다 겨우 찾은 책이 왼쪽의 것 그러나 전부 백남준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사진> 베를린 국립미술관 근처 미술전문서점

[2] 백남준 부친 백낙승(일본에서 메이지 대학 법대와 니혼대 상대를 나온 지식인)이 운영하는 태창방직 사진 1920년대 방직기가 300여대(아래사진)가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당대 지금 삼성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부잣집 막내아이들이었다 아래 사진은 그의 유치원 다닐 때 캐딜락(유치원 동창인 이경희여사와 함께)을 타고 다니고 당신 한국에서 캐딜락이 2대가 있다고 당시에 차 수리공이 10명이 되었다고(당시는 차가 자주 고장이 나서 수리공이 많이 필요했다고) 동대문집이 3천평이나 되고 그러니 백남준 부친이 사업가로써 친일을 했다기보다는 불가피하게 일본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백남준은 그런 것이 싫어서 굶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예술가가 되려고 결심했다는 고백했다
아버지가 친일이냐 아니냐 논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기에 일제시대 친일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일본과 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그런 점이 싫어서 예술가가 되려고 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친일이란 아주 적극적이고 악질적인 친일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식민지시대에는 대부분 사람들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도 하고 눈치를 보며 산 것은 사실이다

<진화, 혁명, 결의> 4번째 작품 ‘로베스피에르'

[3] 백남준 유럽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프랑스 대혁명의 당위성에 대해 물으면 그 폭력성을 비판하다. 석판화 연작 <진화, 혁명, 결의>의 네번째 작품 ‘로베스피에르’. 18세기 프랑스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를 상징하는 로봇 그림 양옆으로 ‘혁명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나?’란 문구를 써 넣었다.

<백남준 정치에 관심이 높은 예술가 정치적 촉이 예민한 작가>익살스럽고 심오한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볼거리는 프랑스혁명을 다룬 석판화 연작이다. 1989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혁명 200주년을 기념한 영상 조형물 작업을 의뢰받은 뒤 구상한 작품이다. 당대 혁명가 8명을 상징한 로봇 이미지 석판화 연작 8점이 나왔다. 로봇 그림마다 여러 나라말로 된 문장과 암호 같은 기호를 가득 적은 백남준의 필적이 작은 화면에 함께 들어가 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 조만식

혁명기 암살된 마라를 다룬 두번째 작품을 보면 로봇의 얼굴 부분에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 조만식 같은 국내 해방 공간의 주요 정객의 한자 이름과 ‘죽는다’ ‘바보’ 같은 문장·단어를 뒤섞어 적었다.

이어 사람 얼굴이 들어간 티브이 모니터와 뜻 모를 기호를 줄줄이 그려놓아 마치 한국과 프랑스의 혁명사가 얽힌 암호 그림 같은 인상을 준다.

프랑스 혁명가 조르주 당통을 다룬 석판화에는 “나는 자식을 하나도 안 만들었으나, 로보트는 100마리나 만들었다”는 다소 엉뚱한 술회를 털어놓으며 역사의 무상을 설파한다. 석판화 외에도 컬러텔레비전 초창기에 나왔던 화면 조정 화면을 캔버스에 재현한 뒤, 그 위에 김소월의 시구나 ‘가나다라’ 등 한글 자모를 적은 작품도 보이는데, 선승의 게송이나 화두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어 등으로 적은 작품 속 문장과 기호를 탐구하는 ‘작가 도상학’의 지평이 열릴 수 있을까. 미술사가나 기호학 전문가들이 주목한다면, 백남준이라는 거장의 깊고 넓은 내면을 새롭게 이해하는 통로가 생길 듯하다. -한겨레(노형석)

오늘 2부 본론에서는 백남준의 말 어록에 대해서 소개

-백남준(1962) 30살 발언: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내가 서구를 다 쓸어버릴 황화다)"
-
백남준(1992) 60살 발언: "서양의 룰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자신감 넘치다
이 두 마디로 서구와 모든 게임이 끝났다. 그의 어록에 대해서 소개

[백남준&어록집] <16> 남준파이크, 이렇게 말했다.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Yellow Peril C'est Moi!)" 황색재앙이란 뭔가?
몽골이 전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유럽까지 쳐들어갔다 헝거리까지 원정을 간 것이다 헝거리 사람들 몽골군의 말이 빠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3달 안에 쳐들어오겠지 하고 있었는데 하루만에 헝가리를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겠는가 그게 바로 황색재앙이다. 유럽미술을 다 쓸어버릴 미술의 황색재앙, 그게 바로 나다라는 소리다. 정말 큰 소리다

<1>1963년 TV등장 <2>1964년 비디오 등장<*>1968 유럽 혁명기(아래사진)<3>1969년 비디오 합성기 발명<4>1970년 위성아트 등장 비디오 코뮌<5>1973년 글로벌 그루브<*>1974년 TV부처와 정원 성공<*>1978년 뒤셀도르프 교수<*>1982년 '휘트니' 회고전 성공<6>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7>1986년 바이 바이 키프링<8>1988년 손에 손잡고<9>2000년 호랑이 살아있다.

정치만큼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한 분야가 없다

"상상력에게 모든 권력을"이라는 68표어가 퍽 인상적이다. 창의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에게 권력이 간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지겠죠

<1> 백남준의 70-80년대 위성아트 나온 시대배경

[1] 맥루언 지구촌(그가 발명한 언어) 글로벌 개막 1960년대 백남준의 실험적이고 전위적 전자아트는 이런 유럽의 68혁명과 미국의 과학혁명이라는 맥락에서 태어난 것. 
|휘트니미술관이 편저한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 1950-2000)> 를 보면 "비디오아트는 60년대 미국의 반체제문화 속 세 가지 경향 즉 1) 뉴 테크놀로지 통해 확장된 지식에 대한 유토피아적 욕망과 2) 반전운동과 3) 주류텔레비전의 제도적 권위에 대한 반항심에서 태어났다(쌍방소통)"고 적고 있다.

<미국의 세기(The American Century, 1950-2000)> 

[1] 백남준에게 참여와 소통을 에스페란토였다.
이를 통해 백남준은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맥루언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인 '참여와 소통'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누구나 즐기는 '댓글' 같은 게 백남준이 상상한 '참여와 소통'의 '에스페란토(국제어)'였다

백남준의 말 중 하이라이트 민주주의가 뭐냐? "말대꾸(쌍방소통)하는 것" 그리고 가장 취약한 것 혹은 가장 연약한 것을 연결시키고 소통시키는 것이 그의 철학적 테마 
<백남준 주제는 왔다갔다 통신의 소통과 물류와 사람의 유통 이런 게 관심거리다>
1993년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요원들과 작업하는 모습 진짜 장난꾸러기는 여기에 있군요 이것 타고 울람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 왔다갔다 하겠다는 소리죠. 노마드 작가로서 재미있는 점은 자연 반 문명 반 둘의 조화에 두고 있다. 뒤에는 바로 단군이 보이네요 정식이름은 '스키타이 단군'이죠 즉 우리가 유목민의 후손을 말하고 있다.

거울을 들고 있는 1969년 미디어학자 맥루한(M. McLuhan)의 모습
[2] 60년대 마셜 맥루한(M. McLuhan 1911-1980)은 캐나다 출신의 언어학자, 미디어학자로 우리시대 고전이 된 <미디어의 이해>를 1965년에 냈고, 그의 탁월한 미디어이론은 정보기술혁명시대의 앞길을 예견해 단번에 그를 세계적 명사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의 저서에서 맥루한은 '지구촌'이란 처음 말을 썼고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도 했다. 이는 미디어가 그걸 만든 이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남준은 1967년 <신동아> 12월 호에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60년대를 읽은데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인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와 미디어의 권위자 '마셜 맥루한'을 한국독자에게 소개했다. 지난번 기사에서 위너는 길게 맥루한은 짧게 소개했지만 이번엔 맥루한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또한 미디어와 그 기술은 '인간의 확장'내지 눈·코·귀 같은 '인간신체의 확장' 혹은 '우리자신의 확장'과 '우리의 감각·사고·기억을 확장한다"고 봤다. 맥루한은 언어학자답게 히틀러를 독일 영웅으로 만든 보다 집중적인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로, 산만한 TV는 '차가운 미디어'라고 명명하며 미디어를 분류했다. 또 그는 인류역사를 '구어문화·필사문화·인쇄문화·전자문화'로 구분하면서 전자시대에는 지구촌이 미디어로 하나의 부족이나 공동체가 되는 시대가 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위성아트도 바로 미디어의 확장 중 대표적 예이다.

[2] 1978년부터는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고,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다. 전성기 진입하다 이어 80년대 1984년 제1편,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발표하여 전세계에서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 1988년 제3편 ‘손에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를 연달아 발표했다

1986년 제2편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ling)’ 뉴욕에서 시연 비디오 콘텐츠 제작 과정

<2> 시공간 뛰어넘어 쌍방소통 '정보아트' TV

백남준 I '쿠베르탱 Coubertin)' 여러 개 모니터, 철재, 네온, DVD 플레이어결합, 2004, 150×120×285cm 소마미술관 소장. 위성아트 그의 작품은 늘 우주와 긴밀하게 연결

[1] 백남준은 쿠베르탱처럼 인류공동체를 꿈꾸는 사람을 좋아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봤다면 백남준은 TV를 오감을 갖춘 인간의 연장으로 봤다. 백남준에게 TV는 회화이자 조각이고, 언어이자 기호이었고 또한 한 시대를 성찰하고 문명도 비평하는 도구 같은 것이다.  예술이란 원래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기. 백남준은 TV를 오브제가 아니라 신경계가 작동하고 혈액이 순환하는 생명체로 봤기에 거기에 기와 혼을 불어넣어 그런 기계마저도 사람과 하모니를 이루는 이상적 세계 추구

백남준은 또 전자예술을 기술을 쓰되 기술에 예속되지 않는 '반기술적 기술'방식과 미디어 사이의 경계를 넘는 인터미디어 방식 그리고 비선형적인 사이버네틱스이론으로 결합한 방향으로 진화(다음 강좌에서 설명)시켜나갔다. 그러면서 TV가 돈벌이로만 악용되자 "TV가 우리 삶을 공격할 때 이젠 우리가 거기에 반격할 차례다"며 이에 반발했다.  TV->비디오로 발전

백남준은 경계 없는 굳건한 공존의 지구촌이 되기를 갈망하며 인종문제, 세대갈등 등을 지구촌의 공동이슈로 다룬다. 어떻게 하든 국가 간 문화차이를 이해시키고 그 경계를 넘어 지구촌 사람 누구나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려 한다.

<3> 1969년 '창조적 매체로서 TV’라는 전시. 하워드와이즈갤러리에서

[1] 1969년에 백남준은 하워드와이즈갤러리에서 '창조적 매체로서 TV'라는 제목으로 무어만과 함께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도 공연했고 또한 관객이 TV앞에 설치한 카메라로 자신을 비춰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관객이 직접 조절할 수 있게 하는 '참여TV'도 선보인다. 날로 그의 예술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갔고 결국에는 이를 증명하듯 미국에서 처음으로 그의 '참여TV'가 팔려나갔다.

[2] 1969년엔 '보스턴공영방송'에서 백남준 외 앨런 카프로 등 6인과 함께 '매체는 매체다(30분)'를 발표해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걸 증명해 보였다. TV방송에서 터부시 하는 사회비평이나 에로티시즘까지 다루면서 대중취미만이 아닌 예술적 방식으로 접근한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로 인한 사회적 지성의 결핍을 채워주다. 그밖에도 '전자오페라 1번' 등을 발표한다.

<2> 미국의 반지성주의(남탓주의)는 20년마다 돌아온다. 트럼프는 그렇지 않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대부분 반지성주의자들이다. 그런데 반지성주의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기파다. 일본도 반지성주의자가 미국 못지않다. 반지성주의자는 지식이 전혀 부족한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음모론이 나오는 이유다. 대중은 애매모호한 것을 참지 못한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아무리 세계적 수준의 지식이 있는 지성인이라도 미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학계나 대학을 넘어서지 못한다. 대신 미디어와 할리우드 스타들이 미국사회를 좌우한다. 미국에서 프랑스에서 보듯 20세기 프랑스 사회의 심판자 역할을 한 사르트르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같은 혹은 독일의 하버마스 같은 국가의 정신적 기둥이 되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지성인이 있어도 미국에서는 맥을 못 춘다. 가까운 곳에서 예를 들면 이만열 교수 같은 지성인도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출신의 현존하는 최고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는 유럽의 지성인들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계몽주의적 이성주의(?)를 믿는다. 그는 신체적 장애가 있다 19살 때 보리외과 수술에도 연설에 불편을 줄 정도도 입이 기형이다. 역설이지만 그래서 소통철학의 대가인가. 인생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입보다 귀가 발달한 것인가요[백남준과 하버마스(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라고 하죠 공론장 이론으로 유명 아직 생존)는 소통철학에서 통한다] 68혁명 당시 하버마스/그는 10대를 나치시절에 보냈는데 그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사회였기에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출현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개인 의견 여기서 미디어가 중요하다 미디어과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일방적 미디어가 되면 독재자가 등장한다) 그에게도 백남준의 미학에서 강조하는 쌍방형 소통방식이 역시 중요하다. 

[3] 1969년 미국에서는 TV전성시대를 맞아 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안방에까지 전해지면서 반전운동을 펼치다. 반면 그해 1969년 7월 20일에는 미국의 우주비행사가 인류최초로 달에 착륙하여 첨단우주과학의 승전보를 알리는 인류역사의 신기원을 이룬다. 백남준의 위성아트는 여기서 영감을 받다.

 

[4] 백남준이 60년대 후반 TV매체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이 상호공존 속 인종과 국경을 넘어 어떤 소통방식을 통해 인류공동체를 구현하려 했는지 알아보자 60년대 세계격변기에 꽃핀 '비디오아트' 백남준 

[]뉴욕 캐널 스트리트여기에 가면 TV 전자제품 상가가 몰려있다. 캐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운하를 복개해 만든 거리다. 미국판 청계천 전자상가다. 백남준 이 근처에 작업실이 있었다. 2015년에 가본 적이 있다. 플럭서스 본부에 이 근처(359번지)에 있다. 과거에는 섬유공장이 많았던 곳이다. 이 근처 차이나 타운 이탈리아 타운 소호스트리트가 맞닿아 있어 여러문화의 뒤섞인 곳이다.

내가 직접 찍은 뉴욕 캐널 스트리트

[] 60년대 뉴욕 캐널 스트리트(전자상가) 작업실에서 백남준이 자석으로 변형된 TV화면을 보는 모습 이 작품은 TV외부에 자석을 놓고 관객이 그걸 움직일 때마다 다른 형태의 추상패턴이 보이도록 고안한 것으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참여 TV'가 된다 이 작품은 TV외부에 자석을 놓고 관객이 그걸 움직일 때마다 다른 형태의 추상패턴이 보이도록 고안, 자석 TV'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참여 TV'가 된다

[] 70년대 뉴욕 10년, 비디오혁명으로 미국 미술계 강타. 뉴욕미술계 기린아로 부각(1971-1974), 백남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생활 10년 만에, 중년에 들어서면서 백남준은 마흔 줄로 들어서는 70년대 뉴욕미술계에서 작가로서의 자리매김이 시작된다. 특히 1967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성과 에로티시즘의 금기를 깬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공연으로 (나중에 선고 유예가 났지만) 샬럿이 체포·구금돼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969 비디오합성기 발명] [1] 1969년 백남준은 록펠러재단과 보스턴 공영방송(WGBH-TV)의 지원을 받아 9년에 걸려 '영상마술사'라 불리는 비디오합성기 신디사이저(Paik-Abe Video Synthesizer for WNET TV Channel 13, 미국 MIT소장)를 아베(1932-)와 공동 개발한다. /비디오합성기, 비디오아트에 날개 달아주다 /보스턴 공영 TV방송국에서 백남준에서 기능에 대해 설명하는 '아베 슈아' 그리고 이 방송 프로듀서 '프레드 바직'. 왼쪽에는 백-아베 비디오합성기(1969-1972). 2014년 3월 백남준문화재단 국제심포지엄에서 찍은 사진

백남준이 이를 발명하는 지난한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달마의 고행에 비유했을까. 달마가 9년 동안 부동한 자세로 좌선하느라 배설물이 다리를 녹여 좌상의 부처가 되었듯 자신의 신서사이저 발명도 9년 동안의 'TV 배설물'의 축적이라고 했다. 이는 비디오아트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그 형태와 색채를 무한히 변형시키고 다양한 추상화로 변주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전자터치방식으로 새 이미지를 창조한다기보다는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시킨다는 의미가 강하다. 백남준 말대로 "다빈치처럼 정확하고, 피카소처럼 자유롭고, 르누아르처럼 현란하고,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고, 잭슨 폴록처럼 강렬하고,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인" 그림도 다 가능해졌다.

<4> '비디오(TV) 코뮌', 본격적 가상 인터넷. 하나 된 지구촌 건설 염원"

[1] 비디오합성기로 만든 첫 작품 20011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비디오(TV) 코뮌' 중 첫 장면을 찍은 것 백남준은 '보스턴 공영방송'에서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드디어 1970년에는 비틀즈, 조지 해리슨 음악과 함께 자막도 없이 통째로 4시간짜리 일본방송 등을 내보내 동서양간 균형감 있게 문화를 주고받은 장을 마련하며 'TV실험을 위한 비디오 코뮨(Video Commune: Beatles from beginning to end_An experiment for TV)을 생방송한다. 여기서 백남준은 전자색채와 피드백도구를 활용해 색채의 폭발력이 가히 초현실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움직이는(kinetic) 리듬감에 변화무쌍한 추상이미지도 연출해 뉴미디어아트라는 새로운 영역과 그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는다. 문화민주주의자인 백남준은 TV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비록 군사용이거나 정치권력과 경제이득 의도였다 해도 이를 뒤집어, 보다 교육적이고 철학적이고 예술적 도구로 활용해 TV를 인간화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맥루한처럼 전 인류의 다양한 문화가 보다 평화롭고 평등하게 상호 공존하게 되는 인류공동체를 꿈꾸었다.

<전쟁세대>백남준이 이런 사고를 하게 된 배경은 그가 어려서 겪은 식민지경험이나 한국전쟁 같은 분단의 아픔을 다른 나라사람이 알 리 없고, 홍콩, 일본, 독일 등에서 유학할 때 체감한 텃세라는 게 결국 국가 간 정보교환의 부족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번역 없이도 소통이 가능한 춤과 음악 같은 콘텐츠가 작품에 단골메뉴로 쓴다. 2011년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열린 '비디오(TV) 코뮨전'에 전시장면 그러면서 백남준은 공영방송이 오히려 국가주의를 강조해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을 낳고 타문화에 대한 무지로 세계평화를 위협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서구사회의 동양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단절과 불통을 가능한 해소하려했다. 이에 대해 1970년 '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공동시장'이라는 글에서도 백남준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TV공영방송이 자국의 문화만 소개하고 상이한 문화를 알리는데 편협함을 보인다면 세계평화는 위협받을 것이고 […]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한 것은 근본적으로 아시아에 대한 정보부족에서 온 것이다"이라고 지적한다.

[왜 이런 것을 만들었나]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도 이에 대해 "백남준의 이런 철학은 '해원상생(解寃相生)', 즉 원한을 풀고 서로 살자는 뜻일 것이다. 백남준이 바라는 세상은 세계적 차원의 상호이해, 투명하고 전쟁 없는 평화와 공존의 사회, 서로 연대하는 공유 사회, 지구촌을 향 행복한 꿈이 어우러지는 그런 이미지세계는 현대의 만다라 풍경 같다"라고 해석했다

[]백남준은 1967년부터 록펠러재단의 지원 하에 4년여만에 '슈아 아베'와 함께 1001가지의 영상편집이 가능한 비디오합성기를 내놓았다. 그 기술로 1970년 '비디오 코뮌'을 발표했다.게다가 백남준은 미국대중문화의 트렌드를 꿰뚫고 있었고 그런 감각과 친화력으로 갤러리나 동료작가로부터 호응과 지지를 많이 받았다. 백남준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1963년 독일에서 충격적인 '첫 전시'를 연 지 10년만인 1973년 '글로벌 그루브'를 선보였다. 10년만에 대성공을 하다.

1971년 본격적 비디오 시대

<사진> 1971년에 전자아트전이 열린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오노, 레넌, 아베 등과 함께 찍은 백남준 사진에서도 그만의 작가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TV와 비디오 등 뉴미디어 시대 도래 미국 '타운 홀 바가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1968 백남준은 1960년대 후반 뉴욕 보니노 갤러리, 하워드와이즈갤러리 등에서 '소리의 시각화를 시도'하는 비디오아트와 행위음악 등을 다각적으로 실험한다. 

 

백남준은 1960년대 후반 뉴욕 보니노 갤러리, 하워드와이즈갤러리 등에서 '소리의 시각화를 시도'하는 비디오아트와 행위음악 등을 다각적으로 실험한다. 그리고 백남준은 70년대 '종이 없는 사회(the paperless society)' "철학이 수세기 동안 유지해왔던 헤게모니를 되찾으려면 양피지 문헌학 대신 지금 같은 전자공학상황(모니터)으로 노출돼야 한다"며 오늘날 인터넷신문을 예고했다.

<5> 1973년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전 세계가 함께 노는 '맘판놀이굿'

[1]1970년에 선보인 '비디오 코뮌'의 완결판으로 그 내용과 기법에서 훨씬 더 업그레이드됐다. 제목에 '글로벌'이 들어가 있는데 그냥 제목만이 아니라 실제로 세계 55개국에서 방영되었다./기존의 회화가 구도와 색채, 형태가 중요하다면 이 전자회화는 빛과 소리,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래서 공간예술에 시간적 요소가 더해진다. 그리고 백남준은 지금은 누구나 다 익숙한 '글로벌' 개념을 도입한다. 이와 함께 "앞으로는 'TV가이드'가 맨해튼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워질 것'이라 주장, 'TV케이블시대'도 예견.

'글로벌 그루브'는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와 지식 "방송내용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다"라는 '다다익선'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킬 만큼 영상의 양과 질이 풍부해 '이미지천국'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 선가 당시 미국에서 백남준은 미디어에 대한 신비주의와 과대망상, 지구촌에 대한 환상에 빠진 작가라는 좀 생뚱맞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글로벌 그루브',1974년 백남준은 자신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글로벌 그루브'가 뭔 뜻이냐고 묻자 "70년대 글로벌 음악축제로 세계 모든 나라가 케이블 TV로 연결될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미리 예견한 일종의 상상적 경관"이라고 말했다. 풀어 말한다면 '지구촌시대 전 인류가 함께 모여 즐기는 환희의 만판놀이'라는 뜻이 된다./여기에서 활용되는 기법은 화면을 왜곡하는 것뿐 아니라 두 개의 영상을 혼합하여 뒤섞는 것이나, 백색광을 넣어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조합하는 것, 출력한 걸 재구성해 피드백효과를 주는 것 등 다양하다. 또한 그 속도감은 요즘 봐도 엄청나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도약하는 시발점이 된다. 여기에 그의 관심, 기법, 특성, 신념, 철학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콘텐츠는 마치 종잣돈 혹은 원금과 같은 역할을 해 나중에 그의 대표작인 '굿모닝 미스터오웰'이나 '바이 바이 키플링'과 '다다익선' 등에 단골메뉴로 재활용된다./

백남준은 이 작품의 콘텐츠에 전 지구적으로 편향된 민족주의 경향을 없애고, 국가 간 소통을 저해하는 요소를 극복하려고 번역이 필요 없는 춤과 음악을 가능한 많이 넣는다. 예컨대 서양의 록음악과 탭댄스는 물론이고 미국 인디안 나바호족 북소리, 일본 오키나와 전통음악, 재미무용가 이선옥씨가 선보인 한국 전통춤 등이 그것이다.

<4> 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TV첼로(1971)'를 연주하는 샬럿 무어먼이 보인다. 현란한 색채오 변화무쌍한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지구촌 다문화 실어 나르는 축제의 장/백남준 I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스틸컷(부분사진) 28분 30초 1973. 이 작품에 나오는 부분부분을 모음곡처럼 편집한 것이다.

<6>그런데 '글로벌 그루브'에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관객도 이런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마치 작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된 이런 콘텐츠를 자기 나름의 서사로 재구성해 다르게 구상해 보라고 권고하는 것 같다. 여기서 백남준은 '동양의 정보를 서양에 제대로 전달해 동서양이 한 가족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다. 독일 록 연주, 페테르부르크 음악, 빈의 재즈 오케스트라, 브라질 삼바 춤, 예루살렘 콜테 마마 무용에 중국의 베이징무술과 한국의 사물놀이, 일본의 전통 음악 등이 소개된다. 초대형 작품을 하다 보면 항상 돈과 사람이 문제가 된다. 백남준은 손수 삼성을 찾아가 1천 대 TV 지원을 약속받고 나니 설계자 선정이 또 남았다. 마침 백남준 경기중학교 후배인 건축가 김원이 발 벗고 나서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백남준은 국내에 거주하지 않아 지구 반대편에서 2년간 손발을 맞춰가며 고생한 끝에 완성했다.

또한 이 혁명은 '기동성(움직이는 전자회화)'과 '즉시성(리얼타임)'이 특징이다. 붓이나 물감대신 TV로 표현하는 예술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패러다임이 엄청나게 바뀌는 시대에 맞게 인식을 넓혀주고, '텔레토피아'라는 이상사회의 단면도 제시한다.그러면서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 리비어와 인터뷰(1974)에서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가고 예술의 시대가 왔다". 68혁명 이후 바리케이드시대는 지났다. 다른 사람이 헬리콥터나 위성을 소유하는 상황에서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제는 저항운동도 예술적이라야 한다"며 우리시대는 예술가가 진정한 혁명가 천명

 

1983년은 첫 '위성아트' 위한 폭풍전야

[1] 50살이 된 1982년 백남준은 이렇게 뉴욕과 파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전 지구적으로 충격을 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그런 면에서 1983년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한 '폭풍전야'와 같은 해라 할 수 있다./백남준은 이미 'TV'를 예술화했지만 이번에는 '인공위성'을 활용한 예술을 상상했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전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 좋아했다. 그래서 그해 8월 백남준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믿는 케이지를 찾아가 그들 설득한다. 이 부분과 관련된 내막을 이용우 미술평론가가 글로 남겼는데 그걸 여기 소개한다.[2] 백남준은 <예술과 통신> 전시 도록(현대화랑 1995)에 '별들의 랑데부'라는 글에서 '칠월칠석'에 황소를 끄는 총각 별 '견우'와 베를 짜는 처녀 별 '직녀'가 여름밤 꿈 같이 만났듯 동서가 그렇게 랑데부하는 이야기로 번안했다고 밝힌다. 이런 전설은 백남준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백남준은 50대 초반인 80년대 전반기에 19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과 1982~1983년 퐁피두센터 회고전, 1984년 위성아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을 연이어 발표해 전성기를 맞는다. 뉴욕, 파리에 이어 서울에서도 세계적 작가로 떠오르다. 백남준은 그의 연구가인 리비어와 인터뷰에서 "진실로 난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실험미술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인데 마침 뉴욕 보니노갤러리가 운 좋게 그를 받아줘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당시로는 상업성이 없는 실험미술인 전자예술(Electronic Art)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1983년 여름 어느 날 백남준이 찾아와 다짜고짜 하는 말이 내년 1월 1일은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는 오웰에게 한수 가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날인데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TV쇼를 하겠다고. 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또 그 짧은 시간 내 돈을 마련할 수 없으니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말렸죠. 그런데 그는 이미 프랑스채널(FR) 3TV와 약속을 해 놓은 상태였고 퐁피두센터와도 프로그램 대한 결정을 해놓고 있었어요. 나는 영락없이 백남준에게 걸려든 셈이 됐어요." 위성아트는 멀티 공간, 멀티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백남준] 굿모닝 Mr. 오웰, '견우와 직녀'에서 음력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아직 좀 멀었다.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우리의 설화인 '견우와 직녀'에서 영감을 받았다. 위성아트의 상상력은 어디서 왔나?

1984년 백남준이 비행기 안에서도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고심하는 모습. 2014년 방송된 <KBS 파노라마 굿모닝 미스터 오웰 30년, 백남준2편 : 디스토피아를 넘어서> 의 한 장면을 갈무리한 사진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 백남준은 예술에서 고급과 저급이란 경계를 흐리게 했다. 그래서 대중예술가와 고급예술가를 번갈아 등장시켜 동급으로 놓았고 '대중 쇼' 방식을 취했다. 이 난제는 누구도 풀기 쉽지 않은데 백남준은 이를 능수능란하게 해결했다. 그리고 춤, 노래, 코미디, 퍼포먼스 등을 융합하며 탈장르를 시도했다.

<6> <굿모닝 미스터오웰> "21세기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 감시사회 대안
[1] <1984년>"당신과 보이스가 인공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소설가)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 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 야심작을 성사시키려 인사들을 두루 만났고 그 중 미국방송(WNET) 프로듀서인 '캐럴 브란덴버그'도 있었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왜 생방송인가?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2014>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왜 백남준은 화면이 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이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했을까? 1987년 그 이유에 대해 한 기자가 묻자, "에베레스트나 알프스빙벽에 도전하는 이유가 위험한 것 자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열정 때문이 아닌가. 프로메테우스와 콜럼버스 이래, 이런 열정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었다"라고 대답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도 하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게 아방가르드 정신인데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작가적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는 60년대 초부터 '미래의 빛(A Satellite)'이라는 뜻이 담긴 '위성'을 가지고 예술을 하는 데 관심을 두었고 미래를 사유하는 자로서 경계 없는 지구촌을 그려왔다.

<2>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감시와 처벌 사회 대안 공동체 <굿모닝 미스터오웰 > 전시장에 소개된 감시사회(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을 합성한 것임. 영국의 민주사회주의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1946년부터 2년간 쓴 차용한 것인데, '빅 브라더(Big Brother 가상의 독재자)'가 나타나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담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

[3] 미술사에 유래 없는 기념비적 사건 '2천5백만을 위한 예술(Art for 25 mill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1984년 11월 28일부터 12월 9일까지 베를린 '다아트갤러리(DAADgalerie)'에서 열린 백남준 특별전 초대용 포스터 우여곡절 끝에 1984년 1월 1일 뉴욕(정오), 샌프란시스코(오후 3시), 파리(오후 6시)를 동시에 연결해 한국, 일본,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등 11개국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이는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이 최초의 위성오페라 쇼로 백남준은 명실 공히 세계적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4] 이 프로젝트는 뉴욕에 있는 '공영방송(PBS/WNET)'이 주관했는데 당시 방송제작자 중 누구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거라 긴장했고, 뉴욕과 파리의 위성을 잇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화면이 자주 끊겨 환희와 실망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시청률이 초반에는 7%까지 올라가는 등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위성 쇼는 뉴욕의 사회자인 플림튼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을 만날 시간이네요. [...] '빅 브라더(Big Brother)'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TV는 우리의 뇌를 먹지요, 하지만 조지, 당신은 오버했던 것 같아요, 어떤 것은 아직도 남아있어요, 봐요, 당신은 좀 틀렸군요"라는 멘트로 시작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오웰의 생각이 반만 맞았다며 그의 '빅 브라더'론을 조롱했다. 하긴 오웰의 예측이 다 틀린 건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형편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첨단미디어기술'이 개발되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쌍방소통이 가능할 거로 낙관했다. 그러나 오웰은 '인터넷-SNS시대'가 오리라고 전혀 예상 못했다. [6] 백남준은 프로젝트 방영 후에도 빚 갚느라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을 빌리기 위해 개인파산을 전제로 부채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1984년 6월 귀국했을 때 만난 유치원친구 이경희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그 빚을 갚는 데 조금 도움이 되고자 기부하려 했으나 그런 한국 돈은 쓸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또한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맑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 주었다. 그때 백남준은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놀라운 말을 던진다. 그는 20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연 셈이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를 꿈꾼 지 20여 만에 세계를 호령하며 지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칭기즈칸'이 됐다.

중계여부가 결정되자 백남준에게 이번엔 제작비 40만 달러가 문제였다. 록펠러재단에서 17만 달러를 지원받았으나 그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자 아이디어를 내 케이지, 보이스, 커닝행, 긴즈버그가 만든 판화를 만들어 팔아 7만 달러를 충당했다. 이밖에도 서울 원화랑 정기용 사장이 4만 달러를, 프랑스방송과 KBS 등에서도 협찬했다.
<7> 1986년, 동서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반발

[1] '바이 바이 키플링'은 영국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시인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이니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라고 한 노래에 반발하며 만든 작품이다

[2] 뉴욕에서는 미국의 팝 작가 '해링', 프랑스 조각가 '아르망'이,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건축가 '이소자키', 패션디자이너 '이세 미야케'가, 그리고 한국의 고싸움, 사물놀이, 정경화와 정명훈의 연주 장면, 황병기 가야금 연주와 한강 노들강변이 소개됐고, 아시안게임 마라톤경기가 최초의 여성 마라톤주자의 해설로 중계됐다. 백남준도 이 프로그램에 등장해 일본 음악가 '사카모토'와 지구본을 주고받는 게임을 보여주며 지구는 평화의 터전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두 작가의 인연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침 그해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 포함 2인전이 기획돼 그는 작가를 모색 중 30년 후배인 강익중을 추천했다. 백남준은 자신이 독일에 있으면서도 휘트니미술관 관계자에게 "난 괜찮으니 강익중에게 더 좋은 자리를 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팩스를 보낼 정도로 그를 배려했다.

 

[3] "동은 동, 서는 서가 아니라 지구는 하나다" 50대 후반기, '정보아트' 꽃 피우다 (1985~1989)백남준은 80년대 후반기 '전자오페라' 3부의 완성과 함께 정보 지식 시대에 걸맞은 하이테크(첨단기술)와 위성 아트를 결합해 '정보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을 꽃피우다. 백남준은 동은 동이고 서는 서가 아니라, "동이 서이고 서가 동이 될 수 있다"는 동양의 일원론적 철학에 근거해 서구인이 가지는 아시아·아프리카를 미개국으로 보는 문화 제국주의적 관점을 한방에 날려버리며 이에 대한 고별을 선언했다.

 

위성오페라 '3부작'으로 지구가 하나임을 증명 '바이 바이 키플링'에서 '제국TV' 안에서 얼굴을 내민 백남준. 1985-1986. 차도르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건 동서 문화의 불통으로 서구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이슬람문화권을 말할 수도 있고, 이슬람문화권의 여성의 억압을 상징할 수도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중에 근접 촬영한 전시물 위성오페라 '3부작'을 만든 백남준의 의도는 '마르코 폴로 이후 동서가 동시에 볼 수 있고, 시공간 개념을 넘어 동서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것이다. 1부 '굿모닝 미스터 오웰', 2부 '바이 바이 키플링', 3부 '손에 손잡고'로 마무리된다

<8> 다양성을 찬미한 백남준의 '다다익선’(1988)'손에 손잡고

[1]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맞아 백남준은 예술과 스포츠도 맛있게 칵테일 할 수 있다며 인류 공존의 정신이 담긴 '손에 손잡고'를 선보였다. 위성아트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소통을 이루는 매체'임을 알린 것이다. 여기선 구소련의 작품도 소개해 이념을 넘어 지구를 하나로 감싸는 '참여TV'의 단면도 보여줬다. 백남준은 당시 스타급 연예인과 예술가 100여 명을 그것도 1월 1일 한 곳에 모으는 초능력을 보였다. 뉴욕에선 '앤더슨, 긴즈버그, 무어먼, 케이지, 커닝햄' 등이, 파리에선 '사포, 보이스, 삭스, 팅겔리, 생팔' 등이 출현했다. 백남준은 전설적 전위무용가 '커닝햄'을 14년 만에 방송에 출현시켰고, '보이스'도 6년 만에 무대에 올렸다.

[3] 또한 1988년 10월 26일 제24회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높이 18.5m, 지름 7.5m의 거대한 철골에 1003대(10월 3일 개천절) TV 모니터를 설치한 총 7단 규모의 철골 구조로 만든 기념비적인 백남준 작품 중 하나인 '다다익선'을 선보였다. 부인 시게코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을 구상할 때 러시아혁명시절 구성주의 작가이자 건축가인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 디자인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에서 착안해 제목을 '타틀린을 위한 헌정'으로 붙이려 했으나 이 제목이 한국에서 말썽의 소지가 있자, 보다 함축적인 뜻이 담긴 '다다익선'으로 작품명을 바꾼다.'다다익선'이라는 제목은 민주 사회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정보 사회에서 TV·신문·잡지·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해석도 가능해 잘 어울린다

<9> 2000년 "한반도에 아직 호랑이는 살아있다"백남준 왈 "한반도에 아직 호랑이는 살아있다" 이 작품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남북 대치라니 답답하다. 종전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만 생기고 한반도 평화가 더 가까이 올 것인데 갑갑하다. 백남준은 "드디어 호랑이가 제대로 운다"라고 좋아했다. 백남준은 우리가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지만 아직 우리는 기죽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선언.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 여기서 호랑이는 백남준 자신을 말한다. 이 위성 아트는 새 천년 첫날, 전 세계 77개국 방송망 탔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도 많지만 백남준은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는 남북의 사람들은 아직도 기죽지 않았다>를 1999년 자정 12월 31일 자정부터 2000년 1월 1일 위성 아트로 선보였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여기서는 약소국이라는 한국의 강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00년] 모바일아트', '네온(빛) 아트', '레이저아트'로 발전된다. 그 자신이 이런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는 건 "중심만 보려는 농업중심의 중국과 달리 선사시대부터 우랄 알타이와 시베리아에서 네팔, 한반도, 라플란드 등에까지 말을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더 멀리 있는 지평선을 보려고 한 유목중심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다"이라고 좀 엉뚱하고 재미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영화, 사진 등 올드미디어가 아닌 텔레비전, 비디오 등 뉴미디어로 주류미술계를 능가해 인류문화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알린다. 이런 미디어아트는 훗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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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남긴 말 어록집 https://www.youtube.com/watch?v=OA6GXeep6aw&t=31s 

백남준 이야기 <백남준&어록집>

<<리뷰>> 2021년, 시공간의 주인으로, 어떻게 백남준 같이 사나? [1] 1991년 백남준 가장 백남준다운 패션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자만심, 자존감도 아니고 자부심 혹은 바로 자신감

이 세상에서 시공간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잘 놀면 '영원한 지금(eternal now)' 장자의 관점이다. 영원한 지금이 남준 왈 "현재가 유토피아다. 이게 핵심-포인트다(Jetzt ist: Utopia Das ist Wichtig)". 다시 말해 지금 여기(Here and now)가 모든 시공간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백남준은 미래를 사유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데도 현재를 가장 사랑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 해저 속 깊이 잠수한 '사유자' 그를 아무도 터치하지 못한다. 장자처럼 나비처럼, 빈 배처럼 '영원한 지금'을 살아보면 어떨까.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것 하면서 '영원한 지금' 속에 사는 것이다.

<01> <가장 잘 나가는 한국 철학자가 드디어 백남준을 공부 강신주, 장자의 소통론으로 백남준 설명, 백남준의 소통론을 장자의 비유로 풀다> 피리는 속이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바람과 만나야 울림이 생긴다. 피리와 바람 이 둘이 같이 있어야 연인처럼 떨림이 온다. 이것이 진정한 소통의 첫 단계이다. 소통이란 생각의 벽을 트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피리 즉 사람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타존재(마주침 미학)가 될 때 진정한 공감과 울림과 떨림과 파동이 오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영원한 지금(eternal now)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철학과 연애에서 보면 가장 중요한 건 우주와 인간을 묻는 것이다.

<02> <내 삶은 세계적 사건이다. 내 신체가 움직이면 이게 다 포퍼먼스> 한국인은 멋과 가무와 예술을 좋아한다. 삶은 사물인가 사건이다. 삶이란 사건이다. 세계적 사건이고 우주적 퍼포먼스다. "현재가 유토피아다((Jetzt ist: Utopia Das ist Wichtig)" -백남준. <신체가 존재다> 몸이 일어나서 마음이 되고 마음이 일어나서 몸이 된다. 그런 면에서 몸은 마음이고, 마음을 몸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하지 않는 것이다. 바퀴 가운데가 비워있기 때문에 바퀴 살이 돌아가다. 유가 있는 것은 무가 있기 때문이다. 무위는 유위에서 나온다. 무용이 유용이다. '없다는 (아이들) 업다=업으면 아이가 없네'에서 나왔다.

<03> 백남준과 장자 '제물론'을 보면 생각이 같다. 장자는 사물, 자연, 기계도 같다고 본다. 백남준 생각도 그렇다. 과거, 현대, 미래도 같다. 시비와 판단에서 벗어나라. 대립구조과 사슬에서 벗어나라. 일체의 고정관념을 버려라. 얽매임에서 벗어나라. 말, 글 그 자체도 의심하라. 문자주의에 빠지면 어리석다. -라캉, 장자, 루소. [라캉] 상징계 벗어나 '실재계'로 가라(말, 나이 감옥 빠지지 마라, 있는 대로) 서양에서는 루소가 좀 그렇다.

[04] [백남준, 인류공존과 지식과 정보를 공유를 추구하는 공화주의자 그리고 인터넷주의자] 백남준은 진정한 지구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창안하다. 공화국(La Publica) 뜻은 다 같이 가는 것, 모든 것이 우리 재산, 우리가 소유하는 것 '공동재산'이라는 뜻이라고. 공화국에 살수록 역사에 관심이 높다. 모든 일이 나의 삶과 연관성이 높기에

 

[05] [맹자 위민 사상=백남준의 인류애 통한다] 인: 측은지심, 의: 수오지심(옳지 못한 것을 부끄러움), 예: 사양지심, 지: 시비지심. 맹자는 임금이 가볍게 봤기 때문에 군주들 싫어했다. 왕(군주) 중심의 정치를 반대하고 신하(백성)와 함께 하는 왕도정치(인의정치)를 강조했다. 발음이 비슷해 혼돈. 조선은 왕이 함부로 하지 못했다. 맹자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맹자에 따르면 왕도정치는 인(仁 : 사랑)과 의(義 : 올바름)를 통해 백성을 교화하고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이다. 패도정치는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 권세와 무력을 쓰는 정치 맹자는 그런 방식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06] 모든 사상가와 성인이 다 도 즉 길을 이야기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로마가 유럽을 지배한 것은 당시 최고의 마차고속도로가 있었기 때문). 멀티미디어(다양한 매체 미디어와 고속도로)=도(道)=예수 왈, 나는 길(way)=노자 왈, 도(tao)=칭기즈칸의 초원고속도로와 병참제=백남준의 전자초고속도로=인터넷=디지털아트=사이버네틱스 아트

[07] 백남준 60년 전인 1974년에 이미 TV 쇼핑과 인터넷 쇼핑, 전자 팩스 화상 전화, 의료 상담, 바이오 커뮤니케이션 전자 여론조사, 전자투표, 전자 도서관 검색, 자동차 네비게이션 등 수많은 것 예언

[08]노자는 무위자연을 발명하다. 노자의 영감을 받은 것인가? 백남준은 무음악(a-music)을 발명하다. 백남준의 무음악은 그의 스승인 쇤베르크의 무조음악(atonal music 12음계음악)과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09]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 백남준의 '새로운 야만인(바이올린 부수고 피아노 파괴)',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 이런 건 대가들로서 서로 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인류의 진정한 에로스 회복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의 풍경, "끊임없이 자기의 영토를 떠나는 자만이 새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탈영토주의 이런 건 백남준 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 '탈영토제국주의'나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와 통한다.

[1] 백남준은 1932년 학교에서 모국어 쓸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백남준의 에세이 중에 이런 시절의 비애를 고백한 글도 남겼다.[2] 백남준 식민지 시절의 학교에서 한국어를 쓸 수 없었던 쓴맛에 대한 기억 하나: 우리는 일본 선생에게 밀고자가 되어야 했다. 백남준 식민지 시절의 학교에서 한국어를 쓸 수 없었던 쓴맛에 대한 기억 둘: 영국 사람들 공포정치로 아일랜드 1000년 식민지로 다스리다. 아일랜드어 없애는데 1000년이 걸렸다. 아일랜드 질겼네요. 그러나보니 문학이 발달했다.(출간 종수에 따른) 아일랜드 소설 작가 순위 7명스타 : 대런 섄 (46) 제임스 조이스 (41) 오스카 와일드 (31) 브램 스토커 (18)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14) 오언 콜퍼 (9)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8) 존 코널리 (5) 레너드 위벌리 (5) 사무엘 베케트 (4) 세실리아 아헌 (4) 조지 버나드 쇼 (4) 데릭 랜디 (3) 마이클 스콧 (3) 칼럼 매캔 (3) C. S. 루이스 (2) 켄 브루언 (2) 콜럼 토빈 (2) 존 반빌 (2) 메리언 키스 (2) 셰이머스 히니 (2) 엠마 도노휴 (2) 피아더르 오 길린 (2) 등등 지천에 깔려있다.

<3> 백남준의 미디어 비판 그리고 백남준은 우리 시대에서 불쾌한 것은 정보의 입출력에서 균형감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통계에 의하면 우린 매년 4만 가지 광고를 봐야 하지만 그중에 40개 광고방송에서 선전하는 상품만 구매할 뿐, 우린 그렇게 정신병원 소파에 누워있는 금붕어"라며 시청자가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돼 볼모로 잡히는 걸 늘 못마땅해했다.

 

[12] 백남준은 1963년 첫 전시 포스터에 16개 예술개념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내용 없는 시간은 가능한가(Is the TIME without contents possible)?> 시간문제에서 1960년대 초부터 "서로 관계가 없는 여러 동작이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성(시간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는 아직 녹음기가 없었던 시대였다. 백남준으 비디오매체로 이것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백남준은 멀티한 시공간성(multi temporal and multi spatial)을 평생 관심을 두었다. 이게 위성아트가 되다.

[13] 백남준에게 1863년이 중요하다. 프랑스 최고 전성기. 왜냐하면 1983년 전화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전화 전에는 말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다. 그리고 서양미술사에서 1863년은 마네가 처음 인상주의를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인상파를 발표한 후 100년 후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백남준 첫 전시를 열었다. "예술은 텃세다. 보편성이 아니다" -백남준. 만약 백남준이 미국에서 앤디 워홀처럼 유럽에서 이민자의 후손이었다면 앤디 워홀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벌써부터 잃어버렸을 것이다.

 

[]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 대한 후기 1963-1964> "영원에 대한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Der Ewigkeitskult ist di langste Krankheit der Menschkeit)" -백남준. 평생과제 모든 예술가들의 로망이 내 작품이 영원히 오래 오래 남는 것. 그러나 백남준은 이 마저 부정. "뭘 그렇게 남기려고 해!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남기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 즉 내일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치열한 삶의 방식으로 살았던 것이다.

 

[] <정보가 석유를 대신>40년 전 한국은 정보시대 빛을 발할 것임을 예언하다. 앞으로는 두뇌 파워(brain-power)가 오일 파워(oil-power)를 이길 것이다. 탈영토제국주의를 언급하다. 앞으로 정보사회는 영토의 크기와 그렇게 중요한 시대가 아닐 것이다. 그는 한국인의 최고두뇌와 인터넷의 가장 빠른 속도와 그런 소통능력을 통해 세계에서 최고의 정보와 지식을 공급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다. 그걸 통해 바로 전 세계를 호령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다. 전쟁이나 침략의 방식이 아닌 완벽하게 평화의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온 라인의 영토에서는 지식과 정보 수집능력이 많을수록 인터넷 속도에 빠를수록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 미국 예일대에서 바빌로니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무려 스무 명이 넘는데 왜 전화를 논문의 주제로 삼은 박사는 한 명도 없는가? -백남준. [평] 전화는 전선을 통해 가장 빠르게 소통을 하는 전기초고속도로가 아닌가 베니스는 왜 최고의 도시인가? 자동차가 없기 때문이다. -백남준. 이것이 없었다면 인터넷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백남준: 황홀경-주이상스>

<1> <백남준에 황홀경은 내가, 내가 아닐 때다. 남이 존재를 이루도록 할 때이다. 사르트르의 생각과 같다> 백남준에게 있어 황홀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자리, 즉 내가 내 자신을 극복하려는 순간에 찾아온다. 새롭게 내가 태어나는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심지어 TV도 인공위성도 장난감일 뿐이다. 백남준은 혁명가들이 원하는 경건주의나 엄격주의와 다르게 그는 유쾌함과 즐거움 그리고 인간의 유치찬란한 행복을 추구한다. 백남준 엘리트주의나 순수주의를 멀리하고 늘 즐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백남준의 유토피아는 신석기 시대 그때는 소유(사유재산 발명되기)이전의 사회로 독점이 없는 공동체사회로 돌아가려 한다. [약간의 주, 인류는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나고 독점사유사회가 발명이 된다] 백남준이 말한 "나의 TV는 신석기 시대를 닮았다"의 해설이다 -강신주 아래는 백남준 글 원본과 그에 대한 해설 등이 조금 보인다. 백남준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핵심 즉 나를 밖으로 내던질 때(être pour autrui) 황홀이 온다는 의미(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Sartre)를 파악했죠.

 

[] 백남준에게 있어 황홀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자리, 즉 내가 내 자신을 극복하려는 순간에 찾아온다. 새롭게 내가 태어나는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심지어 TV도 인공위성도 장난감일 뿐이다. 백남준은 혁명가들이 원하는 경건주의나 엄격주의와 다르게 그는 유쾌함과 즐거움 그리고 인간의 유치찬란한 행복을 추구한다.

 

[]백남준 엘리트주의나 순수주의를 멀리하고 늘 즐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백남준의 유토피아는 신석기 시대 그때는 소유(사유재산발명) 전의 사회로 독점이 없는 공동체 사회로 돌아가려 한다. [약간의 주, 인류는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이 나고 독점사유사회가 발명이 된다] 백남준이 말한 "나의 TV는 신석기 시대를 닮았다"의 해설이다. 강신주 아래는 백남준 글 원본과 그에 대한 해설 등이 조금 보인다. 백남준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핵심 즉 나를 밖으로 내던질 때(être pour autrui) 황홀이 온다는 의미(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Sartre)를 파악했죠.

 

[] 예술은 형도 중요하지만 색이 더 중요하다. 색의 예술화에 능수능란한 작가가 세계 최고가 된다. 왜냐하면 색이란 최고의 절정이고 황홀경이고 가장 높은 단계의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주이상스를 제대로 경험한 사람은 드물다. 미술이 이것을 경험하게 한다면 대성공이다. 프랑스 저명한 성 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그래서 "색정은 죽었다(Il n'y a pas de rapports sexuels)"고 선언. 뒤샹은 이걸 시도했지만 실패했지만, 백남준 이런 시도에서 성공하다.

 

[][색 혹은 색채] 무엇인가? 동양에서 색은 색정을 말한다. 섹스를 말한다. 일종의 생명 에너지를 뜻한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엘랑 비탈'이다. 그리고 동양에서 색은 시간을 말한다. 색동옷을 때때옷이라고 하는데 시간마다 우주만물의 색채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색이란 뭔가 현상적인 것을 말한다. 공은 진리를 말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백남준에게 색은 뭔가 그에게도 색은 섹스이고 시간이고 그리고 비디오아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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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한국언론 9대 뉴스> [1] OECD 37개국 중 한국 경제성장 1위 실제 중국1위 그러나 OECD 아니다 [2] 영국 문화 소프트 파워 1위 독일, 2위 한국, 3위 프랑스, 4위 일본. [3] 한국정부가, 2억7천 명 인구 가진 인도네시아 FTA 체결 [4] 정은경, 봉준호 뉴욕타임스 100인 [5] 109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게 신용등급 유지 [6] 한국, 전자정부 1위 [7] 국가 경쟁력 8위. 2단계 올라감 [8] 코로나 방역능력 3위: 뉴질랜드 1위 봉쇄 때문, 타이완 2위 봉쇄 때문, 봉쇄 안하고도 3위 [9] 주가 상승률 세계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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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는 외줄 타는 사람.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것이 예술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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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일화와 되는대로의 어록

白南凖의 生涯와 藝術 백남준은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공존한다.”라고 말한다. “프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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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희랍힌 조르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사랑을 할수 있기에 자유롭다.
[]예술은 밋밋한 이 세계에 양념과 같은 것이다. 이 상투적인 세계에 그나마 예술적 충격이 없으면 인간들은 정말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예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건조한 세상이 재미없다 보니 예술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위대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런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 최초의 쌍방향 방송이다. 나는 이것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자랑할 수 있다. TV문화는 레이더로 시작되었으며, 레이더는 쌍방향이다. 즉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 1977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고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요.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을 좋아해요.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입니다. 대부분 읽고 생각해볼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입니다. 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중에서), 2001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1988

[]"길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라고 베블렌이 말한다.나는 " 내 가슴에 비가 내리듯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린다" 라고 말하겠다."내 컴퓨터에 비가 내리네" 가 나의 비디오 첫 작품이 될 것이다.그것은 현상의 비와 컴퓨터 비의 혼합이다.나의 두 번째 작품은 센티멘탈한 컴퓨터가 될 것이다.

[]콜라주가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듯이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기계의 인간화 예술화>

[]사람들은 내게 왜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하느냐고 많은 질문을 던진다.나는 그들에게 생중계 위성방송은 나의 무모함에 와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모험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생방송은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현실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생중계는 베타멕스처럼 리와인드가 안 된다.

[]우리들의 인생처럼-내 인생의 하나의 행운은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요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일 때에 만나놓은 것이다.따라서 금세기의 두 연장자와 역경시대의 동지로서동등히 교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맴도는 문화현상이다.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백/아베 영상 합성기”,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선생께서는 비디오아트가 앞으로 커다란 발전을 맞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러리라 확신합니다.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이뤄놓았습니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지요. 그 조그마한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입니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1974년 이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 <백남준 :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2009

[]난 구라파에 가서 보고 음악이나 미술 수준에 관하여 매우 실망을 느꼈다. 내가 가서 본 르네상스 이후의 위대한 실물들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사원에 들어가서는 좀 위압감을 느꼈다. 그 위압감의 본질이 고딕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공간 처리에도 있겠지만 난 무엇보다도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로움에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벽에 건 그림과는 달리 빛이 투과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빛이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저 건너 바깥에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빛 때문에 인포메이션이 생겨난다. 그래서 난 그걸 좋아했고 그것을 내 아트로 옮겨보았다.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2001)

[]나의 실험적 텔레비전은 “완전 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1964
[]미국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항상 즐거워하거나 자극받을 필요는 없다. 미국에는 지루한 음악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지루한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나 자신도 가난하다. 나는 매 순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르노와르처럼 화려하게 /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풀록처럼 간결하게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텔레비젼 스크린 캔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백남준-아베 영상합성기”,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1965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사용한다. 1980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이다. 1961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1984

[]만약 현대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인 것이다. 1986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만큼이 사기가 되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월간 <춤>, 1986년 11월

[]백남준은 한국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재벌이 아니라 바로 시장통 사람들로 보다.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사람들 서민들 덕으로>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 찾는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은 이 문제를 1백 년 전에 이미 해결하여 놓았던 것이다. 일제 하에서도, 6·25동란과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 재벌독점, 환경오염에서도 이 두 시장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 불만 났다하면 제일 먼저 터지고 타는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불타 폭삭 주저 앉았나 싶더니 다음날 여지 없이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달라졌다고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1999년 2월 18일 백남준

[]예술가에게 실수는 오히려 천재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다.[] "남준 내겐 어머니 같은 존재" -장 폴 파르지에

[]행복이냐? 아마… 배반이냐? 아마… 출세주의냐? 아마… 겁쟁이냐? 아마…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 해방 20년이 다가온다. -슈투트가르트 좀 아카이브, 1965년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넥타이는 멜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를 수도 있다.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끌어온 것이 아니다.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이 고생스런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93년 휘트니베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한국의 재벌은 결코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사람을 이길 수 없다(독점기업도 건드리지 못하는 양대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기능을 우리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란의 *'샤' 왕조(1077년부터 1231년까지)가 결국 바자의 상인들에게 진 것처럼 말이다 *(페르시아어: خوارزمشاهیان) [...] 자본도 변변치 않은, 노력투성이의 경제라 시장상인은 아무도 무섭지 않고 특혜금융도 필요없다 양대시장이 거대부패와 특혜융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 불만 났다하면 제일 먼저 불타 폭사 주저않았나 싶더니 다음날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이런 자유경제가 자본주의의 능률을 최상으로 끌어로리고 한국을 지킬 것이다 -백남준

[]현대 문화에서 비디오 아트가 크게 자리 잡은 것은백남준의 예술과 놀라운 상상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텔레비젼을 이용한 프로젝트, 설치 미술, 행위 미술, 공동 제작,새로운 예술 도구 개발, 교육에 이르기까지그는 대중 매체 문화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언어를 재해석한 선구자적 존재이다.  -존 헨하르트-아이폰은 백남준 아이디어다  -존 헨하르트

[] "반 아방가르드적이며, 반 개척자적이며, 반 케네디적이다. 선은 아시아의 빈곤에 책임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선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수행과 사회적 차원에서의 적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사람들은 최소한의 욕망으로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매우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것이 집단에서 드러났을 때에, (보다 정확히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되었을 때, '불필요한 혹은 잉여'의 욕망들이 제거된다는 것은 소비-생산의 동력을상실케 하는 것으로 작동하는 꼴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이들이 많은 집단의 경우, 생산양이 절대적으로 줄기 때문에, 빈곤이라는 사태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백남준은 선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 예술가는 외줄 타는 사람이다.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것이 예술이다 -백남준 blog.naver.com/sulsong21/221515565255

 

우양미술관_백남준강의록17

"백남준이 평생해온 예술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전쟁방지다" -소통이 결핍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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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두 사람이 동시에 주인공이 되는 걸 경험하는 것이다 - 알랭 바디우

김광섭 시인, 그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작품의 제목이기도. 일제시대 교사로 민족의식 고취시켰다고 3년 8개월 감옥살이하다. 해방 후 우파적 성향을 보이다. 그러나 시는 여전히 살아있다. 참 절제된 시다. 시가 짧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쉬운 시는 아니다. 다만 다가가서 읽어보고 싶은 시이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사랑  - 김광섭 이리로 오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아 저 달이 유난히 빛나면서 고인 듯이 흐르는 푸른 강 위에 자욱한 빛이 꿈처럼 풀려 오른다 물 속에 고기와 산 속에 새와 언덕조차 취한 밤이니 너와 나를 새겨 놓고 말없이 저 달을 보낸 뒤에 문을 열고 너는 내 가슴에 불을 켜라 이제로부터 나는 너를 붙잡고 가리니 자연에 편만(遍滿:널리 그득)한 사랑과 함께 너와 나 사이에 다시 뜨는 달을 보며 우리는 이루어 새것을 열리라 아 드디어 돌아갈 날 함께 누우려나 . 팔을 베개로 아지 못할 표상이 시작되리니 그립다 서울 복판에 걸린 한 조각하늘을 이름 새기고 갈 낯익은 종이로 삼을까 //인생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을 유지 시켜 주는 것으로 바로 '기다림'이다. 이때 서러움이 올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서러움이 인간을 구원한다. 천재 시인들의 보편 정서는 바로 서러움이다. 김수영 시에 서러움이라는 단어가 아주 흔하게 등장한다. 서양어에 서러움과 비슷한 뉘앙스로 RESSENTIMENT 있다

<부록> 개인전
2004 백남준(Nam June Paik),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2004 백남준: 글로벌 그루브(Nam June Paik: Global Groove), 베를린 도이치 구겐하임(Deutsche Guggenheim)

2002 전자 저글러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시작(Il giocoliere elettronico, Nam June Paik e l’invenzione della videoarte), 튜린 팔라초 카부르(Palazzo Cavour)

2002 트랜스미션(Transmission), 뉴욕 록펠러 광장

2002 백남준, 플럭서스와 비디오 조각(Nam June Paik, Fluxus und Video Skulptur), 뒤스부르크 빌헬름 렘브루크 미술관(Wilhelm-Lehmbruck Museum)

2000 백남준의 세계(The Worlds of Nam June Paik),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한국 순회

1999 백남준 플럭서스/비디오(Nam June Paik: Fluxus/Video), 브레멘 쿤스트할레(Kunsthalle Bremen)

1999 백남준. 비디오 조각 <트라이앵글 II>와 페이퍼 작품(Nam June Paik. Videoskulptur Triangle II und Arbeiten auf Papier)>, 브레멘 쿤스트할레

1997 백남준. 희귀 회화, 사진 꼴라주, 비디오 조각(Nam June Paik. Seltene Grafiken, Fotocollagen und Videoskupturen), 베를린

1997 백남준(Nam June Paik), 뉴욕 괴테 인스티튜트(Goethe Institute)

1996 백남준: 비디오 조각, 전자 암류(Nam June Paik: Video Sculptures, Electronic Undercurrents),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Statens Museum for Kunst)

1996 백남준의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 of Nam June Paik), 후쿠오카 하카타 캐널 시티(Canal City Hakata)

1995 백남준: 하이 테크 알러지(Nam June Paik: High Tech Allergy), 볼프스부르그 쿤스트뮤지엄

1995 백남준 '95: 아트 앤 커뮤니케이션즈(Nam June Paik '95: Art and Communications), 서울 갤러리 현대, 박영덕 갤러리, 조선일보 미술관

1995 백남준(Nam June Paik), 핀란드

1995 백남준: 바로크 레이저(Nam June Paik: Baroque Laser), 뮌스터-생 모리츠

1994-1998일렉트로닉 수퍼 하이웨이: 백남준과 함께 여행(The Electronic Super Highway: Travels with Nam June Paik), 미국 전역 순회

1994 백남준: 최신 작품(Nam June Paik: Recent Works), 파리 알베르 베나모우-필립 그라비에(Albert Benamou-Philippe Gravier)

1994 백남준(Nam June Paik), 후쿠오카 아트 뮤지엄

1994 백남준: 비디오 샤먼(Nam June Paik: Lo Sciamano del Video), 밀라노

1993 백남준 최신 작품(Nam June Paik Recent Works), 도쿄 와타리움

1993 백남준(Nam June Paik), 함부르크 바이저 라움

1993 자뎅 일루미네(Jardin Illumine), 취리히 하우저 & 워스(Sammlung Hauser & Wirth)

1992 백남준의 20세기(Il Novecento di Nam June Paik), 로마 팔라초 델 에스포시지오니(Palazzo delle Esposizioni)

1992 백남준: 사진(Nam June Paik: Photographs), 뉴욕 홀리 솔로몬 갤러리

1992 백남준: 최신 작품 '88-'92(Nam June Paik: Recent Works '88-'92), 서울 갤러리 현대

1992 백남준 회고전: 비디오때 비디오땅(Nam June Paik: Video Space and Video Time),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992 백남준: 신작(Nam June Paik: Neue Arbeiten), 뒤셀도르프 갤러리 한스 마이어

1991 백남준 네온 TV / 비디오 오브제(Nam June Paik Neon TV / Video Objekte), 프랑크푸르트 갤러리 룹케(Galerie Lüpke)

1991 백남준. 비디오 월 / 비디오 샹들리에(Nam June Paik. Video Wall / Videochandeliers), 함부르크 바이저 라움(Weiser Raum)

1991 백남준: 비디오 조각(Nam June Paik: Video Sculpture), 런던 메이어 갤러리(Mayor Gallery)

1991 늑대의 걸음으로: 서울에서 부다페스트까지(A Pas de Lou: de Seoul à Budapest), 서울 갤러리 원, 갤러리 현대

1990 백남준: (Nam June Paik: Sterne), 뒤셀도르프 갤러리 한스 마이어(Galerie Hans Mayer)

1990 요셉 보이스 추모 굿 <늑대의 걸음으로(A Pas de Loup de Seoul à Budapest(ritual for Joseph Beuys))> 공연, 서울 갤러리 현대

1990 백남준: TV(Nam June Paik: TV), 제네바 갤러리 마리카 마라코다

1989 백남준: 최신 회화와 조각(Nam June Paik: Recent Paintings and Sculpture), 뉴욕 홀리 솔로몬 갤러리

1989 백남준(Nam June Paik),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89 백남준: 로봇 가족(Nam June Paik: The Family of Robot), 후쿠오카 아트 뮤지엄(Fukuoka Art Museum)

1989 백남준(Nam June Paik), 함부르크 갤러리 베이세 하우스(Galerie Weisses Haus)

1989 전자 요정(La Fée électronique),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1989 백남준(Nam June Paik), 빌바오 뮤제오 드 벨라 아르떼(Museo de Bellas Artes de Bilbao)

1989 한 초(Eine Kerze / One Candle), 프랑크푸르트 포르티쿠스(Frankfurt Portikus)

1988 백남준: V-아이디어(Nam June Paik: V-Idea), 런던 나이겔 그린우드 갤러리(Nigel Greenwood Gallery)

1988 백남준. 회화(Nam June Paik. Painting), 파리 FIAC

1988 백남준. 비디오 작품 1963-88(Nam June Paik. Video Works 1963-88),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

1987 바이 바이 키플링 드로잉(Bye-Bye Kipling Drawings), 도쿄 와타리 갤러리

1986 백남준, 바이 바이 키플링(Nam June Paik, Bye Bye Kipling), 도쿄 와타리 갤러리

1986 백남준. 조각, 회화, 레이저 사진(Nam June Paik. Sculpture, Painting and Laser-Photography), 뉴욕 홀리 솔로몬 갤러리(Holly Solomon Gallery)

1986 로봇 가족(Family of Robot), 신시내티 칼 솔웨이 갤러리

1984 백남준 - 25백만을 위한 예술(Nam June Paik - Art for 25 Million People), 베를린 다드 갤러리

1984 시간의 색.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The Color of Time. Video Sculptures by Nam June Paik), 뉴욕 로즈 아트 뮤지엄

1984 백남준: BSO와 그 이후(Nam June Paik: BSO and Beyond), 보스턴 ICA

1984 백남준 - 모스틀리 비디오(Nam June Paik - Mostly Video), 도쿄도 미술관(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1984 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 뉴욕 WNET과 파리 FR3 채널을 비롯, 전 세계로 생중계

1983 비디오 깃발(Video Flag), 신시내티 칼 솔웨이 갤러리(Carl Solway Gallery)

1982 백남준, 삼색비디오(Nam June Paik, Tricolor Video), 파리 퐁피두 센터

1982 회고전: 백남준(Nam June Paik), 뉴욕 휘트니 미술관

1981 임의 접속 / 종이 TV(Random Access / Paper TV), 도쿄 와타리 갤러리

1980 비디아 이로 이로: 페이퍼 TV와 열대어(VIDEA Iro Iro: Paper TV and Tropical Fish), 도쿄 와타리 갤러리

1978 회고전: 백남준(Nam June Paik),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1978 백남준. 비디오 정원(Nam June Paik. Jardin - Videos), 파리 퐁피두 센터

1977 프로젝트: 백남준(Projects: Nam June Paik), 뉴욕 현대미술관

1977 백남준. 오버뷰 1946-1976(Nam June Paik. Overzicht 1946-1976),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Stedelijk Museum)

1977 백남준: TV, 드로잉, 회화, 오브제(Nam June Paik: TV, Dessins, Tableux, Objets), 제네바 갤러리 마리카 마라코다(Galerie Marika Malacorda)

1976 백남준: 작품 1946-1976: 음악-플럭서스-비디오(Nam June Paik: Werke 1946-1976: Musik-Fluxus-Video), 쾰른 쿤스트페어라인

1976 하늘을 나는 물고기(Fish Flies on Sky), 뉴욕 보니노 갤러리

1976 달은 가장 오래된 TV(Moon is the oldest TV), 뉴욕 르네 블록 갤러리

1975 백남준(Nam June Paik), 뉴욕 르네 블록 갤러리

1975 하늘을 나는 물고기 - 물고기들은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다 - 물고기들을 다시 하늘을 날게 하자(Fish on the Sky - Fish hardly flies anymore on the sky - let Fishes fly again), 뉴욕 마사 잭슨 갤러리(Martha Jackson Gallery)

1974 백남준: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Nam June Paik: Videa n Videology 1959-1973), 뉴욕 에버슨 미술관

1968 백남준(Nam June Paik),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 브룩 아트 갤러리(SUNY Stony Brook, Art Gallery)

1964 백남준 작품 발표회(Nam June Paik: Composition), 도쿄 소게추 아트센터

1963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Galerie Parn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