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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인터넷] <02강> '전자초고속도' 가는 길, 10단계

<서론> 인트로 백남준 맛보기
1 I Never Read Wittgenstein 1998 2 독일 사람들이 왜 백남준 좋아하는가?
3 1990년 백남준, 한류 예언하다 4 1995년 인터넷 미디어론 총정리 5개 국어로
5. 1995년 '정보 아트' 광주비엔날레 6. 백남준 어떤 의도로 인터넷 발명했나?
<테이트모던 백남준 인터넷, 유튜브, SNS, Smart phone 예언> www.youtube.com/watch?v=yMUJB5aFvdo

백남준, 30년(1963-1993) 동안 백남준 인터넷 등 5가지 예언 : 1. Internet 2. Video ART 3. Climate Crisis 4. Global Media<1인 미디어> 5. Smart Phones - 테이트 모던 기획팀 관점.

<본론> 인터넷 10단계
<백남준 발전시킨 인터넷 10단계> 1963-1993 30년 걸리다
www.youtube.com/watch?v=K3SXEkPJseY&t=1556s

1963년 [01단계 인터넷] 첫 전시에 미래의 인터넷인 TV을 도입하다.
1965년 [02단계 인터넷] <달은 가장 오래된 TV> 소니 비디오 처음 사용
1970년 [03단계 인터넷] <비디오 코뮌>, 69년 합성기(신디사이저) 발명으로 가능
1973년 [04단계 인터넷] <1인 미디어 시대> 유튜브 예언과 그 성과로 <글로벌 그루브> 발표.
1974년 [05단계 인터넷] 인터넷 전신 <전자 초고속도로> 개념 록펠러기금수령
1978년 [06단계 인터넷] 그해 백남준은 “종이는 죽었다” 예언
1984년 [07단계 인터넷] 굿모닝 미스터 오웰 등 3탄 위성아트 전 세계 방송채널 연결
1993년 [08단계 인터넷] 1993년 작품 <전자 초고속도로>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
1994년 [09단계 인터넷] 상용화된 인터넷을 보여주는 W3 작품 등 발표,
2000년 [10단계 인터넷] SNS 상용시대 1974년 mixed-media phone 예언 스마트 폰 되다
www.youtube.com/watch?v=kFfGIjAQbDg


<결론> 우리는 모두 백남준의 (전자) 은하계(갤럭시) 속에 살고 있다

I Never Read Wittgenstein by Nam June Paik (1998) 가변설치 가능


===> 백해영 갤러리에서 올여름 6월 1일-7월 20일
'나의 예술적 고향, 파르나스'라는 제목으로 백남준 전시가 열렸고
이 전시를 계기로 <백남준과 친구들>이라는 백남준 (Institute) 공개 대학 공부방이 만들고 있어요
seulsong.tistory.com/1081

그런 준비과정에서 백남준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고 그래서  매주 수요일
백남준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나누려고 해요.
첫 번째 이야기 '백남준과 BTS'는 왜 그들은 만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오늘은 두 번째 이야기로 <백남준과 인터넷>'인터넷'으로 가는 길, 10단계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론에 들어가지 전에

간단한 <인트로> 몇 가지 소개하죠.

Never Read Wittgenstein

백해영 소장품 I Never Read Wittgenstein by Nam June Paik (1998) 가변설치 가능

[인트로 1] 백해영 소장품은 백남준이 1998년 몸이 불편해지자 간단하게 디자인한 작품
비트겐슈타인 세계적 천재 언어학자 그런데 사실 나도 그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고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색동이라는 뛰어난 색채 언어와 전자 언어로
그의 언어철학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언어철학을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
이것은 나의 가설이죠

[인트로 2] 사실 독일 사람들이 백남준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
독일에서 줄 수 있는 모든 예술상을 다 받았어요. 희안하죠.
그중 가장 큰 상은 역시 괴테상이다. 

제가 기자라 필드에서 경험한 일화 소개하고자 합니다.
몇년 전인가 취재한 적이 있는 독일 작가 원래 음악 전공인데
사운드 아트를 하는 작가로 부인은 한국분이고요
'알프레드 하르트' 씨와 대담 중에
왜 백남준은 독일에서 그렇게 인기가 높은가 하고 물어봤어요

"백남준이 독일에서 인기가 높은 건, 알다시피
2차 대전 이전은 프랑스가 세계 미술을,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
그래서 독일은 변방이었는데 70년대 '요셉 보이스'와 함께
백남준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독일에 혜성처럼 나타나
소리와 영상을 뒤섞는 '전자 아트'를 창안해
독일 미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
'아트스타'가 되었다.
독일뿐만 아니라 그는 세계 미술을 뒤바꾼
그리고 20세기와 21세기를 연결한 (아날로그와 디지털)
'다빈치' 같은 예술가였다" 그에 대한 극찬이다.

요즘 양혜규가 백남준을 따라잡기에 바쁘죠.

[인트로 3] 백남준 1990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만나서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서 백남준 
21세기 세계를 놀라게 할 한류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했어요. 뭐라고 했을까요
백남준 왈 "이제 21세기에는 우리가 뜸 들여 익힌 문화를
전 세계에 내보일 때가 올 것이다" 예언이 적중했죠. 100% 예언이 맞았죠.
한국문화의 도약적 발전과 그 징조인 미리 발설한 셈이죠

[인트로 4] 백남준은 어떻게 인터넷을 착안했을까? 궁금하죠
오늘의 주제와 관련 된 것이죠. 이걸 상용화하는데 30년(1963-1993)에 걸렸다. 

10가지 단계를 밟았어요.

1995년 인터넷 등장 이후
이것을 총정리해서 기록한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이 있어요

여기서 고속도로가 뭘까요 바로 인터넷 전자 초고속도로죠.
백남준의 예술론 5개 국어로 종합한 거죠
일종의 미디어론이죠. 이것은 나중에 설명하죠

인터넷 예언과 관련해 백남준이 남긴 유명한 말 2가지를 소개하겠다.

"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다",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이런 말은 다 인터넷이 연상되죠.

[인트로 5] 그래서 1995년 인터넷에 막 시작되는 시기죠.
광주에서 처음 비엔날레 열렸죠. 백남준도 너무 기뻐하면서 여기에 참여했는데
그때 특별전으로  <정보 아트(INFo)> 을 열기도 했다. 
당시 해외에서 알게 된 백남준의 친구들 
첨단의 미술을 개척해 가는 세계의 천재급 작가들 광주로 초대했어요.
당시 세계 최상급 뉴미디어 큐레이터 '신시아 굿맨'에게 큐레이팅을 맡겼다

굿맨(Goodman) 누구?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그녀의 저서 "아트와 테크놀로지(Art and Technology) 1997년. "디지털 혁명 : 컴퓨터 시대의 예술", College Art Journal, 에서 보듯 디지털 아트의 최고 권위자죠

<미술의 시골동네에 큰 잔치를 벌리다>

백남준은 평생 자신을 '비디오아트스트'라기보다는 '정보 아티스트'라고 말했어요.
앞으로의 시대는 정보 디지털 시대가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되었죠.

[인트로 6] 정보를 위한 사회라는 것은 결국 전 세계가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죠, 소통이 잘 되어야 행복해지죠
부부 사이나 부모 자녀 사이나 정치로 치면 여와 야 소통이 잘 되면 만사형통이죠.
이렇게 소통이 중요한데
백남준은 이런 정보가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인류의 공공재로 그걸 공유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문화의 민주화, 정보의 민주화>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이런 말을 했어요.
정보 즉 brain-power가 석유 즉 oil-power를 대신하는 시대를 올 것이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좋은 정보가 있으면 석유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그러면서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어요
"한국은 다 좋은데 정보가 부족하다".
정보의 소중함을 잘 모른다 오래전에 한 이야기 지금도 유효 
결국 최후의 승자는 더 질 높은 정보를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터넷 창안했는데
과연 어떤 방식의 인터넷을 발상한 것일까? 그의 콘셉트는 뭔가?
<침묵> 그것은 바로 "가장 빠르고
가장 싸고(저비용으로 왜? 가난한 자를 누리게 하려면)
가장 접근하기 쉽게" 바로 그런 방식의 인터넷을 원했죠
전 세계와 원활하게 소통하는 길에 대한 열망이 엄청 컸다. 

왜냐하면 소통이 잘 되면 나라와 나라 사이 동과 서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죠
전쟁세대인 백남준은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죠. 물론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되면 동서의 세계가 서로 잘 이해하게 되고 전쟁이 없어지고
백남준은 심지어 미국이 베트남에게 졌죠. 왜(?)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백남준 처음 인터넷 발상할 때는 몽골 초원 고속도로, 실크로드에서 생각을 시작했죠.
과거 몽골의 칭기즈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 장비 보완해주는 병참 제도 platform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빠른 말이 있었기에 세계를 지배했죠
지금은 전자통신과 위성과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죠
그래서 앞으로는
아시아가 전망이 좋다 부각되고 있다. 중국, 인도, 베트남 등등
백남준은 세계를 빠르게 연결시켜 상호 이해와 문화교류를 통해 전 세계의 하나 되게 하고
공존공영의 변화를 도모하려고 했죠.
<영어로 하면> Transforming Cultures and Connecting the World

[본론] ===> ===> ===>

백남준 30년(1963-1993)에 걸려서 10가지 단계를 어떻게 밟았는지
그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시대는 인터넷을 빼고 하루도 살 수 없죠. 

1963년 [1단계 인터넷]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에 미래의 인터넷인 TV을 도입하다.
TV는 미래의 컴퓨터였죠. 물리적 음악이라고 백남준은 TV를 악기로 봤죠. 혹은 장난감...
첫 전시 제목이 그래서 <음악의 전시>
독불장군이나 독재자 같은 TV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싶은 것으로 만드려고 했죠.
이런 TV를 가지고 미술을 시도하는 건 서양미술에는 족보에 없는 혁명적 일이었다.

1965년 [2단계 인터넷] 백남준 '월인천강지곡'을 좋아했는데 여기서 발상,
강물에 흐르는 달빛은 부처한 대자대비한 은공으로 비유한 최초의 한글시)
<달은 가장 오래된 TV> 기막히다 토끼이야기 생각하면 쉽죠
매우 시적인 제목이죠 무명의 백남준 배려
뉴욕 갤러리아 보니노에서 처음 선보이다.
무명 실험예술 자리 마련 등 배려. 과거에는 달이  TV였다.

그리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을 세계 최초 (사전) 구입하다.
당시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그때부터 드디어 비디오 아트가 사용하기 시작했죠.
왜 비디오 사용했을까요  비디오는 TV보다 수정이 용이하고 순서를 왔다 갔다 편집이 가능했죠.

1970년 [3단계 인터넷] <비디오 코뮌>, 가능했던 것은 1969년 아베와 함께
비디오 용이하게 편집하는 합성기(신디사이저) 발명하다. 쉽지 않은 일
이 기술의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다. 비디오
코뮌이란 사회주의 개념인데 비슷한 말은 '글로벌 비디오' '인류 공동체'라는 뜻이죠. 
여기서 강조점, 역시 동서양의 다양한 정보를 교류해야 한다
이 작품의 콘티를 보면 동서양 내용을 반반씩 소개하고 있죠.

1973년 [4단계 인터넷] 비디오 아트 작품 중 걸작인 <글로벌 그루브>을 발표하다. 이것은  <비디오 코뮌> 더 업그레이드시킨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예외 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제죠. 여기서 축제는 무슨 축제죠 바로 정보의 축제죠. 미국이나 유럽만 정보의 축제를 독점하거나 즐기면 안 되고 지구촌 모든 나라에서 이 축제를 즐겨야 한다. 그래서 그 속에 내용을 보면 <비디오 코뮌>과 마찬가지로 동서문화 반반씩 비율로 소개 일본의 상업광고, 한국의 부채춤 등등 

또한 1973년 같은 해 획기적 선언 즉 <1인 미디어 시대 올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다.
"앞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만 TV 채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혁명이죠? 왜요? 사실 KBS MBC 등 이런 방송매체를 운영하려면 천문학적인 대자본이 들어가죠. 그런데 1인 미디어 시대가 되면 개인도 최저비용으로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언한 셈이죠. 대형 미디어는 대자본 광고비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가진 자 중심으로 그들에 유리한 방송을 하다 보니 fact가 왜곡되거 축소 확장 굴절되죠. 이걸 막을 수 있는 거죠.

1974년 [5단계 인터넷]  백남준이 지금의 인터넷 그 전신인 <전자 초고속도로(E Super High-Way)> 개념을 만들어서 록펠러재단에 예술기금을 받기 위해서 문화 프로젝트 제출로 이 개념을 제출했죠 그래서.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가 된 셈이죠. 1974년 그해 백남준에게 너무나 중요한 해줘.


그를 세계적 작가로 떠오르게 한 대표작 <TV부처> 발표하는데 이 작품 역시 인터넷 개념이 들어가 있다. TV와 부처, TV는 서양의 기술을 말하고, 부처는 동양의 사상을 말하죠.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만나서 융합이 될 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인터넷이 필요하다. 동양은 서양의 기술이 필요하고, 서양은 동양의 지혜가 필요. 어려운 말로 상호 주체적 의존 관계 서로에게 도움을 주되 종속되지 않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1978년 백남준 MOMA Lecture

1978년 [6단계 인터넷] 그해 백남준은 “종이는 죽었다” 예언하죠. 그리고 뉴욕 모마 미술관 특별 강연이 이 선언을 하다. 지금은 종이신문보다 인터넷 신문이 훨씬 많아졌죠. 이것은 '인터넷' 예언과 함께 인터넷이 환경운동에서 도움이 된다고 발표한 것이다. 왜 그럴까. 종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를 덜 죽인다는 뜻 즉 현실적인 환경운동이 되죠.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7단계 인터넷] 백남준 인터넷이 없는 시대 어떻게 하면 세계를 연결할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드디어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미국 유럽 아시아 방송채널을 일단 연결시켜보자. 그러면 뭐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 위성 아트죠. 그래서 뉴욕, 파리, 쾰른 서울 TV 방송 PD와 협의해 채널 연결 드디어 성공을 했죠. 지구촌 사람들 몇 명이 시청했을까요?  2500만 명, 정말 대단한 숫자죠. 21세기 정보 디지털 시대의 시작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1984년 1월 1일이 바로 21세기가 시작한 날이다"라고 말했죠.

1993 베니스

1993년 [8단계 인터넷] 진짜 인터넷이 등장하는데 백남준 예술적 인터넷 작품 <전자 초고속도로>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해 발표하죠. 이 작품으로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국에서 군사용 개발된 인터넷 WWW 상용화되죠.

1994년 [9단계 인터넷] 상용화된 인터넷을 보여주는 W3 작품 등 발표, 사실 이 작품은 몇 년 전부터 기획된 것이다. 이것을 상용 인터넷을 나온 지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이후 인터넷 기술(프로토콜)을 폭발적으로 발전한다

백남준 I 'W3' 64대 비디오 15분 1994년 작품

2000년 이후[10단계] 디지털 세상 완전히 자리를 잡고 정보시대의 돌입하다. 그리고 1974년 백남준이 발상한 mixed-media phone(여러 미디어를 종합한 폰) 예언했는데 결국  2009년부터 스마트폰 smart phone, 혹은 아이폰으로 발전하고 그래서 지금의 SNS가 전 세계적으로 상용화된다. 트윗과 페이스북이 전 지구를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런던 테이트 모던 동영상 자료> www.youtube.com/watch?v=yMUJB5aFvdo

이제 결론입니다===> ===> ===> 

백남준 추모제는 매년 1월 29일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 열리고 있어요 저도 최근 1-2번 참가했어요
봉은사 주지인 원명 스님이 이 행사 인사말에서 여러분의 손 혹은 주머니에 백남준이 있어요
스마트 폰을 두고 한 말이죠
그는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위대한 예술가죠. 덕담을 했는데 정확한 말이죠

오늘의 결론 우리 모든 인류는 지금 백남준이 발명한 전자 은하계 속에 살고 있다 

<추신> 시간이 나면 백남준 그의 생애 마지막 이야기 소개>

"Jeder Tag ist ein Guter Tag" - Buddha 매일매일이 좋은 날 -부처
백남준 뇌졸중 후 10년 만에 타계했다. 그는 마지막 10년 인간 승리자의 모습을 보인다. 불편한 몸에도 전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몸이 불편하기에 오히려 마음에 욕심이 없이 편안한 사람처럼 어느 시기보다 삶을 즐겼다. 그의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I am Happy, I am Happy"를 연발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오나 그의 낙관성을 그가 후회 없이 인생을 충만하게 살았기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전 세계를 호령하면서 문화 칭기즈칸으로 못할 것 없이 살았기 때문인가. 그러면서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서양인들 그를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서양인보다 서양을 더 많이 알기에 오히려 서양인들이 기가 팍 죽은 것이다. 6개 국어 하니 그를 감당 못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