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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전시, <나의 예술적 고향 파르나스>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 전 <백남준, 나의 예술적 고향 파르나스> 6월 30일까지 <작성중>

<백남준 제로 아트 시절이다> 1962년(백남준 30살) 뒤셀도르프 병렬 공연 기획: 백남준과 보스텔(Parallele Aufführungen), NEO-DADA in der Musik, Kammerspiele, Düsseldorf / Neo-Dada in der Music 은 Carlheinz Caspari, George Maciunas, 백남준, Benjamin Patterson, Thomas Schmid, Wolf Vostell이 Kammerspiele (Dusseldorf)라는 극장에서 공연 한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은 백남준과 마시우나스가 공동 감독했고, 개막 연설은 장 피에르 빌헬름이 전했다. 이곳에서 백남준은 처음으로 바이올린 솔로와 소나타를 위해 곡을 연주했다

1957년 독일 죽어가는 동물들 소리

<백남준의 플러스 아트는 결국 마이너스 아트를 위한 것이었다 그 중간에 제로 아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1990년작 ‘보이스 복스(Beuys Vox)’. 백남준이 1961~1988년 작업 중 선정된 21가지를 하나의 세트처럼 작품 아래 작품 도 그 중 하나이다. 1961년 백남준, 독일 제로 그룹과 제로 공연을 할 무렵 사진

백남준과 보이스의 1984년 도쿄 합동공연 그리고 1988년 서울 합동공연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보이스가 1986년 갑자기 죽는 바람에 합동공연을 못하고 1990년 서울에서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을 펼치다.

독일에서 1976년 40대 중반 백남준 모습

1976년 백남준 40대 중반 1978년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교수가 되다

백해영 갤러리와 정원

[백남준 전] <백남준, 나의 예술적 교향 파르나스> 6월 30일까지 백해영 갤러리(설계: 정기용 건축가)
기획 독일통 김순주 선생.

전시장 내부 

백남준 EXPO에서 색동 TV 피아노가 없으면 전시가 안 되죠. 

3층에는 레지던시 방 2개도 있고 재미있어요 관객 수준 높아 70년대 말에 뉴욕에서 백남준을 이미 만났던 분도 계시고요 백남준 아파트 5층이고요 머서 스트리트 소호지역 뉴욕대 근처죠.

1997년 백남준 괴테상 수상장면

백남준 1997년 괴테상 받을 때(장소:뉴욕 독일문화원) 뒤에 흑인이 백남준 1996년 뇌졸중 쓰러진 이후라 백남준 휠체어 이용 시 도와주는 분1997년 백남준 괴테상 수상장면

1993년 베니스에서 단군왕검을 형상화한 작품 '단군 스키타이'

위 작품 도움말: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단군왕검을 형상화한 작품 '(전자) 단군 스키타이' 백남준은 단군을 유라시아를 연결시켜주는 미디어(match maker)로 봤다. 백남준은 고조선 단군시대로 돌아가는 그 순수한 원래의 기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 다산의 시에도 보면 고조선 단군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메시지가 보인다. 그 시대만 해도 한국인의 기상과 패기가 넘쳤는데 처음 시작한 우랄 알타이 국가에서 밀리고 밀리고 밀리고 해서 결국 한반도에 갇혀버린 것이다. 결국 그것 마저 반쪽이 나고 말았다. 여기에는 백남준이 말하는 싸우지 않게 세계를 지배하는 <탈영토제국주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가 인터넷 강국으로 높은 교육열과 고급 정보와 지식을 통해 전 세계에서 지적 제국으로 전 세계 평화와 공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과 제안을 엿볼 수 있다

백남준 관련 50여점의 사진전도 같이 열리고 있다.

<백남준 전 <백남준, 나의 예술적 교향 파르나스, 6월 30일까지 백해영 갤러리에서 관련 사진 50여장 소개 1993년 베니스에서 단군왕검을 형상화한 작품 제목 '단군 스키타이' 백해영 갤러리 관장도 백남준과 90년대 같이 기획에 참여했는데 백남준 거의 (눈꼽도 떼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 좀 불편하게 했다고. 미국 워싱턴에서 백남준 특별 전시 때 미국 상원 하원위원 등 VIP그렇게 많이 오는데도 역시 (눈꼽도 떼지 않고) 세수도 안 해 그곳에서 펠로십으로 근무하게 된 한국 큐레이터(직접 들은 이야기다 백해영관장도 같은 이야기) 말에 의하면 너무 기대를 했는데 백남준을 만나 너무 당황했다는 일화가 있다. 백남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어느 때인가부터 남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고 그래서 너무 좋았다"고

1974년 쾰른 TV 첼로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베니스비엔날레 1993년 백남준 전시 중 하나였던 Sistine Chapel 이것이 2019년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재현
 백남준 1993년 작 Sistine Chapel 테이트모던에서 재현 
플럭서스 퍼포먼스
플럭서스 퍼포먼스
전자 유목민 상징하는 TV조각

<역사는 지배자에 의해 쓰여졌다(« L’histoire a été écrite par les dominants »)> 맞다. 그래서 백남준은 중국의 <사기>를 안 믿었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비교적 그런 사관에서 벗어난 정치가가 아닌 민간인(승려)가 쓴 <삼국유사>는 매우 좋아했다. 그럼에도 역사가 민초들의 의해 발전했다는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1993년 백남준 전성기 작품 베니스비엔날레 때 전시 일종의 전자벽화
1989년 백남준 TV Tower
 백해영갤러리 주소: 용산구 이태원로 27길 77. 지하철 6호선 2번 출구 10분 보도

<관련 블로그> https://seulsong.tistory.com/1088

 

[백남준] '요셉 보이스'와 함께 '유라시아 작가'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를 흔히 유라시아 작가라고 한다. 이 두 예술가는 아시아와 유럽의 예술을 하나로 합쳤다. 그것을 연결하는 매개체(미디어)는 바로 굿(샤머니즘)이었다. 보이스가 굿을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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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백해영 백남준 전시 소개 www.youtube.com/watch?v=Kz6QPGR-pu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