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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 르네상스 꽃 피우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계보> 어떻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나?

그것은 문화를 이해하는 최고 가문(메디치 가문)의 경제적 지원+원급법과 오일물감 발명 등 하이테크의 발달+최고의 예술가와 건축가 등장+인본주의라는 시대정신과 혁신이라는 새로운 바람과 다이내믹한 사회 분위기가 합쳐 르네상스가 탄생한 것인가? 이탈리아 피렌체를 가보면 그 당시의 힘이 그대로 느껴진다.

Pico della Mirandola

“애플은 ‘컴퓨터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컴퓨팅 파워를 모두에게 가져다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애플이 만든 의미다. 구글은 ‘정보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모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이베이는 ‘거래를 민주화’하고자 했다. 웹사이트가 있는 누구나 다른 큰 소매점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도록 했다. 유튜브는 사람들이 영상을 만들고, 업로드하고, 나눌 수 있기를 원했다. 이것이 기업과 그들이 만들고자 한 의미의 사례들이다.” -이주헌

<메디치 가문 코시모(2대)로 이어지다>
메디치 가문에 최고급 인문학교육을 받은 2세대인 '코시모'라는 큰 인물이 태어나게 된다. 메치디 은행을 경영하면서도 플라톤 철학에 능했고 플라톤 아카데미도 운영했다. 그리고 예술가와 교류를 끊이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어를 포함 5개 국어를 능했고 문헌학자 수준의 지식과 정보를 갖추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그는 많은 고문서를 수집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의 보고인 메디치가문 도서관을 설립했고, 산마르코수도원을 건축·회화의 빛나는 아이콘으로 재건했다. 괴팍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해 찬란한 두오모 성당의 돔을 설계하게 했고, 도나텔로·필리포 리피 등 초기 르네상스 대가의 든든한 뒷배였다. 인문학 연구의 요람인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원했다. 코시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렌체시가 그에게 국부(國父·Pater Patriae)의 칭호를 선사한 것은 누가 봐도 그 공적에 걸맞은, 당연한 예우였다. -이주헌 아래사진

우수라’(usura=usage 사용법)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메디치가문에 번영을 가져다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대금업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금업을 신성모독과 같은 죄로 쳐서 심지어 “대금업자의 시신은 개나 소·말의 주검과 함께 구덩이에 묻는 게 마땅하다”(1274년 리옹공의회)고 할 정도였다. 그런 편견과 멸시를 딛고 큰 부를 일군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에게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했다.

그 덕분에 코지모는 라틴어·헬라어·히브리어·아랍어에 능했고, 고문서를 숙독하고 철학을 공부하며 인문학자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젊은 날 고문서를 수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까지 가려는 것을 아버지가 가까스로 말릴 정도였다. -이주헌

<메디치 가문  '로렌초'(3대)로 이어지다> 

보티첼리

그는 자신 탁월한 시인이었다. 베로키오(다 빈치의 스승), 보티첼리,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적극 후원하다. 세계사적으로 이렇게 3대에 걸려 문화발전에 기여한 가문이 없다. 이 메디치 가문에게 돈은 뿌리요, 정치는 줄기와 가지였으며, 문화 예술은 꽃과 열매였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많아도 마지막 문화의 그릇에 예술의 꽃을 피우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 가문은 3대의 걸쳐 결국 르네상스의 꽃을 활짝 피웠다. 정말 드물게 돈을 제대로 잘 쓴 가문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코지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 이르러선 절정을 이뤘다.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로 불린 데서 알 수 있듯 로렌초는 르네상스의 가장 강력하고도 영향력 있는 후원자였다. 어릴 적부터 당대 최고의 석학들에 둘러싸여 공부한 로렌초는 그 스스로 탁월한 시인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늘 역사라는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돌아봤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 곧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산드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을 적극 후원했다.

피렌체

할아버지가 만든 도서관을 더욱 크게 확장하고 피사대와 피렌체대에 거금을 기부했다. 그런 그에 대해 ‘처세의 지혜’를 쓴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는 “피렌체에 독재자가 있어야 한다면 이보다 훌륭하고 매력적인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렇게 한 시대를 넘어 그 후까지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정신적·감성적 영향을 끼친 가문은 세계사적으로도 찾기가 어렵다.

메디치가는 이처럼 전무후무한 문화사적 의미를 창출한 집안이었지만, 더불어 당대의 가장 선구적인 금융인으로서 근대 경제의 기초를 놓은 사람들이기도 했다. 흑사병이 창궐해도 신용을 지켜야 한다며 은행 문을 닫지 않을 정도로 돈을 열심히 벌었으나 그렇다고 돈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메디치가 사람들에게 돈은 뿌리요, 정치는 줄기와 가지였으며, 문화예술은 꽃과 열매였다.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풍성하게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불휘 깊은’ 거목이라도 존재의 의미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 사실을 잊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르네상스라는 대혁신을 선도했다. -이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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