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철저한 우상파괴자였다. 백남준 보면 백남준 죽여라
우리 모두는 백남준 은하계(galaxy) 속에 살고 있다. 그가 고안한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우리 손과 주머니 속에 품고 살고 있지 않나. 백남준은 우연설과 윤회설을 믿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어딘가 그가 사는 은하계 속에서 재회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우주 회로 안에 있는 주파수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We are the beautiful frequencies in his cosmic circuit)
세계에서 최고의 두뇌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게르만 민족의 후손인 독일인들은 왜 백남준을 그렇게 예술의 신으로 숭배하나? 아래 사진은 그의 추모 1주기를 맞아 대중교통 수단인 모든 전차(tramway)에 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붙이고 다니다. 모든 독일 시민(독일 뒤셀도르프 시)이 이 사진을 보고 그를 기억하라는 말인가. 그는 정말 독일에서 베토벤보다 더 존경을 받는가? 난 잘 모르겠다.
백남준과 샤머니즘 : 사실 굿의 절정(Highlight)은 굿(대감놀이 등)이 끝난 후 이뤄지는 밥상 공동체다 굿이 끝나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시간이 없다면 그건 가짜다. 그래서 백남준 독일에서도 그런 정신을 살려 공연 후 독일 관객에게도 뭔가 작은 소품이라도 나눠졌다고 한다. 백남준과 샤머니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백남준은 유년시절 서울에 있을 때면 계절마다 집에서 굿을 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서 큰 방직공장을 경영했던 선친은 가업과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위해 대감놀이 굿 행사를 주기적으로 가졌다고 한다. 이 영향 탓으로 백남준의 드로잉에는 박수무당 애꾸가 자주 등장한다. 백남준은 1959년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다. 이후 독일에서 퍼포먼스를 할 때는 공연이 끝난 뒤 관객에게 여러 가지 소품을 나눠주곤 했다. 굿을 하고 나면 제사 음식을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던 공동체 풍습을 재현한 것이다. 음식이 없을 때는 관객에게 물이나 콩을 뿌리기도 했는데, 이것도 일종의 샤머니즘에서 온 것 같다. -임영균
내가 백남준을 좋아하는 이유 내가 백남준을 좋아하는 건 허리 잘린 한반도에 산다는 게 너무 답답한데 그의 예술활동을 보면 정말 통쾌하다. 전 세계를 향해서 그렇게 호령하는 한국작가는 없었다. 서양인이 애지중지하는 피아노 그렇게 때려 부수는 작가도 없었다. 그리고 서양미술판을 칭기즈칸처럼 다 쓸어버리겠다고 한 예술가도 처음이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전성기는 1968년 68혁명시기다. 미국은 반전시위가 극에 달했다. 유럽질서개편기 그 가운데 유럽인 지식인이 있었다. 백남준 이 소용돌이(유럽의 정치사회적 격변기) 속 한복판에 있었다. 백남준 연구자인 이르멜린 리비어는 이런 모습을 "드넓은 공간과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라고 표현했다. 백남준은 그 어느 나라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떠돌았다 글로벌 노마드였다. 백남준은 자신의 사회적 발언 혹은 정치적 발언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비디오를 통해 서구에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새롭게 시도를 한 셈이다 .거기에 백남준만의 철학적 체계와 동양의 지혜를 담은 것인가
백남준이 초기 독일에 집중적으로 체류기간은 1956-1963은 바로 소위 라인강의 기적(1955-1966) 시기라 독일이 가장 다이내믹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부친도 독일에서 화학기술연수 혹은 유학을 하셨다(아래사진 1957년) 실험과 전위적 사고가 통하 룻 있었다 독일경제가 최고로 좋아질 때였다. 그래서 백남준도 바로 그런 독일의 시대 분위기를 탄 것이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도 신좌파인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왕성하고 활동하며 기존유럽질서를 붕괴시키는 시대였다 백남준은 운이 좋았던 것이다. 풍자적 현실인식이 가능했다. 백남준은 사르트로 못지 않게 1960년 유럽문화혁명의 기수였다. 서양의 구음악과 구질서과 구사상을 다 때려부셨다 피아노 때려부수고 바이올린을 개처럼 질질 끌고 다녔다. 여기서 백남준 돌파구는 비디오뿐이었다 그는 서구예술에서 개척할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모든 예술은 결국 기존의 것을 파괴함으로써 창조가 되는 것이다. -피카소 백남준 기존의 미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음악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미술을 창조했다는 점도 또한 기발하다. "새로운 전율(nouveau frisson)을 창조한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빅토르 위고가 보들레르의 시를 보고 한 극찬의 말이다.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은 "거문고를 팬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백남준이 '총체 피아노(아래작품)'에서 피아노를 패면서 하는 연주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더 심하게 말하면 피아노에 도끼질을 하면서 연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비서구적 (타악)방식으로 아시아에서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고. 그때 나오는 소리는 막힌 소리, 탁한 소리, 북소리에 가까운 소리, 무시할 수 없는 소리라고... 백남준은 예술세계는 콧대높은 서구인의 기를 팍 죽이고 죽사발 만들었다. 사실 그의 모든 아트 퍼포먼스는 충격적이다. 감히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서구인들이 숭상하는 피아노를 이렇게 모독하다니 예술은 새로운 걸 창조하는 행위기에 원래 신성모독에서 시작한다. 그 시대 일체의 우상을 파괴하는 행위다
198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미국에 대한 공헌이 큰 10명의 예술가 중 하나로 선정된 백남준이 메달을 목에 걸고 환하게 웃는 사진은 뿌듯한 자부심을 전한다. 배우 안소니 퀸, 가수 폴 엔카 등이 당시 백남준과 함께 상을 받았다. -조상인 기자 기사 중에서 - 사진 임영균
백남준 사진전 임영균 작가 <출처> https://www.sedaily.com/NewsVIew/1VJBGMMQV7…
NAM JUNE PAIK, NOW HERE 전시 (2019년 5월9일부터 5월25일까지) 2GIL29 GALLERY 백남준 지금 여기 임영균 사진전 <사진저작권> Copyrights ⓒ 임영균과 이구이길갤러리 이렇게 잘 기획된 백남준 전시(2019년 5월..
임영균의 사진전 ‘백남준, 지금 여기’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이길이구갤러리에서 최근 열렸다. 1980년대 백남준의 뉴욕시절 활동상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오는 10월 17일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개막하는 대규모 백남준 회고전을 앞두고 국내외에서 백남준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가운데 열린 전시라 눈길을 끌었다.2019년 5월 29일 기사 조상인 기자가 씀
임영균이 찍은 백남준 사진 IIIII 1982년(백남준 만 50세) 뉴욕 휘트니(미국)미술관 백남준 회고전이다. 샬럿 무어만은 병 중이었기에 몸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그러나 1964년부터 1982년까지 거의 20년 간 동고동락한 예술적 파트너인 백남준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발휘한 것 같다. 이 전시가 특별히 백남준 회고전이 아닌가. 백남준은 임영균 사진을 보고 이렇게 극찬을 해줬다고 한다 "임 선생의 사진은 마치 중국 북송시대 수묵화 같다"
<음악가로서의 백남준> 임영균이 찍은 백남준 사진 IIII 1982 휘트니 백남준 회고전 사진 사진작가 임영균 (B.1955) 은 대구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및 뉴욕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뉴욕 국제 사진센터 (I.C.P) 에서 수학했다. 1973년 문화공보부 장관상 (전국학생사진전 최고상) 을 시작으로 1985년 스미소니언 박물관 큐레이터인 메리 포레스터가 선정한 전 미주 10대 사진가상을 수상하고 2000년 미국 국무성 풀 브라이트 연구 기금을 받았다. 2007년에는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중앙일보 뉴욕 지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1983-1988년) 뉴욕타임즈 및 국내외 일간지와 잡지에 글과 사진을 발표했으며, 뉴욕대학교 사진학과 겸임 교수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국제사진센터, 코닥 사진박물관, 독일 뮌스터 시와 올덴부르크 시립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집으로는 Destiny (뮌스터 시립미술관), 일상의풍경 (열화당), 임영균 인물 사진집 (안그래픽스), 임영균 사진집 (시공사) 등이 있다.
임영균이 찍은 백남준 사진 II 무어먼 사진 1장
임영균이 찍은 백남준 사진 III
임영균 뉴욕에서 1982년 국제사진센터(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에서 유학을 시작했고 알바를 하면 어렵고 공부를 하는데 뉴욕사람들 한국예술가를 잘 모르고 백남준도 일본 작가로 알자 그때부터 백남준을 사진 찍기로 결심하고 여러 번 전화 끝에 백남준 만날 수 있었고 휘트니백남준회고전에 초대를 받기도 했다. 마침내 백남준 작업실을 방문해 백남준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1983년 인가보다 그는 마치 인류 학자와 미래 학자처럼 이야기해 했다면 그때 이런 말을 들었단다 "앞으로 TV를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시대가 올 것이다. 난 인공위성을 가지고 작업을 하거야. 인간이 어리석은 것은 자동차를 발명하면서부터였어. 헝가리에 가 봤는가. 우리말과 같은 것이 많이 있어. 헝가리 사람들도 '가슴'을 '가슴'이라고 하고, '굿'을 '굿'이라고 하고 또한 한옥의 나무 냄새도 똑같지. 뉴욕타임스 보는가? 매주 과학 센션은 전문 기자가 쓰지" 3시간이상 힘들게 작업을 한후 임영균은 뭔가 작품이 될 거라고 예감을 했다. 1984년첫날 '뉴욕타임스' 예술섹션에 임영균이 찍은 백남준 사진이 나온 것이다.
"예술 사진이란 사진이 사진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사위에 접근하려는 정신적 의도[태도]이다" -백남준> 백남준 뉴욕에서 임영균 사진작가에게 편지 보내면서 사진이 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진(寫眞 진짜의 사물)-사가(寫假 가짜의 사물)-사위(寫裝 위장된 사물)라는 말을 꺼낸다. 회화는 눈속임이듯 사진의 정신은 寫眞이 아니라 寫裝인가
사이버네틱스 아트: 인공지능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다운로드
뇌 과학 초기 연구자들 이구동성으로 뇌가 곧 마음이라라고 보다. "인간의 몸이 환경의 세상과 일체가 되어 적응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몸의 행위 하나하나가 마음을 구성한다고 보고 이 과정에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 개념을 탄생시키다" 백남준 1965년 <사이버네틱스 예술>이라는 글을 발표. 미래를 주도할 사이버네틱스 즉 인터넷 예술에 주목하다. 이것은 개인을 위한 예술이 아니고 사회(Commune)를 위한 예술이다. 그래서 백남준 1970년 위성아트의 출발점인 TV Commune(인터넷의 또 다른 이름)을 발표하다.
1965년 사이버네틱스(인터넷 전신) 디지털 세상에 대한 환상: 인터넷 발상의 시발점 백남준 미국의 수학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1894-1964) 사이버네틱스 이론에 큰 영감을 받다. 동물(식물포함)=기계=인간을 동급 그 사이의 위계를 해체하다. 우월을 가리지 않는다.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고 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인공두뇌학>으로 보다 여기서 기계의 인간화를 말하다. 기계도 인간이다. 자연도 인간이다. 'TV정원' 천지인은 하나라는 동양사상을 더 확장해서 해석한 것이다. 융합의 창조세계과 일맥상통한다. 쉬운 말로 퓨전 하이브리드 비빔밥이 조형예술화 한 것이다. 서양의 이원론에는 답이 없다. 끝없는 경쟁과 대립이다 동양의 일론원으로 가야 답 나온다. 그렇다고 백남준이 생태계(전 지구적 재생)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디어 생태계 보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TV정원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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