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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중요전시행사

김환기 청자빛 유전자 고려청자에서 왔나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가 만나 사람들] 환기미술관에서 2011.09.29-10.30까지 

김환기 I 'Universe' 유채 254x254cm 1971 © 환기미술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일본 유학시절과 해방 전후 그리고 파리, 서울, 뉴욕시대에 이르는 일생 동안 미술은 물론 문학과 연극,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과 교류하며 한국 근현대 문화형성기, 많은 족적을 남기며 예술에 대한 깊이를 다졌다. 김환기는 1930년대 후반, 한국 문학의 초석을 이루는 많은 문학인들과 교류를 나누며 이들 문학작품의 장정과 삽화 작업은 물론 그 스스로 문필 활동을 하기도 한다. 그 중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수필가인 근원 김용준과의 우정은 여타 문학인들과의 교류 중에서도 정수를 이루며 많은 미담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해방 직후와 6.25 전쟁기에는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이중섭, 백영수를 위시한 신사실파 동인들과 함께 ‘추상을 표현의 양식적 수단으로 하더라도 그 바탕이 되는 내용은 사실 즉, 자연의 모습이나 현실, 또는 진실의 반영’이라는 기조로 미술의 새로운 조형성을 모색하는가 하면 1956-59년 파리 체류기, 남관을 비롯한 당시 파리진출 작가들과 함께 파리화단에서 활동하며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선양과 방향성을 고민하였다. 

이후 서울에 돌아온 김환기는 파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심화된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이 시기 김환기는 미술평론가인 이경성은 물론 동료 화가아자 미술교육자인 이봉상 등과 함께 미술대학의 이상을 모색하고 사명을 정의하면서 건전한 후진 양성의 당위를 피력하고 실천하였다. 

그리고 김환기는 1963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출전을 계기로 뉴욕에 정착하여 1974년 작고하기까지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숙의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순수 미술인으로서의 고행을 자처하기에 이른다. 당시 김환기가 보여준 화가로서의 진지한 작업 태도와 예술에 대한 번뇌는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과 더불어 그의 작업을 지켜보았던, 김환기의 뉴욕예맥들이라 별칭 되는 작가들에 의해 기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환기미술관 

화제란 보는 사람이 붙이는 것, 아무 생각 없이 그린다/ 생각한다면 친구들, 그것도 죽어 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 생각뿐이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김환기, 1972년 9월 14일 일기 中 

그의 반려자였던 김향안의 회고에 의하면 청년시절 김환기는 주위의 선배 예술인들을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이 속에는 춘곡 고희동, 아정 김용진, 월탄 박종화, 이산 김광섭, 소천 이헌구, 유치진, 정지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한국 전쟁기를 거쳐 파리와 서울시기, 김환기는 신사실파 동인들은 물론 파리와 뉴욕 진출 작가들과 함께 한국 화단의 다양성을 개척해 나감과 동시에 이를 후대 화가들에게 전수해주고자 많은 인연에 인연을 거듭하였다. 

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수화 김환기가 만난 사람들(1)>은 김환기의 각 시기별 작품과 더불어 그와 교류를 나누었던 많은 문화예술인의 작품과 자료 일체를 전시함으로써 김환기와 그가 아꼈던 미술인들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주변의 많은 지인으로부터 칭송 받았던 김환기의 인간미와 앞서가는 사고, 삶과 예술에 대한 넉넉한 해학을 되짚어 보는 이번 전시는 김환기와 그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완결의 의미가 아니라, 향후 '수화가 만난 사람'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고증에 대한 출발점이고자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2011 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수화 김환기가 만난 사람들1>은 김환기의 글귀처럼 ‘사람을 통해 보는 명랑한 그림들’을 소개하며 해를 거듭할수록 대상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명랑한 전시’, ‘명랑한 이야기’들로 전개되었으면 한다. 

김환기 그림 편지 

수화 김환기와 김향안(1916-2004) © 환기미술관 

김환기는 편지를 참 잘 쓴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글이다. 때로는 지나치게 정이 넘쳐흐르는, 그러나 나는 곧 답장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 일방적으로 또 편지가 왔다. 나는 그의 편지를 몇 번씩 받으면 한 번씩 답을 썼고, 그러는 동안에 한 번 밖에 만나지 않았던 우리는 편지로써 가까워졌다. 김향안, '정情이 넘쳐흐르는 수화의 편지'中 

김향안은 김환기 예술세계의 가장 든든한 조언자로서 인생을 함께 하고, 그의 사후에는 남겨진 작품을 정리하고 널리 알림은 물론, 그 자신 또한 문필가이자 화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김환기와 김향안이 부부의 연으로 만나기 시작하는 1943년경, 당시 김환기는 반생을 살고 30에 인생과 예술을 재출발하려고 고민하던 시절로 선친이 남긴 소작인들의 빚 문서를 모조리 돌려줘버리고 지장地莊이라는 유산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4년, 김환기는 김향안과의 결혼을 계기로 일본 유학 이후 고향인 기좌도와 서울을 오가던 시절을 청산하고 본격적으로 상경하여 미술인으로서의 활동을 전개한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이러한 작심作心의 시점에서부터 1974년 작고하기에 이르는 근 30여 년을 함께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김향안은 뉴욕의 아틀리에에 남아 김환기의 작품을 정리하고 알림으로써 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밝은 광선으로부터 오는 화사하고 섬세한 빛깔 그리고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하여 몽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김향안의 회화 작품들은 김환기 작고 이후 뉴욕 아틀리에에서 그려진 작품들로 문필가로서의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와 화가의 아내로서 가지는 심미안을 엿볼 수 있다. 

수화 김환기와 이봉상(1916-1970) 

이봉상 I '나무' 유채115*168cm 1963 © 환기미술관 

김환기와 이봉상의 인연은 이봉상이 1954년 문화세계 1월호에 발표한 「내용의 참된 개조를 위하여」라는 글 중 김환기의 작품에 대한 언급을 통해 확인된다. 본 글은 1953년 미술계를 되짚어보는 기고로써 이봉상은 그 중 신사실파 3회전에 출품한 김환기의 작업에 대해 철저하고도 열렬히 나아가고 있다고 평하였다. 이후 이들의 관계는 이경성 등과 더불어 같은 대학에 재직하면서 더욱 돈독해졌음을 여러 문헌과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봉상은 1950년대에 강렬한 색채와 거친 필치로 주로 나무와 수풀, 동물 등을 한국적 설화를 가미하여 작업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이봉상은 화면의 강렬한 색감을 의도적으로 탈색함과 동시에 대상의 형태들 역시 관념화, 추상화하기에 이른다. 김환기는 뉴욕에 머물던 1970년 8월의 어느 날, 이봉상의 죽음을 전하는 비보를 접하면서 청춘 시절을 같이 살던 친구의 타계를 애도한다. 

오랜만에 석호 편지 오다/ 그러나 그것은 비보悲報를 전하는 편지다/ 이봉상 형이 신장염으로 별세/ 청춘 시절을 같이 살던 친구가 또 세상을 떴다. 김환기, 1970년 8월 18일 일기 中 

© 환기미술관 

이번 환기미술관 특별기획전 <수화 김환기가 만난 사람들1>에 참여하는 정문규과 석난희는 김환기의 미술대학 재직 시절 제자이며, 한용진과 문미애는 김환기와 뉴욕시절을 함께한 이들이다. 정문규는 1960년대 견고하고 침잠하는 깊이를 지닌 추상작업에서 출발하여 근작에 이르러 원색의 강렬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한 자연 풍광과 화훼류의 자유분방한 표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석난희는 흑색과 청회색 등 한정된 단색조의 화면에서 자유로운 선획들을 무질서하게 움직이며 우연의 하모니를 펼치고 있다. 문미애는 철저히 형태를 재현하고자 하는 유혹을 멀리하고 깊어진 색감과 터치로 그의 청년기, 앵포르멜 운동에 동참하던 자유정신에 입각한 화면으로 평생 일관하며 작업하였다. 

그리고 한용진은 돌에 새겨진 작은 흔적들을 가감 없이 관찰하고, 교감하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 돌 자체에 내재된 시간의 흔적과 에너지를 밀도 있으면서도 조용한 형태로 작업하고 있다. 이들 작업 정신의 공통점은 모두 1960년대 한국의 뜨거운 추상운동, 앵포르멜의 전유에 동참하거나 동조하였다는 것이다.  

<추가> 60년만에 돌아온다는 黑龍의 해, 2012년 용처럼 하늘로 웅비하자] 

- 미술이란 명화를 감상한다기 보다는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기술을 터득하게 해주는 선생이 아닌가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 캔버스에 유채, 60.5*41cm 1956 ⓒ 갤러리현대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전] 2012.01.06(금)-02.26(일) 갤러리현대 신관 및 본관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122번지 2287-3500) 
[관련기사] 김영태기자 
 

김환기 I '항아리와 꽃가지' 캔버스에 유채 78*100cm 1957. 미공개작  ⓒ 갤러리현대 

김환기는 1913년 전라도 신안군 기좌면(안좌면)에서 부농 김상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잠시 서울 중동 중학에 진학하기도 했으나 1931년에 일본에 가 동경의 니시키시로 중학을 다녔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학부에 들어가 졸업했다. 당시 동경의 실험미술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으면서 김환기는 추상미술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1936년에 동경의 아마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 무렵의 작품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론도>나 <창>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곡선과 직선,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된, 당시 서울 화단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회화가 대담하게 시도되어 우리나라 추상회화의 선구적인 화가로서의 그의 초기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생-루이 아뜰리에에서 김환기 1957. 갤러리현대 제공 

1930년대를 동경에서 벌어지고 있던 새로운 추상미술에 매혹된 일종의 실험 시기라 본다면 1950년대는 무언가 우리 것을 그려야 된다는 자각의 시기다. 이 무렵 그의 그림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들은 산이나 달, 학, 매화, 조선시대의 백자 등으로 전통적 소재로의 전환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1956년 파리에 가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파리에 간지 1년 후에 제작한 <영원의 노래>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또한 풍경화에서 대부분 푸른색으로 일관된 색채를 보이는데 그 당시 그는 어느 프랑스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하늘과 동해바다는 푸르고 맑으며 이러한 나라에 사는 한국인들은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아마 그에게 푸른색은 우리나라를, 아니면 작가의 마음 상태를 상징하는 색채였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 I '10만개의 점(A Hundred Thousand Dots)' 코튼 위 유채(huile de coton) 270*205cm 1973 

[유홍준 교수] 1부 '김환기 특강': 2012.01.10 (화) 2시 2부 유홍준 교수와 함께 하는 '신안 김환기 생가 투어': 2012. 02. 20(월) 유홍준 교수 특강, 신안 김환기 생가 방문, 2012.02.20.월, 선착순 40명, 2287-3500 전화문의

"김환기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어려서 신안 밤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보고 몸에 전율을 느끼며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던 그 순간들을 뉴욕에서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하며 그 간절한 마음을 화폭에 수천수만 가지의 점으로 그렸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4년에 작고한 김환기(1913~1974)의 1970년대 점화(點畵) 시리즈는 왠지 친근감이 간다. 원래 구상을 거쳐 추상을 해서 그런지 또 35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라 그런지 우리에게 너무나 편안한 여백과 여유를 주며 감상하게 한다. 

2층에서 보는 숭고한 파란색 점화, 정겨운 회색 점화,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란색 점화를 보고 있으면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그림이 주는 황홀함에 빠진다. 저것이 하늘의 별인가 바다의 물인가 인간의 발자취인가 태초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것은 김환기 화백이 고독한 뉴욕생활 속에서 밤하늘 저녁별을 보며 그리운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찍어나간 점들로 구성된 말 그대로 점화들이다. 

김환기 1972년 뉴욕 아틀리에. 점화를 마무리하는 모습  

그는 작업에 임하는 심정을 뉴욕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로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갔을까". 또한 이 작업의 힘듦을 이렇게 썼다. "마치 종신형 죄수가 되어서 일하는 것 같고…" "깜깜한 하늘 밖에 한번 못 나갔다." 


김환기 아내 김향안 여사는 점화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속틀을 짜고, 캔버스를 매서 바닥에 놓고 아교질을 한 다음, 한 폭을 완성할 만큼 물감을 풀어 유리병에 준비 한 후, 점을 찍고 그 하나하나를 사각형으로 돌려 싸기를 반복한다." 
결국 김환기는 결국 점·선·면으로 회귀하여 공간의 심화와 확대를 기했고 초기 모더니즘 모색과, 중기 한국적 조형미 탐색을 거쳐, 마침내 후기 순수추상으로 모든 실험과 탐색을 다 쏟아 부어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 누구도 공감할 여지가 있는 추상화를 완성했다.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970 코튼에 유채 236×172cm  ⓒ 갤러리현대 

마침내 김광섭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부제가 붙은 김환기 화백의 추상화의 한 획을 긋는 대작인 '16-IV-70#-193(1970)'이 탄생했고 이를 전후로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국의 하늘과 바다, 뉴욕의 별빛과 달빛이 고스란히 담긴 추상화 말이다. 

김환기전시에서 만난 박서보화백. 

이우환도 "다른 어느 색보다도 블루는 멀다. 블루의 다가가기 어려움은 하늘에 닮았다. 블루, 생과 죽음을 품은 무의 색"이라고 했는데 블루 톤도 천 가지 만 가지지만 이렇게 푸른 블루를 사용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 만큼이나 했을까"하는 그의 염려 그 이상으로 그가 도달한 추상적 조형은 우리에게 놀라운 경이로움을 맛보게 한다. 이건 작가의 염원이 하늘의 별처럼, 대지의 꽃처럼 확고히 분출되었음을 뜻한다. '출처' 삶의 흔적과 사연들, 점·선·면에 담다 - 오마이뉴스  

'무제 25-V-70 #173' 코튼에 유채 127*86cm 1970 ⓒ 갤러리현대 

"그는 민족적 서정을 현대미술의 모더니즘 속에 어떻게 구현할까 치열하게 고민했던 작가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소재, 사슴, 학, 여인, 항아리, 산, 달을 절묘하게 그렸죠. 모두 민족적 서정이 담긴 겁니다. 그의 그림은 귀티가 나죠. 텍스처와 색감도 남다르고요. 

김환기가 미국의 색면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FBI까지 동원해 액션페인팅의 작가 잭슨 폴락을 키웠는데, 우리도 김환기를 세계로 키워야 합니다. 로스코와 엘스워스 켈리, 김환기를 묶어 세계순회전을 열어야 합니다. 김환기 추상은 그들과 동시대에 이룬 것이니까요. 김환기는 로스코와 맞짱 뜰 수 있는 작갑니다" - 유홍준 교수 특강 중에서 

[김환기 美추상거장 로스코에 비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