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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박여숙화랑I] '텅 빈 충만 展' 기획 정준모(비평가)

[텅 빈 충만 展] 기획 큐레이터; 정준모(전 국현 학예연구실장, 미술비평) 전시기간; 2020. 04. 10(금) ~ 05. 10(일) 장소 <박여숙화랑>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 38길 30-34 (이태원동 262-23) 02) 549-7575 / 한국의 단색조 회화, 시간과 과정과 비움의 현현(顯現, Manifestation) parkryusook@gmail.com <수정중>
<관련사이트> https://seulsong.tistory.com/924

최상철 작품 무물 13-9

박여숙화랑은 청담동에서 이태원으로 이전하고 나서 두 번째 기획전을 마련한다. 오는 4월 10일부터 5월 10일까 지 1개월간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정준모(큐레이터, 미술비평)가 기획한 한국 현대미술의 큰 줄기를 이루는 ‘단색조 회 화’를 대표하는 주요작가 총 18명의 작품을 선 보이는 <텅 빈 충만>전이 그것이다.

이 전시는 원래 단색조 회화를 통해 한국 드라마와 K팝 열풍 속에 넓고 깊은 한국 문화의 정신성을 세계에 알려 한국문화의 국제적인 보편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한국의 품격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트래블링 코리안 아 츠>(Traveling Korean Arts)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된 전시다.

[쌓임과 겹침 -정준모] 단색조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는 ‘시간의 중첩’과 ‘행위의 반복’으로 작업은 ‘겹’ 또는 ‘겹겹이’ 쌓아 올려진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지지체에 매우 균질한 행위가 거듭되면서 그것이 거듭되어 쌓일 때마다 그 결과물은 지지체와 혼연일체가 되면서 서 정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언 듯 보면 하나의 균질한 색채로 도포된 듯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면 화면의 호흡이 느껴지면 서 신비로운 느낌마저 준다.

[1] 윤형근은 그림의 바탕이 되는 지지체에 붓질을 가하지만 붓질보다는 화면 즉 지지체와 일체화한 흔적을 중시한다. 그의 그림 을 두고 쥬디스 스테인(Judith Stein,1940~2017)같은 이는 “강한 현존성-엄숙히 절제된 침묵”이라고 평했다. 검은 듯한 진 한 갈 색이나 진한 청색이 수차 거듭 어느 부분에 반복적으로 칠해지면서 층위를 이룬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착색과정에서 지지체에 흡수되면서 지지체와 자연스럽게 일체가 되는 동시에 그 반복되는 무엇인가를 칠하는 과정에서 남는 경계선들이 겹쳐지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 미묘한 겹의 차이를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그림과 바탕, 물감과 지지체라는 이분법적 구 조는 어느 사이엔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탈속화 한다. 이제 그에게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곳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마치 바탕과 칠해진 곳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바탕인 동시에 그림이 된다.

[2] 김창열의 작업은 어느 면에서 보면 일종의 ‘거울회화’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대상을 철저하게 묘사한듯한 그래서 곧 흘러내 릴 듯한 물방을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극사실회화로 분류하기보다는 단색조 회화에 편입시키는 이 유는 그의 작의가 물방울에서 시작했다하더라도 오늘날 그의 작업은 행위의 반복과 그려진 것과 바탕 즉 지지체의 일체화를 이룬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투명한 물방울을 보지만 실인즉 그의 물방울은 오직 보는 사람의 경험과 착시에 의 한 것으로 실제로는 지지체를 살려두고 어느 일부에 물방울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지지체와 가장 가까운 색을 최소한 올 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 문자가 바탕에 있는 경우도 그 자체가 지지체로서, 바탕에 올라앉은 형국이 아니라 지지체와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물방울 그린 것이 아니라 지지체와 가장 최소한의 근접한 색채를 반복해서 올려놓고 관 객들에게 물방울로 보이도록 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지지체 위의 그림”이라는 고정관념 또는 습관 때문에 물감을 물방울로 인식하게 된다.

이번 전을 기획한 정준모 미술비평가

[3] 김아타, 사진은 인화지에 이미지, 형상을 기계적인 장치와 현상과 인화의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 기계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김아타는 이런 사진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 그의 사진은 이미지 또는 대상을 화면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 라 사라지게 만든다. 그는 형상을 날려버린 사진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사진의 존재와 인간의 실존의 문 제를 동시에 묻는다. 이런 불가사의한 그의 사진의 매력은 그의 사진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있다. 그의 작업의 비밀은 장노 출기법에 있다. 8시간 이상 노출을 주게 되면 피사체인 풍경 또는 대상의 움직임과 비례해서 상이 사라지게 된다. 빨리 움직 이는 대상은 빨리 사라지고, 천천히 움직이는 대상은 천천히 사라진다. 다만 움직이지 않는 정지된 것들은 분명하게 남는다. 도시를 찍다 보면 건물은 그대로인데,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아 유령의 도시처럼 아무도 없는 텅 빈 도시만 남는 다. 움직이는 살아있는 생물들은 사라지고, 움직이지 않는 무생물만 사진에 남는 그의 사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 진다’는 테제를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4] 김택상은 보거나 느낄 수 없는 두께를 천천히 쌓아 올린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이런 ‘쌓아올림’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 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게 지지체는 프레임이 없는 얇디얇은 천이다. 거의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지지체가 매우 농도가 낮은 다만 작가 순순한 물과 구별하기 위해 색을 풀어놓은 맑은 물이나 다름없는 매우 농도가 낮은 물감 속에 담구어 물이 증 발하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담궈 놓은 지지체는 계속해서 이런 반복적인 행위와 시간이 거듭됨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 한다. 질료로서의 물감이 지지체인 화면에 흡수되면서 상호 동화되어 질료와 지지체가 하나로 통합되며 그 중첩된 시간의 축 적물 또는 퇴적물은 작품이 된다.

[5] 강영순의 경우도 겉과 속이 같다. 그렇기 때문에 겉과 속을 구분할 수 없다. 강영순의 작업에서 지지체는 지지체라고 하기에 는 너무도 약하고 부드럽다. 무엇인가를 지지하기에는 턱없이 연약하다. 우리에게 그림, 미술작품은 항상 지지체 위에 발린 물감으로 대상을 표현하다고 믿어왔다. 제 아무리 미술이 추상화하고, 첨단의 새로운 미술이 등장해도 미술이란 용어가 붙어 있는 이상 ‘재현의 미술’은 우리의 고정된 관념이다.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재현’의 신화는 우리를 괴롭 혀 왔다. 그런 점에서 강영순의 회화는 회화 이전의 회화인 동시에 회화가 아닌 회화이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표현하기보다 는 지지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작품으로 오브제로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보여주기보다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거울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가끔은 작품 자체가 되어 작품이 작품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단색조회화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진영

[6] 이진영의 작업은 인간이 19세기에 화가들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 사진기를 이용해 작업한다. 그의 작업은 가장 명확하게 대상 을 포착해낸다는 사진의 불명확성을 사용해 작업한다.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대상은 모호하다. 형태에서도 모호할 뿐만 아 니라 사진이냐 회화냐의 경계도 모호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경계나 구분이 없이 오직 작품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작품이 담고 있는 형태나 색채는 부수적인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아날로그적인 암브로타입이 지닌 액체류의 물성과 가장 단단한 고 체류인 유리의 물질성이 인화라는 과정에서 물이라는 순수한 액체를 만나 서로 밀어내고 결합하면서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한다. 기계적인 카메라의 필연성과 아날로그의 우연성이 결합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행위의 결과물로서 얻어지는 장시 간 노출의 사진은 시간의 중첩이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모호함이 사진을 덮는다.

[7] 남춘모 형식상 이들의 작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른바 반복과 겹침이라는 방식에서 남춘모의 작업은 별다르다. 그는 일정 넓이로 자른 광목천을 섬유강화수지(FRP,Fiber Reinforced Plastics)를 발라 건조시켜 ‘ㄷ’자 모양의 기본형태를 만든다. 그 후 이를 기본단위로 전후좌우로 이어 붙여 증식시켜 하나의 부조(Relief)같은 회화를 완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매우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질서를 지녀 매우 시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각각의 단 위가 서로 다른 모양과 질감 그리고 색을 가지고 있어 촉감적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것이 하나가 되어 배경인 동시에 작품 이 되어버린다. 여기에 빛을 받아 은은하게 번지듯 퍼져 나오는 각각의 단위가 만나면서 자아내는 명과 암 그리고 그 사이에 서 변화하는 미묘한 중성적인 색은 울림을 넘어 여운이 된다. 따라서 그의 스스로를 드러내는 절대적인 명료함은 단순한 구 조와 기계적인 정확한 기법을 뛰어넘는다.

<단색화는 결국 달항아리, 그 물성의 질감과 시각적 촉감을 회화적으로 현대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성-시각적 촉감: Materiality-Visual Touch] -정준모(미술비평) "필자는 한국의 단색조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시각적 촉감’을 상정한다. 일루전 없는 때문에 화면 자체에서 촉감을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치 각기 다른 유백색의 달 항아리 표면에서 각각 다른 질감과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같지만 미세하게 다른 그리고 그 미세함에서 커다란 다름을 찾아내거나, 그 다름을 확인하는 일이야 말로 시각적 촉감을 만끽하는 것이리라" -정준모. 아래는 박서보, 정창섭, 정상화, 김태호, 김근태, 이진우, 최병소, 김덕한, 윤상렬 작가에 대한 단상 <아래, >

[1] 달 항아리를 보며 멀리서 보면

[2] 한국의 단색조회화 또는 모노크롬 특징: 1) 박장년, 김용익, 김창열, 신성희, 이동엽, 허황, 서승원, 곽인식, 이승조, 김종일, 심문섭, 김홍석, 이강소 등이 있다. 정상화, 정경연, 진옥선, 최상철, 윤미란, 정영렬, 한영섭, 최창홍, 윤명로 등을 들 수 있다.
둥글지만 가까이서 보면 모양이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달 항아리는 한국미술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미학을 그대 로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투명한 유약의 우윳빛 색은 가히 색이 없는 것 같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을 뿐 자신의 색을 분 명하게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크고 가끔은 뒤틀린 항아리의 특징은 단순하게 보고 즐기는 완상용이 아니라 생활에서 사용 하는 생활 속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달 항아리는 조선 시대 후반 즉 19세기에는 접시와 함께 가장 많이 생산되던 생활 도구였 으며 부와 지위와 관계없이 반상을 가리지 않고 집 집마다 한 두 개씩 놓고 쓰던 생활필수품이었다.

박여숙 관장

[2] 한국의 단색조회화 또는 모노크롬의 특징 에 대한 회복과 질료의 비물질화를 시도하는 경향4)(그림 8, 9), 평면을 찢어 내던가 뚫어 입체적인 소통을 시도하거나 한지 에 관심을 가지고 스며드는 수묵화의 침윤의 방법을 원용하거나 5)(그림 10, 11) 그리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평면에 대한 자각 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편 그린다는 자체의 표현성을 지워가는 경우6)(그림 12, 13)로 나누어 볼 수 있다.7)

한국의 단색조회화를 한국에서는 고도의 정신적인 세계의 구현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한국의 선비문화를 통해 설명하고 이해 하려 했다. 또한 다색주의의 반대적 개념으로 탄생한 서구와 달리 한국의 단색조회화는 한국 고유의 자연관과 물질관에 바탕 을 둔 독창적 장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의 단색조회화는 크게 보면 하나의 운동이고 경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다양한 양식들이 존재한다.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호모 에렉투스)-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시대(융기문 토기)-민무늬토기 시대(청동기전기)-원삼국 시대(청동기 후기) 삼한[원삼국] 시대(철기시대)-삼국 시대(오리모양토기)-고려청자-조선백자-20세기 한국(단색화)

[스스로의 회화 -정준모] 조각가 J.맥클라겐(John H. McCracken, 1934~2011)은 합판으로 만든 사각형 막대에 광택 페인트를 칠해 합판 고유의 질감을 철판처럼 다른 느낌으로 변모시킨다. 이처럼 한국의 단색 화가들은 그림의 바탕이 되는 지지체로서의 평면을 전혀 다 른 새로운 평면으로 치환시킴으로서 그림을 위한 지지체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를 또 다른 지지체로 탈바꿈시킨다. 마치 페 인트로 합판을 철판처럼 만들어 버리듯. 그림이 그려져야 할 지지체가 바로 지지체인 동시에 그림이 되는 것이다.

정준모 미술비평가

따라서 이들은 그리기보다는 지지체를 가지고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지지체 자체를 탐구한다. 그리고 지지체가 곧 작품 이 되도록 한다.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작가로서 작품에 개입하는 것을 절제한다. 이렇게 단색조를 지향하는 작가들은 조건 또는 바탕이 아닌 존재로서의 평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새로운 자신만의 ‘그리기’가 아닌 독특한 방식을 통해 평면으로서의 회화의 한계상황과 평면구조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출한다. 하지만 이런 독창적인 방법론에도 불 구하고 그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자연성이다.

이렇게 스스로 회화가 회화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자신의 작품을 위임하거나 또는 방기하는 작가로는 윤형근. 정창섭, 김 택상, 김근태등의 작업에서 잘 드러내지만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최상철이다. 최상철의 작업에 최상철은 없 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업은 우연과 우연의 중첩을 통해 작품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완성되도록 방임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스스로 그려질 뿐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은 마치 구도의 방편처럼 작용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물감이 묻은 돌을 화면 에 던져 구르도록 한다. 돌을 놓는 위치도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을 던져 우연히 떨어진 그곳에서 돌은 구르기 시작 한다. 이렇게 천 번의 행위를 반복해서 얻은 결과물이 그의 작품이 된다. 사실 욕심을 버리고 작가로서의 개입을 최소화하려 는 것은 더 큰 욕심일 수도 있다.

욕망 덩어리인 인간에게 절제, 자제란 불가능한 일 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불가능을 간단없이 시도한다. 그에게 천 번이란 스스로 정한 제한조건은 작가로서 작품의 조형적인 요소인 균형과 비례, 변화와 대비, 리듬, 통일등등의 조형적인 요소를 고려해 자신이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장치이다. 물론 이런 경향은 그만 의 전유물이 아닌 단색조 화가들의 각기 다르지만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70년대부터 단색조회화에 천착해 온 작가들의 화두 중 하나였던 ‘무위자연’과 닿아있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이 단어, 특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무위’란 단어는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회화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그리려고 하지 않는 가운데 마음 가는 데로 스스로 그려진 것을 의미한다.

단색조회화를 조금 더 깊이, 긴 호흡으로 들여다보면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우러나오듯 생각이 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쓰 이는 원초적인 본질 또는 한자 그대로 “스스로 ‘자’에 그러할 ‘연’”이라는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헤아려 보면 단색조의 깊은 사유의 세계에 도달 할 수 있다. 물론 단색조 회화가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개념미술에서 외형적인, 형 식적인 유사성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이들 한국의 70년대 회화가 지닌 특성상 화면과 화면위에 그려진 또는 행위의 결과, 산 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화면과 일체가 된, 화면이 되어버린, 지지체에 올려진 물감과 물감을 올리는 행위가 하나의 질료로 지지체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미니멀이나 개념미술보다 되려 쉬포르 쉬파스(Support Surface)와 맥이 닳아있 는 것처럼 보인다.

[물성-시각적 촉감] 미술은 원래 시각이 아니라 촉감이다. 촉감에 가장 예민한 사람이 진짜 화가다. 뭔가를 살짝 만져봐도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화가인 것이다. 촉감의 미학이 그런 면에서 중요하다 남녀의 사람도 마찬가지도 살이 살짝 스쳐도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진짜 연애다. 작은 촉감 하나로도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나의 서론

통상 한국의 단색 화가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한국의 전통 자연관을 바탕으로 수묵화와 서예의 정신인 여백, 관조, 기, 정중동, 무위자연, 풍류 등등 총칭해서 ‘한국의 정신적 가치’를 내면화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란 한국의 전통사상과 정신의 모두를 거느리는 넓은 의미의 가치이다. 따라서 한국 단색조회화를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범주를 너무 확대하는 나머 지 오히려 더욱 더 모호하고 실체가 없는 언어의 향연으로 치달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한국의 단색조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시각적 촉감’을 상정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시각과 청 각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촉감에 대해서는 그렇게 민감하지 않다. 하지만 촉감이란 원래 ‘외부의 자극이 피부 감각을 통하여 전해지는 느낌’으로 사물과 직접적인 접촉이나 만남을 통해 전달되는 감각이지만 시각적 촉감은 미술에 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시각적 화면 고유의 물질적 재질감은 그림을 그림으로서 표현된 대상의 재질감으로 대 체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유리잔을 그린 그림에서 유리잔의 질감을 느끼는 것은 시각적 촉감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는 미술의 중요한 요소인 양감과 함께 촉각적, 시각적인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재불화가 이진우와 박서보 화백

하지만 단색조회화에서의 시각적 촉감은 회화의 기본인 지지체와 그 위에 그린다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물감, 안료의 물성 에 의해 드러나는 질감을 눈으로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즉 손으로 만져보는 등의 촉감을 통하지 않고 시각적으로 공간적 환 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질감,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사물이나 그려진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회 화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눈을 둠으로서 화면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러한 시각적 촉감을 얻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때문이 다.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그리고 있지 않아 일루전이 없는 때문에 화면자체에서 촉감을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마치 각기 다른 유백색의 달 항아리 표면에서 각각 다른 질감과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같지만 미세하게 다른 그리고 그 미세함에서 커다란 다름을 찾아내거나, 그 다름을 확인하는 일이야 말로 시각적 촉감을 만끽하는 것이리라. 

박서보의 연속해서 반복적으로 내려긋는 선은 계속되고 반복되면서 지지체인 종이의 결들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밀려난 종 이를 구성하는 펄프의 속살이 선과 색과 함께 뒤 섞여 수많은 결을 만들어 촉각적인 화면의 결을 조성한다. 이렇게 그의 ‘결의 회화’는 그의 간단없이 거듭되는 행위로 인해 어느새 무아지경에 들어 스스로가 하는 행위의 동기와 결과를 놓아버리고 만다. 그렇게 결과를 방임하는 무관심성의 결과는 그의 작업의 백미이다. 게다가 그의 ‘무위자연’이란 개념을 접하면 그의 회화를 읽는 일이 한결 수월하고 편해진다. 그의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스스로 그러하고 자유여체(自己如此) 즉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른 것이며, 사물의 실상과 자신이 합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원만성이다. 즉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삶이 무위자연이다. 따라서 그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무한한 행위의 반복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이 된다.    


정창섭의 경우는 종이 그 자체가 펄프의 형태로 스스로 모양을 잡으면서 캔버스 표면에 자리를 잡으면서 혼연일체가 된다. 그 는 이 과정에서 재료인 닥과 작가의 행위가 일체화하면서 동양적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통해 합일을 이룬다. 따라서 그의 작 업은 닥의 물성을 드러내어 침묵의 세계,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찰나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화면을 통해 느껴지는 찰나는 그림이라는 속성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찰나는 곧 영원이 된다. 그렇게 흐르듯 번지듯 스스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 에 작가가 부여하는 사각의 틀에 밀려 디시 스스로의 모습을 정하는 자연스러움은 그의 자연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한지는 한지이다. 

정상화는 고령토를 지지체에 칠하고 접었다 펴면서 생기는 선을 토대로 물감을 계속 쌓아올리고 그후 다시 ‘뜯어내기’와 ‘메우 기’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는 그렇게 물감을 화면에 올리고 다시 뜯어내기를 반복하면서 그 틈과 틈을 메꿔 나간다. 이렇게 그 의 작업은 고령토 또는 물감을 쌓아 올리지만 물감은 여전히 결과적으로 지지체의 일부이다. 이렇게 그는 대상을 묘사하거나 장식적인 방식을 배제한 채 오로지 쌓아 올려진 그 지지체를 가로 또는 세로로 접고 펴는 작업을 통해 물감이 떨어진 곳에 다 시 물감을 채워넣는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하는 것이 그의 일의 전부이다. 그에게 결과적으로 지지체인 동시에 그림인 작업에 서 드러나는 흰색과 검은색, 자주색, 청색은 어떤 의미도 없다. 다만 행위를 위해 동원된 조연일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결과일지 모르는 곳에 다다르는 과정이다.  

김태호의 경우는 단색이라는 색의 의미보다는 행위의 무한 반복과 그 과정에서 작가보다는 작품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작업 이다. 그는 색을 쌓고 다시 긁어내고, 다시 쌓은 다음 다시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긁어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중첩된 색채는 묘한 여운을 갖고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체와 세계가 상호 침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본다’는 체 험 그 자체를 하도록 만든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몸과 지각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서 가능하다. 따라서 지각은 인간 활동 의 근원이자 세상을 받아들이는 통로이다. 김태호의 작업도 이렇듯 신체와 그것이 외부 또는 타자, 세상과 교감하고 지각하 는 탐사의 과정이다. 

윤형근

김근태의 작업은 형태나 이미지가 없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논리나 해석 또는 분별이나 이성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아 니 처음부터 독해할 수 없는 작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의 단순함은 단지 흰색을 20~30회를 반복해서 칠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작업을 단순하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작업은 꾸준히 같은 일과 행동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첩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흰색은 겹쳐지고 투영되 면서 본래의 흰색이 아닌 결이 다른 겹의 흰색이 된다. 여기에 칠하는 과정에서 가끔 남게되는 흠집이 덤덤한 그림을 그나마 한 번 더 들어다보게 할 뿐이다. 

이진우의 회화에는 행위와 대상이 동시에 공존한다. 그는 캔버스 위에 나무를 태워 얻은 숯을 붙인 다음, 그 위에 한지로 덮 어 붙인 다음 쇠솔로 문지르고 긁어낸다. 그후 다시 한지를 덮어 바르고 그위에 쇠솔질을 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무목적인 노 동 끝에 그는 숯과 그 틈새를 뒤덮는 한지의 물성이 이루어내는 질감을 얻게 된다. 그의 이런 ‘반복’되는 작업은 스스로를 갈 아내는 작업인 동시에 스스로 자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부정하는 거듭되는 부정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스스로가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서 역으로 긍정을 느낄 수도 있다. 이렇게 안과 밖이 동시에 공존하는 또 수시로 역할이 바뀌는 과정에서 숯과 한지는 물아 일체를 이룬다. 

윤형근

최병소의 경우는 일상적으로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이나 기타 잡지등의 매체를 사용한다. 날짜가 지나면 무용지물이 되는 신문은 새로운 소식을 담았을 때 만 유효하다. 그는 언어의 지지체로서의 신문을 여지없이 범한다. 그는 연필이나 볼펜 으로 거듭 신문 위에 의미없는 드로잉을 해 나간다. 언제 끝날지 모를 행위가 반복되면서 신문지 또는 그의 그림의 지지체는 지지체로서의 기능을 탈각하고 하나의 ‘너덜너덜’ 오브제로 변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의 지지체는 스스로의 의미는 물론 그가 담았던 단어나 문장의 의미까지 모든 것을 상실한 채 그냥 하나의 미지의 새로운 물성으로 되돌아간다. 아니 되돌아가기보다 는 새로운 성질의 또 다른 것으로 변모해간다. 종이로서의 기능과 의미는 사라지고 새로운 표정을 지닌 그의 종이는 종이 너 머의 종이인 동시에 작가의 행위를 오롯이 몸으로 받아낸 작품이 된다.  
 
김덕한은 한국의 오랜 전통 안료인 옻칠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완성한다. 매우 장식적인 공예품의 주재료로 쓰였던 옻칠을 현대미술의 전면적인 물성을 치환시켜내는 그의 작업은 어느누구의 작업 못지않게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시간 이 충첩되어 스스로를 드러내는 과정은 지문이 닳아 없어질 만큼 인내와 고통을 수반한다. 옷칠은 칠하고 건조되는 과정이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그는 한가지 색을 바르고 건조되길 기다려 사포질을 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칠하고 건조되면 사포질 을 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런 반복의 과정은 여느 단색조 회화작가들과 같다. 공통적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의 재미는 사포질 에 있다. 무심하게 반복되는 사포질에 자신의 몸무게를 실어 계속 반복하다보면 어느 덧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먼저 칠해진 색들의 흔적이 스스로 드러난다. 바로 그 자연스러움, 뜻하지 않게 뜻 밖의 색이 출현하는 그 순간을 그는 기다린다. 게다가 가끔은 의도치 않았던 사포질의 완급이나 힘의 분배와 상관없이 스스로 지지체인 동시에 그림이 되는 우연하게 수줍은 듯 드 러내는 작품의 결과를 그는 기다린다. 끝임없이 사포질을 하면서.

윤상렬의 작업은 샤프 심이라는 기성의 물성이 강한 재료를 사용해서 새로운 물성으로 현현하는 작가이다. 정교하고 약한 샤 프 심을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일견 매우 옵티칼(Optical)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미술이 시각적인 착시 현상에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 그렇게 낯설지 않다. 사실 현대미술이 등장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 들이 보고 있는 진실이라 믿었던 그림들이 착시에 의한 허구라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부터이다. 그렇다면 진실된 회화는 무었 일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현실도 실은 백일몽 같은 것은 아닐까. 그는 이런 허구에 대한 실체를 허구 속에 은닉함으로서 진 실과 거짓, 안과 밖, 대상과 지지체, 나와 너, 주체와 타자의 혼란스런 경계선에 서 있는 그림이란 존재, 보고있는 관객의 존 재를 실체와 허상의 중간지대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는 그 중간지대를 만들기위해 정교한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듯 단색조회화는 안과 밖이 공존하는 그림이다. 또한 보이지만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다. 하지만 지지체 자체를 보는 순간 그 화면을 지지하고 있는 지지체 자체의 시각적 질감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결되어 작품이 된다. 평소와 같은 시각 적인 체험을 통해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그동안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시각적 촉감을 통해 얻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재현된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순간 사물이나 대상을 떠 올리거나 이미지에 더 이상 방해받지 않고 순수하게 화면에서 드러나는 지지체의 질감을 통해 본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보는 이의 감정적 일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서구의 모노크롬 회화와 다른 점이다. 그래서 단색조회화는 마치 소리를 듣고 음색을 통해 악기를 알 수 있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