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선생 건강이 더 좋았더라면 우리가 마포 쪽 한강변에 대형 모니터 작품(메가톤 메트릭스)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이정성 선생.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내가 사는 동네에도 백남준 작품이 설치되었을 텐데 나도 아쉽다. <아래> 백남준이 기획한 메트릭스 연작 중 하나. 메가톤 메트릭스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Megatron/Matrix(전자모태) 여기에 홍길동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선생님의 최종 목표는 마포 쪽 한강변에 대형 모니터로 설치해서 여의도 쪽에서 감상할 수 있게 설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 뉴저지 쪽에 설치해서 맨해튼 쪽에서 감상 하게 하는 게 목표이였으나건강을 돌보지 않는 선생님의 비디오 편집 습관으로 인하여 호암 상 수상 차 서울에 오셨다가 뉴욕으로 귀환 직후 쓰러 지시여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꿈으로 끝났습니다 -이정성
"나는 선생님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고 선생님 작품 중에서 작품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 고 난도의 전자 장비가 포함된 대표적인 두 작품의 경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경우를 참고하면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도 장기 보존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우선 이 작품은 선생님과 제가 여러 해 동안 의논하고 토론하면서 선생님이 만들고 싶어 하시는 새로운 작품의 개념을 숙지 해가면서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나 밤잠을 설치면서 좋은 방안을 궁리하고 1993년 겨울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선생님 전시 오프닝 파티도 대충하고 택시를 타고 찾아 간 곳이 몽파르나스에 한 카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9QHrw9Nr0jc
이정성선생은 백남준의 이 작품을 매우 중시했다고 전한다. 이정성 선생이 직접 쓴 글이다.
<메가톤 메트릭스> "나는 선생님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는 없고 선생님 작품 중에서 작품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 고 난도의 전자 장비가 포함된 대표적인 두 작품의 경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 경우를 참고하면 선생님의 다른 작품도 장기 보존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우선 이 작품은 선생님과 제가 여러 해 동안 의논하고 토론하면서 선생님이 만들고 싶어 하시는 작품의 개념을 숙지해가면서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나 밤잠을 설치면서 좋은 방안을 궁리했다. 1993년 겨울에는 파리에서 선생님 전시 오프닝 파티도 대충하고 택시를 타고 찾아 간 곳이 몽파르나스에 한 카페였다.
웨이터에게 두둑한 선불 팁을 주고 전망 좋은 자리를 어렵게 차지하고 작품 구상에 몰두 한 적도 있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 작품을 제작 하였는데 원래의 구상에 충실하게 제작 하였으나 그 당시 컴퓨터 사양이 다양하게 변환 하는 영상을 구현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그 후로 한 번의 시행착오를 발판으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서 드디어 Megatron이 탄생하였다. 선생님이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150대의 모니터에 작가가 원하는 무슨 형상이든 구현이 가능하고 그 형상 속에 작가가 원하는 어떤 소프트웨어라도 7개의 Channel로 표출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처음 선생님이 소프트웨어를 선택할 때 1, 탈것(자동차. 마차, 자전거 등) 2, 날 것(비행기, 새 등) 3, 자연(구름, 바다 등) 이런 종류의 영상이 포함된 Disk를 준비해 오셔서 애니메이션의 내부에 어떤 영상이 좋을지를 화면을 보시면서 선택했고 애니메이션에 OECD 국가의 국기를 중간 중간에 넣어서 유럽전시에 대비했다.
이 작품의 1호 작품을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전시한 후 삼성전자의 주선으로 특허등록 출원을 하였으나 복잡한 서류준비와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발명특허가 없어도 작품을 제작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하시며 그만두자고 하셔서 신청서류를 취하 한일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의 최종 목표는 마포 쪽 한강변에 대형 모니터로 설치해서 여의도 쪽에서 감상할 수 있게 설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 뉴저지 쪽에 설치해서 맨해튼 쪽에서 감상 하게 하는 게 목표 이였으나 건강을 돌보지 않는 선생님의 비디오 편집 습관으로 인하여 호암 상 수상 차 서울에 오셨다가 뉴욕으로 귀환 직후 쓰러 지시여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꿈으로 끝났다.
선생님은 그 후에도 간간히 이 계획을 완성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 하시곤 하셨다. 작품이 제작된 경위를 소개해 드렸다. 오늘의 목적인 작품을 어떤 방법으로 오래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나 어떤 방법이 제일 좋은 방안인가 하는 게 중요하다" -이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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