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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문화민주주의자로 르네상스 인간

백남준 21세기 정보의 독점을 막아낸 것이 예술가로서 최고의 공로다.

최울가 작가가 들려주는 백남준 돌아가시기 2년 전 이야기

소호에 비가 내렸는데, 애기 유모차에 타시고 반쯤 비를 맞으면서 가시길래 "선생님 건강 괜찮으세요?" 물으니 "어 괜찮아!" 하시면서 도우미가 끌어 주는 유모차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나와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국가가 저렇게 큰 거인 하나를 돌봐주지 못하다니!! 일본 같았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텐데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대한 원망, 예술을 모르는 무지함, 저 큰 대가를 저렇게 버리는구나! 싶어 그 답답한 심경은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종일 비가 내렸고, 난 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보내던 기억이 난다.

백남준은 누구인가? 2015년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강의(419호)초고 뒤죽박죽 중 일부 (A4-18장)

<1> 문화민주주의자로서의 백남준 : 문화민주주의'디자인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철학이 세계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이 메시지는 독일의 개념 미술가 요셉 보이스를 연상케 하는데, 그는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강연, 교육, 정치, 행동, 무엇이든 다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확장된 예술 개념이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는 예술의 탈신비화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예술가란 날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굳이 나에게 예술론을 묻는다면 지금 현재로서는 파괴 없는 창조는 없기에 우리시대의 우상을 파괴하는 것에서 우선 예술은 시작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나무를 날마다 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형순

<2> 축제주의자로서의 백남준: 돈보다 축제가 먼저다 일관되게 삶의 향유를 최우선으로 두는 축제주의자였다.

<3> 전자공학(물리학)을 프로처럼 구가하는 공학도로서의 백남준: 전자공학을 독학하다 학창시절 물리학을 좋아한 백남준:백남준이 이런 과학이론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동거 동락한 부인 '시게코'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학창시절 물리학자가 되고플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기계 다루는 데도 능했다. 'K-456'도 만들었고, 전시 땐 TV내부회로도 직접 조작했고, '아베'와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설계할 만큼 과학적 지식도 풍부했다.

<4> 르네상스인간으로서의 백남준: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라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래서 백남준이 '현대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위너는 르네상스 인간 하버드 철학박사 수학자다.

<5> 우상파괴자로의 백남준 우상숭배는 인류의 영원한 질병이다 6) 인류학자로서의 백남준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6> 인류학자로서 백남준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참고] 질문: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이영: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7> 기존체계와 질서의 교란자로서의 백남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기가 횡행하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술가는 그 모든 사기를 사기 치는 교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백남준의 예술가론은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의 사기론은 이런 교란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8> 현대전위 작곡가로서의 백남준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랜덤 액세스인데 내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된 것은 정말 랜덤 액세스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일종의 교란이다. 그것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나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런 것이 예술의 창작에서도 작용되기도 한다.

[05] 음악의 확장 백남준은 1958년 존 케이지가 음악의 범위를 확장해서 침묵과 소음을 현대음악의 범주에 집어넣은 것도 그렇지만 그가 주역을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주역의 음표를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백남준은 그 대신 쇤베르트의 무조음악을 업그레이드시켜 기존의 음악을 무화시키는 무음악(a-music)을 시도하다 무음악은 또한 악기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일종의 신음악이다. 이런던 '무음악'에도 그 계보가 있다. 음가의 민주화를 시도하며 '12음법'을 만든 쇤베르크의 '무조성(atonal)'과 때로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지 않고 관객의 소음을 중시하는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이 바로 그것이다.

김홍희: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06] 그는 6개국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인터넷은 당연히 백남준의 예술적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다

그는 6개 국어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인터넷은 당연히 백남준의 예술적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다.

[07] 백남준의 또다른 스승은 보들레르 발터 벤야민이 그랬듯 말이다.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visionary)': 보들레르와 백남준

"어둠인지 빛인지/광막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긴 메아리 멀리서 잦아들듯/색채와 소리와 향기가 서로 상응하네" -보들레르의 대표시 <상응> 중에서

백남준의 글 비디오암호코드 중 위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며 그가 보여준 비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P185>

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

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 visionary)'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경계를 허무는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된 '전자 비전(Television)'을 썼다는 점이다.

[08][백남준의 낙관론_내일 아름다울 것이다]

백남준은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 크게 성공할 것이며 다만 유태인처럼 한국인도 이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박만우: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인간 백남준, 한국인 백남준이 바로 근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갈등을 다 겪고 그것을 처절하게 실천한 롤 모델이 아닌가요. 그걸 보면서 제가 깨닫는 건 바로 '약한 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에요.

백남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서구에서 많은 설움을 받으면서 백남준이 봤을 때 한국인을 유태인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죠. 뿌리 뽑힌 삶이 역으로 21세기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분열될 정도의 슬픔과 고통에도 그걸 신명으로 승화시켰잖아요. 한국인만이 가진 유전인자로 본 거죠.

인도인, 유태인, 우리나라 안산 외국이주민 등 이런 떠돌이들, 그들은 집을 언제라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도 말뚝을 박고 살 수 있는 자세, 이런 것이 바로 21세기에 소프트파워가 됩니다. 유태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한 거죠. 백남준이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09]백남준의 과격성_새로운 야만인 등장] 왜 백남준은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이영철: 백남준, 성상 파괴하는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도 있어요."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피아노는 음악적 권위의 상징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의 상징인데 그것에 대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래서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쳤죠. 예술적 테러리스트인 백남준은 그런 맥락에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 잘랐고요. 이건 다 새로운 미술을 재창조하기 위한 파괴였죠."

왜 백남준은 모든 걸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왜 백남준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파괴적이냐고요. 새로운 야만인이 오는 거죠. 세상을 다 걸고 싸우는 그 명분을 아무나 스스로 설정하기 어렵죠. 정치가 중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나요. 영구혁명을 꿈꾸던 인물이 예술가였으니까 용납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감옥을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죠.

백남준은 위대한 전사였어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굴었고 집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 정신은 정말 대단히 위대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죠. 유를 부서야 창조가 나와요. 파괴 없이 창조 없어요.

겁쟁이나 좀비들에게 창조는 없어요. 창조자에게 기생하거나 합세하여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죠. 기존의 것을 부숴서 잡석으로 만들어 길을 내는 자, 그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자가 바로 창조적인 야만인이죠.

나는 백남준의 이런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을 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아래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전시 때 벽에 적어놓는 백남준 관련 자료텍스트와 작품] 맑스는 사회의 계급화를 파타하려고 했다면 백남준은 예술의 계급화를 타파하려고 했다. 이용우씨는 백남준 예술에 대한 평가에서 "관객참여방식에 의한 그의 미적 실험은 백남준 미학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을 독재 또는 독백예술로 봤고,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이 관객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예술의 계급화를 초래했다"라고 논평했다.

"나의 쇤베르크 발견은 아마도 맑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 상황은 은연중 지식인들로 하여금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맑스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이를테면 지식인의 열병이었다. 쇤베르크가 극단주의자였다면 내가 전통음악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급진주의자가 되는 길이다 나는 경기중 4학년 2학기에 이런 이유로 아버지가 강제로 나를 홍콩 영국계 로이덴 고등학교로 전학시켰다. 나는 이것을 화려한 정치 망명이라고 생각한다" -백남준

이렇게 유발된 부친과 갈등은 계속이어져 일본·독일 유학 기간 날이 갈수록 악화된다, 앞에서 언급한 이것은 백남준이 홍콩에 갈 때부터 시작됐지만, 동경대학에 진학할 때 폭발했다. 성적은 부친이 원하던 대로 동경대 상과를 들어갈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부친을 속이고 미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지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11] [견우와 직녀가 설화에서 영감]위성아트의 상상력은 어디서 왔나? 백남준은 <예술과 통신> 전시 도록(현대화랑 1995)에 '별들의 랑데부'라는 글에서 '칠월칠석'에 황소를 끄는 총각별 '견우'와 베를 짜는 처녀별 '직녀'가 여름밤 꿈 같이 만났듯 동서가 그렇게 랑데부하는 이야기로 번안했다고 밝힌다. 이런 전설은 백남준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전자아트 정보아트 인식이 지평확대 동서의 다양한 정보가 중요하다. 예컨대 부부 간 대화가 부족하면 문제가 생기듯 나라 간 소통 부족하면 전쟁이 난다 바로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바로 코뮌 글로벌 그로브를 형성하는 것이다 (가상적 상상적이나 지구촌 축제를 일으키기 그래서 그 내용에 인디언 춤 오키나와 민속과 한국전통춤이 소개된다

[12] [위성(=미래의 빛)아트_백남준의 유토피아는 바로 '해원상생(解寃相生) 즉 인류평화가 공존하는 공동체)'] TV예술화와 위성의 예술화;"당신과 보이스가 인공(=미래의 빛)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반전소설가 네오 맑스시트)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백남준

[13]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었던 것예요. 그는 테크놀로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그걸 인간화했다" -독일평론가.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14] 독일에서도 백남준은 예술파트너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백남준보다 2살 아래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이다. 그녀는 백남준에게 높은 점수를 주네요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15]남의 나라를 쳐들어가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바로 탈영토 제국주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탈영토 제국주의를 경험할 수 있나. 예컨대 내가 세계에서 어느 한 부분에서 최고의 디자인이 된다면 땅을 차지하지 않아도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7] 랜덤 액세스? 백남준은 1960년대 서구의 견고한 근대주의 미술체계를 해체시키는 데 사용한 방법이 바로 <랜덤 액세스> 즉 일종의 교란미학인데 창조의 순간은 항상 그 이전에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상태를 거쳐야 한다 그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징조가 바로 랜덤 액세스이다

[18]질문: 백남준과 광주비엔날레의 관계성은?

박만우: 김영삼 정권 때 광주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를 모아놓고 5·18 보상을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할 때 한 분이 "비엔날레요" 그래서 광주에서 아시아 최초로 비엔날레가 생겼죠.

광주비엔날레가 그 아이디어로 그렇고 '인포아트'도 다 백 선생이 직접 섭외하고, 아는 외국작가를 섭외했잖아요. 어떤 파장이 올지 결국 고국의 미래를 다 내다보고 이를 기획하여 구체적 플랜까지 생각하며 실현한 거예요.

이보다 2002년에 미국 휘트니비엔날레에 참여한 백남준이 미국에서 받은 상금(요즘 돈으로 약 3억 원 해당)을 휘트니 관장 찾아가서 "한국은 아직도 동시대 미술을 모르고 유화로 꽃, 나비를 그리고 있으니, 내가 그 돈을 다 낼 테니까 한국에 꼭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거잖아요. 그렇게 그 전시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온 거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젊은 20대, 30대 부부 등 25만 명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이렇게 우리나라에 세계현대미술의 흐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가 직접 코디네이션 한 것입니다. 그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큼 보답 못 드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강의실

[19]백남준을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어떻게 활용해야죠?

이영철: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20]자신의 취향에 대해서는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좋다. 모두 다 커피마신다고 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차를 주문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게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 취향만이 아니라 결혼도 마찬가지고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타적인 삶은 남의 눈치를 보고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이다

백남준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건, 자신이 동양인임에도 서구인보다 더욱 서구예술과 철학의 본질을 꿰뚫어 봤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리라. 광기 어린 그의 '액션아트'는 '비디오아트'로 연장된다.

이것도 랜덤 액세스의 분위기가 난다. 백남준은 유럽에 처음 가서 그들의 문화수준에 상당히 실망을 했고 다만 그에게 황홀한 경험을 맛보게 한 것은 바로 중세고딕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다. 백남준은 거기서 비디오아트의 단초를 얻는다. 자연의 빛이 주는 그 눈부심 그는 거기서 전자의 빛의 주는 그 경이로움을 상상했던 것이다. 아래 백남준아트센터 건물도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21] 그의 첫 대학수업 백남준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제자를 존중한 그가 일방적 수업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과 공동으로 현대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시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해프닝아트에 '성(性)'을 가미한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원조 격인 1968년 샤먼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도 이런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10년 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보다 25살이 어린 같은 대학 제자 '자니스 거이'와 함께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면 '누드비너스'가 음에 맞춰 몸을 변주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오감을 최대로 확장시키며 뒤틀린 우리 내면을 풀어주는 걸작이다.

이런 작품을 백남준이 교수가 되기 전부터 무척하고 싶었지만 모델료가 너무 비싸 못 하다가 드디어 수업시간을 통해 천지인이 하나이듯 자연과 인간과 음악이 하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 그의 제자 '이보 데코빅'이 이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았다.

[22] 프랑스 파리8대학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백남준 비디오이론' 과목을 개설(교수 장 폴 파르지에 Jean Paul Fargier 백남준 전문가)하고 있는데 한국미대 그 어디도 백남준 미디어론 강좌가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전남대 문화대학원이 처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3] 2009년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 때 소개된 1960년 초 플럭서스의 누드 퍼포먼스는 왜? 그것은 끝까지 가보는 극단의 무질서 후에 창조가 나오기 때문이다. 노이즈 아트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진도 바로 랜덤 액세스다 아래 사진은 1960년대 초반 플럭서스 퍼포먼스 장면 이런 것이 나온 것은 나치즘의 공로다. 나치즘은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여 인류의 대학살을 낳았다 파시즘의 재발을 경고하는 퍼포먼스다

[24] 랜덤 액세스? 백남준은 1960년대 서구의 견고한 근대주의 미술체계를 해체시키는 데 사용한 방법이 바로 <랜덤 액세스> 즉 일종의 교란미학인데 2009년 3월에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와 함께 강연 때 칠판에 적힌 이런 개념어에서 바로 랜덤 액세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창조의 순간은 항상 그 이전에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상태를 거쳐야 한다 그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징조가 바로 랜덤 액세스이다

[25] 여러 분이 탈영토 제국주의시대 제왕이 되는 경험을 하기 바란다: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바로 탈영토 제국주의다. 내가 세계에서 최고의 디자인이 된다면 땅을 차지하지 않아도 세계를 지배한다.

[26] 최울가 작가의 고백 ;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애기 소호에 비가 내렸는데 애기 유모차에 타시고 반쯤 비를 맞으면서 가시길래 "선생님 건강 괜찮으세요?" 물으니 "어 괜찮아!" 하시면서 도움이가 끌어 주는 유모차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나와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국가가 저렇게 큰 거인 하나를 돌봐주지 못하다니 일본 같았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텐데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대한 원망 예술을 모르는 무지함이 저 큰 대가를 저렇게 버리는구나 싶어서 그 답답한 심경은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종일 비가 내렸고 난 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보내던 기억이 난다

[27] [인류문제에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철학자] 피카소와 르네 마그리트 왜 코뮌인가 파시즘 때문이죠. 모마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정말 압권이다. 나는 피카소가 주는 그림의 위력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온 보람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런 작품을 보면 정말 현대적이죠. 현대인의 삶이 그야말로 초현실적으고 그려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코뮌니스트였다는 잘 모르죠. 그는 현실을 그리되 현실을 그리지 않고 환상을 그리는 그런 미술의 또 다른 세계를 실제로 펼쳐 보인 천재급 작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의 작품은 주로 신비한 분위기와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 발상의 전환 등의 특징을 보이며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데페이즈망 기법(dépaysement)으로 유명하죠.

데페이즈망은 우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대상이나 상황을 이질적인 상황으로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페이(pays)는 원래 땅이나 장소를 말하는데 그 단어 앞에 데(dé, 해체하다)가 들어가니까 그 땅을(그 어떤 물체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장소로 옮겨놓는다(배치한다)는 뜻이 된다 고정관념 깨기 낯설게 하기

[제안] 백남준은 영원한 우리의 키치인 동시에 살아있는 호랑이다. 그는 단군의 직손으로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었다. 백남준 <전자장승>을 하나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28] [플럭서스] 끝까지 가보는 극단의 무질서 후에 창조가 나온다. 노이즈 아트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진도 바로 랜덤 액세스다 아래 사진은 1960년대 초반 플럭서스 퍼포먼스 장면 이런 것이 나온 것은 나치즘의 공로다 나치즘은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여 인류의 대학살을 낳았다 파시즘의 재발을 경고하는 퍼포먼스다

플럭서스 운동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 사진 한 장이면 끝이다 사진설명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서구근대의 상징)를 파괴하는 멤버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반예술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예술이 상업화·대상화·물질화되는 걸 반대하고 대립되는 갈등이나 충돌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창조적 발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

[29] [반애국]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1994년 '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예술가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에서 21세까지 걸쳐간 사람으로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한 사람이죠.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 중 한 분이죠.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의 삶의 족적을 알면 알수록 고국에 대한 사랑 굉장했구나 싶어요. 애국심의 발로만 아니라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뿌리와 기원이 이게 결국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증명해 보인 게 바로 백남준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0] "언어의 경직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21세기의 살길이다" <신조어를 많이 만드는 나라가 승리한다> 언어애국주의에 대한 경고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만 외국어에서 온 어휘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다 이 부분은 사실 예민한 부분이라 잘 소개되지 않고 있다. 1996년 인터뷰 황: 황필호 박사 1991년 인터뷰라고도 하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http: kmitp2005.blogspot.kr 2007 04 honaya.html

[31] [글로벌 그루브] 상상적 가상적 지구촌 놀이굿 글로벌 그루브 1973년에 제작된 '글로벌 그루브(지구촌 놀이굿)'는 뉴욕 WNET-TV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아티스트로 선정된 백남준의 작업으로 ‘앞으로 TV 가이드는 맨해튼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워질 것’이라는 예언적 비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글로벌 그루브'는 맥루한이 TV가 국제적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체가 될 것이라 주장했던 바를 시각적으로 증명해 보인 작업으로 탭댄스에서 인디안 나바호족 북소리, 한국의 부채춤, 샬럿 무어만의 퍼포먼스에 이르는 각 문화권의 춤과 음악이 겹쳐진다. 백남준은 「글로벌 그루브와 세계 비디오 시장」(1973) 이란 글을 통해 당대 TV영상 문화가 편향된 민족주의적 시각만을 전달하여 <민족 간의 소통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비언어적인 소통 매체인 음악을 통해 백인과 흑인, 동양과 서양,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이어주는 통로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백남준은 더 나아가 세계 각국의 음악과 무용 프로그램을 주간 편성하여 비디오 공동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확산시키면 이에 따른 교육적, 오락적 효과가 놀라운 것이 되리라고 장담한다. 이후 <글로벌 그루브>는 <TV 정원> 등 백남준의 다른 작품에 삽입되어 계속 이용된다.

[32] [굿모닝 미스터 오웰]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백남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영됐는데 어떤 평가를 하시나요?"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1984년 1월1일 백남준의 '위성오페라' 총진행을 보다 김 관장 부부가 그 중계 과정을 파리에서 보셨다고 들었어요."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한 후라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년 1월 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본부에서 교통정리 하듯 뉴욕, 파리, 독일에서 송출된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순식간에 편집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보내는 거죠.

KBS도 돈을 내고 방영권을 따 한국에도 중계했죠. 남편이 이걸 연결하는데 한 사람이었죠. 정말 그런 놀라운 위성오페라를 보면서 감격했어요. 그게 전 세계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꿈같았어요. 중계가 다 끝나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은 없었지만 백남준 선생과 한국에서 오신 조수 등에게 저녁을 한턱냈죠."

[33] [레이저아트] 뉴미디어 시도 우주와 교신 "그런데 백 선생은 레이저아트를 21세기에 한 게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발상을 했어요. 당시는 기술적인 뒷받침이 안 된 거죠. 그걸 집대성해서 작품화한 것이 2천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선보인 레이저아트인 '야곱의 사다리'죠. 그래서 60년대를 '프리비디오(TV)시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비디오시대', 2000년대를 '포스트 비디오시대'라고 하죠. 레이저아트와 홀로그램아트 등이 후기에 속해요." 뇌졸중 극복하고 2000년 구겐하임 전에서 '레이저아트'를 선보였죠?

[질문]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이영: 19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전시에서 '참여 TV'라고 TV에 자석을 붙여놓은 건데 TV의 내부회로 보여주는 영상을 관객이 좌석으로 전자파 조작과정으로 이미지 바뀌고 그 다음에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어 관객이 육성을 집어넣으면 파장이 변해요. 이건 관객이 전시에 참여해서 전시를 완성시킨다는 뜻이 담겨있죠. 비디오아트를 '참여 TV'라고 하잖아요.

[34] [미디어로 이분법 극복] 한국에서 좌우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현상을 보면 정말 웃음이 나온다. 좌 속에 우가 있고 우 속에 좌가 있지 너는 좌고 나는 우다 이것은 서구의 이론 중 가장 나쁜 것인 이항대립법 중 하나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런 논리는 우는 우고 좌는 좌다 양은 양이고 음은 음이다 와 같은 논리인데 그것은 결국 2차 대전과 나치즘의 비극을 낳지 않았나.

백남준은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랜덤액세스(상호주체적 참여적 비빔밥 같은 예술교란)>라는 새로운 미학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나라 태극기에 보면 나온다. 가운데 陰陽문양에서 양은 양이 아니고 음은 음이 아니다. 양이 음이고 음이 양이다 양 속에 음이 있고 음 속에 양이 있다. 평화와 공존의 철학이다. 나의 선에도 악이 있고 너의 악에도 선은 있는 것이다.

원효의 화쟁이 바로 이런 통합의 사상이다. 원효가 말하는 <원융합일>이 한국철학의 골자다. 이것은 서구의 논리모순인 이원론을 극복하는 일원론적 통합론이다. 서구적 잣대에 갇혀 우리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 남성 속에 여성이 있고 여성 속에 남자가 있다는 비유는 촌철살인입니다. 바로 21세기에야 비로소 여성 속에 남성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죠.

사실 극우 속에 극좌가 있고 극좌 속에 극우가 있죠. 그런 면에서 요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로 미디어(match maker, peace maker)죠. 요즘 말로 인터미디어 즉 융합이라는 가치가 아닌가 싶네요. 극우와 극좌를 잘 섞어서 비빔밥 다른 말로 인터·미디어를 만들어 수준 높은 사회가 만들 수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35][질문] 백남준은 10대에 막강한 독서가였고 쇤베르크, 맑스도 섭렵했는데요.

김홍: 당대 최고 부잣집(지금으로 치면 삼성가) 막내로 태어난 백 선생은 집안도 좋았지만 워낙 타고난 기인이에요. 일찍이 아방가르드 기질이 있었어요. 10대에 이미 쇤베르크 판을 구하기 위해 청계천 헤맸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죠. 맑스에 대한 열광은 그 당시 지성인과 엘리트들이 다 맑시스트였으니까, 그런 정서가 어린 그에게도 전파됐고. 그 나이에 그걸 받아들인 게 백남준이죠."

백남준은 예술의 계급화를 타파 : 맑스는 사회의 계급화 파타 이용우씨는 백남준 예술에 대한 평가에서 "관객참여방식에 의한 그의 미적 실험은 백남준 미학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을 독재 또는 독백예술로 봤고,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이 관객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예술의 계급화를 초래했다"라고 논평했다.

[36] 청년 백남준, 쇤베르크와 맑스에 빠지다 백남준은 예술적으로는 '쇤베르크', 철학적으로는 맑스의 영향을 받았다.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과학적 논리를 제공한 맑스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기에 현대 음악의 맑스 격인 쇤베르크를 좋아했다. 1947년 백남준은 쇤베르크 레코드를 수소문해 어렵사리 구하기도 했다.

그는 쇤베르크의 관련해선 바르토크·스트라빈스키·힌데미트·시벨리우스에도 알고 있었고, 맑스에 관련해서는 바쿠닌·부하린·프루동·프랑스노동조합운동·페이비언 사회주의도 알고 있었다. 하긴 그땐 막시스트가 아니면 지성인 행세를 못했다.

하지만 2차 피난대열에 합류할 뜻인지 맑스주의에 심취한 이상주의자 백남준은 북한군에 대한 공포감이나 적대감이 적었는지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혼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기대감은 모두 무너졌다. 백남준 집을 점령한 북한군은 세간을 다 뒤져 개를 모조리 잡아먹고 달아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실망한 백남준은 맨 마지막으로, 마치 망명자처럼 부산으로 내려갔고 7월 27일 밀항을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 동경에는 이미 그의 집이 있었다. 백남준은 이렇게 그의 생애 중 17년만 한국에서 살았다.

[37] 합리적이고 직선적인 선형적 시간의 매듭 끝자리에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온통 다 끊어진 것을 이어놓은 회로로서의 유토피아, 그건 올 것이 아니라 지금 오고 있는 평화세상으로서의 유토피아지요

[38] <소통과 참여는 국제어(에스페란토)> 이를 통해 백남준은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구촌'이라는 맥루언의 개념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식시켰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건 바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인 '참여와 소통'이라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누구나 즐기는 '댓글' 같은 게 백남준이 상상한 '참여와 소통'의 '에스페란토(국제어)'다

또한 이런 '참여와 소통' 방식은 '오웰'이나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사회 그리고 그 이전에 맑스가 말한 '소외와 착취' 사회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한다. 이런 네트워킹 방식은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한 식구라는 묘한 연대감을 주며 평등하게 참여하고 소통하며 새로운 세기를 열 수 있다는 비전을 품게 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백남준의 키워드인 '참여와 소통'이 이해가 돼요."

[39] [오노 요코] 백남준의 애인인가 친구인가? 오노는 남편이 죽은 후에 백남준에게 심적으로 크게 의존한 것 같다. 최근 오노 오코의 고백에 의하면 그녀는 항상 자신도 암살당할 수 있다는 강박 속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누군가 자신이 의존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남준이 죽었을 때 추모사에 1번이 요노 요코였는데 그녀는 고인이 된 백남준에 대해서 "남준은 늘 자신을 지지하고 내 편을 들어주어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의 부처였다"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백남준이 죽은지 60일 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백남준을 위한 추모 퍼포먼스를 자진해서 선보이기도 했다. 오노 요코와 백남준이 처음 만난 건 1963년 말이다. 플럭서스 회원인 요코는 존 케이지의 대변인으로 동경에 와 왔고 백남준은 독일에서 전자공학을 2년간 독학을 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당시 일본이 전자기술이 최고이기에 동경에서 그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와 왔었던 것이다 백남준과 여인들 중에 샬럿 무어먼과 오노요코 그리고 시게코 여사의 관계는 복잡 미묘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1971년 사진 백남준 전시회에 참석한 오노 요코과 존 레논 그리고 전자기술자 아베 John Lennon, Yoko Ono, Nam June Paik and Shuya Abe, opening of the Paik exhibition, Galeria Bonino, New York, 23 November 1971 © Tom Haar

[40] 2가지 악명 높은 퍼포먼스 1965년 과 1967년 여기서 '시게코'가 뉴욕에 온 다음 해인 1965년에 벌린 악명 높았던 퍼포먼스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은 뉴욕 전위예술계를 들쑤셨는데 팬티에 붓을 꽂고 그리는 '버자이너(vagina) 페인팅'을 그녀가 선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해프닝은 백남준이 기획한 것으로 남자의 성기론 그걸 할 수 없다며 그녀에게 떠넘긴 것이다. 1967년 잔 다르크-지유여신-아이콘 1968년 재판에서 집행유예 그해 유럽에서 68혁명 그런 분위기작용 미국의 촌스러움 제거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1969. 인간첼로 1967 1964년 사진 과격하게 에로틱하게

[41] 질문: 샬럿이 누드 연주자가 된 이유 시게: 1965년 5월둘이 만난 지 1년이 된 1965년 5월에 파리주재 미국문화원에서 '표현의 자유 페스티벌'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둘은 1년간 호흡을 잘 맞춰 왔기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일 리허설도 잘 마쳤고 그날은 정장을 입기로 했다. 그런데 샬럿이 갑자기 검은 드레스를 호텔에 두고 온 게 아닌가. 개막 30분 전이라 밖을 내다보니 교통체증이 극심해 도무지 갔다 올 시간이 안 됐다.

백남준은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막이 둘둘 말린 걸 보고, 저걸 이브닝드레스로 입으면 어떻겠냐고 말하자 샬럿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백남준의 설득 끝에 속이 훤히 보이는 비닐을 몸에 두르고, 맨 정신으로는 어려워 위스키를 한잔 하고 프랑스 관객 앞에 섰다. 그들은 환호했다. 격정적 연주가 시작되고 그러나 술기운인지 긴장 탓인지 쓰러지고 만다. 그날부터 그녀는 '나신'의 연주자가 된다.

[42] 동경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됐나요?

융합된 사고가 총체적 예술을 낳다'총체(조작된) 피아노' 1958-1963. 백남준은 연주도 하지만 피아노의 금기를 깨고 그걸 밟고 부수기도 하고 때론 오브제로도 활용한다. 백남준은 동서양의 학문과 예술·철학과 과학을 꿰뚫고 있었기에 동서의 장벽을 넘어 상생의 방식으로 연결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남준은 당시론 매우 드물게 동서양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상호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백남준은 또한 물아일체라는 동양의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통합적으로 봤다. 그러기에 서양의 첨단기술과 동양의 정신세계를 사상과 이념·인종과 지역의 경계 없이 그물망처럼 요즘말로 네트워킹 방식으로 연결시키려 한 것인가.

동양에서 음양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그에게는 음악과 미술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음악전공자인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그의 친구 '예를링에게 보낸 편지'(1962)에서 그가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이런 종합적 사고는 총체적 예술(art for all senses)을 낳는다. 시각예술인 미술에 청각과 촉각적 요소도 도입한다. 시간예술인 음악에 공간예술인 미술을 융합시키고 전자 빛으로 그리는 TV개념을 도입한다. 거기에 몸을 붓처럼 사용한 행위예술도 포함시킨다. 그런 예술에서는 '자연·기계·인간'도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인터·미디아 총체와 융합미디어와 같은 말이다.

[43]백남준은 왜 퍼포먼스 평생했나? 김형: 한마디로 돈 안 버는 예술을 하기 위해서다

백남준은 20대 후반 이런 불경에 심취했다. 위 장면은 백남준이 '오르기날레'에서 선어록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같은 경구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남준은 특히 '벽암록'(18번)에 나오는 '무봉탑'(無縫塔)을 좋아했다.

이 이야기는 혜충 국사가 입적하기 직전 당나라 대종(代宗) 황제와 하직할 때에 나눈 대화로 황제가 "내가 국사를 위해서 뭘 해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국사는 "저를 위해 이음새가 없는 무봉탑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답한다.

형체도 이음새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봉탑이라. 이는 결국 황제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모든 법계를 하나의 탑으로 세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하여간 이런 선문답에 매료된 백남준은 예술동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에게 병풍에 직접 한자로 써서 선물할 정도였다.

질문: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이영: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백남준의 응용?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난해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던 예술이 우리사회에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가 맨 처음 한국에 와 나와 인터뷰할 때 '나의 예술이 지금은 난해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하며 따라할 거야'라고 했는데 실제로 요즘 광고 등에 응용되는 걸 봅니다. TV모니터를 비스듬히 들고 거기에 얼굴을 내밀거나 거기서 연속문양을 사용하는 게 참 많습니다."

백남준은 1958년 존 케이지가 음악의 범위를 확장해서 침묵과 소음을 현대음악의 범주에 집어넣은 것도 그렇지만 그가 주역을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주역의 음표를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44] 68혁명은 왜 미디어가 사회를 보는 눈을 바꾸다_69반전평화운동과 우주과학진화 달에 도착

이런 방식의 전시도 랜덤 액세스(서부활극)라고 볼 수 있으리라 혼미한 가운데 유통성 있고 유연하고 우연적이고 예측하기 힘든 우발적인 사고 말이다 68혁명은 주동자 없는 시위 랜덤 촛불시위처럼 말이다.

백남준의 예언: "현대의 경쟁은 곧 소프트웨어의 경쟁(1986년 10월)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소프트웨어를 가장 잘 활용하는 회사는 바로 구글이다 우리는 지금 구글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45] 여기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왼쪽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 백남준은 세계적 아트스타로 부각되면서 한국에서도 덩달아 유명해져 34년 만에 금의환향한다. 그래서 "80년대 역수입된 한국산작가"라고 불렸다. 그런데 1984년 6월 26일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폭탄선언'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된다.

그 인터뷰내용 중 일부를 여기에 인용한다.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이에 대해 이용우 미술평론가는 "그가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 등을 보여 온 '플럭서스' 철학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기론'과 관련해서 백남준의 귀국시기가 묘하다. 국내적으로는 신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고 언론통제가 심해 학생·민주화운동이 더 격하게 일어났고, 국외적으로는 1984년 LA올림픽에 구소련이 불참하는 등 신냉전체제가 고조되었다. 당시 상황은 백남준이 작품에서 그린 평화와 공존의 세계와도 정반대였다.22그 해 백 선생 35년 만에 귀국해 '고등사기론'을 펼쳤는데요.

[47]비디오는 미술의 속성을 극대화한 영상예술로 한 가지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다양하고 복합한 걸 다 담잖아요. 하나의 진리만 추구했던 것과 다른 패러다임이죠. 사람에게 예술적 방편을 통해서 어떤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고 유희적인 놀이로 보여 사람들은 더 착각에 빠지죠. 예술은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래서 고등사기죠. 과학은 명증적인 것만 주장하지만 예술은 명증 이외에 여러 복합적 양면가치를 제시하잖아요."

[48] 백남준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 -백남준 지도교수의 말] 백남준 독일프라이 대학 지도교수는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전자음악의 본거지인 쾰른방송을 추천하면서 그에게 거기에 가 보라고 권고한다. 백남준의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아래 사진은 백남준의 친구이자 백남준 이론가인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초청 강연할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이다.

[참고] 백남준 비디오아트에 한국-일본-독일-미국이 4분1씩 작용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한국의 굿, 일본의 전자공학, 독일의 몸 철학과 68혁명 같은 유럽의 저항문화, 미국의 위성과학과 팝아트 이런 것이 각각 4분1씩 작용했다. 그래서 1984년 백남준은 미국의 위성기술을 응용해 전 세계를 향해 위성아트를 쏜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한국무당이 소개되었고 일본의 광고문화와 서구의 첨단음악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소비광고문화를 예술화한 팝아트의 영향도 보인다. 이것 결국 인터넷 시대를 여는데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60년대부터 하고 싶었던 레이저아트를 2000년 구겐하임에서 구현했다. 레이저사다리를 타고지구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