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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전시행사소개

[국현] 시대의 질곡 속 역량 다 발휘 못해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1: 절필시대》《Rediscovery of Korean Modern Artist 1: When Brushes Are Abandoned》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 2019. 5. 30.(목) ~ 9. 15.(일)까지 회화, 판화, 도자 등 134점, 아카이브 128점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절필시대, 분단과 전쟁의 틈바구니 그런 근대화로 가는 시대의 질곡 속에 끼여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 칠 수 없거나 거의 포기해야 했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6명의 근대 미술가의 발굴과 그들에 대한 새로운 전망 Prospect 찾고 모색하기

[작품해설] 임군홍, <가족>, 1950, 캔버스에 유채, 94×126cm, 유족 소장. 임군홍이 월북 전 가족을 그린 그림이다. 작은 아들을 안고 있는 부인과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큰 딸을 그렸다. 부인의 뱃속에는 곧 태어날 작은 딸이 있었다. 왼쪽에 그려진 백합은 임군홍의 집 마당에 피어있던 백합을 그린 것인데, 곧 태어날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듯하다. 백합이 활짝 핀 것으로 보아 6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테이블 위 도자기들은 임군홍이 수집한 것으로 임군홍이 떠난 후 이것을 팔아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연계 학술대회_한국 근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형학> 행사일시: 2019. 9. 7.(토) 10:00~18:00 - 행사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세미나실 - 주 최: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사학연구회 용 [기조발표] 작가발굴과 한국근현대미술사의 새로운 지형 (김현숙 전 미술사학연구회 회장) [주제발표] 정찬영과 근대 채색 화조화(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백윤문의 이원적(二元的) 창작활동(최경현 문화재청) 청계 정종여의 불교 주제 회화(최엽 동국대학교) 한국 근대 미술과 종교의 역할: 이규상 작가를 중심으로 (윤인복 인천가톨릭대) 정규의 벽화, 도예의 새로운 가능성 (조현정 카이스트)

<임군훙은 이번에 소개된 6명의 작가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북경풍경화를 많이 그렸다는 점이 특이하다. 마티스 풍의 여인도 아주 참신하고 현대적이다> [월북작가 임군홍(林群鴻, 1912-1979)은 누구인가? 4개월 옥살이 경험도 있다]

임군홍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치과에서 기공사로 근무. 경화양화연구소 등에서 미술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에 입선했다. 1936년 녹과회를 결성하면서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일본인 은행장의 후원을 받아 만주에서 《임군홍. 김혜일 2인 양화전》을 성공리에 개최했다.

이후 한커우에 정착하여 광고사를 운영하는 한편,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풍경화를 그렸다. 같은 시기 한국 화단에서 보기 드문 맑고 강렬한 색채로 중국의 이국적 풍경을 표현했다. 해방 후 귀국 서울에서 광고사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렸으나 *‘운수부 월력사건’으로 1950년 한국전쟁 직후 행방불명됐다가 월북(?)북한에서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맡았고 조선화가로 전향했다.

[운수부 월력사건] 임군홍은 동료화가 엄도만과 함께 1948년 철도국의 달력제작을 의뢰받고 최승희(46년 월북)를 모델로 한 달력을 제작함. 그러나 모델이 북로당 간부 최승희이며 최승희가 쓴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 갓끈은 소련 16연방을 의미하는 16개의 구슬. 갓 측면에는 조선을 더하여 소련 17연방을 의미하는 17개의 구슬, 최승희의 부채에는 삼팔선을 상징하는 선, 하단에는 소련 국기의 망치와 낫과 유사한 모양 등이 있다는 이유로 검거돼 약 4개월 간 옥살이하다


 

[이번 전시에서 유일한 여성 작가 정찬영(鄭燦英, 1906-1988)]

<공작도 2편의 작품 대단하죠> 1906년 평양 출생으로 1920년 평양 서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이영일 문하에 입문했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련>(현재 평양 소재)으로 입선한 뒤 1937년까지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으며 1935년 <소녀>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다.1930년 도봉섭(서울대 약학대학 초대학장 역임)과 ‘결혼 후에도 작품 활동을 한다’는 조건으로 결혼했으나 1939년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고 그 충격으로 절필했다.

1940년대 도봉섭이 한국의 유독식물에 대한 연구를 계획하자, 이를 돕기 위해 식물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도봉섭이 납북된 뒤 정찬영의 그림들은 정태현의 『한국식물도감』(1956)에 삽도로 사용되었으며 2000년 유족에 의해 도봉섭, 정찬영의 자료집이 발간되고 윤범모의 「일제하 여류채색화의 선구」(월간미술, 2000) 논문이 발표되기 전, 조명되지 못했다.

정찬영(1906~1988) 동경 유학파 출신의 이영일(1903~1984)과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조화와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낸 신세대 화가였다. 1930년대 전람회의 스타 작가로 부상했지만 개인적인 비극으로 절필을 한 뒤 화단에서 사라졌다.

이후 2000년(정찬영 유족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까지 화단과 학계에서 사실상 잊혀져 있었다. 근래에는 일본에서 유입된 채색화풍에 사실성을 강화하고 향토성을 가미하여 1930년대 한국화단을 다채롭게 만든 화가들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종여(1914~1984) 작가는 임군홍(1912~1979)처럼 월북화가다. 1940년대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1950년 월북을 기점으로 남한 미술사에서 삭제되었다. 정종여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전 국토를 화폭에 담고자 하였으나, 분단으로 인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정종여는 거창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해인사에서 생활했고,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하였다. 정종여는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한국에 들어와 사찰 관련 그림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정종여가 25세 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진주 의곡사에 전한다. 의곡사는 해인사의 말사이므로, 의곡사 괘불도는 정종여와 해인사의 인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괘불은 사찰에서 야외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하는 대형 불화이다. 보통 불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그림들은 ‘화승’이라고 불리는 승려들이 제작하는데 일반화가인 정종여가 의식용 괘불을 그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정종여는 전통적인 불화 양식을 따르지 않고 동양화풍의 맑은 채색화법으로 이 괘불을 완성했다. 굵기의 변화가 크고 리듬감이 넘치는 필선, 인간미가 넘치는 부처의 얼굴 표현 등에서 전통 불화의 법식에서 벗어난 파격이 느껴진다. 부처의 머리카락에서 윤곽선을 없애고 부드럽게 처리한 점, 바탕색을 번지듯이 처리한 점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채색화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20대의 젊은 정종여의 패기와 새로운 화풍에 대한 관심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작품 해설 정종여, <의곡사 괘불도>, 1938, 면에 채색, 652×355cm, 진주 의곡사 소장
정종여는 거창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해인사에서 생활했고,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하였다. 정종여는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한국에 들어와 사찰 관련 그림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정종여가 25세 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진주 의곡사에 전한다. 의곡사는 해인사의 말사이므로, 의곡사 괘불도는 정종여와 해인사의 인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괘불은 사찰에서 야외 의식이 있을 때 사용하는 대형 불화이다. 보통 불교 의식에서 사용하는 그림들은 ‘화승’이라고 불리는 승려들이 제작하는데 일반화가인 정종여가 의식용 괘불을 그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정종여는 전통적인 불화 양식을 따르지 않고 동양화풍의 맑은 채색화법으로 이 괘불을 완성했다. 굵기의 변화가 크고 리듬감이 넘치는 필선, 인간미가 넘치는 부처의 얼굴 표현 등에서 전통 불화의 법식에서 벗어난 파격이 느껴진다. 부처의 머리카락에서 윤곽선을 없애고 부드럽게 처리한 점, 바탕색을 번지듯이 처리한 점 등에서는 부분적으로 일본의 채색화법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20대의 젊은 정종여의 패기와 새로운 화풍에 대한 관심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단의 신세대 작가 백윤문(1906~1979) 작가는 동경 유학파 출신의 김은호(1892~1979)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채색화조화와 채색인물화로 두각을 나타낸 신세대 화가였다. 이들은 1930년대 전람회의 스타 작가로 부상했지만 개인적인 비극으로 절필을 한 뒤 화단에서 사라졌다. 이후 1981년(백윤문) 유족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지기까지 두 화가는 화단과 학계에서 사실상 잊혀져 있었다. 근래에는 일본에서 유입된 채색화풍에 사실성을 강화하고 향토성을 가미하여 1930년대 한국화단을 다채롭게 만든 화가들로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규상(1918~1967) 작가는 한국 모던아티스트 1세대로 불린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고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현대미술을 개척한 선두주자이다. 그러나 이규상은 일체의 형상이 배제된 극도의 추상회화를 추구하면서 세상의 이해로부터 멀어졌 주류 화단과 거리를 두었기에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러왔다. 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 시작하는 시점에서 적극적인 선언이나 행동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예술세계와 창작 태도를 모색해 간 이들의 작품 활동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정규 작가는 1958년 한국판화가협회를 결성하고 국제판화전을 기획하면서 현대판화의 보급에 몰두했다. 정규는 1958년 첫 번째 판화 개인전을 개최한 뒤 그로부터 5년 뒤인 1963년 서양화가 이항성과 함께 《정규.이항성 이인전》을 연다. 이 전시에서는 정규의 목판화, 이규상의 석판화, 외국화가의 에칭 등 다양한 판화기법이 소개되었다. 이 전시에 출품한 <노란새>는 다색판화 기법을 사용하고 목판화의 거친 질감을 드러내면서도 대상의 형태는 더욱 단순하게 표현했다.

날개를 펼친 새의 형상 주변의 대각선과 원, 노란색의 새 주변의 검은색과 흰색 등 형태와 색채의 대비로 간결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편, 목판화의 거친 칼자국을 남겨 화면에 풍부한 질감을 더했다. 정규 자신이 회화 양식에서 완성한 간결한 구조미를 판화 양식에도 성공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정규는 1963년 경희대학교에 요업공예과 초대학장이 된 뒤 도자 산업을 이끌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옛 가마터를 답사하고 도자기 파편을 수집하며 전통도자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건축물의 세라믹 벽화 작업을 시작했다. 오양빌딩은 1962년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1964년에 준공되었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인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로, 건물의 한 면에 정규가 거대한 벽화를 장식했다. 벽화에는 전통 가마에서 구워진 옹기, 조선시대 가마에서 수집한 도자기 파편이 사용되었다.

중앙의 거대한 원형은, 태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거대한 크기와 두께감에서 부조 조각을 방불케 한다. <오양빌딩 벽화>는 현대적인 조형성을 갖추면서도 전통 도자 전반에 관한 정규의 관심이 집대성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정규는 이 밖에도 부산 해운대의 극동 호텔, 남산의 자유센터, 대학로의 우석대학교병원 정문에 세라믹 벽화를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