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Cartier-Bresson (French, 1908-2004) Albert Camus, 1946
아름다운 자연의 왕국에서 추방된 인간의 부조리를 파헤친 작가 카뮈(1913-1960)
알베르 카뮈는 20세기 전쟁과 파국의 시대에 딜레마에 빠진 인간과 부조리한 삶에대한 소송(en proces)을 건 작가요, 또 막다른 골목에 빠진 기존 질서에 대항하여그 비상구를 찾고 새로운 인간 조건에 대항하여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 작가였다.
그는 현대인들의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삶 속에서 부딪치는 부조리함과 그것을 깨치지 못하는 현대인의 어리석음을 명료한 의식과 역설적 언어로 경고하며, 보다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인간상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반항적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을 통한 진정한 긍정'과 '반항을 통한 진정한 창조'에 이르는 인간상을 제시했다. 이것은 프랑스 사상 전통 중 하나인 모럴리즘이 현대화인데, 이는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공감을 줄 수 있었다. 삶에 대한 낯설음이나 세상에 대한 무관심(indifference du monde)은 분명 현대인의 어두운 일면이다. 카뮈는 바로 이점을 고발하고 있다.
그가 '낯설음'의 작가다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출신부터가 '아웃사이더'였다. 물론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 본토인도 아니다. 파리 출신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알제리 출신이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어렵게 고학을 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폐결핵 등으로 건강이 나빠 후에 교수 자격시험도 포기하고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파리 작가와는 다르게 지중해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지중해 바다의 세례를 받으며 자랐다. 그에게는 태양과 바다가 그의 모든 창조력 무의식적 근원이었다. 태양은 그의 아버지요, 바다는 그의 어머니다. 프랑스어 발음에서 어머니의 발음 '메흐(mer)'와 바다의 발음 '메흐(mer)'는 우연히도 같다.
그는 이러한 불우한 어린 시절을 통해 두 가지 점을 배웠다. 한 가지는 삶에 대한 열정과 성실이고, 또한 가지는 인간에 대한 연대와 연민의 자세를 취한다는 점이다. 카뮈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조리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자연만이 유일한 조화와 행복의 왕국을 이루고 있고 인간사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 없는 자연'을 동경하기도 한다.
그는 기존의 프랑스 문학 풍토와도 좀 다른 점이 있다. 카뮈의 소설은 프랑스 전통 소설 양식에 분류하기에는 지방적이다. 그의 대표작 <이방인>에서도 그런 점에서 돋보인다. 특히 이 책의 장점은 내용의 전개보다는 세련되고 절제된 그의 문체 때문이다. 그의 소설 전개 방식이 전통 소설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부조리하게 보인다. 독자를 당황하게도 하고 놀래게도 하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브레이트의 '낯설게 하기(소외 기법)'과 꽤 닮았다고 할까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개의치 않고 그날 바닷가에서 애인과 정사를 나눈다. 이런상황 설정은 현대적 부조리의 한 단면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책에서 카뮈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성에서 깨어나면서 삶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명료한 언어로 그리고 있다.
어느 날 아침, 의식이 눈뜨는 순간,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산다는 게 도대체 뭔가? 나는 진정 살아 있는가? 산다는 것은 의무인가? 정당한 것인가?(vivre droit ou devoir?)" 이 부조리의 발견이 카뮈 문학의 시발점이다.
유럽 본토에서 벌어졌던 세계 1차-2차 대전 등으로 죽음과 공포와 소용돌이 속에서 떨며 방황하는군상들의 소외된 모습을 작가적 양심과 역사적 이식이 투철했던 젊은 작가에게 있어서 그냥 넘어갈수 없는 쟁론이었다. 인간 조건에 대한 철학적 물음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항이었다.
키에르케고르부터 시작된 '유신적 실존주의'에서 하이데거의 '무신적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삶은 불안, 절망, 공포로 고민했던 시대였고,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던 시대였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햄릿형 인간, 그런 갈등과 고민이 20세기적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것을 카뮈는 그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서 "자살을 할 것이냐? 자살을 하지 않을 것이냐? 이것이 모든 철학의 첫 번째 물음이다."라는 카뮈적 어법으로 다시 제기된다.
이 질문은 얼핏 들으면 상당히 무겁고 낯선 질문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한번은 던져볼만한 질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고민은 그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의어린 시절 뼈아프게 맛본 인간 조건과 심한 폐병으로 인한 질병과 고통 속에 자연스럽게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는 이런 쓰라린 절망의 체험 끝에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삶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삶에 대한 탐욕(애착)도 없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의 삶의긍정은 종교적 초월의 의미는 아니다. 그에게는 내일보다는 오늘이 중요하다.
삶의 초월이나 미래적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처럼 - 아무리 애써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돌을 이고 또 지고올라가야 하는 인간, 여기엔 종교적 의미의 어떤 구원이나 절망은 없다.
이러한 인간성의 전형은 그의 가장 대중적 소설 <페스트> 의 주인공 의사 리외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의사 리외는 페스트의 전염병 도시 오랑을 치유하는데 헌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렇다고 페스트균이 완전히 섬멸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다시 퍼질지 모르는 페스트균과의 싸움에 만전을 기한다. 이것이 바로 카뮈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소설의 주인공 리외는 이와 함께 이런 질문도 던진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것을 바로 카뮈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현재의 삶이 중요하기에 부조리 치유가 시급하다.
이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창조적 반항으로 발전되는데, 이것이 카뮈 문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 관건이다. 이 창조적 반항은 이 천년 유럽 문화를 지배해 온 그리스 문화와 함께 기독교 문화의 안일주의와권위주의에 대한 반항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천 년 동안 서구를 지배해 온 기독교는 카뮈가 보기에는망령이 든 것이다.
역사에 대한 무책임성과 무관심은 카뮈에게는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시지프는 카뮈의 변신이며 영원한 삶보다 영원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인간상의 한 화신이다. 카뮈는 이같이 '성자주의'나'영웅주의'를 배격하면서 절망적 노력과 책임 있는 성실성을 실천하는 인간상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런 인물을 리외 의사를 통해서 묘사된다.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스토이시즘이 좀 낯설게 느껴지지만, 카뮈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더 많은 전쟁과 이념의 갈등과 대립, 긴장과 공포 속에 살았기에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몸부림은 더 격정적이었던 것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살육과 파괴, 정치적 광기는 카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였다.
인류 공동의 적인 전쟁, 절망, 불안이나 파쇼의 망령과 싸우기 위해서는 공동의 전선이 필요했다. 개인적 안일주의를 배격하고 책임질 수 있는 공동체적인 대안을 촉구한 것이다. 소위, 앙드레 말로가 주장하는 '인류 동지애(fraternité humaine)'를 강조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의 행동이라도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연극<정의의 사람들>에서 그는 분명 모든 것이 허용된다(Tout est permis)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에는 자기모순에 빠져 허무주의와 폭력과 파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가 프랑스 공산당(탈당)에서 멀어지게 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카뮈 문학의 후반기는 <전락>이나 <추방과 왕국> 이라는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전반기의 그것보다 더 난해하고 더 예술적으로 한 단계 올려놓은 것이어서 문학적 형상미가 빼어나고우리가 접근하기가 그리 쉬지 않은 작품이다.
특히 시적 언어로 우화 형식을 띠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데는 단편집 <추방과 왕국>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의 후반기 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잇다. 아름다운 자연의 왕국에서 추방된 인간의모순되고 추악한 모습을 카뮈 특유의 문체와 기발한 구성으로 잘 그려냈다. 우리에게 많은 문제점을제거하는 문제작이다.
<전락>은 그의 후반기 대표작으로 인간이 짐승의 자리로 곤두박질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성서의 창세기에 보여준 인간 타락의 이미지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것은 또한 앞으로도 계속될 여러 유형의 인류 타락의 모습과 그에 대한 준엄한 결과일 수 있다는 고발이다.
그러나 그 떨어짐의 미학은 또다시 일어나기 위한 떨어짐인지 모른다. 왠지 이 작품은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고해성사 같다. 그러한 진지함과 성실함은 장엄하고 경건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작품은 그 무대가 <이방인>의 무대인 알제리 바닷가나 <페스트>의 무대인 알제리 오랑 시가 아니라 유럽 한복판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카뮈의 <이방인>의 해설서 같은 역할을 한 <시지프의 신화>에서는 행동하는 인간을 보여주었다면,<페스트>나 <전락>의 해설서 같은 역할을 한 <반항인>에서는 창조하는 인간을 보여주었다. <반항인>이라는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반항은 우주의 건설이다." 라는 전제이다.
물론 여기서 반항이란 파괴적 반항이라기보다는 창조적 반항을 말할 것이다. 처절한 자기비판을 통한 인간 위선과 무력을 고발하고 부조리한 삶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뜨거운 열정을 한마디로 인류 공동의 악과 투쟁하는 인간상으로 제시한다. 카뮈는 결국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서 "우리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그 영역이 확대된다.
그는 이렇게 휴머니즘을 통한 인류 구하는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불의의 차륜 사고로어처구니없는 부조리한 죽음을 맞게 된다.
카뮈 그는 찬란한 태양, 지중해 바다, 신비한 사막의 밤하늘 속에서 별빛에 젖은 왕자와 같은 환희를맛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악과 부조리, 현실에 부딪치는 전쟁, 불안, 비극, 질병, 가난의 문제 등 몸부림치는 역사의 딜레마 앞에서 그는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부정'을 '긍정'으로, '고독'을 '연대'로, '정관주의'를 '행동주의'로, '니힐리즘'을 '휴머니즘'으로 '반항'을 '창조'로 바꾼다.
카뮈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끄는 인간적 미덕이 많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는 분명 부조리 문제를 그의 문학과 철학의 화투로 삼아, 창조적 반항과 인간성 파괴에 대하 투쟁 그리고 열정적이고 진실한 인류애를 통해 이 사회의 극복해 보려 했던 우리 시대의 휴머니스트로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대표자로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1976년 대학신문에 쓴 글 약간 수정하다. 80년대 그의 전집을 다 버린 적이 있다. 80년대는 민중시대였기에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너무나 강했다. 서구적인 것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까 거부라고 할까 그런 시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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