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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현대미술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 향년 88세 별세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 향년 88세 별세 / 독일에서 크게 성공한 신표현주의 한국 작가 세오의 대학(독일 베를린예술대학교) 시절 스승

현대미술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 향년 88세 별세

현대 회화와 조각, 드로잉 및 판화 분야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별세 소식을 전하게 되어 깊은 슬픔을 표한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이자 혁신가였던 그는 전 생애에 걸쳐 동료 예술가들과 국제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그의 작품들은 앞으로도 그의 예술적 유산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로버트 이사프(Robert Isaf)가 집필한 바젤리츠 유족의 부고 전문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는 고인의 아내 엘케 바젤리츠(Elke Baselitz)와 두 아들 다니엘 블라우(Daniel Blau), 안톤 케른(Anton Kern), 그리고 유가족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전한다. 또한 수년간 헌신과 충성으로 고인을 보좌해 온 스튜디오 팀에게도 깊은 위로를 보낸다. 고인을 기리는 전 세계의 예술가, 미술관 큐레이터, 갤러리 동료, 친구 및 협력자들과 함께 그의 빈자리를 깊이 통감한다.

나는 그림을 시작할 때 마치 땅을 일구고 구멍을 뚫듯, 혹은 남몰래 엿듣거나 되새김질하고 광물을 채굴하듯, 무엇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렇게 선과 형상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내가 속한 세계를 넘어 또 다른 세계로 스스로를 실어 날랐다.

게오르그 바젤리츠

게오르그 바젤리츠는 20세기 후반 독일 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국제 미술계에 광범위한 발자취를 남겼다. 2차 세계대전의 비극과 트라우마에 대응하여, 그는 선대 예술가들의 작업을 수용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예술적 언어를 구축했다. 바젤리츠는 끊임없는 형식적 발전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쇄신해 왔으며, 미술사와 자신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반추하며 고유한 표현 방식을 발전시켜 평단으로부터 지속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의 생애 마지막 연작은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202656일 베니스 조르조 치니 재단(Fondazione Giorgio Cini)에서 개최되는 전시 황금빛 영웅(Eroi d'Oro)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바젤리츠(Baselitz)_I '훌륭한 친구들(Die großen 'Freunde)'_사진저작권(Photo) : 커밍 P_Cuming 1965년

나에게는 돌이켜볼 긴 삶의 궤적이 있다. 이는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실로 엄청난 수의 그림을 그려왔다는 뜻이다. 1965년 당시, 나는 훗날 영웅(Hero)연작으로 불리게 된 그림들을 그렸다. 이 연작은 오랫동안 내 작업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나의 예술 여정의 끝자락에 선 지금, 그간의 여정을 갈무리하는 일종의 결론을 내야 할 시점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지난 세월의 작업들을 하나의 세계로 집대성하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들을 미술사학자에게 보여준다면, 그들 역시 선을 긋고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오르그 바젤리츠, 2026

게오르그 바젤리츠 유족이 전한 부고

: 로버트 이사프(Robert Isaf)

독일 현대 미술의 지형을 새롭게 정의하고 동료 및 후대 예술가, 나아가 국제 미술계에 지대한 영감을 준 작센(Saxony) 태생의 거장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가 향년 88세를 일기로 평온하게 타계했다.

전쟁과 폐허, 점령의 시기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분단된 고국에서 망명객의 삶을 살았던 바젤리츠는 전후 유럽이 겪은 시대적 풍파를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이었다. 이는 인류의 문화적 서사 속에 깊이 각인된 그의 방대한 예술적 유산뿐만 아니라, 그가 견지해 온 정직하고 끈질기며 훌륭했던 삶 자체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1938123일 한스 게오르그 브루노 케른(Hans-Georg Bruno Kern)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는 1961년이 되어서야 고향인 도이치바젤리츠(Deutschbaselitz) 마을에 경의를 표하며 '바젤리츠'라는 이름을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으로 삼았다. 이곳은 야생동물 사진작가들과 이젤을 들고 현장에 나가 풍경을 직접 담아내는 사생 화가들을 매료시키는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며, 어린 시절의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술이라는 인간의 창조적 행위를 접했다. 오버라우지츠(Upper Lausitz)의 새들과 풍경은 그에게 미술의 본질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Art Academy of Dresden)에서 입학을 거절당하고, 동베를린의 바이센제 미술 대학(Weißensee Academy of Fine and Applied Arts)에서 제적당한 후, 가중되는 정치적 압박과 석탄 광산 노동 공동체로의 강제 노역 위협에 직면하자 1957년 동독을 떠났다. 초기 선언문 발표와 단체전이 열렸던 1961년 무렵, 그는 이미 동독 미술의 엄격한 규율과 기대치는 물론 서독의 예술적 조류에서도 벗어난 이방인임이 분명해졌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도, 추상표현주의자도 아니었으며, 미술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었다.

동독에서 '사회정치적 미성숙'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바젤리츠는 1963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도 언론으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시련을 겪었다. 그의 그림 두 점은 압수되었고 전시는 강제로 폐쇄되었으며 경찰로부터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장학금을 받고 피렌체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훗날 걸작으로 추앙받게 될 기념비적 연작 영웅(Heldenbilder/Heroes)을 탄생시켰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 바젤리츠는 오늘날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기법인 '역전(inversion)', 즉 그림을 거꾸로 뒤집어 그리고 전시하는 독창적인 방식에 도달하게 된다.

바젤리츠를 시대를 정의하는 선구자의 반열에 올린 것은 단순히 윤곽선이나 명암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관계', 즉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연결성을 다루는 탁월한 통찰력이었다. 이는 미술 창작에서 간과되기 쉬운 지점이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젤리츠는 이 관계의 층위를 비할 데 없는 능숙함과 숙련도로 조절했다. 서베를린 졸업반 시절의 초기 '판데모닉(pandemonic)'한 충동부터 그의 마지막 연작이자 초월적인 황금 배경이 돋보이는 황금빛 영웅(Eroi d’Oro)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그의 전 생애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그가 사용한 기법은 실로 다채롭다. 어떤 시기에는 주제와 모티프를 캔버스 위에서 물리적으로 분할하기도 했고, 또 다른 시기에는 어떠한 맥락의 뒷받침도 없이 거대하고 기괴하게 부각된 신체의 일부만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암시적인 제목을 붙인 대상의 형태와 특징을 깎아내기도 했다.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독일관에서 선보인 조각을 위한 모델(Model for a Sculpture)은 마치 관객들에게 도전하듯 노골적이고 충격적인 미완의 형태로 나타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젤리츠가 사후 원치 않는 모든 수식어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의 작업은 흔히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여러 흐름과 비교되었으며, 많은 관찰자들은 그를 독일 신표현주의(German Neo-Expressionism)라는 다소 모호한 운동의 상징으로 규정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미술 형식이 표현주의의 문법을 따른다면,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오히려 '(Pop)'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동시대 운동 중 관찰자와의 관계를 조절하는 것을 핵심 과제로 삼은 것은 결국 팝아트(Pop Art)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들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며 형식적 분류라는 목적에는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주의적 유사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바젤리츠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정수를 놓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그를 ''으로만 한정하면, 그가 거장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던 20세기 중반 이외의 바젤리츠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마주하는 진정한 경이로움은 초기 시절의 뜨거웠던 성공을 넘어서,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의 진정한 천재성이 가장 온전하게 빛을 발했다는 점이다. 바젤리츠는 지난 10년에 걸쳐 일생의 모든 주제와 모티프를 결합하고 재검토하는 비범한 후기 작업들을 남겼다. 이는 피카소(Pablo Picasso)의 노년기를 의식적으로 참조한 2015년의 강렬한 아비뇽(Avignon)연작에서 시작되었다. 피카소에 필적하겠다는 선언은 대담한 것이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그 대담함은 명확한 실체로 증명되었다. 그는 결국 특정 운동이나 학파에 귀속시키기 어려운, 독보적인 비전을 지닌 인물이다. 2021년부터 2022년까지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에서 열린 파리 회고전은 그의 미술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이러한 독창성과 완결성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아비뇽연작 이후의 후기 작업들은 그 비전이 지닌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시켰다. 독수리, 오렌지를 먹는 사람, 벌거벗은 인간의 형상들이 다시 등장하지만, 이는 초기 시절의 탐색을 무색하게 할 만큼 확신에 차 있고 잊히지 않는 모습으로 구현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연작들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평생을 함께해 온 동반자와의 삶을 향한 남다른 성찰이다. 바젤리츠는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직후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던 엘케 크레츠슈마(Elke Kretzschmar)를 만났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초기 시절, 두 사람은 제2회 카셀 도큐멘타(documenta)부터 파리와 암스테르담의 주요 미술관들을 함께 유랑하며 견문을 넓혔다. 당시 이들은 정치 난민 보조금과 각종 잡일로 생계를 꾸려가며 맥주통을 배달하거나 술집 벽에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으며, 마침내 1962년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 그녀는 전면적인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작품 속에서 엘케를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젤리츠가 그녀를 만난 지 한참이 지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온전하고 확고하게 무르익은 이후의 일이다. 그녀는 바젤리츠가 자신의 예술적 기교에 확신을 갖게 된 후에야 비로소 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젊은 날의 일시적인 열정이 아니라, 밀랍의 홈 속에 안착한 촛불처럼 고요하고도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랑의 증거이다. 우리는 자화상 속의 남자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그의 파트너이자 가장 친밀한 조언자인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예술가가 자신의 삶과 평생의 업을 이토록 시적인 힘으로 갈무리하는 것은 경이로운 성취이며, 바젤리츠는 생애 끝자락에서 거장의 손길로 이를 완벽히 구현해냈다. 그의 마지막 연작을 선보이는 전시 황금빛 영웅(Eroi d’Oro)은 베니스 비엔날레와 나란히 개최되어 관람객들에게 압도적인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바젤리츠의 궁극적인 주제는 언제나 엘케였고, 마지막까지도 그러했다. 정직하고 당당하며 깊이 인간적인 두 사람의 초상을 담은 마지막 작품들은 이 모든 생의 의미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형상들은 그들이 함께 살아온 수많은 황금빛 세계와 삶, 그리고 영원의 시간 속에 거꾸로 뒤집힌 채 아련히 머물러 있다.


“4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인연을 맺고, 30회가 넘는 전시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더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는 수십 년간 회화와 조각, 드로잉, 판화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어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서, 그는 늘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예술적 영역을 확장해 왔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선대 예술가들과 맺어온 지속적이고 깊은 교감, 작가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과의 '대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이제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세상에 더 큰 울림을 전할 것입니다. 그의 부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커다란 상실이며, 게오르그 바젤리츠가 없는 미술계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타데우스 로팍(타데우스 로팍 갤러리 설립자 및 대표)

“It was a privilege to have known Baselitz for more than 40 years and to have worked together so intensively on over 30 exhibitions. For decades he continuously broke new ground with his work, whether it was his paintings, sculptures, drawings or printmaking. He w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rtists of our time, repeatedly pushing artistic boundaries in such a thought provoking way. His works reflect his continual and deep engagement - or confrontation as he said - with his artistic forebears, and now the impact of his own artistic legacy will resound. This is a profound loss, I simply cannot imagine the art world without Georg Baselitz.”- Thaddaeus Rop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