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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론미술사

[김구림] 태양의 죽음(1964년) 작품 해설 및 다양한 아카이브 등등

김구림 <태양의 죽음(1964년) 1번> 테이트모던 소장품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건 정말 회화도 아니지만 획기적인 실험적 작품이다. "현대미술이란 오늘날의 심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너무나 부조리하고 비정하다. 바로 그런 전율을 느낄 만큼 공포와 불안에 싸인 세기말적 비정미로 넘친다" - 김종목

태양의 죽음 1 테이트 무던 소장품

<태양의 죽음> // 김구림 : 저기 <태양의 죽음> 같은 거는 이야기했나? / 서 : <태양의 죽음>이요? / 윤진섭 : 까만 그림? / 서정걸 : 아! 말씀 안 하셨어요. / 김 : 그게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 소장되어 있는 것 / 윤 : 까만 그림이요? / 김 : 까만 것 그게 두 장... 지금 두 작품이 남아 있어요. <태양의 죽음) 시리즈가 두 작품인데. 하나는 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고 하나는 지금 테이트 모던에. / 윤 : 페인트(paint)를 어떻게 몇 점이나 하셨어요? / 김 : 아니, 많았지. 많았는데 남아 있는 게 그 두 작품만 남아 있는데 하나는 테이트 모던에 들어갔어요. 그 시리즈가 이제 저기에도 두 점이 있고 그 워커힐미술관. 거기에도 있고 여러 군데 및 점씩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이제 특히 이제 그 작품은 어떻게 했냐 하면 우리집이 상당히 그 당시에는 마당도 넓고 굉장히 잘 살았어요. 큰 집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이런 작품을 하게 된 동기가 다른 사람들은 유화로 뭐를 형태를 그린다. 이런 것을 했잖아요. 그리고 이 당시에 이제 박서보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앵포르멜 한다고 뭐 막 저기 물감을 말이지 두텁게 막 갖다 발라가지고 걸레로 닦아내고 이런 짓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다가 내 어떤 저기 이 손의 의미성을 넣기 싫었다고요. 여기 작품에다가. '손의 의미성을 안 넣고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물질 자체부터 바꾸자'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게 캔버스가 아니라 합판을 샀어요. 베니어판을 사가지고는 거기다가 이제 시장에 가지고 그 당시에 비닐이 나왔었을 때입니다. 비닐을 갖다가 거기다가 발랐어요. 그래 가지고 이제 내가 드로잉해어요. 어떤 부분에다가 석유를 갖다놓고 마당에 떨쳐놓고 석유를 뿌려가지고 불을 지르고, 그 다음에 옆에 담요를 준비해놨다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어떤 부분만 내가 해놨기 때문에 그 부분만 타오르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불 올라왔을 때 담요가지고 탁 끄고, 그래서 이 작품이 뭐냐면 행위가 합쳐진 작품이에요 이게. 행위가 벌써 그때 퍼포먼스가 나오기 시작한 거야 내가. 그래가지고는 만든 작품인데 그 이야기를, 그걸 알고 테이트 모던에서 환영을 한 거야. 야 벌써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이런 일이 없었는데 행위를 결합시킨 작품을 했구나. 그런데 그 당시에 뭐냐 하면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은 잭슨 폴록이라든가 캔버스 위를 빙빙 돌아다니면서 막 뿌리는 것. 이런 건 진짜 많이 행위와 완전히 결합한 작품이구나 내가 거기서 굉장히 높이 산거야. 이거는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세계 역사에 없으면 안 된다 하고는 자기들이 이걸 바로 사놓은 겁니다. 테이트 모던에 다가 이 작품을. 그런 작품이에요. 그런 역사가 있어요. 이 작품은 60년대 초 작품이죠 그게? / 서: 아... 1960년대 초에요? / 김: 네. 도록을 보며) 여기 연도가 나와 있지요? / 서 : 여기 사진이 실렸나요? 김 : 네. 실려 있어요. 잭슨 폴록이 언제부터 그걸 했죠? 그건 60년 몇 년도죠? / 윤 : 50년대. / 김 :50년대인가? 맞아

<편지는 유물이 될 것이다 - 매스미디어의 유물 "삶 자체가 무한한 팔레트이자 캔버스이다" - 김구림 / 메일 아트 소동> "당시 국전 심사위원들이나 미술계를 좌지우지했던 사람 중엔 젊은 놈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어른들을 놀린다"고 한 이들도 있었다. 국전과 미협의 부패를 비판하려고 했던 것인데, 상을 안 줘서 이런 행위를 한다고 오해한 사람도 있었다. 라고 전했다. 김구림과 김차섭의 의도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어느 기자의 눈엔 장난이었다. 빨간 루즈빛 도장이 새겨져 메일 받는 사람에 잠시 공포에 질리다 <아래 1969'매스미디어의 유물' 종이와 명함(메일 아트) - 김구림 김차섭>

김구림 전시에서 2023년 국립현대 미술관 전시(김구림 회고전)도 일부 작품 거부 당했지만 생애 여러 번 작품 전시가 거부되다 / 1981년 이것은 판화가 아니다 라고 / 김구림 작가는 판화 저서가 2권이나 되고 한국 판화의 선구자임에도 거절 당해 / 일본 사람들 손재주 대단 우키오에가 프랑스 인상파 점령 그래서 1973년부터 일본에서 자극을 받아 판화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일본판화가 협회 회원>이 되고 판화 저서도 2권을 냈어요.

199110LA 라카 갤러리(대표 한국인)에서 3인전이 열렸다. 1) 백남준 비디오 작업 2) 임충섭 설치 미술가 3) 김구림 설치와 평면 결합 / 3명 거장들 다 모였군요. 백남준은 고인 되시고 <당시 김구림 출품작(LA, 1990년 음양시리즈 35)> 이 작품은 자본주의 배금사상을 상징하는 광고로 압축된 신문 잡지와, 자연의 상징인 야자수가 보인다. 미국사회의 물질문명을 비판한 작품이다. 김구림은 이 작품에 대해 미주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늘 실험하는 자세로 극과 극(자연과 문명)을 연결하려고 한다 이런 대작을 하려면 수개월 걸리고 팔리지 않지만 상업적 관심을 두었다면 예술가의 생명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