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우순옥 작가] 짧은 여행자가 쓴 오래 남을 '빛' 드로잉
이화여대 우순옥 교수(작가)와 2014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장 미셸 바스카야' 전 때, 찍은 사진이다. 오늘 귀천하셨다고 하니 너무 가슴 아픕니다. 부드러우면서 내면이 강한 또한 예술정신이 투철한 작가라고 할까요.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할 때 백남준에 대한 추억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삼가 고인에 대한 애도와 유족에 대한 위로를 전한다.
인생이란 여행자가 쓴 짧은 '빛 드로잉’
우순옥 작가는 인생을 짧은 여행으로 봤다. 그녀는 시적 은유와 철학적 사유가 넘치는 설치, 영상, 조각, 오브제 작품 등을 해왔다. 구체적 대상보다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할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언어 이전에 우리 속에 내재한 개념의 원류를 찾았다. 또한 그녀는 회화보다는 설치, 형상보다는 개념, 색보다 빛을 중시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 전체를 넓게 해석하면 '빛 드로잉'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달빛이 주는 상상력
전시장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왼쪽에 NASA에서 찍은 달이 느리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곳'이라는 작품이 있다. 분위기가 잔잔하고 고요하다. 작가에게 본다는 것을 그 범위를 넘어 심연을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때 묻지 않은 감각으로 본 달빛이라 그런지 더욱 신비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달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지만 우순옥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만질 수 없고 소유할 수 없기에 더 아련한 동경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달이 차면 지듯 인생의 덧없음도 곱씹으면서 "당신은 사라진다. 아름답게 희미해진다"라고 시를 읊는 것 같다.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나그네 길에서 인생이란 잠시 왔다 떠나는 여행이기에 그런 맥락에서 '잠시 동안의 드로잉'도 나왔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유토피아를 갈구하나 그 환영은 신기루 같이 금세 사라진다. 그러기에 작가로써 그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을 항구적 시간과 초월적 공간을 획득하고 싶어 한다
죽은 나무를 살려낸 '빛 설치조각'
이런 고민에 빠진 그에게 길에서 우연히 본 '죽어가는 나무'는 창작의 동기가 되었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누구보다 예민한 여성작가로써 더욱 그랬을 것이다. 무기물인 철에 형광빛을 불어넣어 생명의 나무로 바꾼다. '커플 트리'라고 멋진 제목을 붙였다. 작가는 이 나무를 보고 너무 사랑스럽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런 눈길은 바로 품고 보듬고 어루만져 뭔가를 회생시키는 여성의 '살림' 본능에서 온 것이리라. '살림'은 '살린다'의 명사형이고 죽임의 반대말이다. 이런 정신이 바로 예술가의 몫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대가족제에서 며느리가 공부로 지친 자녀와 직장 일로 힘든 남편과 노환 든 시부모를 밥을 먹여 살려내듯 우 작가는 이런 작품으로 그런 회생을 구현했다.
영화가 준 예술혼, 설치미술로
그리고 갤러리 1층 본 전시실로 들어서면 '신기루' 연작이 보인다. 작가가 대학시절 프랑스문화원에서 본 영화나 독일 유학시절 대학 영상자료실에서 본 영화 중 감명을 받은 작품을 소재로 만든 설치작품이다. 1년이 12달이라 그런지 200편 중 12편만을 엄선했다.
미니모니터에는 영화장면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를 5분에서 10분 정도 반복해 보여준다. 그 TV 주변에는 작은 정원처럼 들꽃들이 둘러쳐져 있다. 관객이 주변을 서성거리며 영화도 찬찬히 보면서 삶을 좀 색다르게 사유해 보도록 유도한다.
희미한 옛 영화의 감회를 회상하며 그때 받은 환영을 불러낸다. 영화가 주려고 했던 메시지도 새삼스럽게 깨우치고 그 의미도 터득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12편의 '신기루 연작'은 무당이 죽은 자를 불러내 산 자와 만나 화해시키는 것 같은 초혼제라 할 수 있다.
경쟁과 속도숭배 속, 숨과 쉼 찾기
그녀는 주로 오브제와 비디오 작품 등이 많다. 정면에 보면 '예술은 이미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라는 제목이 붙은 영상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유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라 독특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추와 자기성찰을 통해 숨과 쉼을 얻으면 우리 마음속에 예술이 저절로 들어온다는 뜻인가 보다.
이 영상에서 작가가 직접 낭송하는 6세기 시(詩)도 들을 수 있다. 이는 아르헨티나의 환상적 리얼리즘작가인 보르헤스가 쓴 불교해설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간이 자아를 버리고 무념무상의 빠질 때 맛보는 환희를 노래한 것이다. 우 작가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돌, 강, 물이었지 모른다고 윤회적 관점도 피력한다.
보이스의 오브제 연상시키는 작품
그녀는 요세 보이스처럼 따뜻한 스웨터가 유리박스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층층이 쌓인 스웨터에서 온기 느껴그리고 '포즈(Pause)'라는 큰 단어가 적혀있다. 그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솜이불 같은 온기가 느껴진다.
경쟁과 속도가 숭배되는 사회에서 치이고 밀리고 쫓기는 듯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작품은 큰 힘과 위로와 용기를 준다. 한편 아주 하찮은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물을 찬찬이 들여다보는 재미와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로움도 되찾게 해준다.
그녀의 작품 중에는 타원형의 연작이 벽에 걸린 작품이 보인다. 이는 서구문명을 전복시키고 원시적인 것에서 생명을 구하려 한 독일작가 요셉 보이스(1921-1986)의 주술성 높은 오브제작품을 연상시킨다.
보이스는 잘 알다시피 1차, 2차 대전과 나치즘으로 상처받은 독일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며 씻김굿을 벌린 박수무당이었다. 그는 또한 '모든 이가 예술가'라고 주장한 문화민주주의자로 대중의 예술참여를 유도하는 '사회적 조각'이라는 개념을 내놓기도 했다.
데자뷰 연작에는 '황금물이 흐르는 손', '거대한 기둥' 같은 다소 애매한 제목이 붙어있다. 작가노트에서 그는 "어디에도 없는 곳에 대한 꿈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런 시각언어를 통해서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형상화했는지 모른다.
독일유학에서 영상설치에 더 관심 둔 이유
그녀는 7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우순옥 작가가 어떻게 회화보다 영상과 설치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었더니 먼저 대학시절과 독일유학동기부터 말을 꺼낸다.
"저도 물론 이화여대 다닐 땐 교과과정도 그랬지만 페인팅과 드로잉을 많이 했죠. 개인적으로 시도 좀 썼고요. 그러다가 1986년 독일음악과 보이스를 좋아해 독일유학을 가게 됐는데 보이스는 이미 작고했어요. 마침 제 마음에 드는 우커 교수를 만나 지도교수가 됐죠."
이어 당시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그 이유를 밝힌다.
"당시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는 전위예술의 전진기지로 전쟁터 같았어요. 굉장히 아방가르드하고 그 유명한 '플럭서스(60년대 전위미술운동)'의 주 무대였죠. 백남준은 명성 높았고 우리 그걸 본 산증인이죠. 저는 거기서 어떤 생각을 한 가지 매체에 고정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개념을 영상으로 하면 설치가 되고, 글로 쓰면 시가 되고, 오브제하면 개념미술이 되잖아요. 귀국해서도 그런 작업을 쭉 해왔죠.“
나는 그 부드러운 흰빛 정서의 따뜻하면서도 우아한, 그리고 치열한 예술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의 백색의 장소(백지와 같이 텅 빈)에서 조교로 지내던 5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독일로 건너가선 그의 아틀리에를 들르곤 하는데 그때 그 마음은 아직까지도 한결같다." - 우순옥
우순옥 작가 스승 우커 교수 세계적 작가
우순옥 작가(1958~)는 이화여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박사. 귄터 우커(Günther Uecker 1930~) 교수의 지도로 학교를 졸업한다. 인공화랑(1991), 국제갤러리(1993, 2006), 대림미술관(2002), '마인드 프로젝트-꽃씨'(서울 카페마운틴 2006), 아틀리에 705(2009)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젊은 예술인을 위한 예술상전'(독일 쾨갤러리 1991), '도시와 영상(서울시립미술관 1999)', '내 마음에로의 여행'(삼성미술관 2003), '차가움과 따뜻함'(성곡미술관 2005), '추상하라!'(덕수궁미술관 2011) 등 국내외 단체전 및 프로젝트 참여했다. 현재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서양화 교수로 후배를 양성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우순옥 작가 관련 기사
[국제갤러리] 보도자료 현대미술가 우순옥, 향년 64세로 별세
시간과 공간, 사물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해온 현대미술가 우순옥(1958-2023)이 4월 23일 별세했다. 향년 64세. 우순옥 작가의 유족은 “평소에도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신 분이고, ‘잠시 동안의 드로잉’(국제갤러리 2011년 개인전 제목)처럼 그렇게 살다 가셨다”고 소식을 전했다.
우순옥 작가는 특유의 관조적 예술관으로 삶과 세계에 대한 생각들을 평면, 영상, 설치 등을 통해 선보여왔다. 30여 년의 예술적 여정 동안 작가는 한국적 여백의 미와 개념적 표현의 조화를 통해 장소, 존재와 부재, 나아가 사물을 통해 기억되는 비가시적인 관계에 대해 일관되게 탐구했다. 삶과 긴밀히 연결된 예술을 실천하고자 했던 우순옥은 구체적인 사물을 표현하기보다 사라진 장소와 기억, 부재하는 대상에 주목하며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우리의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우순옥은 이화여자대학 미술대학 및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후,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Düsseldorf Kunstakademie)에서 수학했다. 1995년부터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활동했고 2022년 정년 퇴임하기까지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예술의 수행적 가치를 강조하며 수많은 예술계 인재들을 배출하는데 헌신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무위예찬》(국제갤러리, 2016), 《잠시 동안의 드로잉》(국제갤러리, 2011), 《아주 작은 집 - 아이캠(아이치 현립 예술대학, 2009), 《아주 작은 집》(국제갤러리, 2006), 《장소 속의 장소》(대림미술관, 2002), 《한옥 프로젝트-어떤 은유들》(아트선재센터 & 삼청동 한옥, 2000), 《나비의 꿈》(오사카 빛의 교회, 1996), 《물질비물질》(국제갤러리, 1993), 《생각은 그림자》(인공화랑, 1991) 등이 있다. 또한 제9회 광주비엔날레(2012), 제15회 시드니비엔날레(2006), 《한국현대미술 해외순회전: 사계의 노래 - 8인의 한국작갬(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2003), 《마인드 스페이스》(호암갤러리, 2003), 《또 다른 이야기-한일현대미술전》(국립현대미술관 &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200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1991년에는 빌리우스 발틱-유럽 현대미술 트리엔날레 최우수상, 젊은 예술인을 위한 예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고인의 빈소는 한양대학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다. 발인은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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