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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포럼(Forum)

[제7회 백남준포럼I] 홍성 "난 백남준 다면체적 사고에 반했어요"

[7회 백남준 포럼(홍성 편)] 2024년 5월 26일

[소개] 강사 박지연 교수(전 대학원장 아래 사진) 청운대학교(충남 홍성)에서 열리는 제7회 백남준 포럼(대표 이상미) 2024년 5월 26일 일요일 12시부터 점심 2시부터 강의 / 작년 박지연 교수 국회에서 발표한 <백남준 삶과 예술(미국 이민 100년 한국 대표하는 예술가 분야 백남준)> 요약본 쉽게 풀기 <수정 작성 중>

청운대학교 홍익관 51 박지연 교수


1) 참석자 전원에게 청운대 대학원에서 점심 제공 2) 교통비 백남준 포럼 후원회에서 일인당 10000원 지원 // ·박지연 교수 "청운대학교 공간디자인학과 // 장소 청운대학교 홍익관 51 충남 홍성군 = PAIK FORUM

[제7회 백남준 포럼 5월 26일(일요일)]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홍성종합터미널까지 2시간 소요> 1. 주제 : 공간 디자이너가 바라본 천지인 '백남준' 2. 발제 : 박지연 공간디자인학과 교수(원래 백남준 전문가 아니지만 지난번 의뢰를 받아 백남준 저서 30권을 읽고 백남준 예술세계를 요약해 국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다시 소개) <회원이 아니라도 누구나 신청하면 참가 가능> <청운 대학교에서 포스터 비용 현수막 제작비 지원 필요한 책도 지원한다고> <충남 홍성[시인 한용운 고향] 안 가보신 분 나들이 겸>

[일시 : 5월 26일(일), 14시-16시 장소 : 청운대학교 홍익관 510호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학길 25)] 주제 : 공간 디자이너가 바라본 천지인 백남준. 발제 : 박지연 공간디자인학과 교수 / 참여자 : 포럼 회원 중 신청자 전원 // # 이번달 포럼은 청운대학교 사회서비스대학 학장님이신 박지연교수님께서 국회에서 발표하신 백남준 관련 내용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전에 충남 홍성편 대중교통(자차) 소요시간 확인하셔서 안전하게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

[후원금 모집] 매월 운영되는 백남준포럼은 회원님들의 정성과 조력으로 만들어집니다. 혜택 : 홍보 노출, 매년 후원자 VIP 행사 초대 / 연간회원 : 월 1만 원, 연 10만 원(금액 자율) 평생회원 : 100만 원 / 후원계좌 : 카카오뱅크 3333 2878 20875 백남준포럼 / 문의 : 백남준포럼 공식 인스타그램 DM

[강의] <나는 백남준의 다면체적 사고에 반했다. 백남준 어린 시절 2만 개 이상의 색색의 실을 보면서 비디오아트의 색색의 전깃줄을 발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7회 백남준 포럼(홍성)> 박지연 교수의 백남준 이야기, 그녀의 성장기와 백남준의 성장기가 너무 유사한 점이 많아 우리도 놀라다 

[어린 시절 눈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실] 백남준, 그를 생각하면 무지개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형형색색의 실을 짜던, 가업인 공장에서 펼쳐진 화면이 영감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1932년생 조선의 백성들은 하얀색 옷을 주로 입었으며 결혼식이 있을 때나 설빔으로 색동옷을 입었다. 서민의 집에서는 그다지 많은 색상의 직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색과 다양한 이미지는 개인의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색은 2만 가지 이상이 면직물을 짜는 과정에서 그 조화를 보게 된다. 색색의 실은 백남준의 비디오작품에서 색색의 전깃줄(혹은 전자라인)로 이어진다. 아무도 쉽게 경험할 수 없던 다채로움이 그의 작품과 표현 방식에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백남준 자체가 다면적 사고체이기 때문에 그를 공부하다 보면 그 속에 다양한 모습이 발견된다.

<7회 백남준 포럼(홍성)> [앞마당에 그려놓은 피아노 건반에 몸을 맡기고] // 여기서 백남준 어린 시절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 박지연 청운대 교수 // 백남준은 왜 피아노의 음을 이미지화했나? // 백남준은 철절한 서비스 정신의 소유자다. 그 어려운 음(음악과 소리)을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하고 싶어서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일제강점기 격변의 시기에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났다. 섬유업을 운영하는 부유한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자랐다. 요즘 말로 금수저이다. 대부분의 조선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반면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큰누나 백희득은 피아노 레슨까지 받았지만 부친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 싶어 하였다. 백남준은 피아노소리가 너무나 좋았고 그 리듬을 온몸으로 느끼는 그런 아이였다. 큰누나가 레슨을 받는 모습과 그 소리를 기억하지만 피아노를 칠 수는 없었다.

청운대학교 홍익관 51 강의실 백남준 포럼 대표 이상미[맨왼쪽]

그는 앞마당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는 나름으로 연주하고 지휘하며 흥얼거렸다. 본인이 듣고 기억하는 피아노의 음을 이미지화했다. 이미 퍼포먼스가 가미된 예술적 경험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이 지휘자이기도 하고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생각의 뿌리를 형성하였다. 하고 싶은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그만의 스타일을 갖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7회 백남준 포럼(대표 이상미) - 박지연 교수 강의 일부 <진정한 쾌락과 환희의 의미를 인식하다. 백남준은 어느 정도 에피쿠로스학파였다>

백남준이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은 그리스 시대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의 정원과도 그 맥락이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과 철학자들은 그 어떤 욕망도 갖지 않는 것이 진정한 쾌락이라고 보았다. 물론 실제로 그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쉽지는 않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은 '하나의 빵과 한 잔의 물'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얘기하는소확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개인의 소중함과 보편적 행복의 추구로 볼 수 있다. 그는 어떤 특수한 계층과 정해진 규범의 음악 세계가 아닌, 개개인의 가치를 나타내는 음악 세계를 이야기하였다. 미에 대한 기준도 제각기 다른 아방가르드적' 생각과 표현을 추구하였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는 전통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클래식 공연과 달리, 인체를 포함한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행위, 새로운 소리를 총집합하여 관객을 일깨운다. 또한 CD, 비디오테이프, 텔레비전 모니터에 영상과 움직임의 전자기술을 이식함으로써 예술과 과학, 기술을 접목한 비디오아트를 선구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는 지구 생태계를 생각하고 경험과 시간을 소환하여 조형화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어 상업예술을 재탄생시킨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텔레비전이 캔버스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다. 인공위성과 레이저아트는 여러 나라의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또한 이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로 기능하여 불멸의 예술을 탄생시켰다. 지금이야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던 와이파이 세상, 디지털 네트워크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백남준은 한국과 일본, 독일과 미국을 넘나드는 동서양의 문화 인식과 경험을 토대로 새로움을 엮어내었다. 더불어 음악과 공학 기술을 접목함으로써 거대 21세기 인류 예술의 융합을 보여줬다

위 작품은 박교수가 백남준 공부하면서 받은 영감으로 만든 미디아 작품

제7회 백남준 포럼(대표 이상미) - 박지연 교수 강의 일부 [샤머니즘, 굿판의 기억과 꿈의 흐름] //

백남준이 추구하는 소통과 참여의 예술에는 샤머니즘의 소리와 이미지 그리고 굿판의 상황 등이 구체적으로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타국에서도 한국적 뿌리를 잊지 않은 디아스포라 예술인 백남준은 그의 작품에 고국에 대한 정서를 깊이 담았다. 가령 그는 담뱃대, 요강, 장독, 갓, 고인돌, 거북이 등 다양한 한국 전통 관련 오브제'(objet)를 그의 작품에 활용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한국인을 넘어 '시베리언 몽골리언'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

디아스포라는 '~너머'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이다. 이산 또는 파종(種)을 의미한다. 원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유의 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의 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백남준은 시대 정치적 상황으로 본국을 떠나 새 세상에서 혼돈적 사상과 현상을 접하며 진정 새로운 예술로 시대에 맞서고 세계적 공존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노인은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안회당) <노자안지(老者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 - 논어>

홍주 안회당은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의 중심지였던 홍주의 관청으로 지방관(목사-조선 시대에 지방 행정 단위인 목을 다스리던 정삼품 외직 문관)이 근무했다. 22칸의 목조 기와 건물로, 처음 세워진 것은 숙종 4년(1678)에 때이며 한응필 목사가 고종 7년(1870)에 다시 더 크게 개축했단다.

[논어] '노자안지, 봉우신지, 소자회지'에서 인용해 '안회당'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며 '노인은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시대에 여전히 필요한 미덕이다. 약자 보호의 정신이 담겨 있다

 

위치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문화재] 조양문(朝陽門) 홍주성의 동문

조양문(朝陽門)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위치한 홍주읍성의 4대 문 중 하나이다. 사적 제231호로 제정되어 있다.

홍주성의 동문으로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방화문의 문액은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나 망실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서문과 북문은 없어지고 조양문마저 파괴하려고 하였으나 읍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화를 면하였다. 1906년에 을사늑약에 반대한 홍주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홍성 신지역에 생긴 충남도서관

[천재시인] 한용운의 고향 홍성 / 천재적 시인이 태어나려면 그의 지적 토양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리학적 기운과 자연의 풍토 음식의 수준, 공간적 역동성, 물과 산과 공기 지세 등이 작용하지 않을까 이곳은 시인과 특히 김좌진 장군 등 일본 식민지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 인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일제 식민시대 이 좋은 도시를 아주 후진 지역으로 축소시키고 지워버리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도시가 지금까지도 홍보가 잘 되지 않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