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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포럼(Forum)

[제2회 백남준포럼II] '백남준기념관' 왜 지켜야죠? 일본은?

[리뷰] 2회 백남준 포럼 2번째 강좌 : 장소: 종로 2가 인사동 코트 본관 시간: 2023년 12월 09일(토) 3~6시까지 강사 김보람 서경대 교수(도시를 살리는 문화 예술: 일본 사례 중심으로),

<서론> 백남준 다큐 영화 1) 홍익인간 두루 넓게 주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 독일에 가서 유럽에서 1등 미술국가 미국에 가서 세계에서 1등 미술국가로 만들다10년 전 제가 백남준 연재 기사 25편 쓸 때 쯤에는 백남준 자료가 많이 제한되었고 지금처럼 유튜브 자료가 없었어요 지금은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다큐 영화가 나올 것인가 항상 의심(?)

<뉴욕 MoMA 미디어아트 전문큐레이터 '바바라 런던'의 백남준에 대한 증언> // 그녀는 백남준을 '탁월한 외교관'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녀가 백남준 덕분에 록펠러 재단기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그만큼 외교관처럼 수완이 좋았다는 점이다. 백남준은 '홍익인간'의 전형이었다. 단군 건국신화의 주인공이죠. <두루 넓게 주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돼라> - '바바라 런던'이' 지난번 과천국립미술관 백남준 국제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진행자와 이루어진 영상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 <백남준은 왜 동대문에서 태어났나? 백남준 기념관 왜 보호돼야 하나?> 이곳은 예로부터 그리고 서울의 동부에서 가장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상인구역이자 한말 1899년 개통된 전차가 있었을 때는 여기가 출발점일 정도로 교통 요충지였다. 이제 이곳을 문화지역으로 급을 높여야 한다. 동대문구를 제2의 종로구로 바꿔야 한다, 가까이 DDP가 있어 정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백남준 기념관을 기점으로 동대문 구역에 이런저런 문화 공간을 확장하는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곳의 문화지대를 거점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곳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도록 문화 복지를 더 보편화해야 한다>

[백남준 기념관은 왜 지켜져야 하는가?] [1] 백남준은 '' 동대문에서 태어났나? [1] 백남준 왜 기념관 보호돼야 하나?>

이곳은 예로부터 그리고 서울의 동부에서 가장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상인구역이자 한말 1899년 개통된 전차가 있었을 때는 여기가 출발점일 정도로 교통 요충지였다. 이제 이곳을 문화지역으로 급을 높여야 한다. 동대문구를 제2의 종로구로 바꿔야 한다, 가까이 DDP가 있어 정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백남준 기념관을 기점으로 동대문 구역에 이런저런 문화 공간을 확장하는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곳의 문화지대를 거점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곳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도록 문화 복지를 더 보편화해야 한다> 그는 거상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집이 33천 평이고 캐딜락 자동차(고종이 1, 백남준 집안에 1)가 있었다. 과거 상인들 남대문과 동대문에 많았다. 특히 동대문은 한말부터 포목이나 비단 같은 옷감 원단 시장이 활성화된 곳이다. 지금은 이곳이 패션 지구(국내 패션시장 규모 40% 차지/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가 될 정도)가 되었다.

[2] <백남준은 왜 동대문에서 태어났나?>

백남준 조부 백윤수는 한국 최초 사업가 중 한 사람이었고, 백남준 부친 백낙승은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태창방직을 설립했다. 이 가문은 이런 옷감 원단 비단 사업을 했고 섬유업으로 확장시켰다. 백윤수씨는 조선말 왕가의 장례용 옷감을 독점적으로 공급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안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그러니 백남준이 동대문에 태어난 것은 당연하다.

<1> 백낙승씨는 그런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니혼대 상경대와 메이지 법대를 나온 엘리트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지금 삼성가보다 더 큰 재벌이 될 수 있었다. 1930년대 방적기만 무료 1300(아래 사진) 있었으니 그 사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2> 백남준은 금수저 집안에 32년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모든 것이 풍족했다. 1) 1909년 설립된 '고단샤(講談社) 일본 그림책은 물론이고 2) 세계문학전집(일본어) 3) 여러 일본어 잡지 읽을 수 있었고 4) 피아노도 있었다. 큰 누이 배희득에게 어깨 너머 피아노 배우고 후에 신재덕 선생(이화여대 음대 학장)에게 경기 중학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피아노도 배웠다 그 시절 백남준은 5편의 작곡을 남겼다. 그중에는 조벽암 시에 곡을 붙인 것도 있다. 그 밖에도 5) 축음기 등 일본 상류층 사용할 수 있는 가정 제품이 많았다. 6) 집에 냉장고에는당시에는 비싸고 드문 파인애플 통조림도 있었다. 그만큼 문화 사회적, 경제적 혜택을 누린 셈이다.

<3> 그는 그때 작곡가 이건우 선생으로부터 작곡을 사사하면서 그를 통해 쇤베르크 알게 되었고 그의 음반이나 악보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뒤쥐기도 했다. 이렇게 백남준 일본어로 된 서적을 독파했다. 그때 그가 가장 열심히 한 공부가 프랑스어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가 뒤늦게 부산에서 가족과 합류해 일본으로 갈 때 제일 먼저 챙긴 게 바로 프랑스어 사전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 입학을 했는데 상경대나 법대를 갈 점수임에도 예술대 입학해 부친의 큰 분노를 샀고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나쁜 부자간 회복 불가능하게 되었다.

3] 백남준 기념관 '어떻게' 활용하면 될까"제발 날 써먹어라" - 백남준 그를 골려 먹기- 그를 가지고 놀기 - 그를 비빔밥 만들어 맛보기 (1) '놀이방: 백남준 사랑하는 사람들의 <우정>을 키우는 방(2) '공부방', 백남준 인물,예술, 사상에 리서치하기 이를 창조적 해석을 <지성>의 잔치 < 백남준 학교(가칭)> 시민대학 (3) '사랑방', 백남준의 대한 금기 없는 이야기 판을 열기 금기 없이 <유머>와 맘판 잡담 가능한 야자타임 (4) '동네방' : 근처 이웃에 두루 넓게 이익을 주는 장소 <공유하기> (5) '자료방' : 백남준 자료 수입하고 도모하면서 이를 정리하고 기록하고 책과 자료집 출판 (6) '영상방': 자료방을 업적으로 영상물로 만들어 대중과 함게 정보를 공유하고 호흡하기 (7) '전시방': 그의 사진, 그의 오브제 중심으로 가볍게 유연하고 유쾌하고 선보이기 (8) '전자방': 음악으로 하는 물리학 실험하는 실험 미술 전자 미술 역할을 해야 한다(9) '셔먼방' 샤마니즘에 대한 인류학적인 접근

[4] 백남준은 누구인가? 세계미술 속에 어떤 인물이었나[5] 백남준 시간은 언제였나? 20세기 살다 30세기를 보다 그리고 선사시대를 상상하다. 그는 시간에 대한 철학 [6] 백남준 장소는 어디였나? 한국 일본 유럽 미국 그리고 여러 나라 공간에 대한 개념

===== 2부 =====

액티비스트 동경대학(The University of Tokyo)과 외국인 최초로 일본의 정치사관학교 '마쓰시타정경숙' 대학도 졸업하다. 우리에게 파나소닉 창업자로 알려진 마츠시타 코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 1979년에 세운 정치경영사관학교다. 한국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것과 달리 일본인들은 그를 철학가이자 혁명가로 여긴다. 그가 쓴 책 <길을 열다>는 일본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 //

백남준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이다. 일본에서는 별로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도 지역에서 그를 추앙하는 문화행사가 왕성하게 일어난다고 백남준 같은 세계 최고의 작가에 대한 추모행사가 한국에서는 별로 없는 것 같아 정말 이해가 안 된다 //

일본 같았으면 서린동(백남준 태어난 곳)과 창신동(백남준 자란 곳) 지역 사람들이 서로 백남준 태어난 곳이라고 맹렬하게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아톰기념관>이 당연히 있지만 <아톰>이라는 만화는 물론 이 작가와 관련해서 그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활동을 했는지 관심이 매우 높다고. 관련된 동네마다 자기 출신 작가라고 전쟁이 난다고 - 김보람 교수

일본 같았으면 서린동(백남준 태어난 곳)과 창신동(백남준 자란 곳) 지역 사람들이 서로 백남준 태어난 곳이라고 맹렬하게 싸움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아톰>이라는 만화와 관련해 이 작가가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활동을 했는지 관심이 매우 높다고. 관련된 동네마다 자기 출신 작가라고 전쟁이 난다고. 백남준 기념관 아파트 1000대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인데 잘 보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지켜야 하는 논의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 김보람 교수

"백남준 기념관 아파트 1000채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인데 잘 보전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지켜야 하는 논의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집 문턱을 수시로 마르고 닳도록 밟고 다니면 그게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된다. 시간이 좀 걸린다> 김구림 말대로 그런 현상이 흔적으로 남으면 유적지가 된다. 규모가 문제가 아니다. 그곳에 사람의 마음을 두고 오는 게 중요하다. 서울에서 백남준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소통과 경청의 귀재인 백남준은 시민들이 여기에 오면 반가워할 것이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또 우리의 말을 잘 들어준다. 그는 홍익인간으로 죽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득과 생각을 주려고 한다.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 <백남준 기념관>이 자리한 이곳은 백남준이 1937년부터 1950년까지 성장기를 보낸 생가터이다. 서울시는 2015년 창신·숭인 도시재생 선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백남준이 성장기를 보낸 창신동 197번지 일대 집터에 위치한 한옥을 매입, 기념관으로 조성하였다. 생가터는 3천 평이었다는데, 지금은 작은 집터만이 그의 삶과 작품을 기억하는 공간이 되었다. - 서울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게 소원이다. 창신동에 뼈에 사무치는 듯한 유언.

큰 대문집이라 불리던 창신동 3,000평 대저택에서 살던 그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 창신동에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창신동을 창작 활동의 근원이자 마음의 안식처로 여겼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백남준 기념관은 창신동 일대를 아우르는 시간과 공간의 기억을 존중하되, 의도적으로 옛것을 연출하는 장식이나 개조는 최대한 배재하는 형식으로 조성됐다고

서울시립미술관 입장 백남준 기념관(서울에서 유일한 백남준 공간)의 운영 방침 강화(?) //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것보다 100배는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사실 공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고 지속적인 교육 프로그램(백남준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프로그림 개발 : 5개년 계획 (I) 5개년 계획(II )과 지역과 긴밀한 네트워킹, 자발적 참여를 유도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즐거운 장소가 되어야 한다. 접근성이 더 쉬어야 한다. 물론 니체나 사르트르나 백남준 다 어려운 작가지만 소그룹이라도 <백남준을 비빔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노는 시민들의 유희판>도 만들어야 한다. 시민들 자원봉사(참여)도(참여) 유도해야 한다. 백남준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것을 유치하다고 보면 그게 더 유치하다.

[아래 서울 시립 미술관 2023 10 26일 보도자료] 서울시립미술관, 현대미술 선각자 '백남준 기념관' 활성화 나선다 [1] 종로구 창신동 백남준 기념관 강연 프로그램 개설, 성과기록화 등 활성화할 것이다 / [2] 전시 및 프로그램 진행에 맞게 시설콘텐츠 개선 작가작품도 심화연구할 것이다 [3] 백남준 예술세계 조명 시민에게 사랑받는 공간으로 지속 운영해 나갈 것이다

 종로구 창신동에 위치한 <백남준 기념관>이 청소년성인 대상 강연 프로그램 개설, 기념관 운영성과 기록화 등 작가의 예술세계와 정신을 이어 나가고 시민과 공유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서울시립미술관(관장 최은주)은 한국현대미술의 선각자이자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을 기리기 위해 <백남준 기념관> 운영 활성화에 나선다고 밝혔다.

 창신동(종로구 종로 53길53길 12-1)에 위치한 <백남준 기념관> 2017 3, 백남준이 13년간 성장기를 보낸 창신동 옛 집터의 한옥을 개조하여 작가의 삶과 예술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됐다.

 미술관은 그동안 개관 기획전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를 시작으로 석가산의 액션 뮤직(2019), 비디오 콜라주-파운드 푸티지-쉐어드 무빙이미지(2020)등 다수 기획전과 백남준 탄생 9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2022)’ 개최 등 기념관이 작품 전시연구교육에 활용되어 왔으나 공간 협소, 항온항습 등 전시에 불리한 환경 등 개선이 필요해 활성화에 나서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앞으로 <백남준 기념관>을 작가정신이 담긴 창의적인 공간이자 세계적인 예술가, 한국 미술사에도 큰 영향을 준 백남준을 기억하는 곳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또한 시민과 예술전문가 모두가 참여하는 프로그램 발굴에도 나선다. 작가의 예술정신을 계승한 신진미술인의 창작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는 한편 독창적인 예술세계와 실험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어린이청소년 교육, 전문가 초청 강연 등을 마련할 방침이다.

 그간의 <백남준 기념관> 운영 성과와 과정을 기록화하여 작가에 대한 연구 기반을 마련, 기록물은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품과 통합 관리함으로써 백남준과 그의 작품 연구도 심화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운영 성과는 공간(백남준 기념관 내외부 영상 촬영 기록화), 시간(백남준 기념관 조성부터의 자료를 아카이빙) 사람(조성부터 운영까지의 관련 인물의 구술 채록 기록)으로 기록화하여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로 이관할 예정이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백남준 기념관>을 한국 현대미술의 선각자이자 세계적인 예술가인 백남준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기억하는 공간으로 지속 발전시켜 시민 모두가 사랑하는 공간으로 운영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KSSxWaPuu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