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3년 11월 10일 오후 2시 장소: 인사동 코트 조선살롱 인사동 1길 7. 해봉빌딩 인사동 130-2
늦가을 차 한잔 하면서 백남준 수다 풀기 그는 과연 왜 세계적 작가인가?
한 세기를 규정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
백남준처럼 6개 국어를 하면 같은 시간이라도 시간의 질이 다르다. 보통 사람이 100년 살 때 600년을 사는 것이다.
백남준도 젊어서는 꽃미남이었다 시게코 여사는 천재 시인 랭보를 떠올렸고 그를 일본에서 처음 만나 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겠다 결심하다 그녀는 백남준이 40년 전 욘사마 열풍 1호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할 정도였다. 일본 여성 유명 남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26살에 처음 봤고 14년을 따라다녔고(?) 40살에 결혼했다 그런데 그 결혼 이유가 좀 슬프다. 사실 백남준과 시게코는 예술 동지로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서 코뮌 생활을 하는 입장 그러다가 시게코가 어느 날 백남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백남준은 아이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시게코가 병원에 상담을 하는 중 암이 있다는 것과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데 미국에는 의료 보험이 없이 치료비가 억대로 든다. 걱정이 태산 같았고 일본으로 가야 하나 고민 중 백남준은 마침 백남준 후원단체가 의료보험에 가입해 두었기에 그럼 결혼하자 그렇게 되면 치료비는 걱정할 것 없다면서 결혼이 성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시게코 백남준과 결혼하기 전 아주 부자 하바드대(?) 나온 독일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도무지 살 수 없어 나왔고 그런데 백남준 시게코를 아무 말없이 다시 받아주다
공부를 잘 하는 게 천재가 아니라 백남준처럼 2400명의 세계적 석학과 초연결하는(초소통하는) 능력을 가지는 게 천재인 것이다
1963년 백남준 첫 전시 "TV로 음악을 연주하는 전시"다. 이 아이디어는 선불교에서 왔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 Sound & Sight 통합이다. 총체예술(Integral art) 비빔밥이다. 그의 예술에는 그렇게 경계가 없다. TV+음악+미술을 통신기술로 합치다 보니 INTERNET가 나오다
2002년 백남준 60 생일 때 경주에서 열린 국제 미술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거기에 참석한 전 세계 유명미술인사들 백남준은 휴먼네트워킹의 천재라는 말이 증명 되다 와타리, 핸하르트, 장 폴 파르지에, 부스만(뮌스터조각 프로젝트 창시자)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허락해준 베니스 시장 등등 유명인사 많이 보인다
한국은 1) 직지(금속활자 발명)로 1000년을 2) 백남준 인터넷 아이디어(1974년)로 1000년을 2천년 연 나라다 / 세종대왕(한글 창제와 직지와 연관성 깊어 보인다)과 백남준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자부심 가져도 된다
전 인류를 구원하는 대안은 뭔가? 그것은 바로 <홍익인간(An act of benefiting all mankind broadly)>이다. 맑스의 사상도 이에 비교가 안 된다. 우리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두루 넓게 이득이 되는 사람이 되라 이런 고차원적 휴머니즘은 전 세계 역사에 없다. 대부분 세계사에서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위기에 처했을 때 영웅이 나타나지만 한국은 시작할 때부터 위대한 성인이 나타나 인류 구원의 길을 선명하게 확실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는 그런 면에서 진정한 visionary(voyant 비전을 제시한 예언자) 백남준, 단군을 존경했고 역사적 인물로 봤다. 그는 1993년 '스키타이 단군'(중앙아시아를 통치한 전자인간형으로 묘사)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다.
1984년 1월 1일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방영되었을 때 프랑스 유명 일간지 르 몽드는 그의 해피닝 비디오 아트, 위성아트를 보고 프랑스 제3TV 방송 직원과 PD들이 방송국 복도에서 화들짝 놀라워했다고 breathtaking(아찔했다)고 보도하다. 제목은 "1984년 전자아트가 드디어 폭발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계에서 최초로 뉴욕과 파리의 방송채널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 쾰른과 한국의 서울도 연결되었죠 당시 백남준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총 지휘를 하고 있었다. 김홍희 관장 부부가 그 현장을 다 목격하다.
1976년 백남준 40대 중반 1978년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교수가 되다
1989년 백남준 TV Tower
구겐하임 전 관장이 기획한 백남준 다큐 영화 무려 4년 반이 걸려 완성되다.
전자 유목민 상징하는 TV 조각
1993년 백남준 전성기 작품 베니스비엔날레 때 전시 일종의 전자벽화 / 서양인은 키가 크지만 백남준은 마음이 크다. 천문학 자손의 후손 답게 그 스케일이 크다.
서양예술의 룰 파괴자들이 플럭서스에도 있었지만 / 백남준은 그것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다 그것의 매체는 바로 피아노였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TV를 등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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