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모든 고민을 혼자 다 뒤집어 쓴 사람처럼 표정이 심각하다. 하긴 20세기는 이념과 철학의 시대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사르트르 사진. ⓒ Henri-Cartier Bresson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농(Non, 부정)의 철학'이다. 老子도 '반대가 진리다'라고 했는데 둘은 서로 통한다. 단 평화의 시대에는 이런 철학이 적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언제나 문제인물로 언론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단골메뉴였다. 한번은 불법 외국노동자의 숙소에 가스안전사고로 몇 명이 죽었는데 그 자리에 사르트르는 또 나타났다. 언론의 카메라는 그에게 후레쉬 세례를 퍼붓는다. 그는 그렇게 매순간 하나의 사건(행위예술)을 창조하였고 한 시대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치열하게 살아갔다. 김지하시인이 70년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이에 탄원서를 낸 것도 그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매순간의 우주의 이름으로 선택하고 우주의 이름으로 책임진다" 그런 면에서 그는 신이 없는 우리시대에 우주의 이름으로 신을 대신한 세속적 성직자였다.
BBC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사르트르 편) 추모 특집방송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파리시민들이 거리를 메웠다.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언제나 약자에 편에 서서 지식인의 책무를 다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국에 대한 보편적인 애국심을 저버리고 알제리독립을 지지하고 독립자금까지 보내주었을 때 드골대통령은 "그도 프랑스인이다"라도 말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사르트르는 노벨상만 거부한 것이 아니라 레종 도뇌르 등 프랑스정부에서 주는 일체의 상도 거부했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그는 인간은 매순간 자유를 창조해야 하는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말하며 절대적 자유를 추구했다.
중앙에 피카소 시몬 드 보부아르 뒤로 라캉, 달리, 디에고 리베라 아래 사르트르, 카뮈, 사진작가 브라사이
20세기는 프랑스의 전성기가 모든 예술가들이 다 파리에 모였다. 문인들만 해도 일일히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헤밍웨이, 사무엘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헨리 밀러 등등 당시 파리는 소용돌이 치는 왕성한 창조적 기와 에너지가 넘쳤기에 그러나 이제 그런 전성기는 다시 올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의 사르트르가 나올 때가 되었다.
20세기
세계적 문제아
노벨상을 거부할 정도로
엉뚱하고 배짱 두둑한 놈
자유에 미쳐
머리가 돈 광인
세계 문제를
마치 자기 문제인 양
온통 뒤집어쓰고 고민한 사나이
문학은 오직
실천을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행동파
자유가 주는 고뇌와 괴롬
온몸으로 밀어내며
프로메테우스처럼 살았던 철학자
지독하게 못나고
사팔뜨기에다 꼴 사나운 안경잡이
갖은 정치 참여로
좌충우돌
시행착오가 많았던 논객
그래도
늘 최선의 선택 속에
우주를 보며
인류와 대화했던 삶의 열애자
지식인 허위 깨고
늘 약자 위한
외길 지킨 민중의 지지자
살아 있음의 기쁨
글 쓰는 일로 확인하며
자기의 반역사상
끊임없이 떠벌린 수다쟁이
1991. 08. 23
**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시인데 유튜브가 있어서 리바이벌한다.
다시 보니까 지독한 파이프쟁이네요.
1947년 사르트르와 그의 동반자 시몬 드 보부아르. 이 사진의 저작권은 확인하지 못함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 중에도 그와 상관없이 미국 작가 넬슨 알그렌과 17년 동안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오마이뉴스 한경미 파리기자의 기사에서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제목 : 출처 : 세기의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연애했다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18542&PAGE_CD=
"23살이던 1931년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했다. 상대방에게 충실하되 각자 생활의 자유, 연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게 계약결혼의 핵심이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한 호텔의 다른 방에 묵으면서 계약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독립적인 생활을 누리기 위해 독립적인 공간은 필수 조건이었고, 생활공간으로 호텔을 선택한 것은 가사 일을 피하기 위한 보부아르의 선택이었다"
"사르트르도 수많은 '우발적인 사랑'을 거쳐 결국은 '필연적인 사랑'인 보부아르에게로 돌아 왔다. 우발적인 사랑 때문에 결혼까지 할 '위기'에 한두 번 놓이기도 했지만 사르트르가 마지막으로 택한 것은 보부아르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프랑스에서 전설적인 커플로 기억되는 이들은 지적 동반자로서, 서로 작품에 충고와 보완역할을 해주는 조언자로서, <현대지>을 기치 삼아 같은 정치투쟁을 벌인 동지로서 한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녀가 31세 때 8살 연하의 23살 앳된 청년이었던 자크-로앙 보스트다와 4년간(1937~1940) 사랑에 빠졌고 그 때 주고받은 편지가 '오고간 편지(Correspondance croisee)'라는 제목으로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왔다
둘 사이의 계약 결혼 원칙은 영혼의 정절, 육체의 자유, 관계의 투명성이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가 보스트와 사랑에 빠졌을 때, 사르트르 역시 다른 여자가 있었다.
사르트르의 서재와 그의 동상 그리고 게바라와 면담
At Sartre's funeral in April 1980, more than 30,000 people took their grief to the streets of Paris. AFP
1980년 4월 사르트르의 장례식에 파리시내는 추모인파로 넘쳤다. 파리시민들의 그에 대한 경외와 존경심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오마주가 드디어 폭발했다. 그는 20세기의 볼테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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