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독일(스위스)유학 때 찍은 사진들] 나는 부자가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
- 50년을 100년처럼 살다간 사나이
1941년 12월27일 연전졸업 앨범사진. 태평양전이 시작된 시기라 학제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졸업식이 치뤄짐
아버지의 이름은 김갑권(金甲權 1918.2.15-1970.5.6)이다. 인터넷 검색어를 치면 내가 쓴 글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가 그가 돌아가신 40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올린다.
아버님은 문익환시인과 동갑이고 윤동주시인과는 연전 동기동창이다. 당시 연전(연세대학교전신)졸업생은 상과 50명, 문과 21명, 이과 18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님이 그 가운데 끼여 있으니 당시로는 특혜를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다. 아버님은 요즘 IT공학에 해당하는 화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다.
소설가 송우혜가 쓴 <윤동주평전>에 의하면 연전졸업식이 극도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라 학제가 단축되어 3개월 앞당겨 1941년 12월27일에 치러졌다고 하네요. 태평양전쟁의 발발 직전의 사회분위기를 엿볼 수 있네요. 아버지의 학적부와 성적표를 한번 떼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
동주야 - 문익환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 마저 늙어간다면 이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모자 쓰는 축제일의 참가한 여러 국가사람들 같죠.
독일의 축제일 같은데 모두 특이하고 괴상한 모자들을 쓰고 있죠. 독일은 1-2차대전으로 전혀 놀지 못했기에 이 시기에 전위예술가들이 난장을 벌리는데 아버님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즐긴 것 같다.
스위스 제네바 레만 호수
세상이 이렇게 멋진 중년남가가 있나 싶다. 아버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의 백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가 풍기는 멋과 품위는 지금도 나의 삶에 힘과 본이 된다
[레만호수(Lac Léman)] 깊이 310, 넓이 58,000ha에 달하는 호수로 알프스가 융기하면서 계곡이 내려앉아 산맥 안쪽 끝으로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레만호수는 제네바호수라고도 불린다. 레만호수(제네바호수)는 호수를 사이에 두고 스위스와 프랑스의 영토가 나뉜다. 기후가 매우 온화하며, 특히 초봄과 늦가을에는 지내기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아름다운 제네바호수와 스위스의 고원, 알프스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제네바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50년만에 부친이 사진 찍은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다
부친이 사진 찍은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다
부친이 사진 찍은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다
부친이 사진 찍은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다
부친이 사진 찍은 근처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다
'1957년 독일 벨가르트가족(Familie Bellgardt)'과 함께 찍은 사진
아버님이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있는 미헬슈타트 Michelstadt(http://en.wikipedia.org/wiki/Michelstadt)라는 소도시에서 홈스테이할 때 찍은 자신으로 독일가족들이 동양에서 드물게 온 아버님에게 매우 잘 해 준 것 같다. 독일안방 주인의 표정이 참 밝다. 아버지가 인기가 좀 있었나보다. 이 가족은 부친이 귀국할 때 선물로 추억앨범을 받았는데 그걸 자세히 보니 '1957년 6월13일 벨가르트가족(Familie Bellgardt)이'라는 친필사인이 들어 있다.
아버님은 독일을 대표하는 글로벌 화학회사인 프랑크푸르트 근처 바스프(BASF) 공장에서 기술유학하셨는데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그 도시이름은 '루드빅샤펜(Ludwig Shafen)'인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 근교 미헬슈타트의 어느 공원에서
이 멋진 아버님의 미소가 어려서부터 나에게 삶의 여유를 가져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미소는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애정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출 때 생긴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위 공원이 주택단지가 되다
위 공원이 주택단지가 되다
아버님이 벨가르트(Bellgardt)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나는 우연히 송몽규의 조카이기도 한 소설가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을 읽다가 '소화 16년'이 1941년이라는 것과, 원래 졸업식이 1942년 3월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1941년 12월8일 새벽을 기해 미국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앞당겨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친이 졸업 당시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식민시대의 어둠은 극에 달했을 것이고 시국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였을 것이다. 일제는 삼엄한 감시 속에 극악무도한 탄압과 찬탈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졸업장에는 이미 창씨개명이 되어 있었다"
<부친이 홈스테이했던 그 도시에 와 50년만에 다시 도시를 찍어보다>
미혤슈타트 거리
미혤슈타트 거리
미혤슈타트 거리
미혤슈타트 거리
미혤슈타트 거리
미혤슈타트 거리
미혤슈타트 거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3970 [부친관련오마이뉴스]
1960.12.24 마산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찍은 가족사진
오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몹시 사무친다. 문익환 시인도 그립다. 1989년 김남주시인 석방촉구 문학의 밤에 갔을 때 문익환시인이 내 옆에 있었는데 꼭 나의 아버지 같았다. 그분은 겉으로 부드럽게 보이지만 속이 그렇게 강한 분인지 미처 몰랐다. 그의 첫 수필집 <새 것 아름다운 것(1975)>을 읽고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른다. 윤동주 첫 시집 '촛불'에 대한 늦봄의 해석은 그가 천상 시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님의 40대 전반기 명함
동생과 함께
어머니는 커플패션을 즐겼다. 그래서 우리 둘은 똑같은 모양의 옷을 많이 입었다.
1960년대 마산에서 우리는 3백평 자리 집에서 살았다. 아랫집 여기는 평수가 300평 정도
아버지는 날 보고 "저 놈이 홈런을 칠 것이다"고 라고 했다는데 우리 어머니는 홈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나중에 나에게 들려준 일이 있다.
오른쪽 어머니 옆에 미인이 보이죠. 바로 외숙모(어머니 남동생의 부인)죠. 윗집 여기는 450평 정도
그리고 또 5백평짜리 집이 있었다. 이때 나는 부자의 쓴맛을 봤다. 그래서 부자가 되지 않기로 했다. 약간 과장이긴 하지만 큰집에 살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하루종일 청소하다 끝난다. 하하하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전시회(일명 추방전) 장면
아버지(1956-1957)는 백남준(1956년 독일에 도착)과 같은 시기에 독일에 있었다. 백남준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7년간 실력을 갈고닦아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그는 여기서 큰 사고를 치는데 그의 의도는 서양미술 싹쓸이 전, 점잖은 말로 추방(EXPEL)전이다. 그는 특히 서양현대미술의 문을 연 마네의 '풀밭위에서 점심식사'를 발표한지 100년 전을 맞아 그가 만든 서구회화현대성(modernity)의 견고한 성을 여지없이 허물어 버렸다. 그리고 서구인의 뮤즈를 욕조에 처박아 산산조각 낸다. 그리고 서구부르주아의 상징은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서양인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전시장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걸어놓았다. 그래서 후에 백남준은 동양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어느 저녁파티
모두가 젊잖게 정장을 하고 나누는 멋진 만찬이죠. 마치 추억이 서린 명화 중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보이네요.
태극기가 보이는 어느 모임
태극기가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을 기억하거나 기념하는 날 같죠. 주변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스위스 제네바시내에 공원 같은데요. 확실하게 잘 모르겠네요. 시계의 나라답게 공원 한가운데 시계가 있죠.
1957년 당시에도 컬러사진이 있었는데 질이 좀 떨어지네요 이곳은 유엔본부라 지금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
2017년 위 사진이 있는 스위스를 가 보다 여기가 어디인지 드디어 확인하다 여기는 제네바 유엔본부다
위 사진이 있는 스위스를 가 보다
위 사진이 있는 스위스를 가 보다 제네바 주재 미국대사관
꽃시계를 보면 여기가 스위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옆에 있는 분들은 일본사람들이라고 들은 것 같다
직접 여기를 가서 확인하다 제네바에 있는 영국공원(Jardin Anglais) 이고셍 갔으니 장소를 나중에 알았다
이런 유럽의 이미지는 나의 유년시절 머리 속에 깊이 박혔다. 시계탑다리를 보니 역시 스위스인가요.
사진이 누렇게 바랜 걸 보니 정말 세월이 많이 흘러갔죠
역시 스위스 레만호수나 그 근처인 것 같고요
위와 같은 장소로 클로스업해서 찍은 것이죠
저는 1989년 처음 독일을 가 보았는데 역시 독일은 독일입니다. 그 특이한 분위기는 한결 같아요.
여기는 독일쯤 되는 것 같은데 옆 사람들은 역시 일본인들인 것 같네요. 같은 화공학 기술자 같아 보이네요.
1950년대 독일거리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건축양식과 풍경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네요
건축양식이 반듯하여 헛점이란 보이지 않죠. 마치 미니멀리즘 설치작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드네요
위 사진을 찍은 곳에서 다시 사진을 찍어보다 2017년 5월
전형적 독일풍경을 배경으로 한 사진
카메라와 선글라스 당시로는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문명의 기제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모습은 모더니티를 풍기네요 .뒤에 배경이 전형적인 독일풍경이 아닌가 싶네요. 사물과 풍경 그리고 멀리서 온 동양의 신사 그의 웃음과 잘 어울리네요.
사진에 독일어린이의 환한 웃음과 같이 어울려 사진의 힘을 실어주네요 멀리 다리가 보이는데 아치형으로 당시 유럽의 교량기술과 양식을 읽을 수 있죠.
독일의 숲 풍경
독일하면 '검은(울창한) 숲'이죠. 산림의 시원함이 여기까지도 전해지네요. 독일의 땅이 들어서면 우선 맛보는 것이 바로 그런 살림의 멋과 풍요로움 그런 아름다움이죠. 멀리 사람들이 길을 따라 올라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죠
동료와 찍은 사진
역시 일본분과 같이 포즈를 취한 것 같죠. 아버님생존에 사진에 대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네요
여기는 사진의 실루엣 효과를 그 위력을 발휘하고 앞에 망과 같은 것이 있어 사진의 신비한 느낌을 더해 주네요
유일하게 여자가 등장하는 사진이죠. 여자의 패션도 만만치 않고요 당시의 첨단패션이라고 할까요. 저의 아버님을 미인때문인지 얼굴을 돌리고 있네요. 전후독일이라 아직 황폐한 면도 보이고 멀리 호수가 보이는 것 같죠.
여기는 프랑크푸르트가 아닌가 싶은데요. 독일의 전통적인 올드시티(옛시가지)가 보이네요 자동차들은 폭스바겐인가요 타워형의 지프차형식이고요 참으로 50년대 북유럽의 향수를 일으키는 사진이죠.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 2017년 5월 위 사진과 50년의 차이가 있다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 2017년 5월
그리고 여기는 항구도시인 함부르크 같고요. 아니다.
아버지의 기관지염과 화학실험실은 상극인데 어쩔 수 없었겠죠. 자신의 전공을 사랑할 수밖에요.
화공학도였던 아버지는 염색이나 실험실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죠. 독일동료와 같이 찍은 사진
또한 여기는 베를린 만국박람회장에서 찍은 것 같은데 만국기는 보이지 않네요.
1957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이 사진은 매우 중요한 기록사진으로 '국가기록보전소'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 1957년 한국은 처음으로 해외 엑스포에 참가했다. 그곳이 바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엑스포(세계만국박람회)였다. 당시 독일에 체류하시던 아버님이 찍은 사진이다. 태극기가 멋지게 펄럭인다.
[참고] 역대 세계만국박람회 개최지 1851년 영국 런던 1855년 프랑스 파리 1862년 영국 런던 1867년 프랑스 파리 1873년 오스트리아 빈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1878년 프랑스 파리 1880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1888년 에스파냐 바르셀로나 1889년 프랑스 파리 1893년 미국 시카고 1897년 벨기에 브뤼셀 1900년 프랑스 파리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1905년 벨기에 리에주 1906년 이탈리아 밀라노 1910년 벨기에 브뤼셀 1913년 벨기에 겐트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1929년 에스파냐 바르셀로나 1933년 미국 시카고 1935년 벨기에 브뤼셀 1936년 스웨덴 스톡홀름 1937년 프랑스 파리 1938년 핀란드 헬싱키 1939년 벨기에 리에주 1939년 미국 뉴욕 시 1947년 프랑스 파리 1949년 스웨덴 스톡홀름 1949년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1949년 프랑스 리옹 1951년 프랑스 릴 195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1953년 이탈리아 로마 1954년 이탈리아 나폴리 1955년 이탈리아 토리노 1955년 스웨덴 헬싱보리 1956년 이스라엘 베이트 다곤 1957년 독일 베를린 [...]
[세계박람회(World's Fair)]는 19세기 중반부터 열린 대규모 박람회를 말한다. 국제박람회기구(BIE, 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에서 주관한다. 흔히 엑스포(Exposition)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 Universal Expositions)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여의도국제공항
여의도국제공항 같죠.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버님이 독일을 출발하기 전 혹은 귀국 후에 찍은 사진 같네요
1956(?)년 지금 국회 자리인 여의도비행장에서 독일로 떠나며 손을 흔드는 아버님 모습
아버님은 생전에 시대정신을 읽을 정도의 교양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화공기술자였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방직업에 기여도는 켰고 당시 최고연봉자로 그만한 대우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겐 기관지염이라는 지병이 있었고 그에게 숨겨진 지옥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가래 뱉는 소리 속에 살았고 그 소리 속에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숨넘어갈 듯 내뱉는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듣고 싶은 때가 있다. 그리고 정과 품이 넓은 그에게 안고보고 싶은 때가 있다. - 부친서거 30주년(2000.5.3) 추모의 글(1)
연전시절 말 타고 다니던 아버님 모습
그는 항상 노력하는 인간이었고 어려서 그가 딱딱한 독일어발음을 연습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고 그리고 어려서 시절에 주변에 남보다 조금 나은 입장에서 주변사람들의 취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언변은 별로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하는 주례를 들은 적이 있는데 신랑 신부의 이름을 바꿀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누구도 따라 갈 수 없는 인간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인품에서 오는 것이었다. - 부친서거 30주년(2000.5.3) 추모의 글(2)
누이와 나와 동생
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일했던 CIBA 회사에서 보내주는 달력을 보면서, 독일과 스위스 등 유럽을 꿈꾸었고 서양의 풍경과 서양미술의 명화를 많이 접했다(나의 미술취향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독일의 르네상스 작가 뒤러의 그림을 많이 봤다). 뭔가 답답함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를 상상하고 동경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고 나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을 선물했다. - 부친서거 30주년(2000.5.3) 추모의 글(3) 중에서
아버님과 어머님
멋을 잔뜩 낸 부모님들
마산시 평화동 4-2번지 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찍은 부모님사진
[아버지가 엽서에 남긴 유언 1968년 5월] '아빠는 지금 '시바' 미국지사를 방문하고 있다. 이곳은 벌써 날이 덥구나! 학교 다니느라 얼마나 피곤하냐! 용기를 내서 몸조심하고 열심히 공부해라! 너희들 졸업하면 미국에 보낼 생각이다. 큰 희망을 가지고 노력만 남은 숙제이다. 누나, 동생도 학교 잘 다니겠지? 그럼 안녕. 1968년 5월 아버지로부터! 샌들 브루크에서(Saddle Brook, New Jersey, Marriotte Hotel)"
BASF는 아버님이 독일에서 단기유학 혹은 연수를 받은 회사다. 지금도 이 회사는 굴지의 세계적 화학회사로 여러 나라에 지사가 있다. 이 회사에서 보내준 가죽수첩(50년대제작)인데 이럴게 세련되고 멋진 초록색은 당시에는 드물었다
[BASF] is a German chemical company and the largest chemical company in the world.[2] BASF originally stood for Badische Anilin- und Soda-Fabrik (Baden Aniline and Soda Factory). Today, the four letters are a registered trademark and the company is listed on the Frankfurt Stock Exchange, London Stock Exchange, and Zurich Stock Exchange. The company delisted its ADR from the New York Stock Exchange in September 2007.
The BASF Group comprises subsidiaries and joint ventures in more than 80 countries and operates six integrated production sites and close to 380 other production sites in Europe, Asia, Australia, Americas and Africa.[3] Its headquarters are located in Ludwigshafen am Rhein (Rhineland-Palatinate, Germany). BASF has customers in over 200 countries and supplies products to a wide variety of industries. Despite its size and global presence BASF receives little public attention as it abandoned consumer product lines in the 90s.
At the end of 2009, the company employed more than 104,000 people, with over 48,500 in Germany alone. In 2009, BASF posted sales of €50.69 billion and income from operations before special items of about €4.9 billion. The company is currently expanding its international activities with a particular focus on Asia. Between 1990 and 2005, the company invested €5.6 billion in Asia, for example in sites near Nanjing and Shanghai, China and Katipalla in India. - 위키페디아
CIBA 1957 Juli/Juiiiet/July 1 Montag Lundi Monday arrived Seoul from West Germany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독일에서 1957년 6월 13일에 떠나 1957년 7월 1일 서울에 도착했다고 수첩에 기록하고 있네요
CIBA는 스위스의 화학회사로 아버님은 이곳에서 연수를 하셨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스위스 시바회사에서 매년 수첩을 보내주었는데 이것은 그 중 1961년에 보내준 것이다. 수첩이 영어 불어 독어로 되어 있어 어려서부터 3개국어를 보고 자란 셈이다. 아차 자료를 보니까 스위스시바(CIBA)는 독일 바스프(BASF)의 자회사인 것 같네요.
[국민화가 박수근전] 2010.5.7-5.30 갤러리현대 사간동
박수근45주기기념전 포스터가 나부끼는 청와대 근처 사간동거리풍경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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