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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아트페어

작고한 '시게코'여사 추모행사 2015년 8월5일

['시게코'여사 추모행사 2015년 8월5일(수) 오후3시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일본의 3대 세계적 여성작가(오노요코, 시게코, 구사마) 중 한 작가 이제는 시게코여사 전위예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재평가할 때가 왔다 그녀는 예술에서도 사랑에서도 승리자다


고인이 된 시게코 여사


뉴욕 머서 스트리트(Mercer Street)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의 구보타 시게코(좌)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의 <백남준 탄생 80주년 :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구보타 시게코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지난 7월 23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뉴욕의 베스 이스라엘 병원(Beth Israel Medical Center)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고(故) 백남준(1932.7.20.~2006.1.29)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 1937.8.2.~2015.7.23.) 여사를 추모하는 행사를 8월 5일(수) 오후 3시에 연다. 


본 행사는 뉴욕의 브룸 스트리트(Broome Street)에 위치했던 백남준의 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에서 열릴 예정이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추모행사와 함께 8월 5일(수)부터 8월 9일(일)까지 메모라빌리아에 분향소도 설치, 운영한다. 추모행사는 구보타 시게코 여사 약력 소개, 관련 영상 상영, 백남준과 친분을 나눴던 지인 및 예술계 인사들의 추모사와 헌화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추모행사에 상영될 영상 두 편은 백남준의 예술적 동반자이기 이전에 ‘작가(artist)’로서의 구보다 시게코를 조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영상은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1986년 제정한 독립영화 관계자 및 비디오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미국 영화 연구소상(American Film Institute Award)을 수상한 구보타 시게코의 시상식 영상을 편집한 것이다. 마야 데렌상(Maya Deren Award)으로도 불리는 이 상을 구보다 시게코는 1995년에 수상하였으며, 백남준이 이 상의 첫 번째 수상자였다. 

두 번째로 소개할 영상은 구보타 시게코가 1999년 백남준을 피사체로 제작한 <전자 기억(Electromagnetic Memory)>이라는 비디오이다. 젊은 시절의 백남준과 퍼포먼스 풋티지, 그리고 노년의 백남준을 교차 편집한 본 영상 작품은 총 상영시간 27분으로 추모행사에서는 편집본이 상영될 예정이다. 

이 두 편의 영상은 백남준아트센터 비디오 아카이브 소장 자료로서 아트센터의 비디오 아카이브는 백남준의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및 비디오 조각 소스 작품, 다큐멘터리 및 기타 영상물들로 이루어진 비디오 아카이브 컬렉션으로 작가가 직접 작업했거나 관련된 2,285개의 아날로그 테이프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의 지인들은 두 사람이 거주하던 뉴욕에서 오는 10월 초 전 세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식 추모행사를 기획 중이다. 이 행사에는 백남준아트센터 서진석 관장이 참여할 예정이다. 

또한 백남준아트센터 이외에도 같은 날(8월 5일) 오후 5시 용인에 위치한 한국미술관(김윤순, 안연민 공동관장)에서도 고인을 추모하는 전시와 무용가 홍신자의 추모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문의. 031-201-8559) 

시게코는 남편의 태도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다. “남준 작품의 대단한 점 중 또 하나는 고급스러움과 저급함, 복잡함과 단순함 사이를 자유자재로 신나게 넘나들었다는 데 있다. 어떤 작품이 한없이 진지하다면 또 어떤 작품은 아이가 만든 작품처럼 단순하다. 작품을 만들며 이용한 테크놀로지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처럼 숭배하다가도 어느 순간 뻥 하고 차버렸다.”

[79세 프랑크 스텔라 회고전]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 2015년 10.30일부터 내년 2.7일까지 포철본사에 가면 그의 대규모작품을 볼 수 있다 

Frank Stella, Harran II, 1967. Polymer and fluorescent polymer paint on canvas. 120 × 240 in. (304.8 × 609.6 cm).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gift, Mr. Irving Blum, 1982. © 2015 Frank Stella/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The Museum will present a career retrospective of Frank Stella (b. 1936), one of the most important living American artists. This survey will be the most comprehensive presentation of Stella’s career to date, showcasing his prolific output from the mid-1950s to the present through approximately 120 works, including paintings, reliefs, maquettes, sculptures, and drawings. Co-organized by the Modern Art Museum of Fort Worth and the Whitney, this exhibition will feature Stella’s best-known works alongside rarely seen examples drawn from collections around the world. Accompanied by a scholarly publication, the exhibition will fill the Whitney's entire fifth floor, an 18,000-square-foot gallery that is the Museum’s largest space for temporary exhibitions.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 Feminism Art in East Asia] 2015. 9. 15(화)~2015. 11. 8(일) 서소문 본관 2,3층회화, 사진, 설치, 영상 등 50여점

전시에 대한 동기를 설명하는 김홍희서울시립미술관 관장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 2015. 9. 15(화)~2015. 11. 8(일) 서소문 본관 2,3층회화, 사진, 설치, 영상 등 50여점 강애란, 이진주, 장파, 정금형, 정은영, 함경아(한국), 치하루 시오타, 치카코 야마시로(일본), 린 티안미야오, 인 시우젼(중국), 아라야 라스잠리안숙(태국), 밍 웡(싱가포르), 멜라티 수료다모(인도네시아), 쉴라 고우다(인도) 7개국 총 14명아티스트 정금형 퍼포먼스 

기자간담회 왜 다시 페미니즘인가 요즘 여성혐오증이 재발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미술이라는 시각언어에 담아내면 여성이 남성에게 말걸기가 조금은 용이해지는 것인가요. 김홍희 관장은 지금은 페미니즘은 기존의 여성중심주의, 여성적 본질주의 차원을 넘어 이제 부계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해체주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미술관의 전시기획의도를 ‘판타시아’는 ‘판타지’와 ‘아시아’의 합성어로서 아시아와 여성을 관통하는 개념으로 비가시성, 양면성, 전복성을 함의하는 판타지를 설정하는데 두다

그밖에도 젠더의 문제 사라진 국극의 소재로 한 작품 일본위안부문제 여성의 살빼기에 대한 환상 속 유사운동의 문제등 그 소재가 다양하다 여기서 동아시의 페미니즘과 시카고의 작품에서 보는 서양의 페미니즘의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작가와의 대화> 라운드 테이블 <일탈과 섹슈얼리티의 지평>2015.9.18. 금 오후 2-4시

참여작가 강애란, 함경아 정금형(퍼포먼스예정), 정은영



참여작가 장파, 이진주, 치하루 시오타, 치카코 야마시로(일본), 린 티안미야오, 인 시우젼(중국), 아라야 라스잠리안숙(태국), 밍 웡(싱가포르), 멜라티 수료다모(인도네시아), 쉴라 고우다(인도) 7개국 총 14명아티스트


멜라티 수료다모(1969-)는 인도네시아 작가로 직 접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퍼포먼스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내집의 유령 I’m a ghost in my own house>(2012)은 200킬로그램의 숯을 12시간동안 가는 장시간의 퍼포먼스로서 이 과정은 나무가 장작이 되고 장작이 숯을 거쳐 화약의 재료가 되는 과정은 생명의 순환성을 상징한다


중국의 여성작가 린 티안미야오 (1961-)<많거나 적거나 마찬가지거나> 중국전통문화에 실을 사용하여 소공예적 노동으로 새로운 형...
태의 조각이탄생한다 여기에는 고단한 여성의 삶을 예술적 메타포로 살짝 드러나게 하고 있다. 


한국여성작가 장파(1981-)의 <낮의 유령들을위한 드로잉> 매우 독창적 화풍으로어디에서 이런 작품의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남성이 없는 여성의 성애를 전복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기존에 볼 수 없는 도발적 방식으로 재현하다 기존의 성개념을 해체한다 

치하루 시오타(Chiharu Shiota) <After the Dream>, 2015 설치 실, 천 가변 크기

2015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작가이자 ‘거미 여인’이라고 불리는 치하루 시오타(b.1972)는 일상적 오브제를 비정형적 실로 엮은 현장 설치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가 선보이는 <꿈의 이후 After the Dream>는 1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100시간의 밀도 높은 노동으로 만들어진 현장 설치 작업이다. 이를 통해 여성 판타지의 기표로 등장하는 순백색의 드레스를 거미줄처럼 감싼 검은 실을 통해 작가는 여성의 부재와 억압을 이야기한다

[이이남전]
 담양 이이남센터에서 2015년 9월17일부터 10월 31일까지 45일간 열게 된다


1992년 백남준이 한 말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을 백남준아트센터 자료에서 보면 "노스탤지어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의 미래'를 새롭게 펼쳐 보여 과학, 기술, 철학 그리고 문화와 예술이 융합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말로 인간과 기계(하이테크)와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차별화된 세계관을 제시한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런 정신을 이어가려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이이남이다. 이번에 그의 고향인 담양에서 열리는 '세계대나무박람회'에 맞춰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그리던 묵으로 그린 대나무그림(묵죽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미디어아트에 담고 그 가치를 새롭게 창출하고 환기시키고자 박람회장 2층에 있는 '이이남센터'에서 2015년 9월17일부터 10월 31일까지 45일간 열게 된다

박현주기자 기사 중에서 "죽녹원 내 약 500㎡규모의 2층 건물에 자리한 '이이남 아트센터'는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 아트인 '신(新) 묵죽도'를 비롯해 김홍도, 강세황, 이정 등 선조들의 작품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다채로운 작품들로 채워졌다. '움직이는 그림'으로 유명한 이이남 작가는 회화, 오브제와 미디어의 결합을 시도한 디지털 영상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해 ‘제2의 백남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9.16(수) 개막식] 

2015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개막식 및 전시품 이모저모

하늘 하늘 하늘을 수놓은 선녀의 환상적 춤과 도약의 노래

산행의 줄거움 그리고 초가을의 산성의 전경 혹은 파노라마


아마도 한국에서 마지막 전시가 될 수 있는 백남준 거북선 전시에 큐레이터를 맡은 아이리스 문 선생과 그 제작설치를 맡은 라파엘레 셜리 인터뷰에 답하고 있군요 백남준작품은 설치부터 마무리까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협력과 소통과 참여를 요구하다 전기값만해도 엄청날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매뉴얼을 따로 없다고 하네요 작품을 설치하는 사람의 창의성을 존중하는 것인가요

2015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9.16(수) 개막식 후 가벼운 산행 

청주 상당산성(淸州 上黨山城)은 삼국시대 백제가 쌓은 산성이다. 1970년 10월 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부드러운 능선이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또한 사로잡습니다 이런 자연에 만들어낸 선묘의 아름다움을 보면 마음이 절로 넉넉해진다

백남준 거북선 사진제대로 찍기가 쉽지 않다 사진 중 조금 괜찮게 나왔네요

이순신 최고 발명품 거북선에 대한 백남준의 오마주 무빙이 가능한 이런 대형작품 거의 없죠

한국미의 시원이자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백자 달항아리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전시품 중 하나

그중 장식성과 에스테틱한 요소가 강한 아주 귀여운 한국전통신발도 선보이고 있네요

[이형구 작가의 Gallus 전]
 일명 치킨 닭 서초동 페리지갤러리 2015년 9월 11일부터 11월 7일까지


작가는 이미 해부학적 지식에 예술적 상상력을 더한 뼈 조각가로 '뼈 조각'의 신세계를 열었다.


'THE OBJECTUALS', 'ANIMATUS' 대표작부터 신작 'MEASURE'까지 신체를 시각적으로 변형 하거나, 발굴한 골격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작업, 혹은 동물의 움직임이나 시각에 관한 작업 등의 다양한 연구를 해오고 있다. 특히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ANIMATUS'는 ‘생명이 있는’ 이라는 라틴어에서 차용한 단어로 작가가 새롭게 지은 이름이다. 


왜 닭을 선택했을까?. "닭은 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잖아요. 서민을 닮았어요. 또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닭의 모습이 꿈은 접고 현실에 함몰된 직장인 같았습니다."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한후 미국으로 가 2002년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했다. 전시는 11월 7일까지.070-4676-7034 <뉴시스발췌>


[백남준 조수를 7년간(1997-2002)한 미국작가 라파엘레와의 인터뷰]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omn.kr/f9qg
Interview with Raphaele Shirley who was a assistant of N.J. Paik for 7 years

나는 지난 6월 한 달 동안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서 뉴욕에 머물렀다. 지인 소개로 보름간은 미국작가 '로드니 딕슨' 집에서, 또 보름간은 호스텔에서 체류했다. 마침 로드니 친구 중 작가인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가 있었는데 그녀는 7년간 백남준 조수였고 TV복원전문가라는 소식에 좋은 기회다 싶어 인터뷰를 청했고 승낙을 받아 이를 진행하려 했으나 라파엘레 개인전 등이 겹쳐 못했다. 그 후 몇 번 다시 만나 궁리하다, 나에게 부담을 안 주면서 효율적 소통방식일 수 있는 글로 주고받는 인터뷰를 제안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 기자 말

라파엘레 전시 Raphaele Shirley May 20 2010 Chealsea Art Museum Raphaele Shirley is a French-American multi-media artist. She lives and works in New York City. She studied fine arts at the Beaux Arts of Aix-en-Provence, France and then moved to NYC in 1993. Her practice ranges from light art, sound, public art, social interventions, collaborative works and performance. 

Some of her collaborations include Perpetual Art Machine [PAM], an interactive video installation and online web co...mmunity, founded in 2005, of over 2000 members. In 1998 she co-founded The New York International Fringe Festival, the largest theater festival in the US. She was video pioneer Nam June Paik’s assistant from 1997-2002, where she developed his monumental laser works, including the 75-foot waterfall Jacob’s Ladder for the S.R.Guggenheim museum in New York, Bilbao and Seoul and the 30 meter- wide, award winning, Laser Waterscreen‚ permanent on the lake of the Olympic Park of Seoul Korea. She built upon her experience with Nam June Paik and developed her own series of site-specific works, including a commission in Norway in 2009, Jewels of Kvinesdal, a 30’ wide stainless steel, a xenon sky-beam viewable from 15 kilometers around. Another public art-work, commissioned in 2010, Shooting Stair for Dorfman Projects, Long Island, NY, is a water and laser light sculpture set outdoors. Her piece‚ Light Shot on a Bender, combining LED lights and water was presented in the Bring to Light festival in 2011 in Greenpoint, NY. She recently completed a 60-foot diameter light spiral for the Flint Public Art Project in Flint, Michigan. 

Her work has been shown in venues such as the Museum of Moving Image, S.R. Guggenheim, Chelsea Art Museum and Post Masters Gallery in New York, the NCCA Moscow, 2nd Moscow Biennial and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at the Museum of Modern Art, Linz, Austria and Art Basel/ Miami 2006. She participated in 2009 and 2010 in the artist residency/sail boat expedition to the Arctic Circle, Norway with the Farm Foundation, “The Arctic Circle” Residency directed by Aaron O’Conner. [라파엘레 네온아트 잠못 이루는 뉴욕의 밤] Raphaele's leon art 
bring to light | sleepless night(nuit blanche) in new york

뉴욕을 밣히는 밤의 눈

[라파엘레의 작품세계] 장소특정적 빅 스케일의 작품 제1전시실의 가장 큰 특징은 백남준 작가가 조각, 대형설치를 위해 만들었던 60여 점의 아이디어 드로잉 작품들이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는 점이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그래서 테크니션들과 공동 작업을 한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 두 명의 테크니션이 보유하고 있던 자료들을 소마미술관에서 작품화했다. 대부분 설치에 필요한 설계 드로잉으로 연필과 크레파스로 이뤄진 작품들이다.

눈에 띄는 작품은 올림픽공원 내 레이저워터 스크린 설계도이다. 레이저 색깔, 위치, 모양의 지시를 담은 이 드로잉은 실제 미술관 근처에 설치된 레이저워터의 작업 설명서이다. 작품보수설명서도 주목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미디어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설치물의 수명이 다하면 작품이 망가지게 된다. 이를 예측한 백남준 선생은 그에 대한 보수 설명서를 남겼는데, 이것 역시 작품화됐다.

Killing Cloud ⓒ Courtesy of Raphaele Shirley 라파엘레저작권 My work takes root in questions of space and scale, time past and future, engaging themes of dystopias, utopias, and the problematic of hopefacing the human experience. Drawing from elements of the everyday (man-made objects and constructions), as well as natural phenomena (wind, water and light) my work undertakes a portraiture of the possible, of paralleluniverses and sites of transformation. 

Components of chance are central to my process; they grant my work access to a primalenergy and a fertile space of possibilities. It is important for me to approachart in a freehanded manner. I tread lightly in my attempt to harness theephemeral, fusing minimalist aesthetics with the power of new media and attempting to leave ample room for the unexpected. 

[문경원, 전준호 작가<뉴스프롬노웨어(News from Nowhere)>]
 2015년 8월 29일-11월 08일까지 스위스 취리히 미그로스 현대미술관에서 세미나도 열린다 [웹사이트] http://www.migrosmuseum.ch/…/moon-kyungwon-jeon-joonho-wit…/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미술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아오며 올해 제 56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선전 중인 문경원, 전준호 작가의 협업 프로젝트, <뉴스 프롬노웨어: 취리히 실험실(News from Nowhere: Zurich Laboratory)>가 8월 29일부터11월 8일까지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미그로스 미술관에서 그 막을 연다 MOON Kyungwon & JEON Joonho with Urban-Think Tank: News from Nowhere: Zurich Laboratory MOON Kyungwon & JEON Joonho, El Fin de...l Mundo, 2012, 2 channel HD film, 29.08.–08.11.2015

The Korean artists MOON Kyungwon & JEON Joonho create works that address elemental questions concerning contemporary civilization in light of political, socioeconomic, and ecological changes. The exhibition project News from Nowhere, which they jointly initiated in 2012, is premised on a post-apocalyptic scenario: humanity has been wiped out almost entirely and is forced to reconsider long-held convictions that may no longer be tenable. The project premiered at Documenta (13) and is designed as a steadily evolving ensemble. MOON & JEON have established an interdisciplinary and participatory platform on which renowned experts from the fields of product and fashion design, architecture, urban planning, and medical and biotechnology research discuss the urgent issues of our time with the audience. 

[2000년 벽두, 백남준 '예술의 신'으로 다시 부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할 때다 20] 뇌졸중 후 3년만에 재기 뉴욕미술계 강타(1997-2002)
[오마이뉴스관련기사] 
대통령 앞에서 바지 내린 남자 http://omn.kr/f8m9

백남준 2000년 전시장면 1989년 작 TV Clock Picture posted on Facebook by Guggenheim Museum 

구겐하임미술관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보면 볼수록 신비하고 경이롭다 매력적이다. 미로찾기 게임을 하는재미를 준다. 
건축가 라이트는 보호대가 있는 경사진 이동로를 따라가는 방식에 대해서 <어떠한 방식을 채택하든 관객이 더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구겐하임 7층에 올라가면 자연 채광으로 더 아늑한 분위기를 낸다. 미술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천천히 내려오면서 생각을 하면서 반추하면서 작품을 감상하게 되어 있다

건축가 라이트는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유기적으로 과거와 미래 예술이 갖는 무한성과 끊임없는 변화와 변주를 미술관에 담으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것은 원효의 <원융합일:모두가 다른 방향이면서 ...모두가 한 방향에서 만난다> 사상과도 상통한다. 

작가와 관객의 보다 평등하고 수평적인 1:1의 관계라고 할까 상호소통과 긴밀한 관계를 촉발시키는 그런 면에서 백남준의 철학과도 일치한다 백남준은 건축가 라이트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고 2000년 전시 후 이 미술관을 가장 효율적을 활용한 작가로 칭송받는다. 백남준은 인터뷰에서 라이트가 고맙다고 말했다.
이 미술관은 1990년 뉴욕 시에 의해 유적지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국가유적지로 지명되었다 -뉴욕의 특별한 미술관 참고


[이불전_인피니티(Infinity)]
 PKM갤러리청와대앞에서 2015.8.26-09.25

PKM갤러리청와대 

이불은 1980년대 후반부터 퍼포먼스, 조각, 설치, 회화, 드로잉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파격적이고 강렬하게 전달함으로써 비평가들의 호응은 물론 깊이 있는 미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제작해왔다. 작가는 여성인 자신의 몸을 사용한 퍼포먼스를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당시의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렬한 메시지로 드러내며 이름을 알렸다. 


퍼포먼스 의상을 비롯한 작품에 사용된 구슬, 비즈 같은 장식적 요소는 가내수공업이라는 매개를 통해 여성성을 상징하며 주제를 부각시켰다. 퍼포먼스를 통해 관람객과 직접적으로 소통해왔던 이불은 1990년대 후반, <사이보그(Cyborg)> 시리즈를 선보이며 이전보다 묵시적이고 함축적인 구조의 조각, 설치 작업으로 관람객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작업의 지평을 넓혔다.


이불은 현실과 이상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사이보그(Cyborg)> 시리즈에 이어 이상사회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형상화한 <나의 거대 서사(Mon Grand Récit)> 시리즈 중 하나로 <인피니티(Infinity)>를 선보였다. 장식적이면서도 건축적으로 보여지는 작품은 관람객이 직접 작품을 경험하게 하는 구조로 주제에 대한 거시적 시각과 미시적 시각을 동시에 제안한다. <인피니티(Infinity)> 시리즈에 사용된 LED 조명과 거울조각, 크리스털은 시각적 미감을 제공함과 동시에 끝없이 반사되는 관람객 자신의 모습과 작품 형상을 통해 미래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며 더욱 지적인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이번에 발표될 작품들은 거울의 무한 중첩의 이미지로 거대한 공간감을 이끌어낸 작가의 기존 설치 작업 <인피니티(Infinity)> 시리즈와 같은 개념의 선상에 있되, 양면 거울과 LED 조명, 내부의 크리스털 구조물이 서로 결합하여 한층 더 아름다움을 발하는 다양한 크기의 천장에 매단 형태의(hanging) 조각들이다. 미래도시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거울에 의해 끊임없이 중복되며 불멸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공간적 개념으로 표현하는 이불 작가의 <인피니티(Infinity)> 시리즈는 2012년 모리미술관(Mori Art Museum)에서 개최된 회고전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현재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 위치한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Swarovski Kristallwelten)에도 오로지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만을 재료로 사용한 대형 <인피니티(Infinity)> 작업이 설치되어 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현대차 프로젝트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되어 이 시리즈의 초대형 설치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 국제갤러리에서 2015년 9월 1일-10월 11일까지
Ugo Rondinone Sep 1, 2015 - Oct 11, 2015


하반기 첫 전시로 탁월한 조형 감각과 심오한 작품 철학으로 주목 받아온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 작가인 개최한다. "내가 작업을 시작한 이래 지속적으로 나의 작업을 점유해 온 시간의 구조와 개념은 나의 특정적 감각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론디노네는 폭넓은 영역을 넘나드는 다양한 형식과 매체를 사용하는 시적이고 영감 어린 작품들을 선보이며 국제적으로 주목 받아왔다. 다년간에 걸쳐 여러 작품 연작을 진행하는 작가는 재료들이 에너지를 포획하거나 방출하는 방식에 대한 개인적 연구를 수행해왔다. 1990년대부터 론디노네의 작품은 초자연적 방식의 재료 활용과 열린 결말의 감성적인 내용으로 특히 주목 받아왔다. 론디노네는 사물에 대한 명민한 관찰을 통해 익숙한 주제와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어떠한 편견도 끼어들지 않는 시각으로 작품과 조우하게 한다.

선사시대 돌멘(Dolmen)이 정말 사람이 되어 우리 앞으로 걸어오는 것 같다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를 위해 론디노네는 5개로 이루어진 그의 청석 조각 연작을 선보인다. 이 거석 조각들은 거칠게 잘라서 쌓아놓은 청석들로써 정제되지 않은 형태지만 놀라울 만큼 감성적인 인간의 초상을 보여준다. 깨고 조각한 거친 작업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이 고요한 형상들의 제목은 국문으로 의역하면 ‘참견쟁이’, ‘변태’, ‘관찰자’, ‘호기심쟁이’, 그리고 ‘순종자’이다. 갤러리에 늘어선 이 돌의 초상들은 시간의 자연적인 소용돌이를 조용하지만 신랄하게 목격하는 일을 견뎌낸, 모호하지만 감동적인 예술작품이다

[추사 김정희, 우성 김종영: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 2015년 9월 11일(금) -10월 14(수) 학고재갤러리 본관 추사 전시내용: 김정희 서예/우성 김종영 드로잉, 서예, 조각 아래 김정희의 순로향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 사진저작권 학고재 추사 김정희가 본인의 자화상을 그려놓고 쓴 시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도 없다. 
제석천의 구슬이 주렁주렁 한데 / 누가 큰 여의주속에서 상에 집착하는가. 
하하. 과천 노인이 스스로 쓰다." 
謂是我亦可 謂非我亦可 / 是我亦我 非我亦我 / 是非之間 無以謂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 呵呵 果老自題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음)로, 우성 김종영(1915-1982)은 불각(不刻, 조각하지 않은 듯한 조각)으로 두 사람 모두 '구축미'를 담고 있다."


"내글씨는 아직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평생 벼루 열개를 밑창 내었고 붓 일천 자루를 달아 없앴다" 

추사의 이런 글씨를 보면 기절초풍할 것 같네요 그는 당시 코즈모폴리턴으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포스트 포스트 포스트 엑스트라 슈퍼 모던하다

서예의 정신은 글씨를 그림처럼 그림을 글씨처럼 그야말로 글씨와 그림의 경계를 없애는 차원높은 예술장르다 동양의 모든 철학이 그렇다 서양처럼 음은 음이고 양은 양이 아니고 음이 양이고 양이 음이고 일원론에 근거하고 있는데 백남준이 원시샤머니즘과 첨단 하이테트를 하나로 본 것도 같은 정신이다 선사시대를 모르고 어찌 21세기 테크놀로지예술을 말할 수 있으랴 백남준의 TV부처 그런 철학을 비디오아트로 형상화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불계공졸'(不計工拙,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음)로, 우성 김종영(1915-1982)은 불각(不刻, 조각하지 않은 듯한 조각)으로 두 사람 모두 '구축미'를 담고 있다."

학고재에서는 2015년 9월 11일부터 10월 14일까지 특별전 <추사 김정희, 우성 김종영: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을 연다. 이번 전시는 단색화를 통해 한국 미술이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시기에 그 조형성의 뿌리가 되는 서예를 화두로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옛것을 배워 새것을 창조한다'는 뜻을 가진 학고재의 이념과 지향성을 보여주는 대표 전시가 될 것이다. 지난 2010년 학고재에서 열린 <춘추> 전시의 연장이기도 하다.


[아트선재 Real DMZ Project 2015_동송세월(同送歲月)] 2011.08.29-11.29


리얼디엠지프로젝트 기획위원회는'동송세월(同送歲月'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열린 참여 방식 및 협력 기획 구조를 지향한다. 주로 기획자, 예술가들에게 DMZ를 둘러싼 문제 의식에 공감하고 관심 있는 작가 및 기획자들을 추천 받아 진행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2인의 기획자(한금현, 김남시)와 52명(팀)의 참여 작가들은 초기부터 동송 지역 방문을 하고 전시 형식과 장소 논의, 작업안 발표 등을 함께 한 것이다. 


즉, 자발적인 참여와 환대, 상호 협의와 존중을 통해 프로젝트 내용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이는, 단지 기획자, 참여 예술가들을 다양화한다는 측면 외에도, 확장되고 중첩된 사회적 경계로서 DMZ라는 문제의식 하에 과거와 현재 세대를 가로지르는 참여자들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유·무형의 여러 경계들을 다각적으로 바라보려는 의도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함께 살았던 세상’이라는 ‘동송세월’의 또 다른 의미를 구현해보고자 한다.

‘동송세월’은 1914년 동송면(東松面)이라는 호칭이 생긴 이후, 1945년 해방과 함께 북한의 영토에 속했다가 1953년 한국전쟁 정전 후 다시 남한에 수복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 ‘철원 동송의 시간과 세월’을 의미한다


다츠오 미야지마 작품에 숫자 9가 보인다 

[다츠오 미야지마] 작가작품 소개 그는 1부터 9까지 연속적으로 깜박이며 반복되는LED 숫자를 이용해 탄생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을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인문학적 개념들, 불교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주요한 예술 개념, ‘계속해서 변화하라’, ‘모두와 소통하라’, 그리고 ‘모든 것은 영원히 흐른다’ 에서 비롯되었다.

‘카운터 스킨(Counter Skin)’ 연작은 2007년부터 진행되어 온 사진 프로젝트로, 미야지마가 직접 참여자의 신체 부위에 숫자를 그려넣는 작업이다. 작가는 붓을 가지고 바디페인팅을 하는 친밀한 행위를 통해 참여자 내면의 영혼에 닿아 그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이렇게 밀접하게 관계를 맺는 과정은 ‘다름’의 장벽이 예술적인 소통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한 예술이 물리적 구분의 한계를 넘어 사람들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믿는다.


일반인들이 자원해서 이루어진 워크숍으로 진행된 <카운터 스킨 38° 남한(Counter Skin at 38° in South Korea)>은 장소성과 역사성이 드러나는 사진 작업이다. 워크샵은 DMZ 인근에 위치한 임진각과 태풍전망대에서 진행되었는데, 그곳에서 참가자들은 각자 본인의 삶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숫자를 하나씩 골라 본인의 신체 부위에 그려넣고, DMZ 풍경 앞에 서서 사진을 촬영하도록 했다. 프린팅 된 사진 작업에서 관람객은 참가자들의 땀구멍과 미세한 털을 물들인 숫자 페인팅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피부의 감촉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워크숍 참가자들 중 50여 년 전 한국전쟁 당시 어린 나이에 38선을 넘어 피난하였던 실향민이 포함되어 있어 역사적 장소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인간의 삶의 연속성을 실감케 하였다.

다츠오 미야지마(Tatsuo Miyajima)는 1957년 도쿄에서 출생하여 1986년에 도쿄국립예술대학교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이바라키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2006년에 도호쿠예술공과대학교의 부학장으로 선출 되었으며, 베이징의 울렌스 컨템퍼러리 아트센터 (2011), 훗카이도 미야노모리 미술관 2010),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1997)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1996), 그리고 포트워스 근대미술관 (1996) 등 유수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미야지마는 또한 베니스 비엔날레에 1988년과 1999년에 참여하였고, 최근에는 시드니 현대미술관 (2012)과 히로시마시 현대미술관 (2008) 등에서 


'금천예술공장' 미디어아트페스티벌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멋지게 문을 연 '금천예술공장' 미디어아트페스티벌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9월 3일부터 30일까지(추석 연휴 휴관)

백남준의 테코놀로지 아트는 이제 주류가 되어가고 있다 뉴욕은 과거 공장지대였던 브루클린이 지금은 모두 작가의 작업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뉴욕미술의 중심은 맨해튼에서 서서히 브루클린으로 이동하고 있다

Now Nam June Paik's art in technology is going to be mainstream in 21th century. Before, Brooklyn was the factory area in New York, but now all these factories have turned into studio of the artists. So the center of the New York's art has gradually moved from Manhattan to Brooklyn

[아시아문화전당]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 (Interrupted Survey : Fractured Modern Mythologies) 2015. 09. 04.(금)-2017. 09. 03(일) (For 2 years 2년간) 장소 국립아시아문화전당 The Natioal Art Complex of Asian Culture in Kwang-gu 복합4관 큐레이터 :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 


참여작가 : 인주 첸(Yin-Ju Chen), 제임스 홍(James T. Hong), 안젤라 멜리토풀로스(Angela Melitopoulos), 제인 진 카이슨(Jane Jin Kaisen), 호 추 니엔(Ho Tzu Nyen), 트린 티 민하(Trinh T. Minh-ha), 오톨리스 그룹(The Otolith Group) (총 7팀)작품구성 : 영상물, 설치, 사진, 드로잉 등 50점 이상 

[제목해설 <Interrupted Survey(중단된 측량)은 1888년에 제작된 한 판화에서 비롯되었다. 판화는 싱가포르 정부의 토지 측량사인 조지 드롬골드 콜먼이 정글의 땅을 측량하는 도중에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들어 공격하려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장면은 식민주의와 기술로 상징되는 근대기의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전통사회의 가치와 갈등을 일으키는 단적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이 장면의 압권은 호랑이가 공격한 것은 측량사 즉 사람이 아니라 측량도구인 세오돌라이트(theodolite)라는 근대를 상징하는 도구이다. 

[개요]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02년부터 아시아의 문화 창조 및 지식 교류의 허브가 되고자 추진해온 도시문화개발사업 중 전시사업의 결실을 오는 9월 4일 문화창조원의 시범개관 전시를 통해 첫 선을 보인다. 전시의 제목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는 이처럼 신화적 가치로 상징되는 전통사회와 새로운 근대사회의 급작스러운 대면과 이에 따른 충돌과 대립, 수용 그리고 공존의 상황을 집약하고 있다. 

시범개관 전시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는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의 시각·영상부분 수석큐레이터,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를 책임큐레이터로 선정하고,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7개 팀의 다국적 작가들을 초대하여 미디어영상작품과 설치작품, 문헌 등을 다채롭게 선보인다. <신화와 근대, 비껴서다>의 주요 내용은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동·서문화의 충돌과 갈등, 수용의 순환구조와 역사의 그늘 속에 침잠되어 있던 혼돈의 흔적들을 예술가들의 문화인류학적인 시각과 집념어린 창작열을 통해 살펴본다. 


[1] 아시아 근대화는 이미 알려진 것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 정책에 따른 ‘점령’으로 본격화 되었다. 서구 친연적인 제도와 문물, 자본 등이 아시아의 전통사회에 유입되면서 개발과 저항이 서로의 명분과 대응으로 뒤섞이며 근대화라는 대의를 형성해 나갔다. 

[2] 이 과정에서 아시아 각국은 서로 다른 정치 사회의 구조 속에서도 기술과 자본이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고, 그에 따라 측량이나 계산, 기계, 데이터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개념의 기준과 분류체계가 형성되면서 전 지구적인 교류와 이동이 가속화되는 등의 호혜적 측면을 축적하게 된다. 

[3] 또한 전통사회의 익숙한 생활풍토와 근대사회의 이질적 문화 환경이 서로 충돌하고 어긋나면서 각각의 현실이 되어 공존하면서 국가와 사회, 개인은 존재의 본질(정체성)에 대한 혼돈과 분열, 갈등의 구조를 경험케 했다. 

< 참여 작가> 이 전시에는 아시아를 비롯한 다국적 출신의 작가들과 영화감독이 참여하고 있다. 참여작가는 인주 첸(Yin-Ju Chen), 제임스 티 홍(James T. Hong), 안젤라 멜리토풀로스(Angela Melitopoulos), 제인 진 카이슨(Jane Jin Kaisen), 호 추 니엔(Ho Tzu Nyen), 트린 티 민하(Trinh T. Minh-ha), 오톨리스 그룹(The Otolith Group) 등 총 7팀이며, 이들의 작품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지원으로 신작을 제작한 경우로, 이번 시범개관 전시가 최초의 발표 무대가 된다.

[이이남아트센터개관]
담양 이이남 아트센터 입구 인파가 넘친다

그냥 놀이터같은 아트센터이다 이이남 작가의 작품 콘셉트와 잘 맞는다 그가 여기가 고향이고 주변에 대나무밭이 무성하고 힐링산책길과 유쾌한 미디어아트와 동서고금의 고전화가 하이테크와 만나 창조적으로 재해된 모바일아트라 생동감과 활기를 준다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아트, 그 예술적 원류나 족보를 따지고 들어가면 거의 450년 전 담양에서 태어난 대 시인 송순선생의 예술세계와 연결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선 이이남 선생이 태어난 고향이 바로 송순의 면앙정자가 눈에 보이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조선시대의 시인과 21세기 한국의 미디어아티스트는 뭔가 통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우선 자연을 찬양한다는 면에서 닮았고 인간에 여러 생각에 대한 상당히 너그러운 수용의 자세를 가졌다는 면에서 같다 또 두 사람은 4계절을 주제로 삼는 것도 유사하다. 송순의 대표작 면앙정가도 자연의 4계절을 찬미한 작품이지만 이이남 작가의 작품에는 4계절시리즈가 많다

이이남 작가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천진성과 동네 개구쟁이들의 장난기 같은 예상 밖 돌발성에서 나온다. 지방출신인 그가 미디어아티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나 예술적... 감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그런 첨단의 예술을 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도시적 감성이나 교양에서 나왔다고 하기보다는 어려서 중·고등시절 학교 다닐 때 20km나 되는 먼 등교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본 담양의 그 예사롭지 않는 풍경(만경창파)과 청죽의 마을에서 가질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예술적 감성이리라. 송순이 거한 정자 면앙정과 그 주변의 빼어난 자연에서 풍기는 시정(詩情)과 예술적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예술정신은 장르가 달라도 서로 맥이 통하는 것으로 송순은 문자언어로 이이남은 시각언어로 그 중에서도 하이테크에 속하는 미디어아트로 접근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송순은 마음으로 읽은 문학적 시(literatured poem)를 했다면 이이남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비주얼 시(visual poem)를 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참고사항 송순은 인품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어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고루 사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당시 평가를 봐도 알 수 있다. 이황은 이런 성격에 대해 그를 "하늘이 낸 완인(完人)"이라고 했고, 성수침은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단다

이이남 선생의 미디어아트 만화를 애니메이션 하는 과정을 우연히 보다가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은 동심의 세계에 닿는 감수성이 철철 넘친다. 그의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관객은 그래선 가 어른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이들이다

이이남 선생의 미디어아트는 요즘 머리에 물들인 젊은 여성의 참신하고 도발적이고 임펙트한 분위기와 함께 서양고전미술에서 보여주는 화려함과 장엄함도 함께 담겨 있다. 경우에 따라 중간중간에 개구장이들의 장난기 같은 엉뚱한 물체가 튀어나와 사람들은 놀라게도 하고 즐겁게도 한다 아래 작품은 매우 점잖은 편에 속한다

대나무가 전해주는 편안함과 대나무가 풍기는 여유로움 옛 선비들은 그래서 대나무를 보며 '죽보평안(竹報平安 대나무 통에 담겨 온 평안함을 알리는 소식)'이라 했다. 또한 대나무 푸른빛이 주는 유쾌한 정조는 우리마음에 새로운 에너지와 마음의 여유를 불어넣어준다. 내가 어려서 살던 마산 집 뒷 편에서 대나무 밭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나는 죽순이라는 고급스런 요리에 반하기도 했지만 대나무는 쭉쭉 뻗은 시원한 기개와 그 놀라운 곧음이 선비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다.

전통의 정지된 대나무그림과 이이남의 움직이는 대나무 미디어아트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 고유한 기품을 지키면서 하이테크 미디어의 시대의 정신을 담아 그의 그림을 21세 디지털 인간군상의 심정도 건드리며 저절로 고개를 끄떡이게 한다. "참 멋지다"라고

어린 소녀가 이 만화 병풍에 보고 반해 얼굴이 환하게 상기되다 

담양(이이남 작가고향)에 있는 이이남 아트센터 어른들 아이들 한결같이 미디어아트가 주는 유쾌함에 너무들 신명난 얼굴에 천국과 천진의 모습을 띈다. 전시장은 인산인해다 예술가는 일상과 환상을 이어주는 미디어다

최신작 같은데 그 이전의 작품보다 두드러진 더 진일보하다

이이남아트센터에 가면 이이남 아트센터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 컵에 커피를 담아서 판다 여기 초록은 대나무의 푸른 초록빛이다

박제화된 폭포그림이 미디어아트로 다시 살아난다 부분화

이이남 선생과 그의 작품 미디어대나무그림 그의 미디어 대나무그림은 순간순간 변화무쌍하다. 전통 대나무그림과 다르게 일년 사계절을 한꺼번에 다 담을 수 있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작품에는 작가의 엉뚱한 장난기가 발동하다 
이이남 작가 광주에 있는 미술애호가인 무각사 주지스님과 광주의 문화융성을 위한 애정어린 자유토론 광주가 빛고을로 작년에 <유네스크 미디어 아트 창의도시>로 지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 행사를 올해안으로 하는 문제와 무각사에 갤러리가 있는데 무명작가위주 전시기획 등 이곳이 광주 중심가라 관객이 광주에서 가장 많다고 하네요 

광주시청 등에서 아예 관심이 없으니 어차피 우리 민간인들이 작가나 종교인 일반시민이 뭔가를 기획해서 광주비엔날레 디자인비엔날레(어제부터시작) 등등 국제행사와 맞물려 뭔가 새로운 문화공간의 확보와 향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구고 있네요

이이남작가 내년11월 벨기에 전시가 확정되다

[이이남 작가 작업실 이모저모]

이이남 작가 작업실




2007년 3월 이이남 작가는 뉴욕미디어아트페어에 다른 작가 대타로 4점을 출품했다가 전혀 뜻밖에 4점이 다 팔려나갔고 10년간 무명작가로서의 맛본 쓴 경험은 그를 오히려 살려주는 보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해 가을 10월에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해 온몸을 던진 고 이원일 전시기획자가 주도한 독일 칼스루헤에서 열린 <아시아의 새로운 물결>전에서 지역성을 넘어 보다 큰 감흥어린 체온으로 자신만의 숨결을 살릴 수 있다는 작품을 내놓았고 그래서 더 자신감을 얻으며 더욱 창작의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각오를 굳힌 셈이다. 뭔가 10년간을 죽으라고 하면 좋은 결과가 온다는 말이 이이남 창작활동에서 마침내 구현된 셈이다. 2008년에는 예일 대에서 강연요청을 받아 전시와 함께 강연도 했군요.2013년 백남준 스미소니언 특별전 때도 그와 같이 전시를 했군요 앞으로는 스케일이 큰 설치미술에 도전할 모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f7fjGYy2MA

이이남 작가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온 정자영 큐레이터 및 작가 뒤에는 국립 아시사 문화전당 예술극장 그녀는 포철회장 ? 혹은 포철사장?의 딸이라고 하죠


[2015 광주디자인 비엔날레 신명 2015.10.15-11.13]

일본작가 이토도요의 윤무

[강요배 작가전_제27회 이중섭미술상 수상기념 초대전 '소리']

2015년 11월 5일(목)부터 11월 15일(일)까지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다. 작가의 주요 작품과 최근 작품 30여 점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그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제주에 거주하는 작가에게 주어진 상과 전시라 흥미롭다.

[학고재 전시 당대수묵(当代水墨) 2015.10.29-11.29]

[천경자 여사를 추모하면서 2006년 제가 쓴 갤러리현대 기사소개]

제목은 <자기애를 예술로 바꾼 여신 같은 화가> '천경자-내 생애 아름다운 82페이지' 전 갤러리현대에서 4월 2일까지 [오마이뉴스관련기사] http://bit.ly/2iXoaj


천경자 화백

신기(神氣), 광기(狂氣), 무기(巫氣)까지

화폭에 작가의 손길이 닿으면 예측불허의 신비하고 황홀한 세상이 열린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신기(神氣)와 광기(狂氣) 게다가 무기(巫氣)까지 모든 에너지가 하나로 엮인다. 작가의 분신이기도한 그림 속 주인공들, '황금의 비'에서 보듯 그 광채 나는 눈빛에서 전율을 느낀다. 아름답기보다는 처절하도록 슬프다.

▲ '꽃무리' 1972 종이에 채색 195×135cm 꽃이 지천으로 핀 곳에 자기애에 빠진 여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 김형순
천경자 그림의 특징은 무엇보다 환상적이다. 사막의 물처럼, 황무지에 피는 꽃처럼, 꿈과 이상이 없는 삶은 그에게는 죽음 그 자체인지 모른다. 자기애라는 방을 만들고 이 세상의 한과 슬픔과 외로움을 꽃과 새, 뱀과 나비 등으로 수놓듯 덮어버렸다. '꽃무리'는 이런 작가의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경자 그림에서는 왜 꽃이 빠지는 경우가 없을까? 꽃이 없음은 곧 현실에 대한 공포를 막는 무기의 상실일 것이다. 또한 더욱더 강력한 색채에 원초적 화풍을 더하며 인공 낙원을 만들어가는 것은 작가의 강박관념일 것이다. 작가는 누구보다 미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 험난하고 괴로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림보다 글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글에도 일가견이 있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2달 전에 가다

[길 위에 공간 길 위에 시간 길 위에 인간 그 간 사이와 틈 속에서 전시]


<혜화동 재능아트센터개관기념전 2016년 1월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위치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건너편.> [빛의 호흡과 숨결을 다채로운 색채와 움직이는 형태 속에 창조적 미디어로 융합하는 작품을 모색하다] 금민정 작가는 무용수의 멋진 춤처럼 움직이는 그림을 넘어서 쉼을 쉬는 호흡이 살아 있는 그림을 열망하며 미디어의 특징인 융합성 확장성 변용성을 살려내며 다양한 미디어를 연결하고 결합해 제한된 공간속 시간의 연속성에 담아내는 작품에 도전하고 있다. 이미지의 무한제곱이 가능한 미디어에 피드백미학의 또 다른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장소특정적이면서도 공간에 시간을 창조적으로 통합하려 했던 백남준 정신도 엿보인다.

금민정 작가 2015 벽에서 폭포수가 꽐꽐 쏟아지네요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미디어아트의 경쾌한 가변성과 유연한 조형성이 시대정신과 잘 맞네요

금민정 맑게 흐르는 시간 싱글채널 2015 가변

양주혜 펼치고 2015 가변설치 재능아트센터 숫자와 이미지가 사운드와 음향이 되는 융합미디어다

[리뷰 이승택전] 갤러리현대는 한국실험미술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가인 이승택(1932-)의 개인전 


<드로잉>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 “드로잉”은 이승택 작가 특유의 노끈(밧줄)을 이용한 입체 설치 작업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드로잉”이 평생의 작업활동 동안 그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실험을 지속해온 작가 정신의 일면을 드러낸다는 점을 그 시발점으로 삼아, 이번 전시는 다양한 형식과 매체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작가가 그의 작업 초기 시절부터 즐겨 이용한 오브제인 ‘노끈(밧줄)’을,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열쇠말로 삼음으로써 전위적 실험미술가 이승택의 작업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고자 한다.

조각가 이승택은 종이에 그려진 단순하고 예비적 그림이 아닌, 공간을 바탕 삼아 “노끈이라는 선”과 “매듭이라는 점”을 이용한 입체적 행위에 드로잉이라 이름 붙였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고드렛돌에서 발견한, 그 때만 ...해도 묶는 행위에 몰입되어, 재료로만 그치고 말았던, 묶임을 당하는 물체의 물성을 변화시켜 보이게 만들던, 그의 작업에 있어서 핵심 물질이 된 노끈(밧줄)이 바로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다.


60-70년대 변변한 전시 공간이 없던 시절, 그나마 그가 참여할 수 있었던 그룹전은 대부분 조각전이거나 미술대전 형태의 대형 그룹 전의 조각부문이 대부분이어서 그의 경계 없이 실험된 평면에 노끈 작업들은 전시 기회는 물론이고 한 번도 팔릴 수 있다는 기대 없이 반세기를 작가의 집에서 동거동락 해왔다. 


노끈으로 작업한 그의 평면 작업 중 자료로 남아있는 거라고는 1983년 한국 미협과 밀라노시가 공동 주최한 <이탈리아 한국현대미술전> 도록에 나온 작품과 1988년 관훈미술관 개인전 도록에 나온 작품 등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이번 전시는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 낸, 집단화되지 않았기에 주목 받지 못했던, 이승택 작가의 한국현대미술사를 풍성하게 해 준 노끈으로 그린 평면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리뷰] 나비작가 김현정 초대展_눈물꽃에서 피어난 힐링나비 2015. 10. 15(목)-2015. 10. 21(수)
서울시 종로구 평창36길 20 전화 02-396-8744


작가노트 “색은 빛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빛은 색을 통해 발현된다.
그러므로 빛과 색은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것처럼, 음과 양이며 본질과 현상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내 작품은 본질인 빛을 해체해 빛의 삼원색을 만들고 이들을 다시 융합해 새로운 나비의 색깔들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해체와 융합을 통해 자신을 다시 조직해내는 생명현상과 연결되는 작업이다. 생명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힘이다.”
“나비를 모티브로 한 10년간의 작업을 1부 조응(Accordence) 제2부 복제(Duplication) 제3부 날으는 빛(Flying light) 제4부 비움(Zero) 제5부 무한(Infinity) 제6부 부활(Rebirth)나누었다. 이들은 내가 그동안 처음 나비를 만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깨달은 것을 형상화해온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생명은 하나의 개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여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의미에서 생각이 다시 태어나는 부활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당대 수묵 展 Contemporary Ink Painting Group Exhibition] 전시기간 : 2015년 10월 29일(목) - 11월 29(일) 전시장소 : 학고재갤러리 본관 문 의 : 02-720-1524~6 출 품 작 : 회화 및 설치 장위 Zhang Yu, 지인 2012.9-1 Fingerprints 2012.9-1, 2012, Rice paper, water, nail polish, 99x200cm

[전시내용] 학고재갤러리는 10월 29일부터 11월 29일까지 동시대 수묵화의 깊이 있는 실험과 폭넓은 다양성을 보여주는 5인의 한•중 작가 그룹전 <당대 수묵>을 개최한다. 한국 작가 3인 김선두, 김호득, 조환과 중국 작가 2인 웨이칭지(Wei Qingji), 장위(Zhang Yu)가 참여하는 <당대 수묵>은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전시되며, 설치와 평면 작품을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당대 수묵>은 아시아 동시대 수...묵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하며 기획되었다. 이 전시는 장기적이고 주기적으로 개최되어 동시대 수묵화의 발전과 새로운 시도를 탐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첫 <당대 수묵>展 은 동시대 수묵화를 새로운 시각과 방법으로 해석하는 한•중 작가 5인의 만남이다. 이 작가들은 전통 수묵에서 출발하였으나 전통적 재료, 방법 혹은 주제에서 벗어나 독창적이며 실험적인 이미지를 설치, 퍼포먼스, 회화, 조각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수묵화의 다양한 논점을 아시아권에서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여건이 충분히 성숙한 지금, 학고재갤러리는 <당대 수묵>을 통해 동시대 수묵화에 대하여 작가와 학자들이 새로운 담론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열릴 것이다 


미니멀리스트 조각가 토니 스미스(1912~1980)의 작품인 스모크(Smoke)

아만슨 파빌리온(Ahmanson Pavilion) 정 중앙에 놓여져 전체 공간을 압도한다. 재미있는 점은 관객이 조각 사이를 돌아다니며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조각의 고정관념을 깨며 대단한 화제를 일으켰다. 덕분에 <타임 매거진> 커버에 등장한다. 조각 장르에 이정표적인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고 미 서부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이다. LA 카운티미술관(LACMA)는 이 작품을 대여할 때부터 구입하기를 원했지만 경기 침체로 재원 마련을 힘들었지만 단독으로 거금을 쾌척한 사람은 '벨 에어'에 사는 LACMA이사회 중 한 사람으로 가능했다

[미디어아트의 <확장과 융합>]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 -백남준의 미디어론

전남대 문화대학원 미디어예술공학 미디어아트세미나 2015년 10월 16일과 23일(금) 오후7-10시

백남준의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미대) 수업장면 1979 밥-도박-비행기표 art2234@hanmail.net 미디어:靈媒(a spiritualistic medium) meditator(match maker) 산자와 죽은 자의 화해, 부모 간 자식 추천도서 Shamanism+Cyberspace 천민정저 2009 MICA교수


2015년 10월 16일
하나_백남준과 미디어와 광주 [1교시] 01
<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04
< 3>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백남준의 시간론 07

둘_백남준은 왜 유명한가? [2교시] 08-14< 1> 백남준, 탈영토 제국주의자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 10
< 3> 몽골코드: 굿, 미디어, 도약하는 원시적 생명력 12

셋_백남준 첫 전시: 세계미술계 빅뱅 [3교시] 15-21< 1> 비디오아트 탄생: 인터미디어혁명 <2> 랜덤액세스(서구근대주의 해체) 19
< 3> 피드백 쌍방소통과 문화민주주의 21

2015년 10월 23일 넷_[백남준의 대안아트 셋 [4교시] 22-29 < 1> 사이버네틱스와 TV연작 
<2> 에로티시즘아트 24 <3> 위성아트(지구촌 TV코뮌) 27
< 4> 백남준 오웰예언 뒤집기: 소통과 참여 28
< 5> 레이저 아트(뉴미디어)[구겐하임전] 29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백남준 강의 후 학생들 사진 찍는데 밝게 웃어줘서 고맙다!! 프랑스 제8대학에서는 몇 년 전부터 백남준 비디오론을 강의하고 있는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우리나라 대학(원)에서는 이번이 첫 백남준강의인지도 모른다. 
다섯_백남준 예술론과 플럭서스 [5교시] 30-34
< 1> 폼 잡는 예술 교란시키는 사기론 
<2> 유용성을 무력화하는 무상(無償)예술 31
< 3> 파시즘에 반대하는 반애국주의 32
< 4> '플럭서스'의 골자는 반예술주의 33

여섯_백남준이 미디어(아트)다 [6교시] 35-38< 1> 백남준이 미디어가 되는 사례(워크숍1) < 2> 백남준의 10대 작품 선정해보기(워크숍2) 36
< 3> 백남준(세계적 국가브랜드) 활용하기(워크숍3) 37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419호 강의실 

[질문]: 미디어란 뭔가 [대답]: 미디어란 영매(靈媒, a spiritualistic medium or meditator 즉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시키는 것 소통시키는 것 끊어지다리잇고 또 잇고하는 peace maker 부모 사이에서는 자식이 매개자로 미디어역할을 한다 김형순(金炯淳): <백남준에 홀리다(360쪽 예정)> 출판사 작업 중 켄 저작권문제가 남아있다. 백남준 첫 전시 1963년에 있었는데 50주년인 2013년부터 오마이뉴스 3년간 백남준 연재기사를 묶은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지난 5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 뉴욕에 가 백남준과 관련된 사람과 그 흔적과 장소를 따라 리서치하다. 


[백남준 1교시] 백남준과 미디어와 광주<16일> 2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3>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 백남준 시간론


"예술가의 역할을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 우리는 지금 백남준 은하계에서 살고 있다. 스마트폰 있어도 우리는 다 백남준의 후손이다. 

백남준 29살 대 모습 한 시대를 앞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예언자(visionary artist) -인상파는 자연이 주는 빛의 효과를 그렸다면, 미디어아트는 전자파가 주는 빛의 아름다움
-한국에서 1995년 이전 예술은 구석기 시대, 1995년 이후 예술은 신석기시대라면 어떨까

<1> 1995년 광주: 인포 아트와 뉴미디어(신석기)


질문: 백남준과 미디어아트와 광주는 어떤 인연이 있나?

김형: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첨단의 뉴미디어아트가 소개된 곳은 바로 광주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인포아트(백남준 기획)> 100만(?) 달러가 들어간 이 아시아 초특급 전시(백남준이 개인 돈을 너무 투자해 빚을 많이 지다)는 누가 왔는가? 가상현실의 창시자인 '스콧 피셔'를 비롯해 컴퓨터 천재 7명과 인공지능(AI study)과 관련된 작품 그리고 서구에서 이름난 미디어 아티스트인 빌 비올라와 게리 힐, 누벨바그의 기수 장-뤽 고다르 등 42명의 비디오작품이 소개되었다. 전시기획은 백남준과 신시아 굿맨 등이 같이 했다. 신시아 굿맨은 큐레이터도 같이 이행했다. [신시아 굿맨 저서: 컴퓨터 예술의 세계 미진사 1994 190쪽]

[1995년 인포아트전에 관련된 연합뉴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인포아트(INFO ART 정보아트전)이다. 10개국 50명의 작가가 참여해 42개의 비디오 작품 등 과학문명과 예술의 접목을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과 신시아 굿맨(전 IBM미술관장)이 함께 전시기획을 맡았다. 작품을 직접 만지는 방식(촉각)을 도입했다.

첨단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래생활의 총아인 쌍방향TV(최근에 상품화)와 가상현실, 멀티미디어, 인터넷 등을 활용한 작품이 대거 등장할 이 전시는 비디오위주로 꾸며졌던 종전의 수준을 뛰어넘어 세계 최대 규모의 <테크놀로지아트>가 선보인다.

전시는 3부로 구성, 1부는 작품과 관객의 소통을 도모하는 쌍방향 예술작품전이다. 가상현실을 발명해 이를 발전시킨 미국의 '스콧 피셔(Scott Fischer)'와 '마이론 크루거(Myron W. Krueger)'를 비롯해 프랑스의 '에드몽 쿠쇼(Edmond Couchot)', 네덜란드의 '제프리 쇼(Jeffrey Shaw)' 등 25명이 참여했다. 관객이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다.


2부는 아시아의 비디오아트와 멀티미디어전이다. 백남준과 그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 한국의 박현기 씨와 홍콩의 엘렌 파우 등 아시아작가 18명이 출품한다. 3부는 미국과 유럽의 비디오 [03]예술 전으로 미국의 빌 비올라(Bill Viola)와 게리 힐(Gary Hill), 프랑스의 장-뤽 고다르(J.-L. Godard) 등 42명의 비디오작품이 진열된다.

질문: 당시 큐레이터를 맡으셨는데 그 특징에 대해 설명을? 


김홍: "인포아트(Info Art 정보예술)는 지금은 하이-미디어아트라고 하죠. 전엔 '혼합 미디어(Mixed Media)'로 페인팅에 다른 것 넣는 것이지만, 지금은 전자기술이 들어간 '전자매체'라 그 차원이 다르죠. 정보, 소통, 컴퓨터기술이 다 합쳐진 그래서 멀티아트 이걸 '인터미디어(Inter Media)'라고 명명했죠. 그 해 월간미술 주최로 백남준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나온 '비빔밥아트'가 바로 멀티미디어 혹은 인터미디어예요. 그의 비디오아트에 춤, 공연, 영상, 사운드 등 별것이 다 들어 있잖아요"


김형: 백남준은 이 특별전에 뉴욕미술계 인맥을 총동원해 뉴욕현대미술관 진수를 보여주다. 당시 내로하는 유명 큐레이터와 작가를 광주로 불러들여 세계미술조류에 어두운 한국미술계의 견문을 넓혔다. 또 백남준은 김홍희 관장을 한국 큐레이터로, 미국 큐레이터로 신시아 굿맨을 지명했다. 현대미술에서 정보와 미디어를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인식시켜줬다.

<1995년 백남준이 기획한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에 대한 대담> *미술평론가 황인: 학부에서 공학을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다

황인: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의 테크놀로지아트는 왕 초보 수준이었죠. 오히려 당시 포털 '다움(Daum)'이란 회사가 처음 생겨 참가해 관객참여정보, 정지영상 인터넷 중계 등을 선보였고 그 후 그게 성장했다. 김형: 황인선생의 현장증언입니다. 황인: 인터랙티브는 여기서 이야기하는데 로봇공학에 많이 쓰이죠. 내가 대학원에서 회화도 했지만 학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ASTA(Art Science & Technology in Asia)라는 높은 수준의 인터랙티브 아트를 구현하려했으나 당시 국내미술계는 그 이해도는 낮았죠. 제1회 국제학회가 2004년 일본 동경 대에서 있었고 학회결성은 늦어졌어요. 

김형: 역시 공학을 공부한 미술전공자라 남다르군요. 황인: 1995년 백남준이 없었으면 광주비엔날레의 출발 자체가 안 되었죠. 김형: 백남준은 1992년 과천현대미술관,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순회전, 1995년 광주비엔날레 이게 다 시리즈처럼 한국미술의 현대화와 세계화에 힘썼죠. 이렇게 과로를 하시고 1996년 쓰려지셨죠. 정말 정부도 못하는 일을 한 개인작가가 한 것인데 이에 대한 보상이나 공로에 대해서 국립현대미술관이나 한국미술계사람들이 전혀 모르거나 너무 무관심한 것 같다.

황인: 한국미술은 축제만 좋아하지 공부를 안 하고 뒷감당을 못해요. 그래서 인포아트가 계승 발전되지 못했어요. 제가 테크놀로지아트를 하려 하니 너무 빠르다고 주변동료들이 말리더군요. 당장의 성공에 급급한 한국미술계의 행보가 거듭되니 발전이 없죠. 김형: 백남준은 선생이 한국미술을 비약적으로 점프(jump)시키려했으나 이를 감당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저 국내에서만 이름을 날리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요. 황인: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테크놀로지아트를 할 수 있어요. 한국은 모든 걸 유행으로 받아들이죠. 백남준도 유행상품처럼 취급되었죠. 김형: 핵심을 찌르네요. '센세이션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제 백남준 기사도 보면 백남준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벗었다>는 기사의 검색 수는 정말 높죠. 

황인: 꼭 공학적일 필요는 없어요. 공학에도 시대정신이 있어요. 그 정신을 읽고 해석 적용할 수만 있으면 돼요. 백남준이 구체적인 공학의 흐름은 몰랐지만 거시적은 시각은 항상 옳았어요. 21세기에도 백남준은 계속 유효하죠. 김형: 백남준은 올드미디어든 뉴미디어든 지금 봐도 너무 참신하고 현대적이죠.

백남준-광주 민주화운동에 관심 그러나 그 기원이 되는 고인돌(1995년 작)에 더 관심

백남준은 또 '인포아트'에 자신의 작품 '고인돌'을 직접 출품하다. 또한 그는 순천 등 이 지역의 고인돌(최초의 설치미술)에도 관심이 매우 높았다. 이곳 유적을 통해 선사시대 옛 선인들이 보여준 생활양식이 주는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든 '전자 비디오조각'이다. <사실 고인돌만큼 선사시대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자극을 주는 것도 없다>

백남준은 항상 시간과 공간의 구획을 허물고 하나로 엮어내는 작업에 관심을 두었고 그것이 '비디오'라는 미디어를 통하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이 작품도 그런 측면을 보인다. 원시와 현대라는 시간적 차이와 선사시대의 삶의 방식과 현대의 삶의 상황과 같은 공간적 환경적 차이에도 어떻게 인류가 상호소통하면서 발전(진화)해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 백남준·맥루한: 미디어의 확장과 융합 "TV(미디어)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석기가 생각난다" -백남준 

질문: 미디어에서 확장이 중요한가? 
김형: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은 "모든 기술은 인간 기능(function)을 확장시킨다"라고 말했죠.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고,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이고, 컴퓨터는 두뇌의 확장이고, 전기는 중추신경의 확장이다. 그래서 매체(미디어) 기술은 감각기능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 라디오와 전화는 귀의 확장, 텔레비전과 영화는 눈과 귀의 확장이다. 책을 시각매체, 라디오를 청각매체, TV를 시청각 매체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겠죠.
그의 저서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

네티: [매체에 따라 인식방법이 다르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자와 청각장애자의 경우처럼 시각매체인 책으로만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과 청각매체인 라디오로만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코끼리 인식에 있어서 시각장애자와 청각장애자의 차이를 보면, 시각에 의존하는 청각장애자의 코끼리상은 실제 모습과 비슷하겠지만 시각이 가려진채 청각과 촉각 등에만 의존하는 시각장애자의 코끼리상은 실제와 멀어진 모습이다.

질문: '미디어는 메시지다' & '미디어는 마사지'란? -TV를 마사지하라 



김형: 맥루한은 또 미디어는 메시지이고 마시지라고 했는데 이제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말은 
좋은 나쁘든 그 속에는 그 미디어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마사지라고 했는데 이제 미디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즐거운 마시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불쾌한 마시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바람직한 미디어는 <엄마의 약손 같은 미디어> 아닌가 싶다.

이런 뉘앙스는 기계를 의인화해 인격과 인간성을 불어 넣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요즘 흔히 쓰는 '터치(마사지) 폰'도 이런 개념에서 나왔으리라. 기계마저 예술이 된다면 그 세상은 분명 아름답다. 하긴 백남준은 이뿐만 아니라 TV로 새와 물고기와 정원도 만들었다.

질문: 맥루한은 미디어를 구분했나? 맥루: 매체 간에 놓여 있는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감각기관의 수에 따라 뜨거운(hot) 매체와 차가운(cool) 매체로 구분했다. 맥루한은 언어학자답게 히틀러를 독일영웅으로 만든 보다 집중적인 라디오는 '뜨거운 미디어'로, 산만한 TV는 '차가운 미디어'라고 명명하며 미디어를 분류했다. 또 그는 인류역사를 '구어문화·필사문화·인쇄문화·전자문화'로 구분하면서 전자시대에는 지구촌이 미디어로 하나의 부족이나 공동체가 되는 시대가 된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뜨거운 매체(Hot media)는 정보 전달량이 풍부하고 사용자의 낮은 참여 요구: 라디오, 영화, 서적, 사진, 신문, 잡지 그리고 차가운 매체(Cool media)는 정보 전달량이 부족하고 수용자의 높은 참여 요구 직관적, 감성적: 전화, TV, 만화 등등 Any hot medium allows of less participation than a cool one, as a lecture makes for less participation than a seminar, and a book for less than a dialogue. 김형: 이 구분이 애매모호하다.

질문: 비디오아트에서 미디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나?



김형: 그것을 바로 네트워크겠죠.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인간과 우주의 연결> 같은 것 네트워킹은 인류가 같이 가야하는 공존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시간-공간 사이의 연결]

  * 파스칼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두렵게 한다<공간 시간 인간>


질문: 인터미디어는 왜 융합미디어인가?

김홍: "음악이라는 것, 미술이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거기서 중복되어 만나는 <제3의 영역> 즉 '인터미디어(융합)'의 성격이 있죠. '플럭서스(반예술운동)'도 그렇지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도 인터미디어다. 음악적인 요소와 시각적인 요소와 피아노와 TV같은 새로운 오브제아트 전시 포스터에서 보는 개념미술 등 다양한 매체가 고루 활용되었다 그래서 인터미디어다. 여기에 더 추가하면 백남준은 해프닝(몸이라는 미디어)에서 비디오(비디오라는 미디어)로 넘어갈 때 그 자체가 인터미디어죠. 매체만 행위(몸)에서 TV나 전자비디오로 바뀐 거지 거기에 깔린 미학은 같아요. 뉴미디어에는 게다가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들어간다. 

질문: 비디오아트에서 어떻게 회화를 할 수 있나? 


- TV모니터에 전자선으로 그림을 그려 하나의 캔버스로 대체하는 시대

백남: 그 범위의 차이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비디오아트에서는 다 빈치처럼 정확한 그림, [06] 피카소처럼 자유로운 그림, 르누아르처럼 컬러풀한 그림, 몬드리안처럼 깊이 있는 그림,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성 넘치는 그림, 폴록처럼 격렬한 그림을 비디오그릇에 다 담을 수 있다. 그런 대상을 다 형상화할 수 있다"고 그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고 보기보다는 그 나름의 역할이 다르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회화라는 장르가 절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설] 비디오는 그릇이 커서 모든 회화의 장점을 다 담을 수 있다

질문: 백남준의 비빔밥회화가 현대회화에서 영향을 준 예는? 김형: 그 예가 바로 게르하르트다. 그는 나는 어떤 목표도, 체계도, 경향도, 강령도, 양식도,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일종의 융합이고 비빔밥정신이다. intermedia 혹은 multimedia이다.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 게르하르트. 동독출신으로 사실주의와 팝아트 그리고 시대정신의 정수가 잡식과 혼탕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에게 사진, 회화, 추상, 구상 다 뒤죽박죽이다. 통섭, 융합, 하이브리드[fusion and hybrid]의 미술이다. 일관된 작업방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끝없는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작가다.

김형: [백남준 나는 TV(뉴미디어)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대상을 그리는 미술'을 구석기에 비유한다면 '소리를 보는 그리는 미술'은 신석기에 비유할 수도 있다. 백남준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상을 그리는 미술이 아니라 소리를 보는 미술을 추구한다. 공간에 시간을 들여와 제3의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는 다원예술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음악과 소리가 TV로 시각화하면서 비디오아트로 탄생된다. 이런 발상은 "새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본다"는 선불교개념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It is not too difficult to justify Kant's music with Cage's philosophy" -Nam June. Paik 

질문: 백남준을 미디어아트의 선각자로도 볼 수 있나?
진중: 흔히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이었다. 비디오를 넘어 로봇, 레이저, 인공위성 등 다양한 매체로 실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온당할 게다. 실제로 미디어아트의 역사를 다룬 책은 최근 백남준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물론 그보다 먼저 워홀이 비디오를 사용했고, 그에 앞서 포스텔이 TV모니터를 설치했다. 퍼포먼스 위성중계 역시 백남준이 처음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남준처럼 미디어 자체를 주제로 삼아 철저하고 일관되게 미디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아트의 아버지'는 역시 백남준이다.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대중은 카메라로 이미지를 복제하는 수준을 넘어, 컴퓨터로 이미지를 변조, 합성, 생성하고, UCC도 그렇고 어떤 의미에서 디지털의 대중은 모두 백남준의 후예다. [*보들레르의 소리 색채 음향(공감각) 미학을 백남준은 미디어아트로 구현]<한편의 논문>


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

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3> 비디오아트는 시간예술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근이다" 
- 백남준 1991

질문: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을 쉽게 풀면? "비디오아트는 시간개념 바뀌는 혁명이자 시공간의 궁극적 경계선을 탐색하는 유일한 예술이다" - 프레드릭 제임스(F. James 미국의 저명한 포스트모던평론가) 

박만: 노스탤지어는 기존의 시간개념을 넘어 과거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에 이루지 못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며 무한제곱의 원동력이 되게 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피드백)하는 실천행위이다. 이것을 통해 과학·기술·철학 그리고 문화·예술이 융합하고 공존할 수 있는 차별화된 세계관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 말은 더 적극적으로 보면 비디오를 통해 인간이 마치 조물주처럼 시간의 속도를 조정하거나 시간의 순서를 앞뒤로 뒤바꿀 수 있기에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가정이다.

백남준은 비디오테이프로 모든 걸 녹음하고 보존하면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는 이로써 인간이 신에게 도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비디오아트는 기존의 시간개념을 바뀌는 혁명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구별하고 인간이 시간을 조절하는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백남준은 시대에 따라 시간개념의 진화를 이런 순서로 봤다. 윤회부터 [...]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인도의 시간개념-그리스의 시간개념-성서의 시간개념-뉴턴의 시간개념-베르그송의 시간개념-깁스의 시간개념-후설의 시간개념-하이데거의 시간개념-사르트르의 시간개념-케이지의 시간개념-위너의 시간개념-슈톡하우젠의 시간개념' 순으로 진화되었다고 봤다. 여러분의 시간관은

또 이런 말도 했다. 1950년 이전의 예술가들은 추상적 공간을 발견했고 1950년 이후의 비디오예술가들은 추상적 시간을 발견했다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몇 년(?)은 걸린다.

백남준은 1992년 자신을 동서 문명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작가 중 하나라고 평한 적이 있는 '오토 한(O. Hahn)'과 인터뷰에서" 비디오는 우리가 시간을 변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매체로 현재를 과거로 과거를 현재로 되돌릴 수 있다" 백남준은 그의 친구 '예를링에게 보낸 편지'(1962)에서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했는데 결국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 비디오에 한번 찍히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백남준 그에게 영원을 손에 쥘 수 있는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이 평생 그의 화두였다.

[백남준 2교시] 백남준은 왜 유명한가?<16일> 


<1> 백남준은 탈영토 제국주의자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 <3> 몽골코드: 굿(셔면), 미디어, 도약하는 야생주의(원시주의)

<1> 백남준의 탈영토제국주의자
-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내가 바로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제왕이다](30살)
- <우리가 서구에서 만들어놓은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그 룰을 바꿔라>(60살)

질문: 백남준은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죠?  김홍: "백남준은 전설처럼 신화화 된 상태로 그 기행만 알려져 있지 그 밑에 깔려있는 의미가 어렵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백남준을 센세이셔니즘으로만 보기에 그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한국에선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죠."



그러면 백남준은 천재이고 괴짜이고 기인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주는 영감은?
-신인류 노마드 탄생 예고 그리고 인터넷 시대 예고

그는 한국출신으로서 유일하게 열등감도 전혀 없는 열등감 제로 포인트 인간이었다. 당시에 한국에는 2대의 캐딜락이 있었는데 그 중 한대가 캐딜락을 타고 다니고 동대문 창신동 집이 3천 평이고 차 수리공이 10명이나 있고 남준의 부친인 백낙승씨는 한국 최초의 재벌로 일본의 니혼대 상과와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여권번호 6번이고, 백남준은 7번 1920년대부터 1300여 대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을 경영했고 홍콩과도 무역했다. 또한 그의 조부 백윤수씨는 당시 종로·동대문 일대 포목점 중 50~70%를 독점했고 조선말 왕실의 상복·제복 등을 도맡았다. 그런 것보다 경기중학교 다닐 때 일제강점기이고 사실 일본어로 된 것이지만 세계문학전집과 세계문화사와 세계사상사 등을 다 섭렵했다. [참고] 나는 유럽에서 배운 것 없다.


김훈: 모국어로 쓴 책을 어디까지 읽었나? 대답: 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박태준, 김기림을 읽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것은 단연코 정지용이었다. 정지용은 언어의 의미와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모두 장악한 시인으로 저를 매혹시켰다. 그렇게 날카롭고 가파르고 또 시각화한 언어에 저는 매료되는 것이다. <결론 엄청난 독서가였다>

백남준의 위대한 점은 비디오아트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그걸 끝까지 밀어붙인 힘은 뭔가. 그런데 이런 것의 배경은 뭘까요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돈과 권력도 기술도 능력도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자존감(자부심)이다. 

우열등감에서 나온 자존심이 아니라 긍지과 자부심에서 나온 진정한 자존감이다. 내 부족한 [09] 자존감을 백남준이 채워준다. 그는 나에게 진정한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다. <1000년을 우려먹을 문화자본> 같은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우랄알타이부터 밀려서 몽골로 오고 또 밀려서 한반도로 오고 이 작은 한반도 반쪽이 되었고 식민지 분단을 경험하면서 한국인의 사고와 행동이 아주 편협해졌죠. 유치한 좌우 논쟁 지역차별들이 우리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한반도출신으로 백남준만한 인물이 있는가. 단군, 세종,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등등과 비교가 안 된다. 하지만 백남준도 스키타이 단군도 높이 평가했다.

질문: 당신은 어떤 예술가? 

백남: 나는 세계적인 예술가이면서 세기의 예술가이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는 백남준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의 잃어버린 자존감을 결핍된 자의의식 되찾고 싶다. <제국의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백남준은 우리에게 탈영토 제국주의를 권한다. 백남준이야말로 단군 이래 세계를 호령한 문화적 칭기즈칸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호랑이였다.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 있다' DMZ 45분 2000. 세종문화회관 1층 로비에 설치 한국은 21세기를 맞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당시 고갈된 백성들이 자존심을 이렇게 탄식했다 

아아 우리 겨레여/마치 자루속에 같인것 같구나/삼면(三面)은 바다로 둘러 쌓이고/북방(北方)은 높은 산으로 가리웠으니/사지(四肢)는 항상 오므라들고 굽혀져서/기개(氣槪)와 뜻 어디에 편단 말인가/성현(聖賢)은 만리(萬里) 저 쪽에 있으련만/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고개들어 세상 바라보니/견문(見聞)이 좁고 정(情)이 흐릿하구나/남의것 모방(模倣)하기에 급급하고/제것을 갈고 딲을 겨를이 없구나/백성들의 입안에 자갈을 물리고/어리석은 것 하나만을 받들게 하네/차라리 단군(檀君)때의/질박(質樸)한 고풍(古風)이 그립고나

이 사진을 보라 백남준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나 뒤로 단군이 보인다-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참가한 백남준 

그의 자신감/베니스비엔날레에서 보여준/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그는 멜빵 패션/언제나 작업이 가능한 복장/해맑은 미소/천진의 얼굴/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에게는 돈이 안 보인다/권력을 말할 것도 없고/명예도 우습다/단지 창조하는 자의 기쁨만을 즐긴다/그의 눈빛에는 경쟁자가 없다/앞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Voyant)다/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3천 년대를 내다보고 있다/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3천 년대가 종종 나와서/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나는 불행하게도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하여간 이 사진을 보니/오늘 나의 맥 빠진 기운이 조금은 나아진다/내 기운을 살려주는 그의 기품이 멋지다/그는 정말 예술을 하는/보따리 노마드다

[백남준 복장]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고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뭐 이상할 것 없다. 명품을 사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함정이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이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천국을 살 수 있는데 그러나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백남준은 이런 말을 했단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야 가장 자유롭다고 백남준 1993년? 이어령 장관을 만나러 갔다가 수위아저씨의 저지로 문화부 출입을 거부당한 일도 있다. 그는 행색이 거의 노숙자 수준이기에 그는 자신이 너무나 위대하기에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인가. 멜빵패션은 헐렁한 바지 백남준 스타일로 굳어졌다.물론 걷는데 불편함을 없애려고 스스로 발명품 신발도 신고 다닌다.

그는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명품 이런 것을 가지고 다닐 리가 없다. 그는 자기식대로 칫솔과 치약면도기 신문지 물병 멜방 패션 수많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도 사기다. 이런 스타일은 어찌 보면 가장 치밀하게 계산된 교란 술에 가까운 예술가의 음모인지 모른다.

하여간 내가 김달진 연구소에서 열린 미술 강연에서 들은 이야긴데 그 강사는 여자분 워싱턴 스미소니언 fellowship으로 큐레이터로 근무했는데 한번은 마침 백남준 전시가 스미소니언에서 열렸는데 백남준은 미국 최고 정계의 유명인사 등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거지행색을 하고 나타나 놀랐다고 한다.

[도올 백남준 1992년 석도화론 중에서] "우린 역사를 너무 잘 못 봐. 선진이다 후진이다 이런 게 없어. 선진이라는데 가보면 후진도 있고, 후진이라는데 가보면 선진도 있지. 내가 일본가 보니까 일본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더라고. 그냥 우리랑 똑같았어. 그래서 다시 음악의 본고장 독일에 가서 보니깐 거기서 작곡가들이라는데 전부 엉터리들이었어

질문: 미국의 저명 미술사가도 백남준 왜곡이 심하다?


이영: "몇 년 전 출간된 <20세기 현대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작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을 축소 왜곡하고 있어요. 백남준을 '플럭서스'(전위예술단체)의 한 멤버로만 봐요. 백남준의 해프닝아트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케이지', '보이스',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비교하면 백남준을 말이 안 될 정도로 다뤄지고 있어요. 시각 예술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백남준이 안 보이는 거죠. 음악계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고요. 

질문: 백남준아트센터도 국립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영: 제가 보기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범위 안에 있다. 백남준 연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백남준은 초국가적인 장기프로젝트이다.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국립미술관 수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김형: 사실 유럽은 터키도 포함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다 제국의 경험이 있다. 유럽에서 독일은 사실 이 경험이 미비하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미국보다 더 큰 항공모함을 만들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제국을 경험했고 그 이전에 몽골이 유럽까지 지배하는 제국을 경험했다.

백남준은 1993년 일본이 신화적 인물로 바꿔버린 스키타이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보고 그에게 오마주를 보냈다 백남준은 기존의 기록역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자의 기록으로 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특이한 관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단군 시리즈 작품 중 하나 여기서 백남준은 탈영토 제국주의에 대한 열망이 유감없이 나타난다.

<2> 93년 베니스비엔날레와 전자초고속도로(뉴 실크로드)

데뷔 30년 만에 문화 칭기즈칸 되다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수상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중심의 중국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로운 지평을 봤다."

이런 그의 이상을 예술로 이룩하다. 백남준은 1962년 "황색재앙(13세기 초 몽골이 유럽을 침공했을 때 받은 유럽인의 공포감)은 바로 나다"라며 세계를 호령하는 문화계의 칭기즈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독일 첫 전시 30년 만에 세계최고의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1993년)에서 독일작가 '한스 헤케(H. Haacke)'와 함께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다 분단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백남준'은 남북만 아니라 세계의 '하나 됨'을 추구했다. '헤케'는 독일 나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인류의 공존과 평화를 촉구[11]했다. 한국출신의 백남준이 독일대표로 뽑힌 건 파격적인 일로 독일에서도 반대여론이 있었다. 역으로 그건, 백남준이 독일에서 영웅이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 상을 타면서 백남준은 "상을 타는 건 좋은 일이나 올림픽처럼 꼭 상을 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백남준은 2년 후 독일 <캐피털> 지가 발표한 미술가 중 세계 5위에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수상작 제목은 '전자초고속도로'인데, 백남준은 '마샬 맥루한'처럼 '지구촌'을 주제로 삼았다. 동서가 미디어환경의 변화에 따라 교류와 소통을 통해서 서로 만나야 한다는 주제를 표현했다. 최초의 실크로드 개척자인 '마르코 폴로' 외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칸' 등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고비 사막부터 유목민의 이동수단인 말과 코끼리 등을 타고 가는 모습이다. 실크로드가 업그레이드되어 백남준은 <전자(정보)초고속도로>를 상상했다.

그 중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우주선을 타고 가는 한민족의 전설적 시조 '단군'이다. 그런데 이 단군 앞에 '스키타이 왕'이 붙어있다. 백남준은 스키타이를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고대 유목기마집단으로 기원전 6세기 흑해북쪽에서 발원하여 기마의 스피드로 시베리아, 몽골고원, 한반도 남단까지 진출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보면 백남준은 단군을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실증주의적 역사관으로 보지 않았다. 백남준은 국가(국경)의 개념을 넘어 북방계 기마민족 유목민계통으로 본 것이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백남준에게 주는 의미] 

위 작품은 전자초고속도로 중 하나로 제목은 '칭기즈칸의 귀환'이다. 위성시대 전자아트를 상징하는 TV를 자전거에 싣고 백남준이 칭기즈칸이 되어 귀환하는 것 같다 정보는 너무 중요하기에, 동서는 계속 접촉해야 한다고 주장이다
.

아시아 중 유럽을 벌벌 떨게 한 나라는 중국의 황제가 아니라 몽골의 칭기즈칸이었다. 그런데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칭하는 백남준은, 그냥 정복자 칭기즈칸 아닌 하이테크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 정치·경제보다 문화·예술이 진정 인류를 하나로 엮는데 최선책이라 생각이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新실크로드-전자초고속도로(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의 부제는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이다. 서울이 아니라 울란바토르를 붙인 건 백남준이 자신의 뿌리를 한반도로 국한시키지 않고 멀리 몽골로까지 확대해서 봤기 때문이다.

[사진] 영토시대에는 말이 가장 빠른 나라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지만(러시아 200년 지배) 탈영토시대에는 인터넷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메시지인가.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1995년 작품 백남준의 기마민족(Equestrian people) 아트선재소장

[결론: 쫄지 마라] 지금은 네트워크가 가장 빠른 인터넷을 가진 나라가 바로 21세기 제국이죠. 김대중 대통령이 이 부분을 성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넓은 땅이 아니라 빠른 말의 속도로... [12] 우랄알타이 시베리아 몽골 부 이후 깡그리 잃어버린 우리의 자존감을 되살리자.

<3> 몽골코드: 굿(샤먼), 미디어, 원시(야생)주의 



신·구음악 차이 -카라얀은 너무 지겹고 마리아 칼라스 너무 시끄러워 -백남준 
The difference of the new music and old music

백남준은 이렇게 폼 잡는 음악을 정말 싫어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부셔버릴까 하다가 노이에 뮤직(Neue Musik) 신음악 신체음악을 발명한 것이다. 백남준도 이 정도 음악수준은 물론 있었지요.

사진을 보면 신음악과 구음악의 차이를 확연히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와 구석기시대의 차이다 백남준은 왜 카라얀을 경멸했나? 일방적 예술의 독재 혹은 카리스마와 쌍방적 예술의 민주화 인간화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백남준이 원하는 새로운 음악 노이네 뮤직의 참 모습이었다 모든 관객이 완벽한 몰입과 참여와 그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철저하게 인터랙티브하지 않은가

신음악은 무음악이다. 무음악은 기존음악을 무화시키다 악기가 아니라 몸으로 연주하다 수탉소리 등 포함한 소리와 소음을 시각화하다. sound -> image 

백남준이 심취했던 '무음악'에도 그 계보가 있다. 음가의 민주화를 시도하며 '12음법'을 만든 쇤베르크의 '무조성(atonal)'과 때로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지 않고 관객의 소음을 중시하는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이 바로 그것이다.

백남준의 '무음악'은 악기 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해프닝 아트'의 성격이 강한 이 음악은 '액션음악'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런 음악은 매사 심각한 독일인에게 충격과 웃음을 동시에 줬다.

백남준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건, 자신이 동양인임에도 서구인보다 더욱 서구예술과 철학의 본질을 꿰뚫어 봤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리라. 광기 어린 그의 '액션아트'는 '비디오아트'로 연장된다.

둘의 공통점은 장벽을 허물고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거기엔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를 하나로 만나게 하고 싶다는 그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런 철학은 80년대 '위성아트'가 발표되고 나서야 이해된다. 다시 말해, 전 지구적 차원의 소통방식인 인터넷시대를 그가 예고한 셈이다.

그래서 줄리아드 출신 샬럿과 행위음악을 했는데 당시에 그의 파트너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했다. 첫째 고전음악의 달인 최고의 음악가 둘째 최고의 미인 세째는 완벽하게 누드가 되어 연주할 수 있다는 조건인데 샬럿이 이 3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고 마침내 그 조건을 수락했다 아래와 같은 연주는 음악의 독재다 인터랙티브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전남대 문화대학원 백남준의 미디어론 2015. 10. 23 미디어아트의 확장과 융합] 추가보충자료

[01] 임제록 46강 철저한 우상파괴자 백남준 그래서 삶의 축제주의자가 되죠. 이런 면에서 상당히 니체적이다.

逢著便殺하라 逢佛殺佛하며 逢祖殺祖하며 봉착편살 봉불살불 봉조살조

逢羅漢殺羅漢하며 逢父母殺父母하며 봉나한살나한 봉부모살부모

逢親眷殺親眷하야사 始得解說하야 봉친권살친권 시득해설

不與物拘하고 透脫自在니라 불여물구 투탈자재

마주치는 대로 곧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

위에서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공과, 종교라고 하는 공이 말하자면 사실은 속고 들어가는 거야. 아! 부처님인데, 불교인데 하는 그런 권위에 속지 말라는 뜻이다. 

[02] <아래사진> 미국 '타운 홀 바가 스튜디오'에서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1968 ⓒ 피터 무어 에스테이트/VAGA, NYC 백남준 에스테이트. 백남준아트센터소장. 백남준은 1960년대 후반 뉴욕 보니노 갤러리, 하워드와이즈갤러리 등에서 '소리의 시각화를 시도'하는 비디오아트와 행위음악 등을 다각적으로 실험한다.

동경대에서 음악을 전공했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됐나요?

김홍희: 융합된 사고가 총체적 예술을 낳다'총체(조작된) 피아노' 1958-1963. 백남준은 연주도 하지만 피아노의 금기를 깨고 그걸 밟고 부수기도 하고 때론 오브제로도 활용한다. 백남준은 동서양의 학문과 예술·철학과 과학을 꿰뚫고 있었기에 동서의 장벽을 넘어 상생의 방식으로 연결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남준은 당시론 매우 드물게 동서양은 언제나 만날 수 있고 상호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백남준은 또한 물아일체라는 동양의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통합적으로 봤다. 그러기에 서양의 첨단기술과 동양의 정신세계를 사상과 이념·인종과 지역의 경계 없이 그물망처럼 요즘말로 네트워킹 방식으로 연결시키려 한 것인가.

동양에서 음양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그에게는 음악과 미술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음악전공자인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그의 친구 '예를링에게 보낸 편지'(1962)에서 그가 "내 작품은 그림도 조각도 아닌 단지 시간예술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시간을 무엇인가? 평생화두가 된다. 열렬한 연애를 한 1년과 그냥 1년과 차이가 있겠죠. 외국여행 1달과 그냥 한국에서 1달과 다르다. 여러분의 연애경험을 훌륭한 소설로 남기면 그것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꾼 것이죠. 모든 예술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죠. 우리가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은 음악 무용 무당 같은 시간예술 뿐이다. 지난 번 시간에 말씀드린 노스탤지어는 기존의 시간개념을 넘어 과거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에 이루지 못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며 무한제곱의 원동력이 되게 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피드백)하는 실천행위이다. 이것을 통해 과학·기술·철학 그리고 문화·예술이 융합하고 공존할 수 있는 차별화된 세계관을 제시한 것이다"

백남준의 이런 종합적 사고는 총체적 예술(art for all senses)을 낳는다. 시각예술인 미술에 청각과 촉각적 요소도 도입한다. 시간예술인 음악에 공간예술인 미술을 융합시키고 전자 빛으로 그리는 TV개념을 도입한다. 거기에 몸을 붓처럼 사용한 행위예술도 포함시킨다. 그런 예술에서는 '자연·기계·인간'도 같은 생명체일 뿐이다. 인터·미디아 총체와 융합미디어와 같은 말이다. 

[03] 우리는 -1000%에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무욕·무소유주의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선생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 아래 사진 부처의 목을 쳐 그의 몸뚱아리가 아래 바닥에 뒹굴고 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나는 돈을 벌지 않는 예술을 하기 위해 performance를 한다

선불교의 원리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임제록 우리는 어떻게 75%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5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3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9%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10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서구문명과 예술로부터 탈주로 열다 -백남준

백남준은 20대 후반 이런 불경에 심취했다. 위 장면은 백남준이 '오르기날레'에서 선어록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같은 경구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남준은 특히 '벽암록'(18번)에 나오는 '무봉탑'(無縫塔)을 좋아했다.

이 이야기는 혜충 국사가 입적하기 직전 당나라 대종(代宗) 황제와 하직할 때에 나눈 대화로 황제가 "내가 국사를 위해서 뭘 해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국사는 "저를 위해 이음새가 없는 무봉탑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답한다.

형체도 이음새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봉탑이라. 이는 결국 황제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모든 법계를 하나의 탑으로 세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하여간 이런 선문답에 매료된 백남준은 예술동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에게 병풍에 직접 한자로 써서 선물할 정도였다 

[04] [백남준의 여러 얼굴 그는 무엇보다 인류학자였다 아래 사진 인류학 관련사진 백남준아트센터] 빌 비올라: "제가 젊었을 때가 막 비디오아트가 태동하던 시기였는데, 제가 백남준의 조수를 했으니 운이 좋았죠. 제 평생에 만난 사람 중 최고였어요. 에너지가 넘치고 재미있고 지극히 아름다운 분. 그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해줬고, 비디오에 대해서 알고자 하면 그 원리를 주저 없이 개방하는 열린 분이셨죠." -올 국제갤러리 전시 때 인터뷰에서

<1> 문화민주주의자로서의 백남준 : 문화민주주의'디자인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철학이 세계 곳곳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 준 셈이다. 이 메시지는 독일의 개념 미술가 요셉 보이스를 연상케 하는데, 그는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강연, 교육, 정치, 행동, 무엇이든 다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확장된 예술 개념이 '사람은 모두가 예술가'라는 예술의 탈신비화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예술가란 날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굳이 나에게 예술론을 묻는다면 지금 현재로서는 파괴 없는 창조는 없기에 우리시대의 우상을 파괴하는 것에서 우선 예술은 시작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나무를 날마다 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형순

<2> 축제주의자로서의 백남준: 돈보다 축제가 먼저다 일관되게 삶의 향유를 최우선으로 두는 축제주의자였다.

<3> 전자공학(물리학)을 프로처럼 구가하는 공학도로서의 백남준: 전자공학을 독학하다 학창시절 물리학을 좋아한 백남준:백남준이 이런 과학이론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동거 동락한 부인 '시게코'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학창시절 물리학자가 되고플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기계 다루는 데도 능했다. 'K-456'도 만들었고, 전시 땐 TV내부회로도 직접 조작했고, '아베'와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설계할 만큼 과학적 지식도 풍부했다.

<4> 르네상스인간으로서의 백남준: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라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래서 백남준이 '현대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위너는 르네상스 인간 하버드 철학박사 수학자다.

<5> 우상파괴자로의 백남준 우상숭배는 인류의 영원한 질병이다 6) 인류학자로서의 백남준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6> 인류학자로서 백남준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참고] 질문: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이영: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7> 기존체계와 질서의 교란자로서의 백남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기가 횡행하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술가는 그 모든 사기를 사기 치는 교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백남준의 예술가론은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의 사기론은 이런 교란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8> 현대전위 작곡가로서의 백남준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랜덤 액세스인데 내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된 것은 정말 랜덤 액세스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일종의 교란이다. 그것이 우연히 이루어졌다. 나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런 것이 예술의 창작에서도 작용되기도 한다. 

[05] 음악의 확장 백남준은 1958년 존 케이지가 음악의 범위를 확장해서 침묵과 소음을 현대음악의 범주에 집어넣은 것도 그렇지만 그가 주역을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주역의 음표를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백남준은 그 대신 쇤베르트의 무조음악을 업그레이드시켜 기존의 음악을 무화시키는 무음악(a-music)을 시도하다 무음악은 또한 악기대신 몸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일종의 신음악이다. 이런던 '무음악'에도 그 계보가 있다. 음가의 민주화를 시도하며 '12음법'을 만든 쇤베르크의 '무조성(atonal)'과 때로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지 않고 관객의 소음을 중시하는 존 케이지의 '무작곡(a-composition)'이 바로 그것이다.

김홍희: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06] 그는 6개국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인터넷은 당연히 백남준의 예술적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다

그는 6개 국어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인터넷은 당연히 백남준의 예술적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온 것이다. 

[07] 백남준의 또다른 스승은 보들레르 발터 벤야민이 그랬듯 말이다.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visionary)': 보들레르와 백남준

"어둠인지 빛인지/광막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긴 메아리 멀리서 잦아들듯/색채와 소리와 향기가 서로 상응하네" -보들레르의 대표시 <상응> 중에서

백남준의 글 비디오암호코드 중 위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며 그가 보여준 비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P185>

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

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 visionary)'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경계를 허무는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된 '전자 비전(Television)'을 썼다는 점이다. 

[08][백남준의 낙관론_내일 아름다울 것이다]

백남준은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 크게 성공할 것이며 다만 유태인처럼 한국인도 이제 인류 문화사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박만우: "그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인간 백남준, 한국인 백남준이 바로 근현대사회에서 이런 모든 갈등을 다 겪고 그것을 처절하게 실천한 롤 모델이 아닌가요. 그걸 보면서 제가 깨닫는 건 바로 '약한 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에요.

백남준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서구에서 많은 설움을 받으면서 백남준이 봤을 때 한국인을 유태인과 비교하는 것은 당연하죠. 뿌리 뽑힌 삶이 역으로 21세기에 엄청난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분열될 정도의 슬픔과 고통에도 그걸 신명으로 승화시켰잖아요. 한국인만이 가진 유전인자로 본 거죠.

인도인, 유태인, 우리나라 안산 외국이주민 등 이런 떠돌이들, 그들은 집을 언제라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도 말뚝을 박고 살 수 있는 자세, 이런 것이 바로 21세기에 소프트파워가 됩니다. 유태인들은 이런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한 거죠. 백남준이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09]백남준의 과격성_새로운 야만인 등장] 왜 백남준은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이영철: 백남준, 성상 파괴하는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도 있어요."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피아노는 음악적 권위의 상징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의 상징인데 그것에 대한 도전을 표현한 것이에요. 그래서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쳤죠. 예술적 테러리스트인 백남준은 그런 맥락에서 존 케이지의 넥타이 잘랐고요. 이건 다 새로운 미술을 재창조하기 위한 파괴였죠."

왜 백남준은 모든 걸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왜 백남준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파괴적이냐고요. 새로운 야만인이 오는 거죠. 세상을 다 걸고 싸우는 그 명분을 아무나 스스로 설정하기 어렵죠. 정치가 중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나요. 영구혁명을 꿈꾸던 인물이 예술가였으니까 용납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감옥을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죠.

백남준은 위대한 전사였어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굴었고 집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 정신은 정말 대단히 위대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죠. 유를 부서야 창조가 나와요. 파괴 없이 창조 없어요.

겁쟁이나 좀비들에게 창조는 없어요. 창조자에게 기생하거나 합세하여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죠. 기존의 것을 부숴서 잡석으로 만들어 길을 내는 자, 그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자가 바로 창조적인 야만인이죠.

나는 백남준의 이런 정신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을 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0][아래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전시 때 벽에 적어놓는 백남준 관련 자료텍스트와 작품] 맑스는 사회의 계급화를 파타하려고 했다면 백남준은 예술의 계급화를 타파하려고 했다. 이용우씨는 백남준 예술에 대한 평가에서 "관객참여방식에 의한 그의 미적 실험은 백남준 미학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을 독재 또는 독백예술로 봤고,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이 관객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예술의 계급화를 초래했다"라고 논평했다.

"나의 쇤베르크 발견은 아마도 맑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 상황은 은연중 지식인들로 하여금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맑스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이를테면 지식인의 열병이었다. 쇤베르크가 극단주의자였다면 내가 전통음악을 개혁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급진주의자가 되는 길이다 나는 경기중 4학년 2학기에 이런 이유로 아버지가 강제로 나를 홍콩 영국계 로이덴 고등학교로 전학시켰다. 나는 이것을 화려한 정치 망명이라고 생각한다" -백남준

이렇게 유발된 부친과 갈등은 계속이어져 일본·독일 유학 기간 날이 갈수록 악화된다, 앞에서 언급한 이것은 백남준이 홍콩에 갈 때부터 시작됐지만, 동경대학에 진학할 때 폭발했다. 성적은 부친이 원하던 대로 동경대 상과를 들어갈 충분한 수준이었으나 부친을 속이고 미학과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부자지간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11] [견우와 직녀가 설화에서 영감]위성아트의 상상력은 어디서 왔나? 백남준은 <예술과 통신> 전시 도록(현대화랑 1995)에 '별들의 랑데부'라는 글에서 '칠월칠석'에 황소를 끄는 총각별 '견우'와 베를 짜는 처녀별 '직녀'가 여름밤 꿈 같이 만났듯 동서가 그렇게 랑데부하는 이야기로 번안했다고 밝힌다. 이런 전설은 백남준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전자아트 정보아트 인식이 지평확대 동서의 다양한 정보가 중요하다. 예컨대 부부 간 대화가 부족하면 문제가 생기듯 나라 간 소통 부족하면 전쟁이 난다 바로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은 바로 코뮌 글로벌 그로브를 형성하는 것이다 (가상적 상상적이나 지구촌 축제를 일으키기 그래서 그 내용에 인디언 춤 오키나와 민속과 한국전통춤이 소개된다

[12] [위성(=미래의 빛)아트_백남준의 유토피아는 바로 '해원상생(解寃相生) 즉 인류평화가 공존하는 공동체)'] TV예술화와 위성의 예술화;"당신과 보이스가 인공(=미래의 빛)위성 중계를 통해 미국과 유럽 사이를 연결하는 퍼포먼스를 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이는 마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프랑스 철학자)와 노먼 메일러(1923~2007 미국 반전소설가 네오 맑스시트)와 실존문제를 놓고 위성대담을 벌리는 걸 상상하는 것과 같잖아요. 양 대륙 간 하늘이 막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요. 고작 몇 백 명을 놓고 하루저녁 공연하는 브로드웨이공연보다 덜 드는 돈으로 나는 대륙 간 심지어 철의 장막에 갇힌 수백만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어요.-백남준

[13]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었던 것예요. 그는 테크놀로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우습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그걸 인간화했다" -독일평론가.

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14] 독일에서도 백남준은 예술파트너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백남준보다 2살 아래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이다. 그녀는 백남준에게 높은 점수를 주네요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15]남의 나라를 쳐들어가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바로 탈영토 제국주의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탈영토 제국주의를 경험할 수 있나. 예컨대 내가 세계에서 어느 한 부분에서 최고의 디자인이 된다면 땅을 차지하지 않아도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17]랜덤 액세스? 백남준은 1960년대 서구의 견고한 근대주의 미술체계를 해체시키는 데 사용한 방법이 바로 <랜덤 액세스> 즉 일종의 교란미학인데 창조의 순간은 항상 그 이전에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상태를 거쳐야 한다 그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징조가 바로 랜덤 액세스이다

[18]질문: 백남준과 광주비엔날레의 관계성은?

박만우: 김영삼 정권 때 광주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를 모아놓고 5·18 보상을 뭘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할 때 한 분이 "비엔날레요" 그래서 광주에서 아시아 최초로 비엔날레가 생겼죠.

광주비엔날레가 그 아이디어로 그렇고 '인포아트'도 다 백 선생이 직접 섭외하고, 아는 외국작가를 섭외했잖아요. 어떤 파장이 올지 결국 고국의 미래를 다 내다보고 이를 기획하여 구체적 플랜까지 생각하며 실현한 거예요.

이보다 2002년에 미국 휘트니비엔날레에 참여한 백남준이 미국에서 받은 상금(요즘 돈으로 약 3억 원 해당)을 휘트니 관장 찾아가서 "한국은 아직도 동시대 미술을 모르고 유화로 꽃, 나비를 그리고 있으니, 내가 그 돈을 다 낼 테니까 한국에 꼭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거잖아요. 그렇게 그 전시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온 거죠.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젊은 20대, 30대 부부 등 25만 명 참가해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이렇게 우리나라에 세계현대미술의 흐름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그가 직접 코디네이션 한 것입니다. 그 은공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큼 보답 못 드리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419호 강의실 

[19]백남준을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어떻게 활용해야죠?

이영철: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20]자신의 취향에 대해서는 이기적이면 이기적일수록 좋다. 모두 다 커피마신다고 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차를 주문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게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 취향만이 아니라 결혼도 마찬가지고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타적인 삶은 남의 눈치를 보고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것이다

백남준이 그들을 매료시켰던 건, 자신이 동양인임에도 서구인보다 더욱 서구예술과 철학의 본질을 꿰뚫어 봤고 폭넓은 인문학적 지성까지 갖췄기 때문이리라. 광기 어린 그의 '액션아트'는 '비디오아트'로 연장된다.

이것도 랜덤 액세스의 분위기가 난다. 백남준은 유럽에 처음 가서 그들의 문화수준에 상당히 실망을 했고 다만 그에게 황홀한 경험을 맛보게 한 것은 바로 중세고딕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다. 백남준은 거기서 비디오아트의 단초를 얻는다. 자연의 빛이 주는 그 눈부심 그는 거기서 전자의 빛의 주는 그 경이로움을 상상했던 것이다. 아래 백남준아트센터 건물도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21] 그의 첫 대학수업 백남준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제자를 존중한 그가 일방적 수업을 할 리가 없다. 그는 무엇보다 학생과 공동으로 현대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원시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해프닝아트에 '성(性)'을 가미한 수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원조 격인 1968년 샤먼과 함께 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도 이런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10년 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신보다 25살이 어린 같은 대학 제자 '자니스 거이'와 함께 백남준이 피아노를 치면 '누드비너스'가 음에 맞춰 몸을 변주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오감을 최대로 확장시키며 뒤틀린 우리 내면을 풀어주는 걸작이다.

이런 작품을 백남준이 교수가 되기 전부터 무척하고 싶었지만 모델료가 너무 비싸 못 하다가 드디어 수업시간을 통해 천지인이 하나이듯 자연과 인간과 음악이 하나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 그의 제자 '이보 데코빅'이 이 퍼포먼스를 영상에 담았다.

[22] 프랑스 파리8대학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백남준 비디오이론' 과목을 개설(교수 장 폴 파르지에 Jean Paul Fargier 백남준 전문가)하고 있는데 한국미대 그 어디도 백남준 미디어론 강좌가 없다는 것은 유감이다. 전남대 문화대학원이 처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3] 2009년 백남준 아트센터 전시 때 소개된 1960년 초 플럭서스의 누드 퍼포먼스는 왜? 그것은 끝까지 가보는 극단의 무질서 후에 창조가 나오기 때문이다. 노이즈 아트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진도 바로 랜덤 액세스다 아래 사진은 1960년대 초반 플럭서스 퍼포먼스 장면 이런 것이 나온 것은 나치즘의 공로다. 나치즘은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여 인류의 대학살을 낳았다 파시즘의 재발을 경고하는 퍼포먼스다

[24] 랜덤 액세스? 백남준은 1960년대 서구의 견고한 근대주의 미술체계를 해체시키는 데 사용한 방법이 바로 <랜덤 액세스> 즉 일종의 교란미학인데 2009년 3월에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와 함께 강연 때 칠판에 적힌 이런 개념어에서 바로 랜덤 액세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창조의 순간은 항상 그 이전에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상태를 거쳐야 한다 그 극도의 혼란한 무질서의 징조가 바로 랜덤 액세스이다

[25] 여러 분이 탈영토 제국주의시대 제왕이 되는 경험을 하기 바란다: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바로 탈영토 제국주의다. 내가 세계에서 최고의 디자인이 된다면 땅을 차지하지 않아도 세계를 지배한다.

[26] 최울가 작가의 고백 ;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애기 소호에 비가 내렸는데 애기 유모차에 타시고 반쯤 비를 맞으면서 가시길래 "선생님 건강 괜찮으세요?" 물으니 "어 괜찮아!" 하시면서 도움이가 끌어 주는 유모차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나와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국가가 저렇게 큰 거인 하나를 돌봐주지 못하다니 일본 같았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텐데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대한 원망 예술을 모르는 무지함이 저 큰 대가를 저렇게 버리는구나 싶어서 그 답답한 심경은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종일 비가 내렸고 난 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보내던 기억이 난다 

[27] [인류문제에 가장 고민을 많이 한 철학자] 피카소와 르네 마그리트 왜 코뮌인가 파시즘 때문이죠. 모마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정말 압권이다. 나는 피카소가 주는 그림의 위력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온 보람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런 작품을 보면 정말 현대적이죠. 현대인의 삶이 그야말로 초현실적으고 그려지고 있는데 이 사람이 코뮌니스트였다는 잘 모르죠. 그는 현실을 그리되 현실을 그리지 않고 환상을 그리는 그런 미술의 또 다른 세계를 실제로 펼쳐 보인 천재급 작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의 작품은 주로 신비한 분위기와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 발상의 전환 등의 특징을 보이며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데페이즈망 기법(dépaysement)으로 유명하죠.

데페이즈망은 우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대상이나 상황을 이질적인 상황으로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페이(pays)는 원래 땅이나 장소를 말하는데 그 단어 앞에 데(dé, 해체하다)가 들어가니까 그 땅을(그 어떤 물체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장소로 옮겨놓는다(배치한다)는 뜻이 된다 고정관념 깨기 낯설게 하기

[제안] 백남준은 영원한 우리의 키치인 동시에 살아있는 호랑이다. 그는 단군의 직손으로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었다. 백남준 <전자장승>을 하나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28] [플럭서스] 끝까지 가보는 극단의 무질서 후에 창조가 나온다. 노이즈 아트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진도 바로 랜덤 액세스다 아래 사진은 1960년대 초반 플럭서스 퍼포먼스 장면 이런 것이 나온 것은 나치즘의 공로다 나치즘은 지나치게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여 인류의 대학살을 낳았다 파시즘의 재발을 경고하는 퍼포먼스다

플럭서스 운동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 사진 한 장이면 끝이다 사진설명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서구근대의 상징)를 파괴하는 멤버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반예술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예술이 상업화·대상화·물질화되는 걸 반대하고 대립되는 갈등이나 충돌이 생겨도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 창조적 발상에 높은 점수를 줬다.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

[29] [반애국]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1994년 '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은 예술가 측면에서 보면 20세기에서 21세까지 걸쳐간 사람으로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한 사람이죠.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 중 한 분이죠. 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되고 그의 삶의 족적을 알면 알수록 고국에 대한 사랑 굉장했구나 싶어요. 애국심의 발로만 아니라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뿌리와 기원이 이게 결국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증명해 보인 게 바로 백남준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0] "언어의 경직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21세기의 살길이다" <신조어를 많이 만드는 나라가 승리한다> 언어애국주의에 대한 경고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만 외국어에서 온 어휘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다 이 부분은 사실 예민한 부분이라 잘 소개되지 않고 있다. 1996년 인터뷰 황: 황필호 박사 1991년 인터뷰라고도 하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http: kmitp2005.blogspot.kr 2007 04 honay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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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백남준은 왜 퍼포먼스 평생했나? 김형: 한마디로 돈 안 버는 예술을 하기 위해서다

백남준은 20대 후반 이런 불경에 심취했다. 위 장면은 백남준이 '오르기날레'에서 선어록을 읽는 모습이다. 그는 <금강경> '사구게'에 나오는 "모든 가시적 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그걸 응시해야하리(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같은 경구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백남준은 특히 '벽암록'(18번)에 나오는 '무봉탑'(無縫塔)을 좋아했다.

이 이야기는 혜충 국사가 입적하기 직전 당나라 대종(代宗) 황제와 하직할 때에 나눈 대화로 황제가 "내가 국사를 위해서 뭘 해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국사는 "저를 위해 이음새가 없는 무봉탑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답한다.

형체도 이음새도 없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봉탑이라. 이는 결국 황제가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모든 법계를 하나의 탑으로 세워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하여간 이런 선문답에 매료된 백남준은 예술동료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에게 병풍에 직접 한자로 써서 선물할 정도였다.

질문: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이영: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백남준의 응용?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난해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던 예술이 우리사회에도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그가 맨 처음 한국에 와 나와 인터뷰할 때 '나의 예술이 지금은 난해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편리하다고 하며 따라할 거야'라고 했는데 실제로 요즘 광고 등에 응용되는 걸 봅니다. TV모니터를 비스듬히 들고 거기에 얼굴을 내밀거나 거기서 연속문양을 사용하는 게 참 많습니다."

백남준은 1958년 존 케이지가 음악의 범위를 확장해서 침묵과 소음을 현대음악의 범주에 집어넣은 것도 그렇지만 그가 주역을 보고 작곡을 하는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주역의 음표를 보면 참으로 아름답다

[44] 68혁명은 왜 미디어가 사회를 보는 눈을 바꾸다_69반전평화운동과 우주과학진화 달에 도착

이런 방식의 전시도 랜덤 액세스(서부활극)라고 볼 수 있으리라 혼미한 가운데 유통성 있고 유연하고 우연적이고 예측하기 힘든 우발적인 사고 말이다 68혁명은 주동자 없는 시위 랜덤 촛불시위처럼 말이다.

백남준의 예언: "현대의 경쟁은 곧 소프트웨어의 경쟁(1986년 10월)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소프트웨어를 가장 잘 활용하는 회사는 바로 구글이다 우리는 지금 구글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45] 여기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왼쪽은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 백남준은 세계적 아트스타로 부각되면서 한국에서도 덩달아 유명해져 34년 만에 금의환향한다. 그래서 "80년대 역수입된 한국산작가"라고 불렸다. 그런데 1984년 6월 26일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예술은 사기다"라는 '폭탄선언'으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된다.

그 인터뷰내용 중 일부를 여기에 인용한다.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이에 대해 이용우 미술평론가는 "그가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 등을 보여 온 '플럭서스' 철학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기론'과 관련해서 백남준의 귀국시기가 묘하다. 국내적으로는 신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고 언론통제가 심해 학생·민주화운동이 더 격하게 일어났고, 국외적으로는 1984년 LA올림픽에 구소련이 불참하는 등 신냉전체제가 고조되었다. 당시 상황은 백남준이 작품에서 그린 평화와 공존의 세계와도 정반대였다.22그 해 백 선생 35년 만에 귀국해 '고등사기론'을 펼쳤는데요.

[47]비디오는 미술의 속성을 극대화한 영상예술로 한 가지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다양하고 복합한 걸 다 담잖아요. 하나의 진리만 추구했던 것과 다른 패러다임이죠. 사람에게 예술적 방편을 통해서 어떤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고 유희적인 놀이로 보여 사람들은 더 착각에 빠지죠. 예술은 그런 비전을 제시하는 것, 그래서 고등사기죠. 과학은 명증적인 것만 주장하지만 예술은 명증 이외에 여러 복합적 양면가치를 제시하잖아요."

[48] 백남준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 -백남준 지도교수의 말] 백남준 독일프라이 대학 지도교수는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전자음악의 본거지인 쾰른방송을 추천하면서 그에게 거기에 가 보라고 권고한다. 백남준의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아래 사진은 백남준의 친구이자 백남준 이론가인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초청 강연할 때 쓰인 영상을 찍은 것이다.

[참고] 백남준 비디오아트에 한국-일본-독일-미국이 4분1씩 작용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 한국의 굿, 일본의 전자공학, 독일의 몸 철학과 68혁명 같은 유럽의 저항문화, 미국의 위성과학과 팝아트 이런 것이 각각 4분1씩 작용했다. 그래서 1984년 백남준은 미국의 위성기술을 응용해 전 세계를 향해 위성아트를 쏜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한국무당이 소개되었고 일본의 광고문화와 서구의 첨단음악도 소개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소비광고문화를 예술화한 팝아트의 영향도 보인다. 이것 결국 인터넷 시대를 여는데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60년대부터 하고 싶었던 레이저아트를 2000년 구겐하임에서 구현했다. 레이저사다리를 타고지구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49] 이이남 선생의 미디어아트 만화를 애니메이션 하는 과정을 우연히 보다가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은 동심의 세계에 닿는 감수성이 철철 넘친다. 그의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관객은 그래선 가 어른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이들이

이이남 선생의 미디어아트는 요즘 머리에 물들인 젊은 여성의 참신하고 도발적이고 임펙트한 분위기와 함께 서양고전미술에서 보여주는 화려함과 장엄함도 함께 담겨 있다.

경우에 따라 중간 중간에 개구장이의 장난기 같은 엉뚱한 물체가 튀어나와 사람들은 놀라게도 하고 즐겁게도 한다 아래 작품은 매우 점잖은 편에 속한다

이이남 뉴 미디어와 비주얼 포엠
[31] [글로벌 그루브] 상상적이고 가상적인 지구촌 놀이굿 
글로벌 그루브 1973년에 제작된 '글로벌 그루브(지구촌 놀이굿)'는 뉴욕 WNET-TV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아티스트로 선정된 백남준의 작업으로 ‘앞으로 TV 가이드는 맨해튼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워질 것’이라는 예언적 비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글로벌 그루브'는 맥루한이 TV가 국제적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체가 될 것이라 주장했던 바를 시각적으로 증명해 보인 작업으로 탭댄스에서 인디안 나바호족 북소리, 한국의 부채춤, 샬럿 무어만의 퍼포먼스에 이르는 각 문화권의 춤과 음악이 겹쳐진다. 백남준은 「글로벌 그루브와 세계 비디오 시장」(1973) 이란 글을 통해 당대 TV영상 문화가 편향된 민족주의적 시각만을 전달하여 <민족 간의 소통을 저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비언어적인 소통 매체인 음악을 통해 백인과 흑인, 동양과 서양,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이어주는 통로를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백남준은 더 나아가 세계 각국의 음악과 무용 프로그램을 주간 편성하여 비디오 공동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확산시키면 이에 따른 교육적, 오락적 효과가 놀라운 것이 되리라고 장담한다. 이후 <글로벌 그루브>는 등 백남준의 다른 작품에 삽입되어 계속 이용된다. 

[32] [굿모닝 미스터 오웰]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백남준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방영됐는데 어떤 평가를 하시나요?"60년대 백남준 선생은 TV와 비디오시대죠. 1963년 독일 첫 전시에서 TV아트가 등장하고 1965년 최초로 비디오아트가 비디오테이프로 시작됐죠. 휴대용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나오자 그걸 사서 뉴욕을 방문한 바티칸 교황바오로 6세 찍고 그날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해 세계최초로 비디오테이프를 예술화한 거죠. 

70년대가 비디오테이프로 영상작업을 하고 이걸 더 발전시켜 비디오설치, 비디오퍼포먼스, 비디오조각 등 다양하게 실험한 기간이라면, 80년대는 지금까지 해온 TV방송, 비디오, 행위예술까지 총망라하는 만든 게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죠. 그러니까 자신의 60년대TV,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등 모든 것이 결합된 종결 판이에요. 

이게 주는 메시지는 매체가 독재자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사방팔방과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을 강조한 거죠. 또한 기술자와 예술가와 대중미학의 의미를 확실히 부각시켰어요." 

1984년 1월1일 백남준의 '위성오페라' 총진행을 보다 김 관장 부부가 그 중계 과정을 파리에서 보셨다고 들었어요."남편이 1983년 말 덴마크공보관으로 부임한 후라 우리 부부는 백 선생이 1984년 1월 1일 퐁피두센터 앞마당 중계차본부에서 교통정리 하듯 뉴욕, 파리, 독일에서 송출된 것을 진두지휘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순식간에 편집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보내는 거죠. 

KBS도 돈을 내고 방영권을 따 한국에도 중계했죠. 남편이 이걸 연결하는데 한 사람이었죠. 정말 그런 놀라운 위성오페라를 보면서 감격했어요. 그게 전 세계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꿈같았어요. 중계가 다 끝나고 남편이 공무원이라 돈은 없었지만 백남준 선생과 한국에서 오신 조수 등에게 저녁을 한턱냈죠." 

[33] [레이저아트] 뉴미디어 시도 우주와 교신 
"그런데 백 선생은 레이저아트를 21세기에 한 게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발상을 했어요. 당시는 기술적인 뒷받침이 안 된 거죠. 그걸 집대성해서 작품화한 것이 2천년 뉴욕 구겐하임 전에서 선보인 레이저아트인 '야곱의 사다리'죠. 그래서 60년대를 '프리비디오(TV)시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까지 '비디오시대', 2000년대를 '포스트 비디오시대'라고 하죠. 레이저아트와 홀로그램아트 등이 후기에 속해요." 뇌졸중 극복하고 2000년 구겐하임 전에서 '레이저아트'를 선보였죠? 

[질문]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이영: 19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왜 관객을 중시했나요? "전시에서 '참여 TV'라고 TV에 자석을 붙여놓은 건데 TV의 내부회로 보여주는 영상을 관객이 좌 /유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