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기록과 기억] MMCA 과천 1전시실에서 2018.7.26~12.16까지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영상, 설치 등 약 50여 점의 작품 및 도큐먼트, 드로잉, 비디오 등 아카이브 200여 점 전시담당자 임대근 학예연구관 [MMCA 전시토크: 큐레이터와의 만남] 전시기간 중 1회
박이소 작가
박이소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참으로 맑은 사람이었다 김수영(1921-1968) 시인처럼 참 정직한 사람이었다 계산을 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사람이었다. 김수영은 47살에 그의 시를 온몸으로 밀고나가다 차에 치여 죽었듯이 박이소(1957-2004)는 47살에 온몸으로 정직하게 한국미술계를 밀고 나가다가 속에서 불이 나 타 죽은 것이다. 박이소의 주검을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에게서 순교자적 면모가 보이는 것은 그의 죽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삶과 죽음마저도 경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미술작업이나 미술기획에서만이 아니라 후배를 양성하는 미술교육에서도 전력투구하는 사람이었다
1984년 뉴욕에서 박이소
박이소가 뉴욕에서 1984년 가장 배고프고 고단하고 힘들 시절의 그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그와 친했던 강익중이 우연히 찍은 사진이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작품제목은 <단식 퍼포먼스> 1984 밥솥을 힘 없는 어깨에 걸고 걷는 모습이 순교자처럼 보이네요
"윤리의 장에서 박 모는 부모가 만들어준 이름을 스스로 버리고(박철호,박모),이어서 11월 말의 추수감사절때,사흘간의 단식행위를 통한 공복 속에서 작품(밥솥)을 밧줄에 이어 목에 매단 채, 단식 마지막 날 빈속으로 정오에 집을 나서 강을 잇는 부르클린교를 건너갑니다.
20대말의 나이에 이것을 결행했다는 것은 결코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닙니다.그는 미술에서의 퍼포먼스가 1차적인 목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거기에는 아무런 관객도 없었고 단지 친구가 있었지요, 당시 가까이 지내던 강익중이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영철
박이소전 기자간담회
마리관장은 인사말에서 박이소는 1980-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1980년대 이후 국제 미술계의 지형도에서 그의 위치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2014년> 유족들이 작가노트, 드로잉, 비디오, 아카이브 등 많은 작품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 박이소가 목마른데 그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것이 해소가 될지 궁금하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좀처럼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어렵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미술품 옆에 붙어 있는 설명을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2004년 세상을 떠난 작가이자 큐레이터, 평론가인 박이소(사진)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문가들은 “한국 동시대 미술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라고 평가하지만, 평범한 관람객들은 “전문가가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관람객들만 어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된 박이소의 작품 ‘베니스비엔날레’는 공사 중인 시설로 오인되기도 했고, 작품을 운송하는 전문업체의 직원들도 어떤 것이 작품이고, 어떤 것이 일반 설비인지 항상 확인해야 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편견을 벗어나 제도화된 시각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작가]
박이소는 경계가 없는 작가다 민중미술이나 모더니즘 이런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림이 되는 가가 중요하다. 그는 뒤샹의 후예는 아니지만 기존의 그림형식에 대해서 일침을 가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번 전시를 맡은 임대근 학예연구관의 도움말이기도 하다 그림에서 더 높고 더 고상하고 더 훌륭하고 더 숭고하는 뭔 그런 개념이 없는 작가다. 김수영 시인의 유작인 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사군자 그림도 관객의 시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식의 현대화된 사군자를 그리다. 하나의 용기다.
[이번 박이소전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다 ]
그는 이미 역사가 된 인물이다 역사가 되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미래의 작가가 된다는 뜻도 된다. 그에게는 경계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민중미술 모더니즘 뭐 그런 것이 없다. 그냥 그것이 그림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를 누구는 천재적 개념미술가라고도 하지만 많은 사람은 개념미술가가 아니라고도 한다. 그만큼 그를 규정하기는 상당히 힘들다 그는 분명 순교자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광명쇼핑센터
[박이소: 기록과 기억] MMCA 과천 1전시실에서 2018.7.26.~12.16까지 전시담당자 임대근 학예연구관
박이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을 그리는" 작가다 아마도 그는 정직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진보적인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미덕이다. 이런 면에서 1960년대 순교자처럼 죽은 김수영 시인을 닮았다. 김수영이 가장 중요시 여긴 미덕이 바로 정직성(Honesty)였다. 정직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기록을 가장 중시하는 삶을 은유할 수도 있다.
작가의 역할은 이미 굳어진 이미지 제도화된 규범에 대해 정직하게 일침을 가하는 것은 모든 미술사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일 것이다 박이소는 이런 정신에 충실하다.
잡초도 자란다
"허접한 물질과 속화된 언어를 외양으로 했지만, 그의 미술은 철저하게 몸이 겪은 문화적 경험과 느린 호흡의 지적 사유를 바탕으로 했기에 우리는 박이소의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성/세속, 철학적 사변/통속적 유머, 고귀한 정신/파편적 물질을 이분법으로 갈라 보기만 했지 그 양자가 주름과 치마처럼 한곳에 결속해 있으리라 상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이소의 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의 어느 자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당분간 만나기도 어려운 '극단의 변증법적 미술'이다" [...] -이영철
"허접한 물질과 속화된 언어를 외양으로 했지만, 그의 미술은 철저하게 몸이 겪은 문화적 경험과 느린 호흡의 지적 사유를 바탕으로 했기에 우리는 박이소의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성/세속, 철학적 사변/통속적 유머, 고귀한 정신/파편적 물질을 이분법으로 갈라 보기만 했지 그 양자가 주름과 치마처럼 한곳에 결속해 있으리라 상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이소의 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의 어느 자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당분간 만나기도 어려운 '극단의 변증법적 미술'이다" [...] -이영철
사군자도를 현대화하다
김수영의 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박이소 인간적 비인간적
박이소의 이작 품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라는 책제목을 연상시킨다. 여기 가운데 보이지 않게 글이 적혀 있는데 그것을 바로 김근태가 80년대 험하게 고문을 당하면서 기록한 고문일기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그는 80년대 치열한 민중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공감하고 동조한 것 같다. 다만 그는 미국에서 정말 가난한 작가가 처절하게 문화운동(대안공간)을 하였던 것이다.
역사의 문
21세기 인간은 토끼를 통해서 역사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인가 박이소 역사의 문에서 왜 토끼가 나오는가. 이것의 답은 없다. 다만 내 생각에 요셉 보이스의 영향으로 보인다. 20세기 전쟁 학살시대에 인류를 야단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토끼만이 할 수 있다. 토끼만이 인간에게 성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풍긴다. 아래 자본은 창의력은 역시 보이스에 대한 오마주인가. 여기서 자본은 문화자본을 말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든 스승 박이소(한예종 교수)에 대한 기억: 제자들 인터뷰도 들을 수 있다 그는 수업하는 방식은 수업이 끝나면 기진맥진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박이소 쓰리 스타 쇼
커피 콜라 간장을 가시적으로 구별할 수 있나 흐릿하게 보이는 흔적의 그림이다. 여기에서 커피 콜라 간장을 사용하고 있다. 문화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다문화주의적 시각을 보인다.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
박이소는 80년대 대학생들이 정치투쟁을 하는 동안 뉴욕 브루클린에서 미국미술사에도 작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비제도권 시각의 미술운동을 펼쳤다. 바로 그런 실험적 대안공간이 바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다. 그 대상은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 작가 중심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전시를 기획하면서 한반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적은 없단다. 그런 면에서 그는 프로의식이 놓다. 문화활동가 전시기획자로써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서로문화연구회, 집필활동, 스터디모임을 주도하다.
박이소는 80년대 대학생들이 정치투쟁을 하는 동안 뉴욕 브루클린에서 미국미술사에도 작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비제도권 시각의 미술운동을 펼쳤다. 바로 그런 실험적 대안공간이 바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다. 그 대상은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 작가 중심이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전시를 기획하면서 한반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적은 없단다. 그런 면에서 그는 프로의식이 놓다. 문화활동가 전시기획자로써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서로문화연구회, 집필활동, 스터디모임을 주도하다.
가까이서 본 박이소의 작가노트 모두 21권이다, 7권씩 세 코너에서 소개한다, 관객을 염두에 두다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를 살피라고 적고 있다.
박이소 아카이브
여기서부터는 작가노토가 선보인다 작가의 작가노트는 작업비밀과 같은 것인데 이것을 공개하기는 좀 꺼릴 수도 있지만 그의 유족이 2014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다 사실 박이소는 작가노트 즉 작가의 아이디어가 왕성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왜 그리는가의 대한 고민과 예술은 누가 결정하는 가에 대한 물음이 이런 노트에 담겨있을 것 같다.
작가노트 무제(뒤돌아보지 말라)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우치기 위해"
다만 그는 이런 아이디를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그 아이디어만으로 미술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준다고 봐도 좋으리라 다만 그는 완성품보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조금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한 것 같다 작가노트를 제대로 보려면 1주일은 걸릴 것 같다.고시생처럼 도시락 싸가지고 여기 와서 일주일 공부하면 박이소를 좀 알게 될 것 같다
작가노트 1(1984~1985) pp. 66-67.
1984년에 미국에 유학을 간 박모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며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작품에 ‘쌀’, ‘드럼통’, ‘밥솥’ 등의 소재를 사용해 가난한 나라에서 유학생으로서 부채의식과 책임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이소 작품목록
마리 관장도 작가의 노트를 열심히 읽고 있죠. 한글로 된 것을 읽지는 못해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이트 맵을 통해서 더 자세히 볼 수도 있다
번역자의 도움도 종종 필요한 것이다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가 뉴욕에서 서울로 올 때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데 아래 서랍장을 소중히 챙겼다고 한다. 그는 생존에 200여개의 재즈 테이프를 직접 편집하고 만들기도 했다. 노래 솜씨도 좋았던 모양이다. Honesty를 번역해 직접 부른 노래도 있다.
박이소는 재즈 광팬이었다 그 중에서 Honesty(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말, 더러운 세상에서 정직성이란 너무나 듣기 힘든 말)라는 노래를 너무 좋아해 번역을 해 부르기도 했다 박이소가 전설이 된 것을 바로 그의 정직성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작품의 결과보다 태도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순교자적으로 산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그의 융통성 없는 정직한 삶의 태도는 그의 죽음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죽었을 때 한 달이 지난 뒤에서 주검이 겨우 발견되어 간신히 땅에 묻힐 수 있었단다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개인전 소개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아카이브
박이소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그의 탈정치, 탈이념의 경지, 또는 탈의식화의 태도를 과거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비판적 성향의 이면으로 본다면, 그 안에는 아직도 변혁의 의지가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변방과 타자에 대한 이국주의적 관심과 자기를 주변화 시키는 내면적 오리엔탈리즘의 위험, 국제화를 위한 지역주의와 전통주의의 함정을 우려하며, 대서사보다는 소서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틈새에 주목한다. 정체성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을 내용화 하고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성을 주제화하는 그의 작업은 바로 동양적 개념의 여백, 파격, 비결정성과 상통하는 틈새의 미학에 연유하는 것이다.
박이소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2003 작고 1년 전
각목의 한 부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26개국 국가관과 국제관 건물모형이 새겨져 있다
"박이소의 작품은 허접한 물건과 속화된 언어를 외양으로 했지만 그런 것들의 힘을 빌려 합리성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의 인식에 즐거운 바람을 불어넣는다(강수미 해설)" 박이소 작품의 절정은 이렇게 "덜 만든 것 썰렁한 것이 좋다"와 같은 블랙유머에 있다
그는 홍익대 뉴욕 프랫 인스티큐드 정형적인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는 전혀 그런 제도교육적 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는 제도화된 규범을 파괴하는 성향을 보인다. 액자 없는 미술작품과 벽이 없는 미술관을 지향한 것 같다.
<시대착오적인데 가장 앞서는 작가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외전시 그가 뉴욕에서 귀국할 때 이 무거운 작품을 가지고 왔다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이 작품은 없어졌기에 다시 이번에 재현하다.
[참고]박이소는 중고시절 교련받기 싫어 중퇴를 하고 검정고시 시험을 보고 홍대에 진학했다 그의 체질을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박이소는 나보다 4년 아래이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세대다 나는 당시에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다 나같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학생은 그렇게 못하다
그의 작품 중에는 남북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작품도 있다. 그것이 바로 남북이 하나 되는 부적을 그린 그림이다.
작품 전시하는 도움을 주는 전문업체 직원들 어느 것이 작품이고 어느 것이 작품이 아닌지 구별하기 힘들다고 투덜거린다고 그럴만 하다.
박이소의 북두칠성(상단)
<오늘날 누가 미술을 결정하는가를 항상 묻는다 그는 무엇과 어떻게 보다 왜를 묻는 작가인지 모른다> 멀리 북두칠성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뭔지 설명을 듣지를 못하다 나는 정말 산만의 극치라 문제가 많다
"[...] 마지막으로 나는, 박이소의 미술이 자본의 스펙터클과 경제적 합리성이 매순간 첨단을 갱신해가는 20세기에서 21세기 한국 문화예술의 하늘에 난데없이 나타났던 별이라고, 우리가 헤아리지 못한 가운데 여전히 담담하게 떠 있는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 '북두팔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영철
박이소 작품 중에서 가장 Brooklyn적인 작품은 바로 이거다. 동성애가 나오지 않았지만 뉴욕 근처의 하급문화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마이너리티이고 오리엔탈이고 이그조틱이다. 그가 기획전은 역시 <이민전> 같은 사회적 소수자 가 주인공이 되는 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박이소는 숫자가 들어가는 작품 제목이 많은데 이것은 팔방미인도다. 그리고 한 평이라는 작품도 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1평은 사람이 혼자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만약에 20평이라고 하면 20명이 누울 수 있다는 의미로 한국인의 상상력에서 그 크기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수치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그는 한국작가로서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화인류학적인 접근방식이다.
이번 전시를 기회로 박이소 작품 전집 목록도 출간예정이다.
내가 박이소를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번역한 책을 읽고 그와 더 가까워졌다]
박이소는 <문화번역가>라는 별명도 붙어있다. 그는 번역가로도 큰 역할을 했는데 내가 읽어본 미술책 중 최고는 바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이다. 박이소 번역으로 나왔다. 그런데 사실 그는 현대작품 중에 근대성(작가 전지적 관점의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박이소는 그런 작품을 보고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했을 것 같다.
MIN JOONG ART A new cultural movement from Korea 1988 Artists Space 55 Walker Street New York NY 10013 September 29 – November 5, 1988
뉴욕에서 한국 민중미술전 열렸을 때 전시장 내부 모습. 그는 민중적이라기보다는 민중친화적이다
박이소는 80년대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민중미술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의 민중미술을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MIN JOONG ART A new cultural movement from Korea 1988 당시 민중은 한국문화의 주체성 내지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기호 같은 코드였다.
박이소 기획한 전시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1993)> Across the Pacific: Contemporary Korean Art and Korean American Art] Queens Museum launches Major Exhibit of Koreans Artists work
이런 미술행사를 통해 현대미술사의 이사(moving)시키다 미국미술과 한국미술의 상호교환하다. 그런 면에서 문화번역가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전시는 미국에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기획전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의 한국미술(1993)] 1993년 뉴욕 퀸즈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작가 12명(손장섭 김봉준 박불똥 이종구 김홍주 이수경 최정화 윤석남 김호식 김봉준, 최진욱 안규철 등등)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 24명(박이소 마이클 주 이건 김영 김형수 김진수 민영순 등등) 총 36명의 작품이 소개되는 전시다. 그러니까 한국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 조인트 전시인 셈인데 그런 발상 자체가 당시로는 독특했다 뉴욕전시 이영철 과 박이소 기획 당시 <1993년 10월 18일 세계일보 기사>
박이소가 쓴 '태평양을 건너서(2001.10.15-2004.1.9)' 2004년 4월 미술세계
박이소는 당시 지식인 중에서 드물게 인류학적인 관점을 보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문화정체성논의(Identity Polics)는 물론이고 문화접변이라는 인류학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다 상당히 많은 독서량을 가진 작가임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진가는 사실 그림보다 일반인들이 볼 때 그의 글쓰기에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90년대 박이소의 글을 읽을 때마다 60년대의 김수영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30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질적으로 비슷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식만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박이소는 이영철 평론가가 기획한 태평양을 건너서라는 리뷰를 썼다 이 글에서 당시 이 전시에 대해서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기사를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제한된 주제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대답이 놀랍도록 다양했으며 정치적으로 불리곤 하는 카테고리가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가를 제시했다(NY)" 박이소는 이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어쨌든 이 태평양을 건너서전은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의 방법에 있어서도 한국미술이 해외에 소개하는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전시였다 이번 전시는 94.8.23-9.23까지 서울에서 다시 열리게 된다"
이민전 등
상당히 많은 자료들이 이번 전시를 계기로 시각적 연대기는 물론 자료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다. 앞으로 도록이 나오고 <현실문화연구>에서 3권의 전집도 또한 나온다고 한다.
박이소가 뉴욕에서 서울로 올 때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는데 아래 서랍장을 소중히 챙겼다고 한다. 그는 생존에 200여개의 재즈 테이프를 직접 편집하고 만들기도 했다. 노래 솜씨도 좋았던 모양이다. Honesty를 번역해 직접 부른 노래도 있다.
<오늘날 누가 미술을 결정하는가를 항상 묻는다. 그는 무엇과 어떻게 보다 왜를 묻는 작가인지 모른다> 멀리 북두칠성이 보인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뭔지 설명을 듣지를 못하다 나는 정말 산만의 극치라 문제가 많다.
<그의 작품은 가끔 무의식적인 암호 해득을 요구한다>
박이소 오브제작품
[박이소추모글] 미술가 '박모'의 쓸쓸한 죽음 [2004.06.17] - 한겨레 노형석 기자
박이소(본명 박철호) 1990년대 '박모'란 필명으로 국내 미술판에 구미 포스트모던 예술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했으며, 요사이 청년 작가들에게 개념미술 열풍을 몰고 온 비주류 스타작가의 이름이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출품하며 입지를 다진 듯했던 그가 지난 4월26일 새벽 심장마비로 외롭게 숨졌다는 사실이 한달여 지난 주말에야 전해진 것이다. 46살에 맞은 작가의 죽음은 다분히 극적이다. 유족들의 말을 들어보면 고인은 서울 청담동 누나 집 2층 작업실에서 평소 좋아하던 재즈 음반과 포도주 병이 놓인 탁자 옆 소파에 잠자듯 앉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주검은 화장했으나, 유골은 장지를 구하지 못해 지난 6월2일에야 경기도 파주시 기독교 묘지 안 가족묘에 안장됐다. 고인이 평소 유족들에게 미술계쪽 얘기를 하지 않아 컴퓨터 메일을 정리하다 뒤늦게 미술인들의 주소를 보고 연락했다는 저간의 사정이 미술판을 우울하게 했다. 비보를 접한 동료 작가와 기획자들은 6일 낮 파주 기독교 공원묘지에 있는 고인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우는 추모식으로 예의를 차렸다. 추모식에는 작가 안규철·김범씨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구호처럼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순적인 반응을 통해 사회의 지평을 넓히는 그의 미술세계는 이후 세대에게 영향을 주면서 한국현대미술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물을 들인다.
우리는 행복해요 정말 행복한 사람은 이런 표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박이소의 대표작 우리는 행복해요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사후 2004년 부산 비엔날레 미국 LACMA 미국 휴스턴 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작가가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그는 작가라고 할 수 없겠지요. 이 작품은 북한에서 쓰는 선전가(Propagander)를 역으로 활용해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를 묻고 있는지 모른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입구
작가 박이소 Bahc Yiso(1957-2004) 소개 -미술관자료
박이소(1957~2004)의 활동은 미국 유학길에 오른 1982년과 1995년 귀국 시점을 기준으로 뉴욕 시기와 서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후 작가는 ‘박모’라는 이름으로 작품 활동과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특히 브루클린 지역에서 실험적 대안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한 후 뉴욕 미술계에서 소외된 이민자,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젊은 리더로서 주목 받았다. 또한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미국 미술계의 최신동향과 이론적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민중미술》(1988), 《태평양을 건너서》(1993-1994) 등 한국미술을 뉴욕에 소개하는 주요 전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이소 작품
1995년 신설된 SADI(삼성디자인교육원)의 교수직을 맡아 귀국한 후에는 ‘박이소’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후 새로운 방식의 미술교육을 정립하고자 애쓰는 한편 활발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광주비엔날레》(1997), 《타이베이 비엔날레》(1998), 《도시와 영상-의식주》(1998), 《요코하마 트리엔날레》(2001) 등 국내외 주요 미술전시에 참여하였고 2002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초대받는 등 국내외 미술계에서 활약하던 중 2004년 돌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면서 큰 슬픔과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사후 2006년 로댕 갤러리의 회고전 이래 2011년과 2014년도에 아트선재에서 전시가 열렸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이다.
박이소 작품 무제(뒤돌아보지 말라)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깨우치기 위해"
특히 1980년대 이후 순수미술과 참여미술 진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국내 미술계의 상황에서 박이소가 선보인 경계의 미술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무심한 듯 거리를 두면서도 미묘한 지점에서 강렬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두드러져 보일 정도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 본질적인 차이는 질문의 차이일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 “어떻게 무엇을” 그릴 것인가의 질문으로부터 애초에 “왜” 그리는가의 질문으로 초점을 옮겨간 것이다. 작품 활동과 함께 작가 박이소가 보여준 다양한 활동들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고자 노력한 궤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박이소가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의 미술세계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 궤적이 조금이라도 더 뚜렷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본명 박철호(Park Chul-ho), 미국에서 박모(Bahc Mo)로 활동, 이후 한국에서 박이소(Bahc Yiso)로 개명. 1957 6월 23일 부산출생 2004 4월 26일 청담동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박이소 는 민중미술에서 흔히 나오는 밥 사상을 이런 밥통으로 그리다
[학력] 1985 프랫 인스티튜트 회화과 졸업(Pratt Institute New York - M.F.A. in Painting) 1981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Hong-ik University, Korea - B.F.A. in Painting)
[개인전(Solo Exhibitions)] 2014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11 《박이소-개념의 여정》, 아트선재센터, 서울, 한국 2006 《탈속의 코메디》, 로댕 갤러리, 서울, 한국
2005 《팔라야바다 박이소 추모전》, UC 어바인 대학 아트 갤러리, 캘리포니아 2002 《박이소 개인전》, 갤러리현대, 서울, 한국 2001 《박이소 개인전》, 대안공간 풀, 서울, 한국 2000 《New Works: 00.3》, 아트페이스(ArtPace), 샌 안토니오, 텍사스, 미국 1995 《박모(Mo Bahc) 개인전》, 금호미술관 & 샘터화랑, 서울, 한국 1990 《미국말하기(Speak American)》, 브롱스 미술관(Bronx Museum of Art), 뉴욕, 미국
[2011년 설문4] 2000년 이후 작고한 미술인 중 한국미술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 여기서 미술가, 화상, 이론가, 컬렉터, 행정가 등 모두 포함 -김달진 연구소
2011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박이소 드로잉전 작품과 그의 사진. 그는 당신 문화번역가로 당대 후배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으나 말년에 단식 포퍼먼스 등 기행으로 46세에 운명했다 ⓒ 아트선재센터
이 설문에는 1위 백남준(미술가:45명), 2위 이경성(평론가:36명), 3위 박이소(미술가:23명), 4위 김창실(화상:20명), 5위 이원일(큐레이터:8명) 등이다. 백남준(1932-2006)과 박이소(1957-2004)는 미술가로는 최고작가로소개되었다.
폭염 속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그 초록빛이 장엄(splendid)하다
[박이소가 남긴 말] -미술을 고상하고 심각한 메시지 전달로만 보려 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자고 하는 짓으로 또는 시각적인 농담을도 볼 수 있음을 감안해 주면 좋겠다 -박이소는 작품을 보다 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풍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인간이 가장 고귀해지는 순간이 고차원의 유머를 구사하고 이해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유머가 우스갯소리나 단어의 조합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듯 합니다 가만히 있는 물건이나 미술작품도 시각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웃길 수 있다는 것을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관객이 내 작품을 명료하게 이해해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뒤죽박죽인 느낌과 애증의 양면성, 주저함이나 일관성 없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국 후 박이소는 한국사회의 날림성과 기저가 없는 문화적 배경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열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중단하지 않았다
-정직성은 터무니없이 중요한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래 정직성 어니스트 좋아한다. 정직성 정말 외로운 말 더러운 세상에서 너무 듣기 힘든 말이다 -백수건달이면서 숨쉬기 놀이 집보기 놀리 배추벌레 놀이하면서 미술을 취미활동으로 하고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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