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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자-사상가

[발터 벤야민] 시인 철학자 비평가 번역가 저널리스트

Walter Benjamin(1892-1940) 그는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영감 받은 것 같다. 그의 모습 언제나 문학청년 같다. 그의 미적 예민성은 보들레르 못지 않다. 그는 기존의 서구미학체계를 전복시키다. 복제의 미학과 고급예술에서 대중의 역할이 큼을 일깨워주다. 그런 면에서 아도르노와 반대 입장이었다. 그는 대중아트의 가치를 인정하다. 그렇게 해서 20세기 문화민주화에 기여하다. 미국 자본주의 폭력에 의해 생성된 트라우마에 대한 해독제로서 탁월한 현대 및 민주주의 예술을 생각한다 <아래사진> 파리 망명 시절 파리 국립도서관 문서고를 드나들며 ‘아케이드 작업’ 집필에 매진하는 모습 <작성중>

파리 망명 시절 파리 국립도서관 문서고를 드나들며 ‘아케이드 작업’ 집필에 매진하는 모습 

발터 벤야민(1892-1940): 번역가, 시인, 저널리스트, 철학자, 예술 평론가: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장르 사이를 탐색한다. 평생 동안 그는 모더니티를 특징 짓는 기술적, 미학적, 정치적 격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892년 베를린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벤자민은 청년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부르주아적 배경을 깨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과 스위스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하고 그곳에서 주요 예술가들(릴케, 피카비아)을 만나 보들레르 번역을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는 번역을 계속하면서 후자에 대한 에세이를 썼는데, 이는 그가 평생 추구했던 활동이자 번역가의 임무(1923) 에서 이론화하다 .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인 그는 블로크 Ernst Bloch, 루카스 Georg Lukács, 아도르노 Theodor Adorno 또는 브레히트 Bertolt Brecht와 같은 많은 지식인들과 친구가 되었고 일련의 시적 격언(Einbahnstraße , 이는 독특함 을 의미함, 1928)을 출판했다. 1929년의 위기와 독일의 반유대주의의 부상에 직면하여 그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자서전을 시작했다(1900년 경 베를린에서 어린 시절 Enfance berlinoise). 그곳에서 그는 젊었을 때 시작하여 사후에 출판한 파리에 대한 걸작(아케이트 Le Livre des passages)을 마쳤다.

1930년대에는그를 필수 철학자로 만든 예술사에 관한 두 개의 주요 텍스트가 나타났다: 사진의 작은 역사(1931),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제 가능 당시의 예술작품 (1936). 그에게 있어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작품은 대중을 위한 것("전시 가치")이 되기 전에 먼저 마법의 기능("컬트 가치")을 가졌다 . 이 두 단계는 작업이 거의 신성한 차원을 취하는 고전 예술에서 부분적으로 겹친다. 후자는 그가 아우라(aura)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이 공식은 예술 작품의 "지금 여기"의 존재와 그 독특함과 진정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나타낸다. 사진과 영화, XX의 전환기에 나타난 한 세기, 예술 창조 산업의 생식 과정을 도입했다. 사진이나 영화를 제작할 때 기술이 인간의 몸짓보다 우선할 뿐만 아니라 후자는 대량으로 재생산될 수 있다"라고 보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사물의 권위라고 그는 지적했다.

그러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 아우라 의 힘이었던 이 "실재적 존재"는 그 자체가 사회적, 정치적 구성(종교적 숭배)의 결과였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이 새로운 유형의 표현은 새로운 시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는 영화, 특히 미국 자본주의 폭력에 의해 생성된 트라우마에 대한 해독제로서 탁월한 현대 및 민주주의 예술을 생각한다.

1939년 무국적 난민이었던 그는 프랑스의 지식인 친구들에 의해 추방에서 두 번이나 구출되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작품(역사 개념에 대한 노트)을 썼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와 야만에 관한 매우 아름다운 페이지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스페인으로 도망칠 생각으로 파리를 떠난다. 그러나 그는 포르부 국경을 넘을 때 스페인 당국이 그를 게슈타포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다. https://www.philomag.com/philosophes/walter-benjamin...

Traducteur, poète, journaliste, philosophe, critique d’art : Walter Benjamin navigue entre les genres comme il a parcouru l’Europe. Toute sa vie, il a tenté de faire sens des bouleversements techniques, esthétiques et politiques qui ont marqué la modernité.

Né en 1892 à Berlin de parents juifs assimilés, Benjamin rompt avec son milieu bourgeois en s’engageant dans des mouvements de jeunesse. Pendant la Première Guerre mondiale, il étudie la philosophie et l’histoire de l’art en Allemagne et en Suisse, y rencontre des artistes de premier plan (Rilke, Picabia), et commence à traduire Baudelaire. Il écrit à Paris un essai sur ce dernier tout en continuant la traduction, activité qu’il poursuivra toute sa vie et qu’il théorisera dans La tâche du traducteur (1923).

Voyageur infatigable, il se lie d’amitié avec de nombreux intellectuels de l’entre-deux-guerres comme Ernst Bloch, Georg Lukács, Theodor Adorno ou Bertolt Brecht et publie un ensemble d’aphorismes poétiques (Einbahnstraße, qui signifie « rue à sens unique », 1928). Face à la crise de 1929 et à la montée de l’antisémitisme en Allemagne, il s’installe en France et entame son autobiographie (Enfance berlinoise vers 1900). Il y termine un ouvrage magistral sur Paris (Le Livre des passages), commencé dans sa jeunesse et publié après sa mort.

Dans les années 1930, paraissent deux textes majeurs consacrés à l’histoire de l’art qui feront de Benjamin un philosophe incontournable : Petit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1931), et surtout L’œuvre d’art à l’époque de sa reproductibilité technique (1936). Pour Benjamin, au fil de l’histoire humaine, les œuvres auraient d’abord eu une fonction magique (« valeur cultuelle ») avant même d’être destinées à un public (« valeur d’exposition »). Ces deux phases se superposent en partie dans l’art classique, où l’œuvre revêt une dimension quasi-sacrée. Cette dernière correspond à ce que Walter Benjamin appelle l’aura, « l’unique apparition d’un lointain, quelle que soit sa proximité ». Cette formule renvoie à la présence « ici et maintenant » d’une œuvre d’art et à l’expérience que nous faisons de son caractère unique et authentique. La photographie puis le cinéma, apparus au tournant du XXe siècle, ébranlent cette aura, en introduisant le processus de reproduction industrielle dans la création artistique. Non seulement la technique prime sur le geste humain dans la production de photos ou de films, mais ces derniers sont reproductibles en masse. « Ce qui est ainsi ébranlé, c’est l’autorité de la chose », constate-t-il.

Mais loin d’être nostalgique, Benjamin souligne que cette « présence réelle » qui faisait la force de l’aura était elle-même le résultat d’une construction sociale et politique (le culte religieux), qui éloignait le public des œuvres d’art et le maintenait dans l’ignorance. Pour Benjamin, ce nouveau type d’expression correspond à une nouvelle époque. Il conçoit ainsi le cinéma, art moderne et démocratique par excellence, comme un antidote aux traumatismes engendrés par la violence du capitalisme, en particulier aux États-Unis.

En 1939, réfugié apatride, il est sauvé à deux reprises de la déportation par ses amis intellectuels français. Il rédige son dernier ouvrage (Notes sur le concept d’histoire), dans lequel on trouve de très belles pages sur la culture et la barbarie. Il quitte Paris avec l’intention de fuir en Espagne. Mais alors qu’il va franchir la frontière à Portbou, pensant que les autorités espagnoles vont le livrer à la Gestapo, il décide de mettre fin à ses jours.

[발터 벤야민과 백남준] 대중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현재가 유토피아다(Jetzt ist: Utopia. Das ist Wichtig). 나의 유토피아는 -1000% 사는 것" -백남준. 어떻게 -1000 무소유자로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무소유라고 해서 인간의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마저 소유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오직 현재의 순간을 즐기며 사는 것이 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고나 과거를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것이 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과거를 소유하지 않는 것 미래를 소유하지 않는 것 오직 현재에 <존재>하며 사는 것이 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여기서 백남준 사르트르(Sartre)의 말을 인용하다.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무소유) 나는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려고 할 때(소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I am always what I am not and I am not, always what I am)" -J.P. Sar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