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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30세기

[백남준] 미 워싱턴 한 재단에서 출판될 '백남준론'

새로움과 탈경계의 예술적 이룸을 살다!
비디오아티스트 & 전위예술의 선지자 백남준| Nam June Paik(1932~2006) 론

이 글은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 아카데미 재단에서 기획한 <한국인 20인> 중 예술분야에서 백남준이 선정되어 다시 영문버전으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박현옥교수(청운대학교 학장)

소년시절 뼛속까지 예술적 자유로움을 갈망하다 -박현옥교수

< 앞마당 피아노 건반에 몸을 맡기고 >

백남준은 1932720, 일제강점기 격변의 세월에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섬유업을 운영하는 아버지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 사이에서 32녀 중 막내로 요즘 말로 금수저인거죠. 그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어려운 시기였고 많은 교육적 제약과 시대적으로 원하는 것을 다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고급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집에 피아노가 있고 피아노 레슨을 받는 큰누나 백희득과 달리 백남준의 아버지는 그를 사업가로 키우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아노 소리가 너무나 좋았고 그 리듬을 온몸으로 느끼는 그런 악동이었다. 큰누나가 사사를 받는 그 모습, 그 소리를 기억하면서 피아노를 칠 수는 없으니까 앞마당에 피아노 건반을 그리고 그것을 나름대로 연주하고 지휘하고 흥얼거렸다. 본인이 듣고 기억하고 있는 피아노의 음을 이미지화하여 나타내었으니 이미 퍼포먼스가 가미된 경험이었다고 볼 수 있네요. 그러니 본인이 지휘자이기도 하고 연주자이기도 하고 성악가이기도 한 것이죠. 이러한 경험들이 생각한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생각의 뿌리를 형성하였다. 아마도 하고 싶은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는 그만의 스타일을 갖는 원동력이 된 것이죠.

< 당대 최고의 음악스승을 만나다 >

1945년 해방이 되는 해, 그는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당시 음악 선생님이자 누나의 친구인 신재덕(1917-1989)을 만나서 피아노와 성악에 대한 기초적 지식을 배웠으며, 월북 음악가 이건우(1919-1982)를 만나게 되어 작곡을 사사받았으며 새로운 음악에 대하여 공부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건우 선생님을 통해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인 아널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1951)의 음악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전통 고전음악을 공부하면서 무엇인가 틀에 박힌 듯한 질서정연함에 싫증이 났던 백남준은 새로운 기법의 현대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뛸 듯이 행복했다. 무엇인가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맛보았다. 태생적으로 그가 지닌 한국인의 해학과 흥이라는 DNA와 그 당시 일제강점기의 숨 막힌 생활행태들 속에서 뻥 뚫리는 탈출구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전위적 예술가로, 플럭서스의 창립 단원으로, 나아가 새로운 비디오아트의 세계를 열게 되는 선구자적 작품의 단초가 되었다.

남다른 배움의 항해를 하다(홍콩에서 일본 그리고 독일까지)

< 홍콩 로이덴 학교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다 >

194911월 백남준이 18세 때 백남준의 아버지는 똑똑한 막내아들을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는 유능한 사업가로 만들기 위해 해외 출장에 동행하였다. 그가 첫 번째로 해외를 간 나라는 홍콩으로 통역을 담당하였는데 업무를 마치고 아버지는 그와 함께 귀국하지 않고 영국계 학교인 로이덴 학교(Royden School)에 입학을 시켰다. 아버지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군정을 통해 해방을 맞이하면서 세계적인 흐름을 읽고 세계적인 사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영어를 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홍콩에서의 6개월은 짧은 시간이지만 언어능력이 뛰어난 그가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19506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백남준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이어 백남준도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일본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의 주택과 생활양식 그리고 문화를 익히게 되었다. 1954년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예술가가 되기 위한 길을 선택하여 경영학 대신에 미학을 선택하였고 음악과 작곡도 공부하게 되었다.

< 일본 동경대학에서 아널드 쇤베르크를 연구하다 >

쇤베르크에 대한 졸업논문을 쓴 백남준은 그가 서양인이지만 동양사상을 이해하고 음악적 사고와 표현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큰 감동이었다. 백남준은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인 철학자 이당(怡堂) 안병욱(1920-2013)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도 배웠으며 혼돈과 아픔의 시기에 지식인의 저항정신으로 마르크스사상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채 가시기 전 전쟁이라고 하는 참혹한 상황을 보면서 사회주의적 평등이 지구상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지긴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나라를 잃어버리고 전쟁도 겪고 여러 나라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세계의 여러 곳에서 전시하고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민족의 생활양식과 정신세계 그리고 삶의 공간은 그에게는 새로운 사고와 표현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본 유학은 백남준에겐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 속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때 그 속에서 기회를 만나는 것입니다. 노무라 요시오 음악 선생님은 이국 생활의 아픔과 차별 속에서 힘들어하는 백남준에게 사랑을 주셨다.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듯이 국적이 달라도 진정한 스승은 학생의 가치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백남준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어떤 세상을 갈구하는지를 알아본 것이죠. 모두가 편견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음악 세계를 추구하는 그에게 존 케이지(Jhon Cage 1912-1992) 라는 전위음악가를 소개해주었다. 현재가 평등하지 않고 차별적 상황이니까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은 전위예술과 존 케이지를 만나러 1956년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University of Munich)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대학에서 한 해 동안 트라시불루스 조지아데스(Thrasybulos Georgiades)에게 음악사를 배우게 됩니다.

< 독일에서 스토크하우젠과 그의 스승 존 케이지를 만나다 >

독일 뮌헨대학에서 시작한 음악 공부는 일본에서의 공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전형적인 수업이었다. 1957년 백남준은 이곳에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 세계를 모두 담아낼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다름슈타트로 가서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하여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을 만났으며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Conservatory of Music)에 입학하여 볼프강 포르터너(Wolfgang fortner)에 작곡을 배우게 됩니다. 1958년에 드디어 다름슈타트 하기 세미나에서 신음악 과목을 맡았던 존 케이지를 만나게 됩니다. 존 케이지의 연주는 백남준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는 무척 떨렸고 동서양 사상의 융합을 보여준다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기대로 흥분하였다. 그가 만난 최초의 유럽, 독일에서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이 아니라 뉴모드와 뉴패션으로 어떤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고, 사람의 움직임도 역시 음악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아무 소리가 없는 것도 역시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이죠. 그는 다시 쾰른으로 이사하였고 쾰른대학(University of Cologne)에 입학하였으며 서독일 라디오 방송의 전자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전자음악을 공부하였다. 이곳은 음향 제너레이터로 합성음향을 만들 수 있었으며 이 합성음향은 테이프에 저장이 가능하므로 백남준은 한국의 시와 물소리, 아기가 말을 더듬는 소리 그리고 클래식 음악을 콜라주하여 비디오테이프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였다.

행위 음악의 새로운 선, 넘어서다

< 진정한 쾌락과 환희의 의미를 인식하다 >

백남준이 진정 전달하고자 했던 예술은 그리스 시대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의 정원에서 그 맥이 연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어떤 욕망에 대한 욕망도 갖지 않는 그것이 진정한 쾌락이라고 보았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실천하지는 못하여 그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의 빵과 한 잔의 물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얘기하는 소확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의 소중함과 보편적 행복의 추구로 볼 수 있다. 어떤 특수한 계층과 정해진 규범의 음악 세계가 아닌 다면체이기도 하고 개개인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으며 미에 대한 기준도 다를 수 있는 아방가르드적 생각과 표현을 인정하고자 하는 그런 사고방식으로 보인다. 그래서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전통적인 공간에서의 클래식 공연을 넘어서 인체를 포함한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행위, 새로운 소리를 총집합하여 관객을 깨우는 것입니다. 또한 비디오아트는 점차 버려지는 물질인 CD, 비디오테이프나 텔레비전 모니터에 영상과 움직임의 전자기술을 이식하여 예술과 과학 그리고 기술을 접목하고 있다. 이는 지구생태계를 생각하고 경험을 시간을 재생시키고 조형화하여 예술작품으로 남도록 하는 상술로서의 예술이지만 텔레비전이 캔버스가 되는 놀라운 기적을 낳는다. 인공위성과 레이저아트는 여러 나라와 물리적 거리를 넘어 그 간격을 잇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것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엮어내어 불멸의 예술적 가교를 탄생시켰다. 이것이 백남준이 주고자 하였고 추구하였던 진정한 예술적 의도이다. 이토록 백남준은 한국과 일본, 독일과 미국을 넘나드는 동서양의 문화 인식과 경험을 토대로 그의 남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정과 철저한 음악 공부와 공학 기술이 접목하여 거대한 21세게 인류 예술의 융합적 이룸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 생애 최초의 공연, 대 스승 케이지를 경외하며 케이지를 넘어서다 >

1959년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초로 존 케이지를 경외하는 공연을 하게된다. 제목은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외: 테이프 리코더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Homage to John Cage: Music for Tape Recorder and Piano>이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에 푹 빠지게 되었고 전위음악의 세계를 공부하게 되었으며 케이지를 위한 최초의 퍼포먼스(performance 행위, 실행으로 실제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예술에 있어서 조각이나 그림 등의 완성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행위로 전달하는 것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높일 수 있음) 형태로 공연을 개최하였다. 미리 준비한 테이프 리코더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5, 독일 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다양한 일상생활 속 소리가 나오면서 전형적인 음악 도구인 피아노를 손으로 연주해야 하는데 머리로 내려치기도 하고 깡통을 발로 차기도 하는 등 존 케이지에게서 받은 영감을 상상 그 이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악기가 가진 놀라운 파괴력으로 공격하는 행위 음악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존 케이지의 공연이 음악에 있어서 소리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라면, 백남준은 전통음악과 전통적인 공연을 뛰어넘는 그런 시도였다. 이 공연을 통하여 백남준은 그의 스승을 기리며 스승을 뛰어넘는 새로운 장을 펼친 것입니다.

1년 뒤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에서는 관객에게 샴푸를 붓고 대 스승인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르는 등 더 과감한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리고 한참 뒤 전화를 걸어 공연이 끝났다고 알린다. 뭔가요? 새로운 시선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이토록 전위예술가 백남준은 이전과 전혀 다른 공연으로 관객에게 색다른 흥분의 고통에 빠지게도 하고 이 시간을 통해 공연을 보러 올 때 가졌던 기대를 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도 해주는 그런 기인(伎人)이기도 합니다. 격렬하고 파괴적인 행동과 파격적인 행동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보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세상의 인간이 만든 모든 행태에 대한 반란적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시절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음악가의 도구이고 또한 많은 평민이 갖지 못한 소중한 창조적 인공물이다. 단지 클래식 음악에 대한 반기일까? 더 큰 약육강식의 세상, 뺏기고 아팠던 시절의 내재화된 아픔을 그리 표현한 것은 아닐까?

<플럭서스 운동에 창단 멤버로 참여하다>

플럭서스는 1960~70년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으로, 1962년 독일 헤센주()의 비스바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플럭서스-국제 페스티벌, 신음악(Fluxus International Festival, New Music)’에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인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가 초청장에 쓰면서 알려졌다. 플럭서스는 변화, 흐름, 움직임이라는 뜻으로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즉 변화의 바람을 일컫는 것으로 이전과는 다름을 표방하고 있는 새로운 운동인 것입니다. 이 초청장에는 플럭서스는 그 당시 유행했던 아메리칸 스타일과 유러피언 스타일에 대항하는 예술 형태로 시작된 것을 밝히고 있다. 토마스 쉬미트(Thomas Schmit)플럭서스(Fluxus) 운동은 백남준에서 조지 브레흐트(George Brecht), 아디 로커(Addi Krocke), 에메트 윌리엄스(Emmett Williams), 딕 히긴스(Dick Higgins), 알리슨 놀스(Alison Knowles), 오노 요코(Yoko Ono), 조 존스(Joe Jones), 벤 보티에(Ben Vautier), 로버트 필리우(Robert Filliou), 다니엘 스포에리(Daniel Spoerri),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퍼 키르케비(Per Kirkeby)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일상을 기반으로 활동한 전위예술의 보고이며 모음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백남준이 만난 기억과 사람들

< 어린 시절 눈 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실 >

백남준 그를 생각하면 무지개가 떠오른다. 아마도 어린 시절 형형색색의 실로 섬유를 짜던 그의 가업인 공장에서 펼쳐진 화면이 영감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1932년생 조선의 백성들은 하얀색의 옷을 주로 입었으며 결혼식이나 설빔으로 색동옷을 입었다. 아마도 평민의 집에서는 그리 많은 색상이 있는 실과 직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색과 다양한 영상들은 개개인의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색이 2만 가지가 넘는다고 하는데 실들이 직물로 짜여지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교집합을 보았을 테지요. 그 색색의 실은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에서 색색의 전깃줄로 이어진다. 아무도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컬러풀한 다채로움이 그의 작품과 표현방식에 기억으로 녹아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백남준 자체가 다면적 사고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를 공부하다 보면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하고 풀어내고 있다.

<나의 이야기> 박현옥 교수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어려서 백남준 아버지 사업과 관련성이 있다고 재해석한다. 흥미롭다. 백남준 어린 시절 그의 부친 공장(백남준 부친 백낙승은 1920년대부터 1300대의 방적기를 갖추고 사업을 하다 아래 사진)에서 섬유를 짤 때 형형색색으로 펼쳐지는 색채감이 백남준의 아트에 영감을 줬다고 본다. 예컨대 색동의 판타지가 그런 것이다. 사실 나의 아버지도 섬유공학과 관련이 있다. 독일에서 가장 큰 화학회사인 BASF와 스위스에서 가장 큰 화학회사인 CIBA에서 염색기술 연수를 받았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전문적인 염색기술자였다. 좀 과장해서 표현해 보면 그런 면에서 나의 무의식과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백낙승은 1920년대부터 1300대의 방적기를 갖추고 사업을 하다

< 샤머니즘, 굿판의 기억과 꿈의 흐름 >

샤머니즘은 백남준이 추구하는 소통과 참여의 예술에 영감을 주는 동시에 디아스포라 예술인 백남준의 뿌리 의식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한국인으로서의 뿌리 의식을 지니고 있는 백남준은 담뱃대, 요강, 장독, , 고인돌, 거북이 등 다양한 한국 전통 관련 오브제를 그의 작품에 활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한국인을 넘어 시베리언 몽골리언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로, 이산(離散) 또는 파종(播種)을 의미한다. 본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본국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면서 혼돈적 사상과 현상 속 그는 진정 새로운 예술로서 그 시대 맞서고 세계적 공존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 맥시멀리즘과 미니멀리즘 >

백남준을 생각해보면 가법혼색과 감법혼색으로 양면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광학에서 빨강, 노랑, 파랑이 조합되면 하얀색으로 나타나듯이 그의 삶과 생각과 행동을 가법혼색으로 엮어보면 하얀색과 물의 색처럼 맑고 깨끗한 열정이 보인다. 또 하나는 이 세 가지 색을 물감으로 혼합하면 블랙이 되듯이 그가 만든 작품들은 그 속에 사상이 녹아있으며 창의적 정크 아트와 최첨단 기술 융합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 고상하고 품격있는 블랙스톤처럼 기억된다. 아마도 이렇게 백남준을 이해한다면 한 축은 더하면서 국가의 경계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해 낸 평화주의자와 세계주의자 모습이 보인다. 또 한 축은 비우면서 살펴보면 타자에 대한 배려, 대중에 대한 자신을 인식하라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는 아뮤직(a-music), 최종적 개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신적 존재가치를 찾아내라는 메시지를 던진 예술적 선지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 백남준의 전자기술 첫 번째 의사 슈야 아베 >

슈야 아베는 일본인으로 1963년부터 1970년 초반까지 백남준 작품의 엔지니어로서 함께한 사람이다. 그는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년 이후), 텔레비전 실험과 로봇 작품에 기술을 제공한 백남준 작품의 전자의사이다. 첫 인연은 일본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당시(1963) 백남준은 로봇을 만들고 싶어 하였고 아르바이트생 사이토 규타오와 함께 반년 만에 만들었으나 그 기능이 잘 작동되지 않아 아베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내구성을 높이기 위하여 로봇에 사용된 톱니바퀴를 좋은 것으로 교체하거나 뼈대의 강도를 높이고 배선을 정리하고 손과 다리의 동작이 가능하도록 베어링을 설치하는 기술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백남준은 아베를 자신의 작품에 가장 위대한 의사라고 하였다. 사실 이러한 조력자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이고 의도라고 하더라도 실현되기에 무척 까다롭고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복합매체를 사용하고 다양한 기술을 사용한 TV 부처나 덕수궁, 텔레비전 정원과 같은 종합선물세트를 한 예술가가 혼자의 힘으로 작업하기란 너무 어렵다. 이래서 인연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생각만큼 알아주거나 때론 그 이상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실현시키는 데 함께할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진정한 필연인 것이다.

아베와의 두 번째 작업은 6년 후 1969년 비디오 신디사이저에서 이루어진다. 백남준은 이를 위한 개념도를 그려서 아베에게 보여주었으며 아베는 약 5개월 만에 이를 완성시킨다. -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미국에서 사용되었으나 사고가 났다. 이후 오디오 신디사이저는 계속 발전되어 전자악기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인연의 고리는 슈야 아베 이후에도 계속된다.

< 백남준의 전자기술 두 번째 의사 이정성 >

슈야 아베 이후 백남준의 전자의사는 바로 이정성이다. 이정성은 종로 세운상가 전기기술자로 1986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103일 개천절날 개관되는 것을 기념하고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 텔레비전 브라운관 1,003개를 타워형으로 쌓아 올려 다다익선의 엔지니어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후 20여년 간 백남준과 함께 작업을 하였다. 그는 미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이미지 세계: 예술과 미디어 문화), 스위스 취리히(백남준 회고전), 독일 쾰른(브란덴부르크 게이트),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독일관), 한국(광주 비엔날레), 스페인 빌바오 미술관 등에 이르기까지 TV 모니터와 분배기를 이용하여 다양한 백남준의 작품을 설치하였다.

이정성이 엔지니어로 백남준을 만난 것은 그동안 하던 일에 새로운 컨텐츠와 새로운 작업을 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우주를 꿈꾸고 늘 새로운 것을 이루고자 했던 위인을 만나 백남준의 머리를 공유하고 그 마음을 읽으며 그가 가진 기술과 에너지 그리고 노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낸 것이다. 이렇듯 인생에 있어서는 어떤 귀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인연은 준비하고 있는 자만이 잡는 것이다. 우린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이 백남준의 큰 매력이다. 그가 만난 사람을 자기만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 사람으로 당신의 가치와 생각을 이해시키고 공유하며 타인이 자기보다 더 자신의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끌어내는 힘! 그것이 바로 20년 이상을 그의 작업을 위해서는 지구의 반 바퀴도 주저함 없이 달려가고 낮과 밤을 그 일에 몰두하며 지금도 백남준을 생각하면 너무나 기꺼이 행복하게 그 작업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분 한 사람 있다면 행복하게 이 세상에서 잘 살다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 소호에서 세상을 향해 비디오아트의 본격적 작품세계를 구현하다

<평생의 반려자, 동반자 시게코와 부부의 연을 맺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초청을 받게 된다. 독일에서의 플럭서스 활동과 성공적인 퍼포먼스 공연 덕분에 일본의 전위예술의 중심지인 소게츠(草月) 미술관 측의 공연 요청을 받았다. 그는 피아노를 머리로 치는 것을 넘어 연주하다가 부수기도 하고 머리카락으로 먹물을 묻혀 글씨를 써 내려가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이면서 예술의 동반자인 아내 구보타 시게코를 만나게 된다. 또한 <로봇K-456> 탄생을 함께 한 전자기술자인 쉬야 아베도 만나게 된다. 그는 197732146세 때 구보타 시게코와 결혼을 하였으며 20061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부부로서 30여 년을 함께 보냈다. 구보타 시게코와는 일본에서 만나 연인으로 친구의 부인으로 다시 예술적 동반자로 여러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런 10년의 시간을 거쳐 진정한 자신의 배필로 예술조형의 조언자로 부부의 연을 맺는다. 결혼 이후 뉴욕과 독일 그리고 마이애미까지 그와 가장 가까이서 함게한 사람이다.

< 비디오아트의 새 장르를 개척하다 >

백남준은 미국의 전위음악가이자 첼리스트인 샬롯 무어만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의 공연을 마친 후 <로봇K-456>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가게 된다. 미국에서의 샬롯 무어맨과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때 첫선을 보였던 <로봇K-456>은 고물 텔레비전과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만들어졌는데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하고 흉내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 로봇은 훗날 1980년 박영덕 화랑 앞에서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이벤트를 하게 됩니다. <로봇K-456>의 죽음은 새로운 탄생과 영원하지 않은 물성의 세계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겠지요. 이후 백남준은 1986년 로봇가족, 1995년 라이트 형제 등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광주비엔날레(1995)에서는 <-아베 비디오 합성기>, <마차> 등도 전자부품을 이용하여 선보였다. 샬롯 무어만과은 인연은 계속되어 이후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협연을 통하여 음악과 인체의 결합이라는 신체음악이라는 새 쟝르를 개척하였다.

<인공위성으로 우주 오페라를 시작하다-굿모닝 미스터 오웰>

신기술 신제품과 음악과 예술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에 늘 관심이 많았던 백남준은 1960년대 초반에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샌프란시스코와 상하이에서 동시에 연주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를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드디어 1984년에 인공위성을 이용한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성공시켰습니다.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존 케이지가 선인장을 두드리며 연주를 하자 머스 커닝엄이 춤을 추고 파리의 스튜디오에서는 그의 절친인 요셉 보이스와 샬럿 무어만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첼로를 연주하였습니다. 이브 몽탕의 샹송도 울려 퍼지고 록 밴드의 공연과 패션쇼가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음악과 춤과 퍼포먼스,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이 서로 어우러져 비빔밥처럼 편집되고 재구성되어 인공위성을 통해 생중계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이 그의 작품 [1984]에서 묘사한 미래사회에 대한 예측이 불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49년에 발표된 [1984] 소설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국민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과 기계가 사람을 감시하고 고발하는 것으로 과학 기술이 현대 사회에 끼치는 인간의 기계화, 비인간화를 묘사하였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조지 오웰이 기계와 기술의 부정적 종말을 예측했다면 백남준은 이것을 잘 이용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알리며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하고 알게 되고 즐거움을 통해서 쾌락과 행복감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전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공연을 사람들은 ‘우주오페라’라고 불렀으며 이를 통하여 미국과 독일에서 상반되는 평가가 있긴 했지만,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그 명성을 더욱더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이 공연을 통해 백남준의 존재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공위성으로 우주 오페라를 시작하다-바이바이 키플링>

키플링(1865-1936)은 영국의 단편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노벨 문학상(1907)을 받았다. 그 당시 인도는 영국령으로 키플링은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났으며 제국주의자로서 영국의 인도에 대한 정책과 신념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르며 상호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키플링에 대하여 백남준은 생각을 달리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을 그의 동료인 살롯 무어만과 같이 하였다. 그래서 키플링의 생각을 반박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을 구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바이바이 키플링>입니다. 그가 생각한 두 번째 ‘우주오페라’로 동양을 나타내는 우리나라의 사물놀이패와 서양을 나타내는 미국의 타악기 그룹의 연주가 각각 다른 곳에서 진행하면서 동시에 중계하였다. 또한 뉴욕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한강변에서는 마라톤 경기를 중계하기도 하여 예술과 스포츠가 어우러짐을 보여주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위성을 통해 서로 악수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등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날 수 있으며 공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의 이념적·지역적 간격은 예술과 운동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비틀즈와 마이클 잭슨을 이어받아 지금 BTS가 미국의 빌보드 챠트에 연속 1위를 하고 있는 이런 날을 예상한 것이겠지요. 서양이 이룬 것을 동양이 할 수 있고 이미 동양이 창출한 대문명이 있었기에 서양이라는 대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그는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상생과 공존 그리고 소통과 진보의 역사의 순환성과 상호 보완성을 피력한 것이다.

< 다채로운 그의 작품의 베일을 벗기다 >

세상에 와서 한바탕 멋지게 노닐다 우리 곁을 떠난 백남준! 그의 삶의 궤적을 그려보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 있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의 삶은 평면이기도 하고 구형이기도 하고 순간이기도 하고 영원이기도 하다. 백남준에 대하여 그의 일대기를 쓴 책도 많고 그의 전시회를 최근부터 거꾸로 정리한 것도 있고 일본과 독일에서의 그의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표현양식 그리고 퍼포먼스를 다룬 것도 있고 그가 한국에 돌아온 후 오래전 유치원 친구인 이경희와의 만남에서 이별까지 나타낸 것도 있고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 그의 작품세계를 다룬 것도 있다. 그 외에도 종교적으로는 선 사상과 노자, 장자까지를 끌어내고 한국적 정서가 녹아있는 전통 굿과 고사 등 일상생활의 소환 그리고 본능적이고 우주적 소통을 불러오기도 하고 피카소와 앤디 워홀과 같은 시대의 파격적 예술가와 같이 다루기도 하였다. 수많은 지성과 연속되는 창의력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하이테크적 도구와 기술 그리고 장인들과 연계로 그의 작품세계는 다채로웠다. 백남준을 기계와 기술을 통해 일상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예술가, 해프닝과 비디오아트의 새로운 세계를 연 예술가, 과학과 예술의 접점에서 이루어진 디지털 아트의 선구자, 창조를 꿈꾸는 호랑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예술의 칭기즈칸(몽골제국의 제1대왕)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를 예술철학을 구현하고 초기 예술의 융합 미학을 실천한 사람으로 다루기도 하였다.

< 선행 도서를 통해 분석한 백남준의 작품세계 >

박현옥 교수가 분석한 백남준 출판 도서 분석

교보문고 홈페이지에서 백남준 이름으로 검색한 책이 33권 이었다. ISBN이 부여된 책이다. 이중 품절되었거나 구입할 수 없는 5권을 제외하고 28권의 단행본을 구하였다. 그 중 백남준의 작품을 분석한 2권의 책을 제외하고 26권의 책을 대상으로 소제목을 분석하고 년도별로 출간된 책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다음은 년도별로 정리한 것이다

신은 백남준(인간)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진 않았다. 그러나..어게인

< 머서가에서 쓰러지다 >

199649일 백남준은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뉴욕의 머서가 5층 아파트에서 구보타 시게코와 함께 식사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헐렁한 멜빵바지와 큰 주머니가 달린 와이셔츠를 즐겨 입던 그는 외모의 세련됨이나 육체적 안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또 그것을 공연하였을 때 관중들이 즐거워하는 그 상황을 무척 즐겼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지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소망과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작품을 진행합니다. 아마도 아픔을 통해서 더 많은 생각과 또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주와의 소통이라는 인연의 고리를 생각하였나 봅니다. ((()에 대한 생각으로 형상화된 사각형, 원형, 삼각형을 나타내면서 바닥과 천장 그리고 그 관계를 엮어내는 야곱의 사다리를 <동시변조: 감미로움과 숭고함, 야곱의 사다리>라는 주제로 작품을 만들었다.

< 아픔 속 대작이 탄생하다 - ··인을 엮어내다 >

2000년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로 연출된 <동시변조>에서는 천지인을 형상화하였다. 땅은 이전에 발표한 “TV 정원으로 50-100여 개의 사각형 텔레비전에 비디오 영상을 나오게 하여 바닥에 설치하였으며 구겐하임 미술관의 중앙에 나선형으로 뚫린 로비의 천장 돔에서 쉴 새 없이 변하는 여러 기하학적 형상을 레이저 빛으로 나타내어 하늘을 형상화하였다. 이는 달콤하고 숭고한제목으로 기획하였고, 수직으로는 인공폭포를 설치하여 물이 흘러내리는 가운데 거울을 설치하고 레이저 빛을 쏘아 올려 지그재그형의 계단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하였다. 이를 백남준은 야곱의 사다리라고 명명하였다. 야곱의 사다리는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나타내며 서양에서는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희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인간관계에서 자신과 타자를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보여지는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형태 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여러 개의 삼각형으로 형상화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봅니다. 우린 깊은 고통의 심연에서 창조주의 위대함과 내 삶의 여정에서 뜨거운 감동을 우주에 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바로 그러한 백남준의 심연에서 오래 머물고 있었던 그 상황들을 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백남준이 태어난 한국과 백남준이 가장 오래 거주했던 미국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50-100여개의 텔레비전은 그의 발과 육신이 미국에 있음을 나타내고 하늘을 나타내는 타원의 소용돌이 중심에 태극을 나타내어 그의 머리와 생각은 한국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의 끈끈한 동맹관계의 여러 면을 보여주면서 미래의 두 나라가 세상의 빛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의 깊은 애국과 공존, 그리고 평화사상을 담아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분석>

박현옥 교수가 백남준 에세이를 쓰면 정리한 백남준 전시 및 공연, 작곡, 수상 등 연표

백남준의 작품에 대한 분석을 보면 1959년도부터 시작하여 2000년까지 거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공연, 개인전, 작품전시 등 정말 치열하게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표현하고 소통하였다. 40년 작품 시간 중 전반부는 공연, 연주, 협연을 통한 행위 음악이 많았으며 후반부에는 비디오 아트, 조형적 표현으로 개인전이 많았다. 그 사이에 계속적으로 출품 및 제작도 하였으며 대형기획전이나 회고전도 열렸다. 정말 40년을 하루같이 아방가르드 음악과 행위음악과 비디오 음악, 레이저 음악을 통한 설치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실험적이고 하이테크적 예술세계를 아주 작은 키친에서부터 우주에 수놓고 가신 것을 알 수 있다.

박현옥 교수가 백남준 에세이를 쓰면 백남준을 어떤 예술가였는지를 규정한 내용 정리

 

박현옥 백남준 에세이를 쓰면서 참고한 책들 중 일부

백남준을 대상으로 발간된 단행본은 2010년까지는 6권(23%) 이었으며 이후 5년간은 7권으로 27%에 이르렀다. 그러나 2016년 이후 현재까지는 13권으로 50%에 이른다. 즉 우리 사회에서 백남준이라는 예술가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연구하고 관심이 확대된 것은 2016년 이후로 볼 수 있다. 특히 2000묜대 이후 10년간은 주로 백남준의 가정환경 및 시대적 배경 그리고 일본, 독일, 미국으로 이어지는 그의 여정과 작품해석에 주로 관점을 두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새롭고 모험적인 행위예술,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과 동료 등 백남준의 삶과 비디오 예술을 전반적으로 다룬 책이 많았다.

이러한 경향을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나 2011-2015년에 발행된 7권의 책의 내용전개를 분석해보면 이전과는 다른 경향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보다 깊이있게 분석한다는 것이다. 특정 주제로 전자기계기술예술이라는 영역과 특정 시기(독일과 일본) 등으로 전개하거나 비디오 예술의 다양한 발전과정 속에서 백남준의 가치나 위상을 분석하거나 백남준을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문화예술행정에서 바라본 회상적 내용이 담긴 책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5년에는 다른 사람 즉 백남준과 유사한 철학적 메시지나 선지자적인 인물 등과 함께 백남준을 다룬 책들과 소주제나 검색에서는 백남준이 검색되었으나 백남준에 대한 것이 아닌 백남준이라는 거장 이후의 우리나라 비디오 아트, 디지털 아트의 경향이나 현상을 인터뷰하거나 백남준이라는 작가를 상상하고 또 그 뒤를 이어나가는 신진작가를 다룬 책들이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남준의 일생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이 예술적 장르 속에 녹아있는 예술가나 철학가나 다른 영역에서 그와 같은 위상을 가진 예술가들과 함께 조명한다는 것이다. 즉 바그너에서 백남준까지, 피카소와 백남준까지의 연관성과 차이점 등을 살펴봄으로서의 백남준의 독창성과 파급력을 보다 업그레이드되어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사진, 커뮤니케이션 사상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꾼 따뜻한 지식의 반열까지 백남준의 사상적 이해를 보다 넓은 공존의 차원에서 찾아내는 경향을 알 수 있다.

박현옥 교수(청운대 학장)가 분석한 백남준 사상적 계보학과 인맥

한국에서 백남준을 만나다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다다익선 >

다다익선은 서울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서 만날 수 있는 백남준의 작품입니다. “다다익선은 누구나 알다시피 1,003개가 생각하는 상징적 의미로 개천(開天) , ‘하늘을 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103일이 서기전 2333(戊辰年) 단군 기원 원년 음력 10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된 날이다

다다익선의 디자인은 탑의 형식으로 우리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며, 이는 세상을 열다는 의미와 모두가 모여 함께 공존의 삶을 여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각각의 개체는 그 하나로 온전함을 나타내며 그 완전한 하나하나가 모여 진정으로 화합된 세계를 다이나믹하게 구현하고 영원히 나아감을 구현한 것입니다.

다다익선은 건축가 김원에게 백남준이 한 장의 스케치를 보여주면서 가시화되었다. 김 원은 다다익선2만 년의 과거, 천년의 미래라는 시간관을 투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면서 스톤헨지나 바벨탑, 스파이럴 형태와 삼층탑 등 건축적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 조선 숙종 때 돌에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도 연상이 되고 이스라엘에 있을 때 사 온 도자기에 그려진 12간지도 연상이 된다. “지금에서 영원으로, 영원은 과거로부터” 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이 느낌은 제가 이스라엘 박사후과정 연구원 시절 예루살렘 성을 자주 가곤 했는데.. 굳게 닫힌 다마스커스 문과 전통시장들, 좁은 골목길, 통곡의 벽, 검은 옷의 키파를 쓰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 쉰들러 리스트에 나온 마지막 장면의 라임 스톤의 공동묘소, 골고다 언덕의 비아돌로로사, 브라운 옷의 수사들... 수많은 여행객들... 뭔가 영화나 역사 속에서 보아야 할 것들을 동 시간대 같은 공간에서 보면서 수 천년의 시간이 순간!! 지금 존재하고 있는 신비로운 감정을 곧잘 느끼곤 했다. 그 속에 수 천년의 시간성이 남아 있고 그 속에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여전히 담겨있었다. 과거는 현재의 얼굴이며 미래는 그 과거에서 시작됨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시간성과 지속성 그리고 염원을 담은 듯하다.

백남준! 그를 기리며 감사와 존경을 표하다

2021년 현재 한국에서 백남준을 다루는 전시회, 그의 작품,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 그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목포에서 김순주 큐레이터를 만났다. 이날을 계기로 오마이뉴스의 김형순 기자와 백해영갤러리 백해영 관장 등 많은 분을 만나게 되었고 2021. 05.07-06.27까지 개최된 백남준 나의 예술적 고향” 에 대한 전시내용은 특별기고문으로 첨부한다. 마지막으로 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의 공동대표 김원 건축가를 만나 특별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사진도 제공받았다.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를 쓰고자 함께한 시간이 참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버려진 것들의 재생, 내 삶의 파편들을 재구성하고 그 속에서 시간적 연속성과 지속성 그리고 새로운 탄생을 말하고 싶었다. 이것은 서양과 동양의 대립과 공존, 현실에 대한 부정, 아방가르드적 사고와 플럭서스 등 백남준이 보여주고 있는 다이나믹하고 파괴적인 시작을 일상에서 표한한 한 예로 연결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래서 백남준을 만난 것이 필연적 과정이라고 느끼게 된다. 백남준의 예술세계의 그 풍부한 저수지 속에서 뭔가 일맥상통하는 아주 작은 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에 내가 평생 동안 모아온 옷핀들과 옷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 그 외 소품들을 모아 화려한 비상의 날개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백남준을 소환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의 가치를 내 영혼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박현옥 교수 백남준 오마주 에세이를 쓰면서 받은 감동을 위 그래픽 작품으로 남기다 

<특별인터뷰1> 목포 백남준 전시 -아트 저널리스트 김형순(KIM, Hyung-soon)

1) 안녕하세요? 백남준 전시회가 특별히 목포에서 열리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백남준 전시 '나의 예술적 고향(Nam June Paik, ‘My artistic Heimat’)'이 목포 '오거리문화센터'에서 202157일부터 627일까지 열렸는데요. 이는 목포출신의 서울 이태원에서 갤러리를 40여 년간 운영해 온 백해영 관장이 주관하였으며, 독일통인 김순주 디렉터가 기획을 맡아 이루어졌어요. 특히 이번 전시는 백해영 관장의 큰 기부와 목포시장 등의 협조와 '신안 태평염전'과 한국 '파버카스텔(FaberCastell)'도 협찬했어요. 개막식엔 김종식 목포시장, 전성규 목포대 교수, 80년대 뉴욕에서 백남준과 활동한 임영균 교수도 참가했어요. 특히, 임 교수는 인사말에서 백남준을 일본 작가로 알고 있는 미국인이 많아 충격을 받고 백남준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목포전을 준비하는 데만 거의 1년즘 걸렸어요. 작년 6월 서울 백남준 전() 이후, '루브르 아부다비'에서 '백남준과 BTS' 전을 계획했으나 여의찮아, 백해영 관장을 포함해 우선 뜻이 맞는 회원들(백남준과 프렌즈)이 모여 백남준 공부를 시작했어요. 6개월간 월요강좌 40강을 마치고 이것을 유튜브에 올렸고, 732쪽짜리 백남준 자료집도 만들면서 준비했어요.

2) 이번 전시에서는 공연과 연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이 있었으며 백남준을 목포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특별한 전략은 무엇인가요?

백남준에게 있어서 전시는 뭔가 일어나는 것(Something happens)’으로 보았어요. 이번 전시는 작은 규모지만 목포시립예술무용단의 특별공연과 목포시립교향악단의 4중주 연주회도 열렸죠. 또 이번 전시는 목포시장에게 예술에 대한 정보화 마인드를 유도했고, 목포시 시정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어요. 이곳 문화 인사와 교류가 있었고, 전국에서 온 백남준 관련 인사와 대화를 통해 시너지 효과도 얻었다고 봅니다. 전시와 관련해서 김순주 기획자는 MBC에서 '백남준 특강'을 했고, 저는 목포대에서 '백남준 강의'를 했어요.

3) 백남준에 대한 강의와 기사를 쓰면서 백남준 작품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상과 백남준이 일반 대중에게 보여준 가장 획기적인 표현방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준의 63년 첫 전시개념은 '선불교'에서 왔어요. 그 표현방식은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즉 시각(sight)과 청각(sound)이 하나' 되는 방식, 즉 음악이 미술이 되고, 미술이 음악이 되는 융복합 예술이죠. 그래서 전시 제목도 '음악의 전시(Exposition of Music)'가 되었고, 부제도 기존 서구미술판을 밀어낸다는 의미의 '추방(Expel)'이었죠. 이번 전시를 통해 백남준의 예술에서 'TV'가 어떻게 '인터넷'으로 발전해왔는지 알 수 있는데요. '1963년 첫 전시에 TV가 등장했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전자초고속도로(혹은 인터넷)'으로 업그레이드시켜 '황금사자상'을 받았죠. 일방형''쌍방형'이 되는 소통방식의 전환은 가히 혁명적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남준은 시공을 넘어 최저비용으로 더 빠르고 더 쉽게 인류가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며 함께 사는 세상을 염원했고, 그런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유토피아는 이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봅니다.

4) 이번 백남준의 나의 예술적 고향 목포전에 전시된 주요 작품을 시대순으로 정리해 주실 수 있는지요?

1970년대 서구의 '성상'인 바이올린을 길에서 끌고 다니는 백남준 퍼포먼스도 이번에 선보였어요. 백남준은 텃세를 부리는 '서구우월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영상을 찍은 사람은 독일의 미술사가 '헤르조겐라트(W.Herzogenrath)' 박사였어요. 그는 백남준의 의도를 알았죠. 1980년대 작품으로 파리, 뉴욕, 쾰른, 서울 등의 방송 채널을 연결한 우주 오페라인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1990년대 작품으로 백남준이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을 때 찍은 에디션 사진도 전시장 벽면에 게시하였습니다.

' 난 비트겐슈타인은 읽어본 적이 없어 !(I never read Wittgenstein)' 1998. 2021년 백남준 목포 전시장 모습

그리고 메인 작품으로 전시장 중앙에 '나는 결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 (I never read Wittgenstein)'가 전시되어있어요. 이 제목은 서구철학에 맹종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플라톤 이후에 서구에서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시각언어를 서양의 언어철학의 틀에 맞출 수 없다고 선언한 셈입니다. 사방에 걸린 4대의 TV'동서남북과 춘하추동' 등 우주의 질서와 순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체에 일곱가지 무지갯빛을 닮은 색동이 전자 빛과 만나 관객을 황홀하게 합니다. 그 형태가 단순한데 이는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의 작품으로 세심함과 세밀함보다는 강렬하고 단순함으로 그 예술적 가치를 전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2000, 45)'입니다. 이 작품은 새천년인 2000년 첫날 새천년맞이 행사로 발표한 것으로, 당시 87개국에 생중계되었죠. 백남준은 한국인을 호랑이로 의인화하면서 서구에 진출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분단국의 처량한 신세를 청산하고 어엿한 통일국가로 나가야 한다라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는 화려한 금수강산을 찬양한 '금강에 살으리랏다'와 분단된 철조망을 태우는 영상도 불쑥 튀어나옵니다. 호랑이와 사자와의 대결에서 사자를 물리치는 한국 호랑이의 기상이 또한 가상합니다. 요즘 BTS나 봉준호 영화를 보면 한국 대중문화가 미국과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6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5)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시기별로 확연히 정리되었습니다. 백남준이 우리 세대에 남긴 귀한 메시지는 무엇이며 우리는(목포시는) 어떻게 그 메시지를 실현하여야 할까요?

백남준은 금과옥조 같은 '유언'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20세기는 0.2% 인구인 유대인(Jewish)이 노벨상의 22%를 받으면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철학에서 이바지했듯, 21세는 한국인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봤어요. 이런 백남준의 유언이 요즘 실제로 이뤄지고 있지요. 또한 백남준은 시대정신을 중시했죠. 그와 관련된 작품인 한반도와 유럽이 그려진 '지도의 우화(Map Allegory from Cremia to Korea)'를 보면, 백남준은 이미 60년 전에 유라시아 전성시대를 예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남준 스스로 보이스와 함께 유라시아 작가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도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70년간 섬나라였어요. 이제 그 멍에를 벗어나야 합니다. 백남준이 주장한 유라시아 시대를 맞아 남행열차의 종착역인 목포에서 아침을 먹고 북한, 중국을 지나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베를린으로 가 그곳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세계미술품을 감상하는 그 날이 오길 바래봅니다. 백남준은 더 나아가 남의 나라 영토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이 최고급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그런 대중지성으로 전 세계에 공급한다면 그게 바로 '탈영토제국주의'가 된다고 보았어요. 그러기에 인구수나 위치에 상관없이 목포시도 앞으로 그런 글로벌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는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백남준은 동료 플럭서스 친구들처럼 '지방자치 옹호자'였고, '문화 민주주의자'였지요. 백남준도 이번에 자신의 전시가 목포에서 열린 것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디지털 노마드시대, 변방은 없다"라고 했잖아요. "예술이 중심주의를 깨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근대문화유산이 풍부한 목포는 예향으로 호남에서 품격 있는 문화도시입니다. 목포시민도 이번에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정보아트의 새로운 에너지를 받았기에 더 높은 문화적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수정본

< 백남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들 >

[1]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서울 종로구 율곡로 83  02-736-5700  http://www.arariomuseum.org/전시작품: TV 첼로 1971, 히드라부다 1984, 세기말 인간 1992, 노마드 1994

 

http://www.arariomuseum.org/

 

www.arariomuseum.org

[2] 대전시립미술관: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5  042-270-7312  https://www.daejeon.go.kr/dma전시작품: 프랙탈 거북선 [3]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작품:덕수궁

 

대전시립미술관

이달의 전시일정 2021.08 전체보기 눈/마음/사이 08.03 ~ 11.21 DMA아트센터 제18회 이동훈미술상 특별상 수상작가전 : 박운화, 송인 07.13 ~ 09.22 5전시실 트라우마 : 퓰리처상 사진전 & 15분 07.06 ~ 09.26 1전

www.daejeon.go.kr

[4] 본태미술관제주특별자치도 안덕면 산록남로 762번길 69  064-792-8108 http://www.bontemuseum.com전시작품: TV 첼로 1995, 금붕어를 위한 소나타 1992, 나는 결코 비트겐슈타인을 읽지 않는다<never read Wittgenst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