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 이후, 서양미술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할 때, 백남준 급하게 '비디오아트'라는 산소호흡기 갔다 대다
백남준 1963년 독일(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면서 속으로 속삭였다. "너 서양미술 이제 다 죽었어!!" 그래서 백남준 전시장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 잘린 소대가리를 걸어둔 것이다. 그리고 전시 부제를 <추방(Expel)>이라고 붙였다. ":너 서양미술! 이제 다 추방된 거야" 그리고 백남준 "씩 웃었다(아래)" [평] 백남준 배포가 크고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1] <백남준 1962년 글 예술에서 우연성과 비결정성, 모바일 요소 등을 강조하다 "난 <음악의 존재론적 형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 방식은 "surprise a priori" 예기치 않게 선험적으로 놀라게 하는 비결정적으로 우연히 뭣보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어간 음악과 움직이는 모바일로, 작곡가 등은 몰라도 돼!> I am tired of renewing the form of music…. I must renew the ontological form of music…. In the “Moving Theatre” in the street, the sounds move in the street, the audience meets or encounters them “unexpectedly” in the street. The beauty of moving theatre lies in this “surprise a priori,” because almost all the audience is uninvited, not knowing what it is, why it is, who is the composer, the player, organizer—or better speaking—organizer, composer, player. —Nam June Paik, 1962
[2] <백남준 1961년부터 1963년 사이에 과거의 관심거리인 전자음악에서 급격하게 전자미술로 방향을 바꾼다> March 1963. While I was devoting myself to research on video, I lost my interest in action in music to a certain extent. After twelve performances of Karlheinz Stockhausen’s “Originale,” I started a new life from November 1961. By starting a new life I mean that I stocked my whole library except those on TV technique into storage and locked it up. In other words, I went back to the Spartan life of pre-college days…only physics and electronics.
[3] <백남준 1963년의 영문 글, 플라톤에서 헤겔까지의 이데아를 지우고 새로운 이데아(열린 전자회로Open Electronic circuit)를 쓰다> His artwork can be linked to specific writings in which he explored these media and technologies in a language that fused philosophical and cultural discourses. In a 1963 text, Paik wrote: In usual compositions, we have first the approximate vision of the completed work, (the pre-imaged ideal, or ‘IDEA’ in the sense of Plato). Then, the working process means the torturing endeavor to approach to this ideal ‘IDEA.’ But in the experimental TV, the thing is completely revised. Usually I don’t, or cannot have a pre-Imaged VISION before working. First I seek the ‘WAY,’ for which I cannot foresee what it leads to. The ‘WAY’…that means to study the circuit, to try various ‘FEED BACKS,’ to cut some places and feed different waves there, to change the phase of waves etc.….whose technical details, I will publish in the next essay…. Anyway, what I need is approximately the same kind of ‘IDEA’ which American ad agency used to use…just a way or a key to something NEW. This ‘modern’ (?) usage of ‘IDEA’ has not much to do with ‘TRUTH,’ which Plato—Hegel ascribed to this celebrated classical terminology. (IDEA)= KUNST IS DIE ERSCHEINUNG DER IDEE: Art is the appearance of the idea (Hegel-Schiller). (10)
Paik’s text reflects an intellectual struggle in graphic terms: bold highlights, elisions, brackets, capital letters, breaks in words. As he wrestles to express his thinking, he creates a new art practice linking performance and interactivity with sound and the electronic moving image. We see this again in the late style, in which Paik draws and paints onto objects to express his thoughts and explore how they can inform and transform his art. Painting directly onto the television set (“General Electric”, 2005) seen with the videotape and the TV set joined with texts and objects (“Chinese Memory”, 2005, pp. 107–09 and 111) creates a multitextual treatment of language and moving image in a new body of work.
[4] <백남준의 시다. 비디오아트는 물감페인팅의 모든 장점을 하나의 모니터에 다 수용할 수 있다고 선언> This will enable us to shape the TV screen canvas: as precisely as Leonardo / as freely as Picasso / as colorfully as Renoir / as profoundly as Mondrian / as violently as Pollock / as lyrically as Jasper Johns - Nam June Paik
[5] 칭기즈칸 시절처럼 넓은 땅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강대국이 되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통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보다 다양한 양질의 정보와 폭넓은 지식의 가상영토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바로 인터넷 기술과 속도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선진국이 되는 최고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의 두뇌는 세계 최고. 다만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고 제도교육에서 앞으로 전혀 써먹을 수 없는 암기식 교육을 아직도 청산 못하고 되풀이 한다는 점이다.
[6] <백남준이 천재인 것은 그의 재능만이 아니라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킹을 잘 연결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을 때 이미 이들과 헤아리기 힘든 우정의 탑을 쌓고 있었다. 세계 예술의 거장을 접하면서 백남준의 전자아트 자연히 글로벌 아트의 영역을 획득하게 된다>The one good fortune in my life was that I got to know John Cage while he was considered more a gadfly than a guru and Joseph Beuys when he was still an eccentric hermit in Dusseldorf. Therefore it was possible for me to associate myself on an equal footing with these two senior masters as colleagues even after their stardom. -Nam June Paik, 1988
[7] <뉴욕 캐널 스트리트(원래 여기에 운하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가 우리나라로 치면 청계천 전자상가나 용산전자상가 같은 곳이다 여기서 멀리 않는 곳에 백남준 아파트가 있는 소호가 나온다 백남준은 주로 여기서 TV를 제작하고 수리하고 구입하고 한 곳이다. 그 거리의 풍경을 전화 풍경화로 만든 것 같다.> Nam June Paik, “359 Canal Street,” desk with wood blocks from George Maciunas demolition, acrylic, television chassis, newspaper clippings, piano key, and letters (authors included Yoko Ono, Ray Johnson, and Wolf Vostell), dimensions variable, 1991. © Nam June Paik Estate. Courtesy Gagosian Gallery.
www.randian-online.com/np_announcement/nam-june-paik-the-late-style-1996-2006-grasp-the-eternity/
백남준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도 있지만 이 작품이 월인천장지곡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백남준은 TV를 사용하지도 않고 빛으로 달의 모양을 조작한 <하늘에 별이 지구 위에 중국인보다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라(Imagine there are more Stars in the Sky than Chinese on Earth)>를 발표해 TV를 떠나 명암에 의한 빛의 효과를 묘사하기도 했다
"팔만대장경은 21세기를 앞두고 한국인의 뛰어난 정보 수집 능력과 처리 능력을 세계에 과시한 대단히 높이 평가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백남준
<코리아는 21세기의 호랑이> 백남준 위성아트 종결편 <호랑이는 살아있다(DMZ 2000 프로젝트 중 하나)> 2000년 0시 0분에 전 세계 87개국에 송출하다. 한민족의 위상을 호랑이 위용으로 바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내다. 한국의 잠재한 능력과 에너지를 전파하다. 본격적 한류의 힘을 선언한 영상 작품이다. 영상 속 한 장면에서 사자와 호랑이와 혈투를 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국 사자가 도망치고 만다(실제 영상인 것 같다). 그것이 암시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남북평화와 공존의 대한 그의 비전과 염원이 당연히 이 영상에 담겨 있다. <3번째 사진> 이 작품 발표한 후 2000년 뉴욕에서 회고전이 있었는데 그 전시 전주곡으로 백남준이 미국의 여가수와 함께 샬럿 무어먼 추모공연을 선보였다. 당시 백남준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백남준, 호랑이는 살아있다 Tiger Lives,
비디오 설치,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 LCD 모니터, 1 DVD 플레이어, 1 DVD, 레진 구조물에 유채, 61x72cm, 13분 58초, 2000
<가상 기사> 40년간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한국미술계에 크게 기여한 백해영 여사(백해영갤러리 관장) 칠순을 앞두고 고향 목포에서 5천만원을 기부해 백남준 1부 전시, 백남준 2부도 예정)를 직접 기획하여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보사회를 미래 내다보면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터넷망을 깔고 국민 컴퓨터를 보급한 김대중 대통령의 정보사회에 대한 선각적 실천을 기념하며 그리고 고향에 문화발전에 기여하고자 나섰습니다. 이것은 가짜 뉴스입니다. 그러나 잘하면 진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백남준 연결-연결-연결 다시 말해 지구촌 인류공동체 연대와 연합 중시> 백남준과 뒤샹을 비교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뒤샹은 오브제(OBJET TROUVE)를 가지고 최고의 지적 놀이를 한 위대한 예술가지만 백남준은 스케일이 다르다. 그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한국인의 천문학 상상력을 가지고 우주를 하나의 캔버스로 삼아 거기에 전 세계방송채널을 연결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어떻게 하면 인류가 쉽게 빠르게 저비용으로 서로의 정보와 지식을 나눌까 고민해서 만든 것이 바로 위성아트 우주오페라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동서의 문화와 언어와 사상과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넘어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로 공존하면 지식과 정보를 공유(SHARE) 사회를 꿈꾸었다. 이것이 결국 인터넷이 된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한국인이 정보수집능력에서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21세기 정보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과제다. 백남준 정도의 위대한 작가가 되려면 우선 한문에 정통해야 한다. 그리고 5개국이상을 배워라. 소쉬르는 맑스의 이념보다 언어가 더 중요하다고 봤다. 하나의 언어를 하면 하나의 세계를 본다. 5개국어를 하면 5차원이 된다. 그 5차원 위에 예술을 하면 6차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샤머니즘 무당이 되면 7차원이 된다.
21세기는 나라(영토)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보(사이버영토)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세계에서 가장 수준높은 정보와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 그것이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정보수집능력과 정보처리능력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갖춰야 한다. 21세기 그것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바로 한국이다. 나는 이것을 탈영토제국주의라고 부른다. -백남준
0 [백남준&'BTS'] 'From NJP to BTS' 1 [백남준&인터넷] '전자초고속도' 가는 길, 10단계
2 [백남준&첫전시] 1963년에 부퍼탈, '파르나스' 3 [백남준&보이스] 그는 왜 독일에서 예술神 되었나?
4 [백남준&축제론] "나의 환희는 거칠 게 없어라!" 5 [백남준&노마드] 닫힌 '코로나‘와 열린 '노마디즘'
6 [백남준&코로나] '왜 21세기에 백남준인가?' 7 [백남준&코리아] 세계적, 아니 가장 한국적 작가
8 [백남준&사이버] '사이버네틱스' 전자예술시대
<남준 선언 1963년 서양 미술은 죽었다> 니체 선언 1885년 "서양 신은 죽었다".
남준 선언 1963년 "서양 미술은 죽었다"죽은 서양미술 '신의 자리'에 '비디오'를 놓다.
백남준 첫 전시에 서양미술의 뮤즈를 욕조에 처박다
이제는 한국인에게 이런 용기가 필요하다. 6개국어를 하는 백남준 이것은 허세가 아니다.
이건 미술이 아니다. -백남준. 백남준은 모든 서양미술 의심. 그래서 비디오아트가 나왔다. "서양미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마치 니체가 "(서양의)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것과 같다. 니체와 백남준, 그런 면에서 상통한다.
백남준 1963년 독일(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 서양미술 이제 다 죽었어!!" 그래서 백남준 전시장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 잘린 소대가리를 걸어둔 것이다. 그리고 전시 부제를 <추방(Expel)>이라고 붙였다. ":너 서양미술! 이제 다 추방된 거야" 그리고 백남준 "씩 웃었다(아래 오른쪽)" [평] 백남준 배포가 크고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John Cage preparing a piano, in 1946, © Photograph by Irving Penn / © 1946 Condé Nast Publications Inc.
<세계 피아노의 날> 역시 존 케이지. 피아노의 새로운 가능성 열다. 다큐멘터리 : 피아노의 긴장과 확장 존 케이지가 준비된 피아노에서 작곡가 라몬토 영(La Monte Young)의 기질을 포함하여 멕시코 작곡가 콘론 낸캐로우(Nancarrow)의 기계식 피아노에 이르기까지이 다큐멘터리는 음악 실험에서 피아노의 문제와 그 잠재력을 확장하기 위한 기술, 접근 방식 및 방법을 보다 정확하게 다루었다.Du piano préparé de Cage au Piano mécanique de Nancarrow, en passant par le tempérament de La Monte Young, ce documentaire aborde la question du piano dans l'expérimentation musicale et plus précisément les techniques, démarches et méthodes pour en étendre les potentialités.
미국 솔웨이 갤러리 전시 포스터 1991년 이 당시 백남준 정말 많은 작품을 만들다. 장난감 같은 작품에서 1993년 베니스에 출품할 대형작품까지 이때 사실 너무 과로한 면이 있다.
백남준은 미술가보다는 음악가에 가깝다. 작품 명이 다 음악적이다. 첫번째 작품 <푸가예술> 1991년 현대화랑.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네번째 작품도 제목이 <튜브 4중주> 역시 음악용어가 들어간 제목이다. 백남준 작품은 이미지보다 사운드가 더 중요하다.
"이것을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르그리트. 아래 작품 "문학은 책이 아니다: 이제 문학은 책이 아니다. 사운드와 모바일과 비디오로 보고 읽은 보다 확장된 책 개념이다(왼쪽에는 샹들리에도 있군요). 전자책 등 다양한 전자 미디어 매체를 두고 한 말이겠죠. 하긴 요즘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귀로 듣는 책이 나오다.
백남준 여행하는 부처 1998년 어린이 장난감 차로 만든 전자매체로 무장한 노마드 부처 백남준의 천진난만한 마음에서 쏟아져 나온 장난기와 유머감각과 해학의 에스프리가 그득하다. 한순간에 뚝딱 해서 만들어내는 한국인의 남다른 손 솜씨를 여지없이 발휘되다.
<1986년 바이바이 키플링> 백남준 80년대 냉전시대 그의 주제는 축제와 놀이의 본질인 소통과 화해였다. 동서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소통과 화해마저 시도하다. 그러면서 예술의 본질은 참여에 있다고 봤다. 참여를 촉매(재촉)하는 역할 말이다. 인터페이스 강조하다. face to face by video art planet art 1986년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에서는 한국의 고싸움, 정경화, 정명화, 황병기, 사카모토, 이세 미야케(패션 디자이너), 키드 해링 ,일본 무용단 산카이 주쿠, 프랑스 아르망, 일본건축가 이소자키, 사물놀이, 야나기 목관음악, 일본의 참선방, 로저 엔젤, 무어먼, 한국민요 노들강변, 김창열, 이우환, 박서보 작가 소개 제작비 50만 달러 한국 일본 미국이 3분의 1씩 부담<1965년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7월 7일 존 케이지의 작품을 공연 중
장소는 아래 저드슨 홀. 원래 교회인데 부속건물로 공연장이 있다 여기가 '그린위치(Greenwich Village)' 여기가 과거 히피들 집합소라고 기억한다>[Judson Hall] Greenwich Village, Manhattan, New York City, New York, United States // Standing on the south side of Washington Square, this Italian Renaissance Eclectic building and ten story Tower combine to form a striking composition. The walls are warm yellow Roman Brick and represent the bricklayer's art at his best. At the second, third, and fifth floors of the dormitory, rich bands of terra-cotta add a masterful touch to the building. //
Brick arches envelope the round-headed windows, while splayed brick lintels span the square-headed windows of the lower three stories. Two-story brick pilasters alternate with the third and fourth floor windows, while one-story pilasters divide the paired windows of the fifth floor. Originally a five story structure, the architects capped the building with an ornamental cornice and a railing thus adding a rich architectural feature. //
The entrance to the ten story tower is ornately decorated with horizontal bands of terra-cotta ornament, alternating with recessed brick courses. Ornamental metal grille work adorns the two windows flanking a pair of handsome panelled wooden doors which are deeply recessed within the decorated doorway. The impressive tower rising above the brick and ornate terra-cotta ground floor, contains the same type of brick masonry work as the walls of the dormitory. // Variety in design is achieved by using pairs of rectangular windows on the second, third and fourth floors while round-headed windows penetrate all five upper floors. The tower terminates with two slender columns supporting the triple arches of the belfry. The tower design culminates in a richly decorated cornice at the roof line. // - From the 1966 NYCLPC Landmark Designation Report.
<1965년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7월 7일 존 케이지의 작품을 공연 중 장소는 아래 저드슨 홀. 원래 교회인데 부속건물로 공연장이 있다 여기가 '그린위치(Greenwich Village)' 여기가 과거 히피들 집합소라고 기억한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 비문에 보면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는 유목민 흉노의 왕인 <김일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역사적 유물과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대혼란이 온다면서 거부한다. 많은 역사학자들, 김알지를 신라 15대 왕으로 보다. 혹은 그렇게 추론. 200년전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한 흔적이 그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흉노 유물의 전통, 동복(청동솥) 항상 말 뒤에 싣고 다녔단다. 금령총 기아 인물형 뒤에 '동북'이 보인다. 여기 인물은 흉노족 얼굴이다. 동복은 흉노족 전통인데 아래 2번째 사진은 흉노 오르도스 동북이고 3번째 사진은 김해에서도 발굴된 동북이다. *동복(銅鍑): 말 그대로 청동솥. 이 동복으로 밥을 먹거나 국을 끓여 먹으며 말 뒤에 이동하는 밥통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제례 때 어떠한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씨는 금(황금)의 숭배에서 왔다. 금 숭배는 흉노족의 특징이다. 신라 금의 나라다. 김일제 흉노의 왕의 태자였으나 한무제의 포로 중국에 노예가 되었다가 무제 암살하려는 반란군은 제압해 오히려 무제로 부터 포상을 받고 벼슬도 받았다. 중국 황제는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김'씨가 중국에서 생긴 것이다. 지금 중국에 김씨 집성촌으로 살고 있다. 알타이는 금의 산(Golden Mountain)이라는 뜻이다. 김씨는 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라의 수도가 금성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훈족'과 '흉노족'의 차이는 뭔가? '훈족'(헝가리도 훈족에서 왔다 우리가 헝가리와 유사한 민족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은 로마는 멸망시킨 서유럽 유목민이다. 흉노는 훈족과 같은 계열로 북방 유목민 중앙아시아 유목민이다. 북방 우랄 알타이 스키타아와 같은 민족이다. 백남준 <스키타이 단군>이라는 작품이 나온 것을 이런 배경이 있다. 이곳은 서양인 유골과 동양인 유골이 거의 같이 나온다. 그러나 동서문화가 융합된 유라시아 혈통권이다. 실크로드는 중국보다는 흉노적이 개척한 북방 유목민의 로드이다. 흉노적이라는 말이 뉘앙스가 안 좋다. 그건 중국이 흉노족을 비하하려고 쓴 용어다. 김씨왕조는 유목민 흉노의 왕인 <김일제> 혈통에서 온 것이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 비문 기록과 중국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한 중국 탁본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낙랑(위만조선의 유민 중 하나라 고구려 평양 지역 근교에서 살다가 결국은 당시 강대국인 고구려에게 망하다) 아래 낙랑 금제 띠고리(첫번째 사진)>는 사실 가장 전형적인 흉노식 패턴 장식을 따른 것이다. 좁쌀 모양을 한 '누금기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신라금관 목걸이가 되었다. 신라금관도 마찬가지다. 신라금관은 흉노 유물방식을 가지고 있다. 흉노적이 가장 좋아하는 게 금 왜 유목민에게는 가지고 다니기 가장 편하기에 금을 숭배했다)이고 장식과 문양은 사슴뿔 모양(신라금관 장식이 여기서 오다)이 메인이었다.
백남준의 예술을 매우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화해적이고 융합적이다. 백남준은 대중문화를 높이 평가한 발터 벤야민 계열에 속한다. 마르쿠제는 긍정의 문화를 이야기했지만 대중문화를 백남준만큼 이해하지 못했다. 백남준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를 융합하고 유입하는데 탁월했다.
백남준의 장난기, 그 유머와 위트, 로봇이 천진한 어린아이 같다. 기계의 인간화. 오른쪽 꽃의 아이도 그렇다.
"인생은 싱거운 것이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예술을 하는 거다" -백남준.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하는 게 예술이다" -백남준. 예술론을 이렇게 짧고 재치있게 말하기란 쉬운 일 아니다. 그의 언어는 천재적이다. 촌철살인의 어법을 능수능란하게 구가한다. 평상시 사유와 고민을 많이 했다는 증거다.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굳어진 옛것만 즐긴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는 골동품이지요" -황병기. 전통음악과 골동품음악은 다르다. 우리가 흔히 듣는 전통음악은 골동품음악일 확률이 높다. 진정한 전통음악이라면 현대에 와서 들어도 그 맥락이 살아있어야 한다. 전통은 현대의 진정한 베이스이기 때문이다.
백남준, 그가 품은 인류애에 대한 단상 Fragments d'une philanthropie de N.J. Paik
[] 참 아름다운 장면이네요. What a beautiful (performance) scene. 백남준은 미술가라기보다는 몸과 미디어로 음악을 하는 연주자 작곡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음양의 조화는 동양화에서 흔히 보듯 산과 수의 조화뿐만 아니라 여기서 보듯이 동양과 서양의 조화도 역시 포함될 수 있다. 1967년 작품인가 불명확. 아니면 19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 사진같기도 하다.
[백남준 살럿 휴먼 첼로 1965년 뉴욕] 사실 백남준은 독일에서 자신의 예술파트너를 구했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구세주처럼 미국에서 예술파트너를 만났다. 그녀는 바로 줄리아드 출신의 재원인 샬럿, 그녀는 남준을 받아줄 줄 아는 지극히 현명한 여자였다. 그만큼 배포가 컸다. 샬럿이 없다면 남준도 없다. 남준이 없이 샬롯이 없다. 둘은 부부는 아니지만 예술적 파트너로 최상이었다. 백남준은 샬럿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의 천재성을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 작품을 보라 샬럿이라는 여자가 얼마나 남자를 제대로 받아줄 줄 아는가 서양남자도 아니고 동양남자를 그는 백남준이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천재인 것을 알았기에 거장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100%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말 백남준은 최고의 행운을 만난 것이다. 백남준은 여기서 자신의 몸을 첼로로 바꿨다. 첼로는 인간공학과 문명이기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이것을 연장한 것이 TV이고 바로 인간의 몸이다. 백남준은 TV를 통해서 인간이 확장되고 이것이 지구촌을 만들 거라는 맥루한의 생각을 지지했다
<1965년 첫 개인전 퍼포먼스에서 한 발에는 모포(펠트)를 한 발에는 쇠 신발을 신은 채 얼굴에는 꿀과 금박으로 분칠을 하고 죽은 토끼에게 3시간동안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Performance으로 유라시아 평원을 횡단하는 영물로서의 토끼와 정신적 교류를 시도하는 Happening이다. 여기서 이성과 계몽에 세뇌당한 인간의식의 해방과 변혁이 주제다>
요셉 보이스는 평화를 상징하는 토끼에 신령한 영혼이 있다는 '정령신앙'을 믿었다. 그래서 합리주의를 믿는 전쟁광 인간보다 토끼를 더 낫다고 봤다. 사람보다 토끼에게 현대미술을 설명하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이를 주제한 보이스의 작품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1965년 작품. 보이스를 상징하는 오브제 4가지 1) 펠트 2) 기름덩어리 3) 썰매 3) 손전등 여기도 펠트모포와 썰매가 나온다.
[] 샤머니즘은 자발적으로 황홀한 엑스터시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접신술이다.
<나는 백남준이 한국무속을 창조적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얼마나 난해한 작업인가. 경이롭고 놀랍다. 그가 천재임을 직감한다> 요제프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를 행하는 중인 백남준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케 되는 것이다.” _이어령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_백남준
고대 그리스 종교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는 약물을 이용하여 엑스터시 상태에 이르렀지만 빙하기 시베리아 지역에 갇혀 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호흡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호흡과 명상을 통해 병을 고치고 미래의 사고를 내다보면 삶의 역경을 극복했다. 식량과 사냥감을 찾아 이동의 때를 알아야 했던 이들에게 샤먼의 능력을 절대적이었고 그래서 천신과 소통할 수 있는 샤먼이 가장 높은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아시아전역에 퍼졌고 샤머니즘은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되어 전파되었다. 유목 생활을 하면서 샤먼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선하던 몽골로이드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평론가 최광진
[충북대 박선주 교수 북방계 몽골로이드] 세계 고고인류학계는 이의 원인을 기후요소 중 마지막 빙하기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지구 마지막 빙하기(일명 뷔름기)는 대략 3만~1만년전 동안 진행됐다. 이때 시베리아 등 지구 북반구에 살았던 몽골로이드는 '혹한'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몽골로이드는 혹한에 굴복하지 않고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방이 많은 눈꺼풀(쌍꺼풀이 적은 이유) △햇빛을 더 얻기 위한 밝은 피부(비타민D와 관련) △열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통통한 몸매(일명 숏다리 이유) 등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밖에 가늘고 작은 눈, 낮고 작은 코, 칼귀, 비교적 얇은 입술 등도 모두 혹한에 적응한 결과라고 고고인류학자들 의견이다.
이들은 "큰 눈은 눈에 반사된 자외선 때문에 눈 손상시킬 수 있고, 오똑한 코와 두꺼운 입술은 동상에 걸리기 쉽다"고 밝히고 있다. 또 "얼어 딱딱해진 고기를 씹다보니 자연스럽게 턱과 어금니가 발달됐다"며 "여기서 획득된 성질이 유전학적인 표이를 거쳐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인종적인 특징이라고 설명.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1만년 전 지구 마지막 빙하가 물러가자 그들의 생활영역을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했다. 국내 선사고고학자들이 "지금 한반도 사람의 직계 조상은 구석기인이 아닌 신석기인"이라고 말도 있다.
[] 백남준 남다른 감정으로 돼지머리를 놓고 추는 무당의 춤에서 신명의 음악적 원리를 파악하다. 그는 무당의 박자가 중국 아악의 리듬과 달리 싱커페이션(syncopation) 즉 당김음이 있는 3박자, 5학자, 7박자로 이어진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것은 뒤의 음을 당겨서 엇박자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인데 이러한 한국 특유의 무속음악에서 그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선과 다른 역동성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한국이 국제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예술은 춤과 음악과 무당 등 시간 예술뿐이다"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최광진
[] [유럽문명사 변천과정] 처음에는 우주만물(그리스 철학)-전능한 신(중세)-합리와 계몽(데카르트와 볼테르) 신이 없는 위대한 인간과 인간소외, 인간윤리회복(칸트, 맑스, 니체)-언어와 소통과 일상(구조주의 실존주의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 하버마스의 생활세계[Lebenswelt])가 다시 등장-미디어(발터 벤야민, 맥루언, 백남준) [동양문명사 변천과정] 춘추전국시대 하도 사람을 많이 죽이고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한 후 나온 대안이 바로 공자의 예법(인의예지)과 그리고 노자의 도(무위자연), 그리고 동양의 전반적인 인문학 정신이 직관적이고 추상적인 시의 정신(L'esprit poétique) 그리고 결국 우주와 인간을 춤추게 하는 생명력의 근간인 신명과 인류의 영원한 종교이자 사상이자 철학인 샤머니즘 그리고 디지털 노마드 정신(백남준) 등이 아닌가.
[] <백남준 기존의 미술을 의심하다 그래서 비디오아트 나오다>
1. 맑스, 역사를 의심하다 2. 니체, 신을 의심하다. 3. 프로이트, 의식을 의심하다. 4. 하이데거, 존재를 의심하다. 5. 비트겐슈타인, 언어를 의심하다. 6. 아도르노, 계몽을 의심하다. 7. 사르트르, 타인을 의심하자 8. 포퍼, 과학을 의심하다. 9. 아렌트, 정치를 의심하다. // 발터 벤야민, 문화를 의심하다. 문화 민주화에 앞당기다. 카메라가 바꿔 놓은 인간의 지각방식. 복제의 미학이 등장하다. 68혁명이 일어난 것은 바로 TV를 통해서 생방송을 보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20세기 혁명은 결국 미디어 때문이다. 1. 사진기 발명 2. 영화 발명 3 TV의 발명과 생방송 4. 위성아트와 네트워킹 5. 인터넷과 SNS 등등
<음양조화> 남자는 머리가 모자라 항상 몸이 먼저 간다. 사냥꾼 기질 때문이다. 그러니 무의식적인 실수를 자주 한다. 그럴 때 남자는 여자에게 진심으로 즉시 사과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그렇게 남자의 몸이 머리를 못 따라오니 여성도 남성의 사과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용서를 받아주면 그 이후 그 남자는 그 여자를 더욱 소중한 보석처럼 대접할 것이고 최고의 여왕으로 모실 것이다. 남녀의 몸의 차이에서 오는 해프닝이다.
<음양조화> 산수화는 세계에서 가장 에로틱한 회화양식이다. 산(울퉁불퉁한 바위로 된)은 남성의 성기를 수(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산과 수는 마치 양과 음처럼 조화롭게 뒤섞여 있어야 이 세상이 가장 아름다워진다는 미학이 깔려 있다. 다만 그런 성적인 면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가장 성적인 표현을 한다는 면에서 기상천외하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은 너무나 닮았다는 것과 음양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준다. 동양의 유토피아에서 역시 음양의 조화가 없다면 그것의 실현은 요원한 것이 된다. 동양은 서양보다 한 단계 높은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간직하고 있었다.
백남준의 인류애가 담긴 인터넷 코뮌(인류공동체)정신은 바로 <홍익인간>에서 왔다.
이 세상의 많은 신화 중 홍익인간처럼 그 스케일이나 포용성이 넓고 깊고 그 이상이 높은 것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우선주의적이다. 자기 민족만 아니라 주변 이방인 폭넓은 이웃들과 더 넓게는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국 이념은 그 어느 나라도 가질 수 없는 평화공존의 사상이다. 백남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이런 단군을 영웅화해서 <전자 스키타이 단군>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한 이유다.
[]1963년 백남준과 보이스와 함께 유라시아 지도를 그리다. 보이스 2차대전 조종사로 전투 중 러시아 우알 알타 지역 크리미아 반도 근처 추락해 유목민 타타르 족과 극적으로 살아난다. 그들이 지극정성으로 보이스를 치료했기에 그때부터 보이스 유라시아와 샤머니즘을 그의 예술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다. 백남준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 고속도로를 상상하다. 6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 이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철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1. 보이스는 1959년, 처음 백남준을 데뷔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에서 봤고 2. 1961년, 보이스는 '제로 그룹(Zero Group)' 오프닝 파티에서 백남준의 성 Paik 를 불렸다. 3.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 나타나 백남준 부수려고 준비한 피아노를 먼저 부수고 있었다. 백남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1] <백남준 일화와 그가 남긴 말들> 백남준은 한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독어, 영어, 불어, 중국어 등 6개 국어를 구사했다. 그 중 일본어는 거의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구사했으며 독어와 영어로도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두 나라 언어로 책을 쓰기도 했다. 불어 실력은 다른 언어보다는 못했지만 중급 수준이었고 중국어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원서를 읽을 수 있었다. 164cm의 자그마한 키에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고 종교도 갖지 않았다.
[2] 백남준은 창신동 큰 대문 집으로 큰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러 오던 신재덕 선생(나중에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오재경씨의 부인)에게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당시의 신재덕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장안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신재덕 선생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3] 신재덕 선생은 훗날 백남준의 작품 ‘두 스승’에서 존 케이지와 함께 작품화되는 인물이다.
[4] 백남준이 두고두고 애석해하는 것은 “연주자라는 건 발에 차이도록 많은 건데 제대로 된 작곡가는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것이다. 당시에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세계음악사에 크게 기여할 음악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는 말을 자주 했다.
[5] 백남준은 김순남을 만난 본적이 없었으나, 김순남의 동료였고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던 이건우 선생과 신재덕 선생을 통하여 김순남의 음악을 잘 알고 있었다. 김순남과 이건우는 한국전쟁 중에 월북, 휴전 후인 1953년10월 경 모스크바에 유학 중 귀국명령이 내려져 미제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평양근교에서 박헌영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6] 백남준은 1967년에 쓴 ‘뉴욕단상(斷想)’ 이라는 수필에서 ‘어려서 캐딜락을 타보았던 들 무슨 소용이요.이병철의 장남인들 무슨 대수랴’ 는 표현과 “우리 집이 정월이면 장안에서 유명한 애꾸무당이 와서 굿을 했는데, 집안의 아녀자들이 죽 늘어서서 연실 두 손으로 비는 걸 봤다고, 내가 조금 일찍 철이든 편이라서 인민혁명이 일어나서 수원 백씨 집안이 쫄딱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진짜 망하면 나는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했었다”는 말을 보면, 경기보통학교 시절에 마르크스의 열병을 앓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7] “6·25때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이, 집에서 키우던 스피츠를 구어 삶아 먹는 걸 보고 막시즘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무슨 놈의 휴머니스트, 로맨티스트들이 애완견을 구어 삶아 먹냐구”
[8] “사람 팔자 모르는게…나도 어쩌면 평생을 이북의 시골에서 음악선생이나 하다 말았을지 모른다.”
[9] <백남준 일화와 그가 남긴 말들>“독일에서 음악공부 할 때 명석한 지식인들이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이 벌어지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산·사회주의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걸 지금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허영이라고나 할까…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사랑한다는 지식인들의 귀족주의와 허영심이 기묘하게 결합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0]“나는 실상을 이미 알고 환상을 버렸으나, 끼워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짐짓 모른 체하고 있었다.”
[11]“경기보통학교 시절에 천관우 선생에게서 노장사상을 배웠는데…얼마나 흥미가 있었는지 넋을 잃을 정도였다. 나중에 독일에서 유럽의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노장사상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걸 보고, 그들에게 노자·장자를 설명해 주니까 그제서야 끼워주더라고, 그 걸 그렇게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12]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소대가리 효과(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대가리를 전시장 입구에 걸다 희생의 상징물) 서구의 태양계를 우주의 은하계로 바꾸다. 서양 중심의 미술사를 전복시키고 전 세계를 포함한 새로운 미술사를 쓰다. -박정진
[1]'뜨거운 미디어'와 '차가운 미디어'
맥루언은 미디어를 뜨거운(hot) 미디어와 차가운(cool) 미디어로 구분한다. 뜨거운 미디어는 하나의 감각을 밀도(fidelity)가 높게 확장시키는 미디어를 말한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고밀도는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반면 차가운 미디어는 저밀도의 미디어로 데이터가 적어서 수용자가 채워 넣어야 하는 미디어를 말한다. 맥루언에 따르면, 라디오는 데이터가 꽉 찬 뜨거운 미디어이고, 전화는 데이터가 적은 차가운 미디어다. 영화는 밀도가 높은 뜨거운 미디어이고, 텔레비전은 밀도가 낮은 차가운 미디어이다. 그는 뜨거운 미디어/차가운 미디어의 구분을 계속 확장한다. 사진은 뜨거운 미디어이고 만화는 차가운 미디어이며, 한글이나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는 뜨거운 미디어이며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는 차가운 미디어이다. 뜨거운 미디어는 밀도가 높고 정보량이 많기 때문에 참여도가 낮고 배타적이다. 반면 차가운 미디어는 밀도가 낮고 정보량이 적기 때문에 참여도가 높고 포용적이다.
"강의가 세미나에 비해, 그리고 책이 대화에 비해 참여를 덜 허용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뜨거운 미디어는 차가운 미디어보다 참여를 적게 허용한다. 인쇄의 등장으로 인해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각종 형태의 미디어들은 생활과 예술에서 배제되었고, 그 중 상당수는 이상할 정도로 새로운 강렬함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뜨거운 형식이 배타적이고 차가운 형식이 포괄(용)적이다"라는 원리를 입증해 주는 사례들로 가득 차 있다".<미디어의 이해>, 36쪽)
[2]<이영철 교수 글> 백남준의 예술을 유목론에 위치시킬 때 중요한 또 다른 측면은 전자 공학, 테크놀로지를 가능하게 한 유목민의 야금술이다. 프랑스 학자 시몽동이 “역사적으로 볼 때, 야금술 없이는 전자 공학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자의 속성은 금속성이다. 이때 모든 물질은 야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물이나 풀이나 나무, 짐승조차 소금이나 광물적인 원소로 가득 차 있다. 모든 물질이 금속은 아니지만 광물질의 금속성은 물질 전체를 연결시키는 소통의 매개이다. 그가 쉔베르크, 케이지를 거쳐 자신에게 흡족한 방식으로 음악(소리)을 다루는 것을 보면, 유목민의 야금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야금술과 음악의 관계는 대장장이가 내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둘 사이를 관통하는 경향, 물질의 연속적인 변주에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주장한다. 백남준은 음악가로서의 대장장이, “금속성의 합성음”을 내는 최초의 적극적인 변형자였다.
[4]<백남준의 교토상 연설문(노버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 서론> 미학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를 다룰 목록
1) 케이지와 고전주의자들. 케이지와 헤겔/ 케이지와 몽테뉴/ 케이지와 하이젠베르크/케이지와 슈티르너/ 케이지와 한국의 도자기
2) 선(禪)과 전자
3) 권태의 미학
a) 동양의 전통. 인도의 우주론- 중국의 수동적인 철학 - 송(宋)나라 회화의 공간.
일본과 한국의 정적(靜的)인 궁중음악(가가쿠와 시조) -지루한 예술에서 의례적인 예술(노能)로 진행되거나 의례 그 자체(茶), 그리고 형식화된 일상의 예절로의 융합(오가사와라류- 코수기)
b) 유럽의 전통(권태). 보들레르-체홉 - 프루스트 - 바그너 - 사티 -이브 클라인
c) 미국의 전통. 거투르드 스타인-헤밍웨이 - 케이지 - 리몬테 영 - 밥 모리스
- 에멋 윌리암스 - 워홀 - 제1차 구조(야구,생명보험, 주식시장, 마약 포함)
4) 미니아트와 일본
조르주 브레히트와 바쇼(芭蕉)
레이 존슨과 잇사
하이쿠 무대 같은 이벤트(조지 마키우나스)
5) 예술과 기술
전자 음악에서 전자 회화까지(차이와 유사점).
쇠라와 칼러TV
의료용 전자를 예술수단으로 쓸 가능성
(루시에Lucier-태니Tenney-티틀바움Titlebaum−리나우Lienau−백남준 Paik)
비디오 녹화기의 가능성
이브닝 축제에 사용된 다양한 기술들 l
나의 전자예술작품에 사용된 다양한 기술들
6) 컴퓨터와 시청각예술
막스 매튜스Max Mathews−짐 테니Jim Tenney−피터데니스Peter Denes
−마이크로 놀Micro Noll (벨연구소)-힐러 L. J. Hiller(일리노이)
괴츠K.O.Goetz−막스 벤제Max Bense−크세나키스Xenakis (유럽)
나만의 생각과 시도들
7) 시간의 개념
인도- 그리스 - 성경 - 뉴튼 -배르그송 - 깁스 - 후썰 - 하이데거- 사르트르 - 케이지- 위너 - 스톡하우젠(타임 시리즈)
8) 자연에 대한 개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앙리 루소Henri Rousseau -몽테뉴Montaigne-힌데미쓰Hindemith-스즈키Suzuki
9) 가장 오래된 중국 역사가 사마천과 가장 최근의 미국 역사가 아더 슐레징거 2세의 유교론
10) 마리화나(pot)는 인스턴트 선(instant zen : LSD)인가?
11) 노자에 대한 공산주의적 해석 (북한의 참고서적에서),
12) 「피네간의 경야」의 단어 구성과 중국 한자
13) 펠트만의 표기법과 한국어의 중세 표기법
14) 상징주의 연극
소포클레스Sophocles-알란 카프로Allan Kaprow-노(能)-한국 무당공연
15) 문인화와 다다이즘에서의 비전문성
[5] <이동식 선생의 '맥루한을 넘어선 백남준' 글 중에서 일부> 맥루한의 ‘촉각’의 강조는 의외로 그보다 앞서 나온 발터 벤야민의 미디어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6). 또한 맥루한과 벤야민은 예술에 대한 유토피아적 태도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술이 미래의 미디어와 사회의 발전에 대해 예측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맥루한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일종의 ‘원격조기경보시스템’으로서, 기존 문화에 어떤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지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도, 더욱 중요하게는 예술가들이 맥루한으로 부터 깊은 영감을 받는 이유이다.
백남준의 생각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예술은 경계를 넘다드는 급격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새로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설계도로 그려놓았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예술에 있어서, 생각에 있어서, 문명에 있어서의 사이버네틱스이라고 말한다.
1947년 미국 수학자 N.위너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자 그룹을 사이버네틱스라고 이름지었는데, 어원은 키잡이[舵手]를 뜻하는 그리스어 kybernetes이다.
위너의 정의에 따르면 사이버네틱스란 “어떤 체계에 포함되는 두 종류의 변량이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이때 제어할 수 없는 변량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값을 바탕으로 하여 제어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적당히 정하여, 이 체계를 가장 바람직스러운 상태로 도달시키는 마법을 부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학문이라 하였다.
이를 위하여 위너는 일반조화해석(一般調和解析), 예측(豫測)과 여파(濾波)의 이론, 비선형통계이론(非線形統計理論) 등 수학상의 새로운 이론을 많이 발전시켰다. 제어와 통신 문제에 관련된 종합적인 과학이므로 이와 관련된 학문의 분야는 매우 광범위하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에는 자동계산기의 이론, 제어의 이론, 정보통신이론 등이 있다.
응용 분야도 광범위하여 그 경계를 분명하게 표시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자동 계산기를 응용하여 문장이나 도형을 이해시키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일, ② 전철의 자동운전이나 공장의 자동운전 등 모든 종류의 자동화와 관련된 제어공학, ③ 전화·텔레비전·우주중계·데이터전송(傳送) 등의 응용과 관련된 통신공학, ④ 생체정보의 해명, 인간공학, 인간·기계계(機械系)의 연구, 피로와 안전의 문제, 학습이나 교육기계 등과 같은 생리 및 심리학과 그밖에 경제학·사회학에의 응용 등을 들 수 있다.
백남준은 그러한 사이버네틱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고 싶은가, 그것이 이어지는 ‘미학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 목록’이란 글이다. 21세기를 열어가는 백남준의 기발한 착상과 아이디어, 그의 미래관을 보여주는 웅장한 구상이다.
<위너와 맥루한의 방법론은 곧 사이버네틱스의 방법론이다 -백남준> 이동식 선생님 백남준 교토상 수상할 때 연설물을 분석하면서 백남준은 맥루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 독립된 사상가임을 여기서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백남준 교토상 수상 기념 연설물 일부분(미디어론을 주제로 한 논문)이 나온다. *교토상을 노벨상과 동급의 세계적 권위를 가진 상으로 노벨상에서 취급하지 않는 분야에서 상을 수여한다.
m.blog.naver.com/sunonthetree/221542599318?fbclid=IwAR2ztTmkVJQ8coTEejTVgYWbhzVMdtli-dN1ZHiUS-dAoyZhfQd2SYeJwD8
[6] <2014 국제학술대회 : 창조와 융합의 모델, 백남준작품 목록화 방법론 모색> 2014 International Symposium : Documenting the Works of Nam June Paik, Model of Creation and Convergence)> 2014년 2월 7일(금) 13:00~18:00 서울시립미술관 SeMA홀 주최
수잔 레너트(Susanne Rennert/독일/미술사학자, 큐레이터) 김은지(Eunji Kim/한국/홍익대 미술대학 조교수) 앤 버틀러(Ann Butler/미국/Bard College 큐레이터학센터 도서관 및 아카이브 실장) 다비드-올리비에 라티고(David-Olivier Lartigaud/프랑스/Saint-Etienne 미술디자인대학 RANDOM연구소소장)
토론자 김정화(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안소연(삼성미술관 플라토 부관장) 토비아스 버거(Tobias Berger/중국/홍콩 M+미술관 큐레이터) 신야 와타나베(Shinya Watanabe/일본/Hochschule für Technik und Wirtschaft Berlin 강사) 사회자 : 김홍희(서울시립미술관 관장)
[7] <백남준은 세계미술사에서 예술과 비예술 사이에서 특별함을 보인 예술가>스피노자는 서양철학사에서 철학과 비철학 사이에 있었던 특별함을 지닌 철학자라면, 백남준은 세계미술사에서 예술과 비예술 사이에서 특별함을 보인 예술가였다. <조현진 교수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신(神)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생산하는 자연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고 했다. 이러한 면을 '신의 자연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이른바 기독교의 '의인론적 신관'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의인론적 신관이란 "신이 인간처럼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욕구와 정념 등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와 범신론의 자연이 서로 화해할 수 있는가?>
백남준의 3가지 특징 1) 작품을 할 때 선사시대를 먼저 공부했다는 점, 백남준을 이걸 노스탤지어라는 은유로 말했다. 그는 한국의 원류를 핀란드, 칠레, 미국 원주민 인디언, 스키타이, 훈족, 헝가리, 시베리아 타타르 족, 중앙아시아 몽골 기마민족 등과 연결시킨다. 2) 이 지구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예술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발명하다. 지금 인터넷과 SNS는 다 백남준의 덕분인 셈이다. 3) 백남준은 가장 이상적 세계 유토피아적 세계를 꿈꾸다 그것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말이 바로 신석기 시대다. 나의 TV아트는 신선기시대에 너무 닮았다. 신석기 시대는 인류사에서 모든 이상주의와 유토피아(사유를 인정하지 않는 원시공산 코뮤니즘을 포함해서)를 다 구현한 시대였다
[] <디터 다니엘스박사 백남준 강연 텔레비전을 만지다: 마셜 매클루언, 존 케이지, 백남준의 참여 매체 Touching Television: Participation Media with Marshall McLuhan, John Cage and Nam June Paik> 2011년 독일 아헨대학교에서 미술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마르셀 뒤샹 에 관한 논문 «뒤샹과 타자: 근대성에 있어 미술사적 영향의 준례» 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992). 국제 비디오아트 페스티벌 ‘비디오날레 본’의 공동 설립자이며, 카를스루에의 ZKM에서 비디오아트 큐레이터로, 린츠의 루드비히 볼츠만 미디어아트연구소에서 디렉터로 일한 바 있다. 현재 라이프치히HGB에서 미술사학/미술이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뒤샹, 플럭서스, 미디어 아트 등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으며, 주요저술로는 «플럭서스 –인생에 대한 헌사», «통신으로서의 예술: 전신에서 인터넷까지», «레디메이드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발명가인 예술가, 예술가인 발명가», «이 소리를 보라: 오디오비주올로지 1, 2권» 등이 있다.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은 실상 기계에 대한 이론, 커뮤니케이션 혹은 정보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감각과 그것이 미디어와 맺는 다감각적 관계에 대한 이론이다. 매클루언은 일찍이 그의 1964년 저서에서, 텔레비전 이미지는 “촉각의 확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1964). 그의 이러한 발언은 그 당시보다 오히려 스마트폰, 태블릿 컴퓨터 같은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가 쏟아져 나오는 최근의 상황에서 훨씬 더 이해가 가는 말이다. McLuhan’ media theory is much less a theory of machines, of communication or of information –but rather a theory of the senses and their multi–modal relationships to media. Way back in 1964 McLuhan maintains that the television image is an “expansion of the tactile sense”«Understanding media: extensions of man» 1964). This seems more understandable with today’ touch screen interfaces(smart phones, tablet computers) than in McLuhan’ time.
매클루언의 ‘촉각’의 강조는 의외로 그보다 앞서 나온 발터 벤야민의 미디어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6). 또한 매클루언과 벤야민은 예술에 대한 유토피아적 태도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술이 미래의 미디어와 사회의 발전에 대해 예측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매클루언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일종의 ‘원격조기경보시스템’으로서, 기존 문화에 어떤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지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더욱 중요하게는 예술가들이 매클루언으로 부터 깊은 영감을 받는 이유이다.
His emphasis on the ‘tactile’ surprisingly links McLuhan back with Walter Benjamin's theory of media(«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1936). McLuhan and Benjamin also share an utopian appeal for art as anticipation of future developments in media and society. As McLuhan puts it: “Art at its most significant is a Distant Early Warning System that can always be relied on to tell the old culture what is beginning to happen to it.” This is what makes McLuhan so inspiring also for non–academic readers and – even more important – makes him inspiring for artist.
매클루언은 텔레비전이 여타 매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청자와 관계를 맺는 매체라고 주장한다: “텔레비전 이미지는 ... 심층적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시키는 매체이다.” 이러한 논지는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을 1960년대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실험과 연결시킬수 있는 지점이다. 1950년대 초부터 시작된 존 케이지의 라디오를 위한 작품들은 이후의 텔레비전 실험에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McLuhan argues that television engages the viewer in a different sense than any other media: “the television image ... is a medium, which includes all of our senses in an in–depth interaction.” This connects his media theory with the contemporary experiments of media artists in the 1960s. John Cage’ compositions for radios from the early 1950s are another important influence for television experiments to come.
백남준의 “참여 TV” 개념은 매클루언의 이론과는 별개로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시작되었다. 매클루언의 이론과 백남준의 개념에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또한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매클루언이 텔레비전 이미지의 인식에 있어 촉각성을 논한 것은 “상황이 어떠한가how things are”를 분석하는 것이다. 반면 TV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조작하고 또 이를 상호작용화한 백남준은 “앞으로 다가 올 상황things to come”을 제시하는 측면이 강하다. 역사상 이 시기는 분명 미디어 아트와 미디어 이론이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Nam June Paik’ concept of “participation TV”was developed independently from
McLuhan in his «Exposition of Music –Electronic Television» in Wuppertal, Germany
in 1963. There are some similarities, but also important differences: McLuhan talks of the tactility of the TV image perception as an analysis of “ow things are”while Paik develops an (inter–active practice of TV image manipulation, offering a prospectus of “hings to come” Evidently at this moment in time, the art and the theory of media are two sides of the same coin.
1960년대 중반부터 백남준은 그의 이론과 작업 모두에 있어 매클루언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매클루언을 존 케이지와 노버트 위너의 개념과 연결한다: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매클루언의 유명한 문장은 1940년대 이후부터 암암리에 커뮤니케이션 학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버트 위너는 메시지를 지닌 정보는 메시지가 없는 정보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케이지의 말을 듣는 듯하다...”(백남준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매클루언» 1967).
From the mid 1960s on, Paik in theory and in practice refers directly to McLuhan’
theory, and sets him in relation with the concepts of John Cage and Norbert Wiener: “McLuhan’ famous phrase “The medium is the message”also existed implicitly in the science of communication since the 1940s. Norbert Wiener wrote that the information, in which a message was sent, plays the same role as the information, in which a message is not sent. It sounds almost Cagean ...”Nam June Paik «Norbert Wiener and Marshall McLuhan» 1967)
백남준의 1968년 작 <케이지에 갇힌 매클루언>은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과 미디어 인격의 ‘재매개’라고 할 수 있다. 이 설치 작품에서 텔레비전을 만지는 것은 단순히 은유가 아니다. 백남준은 이 작업에서 “데이터 처리”와 참여 TV를 결합하여 미래의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Nam June Paik’ installation <McLuhan Caged> from 1968 is a ‘re–ediation’of McLuhan’ media–theory and media–personality. Touching television is not only a metaphor in this installation, where Paik combines “data processing”and participation TV and gives a premonition of interactive media.
[] [동물-인간-기계가 하이브리드한 동급이 된다] 백남준은 1980년대부터 가족 로봇 시리즈(1986)와 같은 작품으로 발전해온 스타일이다. 이 로봇 조각은 사이버네틱스 연구의 파생물인 사이보그 (인간과 기계의 잡종)에 대한 백남준 평생 관심을 반영한다. 1996년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는 다양한 기존 과학 사이의 경계 영역을 탐험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 융합은 인간을 넘어 동물, 사물, Watchdog II(1997)와 같은 기계와의 생태 융합을 포함된다. 실제 개와 "감시자로서 미디어" These robot pieces reflect Paik’s life-long interest in cyborgs (hybrids of man and machine), offshoots of cybernetic research. In 1996 Paik wrote, “Cybernetics is the exploration of boundary regions between and across various existing sciences.”3 Its fusions went beyond human beings to include animals, objects, and ecological fusions with machines such as Watchdog II (1997) - a pun on an actual dog and the “media as watchdog” and Attila the Hun (1993).
백남준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가 만든 꼭두놀음 어릿광대 양주별산대 공연장면. 1980년 공간사랑에서. 1984년 동독 드레스덴(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 국제 꼭두극 페스티벌에 초대 받아 당시는 드물게 공산권 국가에서 무대공연을 하다
백남준 <참여 TV> 1971년 작품 아이들도 백남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그의 작품감상에서 그 누구도 배제시키지 않는다. 이런 작품이 가능했던 것은 1969년 아베와 함께 신디사이저를 발명했기 때문이다
Fifty chalkboard slates are hung on a wall, their surfaces covered in chalked-in formulas. Alongside, a piano with an axe leaning against it, a zinc tub beside a watering can, a ladder, grease, film projectors. With this installation, Joseph Beuys substantiated his thesis, which was still considered quite radical in the 1970s: Capital actually lies in the creative power of every human being. Art against capitalism.
"Anyone who has not understood Beuys' meaning with this phrase has not understood Beuys and will never understand him," says Erich Marx. Marx bought the work for a "not too modest two-digit million sum" and left it on permanent loan to the Neue Nationalgalerie in Berlin. The installation "Das Kapital Raum 1970-1977" from 1980 is considered by many to be the legacy of the German artist who lived from 1921 to 1986. It can be visited at the Hamburger Bahnhof - Museum für Gegenwart.
<결국 예술은 개념의 윤회하는 순환 같은 것인가> 백남준 정보아트에 대한 예리한 촉을 가지고 있었다. 정보, 통신, 유통 그리고 순환 그리고 (원효)원융회통 혹은 상통 등등 네트워킹과 돌고 도는 연동성과 연결된 연대성에 늘 관심이 높았다.
<백남준과 무어먼 1964년 뉴욕에서 처음 만나다>
[1964] 1964년 제2차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32살의 백남준과 31살의 무어먼 처음으로 만나 서로 죽이 잘 맞아 이 축제에 참가. 1964년 8월 30일이다.
[1965] 1965년 제3차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도, 백남준과 무어먼 차가. 케이지 작곡 <현악 연주자를 위한 26' 1.1499"> 공연하다. 백남준 1964년 처음 미국 뉴욕을 방문하다. 처음에는 바로 독일로 가려고 하다가 뉴욕을 6개월 정도 둘러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어먼을 만나면서 완전히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1968] 백남준과 무어먼 1968년 5월 뉴욕 Canal Street 작업실에서. 1년 전에 무어먼 토플리스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소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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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Q: 역학 사상이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요?
A: 이선경(성대교수) 역학의 기본원리는 ‘음양 대대(待對)’와 ‘소식(消息)’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대’란 대립된다는 말인데 음양, 즉 낮과 밤, 빛과 어둠처럼 대립돼 있지만 낮과 밤이 서로 연결돼 있지 않습니까. 어둠이 있어야 빛이 보이는 것이죠. ‘소식’은 잦아들고 불어난다는 뜻인데요, 낮이 줄어들면 밤이 늘어나고 밤이 깊어지면 해가 솟아난다는 것이죠. 이것을 인간 세상에 빗대면 내가 존재하려면 나와 상반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미운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 까. 미운 놈을 밉다고 죽이는 게 아니고 미운 놈은 함께 살아 가야 하는 상생관계라는 원리입니다. 역에 보면 비구혼구(匪寇婚媾)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적인 줄 알았는데, 혼인할 짝이더라는 말이죠.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 여태까지 도적놈이라고 서로 대치했는데 좋은 기운이 돌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립자인 줄로 아는데 결국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라는 게 역학이 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 습니다.
02 한국철학을 전공한 성균관대 이선경 교수는 풍류도는 삼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고유 정신사상이라며 그 근거로 최치원 이 쓴 <대숭복사비>의 내용을 제시했다. “우리 태평국(신라)은 승지이니, 사람의 성질이 매우 유순하고 지기가 만물을 생기게 하는데 모아졌다. 산과 숲에서는 말없이 고요하게 도를 닦는 무리가 많아 인(仁)으로써 벗을 모으고, 강과 바다의 물은 더 큰 곳으로 흐르려는 형세를 좇아, 선(善)을 따르는 것이 물 흐르는 것 같았다. 이런 까닭에 군자의 풍도를 드날리고 부처의 도에 감화돼 있는 것이, 마치 붉은 인니(인주)가 옥새를 따르고, 쇠가 거푸집 안에 들어 있 는 것과 같았다.”
03최광진 미술평론가 한국미의 4요소
1) 신명 Super Aesthetic Energy for overcome the hardship in daily life and animate feast-causing emotion 2) 해학 Humor and wit for ridicule and satirize absurd society and corrupt political power. 3) 소박 Natural Simplicity 4) 평온과 공존의 철학 Silent Resonance, and Serenity in mind for realize the Philosophy of coexistence
04 칸트가 생각하는 선악 개념에 관련된 자유(자율)에 대한 범주[카테고리] /
1) 양(현상계): 하나, 여럿, 모두 2) 질: 긍정 부정, 제한(이다, 아니다. 인듯하다) 3) 관계: 실체와 속성, 원인과 결과, 상호(평형관계) 4) 양태[시간개념]: 가능, 현존, 필연 / 칸트는 순수 이성개념을 '양', '질', '관계', '양태'로 나눈 뒤, 위의 대상이 우리가 대상의 인식과 지각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칸트마저 '수동적 시민'(투표권을 주지 않아도 된다)과 '능동적 시민'(투표권을 줘야 한다)으로 나누다. 그러나 엘리트주의가 결코 옳을 수는 없다. 예술가가 대중보다 한 발자국 앞서 가지면 궁극적으로는 같이 가야 한다.
05 <과거에는 대상이 주체이고 인간이 객체였는데 칸트는 이 관점을 전복시키다. 인간이 주체이고 대상이 객체라고 보다. 몬드리안도 사물의 형태를 보는 대상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다. 그는 특별한 조형의 형태를 파괴시키다>“We must destroy the particular form” was Mondrian’s mantra throughout his life.
06 내가 유럽에 산다면 헝가리? 헝가리와 한국은 같은 혈통 훈족. 아버지를 헝가리어는 어버지라고 한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우리와 성과 이름 쓰는 순서도 연월일 순서도 같다. 내가 가본 유럽국 중 최고. 유럽 미인이 다 몰려있다. 체코 여성도 그런데 유럽에서 열강이 된 나라는 다 바다와 접한 나라군요.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스, 터키 등등 오스트리아를 가 보니 동유럽이 보이기 시작하다.
07백남준 초기 데뷔시절 60년 초부터 사운드 몽타주 기법 활용하다. 아래 사진(백남준 1964년 이 Pork Pak를 활용해 세계 최초로 비디오아트를 시작하다)을 백남준이 맨 처음 사용한 비디오 기기다
(https://cahierdeseoul.com/nam-june-paik-art-video/). Les débuts Après des études de musique et d’histoire de l’art en Corée puis au Japon en 1950 (fuyant un pays en guerre), Nam June Paik part en 1956 terminer sa formation universitaire en Allemagne. Il se spécialise en collage sonore à partir de bandes audio et disques vinyles. En 1958, il travaille auprès du compositeur Karlheinz Stockhausen (pionnier de la musique électroacoustique) au Laboratoire de Recherche du studio de musique électronique de Radio Cologne – où travaillent également les compositeurs René Köring et Mauricio Kagel. A cette époque, Nam june Paik produit ses propres concerts, expositions et « actions musicales », performances pendant lesquelles il s’attaque aux instruments de musiques (il brise, par exemple, un violon sur scène) dans le but d « éliminer la musique traditionnelle ». En 1961, il participe à la pièce musicale de Karlheinz Stockhausen, Originale, en réalisant une performance pendant que l’œuvre du compositeur allemand et ses propres montages sonores sont joués simultanément. C’est dans le cadre des représentations de la pièce Originale, que l’intéret de Nam June Paik pour le médium vidéo va augmenter.
Durant cette période, Nam June Païk côtoie l’avant-garde de l’époque (notamment Joseph Beuys, John Cage, George Maciunas, Merce Cunningham, le couple de plasticiens Christo, Jeanne-Claude, etc..) et rejoint finalement, en 1962, le groupe artistique Fluxus (issu du mouvement dada qui mélange aussi bien la musique, la performance, l’art plastique et l’écriture). Dès le départ, l’œuvre de Nam June Paik est marqué par ces influences hétérogènes, transdisciplinaires et expérimentales.
08 백남준 예술 속에 담긴 소통과 교감의 정신, 공유사상과 인류애
09 Interview with Raphaele Shirley who was a assistant of N.J. Paik for 7 years
-When first met NJ ?
I first met Nam June as I was living in the same building as him at 537 Broadway/110 Mercer. I was friends and working with many people in the building and still today keep strong relations with the artist community of that building complex. The building was found by George Maciunas and he brought in artists such as Nam June Paik, Shigeko Kubota, Io, Yoshi Wada, Simone Forte and Elaine Summers. I moved in there in 1993 from France and then began collaborating and working with the group.
-Your specialty ?
My specialty is fine arts. I have training in drawing, sculpture,painting, photography and video. I have also learned the specialization of lasers for light art installation for the purpose of making Nam June's laser pieces. I have also founded several art collectives in New York such as "New York International Fringe Festival", "Perpetual Art Machine" to name a few.
-With NJ what job?
My first jobs with Nam June were to help him and the studio build the laser sculptures for the SRGuggenheim Retrospective "The World's of Nam June Paik". I started working with him in 1997. He was in the very early phases of development of his laser works, starting with "Triangle", then "Circle" then "Square". As time went on I had more responsibilities and was the main assistant to develop the "Jacob's Ladder" with his collaborator Norman Ballard. We performed many tests from small scale to large scale and had many meetings with engineers and technicians to figure out all the problems for this epic art work. I also was his main assistant for the design and installation of the "Olympic Park Water screen"
-Where ?
The main hub of operation for my work for Nam June was 143 Green street in Soho.
-How did you be chosen his assistant ?
I had been working with another artist in the building of 110 Mercer by the name of Frances Whitney. She was making multi-media art works and worked with Norman Ballard. He then introduced me to the rest of Nam June Paik studio with whom he was working. I got along very well with all the team and felt I had found my place and favorite people. I think they liked me too!
-What do you do with M. Lee ?
We worked together for the installation of the "World's of Nam June Paik" in New York, Seoul and Bilbao. Also for general studio work with Nam June, MR Lee was often in New York and our main contact in Korea and the most important technician for Nam June. Now, Mr Lee and I don't often work directly together but we are always consulting each other to solve hard problems with the Nam June Paik art works preservation that is ongoing.
10 인생은 원래 지독한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나 유머와 해학과 차원 높은 긍정으로 보면 축제가 된다. 백남준에게 예술은 fun fun fun이었다. fun은 최고의 지성에서 온다. 어떤 슬픔과 좌절 속에서도 즐거움과 기쁨을 발굴할 수 있다. 백남준에게 뇌졸중이 왔을 때 그는 진정한 부처의 미소를 지울 수 있었다
11 Allen Kaprow 18 Happenings in 6 Parts: Room 1, Set 4 Oct. 1959. 그리고 알란 카프로우 퍼포먼스 스코어(동선)
12 <혁명적 로봇 가족 시리즈(프랑스 혁명 200주년 작품) 프랑스 사람들도 잘 모르는 프랑스 여성 혁명가(올랭프 드 구주 Olympe de Gouges)를 발굴해서 작업을 만들자 프랑스 사람들 더 놀라다.>
[Olympe de Gouges] dans La Fée électronique. Nam June Paik-arts plastiques] Voici réunis un artiste coréen, figure majeure de l'art contemporain et une femme de lettres qui vécut et mourut sous la Révolution française. L'œuvre ici présentée évoque cette femme au destin hors du commun, morte sur l'échafaud. Olympe de Gouges, féministe et révolutionnaire, aurait sans doute approuvé le choix d'un portraitiste aussi peu conformiste, aussi rebelle qu'elle le fût elle-même. Nam June Paik voyait en l'art un avatar de la vie : insaisissable, drôle, ironique, ouvert sur le monde. Usant de l'image électronique comme de peinture et de l'écran de télévision comme d'une toile, Nam June Paik engage, dès ses premières performances dans les années soixante, l'histoire de l'art sur la voie féconde de l'art vidéo. Sur chaque écran, des images défilent et le regard se perd dans la succession des détails que l'œil ne peut isoler ou arrêter. Collages d'images qui forment un tout dans l'esprit d'un spectateur devenu acteur d'un spectacle sans cesse renouvelé. Nam June Paik, « peintre » mais aussi sculpteur, empile les téléviseurs et crée un robot puis des familles de robots formant des réseaux de connexions, symboles d'une communication possible entre les générations et les continents. « Olympe de Gouges » appartient à la famille des robots de la Révolution, nés d'une commande de la Ville de Paris pour la commémoration du bicentena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La femme n'eut pas la vie longue. Éphémère, l'exposition « La Fée électronique » le fut aussi, qui vit se déployer la statue d'« Olympe de Gouges » dans la salle Dufy du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aux côtés de quatre autres de ses frères révolutionnaires. Aujourd'hui, le robot demeure. « Olympe de Gouges » fait partie des collections du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qui nous a, pour composer ce dossier, généreusement ouvert ses portes et ses archives
13<(프랑스 혁명 200주년 작품)> 백남준 전자요정(La Fée électronique series) 중 '볼테르(Voltaire)' 1989년. 퐁피두센터 소장품. 볼테르는 이성주의, 자유주의,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인물.
14백남준 I '스탠리 브라운(네덜란드 출신의 개념미술 개척자)의 경의' 암스테르담 스테델릭미술관 1984
방송이란 물고기가 알을 낳는 것과 같다. 물고기의 양은 수백만 개씩 생산되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생명을 잃어가지만 수정되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정된 양도 따지고 보면 대단한 양이다. - 백남준 다다인선 설명하면서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 "서양중심주의에 쏘아올린 조명탄"1978년에 출간된 이 책은 동서양을 바라보는 인식과 시각에 파문을 일으키다. 미국대학은 오리엔탈 연구학과라는 명칭을 동아시아학과와 중동학과로 부랴부랴 바꾸다. 이분법적 구분에 익숙한 제국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은 동서양의 불평등과 차이를 더 심화시킨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자기 고국처럼 느낄 수 있어야 강한 사람이 된다"
15 Vivre seuls ensemble -T. Todorov 혼자 함께 살기. 나와 남 그리고 우리의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사무엘 베케트, 로슈푸코('자기애'라는 심리용어 발명) 등의 사상을 끌어들인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의 말을 인용한다. 과거의 유명 작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타자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성찰의 글이다.
Pour devenir un être humain, le nouveau-né doit être accueilli par le regard et les soins de sa mère, avant de s’insérer dans le monde commun fait d’une langue, d’une culture, d’un ordre. Chacun de nous est fait des autres avant et autour de lui, et lui-même participe à la formation de tous ceux qu’il rencontre ; le « je » dépend toujours d’autrui, le « nous », des autres : c’est la seule immortalité qui vaille. Tzvetan Todorov poursuit ici sa réflexion sur la place de l’altérité, à travers un dialogue avec les auteurs du passé, de Christophe Colomb à Edward Said et de La Rochefoucauld à Samuel Beckett.
16 <예수가 없는 예수, 예수에 반대하는 예수, 예수 다음의 예수, 말이 된다. 한국 개신교는 예수가 없는 예수이고, 성서의 문자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반대하는 예수이고, 21세기 예수는 예수 다음의 예수이다> [Jésus sans Jésus] Après le succès de leurs précédents essais (Jésus contre Jésus, puis Jésus après Jésus), les auteurs des deux grandes séries télévisées Corpus christi et L’Origine du christianisme entament une nouvelle plongée dans l’histoire des débuts du christianisme.
Après le succès de leurs précédents essais, les auteurs des grandes séries télévisées Corpus Christi et L’Origine du christianisme enquêtent sur un événement considérable pour l’Occident : la naissance d’une nouvelle religion, le christianisme.
Comment les chrétiens ont-ils rompu avec les juifs tout en gardant le Dieu de l’Ancien Testament ? Comment le monothéisme chrétien a-t-il pu s’imposer malgré le polythéisme païen qui dominait l’Antiquité ? Comment les chrétiens ont-ils réussi à surmonter leurs conflits internes, à éradiquer les hérésies ? Quels furent le rôle et l’ampleur des persécutions ? Combien y eut-il de martyrs et qui furent-ils ? Qui était l’empereur Constantin, qui consacra la victoire politique du christianisme ? Pourquoi le messianisme d'un courant marginal du judaïsme, entièrement tourné vers l'attente de la Fin des temps, a-t-il abouti à une immense institution, l’Église ? Comment le christianisme a-t-il pu devenir la religion officielle et obligatoire de l'Empire romain ? La conversion de l’Etat au christianisme était-elle inéluctable ?
17 대한민국 국민 지식 수준이 세계 최고다. 백남준이 말하는 탈영토제국주의가 가능해지다. 인터넷이 최고 빠르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높고 IQ 세계1등이고 교육열이 높다 다만 교육제도만은 아직도 산업시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정보시대, 무지(정보와 지식의 결핍)가 가장 큰 죄다. 이것 없애려고 백남준 인터넷 SNS 아트를 창안하다.
18 `캐나다(피 미술재단)에 이배전을 열리고 있다 큐레이터 작품 설명(석탄위에 흐르는 빛 효과)을 하고 있다 PHOTO PATRICK SANFAÇON, LA PRESSE: La commissaire de l’exposition, Cheryl Sim, directrice générale de la Fondation Phi, près d’une des œuvres de Lee Bae. On peut apprécier les effets irisés de la lumière du jour sur les surfaces des morceaux de charbon qui constituent le tableau.
Nam June Paik Work
All Star Video (with Ryuichi Sakamoto) (1984) 32 min | |
(eai) | Allan 'n' Allen's Complaint (with Shigeo Kubota) (1982) 28:33 min |
(eai) | Analogue Assemblage (2000) 2:08 min |
B.S.O.and Beyond (1984) installation | |
(eai, F) | Beatles Electronique (with Jud Yalkut) (1966-1969) 3 min 16mm or video |
Beuys/Voice (1987) installation | |
Birdhouse (1990) installation | |
Brazil 22 (with Hans Donner) (1988) installation | |
(eai) | Butterfly (1986) 2:03 min |
(eai) | Button Happening (1965) 2 min |
Bye Bye Kipling (1986) 32:20 min | |
Candle TV No. 1 (1975) installation | |
Can't Lick Stamps in China 30 min video | |
(F) | Cinema Metaphysique Nos. 1-4 (with Jud Yalkut) (1966-1972) 13 min 16mm |
(F) | Cinema Metaphysique No. 5 (with Jud Yalkut) (1967) 2 min 16mm |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 Tape (1971) installation | |
Connection (1986) installation | |
Dider Rot on Canal Street (1966) | |
(eai) | Digital Experiment at Bell Labs (1966) 4 min |
Digital Zen (1988) 28 min | |
(eai) | Documenta 6 Satellite Telecast (with Douglas Davis and Joseph Beuys) (1977) 28:56 min |
Double Face Arc (1985) installation | |
(eai) | Early Color TV Manipulations by Nam June Paik (with Jud Yalkut) (1965-1971) 23:25 min |
Egg Grows (1984) installation | |
(eai, F) | Electronic Fables (with Jud Yalkut) (1971) 8:45 min 16mm or video |
(eai, F) | Electronic Moon No. 2 (with Jud Yalkut) (1969) 4:30 min 16mm or video |
Electronic Opera No. 1 (1969) 5 min | |
Electronic Opera No. 2 (1970) 7:30 min | |
Electronic Video Recorder (1965) | |
(eai) | Electronic Yoga (with Jud Yalkut) (1972-1992) 7:30 min |
Family of Robot (1986) installations | |
(eai) | Film Video Works #3 (1967-69) 5:36 min |
Fin de Siecle II (with Rebecca Allen) (1989) installation | |
Fish Flies on Sky (1975) installation | |
Flag XYZ (1984) installation | |
Frog (1990) installation | |
(eai) | Global Groove (with John Godfrey) (1973) 30 min Essay by CandiAnn Roswell |
Good Morning Mr. Orwell (1984) 57:18 min | |
(eai) | Guadalcanal Requiem (1977) 50 min |
(eai) | Guadalcanal Requiem (1979 reedit) 28:33 min |
(eai) | Hand and Face (1961) 1:42 min |
Homage to Stanley Brown (Diagonal Matrix) (1984) installation | |
Hydra Buddha (1984) installation | |
Imagine There Are More Stars on the Sky Than Chinese on the Earth (1981) installation | |
(eai) | Lake Placid '80 (1980) 3:49 min |
Laser Video Space I (with H. Bauman) (1980) installation | |
(eai) | Living with the Living Theatre (with Paul Garrin and Betsy Connors) (1989) 28:30 min |
Magnet TV (1965) installation | |
(eai) | MAJORCA-fantasia (with Paul Garrin and Amy Greenfield) (1989) 4:52 min |
Mc and Evers (1990) installation | |
(eai) | Media Shuttle: Moscow/New York (with Dimitri Devyatkin) (1978) 28:11 min |
(eai) | The Medium Is the Medium, segment 6 |
Mein Kolner Dom (with Ingo Gunther) (1980)5 min | |
(eai) | Merce by Merce by Paik: Part Two: Merce and Marcel (with Shigeo Kubota) (1978) 13:05 |
Monument (1986) installation | |
Moon is the Oldest TV (1976) installation | |
(eai) | My Mix--A Composite Edit (1974) 30 min |
(eai) | My Mix '81 (1981) 24:50 min |
(eai) | Nam June Paik in Edited For Television (1975) 28:14 min |
9/23/69: Experiment With David Atwood (1969) 80 min | |
One Candle (1989) installation | |
Orwell, Revisited (1984) 37 min | |
(F) | P+A-I(K) (with Jud Yalkut) (1966) 10 min 16mm |
Paik/Abe Video Synthesizer With Charlotte Mooreman (1971) 30 min | |
Participation TV II (1969) installation | |
Passage (1986) installation | |
Real Fish/Live Fish (1982) installation | |
Real Plant/Live Plant (1978) installation | |
(eai) | The Selling of New York (1972) 7:30 min |
Stone Buddha/ Burnt TV (1982) installation | |
(eai) | Suite 212 (1975) 150 min |
(eai) | Suite 212 (1977 reedit) 30:23 min |
(eai) | A Tale of Two Cities (with Paul Garrin) (1992) 60 sec (included in Trans-Voices) |
Tanzande Muster (1966) Installation | |
Three Eggs (1981) installation | |
(eai) | Tiger Lives (1999) 45 min |
(eai) | "Topless Cellist" Charlotte Moorman (1995) 29 min |
Train-Cello (1973) installation | |
Tricolor Video (1982) installation | |
(eai) | A Tribute to John Cage (1973) 60 min |
(eai) | A Tribute to John Cage (1976 reedit) 29:02 min |
TV Bed (1972) installation | |
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 installation | |
TV Buddha (1974) installation | |
(eai) | TV Cello Premiere (with Jud Yalkut) (1971) 7:25 min |
TV Chair (1968-1974) installations | |
TV Clock (1963-81) installation | |
TV Cross (1966) installation | |
TV Egg (1982) installation | |
TV Garden (1974) installation | |
TV Glasses (1971) installation | |
TV Penis (1972) installation | |
TV Rodin (1975) installation | |
TV Sea (1974) installation | |
TV Trichter (1984) installation | |
(eai) | Two Channel Music Tape: Spring/Fall (with Paul Garrin) (1986) 32:20 min |
V-Matrix (Tribute to S. Eisenstein) (1983) installation | |
V-yramid (1982) installation | |
Variations on George Ball on Meet the Press (1967) | |
Variations on Johnny Carson vs. Charlotte Mooreman (1966) | |
Video Chairs (1988) installations | |
Video Commune (1970) 4 hours | |
(eai) | Video Commune (with Jud Yalkut) 8:36 min |
(eai) | Video-Film Concert (with Jud Yalkut) (1966-1972 and 1992) 34:50 min
|
Video Fish (1975) installation | |
Video Gate (1982) installation | |
(eai) | Video Synthesizer and "TV Cello" Collectibles (with Jud Yalkut) (1965-1971) 23:25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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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i, F) | Video Tape Study No. 3 (with Jud Yalkut) (1967-69) 4 min 16mm and video |
(eai) | Video Variations, segment 8 |
(eai) | Violin Dragging, Brooklyn, NY (1975) 1:37 min |
(eai) | Vusac--NY (with Betsy Connors and Paul Garrin) (1984) 27:10 min |
(eai, F) | Waiting for Commercials (with Jud Yalkut) (1972) 6:45 min 16mm or video |
Wing (1990) installation | |
Wrap Around the World (1988) 47 min | |
(eai) | You Can't Lick Stamps in China (with Gregory Battcock) (1978) 28:34 min |
Zenith - TV Looking Glass (1974) installation |
(eai) Available from E.A.I.
(F) Available from Filmmakers Coope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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