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클릭하면 01강부터 20강까지 다 있다 https://www.youtube.com/user/seulsong/videos
[백남준&피드백] 코로나 시대 백남준 <20강> 6개월 2월 말로 종강. "노스탤지어는 피드백(피드'백'의 '백'은 '백'남준, 오늘은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총정리한다는 의미로 '피드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봤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간다는 의미도 있다)의 무한 제곱" 그는 열린 회로를 미리 만들어놓았다. 앞으로 투 시즌이 있을수도. '왜 21세기에 백남준인가?' 돈, 권력, 명예도 우습게 본 백남준//
https://www.youtube.com/watch?v=r6P1KLrTiBg
백해영갤러리 관장, 권나영, 신미지, 이윤서 큐레이터와 주변에 많은 분들의 도움과 충고 감사. <백남준론과 인생철학 동반된 이야기>
[1] 백남준 전시란 사건이 일어나고 폭풍과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세월호와 같은 사건이 아닌가. 사건은 각성을 준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각성을 준다. 기존의 가치를 바꿔준다. 그래서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 진정한 전시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고 흔히 말하지 않나. 그래야 삶에 변화가 온다고 쉬운 일 아닌 것 같다. 그런가 아닌가(?) 생생활활 생의 활기와 에너지 일어나야 축제 향연[1] "살어리 살어리 살어리랏다" 생생활활(生生活活) / Life&Life <백남준 예술과 관련된 생활철학 단상>
[2] <서론> 이경희 여사가 번역한 백남준이 1963년-2005년까지 아베에게 보낸 일본어로 쓴 97편의 편지>
백남준이 1963년-2005년까지 아베에게 일본어로 쓴 97편의 편지를 보냈다. 그중 하나인데 이경희 여사가 최근에 이 난해한 일본어를 번역했다. 백남준의 서체까지 꿰뚫어 보는 이경희 여사가 아니면 번역할 수 없었다. 일본어에 정통한 교수에게 의뢰했지만 번역을 할 수 없다고 해 이경희 여사가 하게 된 것이다.
백남준이 1963년-2005년까지 아베에게 일본어로 쓴 97편의 편지 속에 나오는 전자공학 기술용어집까지
[3] 백남준 유치원 친구 이경희 여사 2월 5일 초대받아 사인이 들어간 그분의 책 세권 받다 나의 책 2권을 드리다. 그리고 정재숙 청장 등등. 이경희 여사 백남준 전문 연구 기자라는 과찬의 말까지...
[4] 백남준 유치원 동창 이경희 여사 초대로 플라자에서 만나다. 소중하고 이경희 저 희귀한 백남준 관련 서적 선물로 받다. 아베로부터 받은 일본어 아카이브(백남준이 1963년-2005년까지 아베에게 보낸 일본어로 쓴 97편의 편지를 번역하다) 어렵게 어렵게 이경희 여사가 번역을 하다. 이런 일본어는 이경희 여사가 아니면 번역할 수 없단다. 백남준의 일본어가 워낙 랜덤 해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같이 동참하다.
이경희 여사 백남준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글(97통) 번역 후기 I 이경희 여사보다 정확한 번역을 위해 일본에 사는 아베를 2번이나 찾아가다.
[인사철학] 의심스러우면 쓰지 말고. 일단 썼다면 의심하지 마라. 백남준 일단 알게 된 사람이나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지금 당장 아니더라로 언젠가는 늘 도움을 주려고 했다. 백남준의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킹은 여기서 온다. 아베와 편지 교환 97통을 봐도 그렇다. 그에게 신세 진 전자공학기술 갚기 위해 평생 노력.
백남준 인류에게 전자 정보와 지식 원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주려고 자신은 평생 빚 속에 살았다. 아베에 보낸 편지 속에 속속히 드러난다
[1]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에 단 한번 만나는 인연이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할 스승으로 존경하는 벗인 슈아 아베 씨에게 바침 -백남준 2005년 11월 10일(백남준 타계 2개월 전), 백남준이 아베 씨에게 보낸 일본어로 보낸 엽서와 편지. 이경희 여사가 번역 백남준은 1963년 아베를 만난 이후 1964년부터 2006년 사망할 때까지 97통의 편지와 엽서를 보내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과 지성의 네트워킹이었다. [*]"해시시(미국에서만 나오는 마약)는 인스턴트 선불교인가?" -백남준 [평] 미국은 지금 무기 장사로 안 되니까 마약을 싸게 팔기 시작하다. 미 부통령의 지시(?). 그런가 아닌가(?). 바이든이 당선되면서 작년 11월부터 기름값이 올라가다. 왜(?) 석유회사의 더 많은 돈을 벌게 하기 위해서 그런가 아닌가(?)
[1]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 월요 강좌 20강(5-6개월)> 강의 자료 묶어보니 사진을 빼고도 687쪽이 나오네요. 문제는 책의 질이다. 백남준 월요강좌 자료집 백해영 갤러리 기획 1974년 백남준 인터넷 발명으로, 빅 브라더중 하나인 미국 정보부가 맥을 못 춘다
[2] 누구는 왜 백남준에게 관심?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알고 나면 다르게 보인다. 인터넷을 만든 예술가가 백남준이기 때문이고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 다 백남준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가 누구인지 공부하는 것은 당연지사. 우리(인류)는 모두 백남준의 은하계(Galaxy)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지다. 그 때문에 가장 빠르게 가장 쉽게 가장 싸게 미국 CIA보다 더 고급진 정보와 지식을 검색 페이스 북 등 SNS 다 백남준 덕분. 그 덕분에 가장 빠르게 가장 쉽게 가장 싸게 미국 CIA보다 더 고급 정보와 지식을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 핵심] 내일의 기쁨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희생시키지 마라. [평] 내일의 기쁨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희생시켜라. 종교가 거짓이 될 때 쓰는 말이다.
[1] 백남준, 그 자체가 문화인류학 대백과사전이다. 그는 한국의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다. Nam June Paik, He himself is an encyclopedia of cultural anthropology. He will be Korea's ancient future.
[2] 동서양 구분 자체가 차별과 불평등 심화할 수 있다(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골자) 여기에 대해 동서의 구분이 말이 되냐고 투털 거리며 만든 백남준 작품이 바로 <바이 바이 키플링>이다. 동서가 뭐냐 남북이 뭐냐 다 같은 것이다. 서구의 이분법이 인류에게는 주는 해악은 끝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융합의 조화(비빔밥 방식)'라는 한국인 특유의 철학으로 철폐시켜야 한다. 인류는 동서도 아니고 남북도 아니고 그저 하나일 뿐이다
[3] 한국 미디어 혹은 세계 미디어는 정부와 국민을 분열시키고 빈국과 부국을 이간질시킨다.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교란자 역할을 한다. 이걸 보다 못한 백남준 스스로 교란을 교란시키는 예술적 교란자로 자처하다. 백남준 한국 미디어 혹은 세계 미디어가 광고주에 입맛을 맞추려니까 사기에 사기 치는 예술적 고등사기꾼이라고 자처하다.
[4] <1964년 신대륙 뉴욕으로 건너가 31살의 샬럿 무어먼이라는 그의 마음에 드는 환상적 파트너를 만났고 나이도 만 32살 그에게는 예술가로서 에너지가 최정점에 도달한 시기이기도 하다. 아마도 백남준 생애에서 가장 질 높은 에너지를 발산한 시기이자 새로운 출발을 하기 최적의 시기가 아닌가 싶다.> // (Alison Knowles)" Alison Knowles is an American visual artist known for her sound works, installations, performances, and publications. Knowles was very active in the Fluxus movement, and continues to create work inspired by her Fluxus experience www.youtube.com/watch?v=71MuJiwcyuk&feature=emb_logo
[5] 왜 독일인이 백남준을 좋아했나? <전쟁악몽에 시달리는 독일인에게 3차 세계대전을 막아줬기 때문이다> 너무나 비참한 1차 대전 후 절대 전쟁이 안 일어나지 생각했는데 또 2차 대전이 일어나서 독일인들은 스스로 놀라기도 했는데 그래서 독일인들은 3차 대전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남준이 와서 그들에게 새로운 예술바람을 일으켰고 결국 백남준 때문에 3차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죠. 독일사람들 한숨 돌리다 그래서 그들은 백남준에게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그를 결정적으로 존중하게 되었죠. 게다가 백남준의 패거리 중 하나인 보이스를 만나 그의 예술운동은 더욱 확고해졌죠. 게다가 변방인 독일미술을 백남준 보이스 환상적 커플이 세계 최고의 미술 나라로 변모시켜준 것이다.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독일 사람들 나치역사의 악몽을 정신분석가처럼 치유해준 장본인이다. 백남준 무당이잖아요.
[1] 지난번 이경희 여사를 만나면서 이동식 전 KBS 기자도 만나다. 1984년 KBS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실무 총책을 맡았던 당시 1984년 11월 요셉 보이스 작업실을 방문하다. 백남준 소개로. 이동식 기자는 백남준이 가장 신뢰하고 좋아하는 기자였다. 그때 정황에 대해 물어보니, 당시 취재 자료가 KBS에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아쉬워했다. 여기에 일부 이동식 기자와 요셉 보이스 인터뷰 내용이 남아있어 다행. 올해가 독일에서는 요셉 보이스 탄생 100주년이다. 그는 독일에서 문화대통령으로 신격화되어 있는 예술가이다.
이동식 기자의 필력은 소문이 나 있다. 아래 보이스에 대한 소개 요약이 잘 되어 있다. "예술가로서 요셉 보이스는 미국의 워홀과는 정반대 스타일 예술가. 창조의 자유를 추구하고, 창의성을 확대하는데 그 관심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1967년부터는 대학생들의 정치적인 집회를 지원했고, 민주주의도 간접 민주주의가 아니고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어떤 때는 직접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수단으로 권투시합 벌여 웃통을 벗고 선수로 띄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깡패 예술가>
이렇게 거리로 자주 나오다가 드디어 1972년 몸담고 있던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독일의 각계 인사와 전 세계 행위예술가들이 이 해고조치의 부당함과 즉각 복직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 보이스는 이른바 자유대학이란 것을 만들어 대학 건물 안에서만이 아니라 아무 데고 교수와 학생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 국제 자유대학 운동은 독일뿐만 아니라 스위스, 영국, 미국 등 각국에 퍼져나가 지부가 설치되었다.
한편 요셉 보이스는 어린 시절 푸른 숲 속에서 보낸 추억이 바탕이 된 듯, 환경보호 안을 정당의 강령으로 하는 녹색당을 창당하는 창당인으로서, 현재까지는 녹색당 운동의 주 멤버이다. [출처] 요셉 보이스를 만나다| 작성자 이동식 기자
[이동식 인문 탐험가]<기적 같은 이야기, 백남준 이미 1974년에 비대면 시대를 완벽 준비해 놓았다> 얼마 전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한 음식 프로그램에 손이 멈춰졌다. 장안에 인기를 끌고 있는 요리사 앞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고 그 속에는 전 세계 40여 개 나라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혹은 한국요리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이 화상으로 연결돼 각자의 조리대에 재료를 쌓아놓고 있었다. 서울에서 요리사가 요리방법을 알려주면 영상으로 그것을 보고 요리를 해나가는데 요리가 잘못되면 요리사가 개선방법을 즉석에서 가르쳐주고, 잘 된 것은 칭찬을 해주니 각국에서 참여한 자원자들이 원하는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눈앞에서 배우고 그렇게 만든 음식을 맛보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화상회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세상에, 이제 전 세계 어디에 있든지 직접 수강생이 되어 직접 눈앞에서 요리를 시도하고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평] 이것은 백남준의 1974년 개념에서 온 것이다 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28343
[1982년 퐁피두 백남준 사진이 하나 생겨 여기서 설명 1978년 독일에서 교수되고 파르지에 백남준 천재라고 하니까 프랑스에서 초대 미국에서 휘트니 회고전까지 하니 프랑스도 자극을 받다] 예수가 이웃 사랑을 하듯, 남준은 이웃 미디어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발상 혹은 그런 미디어를 네트워킹시키는 것을 사랑하다. 백남준 삼색기 비디오(TV 384세트) 작품에 대한 프랑스 평론가의 해설과 백남준의 설명, 주로 영어로 그리고 프랑스어로 1982년 "우리는 TV 세트 안에 (사람의 두뇌 같은) 새로운 인공지능을 집어넣으려 한다(Nous essayons de mettre un nouveau cerveau aux téléviseurs) -백남준. 백남준 여기서 인공지능을 언급하다. 백남준 삼색 비디오(Tricolor Video 프랑스 국기 상징) 파리 퐁피두센터 1982년. 이 작품은 TV로 만든 전자 컬러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악명 높은 백남준의 무세수] 백남준 그의 전시장에 며칠 씩 머리 감지 않고 등장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워싱턴 미국 국립미술관 전시 때도 미국의 상원의원 등 VIP가 많이 오는 그의 전시회에서도 한국 출신의 큐레이터가 보니 며칠을 머리도 감지 않고 등장해 놀랐다고 한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마치고 기차 안에서 미국이라는 국가 프로젝트로도 하기 힘든 작업을 개인 예술가가 그것을 그랜드 프로젝트(Grand Project)로 시행했으니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위성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누구도 못한 빅 픽처를 그린 것이다. 이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전형을 유감없이 보여주다. 예술가란 자신의 상상력을 구현하기 위해 미쳐 날뛰는 귀신 곡할 인물이다. 그런 모습이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주일 이상 철야한 한 모습이다.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날 것을 보여주다.
[1] 미술은 뇌를 움직이게 한다. 음악은 몸(관념파괴)을 움직이게 한다. 백남준은 Action Music가 생각난다
[2] 딴 이야기 마네 시절 인상파부터 : 주체적 해석과 관점으로 편집하는 관객이 등장하다. 보들레르 상징파부터 : 주체적 해석과 관점으로 편집하는 독자가 등장하다. 마네와 보들레르는 철친이었다. 마네가 하도 사람들로부터 자살을 생각을 할 정도 어마어마한 야유와 참기 어려운 비방과 공격을 당하자 그때 보들레르에게 편지를 보내 날 살려 달라고 했다고 할 정도라니 https://www.youtube.com/watch?v=Kdc8CGJpTpE
[유튜브 전성시대 EUNSS(?) 기획] 최근 것이 아니고 5년전에 만든 3분짜리 백남준 유튜브인에 앞으로 유튜브 작성에 좋은 샘플이 될 것 같다 <시간을 지휘하는 예술가 "백남준" EUNSS 기획> 예술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 / 한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로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예술가 백남준! 타계 소식과 함께 한국이 낳은 최고의 설치 예술가, '1932.07.20 출생 ~ 2006.01.29 타계'를 시작으로
'백남준'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 특유의 장난스러움과 유희 정신을 포함해 그의 치열했던 삶과 예술을 조금 더 알기 쉽게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였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예술에 대한 정의와 표현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백남준을 처음 알게 된 분들을 위해 더 친숙한 관심을 끌고자 그에 관한 짧은 영상을 제작했다. 예술로 시대의 한 획을 긋고 예술의 흐름이었던 백남준으로 인해 달라지고 탄생한 예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본다.
[1] 예술이란 낯설기를 통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
[2] 21세기는 유머가 최고의 아름다움이 되다 [3] 색, 우리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장소 -세잔 [4] 지식 권력으로서의 대학의 자리는 이제 사라지고 있다. [5] 내 삶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삶을 내가 편집해야 한다. 남이 편집한 삶을 따라가면 망한다. 다시 말해 삶의 맥락을 바꿔라 삶을 내가 결정하라 남이 결정하는 것을 따라 하지 마라. -김정운 교수의 주장 [6] 유대인이 천재가 된 것은 잘 쉴 줄 알기 때문이다. 안식일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금요일 저녁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고 다음날 안식일 예배에 참가한다. [7] 우리의 강박관념, 아직도 재미있으면 죄의식 느끼고 행복하면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제는 우리도 일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인생을 즐기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9] 주역에 담긴 생활철학은 경계하고 경계하라는 메시지다. 경계는 인내 못지않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주역은 장차 일어날지 모르는 우환을 미리 걱정하고 예측하여 경계하는 사고방식을 갖추라는 지혜문서이다.
[1] Multiple Perspective 아래 다빈치의 수태고지 소실점이 다양화되다 지금은 Multiple 해야 Beautiful 된다. 아래 이어령 선생에서 다시 설명
[2] 과거에는 번뇌하는 사람이 창조자였다면 앞으로는 재미있는 사람이 창조자가 되는 시대다 백남준이 바로 그런 인물을 대변한다. [2] School의 어원 Schola는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3] 카라얀은 음악으로 미술을 한 사람이고, 그는 왜 눈을 감고 지휘를 하나 백남준은 미술로 음악을 한 사람이다. 그런 일면이 있다 [4] 예술가란 사람들 숨겨진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사람이다. [5] 지식노동자도 설비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물건으로 설비 바꾸기, 책 무한대로 투자,투자 만큼 반드시 그 성과가 나온다 [6] 한국 아파트, 100년 전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온 것이다 -김정운교수 50살에 자신에 삶에 대해 대반란
[모든 여자가 8방 미인은 아니더라도 1방 미인이 아닌 여자는 없다] 모든 여자가 한 가지 면에서는 모두 다 최고의 미인이다. 나의 지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광고와 미디어를 보고 그럴듯해 보이는 남의 미를 무차별적으로 모방하면 그때 그녀는 낭패를 당한다. 정체성을 상실한다. 여자가 최고 아름다운 나이는 50대 중반이다. 성형을 너무 하면 그때 문제가 생긴다. 물론 얼굴에 얼룩, 상처, 화상, 흔적, 점 정도를 없애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내가 본 최고의 미인은 아프리카 미스 마다가스카르였다. 그 미인을 본 후 서구의 미인은 게임이 안 된다.
"세계의 역사에서 우리가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꾸면 된다 [원문 Cependant l'histoire du monde nous apprend que nous ne gagnons jamais à un jeu nous pouvons par contre en chanter les règles]" - 백남준 <내가 광고에 나오는 미인처럼 되려고 하다가 잘 안 되었을 때 그때 내가 스스로 미인의 기준을 바꿔서 그런 서구미의 기준을 깨버리고 내 나름의 미의 기준을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러면 진정한 미임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금은 남과 달라야 생존하는 시대다.
각자가 미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면 살면 어떨까 싶다. 그러면 그 어떤 미도 모방할 필요도 없고 내가 바로 미의 주인이 되고 그 어떤 미의 기준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서구의 미에 종속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다. 나도 10대는 미국보다 더 미국 같은, 20대에는 유럽보다 유럽 같은 가치를 추구한 적이 있다. 30대에 와서 미에 대한 나름대로의 주장과 가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미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누구 만들어 주는 것도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남이 준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그는 결국 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데비 한의 기사를 쓰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데비 한의 충언] 데비 한은 바로 이런 미에 대한 주인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려 한다. 진정한 미인은 절대로 남의 미를 모방하지 않는다. 다만 미를 창조할 뿐이다. 한 여성이 광고에 나오는 서구적 전형미를 계속 따라 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그런 미의 기준에 맞출 수도 없고 자꾸만 스스로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지고 소외감을 느끼고 그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삶의 대한 가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미에 대한 정체성과 철학을 가지지 못하면 삶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몸과 몸짓 그리고 패션을 통해서 한 시대정신과 가치와 흐름을 본다. 데비 한의 말대로 트렌드(조류)에 따라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미의 기준을 창조하면서 자신이 바로 자기만의 미의 주인공을 살아가면 어떻겠냐고 묻는 것 같다 백남준 방식인 셈이다.
[외모 정체성과 장자] 위와 비슷한 장자의 명구가 있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다른 사람을 흉내 내거나 따라 하려고 하다가는 본래 자신만의 미덕과 장점마저 잃어버린다" -장자의 한단지보(邯鄲之步: 본분[본성]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다가 두 가지 다 잃는다는 비유)
[21세기는 유머가 최고의 지성이고 예술이 되는 시대다] 채플린은 히틀러를 유머로 무너뜨리다. 백남준은 유머와 네트워킹으로 장엄미와 엄숙주의에 찌든 서구중심의 세계미술사를 무너뜨리다.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 시대에 충실할수록 영원한 고전이 된다. 백남준은 인터넷 시대에 충실하다 / 다산 정약용이 엘리트주의의 옷을 벗고 한글로 시를 썼다면 지금 더 많은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조선시를 그렇게 쓰겠다고 해놓고 실천하지 못했다. 다신의 실수다.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것은 성 에너지] 모든 아름다움은 출산을 유도한다(번식 혹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정확히 이것은 가장 관능적인 영역에서 가장 영적인 영역까지 다 해당하는 미의 속성이다…. "(TI IX.22) 우상의 황혼 Twilight of the Idols(1889) "All beauty incites to procreation- … precisely this is the proprium of its effect, from the most sensual regions up into the most spiritual….-니체
[공자도 같은 의견] 공자 왈, 색만큼 덕을 좋아하는 사람을 들어보지 못했다. 색이 얼마나 본질적인가를 역설적으로 비유하는 말이다. [올덴버그도 같은 의견] "The erotic or the sexual is the root of art its first Impulse" - Oldenberg
[백남준과 같은 의견] 백남준의 예술에도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백남준에게는 마릴린 멀로는 중요한 존재였다. 백남준은 샬럿 무어먼이 마릴린 먼로의 대타인지 모른다. 아래 백남준의 마릴린 먼로 2번 1962년.
<오노 요코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별인지 잊지 마세요> Don’t forget how beautiful the planet can be. And the beauty of the Universe surrounding us. The sun rising. The moon rising. The stars shining. What a great symphony! I know it’s hard. As I write this, I am telling myself too.
[우상파괴자 니체와 우상파괴자 백남준 상통] 니체의 저서 <우상의 황혼 또는 기존 서구철학을 망치로 깨는 방법(Götzen-Dämmerung oder Wie man mit dem Hammer philosophirt / Twilight of the Idols, How to Philosophize with a Hammer)> 니체 <우상의 황혼 또는 기존 서구철학을 망치로 깨는 방법> 니체 서구 철학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재정리 백남준은 서구 중심의 세계미술을 다 쓸어버리고 재정리하다.
백남준 음악의 신존재론(음악은 청중 속에게 어떻게 존재하는가?) 백남준의 음악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다. 액션 뮤직이다. 더 나아가 청중을 충돌질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험적인 충격을 주는 것이다.
백남준이 행위음악 일선에 나서게 된 공기는 위에 나오는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에 명시하다. "나는 음악의 오선지. 전통적 악기, 벨칸토 창법, 비명소리 등에 진절머리가 나 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거리로 나아가 관객 속에 우연히 섞이고 또 우연히 나타나는 관객의 소통에 상당히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가 비디오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행위음악에 집념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이같은 근거에 있는 것이다. -이용우
[이대원] 이번 백해영갤러리 기회적에 참고 하시면 되겠네요 bit.ly/FPwSU
mn.kr/1nq02 [윤형근] 그의색채는 그렇게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의 불꽃같다. 그러나 활활 불타고 있지만 다 태우지 못하고 남은 재의 색채라고 할까. 거기에서는 어둠의 악령과 인간의 혼령과 역사의 망령까지도 다 순화될 것 같다. 베니스에서 그의 회전이 열렸을 때 현지 언론에서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색채"라고 평했다. 사실 윤형근은 가장 한국적인 색,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색을 오래전부터 탐구해 왔다. 그의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언제부터 흙 빛깔을 좋아졌다. 또 나무 빛깔도 그렇다. 또 돌의 빛깔도 그렇다. 겨울의 자연 빛이 좋다. 이 모두가 인조가 아닌 자연의 빛이라 퇴색한 것 같은, 탈색한 것 같은 그런 빛깔 말이다."
선생님의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는 “메시지 바는 무슨 메시지… 메시지를 전하려면 말로 하지, 왜 어렵게 작품으로 합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흥미도 없고, 돈 많은 할리우드 영화업자에게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백남준
“사실 경제학자나 정치가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들이다. 끝까지 싸운 것은 예술가들뿐이다.” -백남준
[교토상 수상자 연설문] 노벨상 수상자 연설문 있듯이 교토상 수상자 연설문 있죠 그때 나오는 글 중 서문이라 어렵다.미학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를 다룰 목록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 [백남준 논문] <서론>컴퓨터와 시청각 예술 관련 인사: 1) 막스 매튜스(Max Mathews 미국 컴퓨터 과학자), 2) 짐 테니(Jim Tenney), 3) 피터 데니스(Peter Denes), 4) 마이크로 놀(Micro Noll, 벨연구소), 5) 힐러(L. J. Hiller, 일리노이), 6) 괴츠(K.O.Goetz), 7) 막스 벤제(Max Bense), 8) 크세나키스(Xenakis, 유럽)
[1] 프랑스의 백남준 전문가 '장 폴 파르지에'는 백남준을 나의 어머니(Ma Mère)라고 했는데, 백남준은 21세기 예술의 어머니다./ [2] 마고시대의 자궁과 전자시대의 컴퓨터는 어느 정도 닮아 보인다. [3] 세계사는 여성의 '덕'에 의해서 생존할 수 있었다. 20세기는 대량학살을 기반으로 남성의 힘으로 하는 전쟁과 혁명으로 실패한 것이다. 21세기 경영을 여성이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지성주의와 똑똑한 사람은 다른 것] 데이비드 흄은 "행운은 보통 용감하고 진취적인 사람에게 호의적이며, 자신에 대한 훌륭한 평가만큼 용기를 고취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부심(self-esteem)이야말로 모든 성공의 키워드이자 바람직한 삶의 태도. 다만 여기에 동양의 미덕이 겸손이 들어가면 더 좋다.
[원효 화쟁] 원효는 반대로 생각. 나는 무조건 틀리고 너는 무조건 맞는다에서 대화를 시작하면 보다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나중에 혹시 내가 맞으면 더 좋은 모양새가 된다. 원효는 이것을 <화쟁>이라고 했다. 쌍방형 소통의 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최대 과제는 소통을 활성화시키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화쟁의 반대는 논쟁이 된다. 우리 시대 가장 필요한 소통 방식이 바로 원효의 화쟁이다.
[1]<아래 1974년 백남준 예견(visionary), 록펠러 문화재단에 예술기금을 받기 위해서 낸 제안서, 백남준의 모든 발상에는 저비용 경제개념이 깔려 있다>
[2]“새로운 전자 초고속도로(internet)의 건설은 더 거대한 사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뉴욕과 LA를 강력한 송출 영역으로 운영되는 전자 텔레콤 네트워크로, 그리고 대륙간 통신위성, 도파관(導波管), 동축케이블망, 레이저 광통신망 등으로 연결하면, 경비는 사람을 달에 내려놓는 것만큼 들겠지만 그것으로 생겨나는 부산물에 의한 혜택은 훨씬 클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 사이를 컬러 화상 전화로 연결하는 회의도 상업적으로 전망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애초의 설치를 위한 구리 값은 들겠지만) 원거리 화상회의는 항공기 여행과 도시 거리 사이에 혼란스럽게 왕복하는 공항버스를 아주 영원히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다. 효율적인 통신은 어디에서나 사회적인 낭비와 모든 종류의 사고들을 감소시킬 것이다. 그 소득은 환경상으로나 에너지 분야의 현명함으로 보나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텔레컴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유일한 윤활제이자 보충제라는 역할을 다하고 새롭고 놀라운 인간들의 노력을 만들어내는 발판이 될 것이다.” -이동식 기자 번역
[3]백남준이 60년 전에 한 제안이 지금 활성화되고 있다. 1인 미디어 유튜브 전성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앱이란 말이나 원격 의료 치료나, 인터넷 쇼핑 국제 화상회의, 인공지능 등등등 백남준이 너무 앞서가기는 했다. 미래는 창조적 인간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다 성실과 근면 그런 것은 20세기 초에나 필요했다. 정말 백남준 강좌 특히 비대면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 갇힌 코로나 시대 열린 회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4] <나는 TV아트의 비발디다 -백남준> [4] 1974년 백남준 예견(visionary), 록펠러 문화재단에 예술기금을 받기 위해서 낸 제안서, 백남준의 모든 발상에는 저비용 경제개념이 깔려 있다> [3] 우리나라 대학에서 백남준 강좌가 없는 것은 총장들이 그런 수업이 대학생 취직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백남준과 창조경영 꼭 그런 강의를 해야 하나? 백남준이 60년 전에 한 제안이 지금 활성화되고 있다. 1인 미디어 유튜브 전성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앱이란 말이나 원격 의료 치료나, 인터넷 쇼핑 국제 화상회의, 인공지능 등등등 백남준이 너무 앞서가기는 했다. 미래는 창조적 인간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다 성실과 근면 그런 것은 20세기 초에나 필요했다. 정말 백남준 강좌 특히 비대면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 갇힌 코로나 시대 열린 회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5]“유아성(乳兒性, 어린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예술가가 되지요. 어른이 되면 장사꾼이 되지요.” -
[6]“경기중학교 시절에 천관우 선생에게서 노장사상을 배웠는데… 얼마나 흥미가 있었는지 넋을 잃을 정도였다. 나중에 독일에서 유럽의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노장사상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걸 보고, 그들에게 노자·장자를 설명해 주니까 그제야 끼워주더라고, 그걸 그렇게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7] <천재 작곡가 김순남 선생이 살아있었다면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보다 더 높은 명성을 얻었을 것> 백남준이 두고두고 애석해하는 것은 “연주자라는 건 발에 차이도록 많지만 제대로 된 작곡가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것이다. 당시에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세계 음악사에 크게 기여할 음악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는 말을 자주 했다. 백남준은 김순남을 만난 본 적이 없었으나, 김순남의 동료였고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던 이건우 선생과 신재덕 선생을 통하여 김순남의 음악을 잘 알고 있었다. 김순남과 이건우는 한국전쟁 중에 월북, 휴전 후인 1953년 10월 경 모스크바에 유학 중 귀국 명령이 내려져 미제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평양 근교에서 박헌영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8]<6개 국어를 하고 세계정세에 밝은 백남준 미국과 한국 정보부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백남준은 사실 미국 사회에서 위험한 인물로 볼 수도 있었다> 내(김홍희 선생)가 백남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0년 그분의 10주년 해프닝 공연 때였다고 기억된다. 바이올린과 축음기를 깨부수는 역사적 작품을 재현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바닥에 널린 파편들을 주워 사인을 받으려 했으나, “공짜로 해 줄 테니 스튜디오로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조각마다 ‘백’ ‘남’ ‘준’이라고 일일이 사인해 주시고서는 “보석함에 보관하라”라고 하셨다. 나는 남편(천호선)이 뉴욕 한국문화원 문정관이어서 그분을 함께 만나곤 했으나, 당시 KCIA에 대한 선입견으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아 처음 한동안은 가까이 지내기가 어려웠다.
[9]백 선생님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예지력 있는 비전을 가진 세계적 천재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파격 할 수 있는 용기가 곧 그분의 예술혼이다. 백남준아트센터 등 기관이 나서 그분의 작품 카탈로그부터 작성하고, 또 그분의 예맥을 잇는 후진 양성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김홍희 <이 글에서 보면 백남준 한국 정보부와 미국 정보부 감시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류학] 천부인(天符印 도장) 또는 천부삼인(天符三印)은 단군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물(神物)이다. 천제 환인이 아들인 천왕 환웅에게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데 사용하도록 준 세 가지 물건이다. 고대 사회에서 지배 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로 보통 검(생존과 문명과 과학 컴퓨터&인터넷 정보 권력), 방울(악기 문화 SNS), 거울(역사와 철학 TV 모니터)의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백남준이 샤머니즘을 높이 평가한 이유] 그의 융합사상(비빔밥 사유)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1) 고대의 정령숭배+2) 고등 종교의 하늘 아래 '지고신'을 믿다+3) 종교적 화해 사상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신들의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였다. 백남준은 샤머니즘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작명에서 아버지 씨를 사용하지만, 아버지는 껍데기일 뿐이고, 어머니가 삶의 알맹이다. [평] 동양에서 성을 먼저 쓰는 것은 가문이 중요하고 서양에서 이름을 먼저 쓰는 것은 개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아닌가.
[1] 백남준 비대면 시대를 미리 내다보고 60년 전 이미 열린회로(open circuit) 시대를 만들어놓았다. 중국인이 발명한 '줌'도 역시 백남준 개념이다. 그리고 대량실업시대를 예언하고 그들이 돈은 못 벌어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다 만들어놓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터넷 놀이, 댓글놀이, SNS 소통놀이이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근무하는 무지개 방식 노마드 방식의 일터(직장) 개념이다.
[2]노마드 시대 개인적으로 1) 백남준 강좌를 통해 다시 백남준 공부를 여러분과 같이 할 수 있었고 2) 소통방식이 영상이 중심이 되는 비대면 시 영상 혹은 유튜브 친화적 삶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백해영 갤러리를 통해서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식사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
백남준은 그러한 사이버네틱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고 싶은가, 그것이 이어지는 ‘미학과 사이버네틱스의 관계 목록’이란 글이다. 21세기를 열어가는 백남준의 기발한 착상과 아이디어, 그의 미래관을 보여주는 웅장한 구상이다.
<위너와 맥루한의 방법론은 곧 사이버네틱스의 방법론이다 -백남준> 이동식 선생님 백남준 교토상 수상할 때 연설물을 분석하면서 백남준은 맥루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와 독립된 사상가임을 여기서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백남준 교토상 수상 기념 연설물 일부분(미디어론을 주제로 한 논문)이 나온다. *교토상을 노벨상과 동급의 세계적 권위를 가진 상으로 노벨상에서 취급하지 않는 분야에서 상을 수여한다. http://m.blog.naver.com/sunonthetree/221542599318...
[전문내용 생략] 응용 분야도 광범위하여 그 경계를 분명하게 표시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자동 계산기를 응용하여 문장이나 도형을 이해시키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일, ② 전철의 자동운전이나 공장의 자동운전 등 모든 종류의 자동화와 관련된 제어공학, ③ 전화·텔레비전·우주 중계·데이터 전송(傳送) 등의 응용과 관련된 통신공학, ④ 생체정보의 해명, 인간공학, 인간·기계계(機械系)의 연구, 피로와 안전의 문제, 학습이나 교육 기계 등과 같은 생리 및 심리학과 그밖에 경제학·사회학에의 응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동식 선생의 '맥루한을 넘어선 백남준' 글 중에서 일부>
맥루한의 ‘촉각’의 강조는 의외로 그보다 앞서 나온 발터 벤야민의 미디어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6). 또한 맥루한과 벤야민은 예술에 대한 유토피아적 태도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술이 미래의 미디어와 사회의 발전에 대해 예측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맥루한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일종의 ‘원격 조기경보시스템’으로서, 기존 문화에 어떤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지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도, 더욱 중요하게는 예술가들이 맥루한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는 이유이다.
백남준의 생각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예술은 경계를 넘다 드는 급격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새로운 시대에 예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설계도로 그려놓았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예술에 있어서, 생각에 있어서, 문명에 있어서의 사이버네틱스이라고 말한다.
1947년 미국 수학자 N. 위너를 중심으로 하는 과학자 그룹을 사이버네틱스라고 이름 지었는데, 어원은 키잡이[舵手]를 뜻하는 그리스어 kybernetes이다. 위너의 정의에 따르면 사이버네틱스란 “어떤 체계에 포함되는 두 종류의 변량이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가 직접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한다. 이때 제어할 수 없는 변량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값을 바탕으로 하여 제어할 수 있는 변량의 값을 적당히 정하여, 이 체계를 가장 바람직스러운 상태로 도달시키는 마법을 부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학문이라 하였다.
이를 위하여 위너는 일반 조화해석(一般調和解析), 예측(豫測)과 여파(濾波)의 이론, 비선형 통계 이론(非線形統計理論) 등 수학상의 새로운 이론을 많이 발전시켰다. 제어와 통신 문제에 관련된 종합적인 과학이므로 이와 관련된 학문의 분야는 매우 광범위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에는 자동계산기의 이론, 제어의 이론, 정보통신 이론 등이 있다.
[1] 달밤, 흰 한복 차림의 여인이 웬 TV 앞에서 한 서린 창(唱)을 뽑는다. 이윽고 숨 가쁜 타악과 함께 뒤편 건물 외벽 전체에 영상이 투사돼 10여 대의 TV가 흘러 다니더니, 공중에 드론 떼가 출몰해 현란한 군무를 펼친다. 2019년 지난달 24일 한국서 처음 열린 '국제 전자예술 심포지엄'(ISEA 2019) 개막식을 장식한 이 퍼포먼스는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 했던 한국 대표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을 향한 오마주(경의)였다. 백남준을 상징하는 'TV'에서 영감을 얻어, 백남준의 후예로 불리는 이이남 작가 등이 인간과 기계의 교감을 통한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드러냈다 -조선
[2] 백남준 인류에게 전자 정보와 지식 원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주려고 자신은 평생 빚 속에 살았다.
[백남준] 이순신과 정약용 그리고 거북선: 프래탈 거북선 1994
천재는 천재는 알아보는 것인가. 백남준은 이순신과 정약용에 관심이 높았던 것은 이런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아아 우리 겨레여!/마치 자루 속에 갇힌 것 같구나/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이고/북방은 높은 산으로 가렸으니/사지는 오므라들고 굽혀져서/기개와 뜻 어디에 편단 말인가/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고개 들어 세상 바라보니/견문이 좁고 정(情)이 흐릿하구나/남의 것 모방하기에 급급하고/제 것을 갈고닦을 겨를이 없구나/백성의 입안에 재갈 물리고/어리석은 것 하나만 받들게 하네/차라리 단군 때/그 질박한 고풍(古風)이 그립고나!" -다산 정약용. 한반도에 갇혀 세상 혹은 세계 물정 모르고 살아가는 조선 백성들 가엽게 여기다.[뒤에 다시 나온다]
백남준 이순신(군인) 전자 거북선 작품 3(?) 가지가 있다. 이순신 못지않게 작품을 통해 정약용(학자) 전자 거중기 존경을 표시하다. 둘의 공통점은 발명가라는 점이다. 천재가 아니면 못 만든다. 제작비 유지비도 어마어마하게 든다.
[1]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는 끝없이 내 속에서 샘솟는다. 나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백남준이라는 '문화은행'에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대여받고 있다. 아무런 이자도 받지 않고 그것이 공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이라도 쓴다. 그는 일본에 가면 '일본의 백남준'이 되고 독일에 가면 '독일의 백남준'이 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의 백남준'이 된다. 프랑스도 백남준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다. 과거 파리대학에서 백남준 강좌를 20년 간 연 이유다 그는 그렇게 온 인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2] 워싱턴에 있는 미국 스미소니언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존 핸하르트'는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전자 초고속도로'에서 '인터넷'과 'SNS'시대를 예고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우리 모두는 백남준의 은하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3] 인터넷을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1인 기업, 1인 미디어, 전자신문, 스마트폰, 인터넷 쇼핑, 인공지능 디지털 사이버네틱스 기술 등등 60년 전 백남준이 다 예언한 것이다. 최근 영국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 기획하면서 이런 사실을 더 확실하게 선명하게 알게 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TV만 서양이 만들었지 그와 관련된 예술화 정보화 인간화는 다 백남준이 완성시켰다.
[4] 그는 만사에 낙천적이다. 그만큼 고민을 철저히 했다는 뜻이다. 그러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만큼 선(禪)의 수행자처럼 마음이 비웠고 비무장 상태였다. 그러나 지적인 면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에게 질문을 던져 이기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욕 무심이기 때문이다.
[5] 이영철 관장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범위 안에 있다며 그러기에 백남준은 '초국가적 장기 프로젝트'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을 쓰는 국립미술관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백남준&맑시즘] [1] 맑스는 죽었다고 하지만 맑스가 남긴 글을 보면 인류공동체(단결)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백남준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자본론을 꺼내 인터넷을 발명했다. 왜 맑스가 인류공동체를 유지하려고 했던 그 정신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2] 백남준은 TV Commune 정신에는 말스보다 더 차원 높은 홍익사상(두루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이 깔려있다. 홍익사회 Super Global Human Community로 해석할 수 있다. 인종, 국경, 종교를 넘어서는 인류 보편 사상으로 모든 인간에게 이익을 주려고 하는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유방식이다. 폭넓은 의미의 호연지기도 포함되어 있다.
[3] <전 세계 창조신화에서 홍익사상처럼 온 인류에게 두루 도움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높은 이상의 이념으로 출발한 경우는 드물다>/<전 세계 창조 신화 중에서 홍익사상처럼 온 인류에게 두루 도움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높은 이상의 이념으로 출발한 고대국가는 없다> -토인비. /백남준의 휴머니즘은 홍익인간이다(민족적 개념을 넘어 세계 보편적이다). 맑스는 전 세계 노동자를 의식했다면, 백남준은 전 세계 지구촌 네티즌을 의식했다. 정보에서 소외와 배제를 없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안서는 모두가 저비용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4] 역사가 신화가 되어야 시처럼 암기하거나 노래하기 쉽고, 편하게 가지고 다니면서, 스토리-텔링 하기가 쉽다. [3]여기에 더 근원적인 이 작품의 지적 계보학은 뭔가, 그건 아마도 백남준이 17살에 경기중학교 시절 안병욱 선생에게 배운 맑스, 그가 착안한 '코뮌'사상인 것 같다. 백남준은 그 사상을 평생 간직했고 그걸 비디오아트에 적용해 'TV(비디오)코뮌'을 만들었다. 1) 소설가 김훈 인터뷰-2) 황필호 철학자 인터뷰 등등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다. 백남준은 이런 이상을 1970 TV Commune에서 시작해 1993년 인터넷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로 완성하다.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때, 스키타이 단군을 출품한 이유일 것이다.
[5] 실존(인간의 자유 혹은 선택)은 본질(신의 속성)에 앞선다 -사르트르. 무신론적 맑시즘을 재해석한 말이죠. 인간은 BCD다 인간은 삶(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매 순간 선택(choice)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죽음을 극복하는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존재다. 쉽게 말해서 자유(의 선택)를 언도받는 존재다.
[6] 그러나 사르트르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구조주의 다시 말해 인류학)'가 나옴으로써 그의 전성기를 마감했지만, 여전히 그의 사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고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위대한 것은 그의 사상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의 사상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늘 사회적 약자에 편에서 그의 지성을 불태웠던 것이다. 그가 죽었을 때 파리 시민들이 거리를 채웠다고 그 길이가 5KM 이상이었다고 한다
[7] [생생활활(生生活活)] 백남준과 맑시즘의 차이는 재미가 있다와 없다의 차이. 재미가 없으면 어떤 혁명도 실패한다. 동양의 생활(活: 활기)이나 프랑스어 vie 영어 life는 다 생의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의미다. 동서가 같다. 구별이 없다. 그런 면에서 삶의 본질은 축제다. 21세기 다시 선사시대 모계사회로 가고 있다. 왜? 1) 가장 자연스러운 가족 사회 2) 스트레스 없는 사회 3) 여자를 소유하기 위한 권력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 4) 환경 친화적(지구 어머니) 사회 인권과 민주주의 실현이 쉬운 사회.
[8] 기독교, 신 이름 야훼의 의미: "나는 나다". 대타 존재(인간은 이웃을 위한 존재) VS 사르트르, 인간의 의미: "나는 나다" 대타존재(Etre pour Autrui. 인간은 남을 위한 존재 남 없이 나 없다). 그러나 여기는 무신론이다. 야훼와 사르트르의 차이는 전자는 신의 도움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신의 도움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백남준의 휴머니즘은 맑스와도 차원과 다르다. 그 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높다. 맑스는 전 세계 노동자를 의식했다면, 백남준은 전 세계 지구촌 네티즌을 의식했다. 정보에서 소외와 배제를 없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제안서는 모두가 비폭력과 저비용으로 할 수 있다고...
[9] 예술은 원래 판타지이고 유토피아다. 다만 삶을 중시한다. 문화: 환상, 가상현실(AR), 인공 천국(보들레르) 등등으로 표상된다.
[1]<백남준과 이어령 장관 일화> 백남준은 넓은 의미의 보편적 유물주의자였지만 진보와 보수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나 있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은 진정한 보수의 힘을 보여주었다. 사실 보수주의자인 척하는 사람 너무 많다. 1967년 진보적 참여주의자 김수영 시인과 논쟁에서 보수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백남준과 이어령)은 창조적 발상이라는 면에서 완벽하게 상통했다. 이 사진 1990년 7월 23일 사진 두 분과 관련해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한 번은 이 장관이 백남준은 문화부로 와 달라고 요청해, 백남준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잡상인 혹은 노숙자로 몰려 출입을 못하다가 나중에 간신히 장관실을 들어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1] <당시 문인 천재들 예술과는 맑스과 입학해야 알아주는 시대였다> 백남준은 조벽암 시인의 시 <향수>를 가사로 작곡을 하기도 했다. 백남준이 당시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윤동주의 스승인 정지용이었다.
[2] 그가 독서광이라는 건 1995년 소설가 김훈과 한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김훈은 백남준에게 모국어로 쓴 책을 어디까지 읽었냐고 묻자 그는 '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박태준, 김기림'을 읽었다고 했다. 그중 정지용이 단연코 최고라고 했다. 그의 비주얼 한 언어와 상징적 의미가 담긴 날카롭고 가파른 언어구사에 매료됐다는 것이다.//백남준은 유럽에 유학 가서 이미 한국에서 다 배웠기 때문에 여기서 더 배운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1945년 해방기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 집에 일본 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사상전집' 등이 많았나보다. 그걸 다수 읽은 것 같다. <당시 문인 천재들 예술과는 맑스과 입학해야 알아주는 시대였다>
[2] <INTER-FACE 창조적 실천가> 이어령 교수의 백남준의 인터미디어 개념 따라 하기. 이어령 교수의 인터페이스의 선구자다. 팔순이 넘어서도 그의 디지털 마인드는 혁신적이다. 태그 언어, 메타언어 등을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활용한다.
www.youtube.com/watch?v=xTBHFmAHCo8&fbclid=IwAR1u8BQUaymJRIHtMfVq0hO2lSXYttJlhbbvlaTo_7xs8XauLlkdKu8avoM
===>===> 본론===>===> 본론
https://www.youtube.com/watch?v=gLzFgkL8LPM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 10가지 앞으로 시대정신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백남준&코로나] <20> '왜 21세기에 백남준인가?' 돈, 권력, 명예도 우습게 본 백남준
<하나> 자신감 넘치는 세계적 발언, 열등감 제로인간 백남준 :
어리석은 사람은 약(백신)도 없다 -아인슈타인/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는 자존감 Self /respect
우리는 자기비하하는 습관이 있다. 이게 잘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대주의를 하다보면 식민지가 된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미술관에 게시된 대형 사진으로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보인다
백남준은 30살에 플럭서스 창시자인 친구 '마치우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색 재앙은 바로 나다(1962)"라고 했고, 60살에 "세계(서구) 역사는 우리에게 그 규칙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1992)"라고 했다. 이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세계적 발언이다. 이중에서도 서른에 한 백남준의 '황화론'은 더욱 인상적이다.
백남준의 가장 유명한 말은 역시 '황색 재앙', 혹은 짐은 황화[黃禍]다. 이것은 13세기 초 유럽인이 몽골로부터 침공을 당하면서 받은 공포감을 뜻한다. '바로 나다' 이건 "국가는 바로 나다"라는 루이 14세의 말에서 온 것으로 영어· 프랑스어를 합성해 "짐은 황화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패러디한 것이다.
백남준 그가 문화 황제가 되어 전 세계를 쓸어버리겠다는 소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온몸에 전율이 왔다. 백남준은 실제 30년 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말을 실현했다. 그는 확실히 그 이전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이유도 있었다. 백남준 집안은 당대 최초의 재벌이었다. 동대문 창신동 저택이 3천 평이나 되었고 한국에 캐딜락이 2대 밖에 없을 때 집에 1대가 있었고 차 수리공만 10명이나 되었다. 부친 백낙승씨는 1920년대부터 천대 이상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의 최고경영자로 일본 메이지와 니혼 대학 상대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의 부친의 여권번호가 6번이고, 백남준이 7번이었으니 그렇다면 당시 대통령, 국민총리, 장관급 다음 순위이지 않은가 싶다. 대단하다. 그의 조부 백윤수 씨 역시 당시 포목점 중 과반 이상을 독점하는 거상이었고 조선 말기 왕실에 비단과 장례 옷감 등을 댔다.
17살에 한반도를 떠난 백남준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기원은 아주 먼 곳 페루까지 올라간다. 그는 또 '조선', '만주', '몽골', '터키', '헝가리(훈족)', '핀란드'는 말 타는 습관 등으로 볼 때 3천 년 전엔 우리와 한 혈통이라고 봤다. E. 데커, 리비어가 저술한 백남준 연구서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백남준 I '피버 옵틱'(Phiber Optik) 6개 모니터 높이 2m 1995년 작. 1993년 '전자 초고속도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지구촌 노마드 전사의 모습으로 분신한 로봇이 오토바이에 TV6대를 싣고 질주하는 모습이 익살맞고 우스꽝스럽다. 아래는 백남준이 고지도에 그린 한국의 유래
"선사시대, 우랄알타이족의 사냥꾼인 우리는 말을 타고 시베리아에서 페루(잉카), 한국, 네팔, 라플란드(핀란드)까지 세계를 누볐고, 그들은 농업 중심의 중국 사회처럼 중앙에 집착하지 않았고 몽골처럼 더 멀리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 새 지평을 봤다." - 백남준
한국은 고대로 올라가면 '환국-칸국(桓國)'이었다. 백남준은 한반도가 북아메리카 인디언, 멕시코 아스텍 문명과 마야문명 그리고 잉카(페루) 문명과 연결해서 본 것은 러시아 북동쪽과 알래스카 땅이 과거에는 육지로 접해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백남준은 지배자의 관점이 반영된 중국 <사기>나 <삼국사기> 등을 불신했다. 하여간 우린 밀리고 밀려 한반도까지 왔고 요동성까지 차지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이뤘다. 신라가 통일한답시고 고구려 땅을 당에 넘겨줘 한반도는 반 토막이 났다. 발해는 230년밖에 못 갔다(고려와 조선은 500년 넘었다)고려는 조금 북진했고 조선은 반도 통일을 이뤘으나 일제에 의해 망했다.
결국 우리는 40여 년 일본 식민통치를 받았고 1945년 일본 천왕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자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분단되었고 남한은 70년간 외국을 나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섬이 되었다. 한국인의 자존감은 뭉개졌고 5·16 군사쿠데타로 개발 독재시기를 보냈고 10년간 민주주의를 하다 '헬조선'이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자존감은 고갈됐지만 조선 후기도 '헬조선(박근혜 때 나온 말)'이었나 보다. 정약용의 시 '술지(述志)'를 보면 당시 조선 백성들이 얼마나 피폐함 속에서 갇혀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아 우리 겨레여!/마치 자루 속에 갇힌 것 같구나/삼면은 바다로 둘러싸이고/북방은 높은 산으로 가렸으니/사지는 오므라들고 굽혀져서/기개와 뜻 어디에 편단 말인가/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고개 들어 세상 바라보니/견문이 좁고 정(情)이 흐릿하구나/남의 것 모방하기에 급급하고/제 것을 갈고닦을 겨를이 없구나/백성의 입안에 재갈 물리고/어리석은 것 하나만 받들게 하네/차라리 단군 때/그 질박한 고풍(古風)이 그립고나!"
다산, 조선백성들 견문이 너무 좁다고 한탄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뭘 하려면 우선 열등감이 없어야 하고 일본과 우리는 똑같아 전혀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라고 백남준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뭣보다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반세기 전에 백남준이 보여준 그런 '자부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이다.
그런데 백남준의 그런 자부심은 괜한 자존심이나 엉뚱한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우선 6개 국어를 구사했고 인터넷 없는 시대에 한국 신문은 물론 <뉴욕 타임스> <슈피겔> 등 세계 유수 신문을 읽었고 전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충분히 수집·분석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의 말에 의하면 백남준은 1)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천체물리학자나 2) 하버드대 생의학 교수 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3) 세계적 예술가, 4) 첨단 분야 전문가와 석학 등 1500명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상호 소통했다고 하는데 이런 점이 그를 세계적 작가를 넘어 세기적인 작가가 되게 한 것이다. (유튜브 자료 : 백남준 코드)
우리 역사에서 단군 이래 아직 백남준을 능가하는 인물은 없는 것 같다. 결국 그는 6·25 전쟁으로 한국을 떠나 글로벌 노마드 작가가 된다.
백남준 언제나 헐렁한 멜빵 패션을 하고 다녔고 젊어서부터 몽골 유목민족의 후손답게 재기 발랄한 모습을 과시하다. 그만의 독특한 자신감, 자존감, 자부심으로 넘친다. 백남준 1991년 사진이다
그의 자신감
베니스비엔날레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자부심
그는 멜빵 패션
언제나 작업이 가능한 복장
해맑은 미소
천진의 얼굴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에게는 돈이 안 보인다
권력을 말할 것도 없고
명예도 우습다
단지 창조하는 자의 기쁨만을 즐긴다
그의 눈빛에는 경쟁자가 없다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 Voyant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다.
3천 년대를 내다보고 있다
나는 불행하게도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함석헌이나 천상병은 봤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내가 너무 근처에서 보는 영광을 누려야 했었는데
하여간 이 사진을 보니
오늘 나의 맥 빠진 기운이 조금은 나아진다
기분을 살려주는 멋진 작품이다
그는 정말 예술을
제대로 하는 보따리 장사다
2014년
하여간 그는 남의 시선에 전혀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과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넘쳤다. 그의 패션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업하기 편한 멜빵패션이면 끝이다. 그래서 그 행색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로 인한 에피소드도 많다. 1990년인가 이어령 씨가 문화부 장관 할 때인가 그를 만나러 갔으나 수위의 저지를 받아 처음엔 못 들어갔다.
백남준은 돈은 물론이고 권력도 눈에 안 보였고 명예도 우습게 봤다. 다만 창조하는 자의 기쁨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그런 일을 당해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그의 해맑은 미소와 천진의 얼굴은 바로 거기서 나왔고 천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그는 랭보가 말하는 '견자(voyant/visionary)'였다. 남이 보지 못하는 3천 년대를 내다봤다. 그는 지구촌을 놀이터 삼아 작업했고 깊은 바다 같은 TV 속에 그의 '우주관·세계관·인생관'을 다 담았다. 젊어서 찍은 재기 발랄한 그의 사진을 보면 맥 빠진 우리에게 힘을 준다. 그는 비디오 제국의 황제로 누구도 경쟁자가 되지 않는 '울트라 슈퍼 파워맨'이었다.
지난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2016년 1월 29일까지 '백남준 글로벌 흥(興)'전이 열린다. '호랑이는 살아있다'도 소개된다. 새천년 벽두에 발표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보내는 21세기 격려사 같다. 호랑이는 한국인의 자존감을 비유한 것으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선언이다. 그 속에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도 담겨 있다.
백남준은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 실험 예술인 비디오아트에 대해 신념을 가지고 끝까지 밀어붙여 전자 아트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 저력은 바로 그의 '자신감, 자존감, 자긍심'에서 온 것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백남준을 흔히 '천년을 써먹을 문화자본'이라고도 한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영감과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지 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백남준을 통해 식민사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안 된다"는 열등감과 패배감을 씻고, 천지에 가득 찬 영기를 품고 옛 선인의 기개인 '호연지기'도 되찾아야 하리라. 그러려면 과학·문화·교육의 선진화 속에 온 국민이 '지식노동자(정보근로자)'가 되어 뭣보다 창의성(메타언어 편집능력 키우기)을 발휘해야 한다. 난 백남준을 그런 롤 모델로 봤기에 그의 연작 기사를 쓰게 되었다.
<둘> '탈영토 제국주의' 제안... 신 실크로드인 전자 초고속도 구상 디지털 노마드 전성시대
요즘 한국 시민들, 최첨단 디지털로 완전무장하다. 어느 나라 시민도 따라올 수가 없다.
▲ 백남준 I '기마민족(Equestrian people)' 1992년 작품. 이 작품을 보면 과거 영토 시대에는 가장 빠른 말을 가진 나라 예컨대 몽골 같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탈영토 시대에는 수송, 유통, 인터넷 등 정보통신과 소통기술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기마민족인 한국이 정보시대에 세계로 크게 뻗어나갈 거라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경주 우양미술관 소장품
과거 세계사를 돌아보면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서는 한 번씩 돌아가며 제국주의를 경험했다. 다만 독일이 이런 경험이 적어 1차·2차 대전을 일으켰다 실패했다. 일본도 2차 대전 때 유럽을 모방해 제국주의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중 역대 최고의 제국주의는 역시 몽골이었다.
몽골 제국주의('팍스 몽골리카')는 칭기즈칸이 동아시아부터 동유럽과 러시아까지 3300만㎢가 넘는 땅을 차지해 탄생된다. 그의 군대는 놀라운 기동력으로 국가를 연결하는 가공할 만한 네트워크 역참(station)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백남준이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군사력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잇는 인터넷 개념인 '네트워크' 방식이다.
하여간 잃어버린 자존감과 자의식을 되찾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탈영토 제국주의'의 경험이다. 이는 다른 나라를 폭력으로 지배하는 기존의 제국주의와는 정반대로 남의 땅을 차지하거나 침범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세계를 호령하는 '21세기형 디지털 제국주의'를 말한다. 우리가 백남준을 달리 부를 때 '문화 칭기즈칸'이라고 일컫는 이유다.
이를 이루기 위해선 정보화된 지식과 축적된 학문과 앞선 하이테크가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가 지구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가장 먼저 대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백남준은 이런 아이디어를 '탈영토제국주의'로 구상했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작인 '전자초고속도로(초원고속도로, 新실크로드)_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를 통해 그런 꿈을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는 인류 최초로 동서의 관계를 잇는데 기여한 '마르코 폴로', '칭기즈칸', '훈족 아틸라 왕', '알렉산더 대왕'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또 일본 제국주의가 제거한 단군도 부제 '스키타이 왕'을 붙여 위풍당당한 전자 영웅으로 복원시켰다. 백남준의 이런 동기는 바로 탈영토제국주의 걸맞은 평화지향적인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셋> 지구촌 소통 위한 인터넷 착안... 백남준의 국제어 '(소외와 배제 극복) 참여와 (쌍방) 소통'
▲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전시장에 백남준 1973년 작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 신나는 세계축제)' 작품을 재구성해 입체적 시각효과를 주다
백남준은 1984년 지구촌 평화공존을 위한 제안이 담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대해 백남준은 "초우주적 버라이어티 쇼, 글로벌 디스코텍, 복합적인 시공간의 심포니, 우주 오페라, 세계 최초의 쌍방향 아트, 대륙 간 피드백, 견우와 직녀의 랑데부 쇼"라는 자평을 남겼다. 이 작품이 어떤 아이디어로 구상됐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더 근원적인 이 작품의 지적 계보학은 뭔가, 그건 아마도 백남준이 17살에 경기중학교 시절 안병욱 선생에게 배운 맑스, 그가 착안한 '코뮌'사상인 것 같다. 백남준은 그 사상을 평생 간직했고 그걸 비디오아트에 적용해 'TV(비디오)코뮌'을 만들었다.
백남준의 코뮌 연작은 <'참여'하는 사회와 '소통'하는 인간>이 주제이다. 이것은 <'소외'된 인간과 '착취'하는 사회>라고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에 대한 백남준 식 대안이다. "참여가 있으면 소외가 없고 소통이 되면 착취할 수 없다"는 메시지다.
이 '비디오코뮌'은 '글로벌 그루브'과 '굿모닝 미스터오웰' 연작으로 이어진다. 이 연작은 위성아트가 된다. 그 최종판이 '굿모닝 미스터오웰'이다. 2500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는 백남준의 출세작이다. 백남준은 이 작품의 중요성을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라는 말로 대변했다. 드디어 지구촌에 가상이지만 '인터넷의 꽃'이 피어났다.
'백남준 아트센터(용인)'에서 2014년 11월 6일까지 열리는 '굿모닝 미스터오웰' 전시장면. 1984년 당시 영상을 재현한 것으로 뒤로 앤더슨, 커닝햄, 긴즈버그, 보이스, 케이지 등 유명인사들 모습이 보인다
백남준은 소통을 강조하는 예술가다. 그는 위성아트 연작을 통해 평생 서양인이 동양인을 '불가해한 사람(inscrutable oriental)'으로 보는 편견을 없애려 애썼다. 그래서 작품의 콘텐츠를 보면 서양 것과 함께 인디언, 오키나와, 한국 등의 춤과 노래와 민속 등이 많이 소개된다. 이런 방식이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효율적 소통방식으로 봤기 때문이다.
지구촌 사람들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주제 하에 동서의 상호불신과 배격을 해소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부부도 대화가 부족하면 부부싸움이 일어나듯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이 상호소통이 부족하면 전쟁이 난다고 봤다. 그런 면에서 그는 평화주의자이다.
이런 백남준의 미학은 우리도 잘 아는 '이심전심'이 작동한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세상 그뿐만 아니라 위성과 위성, 미디어와 미디어가 통하는 다시 말해 첨단 네트워킹으로 연결되는 '인터미디어'를 뜻한다. 즉 지식과 정보가 공유되는 인터넷 개념이다. 백남준의 Networking개념은 이걸 불교의 '인드라망'이나 도교의 '도(道)'와도 같은 개념으로 봤다.
백남준의 이런 사상에 또한 영향을 준 사람은 맑스(철학)와 쇤베르크(예술)와 칭기즈칸(통치)이 있다. 이 황제는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게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설명했다. 백남준은 이렇게 'TV"와 '코뮌(네트워크)'와 '위성기술'을 최초로 예술화했다.
<넷> 피드백 혁명과 문화의 민주주의... 그가 창안한 SNS 댓글 혁명
** 들라크루아 I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아래 클릭하면 이를 오스트리아 만화가 올리버 쇼프(Oliver Schopf)가 패러디한 '민중을 이끄는 인터넷 여신'이라는 작품을 볼 수 있다. www.voxeurop.eu/fr/content/picture/498941-l-internet-guidant-le-peuple
백남준은 모두가 한 마을 사람이라는 맥루언의 '지구촌'개념에 공감했다. 이의 전제조건으로 '소통과 참여'는 필수적이다. 이와 연관해 생각나는 백남준 말이 있다. "민주주의가 뭐냐?"라고 누가 그에게 묻자, "말대꾸하는 것이다"라고 촌철살인 같은 한 마디를 남겼다. 이건 바로 쌍방적 소통인 '댓글'을 말한다. 'SNS' 방식을 취하는 피드백 혁명이다.
이런 'SNS'와 같은 쌍방소통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은 나라를 지켜주는 효율적 대안이다. 이런 장치는 정치민주화와 함께 문화민주주의에도 도움이 된다. 이를 잘 인식하고 있었던 백남준은 첫 전시부터 놀랍게도 전시의 주인공이 작가가 아니라 관객이라고 했고, 그래서 일방소통의 수직적 전시가 아니고 쌍방소통의 수평적 전시를 선보였다.
이용우 미술비평가는 백남준 이런 정신에 대한 평가에서 "관객의 참여방식에 의한 그의 미적 실험은 백남준 미학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을 독재 또는 독백 예술로 봤고, 고급 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이 관객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예술의 계급화를 초래했다"라고 논평했다.
그는 1인 미디어 시대를 예언했고 지구촌 소통시대를 맞아 페이스북, 트윗, 유튜브 등 다양한 SNS 방식이 발명되면서 미디어 소통이 더 활성화됐고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데 대들보 역할도 한다. 그걸 증명해주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2010년과 2011년에 이슬람권에서 일어난 '아랍의 봄'이다.
이런 민주화운동이 이슬람권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 'SNS'혁명은 작동했다. 프랑스 언론은 '들라크루아' 작품을 패러디해 원 제목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아니라 '민중을 이끄는 인터넷 여신'이라고 제목을 붙여 신문 만평에 실기도 했다.
<다섯> 현대 예술을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바꾸다... 확장·융합하는 총체 예술론
**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 사진으로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라는 글씨가 아래 보인다
백남준은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비디오 아트 이전과 이후를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눈다는 뜻인가. 하긴 '대상을 그리는 것'과 '소리를 그리는 것', 삶과 예술을 '나눠 보는 것'과 '같이 보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과 '부수는 것', 재현하는 '기존 예술'과 소리를 시각화한 '비디오 아트'는 확연히 다르다.
이뿐 아니라 백남준은 음악을 구 음악과 신음악으로 나눴는데 백남준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엄숙한 카라얀을 너무 싫어했다. 백남준은 악보중심의 '구음악'의 룰을 깨고 온몸으로 하는 '신음악' 즉 '액션뮤직'을 발명한다. 신석기와 구석기만큼이나 그 차가 크다.
신음악과 구음악과 연주 방식도 다르다. 구 음악은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치지만 신음악은 머리로 팔꿈치로 피아노를 치고 비디오카메라로 피아노를 치면서 그걸 영상에 나타나게 도 한다. 피아노를 넘어뜨리는 건 다반사고 이뿐만 아니라 피아노에 못을 박거나 대패질하거나 그 페달을 혀로 핥기도 한다. 피아노의 기능을 이렇게 다양하게 확장시킨다.
백남준은 공간예술인 미술과 시간예술인 음악의 경계를 없애고 '제3의 영역'을 개척하려 했다. 미디어를 융합하는 이런 관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구상돼왔다는 것은 아래의 백남준 말 "장자(莊子)에게서 내가 배운 게 시공간이야, 시공간을 따로 놓지를 않고 하나로 봐, 그 스케일이 너무 크고 무시무시해"라는 말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백남준과 장자: 피리 속이 비어야(무음악)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바람(음악)을 만나야 울림이 생긴다(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장자’의 첫 구절이다. “이름이 곤(鯤)이고 그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엄청 큰 물고기다. 그 곤은 가만히 바다에서 놀며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붕(鵬)이라는 새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매미가 '붕새(한번 날면 6개월 지속 비행한다. 마치 항공모함 같은 새. 붕새란 하늘을 가릴 정도로 큰 새를 뜻한다)'를 보고 비웃는다. 자기의 기준으로 남에게 함부로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언어의 사슬을 끊어내라. '장자'가 말하는 충고다.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다(北冥有魚: 북쪽 깊은 바다 혼돈한 가운데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 ‘
큰 사진 보기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백남준과 그의 예술 파트너 샬럿과의 공연사진이다. 여기 보면 구 음악과는 너무 다른 백남준의 신음악이 뭔지 알 수 있다. 일명 '액션 뮤직'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전자로봇 K-456도 연주자가 된다. 1964년 8월 17일 사진가 '피터 무어'가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을 재구성하다.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백남준과 그의 예술 파트너 샬럿과의 공연사진이다. 여기 보면 구음악과는 너무 다른 백남준의 신음악이 뭔지 알 수 있다. 일명 '액션 뮤직'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전자로봇 K-456도 연주자가 된다. 1964년 8월 17일 사진가 '피터 무어'가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을 재구성하다.
백남준은 이렇게 서구의 이원론을 깨고 동양의 일원론을 도입한다. 미술에 음악을 가미해 비빔밥 미디어를 만든다. 사실 나치나 2차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선과 악, 음과 양,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이분법' 때문이었다는 건 서구인도 인정한다. 이런 면에서 음악전공자 백남준이 시각예술가가 된 건 또한 자연스럽다.
시각예술이나 '시간 예술(time based art)'을 중시하는 백남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시간론을 알아야 한다.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근이다"는 그의 시간 개념을 요약한 말로 여기서 노스탤지어는 과거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이루는 무한동력을 뜻한다. 결론으로 인간이 시간의 주인이라는 메시지다.
그의 첫 전시 16 테마 중 하나가 <내용 없는 시간은 가능한가?>인 것도 그의 시간론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내용 없는 시간'이란 1960년 이후 비디오 아티스트가 보여주는 '추상 시간(음악)'을 말한다. 1950대까지 현대미술에서 추구한 '추상 공간(미술)'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백남준은 미디어 융합만 아니라 미디어 확장도 시도한다. 맥루한이 착안한 "의복은 피부의 확장,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 컴퓨터는 두뇌의 확장, 전기는 중추신경의 확장, 책은 눈의 확장, 라디오는 귀의 확장, TV·영화는 눈과 귀의 확장"같은 개념을 작품에 녹여냈다.
임흥순 작가는 지난 6월에 다큐영화로 만든 <위로 공단>으로 한국 작가로는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았는데, 여기서 영화가 어떻게 미술인가 하나 오늘날 미술의 영역은 많이 확장됐다. 이제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디자인, 장식미술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건축, 타이포그래피, 영화 등이 다 미술에 포함된다.
이뿐 아니라 백남준은 '보들레르'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 '조응(照應)'에 "어둠인지 빛인지/광활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긴 메아리가 멀리 잦아들 듯/색채·소리·향기가 상호 조응하네" 등의 구절에서 나오는 '색·음·향'의 공감각적 미학을 발굴하고 시 제목처럼 상호 반응하는 방식을 도입해 전자 아트의 시각·청각·촉각의 요소로 융합시켰다.
한국 백남준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백남준은 60년대 일방적인 TV가 주목을 끌면서 대중의 우상화가 되는 파시즘 현상이 보이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쌍방적인 비디오 아트를 창안한다. 예컨대 모니터에 마이크를 대고 말을 하거나 노크를 하면 이미지가 그려지는 '참여TV'가 그것이다. 비디오아트는 이런 발상에서 이 세상에 나왔고 이로써 인간을 TV의 주인으로 되돌려줬다
<여섯> 실현 불가능한 비디오아트 창시... 미개척지 예술을 향한 도전(탐험) 정신 달에 도착 영감
백남준 I '두 대의 TV에 입력된 소리의 파도_수평/수직(Sound Wave Input on Two TV set Horizontal/Vertical)' 1963. TV 화면에 전자파로 그린다는 개념의 첫 전시를 재현하다. '추방(Expel)'이라는 단어가 뒤로 보인다
백남준은 "콜라주가 회화를 대신하듯 음극관이 캔버스를 대신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자 붓으로 TV 모니터에 그리겠다는 착안이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그러나 백남준은 '현대의 종이'라는 믿었던 비디오로 이미지 혁명을 시도했고 마침내 성공한다. 그러면서 "전위예술은 쓰레기 폐물이 될 수도 있지만 인정받으면 유무형 엄청난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비디오 아트가 어떻게 시작됐을까. 백남준의 직접 설명을 들어보자.
"비디오아트의 기원은 첫째, 가로와 세로로 이뤄지는 '직조'에서 왔고, 둘째, 저 바깥 빛이 만든 색채의 이미지가 황홀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왔고, 셋째, 태양의 반사광인 '달빛'에서 왔다. '눈부신 날, 라인 강의 물결을 세라'에서 그 달빛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기원은 가로와 세로로 이뤄지는 '직조'라는 개념인데 이를 더 쉽게 설명하면 이건 바로 백남준 비디오혁명을 상징하는 모니터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그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전자 붓 개념으로 보면 되는데 요즘 많이 쓰이는 스마트 폰 전자펜의 기원이다.
두 번째 기원은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나온다. 이에 대해 보충설명을 하면 백남준은 처음 유럽에 가서 그들의 문화수준에 크게 실망한다. 그런데 하나 감동을 받은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중세고딕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눈부시고 황홀한 빛에 반했고 그걸 오색 찬연한 전자 빛으로 변형해 비디오아트를 탄생시켰다.
세 번째 기원은 달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은 가장 오래된 TV'도 그렇고 백남준의 위성아트도 달을 의미한다. 이는 북방계 몽골의 샤머니즘과도 관련이 있다. 백남준이 '월인천강지곡'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은 앤디 워홀이 애용한 '복사이미지'와는 다르게 쉼 없이 변화는 '생성이미지'를 연출하기에 백남준이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백남준은 첫 전시 <음악의 전시: 전자텔레비전>에 대해서도 '수직적 구도(plan)'와 '수평적 나눔(partition)'이 상호매개(intermediation)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역시 모니터에 수직선·수평선을 긋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이거야말로 비디오아트의 진원지다.
그리고 1963년 첫 전시에서 백남준은 장치된 TV13대를 선보였지만 실제 비디오를 활용한 건 1965년부터다. 그해 백남준은 '소니'가 미국에 첫 수출한 비디오카메라를 예약 구입했고 10월 4일 '카페오고고'에서 맨해튼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교황 '바오로6세'가 미국방문 중이라 이를 비디오에 담았다. 이렇게 해서 비디오가 미술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렇게 볼 때 TV와 비디오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TV는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받는 '수상기'인 반면 비디오는 주도적으로 이미지를 편집할 수 있는 '제상기(製像機)' machine of making images이기에 이를 결합하니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TV는 평생 우리를 공격해 왔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다"라는 한 백남준의 말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백남준 I '두 대의 TV에 입력된 소리의 파도_수평/수직(Sound Wave Input on Two TV set Horizontal/Vertical)' 1963. TV화면에 전자파로 그린다는 개념의 첫 전시를 재현하다. 첫 전시의 키워드는 역시 '추방(Expel)'이라는 단어가 뒤로 보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벽에 붙은 대형사진으로 하단에 테크놀로지의 인간화와 축제의식의 소중함을 담은 백남준 문구가 보다.
비디오는 이렇게 TV가 독재자처럼 대중을 우민화하는 문제를 극복하게 그걸 반격하는 기능을 갖춤으로써 사회변화의 도구도 된다. 백남준은 이 점에 대해 "나의 실험적 TV는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라고 멋진 재해석을 내놓았다.
미학자 진중권은 "백남준보다 '앤디 워홀'이 먼저 비디오를 썼고, 백남준에 앞서 '볼프 포스텔'이 TV모니터를 설치했고 퍼포먼스나 위성중계 역시 백남준이 처음 한 것은 아니나 그 누구도 백남준처럼 TV를 주제로 삼아 철저하고 일관되게 미디어를 사용한 작가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는 역시 백남준이다"라고 평가했다.
휘트니미술관 편 <현대미술사>에서 보면 백남준의 전자아트를 "60년대 미국에서 '하이테크욕망'과 '반전사상'과 '권위에 대한 반항'과 같은 반체제 속에서 나왔다"고 평했는데 이는 사회문화적 측면이다. 진중권은 미술사적으로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20세기 전체는 뒤샹, 21세기는 백남준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결론 내렸다.
여기서 기억할 한 가지는. 독일 평론가가 한 말 "그는 테크놀로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걸 우습게 만듦으로써 인간화했다"에서 알 수 있듯이 백남준은 테크놀로지의 인간화 시도를 작품에서 항상 빼놓지 않는다. 1993년 휘트니 전 때 30년 된 그의 로봇 K_456를 해체시키면서 "내 아들은 장가도 못 갔는데..."라는 여운을 남기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일곱> 돈보다 축제가 먼저인 르네상스인간... 무욕·무상행으로 향연을 낳다
백남준은 1977년 "나의 환희는 거칠 것이 없어라"라고 말을 했는데 역시 돈보다 축제를 우선시하는 그의 철학이 담긴 말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으려면 무욕의 경지로 가서 '소유'보다는 '자유', 자유보다는 '향유'를 삶의 최고 가치로 둬야한다고 뜻이리라. 그래야 진정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주장인데 이게 바로 그의 예술론과 직결된다. 아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축제를 창조적 예술로 승화>
"예술은 페스티벌이지요, 쉽게 말하면 잔치예요. 왜 우리의 굿 있잖아요. 나는 굿쟁이예요. 여러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도록 부추기는 광대나 다름없어요. 나의 예술 철학은 관념을 무너뜨리자는 거지요. 수직이 아닌 귀납이에요. 획일성을 막기 위해 자유스런 작업을 하죠. 민중이 춤을 추도록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는 것이지요."
백남준은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걸 무력화하는 방안으로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예술을 추구했다. 그때 정말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말이다. 일종의 '무상행(無償行, 무보상행위)'인데 '칸트'가 말하는 '무목적적 합목적성'과 같은 개념이다.
그에게 왜 평생 그렇게 많은 퍼포먼스 했냐고 물어보면 '돈을 벌지 않는 예술'을 하기 위해선데 거기엔 진리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다고 말한다. 백남준은 예술기금을 많이 받아도 원래부터 돈이 목적이 아니기에 더 좋은 작품을 위해 받은 기금보다 2배 이상 쓰기에 평생 가난했다. 백남준이 왜 선문답인 '임제록' 등을 그리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75%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5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3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9%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우리는 어떻게 -1000% 만족할 수 있는지 배워야 한다" - 임제록 중에서
그는 또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는 축제주의자인 동시에 새로운 문명을 맞이하기 위해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추구하는 르네상스인간임을 알 수 있다. 친구들도 다 그런 성향을 보였다.
<여덟> 파괴 없이 창조는 없다... 시대우상 압도하는 반항정신
니체의 저서 <우상의 황혼 또는 기존 서구철학을 망치로 깨는 방법(Götzen-Dämmerung oder Wie man mit dem Hammer philosophirt / Twilight of the Idols, How to Philosophize with a Hammer)> 니체 서구 철학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재정리했듯, 백남준은 서구 중심의 세계미술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재정리하다. 니체의 우상화 황혼 중 한 문장 All beauty incites to procreation- … precisely this is the proprium of its effect, from the most sensual regions up into the most spiritual…
1962년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첫 공연에서 피아노를 파괴하는 멤버들. 네오다다의 성격을 띤 이 반예술운동은 예술가의 주체성마저 부정하고 문화민주화와 지방화를 지향한다. 백남준 국제학술심포지엄(2013.04.26)에서 소개된 영상자료를 찍은 것/백남준의 예술적 관점을 조명한 'KBS 다큐_백남준 코드' 장면을 캡처하다. 나치가 저지른 대학살장면으로 2차 대전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3년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 16가지 테마 중 하나로 <아이디어에 대한 물신주의>가 나온다. 백남준은 1965년에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큰 고민 중 하나가 물신주의 숭배의 극복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카소도 "파괴하려는 충동은 곧 창조하려는 충동이다, 하나의 그림이란 파괴의 총체이다"라고 했지만 이전에 없었던 뭔가를 일으키는(Something happens) 예술을 하려면 시대의 통념과 편견과 고정관념을 파괴해야 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백남준은 피카소식 파괴충동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통치이념, 권위주의, 전체주의 등이 얼마나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너무 잘 알기에 이런 것과 싸우는 위해 그 허구논리에 구멍을 내고 이를 교란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유물론자인 백남준은 20세기가 참혹한 전쟁의 시대였던 건 결국 '인간의 몸이 증발'된 데서 왔다고 진단하고 그런 관점에서 예술을 접근했다. '액션 뮤직'이 그렇고 '퍼포먼스'가 그렇다. 이걸 화두로 삼고 그는 평생 이런 저런 관념주의와 싸워나갔다.
백남준 첫 전시 포스터에는 '추방(EXPEL)'이 나오는데 이건 플럭서스 선언문에도 언급된 병폐한 부르주아 문화와 근현대주의를 추방하라는 메시지와 같은 문맥이다. 이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게 서양뮤즈를 욕조에 훼손된 채 처박아두었는데 이런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첫 전시장이 독일건축가의 개인저택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백남준이 어려서부터 가진 기질에서 온 것인지 모른다. 그가 기존음계를 전복시키는 작곡가인 '쇤베르크'나 기존사회를 변혁하려는 '맑스'를 좋아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푸코'처럼 계몽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주의를 거부하고 그런 관념에 오염되지 않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선사시대의 지식 계보학을 열망했다. 식민시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칠 때보다 그걸 부술 때 나는 소리에 더 매료되었다. 거기서 카타르시스가 온 것이다. 소위 북방계 몽골 등의 타악기 전통을 이은 것인가 부수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 모양이다. 우리 DNA에는 '난타'와 같은 무의식적인 기질이 있나 보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목을 친 부처의 작품을 선보이다. '살불살조'의 정신을 작품화 한 것으로 백남준의 우상파괴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때 찍은 사진
왜 이렇게 백남준은 부수고 자르고 파괴하는 과격성을 보였냐고 이영철 초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에게 물었더니 이건 '새로운 야만인'의 등장을 뜻한단다. 모든 권위에 도전하는 위대한 전사로 일종의 '문화테러리스트'란다.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내리친 건 그것이 음악적 권위뿐만 아니라 엘리트 부르주아문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란다.이런 행위의 배경에는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 자재하게 된다"라는 철학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이런 '살불살조'의 정신은 우리에게 너무 신화화되고 우상화된 서구적 체계를 비판하는 데도 동원된다. 원숙한 나이인 60살에 백남준은 "우리가 세계(서구)의 역사를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이는 서구적 사고를 깨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창조도 진화도 올 수 없다는 경고성 메시지다.
<아홉> 예술적 교란으로 서구근대 해체... '랜덤액세스·사기론·사이버네틱스' 등 [3] 한국 미디어 혹은 세계 미디어는 정부와 국민을 이간질시킨다. 빈국과 부국을 이간질시킨다. 원할한 소통을 방해하는 교란자 역할을 한다. 이걸 보다 못한 백남준 스스로 교란을 교란시키는 예술적 교란자로 자처하다. (예술이란 사람들어떨떨하게 만드는 것) 백남준 한국 미디어 혹은 세계 미디어가 광고주에 입맛을 맞추려고 사기를 치니까 사기를 사기치는 예술적 고등사기꾼이라고 자처하다.
▲ 백남준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두고 "그는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다는데, 1961년 쾰른 돔 극장에서 찍힌 백남준 사진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확연히 느껴진다. 위 사진은 백남준 이론가 헤르조겐라트 박사가 2012년 백남준아트센터 초청 강연 때 찍은 것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 골자를 아래처럼 요약했다. 그는 분명 감각적 쾌락주의자다.
"카타르시스, 순간의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극도의 전자적 충동,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직접접촉예술,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초고속도로),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인공신진대사, 다매체 다방향 상응 등등." <10번 이상> 슈퍼 초감각예술가
시대를 앞선 누구도 규정할 수 없는 멋진 진술이다. 백남준의 이런 면모는 이미 독일유학시절부터 드러난다. 프라이부르크음대에서 백남준 유학할 때 그의 지도교수 포르트너는 그를 보고 "보기 드문 비상한 현상"이라고 했고, 이어령 선생도 "백남준의 예술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어떤 틀도 룰도 없는 그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을 취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특이하게 피아노 2대를 놓고 연주하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 두 대를 사서 각 피아노 음이 서로 어긋나게 조율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또한 예술의 통념을 교란시키는 한 예다.
또 그는 근대서구의 예술체계를 해체하고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랜덤액세스'를 즐겨 사용한다. 이것은 마치 '68혁명'이나 '촛불시위'처럼 주동자 없는 시위와 비슷하다. 우발적이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게 특징이다. 백남준의 첫 전시에도 '랜덤액세스'라는 작품이 선보였는데 관객의 참여와 함께 무질서한 우연성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본 것이다.
<백남준 무질서 미학은 어디서>이런 비위계적이고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랜덤액세스 기법을 낳게 한 공로는 '나치즘'이다. 나치즘을 포함한 파시즘은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했기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인간을 권력욕을 채우는 도구로 보는 통치이념이 결국 대참사를 낳았다.
백남준의 랜덤액세스 기법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 '사기론'과 통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자기만 아니라 뒤샹이 이미 사기를 예술화했다고 지적한다. 그럼 여기서 1984년 6월 26일 백남준과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와 한 인터뷰 중 '사기'에 관한 내용을 좀 보자.
"전위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속이고 속는 사기다. 사기 중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다."
이에 대해 이용우 미술비평가는 "그가 말하는 '예술사기론'은 사실상 그의 예술적 실천을 위해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공격하며, 기상천외한 언어를 통한 시선 끌기와 도발적 제스처다"라고 했다. 하긴 예술이란 착각과 환상을 심어주는 유희라고 보면 문제될 것도 없다.
백남준은 전체주의나 독재를 무지 싫어했는데 예술가답게 이 점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이를 테면 "애국하면 망한다" 같은 '반애국주의'로 빗대어 말했다. 왜냐하면 극단적 애국주의를 내세운 게 나치즘이기 때문이다. 사실 애국주의는 "우리가 남이가"와 같은 패거리문화와 다름 아니다. 이런 방식의 표현이 바로 백남준의 사기 중 하나인 것이다.
▲ '사이버화된 세대(Cybernated Generation)'라는 제목이 붙은 1965년 4월 2일 타임지표지. 그 부제가 '컴퓨터사회(The Computer in Society)'다. 당시 '사이버네틱스'가 대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타임지(The TIME) 백남준은 미디어다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전자셔먼'이라고 했다. 즉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셔먼일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와 30세기를 연결하고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영매'이고 그 다리를 놓은 '매치메이커'
그리고 백남준은 또 '랜덤액세스'와 유사한 기존과학체계를 충격을 주는 '사이버네틱스'도 좋아했다. 이 이론은 60년대 유행한 '제3의 과학체계'로"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신물리학이다. 아래를 보면 백남준이 왜 이런 역발상적인 이론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극을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 백남준 <사이버네틱스 예술> 1965
백남준은 플라톤, 니체, 루소, 헤겔, 맑스, 사르트르, 리오타르 등의 주제이기도 한 '약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라는 철학개념을 과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 반가웠나보다.
<열> 21세기 온 인류가 날마다 한국 찬가를 부르다 케이방역에서 경제성공에 이르기까지
인류문화사에도 기여하는 민족 되길... 3천 년대까지 멀리 보는 안목
백남준은 90대에 들어서 한국미술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1992년 과천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인 회갑 전은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했단다. 1993년에는 한국미술의 현대화·세계화를 위해 '휘트니비엔날레 순회전'을 기획해 성사시켰고 비엔날레에서 받은 예술상금 당시 2억 상당의 돈(지금은 5억?)을 전시에 기부했다.
그 해는 '대전세계엑스포'가 열렸고 거기서 특별미술전에 세계미술계 거물급을 초대해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여는 데 협조해줄 걸 종용했고 그걸 성사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광주를 49개국이나 참가하는 세계적 미술도시로 거듭나게 하며 '광주비엔날레'도 개최했다. 결국 그는 다음 해 과로가 겹쳐 쓰려진다.
그는 이렇게 정부도 못하는 버거운 일을 혼자 감당했지만 누가 알아주기는커녕 그 공로도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긴 백남준이 그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니다. 애국주의를 배격한 그가 보여준 희생적이고 숭고한 애국심일 뿐이다. 하지만 1년 예산 500억을 쓰는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타계 10주년이 되도록 그를 위해 제대로 된 추모전 한번 연 적이 없다.
애국주의, 지역주의, 동네미술 같은 것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같은 지역 고향 사람끼리 잘해 봅시다”라는 지역 파벌적 말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 세계의 시민으로 양성해야 한다. 자신의 고향과 고국에 애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기 출신 지역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편애를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가슴에 품는 진정한 글로벌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성곤(서울대 영문과 교수)
김찬동 경기도뮤지엄 본부장 김찬동이 들려준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당시 김 본부장은 몇 년 전 뉴욕에 있는 소호 백남준 자택을 공무로 방문했는데 부인 시게코 여사가 자신을 보자 버럭 화를 내며 한국정부가 백남준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느냐고 불만을 터트렸단다.
어쨌든 백남준은 1999년 말에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에게 과제를 남겼다.
"그러면 왜 단군은 이스라엘의 모세처럼 세계적 거물이 못되었느냐? 삼국사기가 구약성서에 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민족의 유리 표방을 거치지 않고 그래도 안정된 중견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유대인만큼 문화나 과학에서 세계사에 기여하지 못했다. 21~30세기 한국인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
[위 작품] 백남준 I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 1995. 이 로제타 석에 백남준 예술론이 요약되어 있다<백남준 1995년 말 자신의 예술론[주제: 인터넷 사회로 가는 열쇠]을 5개 국어로 정리해 아래와 같은 로제타석에 새겨놓고 쓰러지다 여기에 보면 백남준의 미디어론과 예술론 특히 문화인류학적인 면에서 샤머니즘 미학을 명쾌하게 정리해 놓았다>
백남준은 같은 해 로제타석(石) 형식에 영어·프랑스어·독어·일본어·한국어 5개 국어로 자신의 예술 골자가 담긴 '고속도로로 가는 열쇠'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자신의 예술혈통과 족보을 총정리]그중 일부를 소개하면 "나는 내 피 속에 흐르는 시베리아-몽골리언 요소를 좋아한다(Ich mag das chaotische sibirisch-mongolische [독일어])"거나, "굿의 어원은 '얼' 즉 정신자체이니 미디어와 굿은 거의 같은 말이다 [한국어]"거나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몽골 선조들은 이 노마디즘 문화(인류학적인 관점)로 내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Mes ancêtres mongols m'inspirent sans doute ce nomadisme culturel [프랑스어]" 등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의 예술은 몽골 전승의 굿과 샤머니즘에서 온 것이고, 전자시대 거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미디어'라는 해석이다. 백남준에게 '미디어'란 중세 개념으로 신과 교류하는 '매개체(meditator)' 혹은 '영매(靈媒)'를 뜻한다. 다시 말해 굿과 샤머니즘, 미디어와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같다는 설명이다.
또 백남준이 이런 몽골의 샤머니즘에 열광하는 이유가 거기에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되는 원시적 생명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굿에서도 보면 무당이 산 자와 죽은 자마저도 소통시키는데 세상에 이렇게 원활할 '미디어'가 어디 있는가.
이런 면에서 볼 때 백남준은 서양과학이 추방시킨 야생적 사고의 복원을 요구한다. 서구에서 끔찍한 나치 역사가 그에게 큰 각성을 주었으리라. 그래서 백남준은 야생적 사고와 원시적 상상력 결핍이 현대인의 비극은 낳는다고 봤고 이것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레비스트로스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말하기를, 그의 어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했다. 물론 백남준 자신은 어머니처럼 샤머니즘을 종교로 믿는 건 아니나 샤머니즘에서 예술적인 영감의 소재로 끌어와 샤머니즘을 예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장면
<한반도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는 긴밀한 관계 >미디어란 '영매(靈媒)', 중매자(meditator)', '매치메이커(match maker)', '피스메이커(peace maker)': 그렇다. 우리는 강대국 속 분단국가에 살면서 어느 나라보다 많은 고통을 받았기에 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것도 부족하면 미디어 그 자체인 백남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미디어란 '영매(靈媒)', 중매자(meditator)', '매치메이커(match maker)', '피스메이커(peace maker)'로도 해석되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런 미디어가 돼야 한다.
백남준도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에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 않았나. 우리도 백남준이 앞서 보여준 삶을 본받아 오랫동안 나라 없이 떠돈 유태인이 인류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듯 21세기에는 우리도 세계문명사에 기여해야 한다. 우선은 주변 4대 강국에 도움이 되는 통일을 슬기롭게 유도해 세계평화에도 촉진제가 돼야 한다.
이런 점에 대해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도 인터뷰에서 한마디 보탠다.
현재 유대인들은 세계에 약 1500~1800만 명으로 세계인구의 약 0.25%에 불과하지만 노벨상 수상자 중 유대인 비율이 25%,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41%로 유대인들이 노벨상을 휩쓸고 있는 상황이다 "제가 깨닫는 건 유태인이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는데(세계 지성계 지배 노벨상 ) 그걸 보면서 그들이 뿌리 뽑힌 삶을 살았지만 '약자의 힘(철학용어)'을 발휘했다. 우리도 그게 가능하다. 20세기 당한 고통만큼 21세기에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시대의 과제는 백남준 연구는 우리가 특히 문화인류학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영철 초대관장은 우리에게 숙제를 준다. 서양의 유명미술사가가 쓴 책 중 백남준 깎아내리는 예는 많단다. 예컨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등이 쓴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보면 백남준을 '플럭서스'의 한 회원으로만 봤고 그의 예술파트너 '샬럿 무어먼'을 성적 대상화했다니 놀랐단다. 우리가 백남준을 연구하고 탐구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12월 5일 영풍문고에서 본 '타센(Taschen)'미술출판사에서 나온 <비디오아트>라는 책에서는 앤디워홀이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서술돼 있었다. 그러면서 이영철 관장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범위 안에 있다며 그러기에 백남준은 '초국가적 장기프로젝트'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기도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을 쓰는 국립미술관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백남준 아이디어를 제대로 활용 못하고 있다. 일상에서 정치까지 한반도 통일은 물론 세계평화를 구현하는 방안 등등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우리도 '백남준상'이 있지만 독일에선 일찍이 2002년부터 '백남준상'을 만들어 세계적 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한국에도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 미술관, 대학교, 연구소 등이 더 생겨야 한다.
이제 1인 미디어시대 우리 모든 국민은 첨단의 스마트 폰을 무장하고 디지털 노마드 전사가 되어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다시 세우고, '자존감, 자신감, 자부심'을 되찾아 '탈영토 제국주의'를 만들어가야 하리라. 백남준은 "내일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했는데 한국의 내일도 그를 통해 세계 속에서 아름다워질 것이다.
[추신] 한반도 호랑이는 제대로 살아있다, 그 힘을 되찾아라
- 기마민족 스키타이왕 단군, 주몽, 원효, 세종대왕, 정약용, 백남준으로 이어진다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있다' 2020. 백해영갤러리에서 9월 전시
백남준은 호랑이처럼 오늘도 살아있다. 그는 우리나라를 문화국으로 세우고 기운생동과 신바람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우리시대의 호랑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기를 넣어주는 사람(animator)이다. 그는 자유분방한 기질로 한국적 파격미를 유럽인의 우상인 피아노를 깨부수는 등의 행위로 독일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백남준은 호랑이의 강하지만 부드러울 수 있는 기질을 빼닮았다.
또한 백남준은 단군 셔먼의 신화를 전승한 예술가다. 남녀가 통정으로 서로에게 많은 기와 에너지를 넣어주듯이 백남준은 예술적 상상을 통해 우리에게 기를 넣어준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신령이 된다. 남준 신당이 생기리라. 기마민족 스키타이 단군(오른쪽 상단) 정약용(오른쪽 하단) 삼성 리움미술관 외
그러나 호랑이 같은 우리를 4대 강국은 자꾸 토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아직도 분단국 가다. 세계의 갈등과 모순의 십자가를 아직도 짊어지고 있다. 원래 샤먼을 가장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대안을 주는 존재이다. 백남준이 그렇고 단군(홍익)과 주몽(천손민족의 자부심)이 그렇다. 원효(소통론)나 세종대왕(한글), 이순신(발명가)이나 정약용(사상가)처럼 말이다.
그가 한국의 문화콘텐츠에서 1) 기사상과 2) 샤머니즘과 3) 선불교 4) 노장사상 등이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제일 먼저 터득했다. 부처와 TV를 결정적으로 만나게 한 것은 참으로 쾌거다. 그는 결국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물질이 만나 비디오 아트를 낳았다.
한국의 풍부한 종교적 다양성을 맛있게 비벼 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우리의 무의식적 신기와 샤먼의 전승 그리고 선불교적 상상력이 합쳐진다. 그는 부처 같은 동아시아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의 예술인류학 고고학 미디어미학 등 조명할 테마가 너무나 많다. 이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내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5개년 백남준 프로젝트로 백남준 전시를 기대해 본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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