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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유튜브

[백남준&사기론] <18강> '성공한 반란자/미적 교란자'

[백남준 추모 15주년 특집] '백남준, 성공한 '반란자' -'뉴욕타임스' 부고기사(2006.2.1)

[인사말] 2021년 2월 1일 / 시작이 반이라고 모든 이에게 좋은 출발 기원한다.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과 친구들> 여는 백남준 강좌 18회 제목은 [백남준&사기론 그 연장선상에 교란자] 기존질서의 파괴자, 전복자. 지난 17강 사이버네틱스 그의 창시자인 위너 공부를 했는데 오늘 어려운 내용이라고 복습 및 보강 그것이 가져온 과학혁명오늘 주제와도 연관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사이버네틱스는 기존 과학 체계를 교란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백남준 그런 면에서 능하다.  사이버네틱스에서 뉴미디어가 나오고 인공지능아트까지 발전. 
[백남준&뉴욕행] 다음 주<19강> 50년만에 뉴욕에서 만난 백남준 등 기행담과 그리고 마무리 정리 하는 내용으로 백남준 강좌 일단 마무리할까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CMxHadJNhA&t=34s 

이것은 사람의 세계에서만 아니라 사물의 세계에서도 약함(soft-ware)이 강함(hard-ware)을 이기는 세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셈. 과학에서도 약함을 상징하는 여성이 강함을 상징하는 남성을 이기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건 기존질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는 교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질문 1> 고전역학은 예측 가능, 양자역학은 예측 불가능. 해석 불가능, 카오스 이론, 랜덤 액세스, 빅뱅 피드백이 여기에 속하는 것 같다. 인간의 합리적 유추가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질문 2> 예술경영은 어떻게? Leadeship=Readership '거래적 리더십(눈앞만 보는 업적에 따른 보상)'과 '변혁적 리더십(멀리 보면서 미래의 비전과 공동체성을 추구)' 2가지 조화가 필요하다.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아이디어가 결국 성공한다" -백남준.
아래 작품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Fish flies on sky 1985. 서로 다른 크기의 TV 88대로 만들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에서나 나올 만한 대사 같다. 대머리 여가수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아이디어가 결국 성공한다 -백남준, 그는 발상의 전환(역발상)에 능숙한 교란자였다. 이 작품은 사실 백남준이 1074년에 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되지 않아 그때 나온 게 그의 대표작인 TV부처(1974년)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Fish flies on sky 1985. 독일 쿤스트 미술관 개관전 소장품

[1] 위에서 보듯 누구도 쉽게 상상하기 힘든 엽기적 발상에 놀랍다. 

[2]이 작품에 대해서 홍대 교수 백남준으로 박사를 받은 김은지 교수의 해설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하늘을 날다(Fish flies on sky 1985)' 이 작품은 비디오조각이라는 장르로 구분되어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 현대미술관에 소장이 되다. TV 88 대로 만들다. 하긴 1984년 굿모닝 이후 너무나 유명해진 백남준 이 미술관의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이다.
뒤셀도르프(쿤스트 팔라스) 미술관이 신개관을 하면서 의뢰를 한 것이죠. 누구보다 어린아이들이 더 좋아하겠죠. 70년대까지만 해도 오락적인 Low art로 취급되던 비디오아트가 80년대 High art가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고 김교수는 평가하네요. 90여 개의 TV의 전자 빛 에너지와 그 현란하고 화려한 빛과 빠른 움직임 속 다양한 형태의 변화에 관객들을 압도당한다. 본격적 전자테크시대의 아트의 리얼한 면모를 보여준다(백남준 연구가, 김은지 교수해설 베를린대학에서 백남준주제로 박사 받다)

[3] 미술관이 이런 작품을 소장할 때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독일의 미술관에 소장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이 작품에 매혹되었다는 소리죠. 그는 확실히 천재, 그만큼 안티아트다. 반음악, 무음악, 반예술이다.
[1]오늘 주제 [백남준&교란자]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교란 파괴 없이 창조 없다고 기존질서의 파괴하고, 전복시켜야 교란의 세상이 열리죠. 우상숭배 파괴자로, 사회적 터부를 부숴라(사회 터부 등등), 양자물리학이 그렇듯이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위한 불가피한 조건. 동양에서 온 변방인 백남준 서양의 과학 체계마저 뒤엎는 니버의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적극 수용. 불교의 윤회론 비슷한 것으로 보다/

그의 별명 동양에서온 문화 테러리스트

[오늘 주제] 백남준은 기존체제에 대한 반란자이면서 기존질서의 파괴자, 전복시키는 전복자였다. 사이버네틱스 그의 창시자 위너의 이론인 사이버네틱스영향도 있다. 이런 신개념이 새로운 사회혁명을 야기하다. 기존 과학 체계를 교란시킨 것이 또한 사이버네틱스다. 이것은 사람의 세계서만 아니라 사물(물리)의 세계에서도 약함(soft-ware)이 강함(hard-ware)을 이기는 세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것은 기존질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는 '교란미학'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약함을 상징하는 여성이 강함을 상징하는 남성이기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기도 하죠.

<<백남준의 발상에 대한 여러 사람들 의견을 들어보면>>
1. 다다익선 만들 때 원통형보다 나선형 비디오 조각 +환상적 아이디어로 소통 - 김원 건축가

2. 난해한 작가에서 전 지구적 종합예술 도약한 백남준 위성아트 -김원 건축가
3. 백남준 컬렉터 김수경 왈 "선사시대, 그의 전생은 말을 타고 시베리아 페루 네팔 핀란드까지"
4. 빛의 확장, 예술적 레이저와 의학적 레이저의 조우, 레이저 거장의 마지막 숨결과 집착: 백남준의 메디컬 아트: 1992년 1 등석 타고 가는 거지(무소유주의자 모습)를 보다. 우리들 병원 이상호 원장
5. 움직이는 조각 백남준 유명하게/몰입 이끄는 열정의 눈빛, 백남준 방불케 하는 백남준 친구들 steps 쟁쟁한 인사, 갤럭시 맨 은하수 노니는 남자, 신시사이저와 메카트론 개발 -이정성 아트 테크니션
6. 한 번도 없었던 전혀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다. -조영남

[오감] 파동: 청각 촉각, 입자: 시각, 미각, 후각 : 멋 정신 VS 맛 물질 // 얼 정신 VS 알 물질

르네 마그리트, 이것을 파이프가 아니다.

백남준 이전에는 회화에서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시뮬라크르)>을 발명했을 뿐이다. 백남준은 그런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것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만큼이나 임팩트하다. 20세기 사무엘 베케트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나 나올만한 대사 같은 백남준의 사기론은 현대미술의 특징을 잘 드러낸 말로 세계의 명언 중 최고다.

<백남준 예술사기론>"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백남준. 이런 말도 예술이다.

백남준 독일에 있을 때 뮤즈(프리마돈나)였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초청(2009.01.29) 강연 "백남준과 나는 쌍둥이 같았다. 대화 없이도 생각이 통했다. 우리는 전쟁을 겪은 세대라는 점에서 같았다. [...] 백남준은 기존질서의 파괴자다. 그는 순전히 창의력과 생각을 통해서 엑스터시를 느꼈다."

독일시절 백남준 마돈나였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쾰른)'는 "그는 기존질서의 파괴자" 다시 말해 "백남준의 일관된 예술정신은 전복이다"라고 서양음악을 뒤집은 쇤베르크를 그래서 좋아했다. 백남준은 깊은 음악의 전문성을 가지고 예술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기존의 유럽음악을 집어 새로운 음악을 그것에 그에게는 비디오아트였다. 그리고 비디오아트 음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예술.../

마리는 백남준을 한 인간으로 정말 높이 평가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퍼포머(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넥타이는 멜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를 수도.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대중을 난감하게 관객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답답하고 확 막혔다고 보고, 숨구멍을 내는 막힌 말의 소통을 터주는 사람" -백남준

손등으로 연주하다

백남준은 이런 사이버 세상을 예술 분야에서도 최대로 적용하여 서양중심의 예술판을 뒤집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고 뒤집어엎다. 1965년부터는 사이버 세상을 열려고 한 장본인. 매우 유쾌한 사회, 유연한 사회, 7일 무지개 색이 되는 세상, 빨주노초파람보 주일마다 다른 직장을 다니는 (기성세대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가능한 정말 환상적 세상의 장을 열어주다. 그야말로 전자과학시대, 비대문시대, 디지털 노마드 시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시대, 모든 인간이 재미있게 사는 길을 여는데 선구자였다. 사이버네틱스 아트가 그런 일상을 가능하게 했다>
[추신]
백남준은 이런 사이버 세상을 예술 분야에서도 최대로 적용하여 서양중심의 예술판을 뒤집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전복시키고 이제는 온전한 사이버 세상을 열어준 장본인이다. 매우 유쾌한 사회, 유연한 사회, 7일이 무지개 색이 되는 세상, 주일마다 다른 직장을 다니는 것이 가능한 환상적 세상의 장을 열어준 셈이다. 나쁘지 않다. 그야말로 전자 디지털, 노마드 시대 그리고 비대문시대, 디지털 노마드 시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시대, 모든 인간이 재미있게 사는 길을 여는데 선구자였다.

[특집 1] <백남준 추모 15주년에> 이경희 여사가 본 백남준의 마지막 모습

백남준은 말년에 건강이 안 좋고 추위를 많이 타 겨울만 되면 마이애미 자택에 거주했다. 이경희 여사는 2004년 12월 6일 마이애미에서 백남준을 극적으로 만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간병인과 그의 부인도 보인다 [위사진] ⓒ 이경희

- 끝으로 백남준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는지요?
[1] "마지막으로 본 게 그가 죽기 거의 1년 전인 2004년 12월 6일입니다. 백남준이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내가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쿠바 여행을 핑계로 백남준에게 전화를 걸고 가겠다고 했더니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부인 시게코에게도 알렸고요.

[2] 호텔에 도착에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안 받아 또 걸었는데 누가 전화를 받기는 하는데 끊어졌어요. 그때 아마 백남준은 내 팩스를 못 받고 부인 시게코가 알지만 집에 있으면서도 안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남편한테 어렵고 허락을 받아놓고도 백남준을 못 만나고 귀국하면 어쩌나 싶어 신경안정제까지 먹었습니다.

마이애미 롱 비치

[3]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을 나와 바닷가를 나갔어요. 백남준을 못 만났지만 백남준이 있는 마이애미 아침바다라 감격스러웠습니다. 길 건너 멀리 노천카페가 보였고요. 그런데 어떤 남자가 정상적이지 않는 소리를 지르기에 누가 장난을 치나 아니면 어젯밤에 본 불량배인가 무서워 안 돌아봤는데 또 더 크게 소리치는 거예요. 돌아보니 파라솔 카페 아래 시게코가 있었고 그 옆에 기적처럼 백남준이 있지 않겠어요.
[4] 백남준 나를 알아보고 괴성을 질렀어요. 시게코와 인사하는 동안도 계속됐고요. '당신이 와서 너무 흥분돼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의사도 흥분하면 뇌혈관 파열이 될 수 있어 조심하라'라고 했는데 나는 왈칵 겁이 나 그가 절규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꽉 껴안았어요. 시게코도 '소리치면 주인이 더 못 오게 한 대요'라며 그를 다그쳤고요. 그런데 백남준은 뜻밖에도 나에게 난생처음 존댓말을 쓰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게 백남준과의 마지막 포옹이었습니다.

[5] 그런데 백남준이 내 얼굴을 똑바로 보더니 '경희, 옛날하고 똑같아'라고 두 번이나 말하잖아요. 유치원 때처럼 날 예쁘게 본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한국어를 모르는 시게코에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왜 통화가 안 됐나요'라고 했더니 '당신이 내가 어딜 가는지 알아야 할 이유가 뭐냐'며 화를 버럭 내더니 백남준의 휠체어를 확 빼가지고 그대로 가버렸지요. 그 순간 너무 당황했습니다. 이제 백남준을 마지막으로 보는가 싶어 급하게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그의 뒷모습을 찍었지요."

<해설> 백남준 2006년 1월 29일 소천하기 전 '마이애미'에서 요양 중인 백남준을 그의 유치원 동창인 이경희 여사가 이곳을 방문하다. 그때가 2004년 12월 6일이었다. 거기서 찍은 마이애미 해변 사진, 나도 여기를 한번 가 봤는데 끝도 없이 펼쳐진 멋지고 아련하게 보이는 해변 비치다.

<하나 마이애미> 2019년 12월 마이애미 주변 거리 풍경 seulsong.tistory.com/718

 

[마이애미] 시내 거리 풍경 및 다양한 건축물

마이애미 문화의 불모지 그러나 지금은 12월 초에 열리는 마이애미 아트위크 행사도 가장 풍성한 미술행사 이벤트가 열리는 미국 남부 가장 중요한 미술거점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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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마이애미>2019년 12월 스코프 아트 페어 풍경 seulsong.tistory.com/716

 

[마이애미] 스코프 아트페어(SCOPE) 화보

마이애미 비치 모래 위에 맞춤형 파빌리온에서 열리는 19번째 마이애미 스코프(SCOPE Miami Beach) 아트 페어(쇼) 설치를 마무리하는 모습 전 세계 134개 갤러리가 참가하다. Celebrating its 19th edition, SC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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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 내 백남준연구회와 백해영 갤러리 내 백남준과 친구들(백남준연구회) 동급이 되다. 아니 동지가 되다"

<특집 2>15주기 백남준 故백남준 선생 15주기 추모재 미국에서 보내온 '켄 하쿠다' 영상 중에서 "'하버드 대학 내 백남준 연구협회 재단(Foundation)' 설립되었어요. '워싱턴 스미소니언 미국 국립미술관 백남준 아카이브 서고'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올여름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테이트 모던 3번째 순회전'이 열릴 예정입니다" -켄 하쿠다 인사말에서. www.youtube.com/watch?v=ykukLlY93Z0

<알고보니>백남준 장조카 켄 하쿠다 하버드 대학 경제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MBA) 학위 받다. 그래선가 하버드 아트 뮤지엄에 100만 달러 예술 기금 기부 그래서 하버드 대학 내 백남준 연구회 재단이 생겼군요./2016 년 12 월 2 일 기사 백남준 조카, 하버드 미술관에 100 만 달러 기부 그는 하버드 경영학 석사 경제학 석사를 마친 이 대학 졸업생이다 하버드 대학 내 백남준 연구협회가 생기다-아트포럼. news.harvard.edu/gazette/story/newsplus/harvard-art-museums-receive-1-million-gift-to-establish-the-nam-june-paik-fellowship/

 

Harvard Art Museums receive $1 million gift to establish the Nam June Paik Fellowship

The Harvard Art Museums have received a $1 million gift from Harvard Business School alumnus Ken Hakuta, M.B.A. ’77, to establish the Hakuta Family ...

news.harvard.edu

2020년 14주기 추모제 기념사진 저도 참석

<특집3>백남준 추모 14주기 봉은사에서 추모제에 모인 사람들 기념 사진을 찍다. 

<특집4>[백남준 추모 15주기] 당시 북경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권연정 전시기획자, 뉴욕에 우연히 출장 갔다가 백남준 장례식에 참가하게 되고 그래서 찍게 된 것이라고. 고맙게 나에게도 그 사진을 보내주었다. 백남준 장례식 날 지난 28일처럼 서울에 내린 눈처럼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 권연정

<특집5> [2006년 백남준 사망 때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 '성공한 반란자(Renegade)'] Turning Television Inside Out, and Art Upside Down -By Roberta Smith Feb. 4, 2006 아래 그 중 일부

<나는 'TV아트의 비발디'다 -백남준> Nam June Paik, 73, Dies; Pioneer of Video Art Whose Work Broke Cultural Barriers By Roberta Smith Jan. 31, 2006 / For him, humanization involved a giddy, celebratory joyfulness. His aim, he once said, was a "TV version of Vivaldi.seulsong.tistory.com/866

 

[백남준] 2006년 사망, 뉴욕타임스 애도기사

시게코 여사는 백남준 사후 그에 대한 글에서 2006년 그가 죽자 <뉴욕 타임스>는 그를 '성공한 반란자'로 말로 애도했다며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래 글은 Robert Smith가 쓴 뉴욕 타임스 기고문 Tumi

seulsong.tistory.com

뉴욕 타임스 백남준 부고 기사 중 일부

<특집6> 2006년 프랑스 '리베라시옹' 백남준 부고. <백남준 경이로운 영혼> 그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iconoclastic 천재적 해커(교란자)의 아이콘이었다. L'initiateur de l'art vidéo, bidouilleur iconoclaste, est mort à 73 ans. “우리는 후원자도, 구조대도, 자선가도 없고 코뮤니즘 같은 조직도 없고 오직 서로 의기투합하는 약 30명의 동료가 있었을 뿐이다. 나는 정치가(감옥에 가야 하고)도 사업가(때로 정당하지 못한 돈과 손 잡아야 하고)도 싫어했다 오직 아름다운 생애를 늦잠을 자면서 시간을 내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백남준. Ensuite, je ne voulais être ni politicien ni homme d'affaires. Avec la politique, on risque la prison et les affaires sont souvent sales. Je préférais être artiste, vivre une vie d'artiste. Dans mon esprit, cela permettait de me coucher tard et d'avoir la belle vie.»  next.liberation.fr/culture/2006/01/31/paik-a-son-ame_28352?fbclid=IwAR3TGMP7qquPmR9OBz8d-pC5DpnUux7CwTqnSheRCEEHIhBeAJ4YrI1abDs

 

Paik à son âme.

L'initiateur de l'art vidéo, bidouilleur iconoclaste, est mort à 73 ans.

next.liberation.fr

아래, 백남준 '하이웨이 해커' 1994년 작품. 자신의 자화상인가. 프랑스 리베라시옹 백남준 부고기사에서 백남준을 <천재적 해커의 아이콘>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여기 작품 모니터 속에 영상에는 각종 도로 선반 차량이 교통수단의 이미지와 컴퓨터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이미지가 중첩되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행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맨 윗부분 회포판 보드가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교란시키는 해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백남준 하이웨이 '해커(교란자)' 1994년

<특집7> [1] 백남준 돌아가신 지 15년 요즘 백남준 관련 동영상, 홍수를 이룬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는 파면 팔수록 알 수 없고 그 예술의 광맥은 깊고 넓고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예술세계의 1%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술은 재미(fun, fun, fun)라고 했는데 그 재미는 무궁무진하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10만 년으로 보고 있다. "11932년에 내가 만일 여전히 살아 있다면, 나는 '십만살'이 될 것이다" <예술산책 기획> www.youtube.com/watch?v=SEEuoAtsMrE

<특집8> "역시 회화그림이 잘 팔린다", ‘이 세상에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건 다이아몬드하고 그림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새 명품이 거의 안 나와. 하지만 그림은 새 작품이 끊임없이 나오잖아. 그러니 부자들이 사는 건 사실상 그림밖에 없는 거지. 그저 그림이 최고예요.
그래서 나도 요즘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해. 그런데 내가 어디 그림을 그려 봤어야지. 하도 안 그려져서 밖에 나가 습자지하고 플레이보이 책을 샀어요. 그리곤 예쁜 여자들 누드에 습자지를 올려놓고 그대로 베껴봤지. 그랬더니만 그런대로 형태가 나오긴 했는데 그것도 여러 개를 하다 보니 별 재미가 없어서 그냥 내 팽겨쳐 놨었지. 그런데 며칠 후 작업실에 사람들이 놀러 와서 요즘 하는 새 작업이냐고 묻더니 몇 장을 사가는 거야. 그저 그림이 최고야. 그림을 그려야 팔 수 있어요.’ -홍순명 회화 작가. 보자르 출신으로 백남준을 우연히 만나서 들은 이야기.

II '사이버네틱스와 인터미디어 미학'이 담긴 자신의 <예술 골자>를 백남준은 아래와 같이 요약하다. "1) 카타르시스와 엑스터시, 2) 순간의 환희, 3) 모든 감각의 만족, 4) 전인격 총체적 개입, 5) 극도의 전자적 충동, 6)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7) 직접 접촉 예술, 8)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9)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 10)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11) 인공지능 신진대사, 12) 다매체 다방향 상응주의(Correspondence) 등등." 그는 확실하게 '전자적 축제주의자'이면서 '감각적 쾌락주의자'다.

<<충만으로서의 엑스터시에서 자아는 세계에 통합된다>>

[1] 사이버네틱스: 엑스터시(충만으로서의 엑스터시 끊임없이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엑스터시의 미학=황홀경의 공감각적인 예술= 그러나 마약과 비슷 집단환영의 양상도 보인다=느림과 권태의 미학(TV 부처)=기술에 대항하는 기술로서의 예술=기계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는 예술=비디오는 우리의 시간의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예술이다.
[2] 되감기가 불가능한 <인간의 시간>과 되감기가 가능한 <기계의 시간> 그 차이가 있다. "잃어버린 땅(공간)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없다" -나폴레옹. "예술적 시공간의 확장해 기술과 예술로 우주와 미래를 내다보는 아트이자, 예술을 기술에 아부하지 않으면서 야합하지 않으면서 기술을 비판하기 위한 예술이다"
[3] 전복은 소통에서 일방적인 소통에서 쌍방적인 소통으로 전복시키다. 비디오 공동체성 강조하면서 비디오는 공동재산 인터넷이 공동재산이듯 그런 개념, 공론장 소통이론(하버마스)과 통한다.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인류애를 지향한다.
[4] 비디오 영토(video-land) 사이버 영토(cyber-land)를 확장하는 데는 무기가 필요한 게 아니라 최고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예술가 개념의 혁신 여기에는 발명가 역할도 포함된다. 예술가는 사회의 안테나 시사에 밝아야 한다=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미래를 사유한다는 것은 보들레르에서 랭보로 이어지는 견자의 능력이며 그것은 또한 멀리 보는 기계인 텔레비전의 능력이다.

<중간에 백남준은 누구인가?> 애교가 넘치는 교란자 1962년 사진 인터미디어 창시자 딕 히킨스가 찍은 사진.

1962년 백남준은 천상 예술가이자 광대이자 교란자이다.

[1]"나는 헐랭이다" -백남준. "헐랭이가 일을 내도 낸다고. 헐랭이가 뭔 줄 알아 헐렁헐렁한 거 말이야 옷도 헐렁라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한 걸 보면 헐랭이라고 그래. 꽉 조인 건 좋지 않아! 헐랭이 같은 사람이 깜짝 놀랄 물건을 만드는 법이지. 진짜 예술가는 헐랭이다" -백남준. 항상 속이 비어 있는 사람만이 창조작가 될 수 있다. 자신으로 꽉 차 있으면 남이 들어가 여백이 없는 것이다. 헐렁해야 다른 사람들이 다가가고 그래야 소통이 되고 네트워킹이 이루어진다.

[2]평론가 김현은 백남준의 이런 선문답 같은 어투나 문체에 대해 이거야 말로 그 어떤 자기 검열이 없는 진정한 해방의 논리라고 극찬했다 옹성처럼 무장되고 구축된 갑갑한 세상에서 창조가 나올 수가 없다. "예술은 사기다"야말로 선무당 같은 예술가들을 여지없이 경쾌하고 박살 내는 그만의 독특한 파열음이었다. 위 사진을 보면 그에게 모든 것은 예술이다. 1962년 비스바덴에서 열린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백남준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동료작가인 딕 히킨스가 사진으로 포착한 것이다 [평] 내가 가짜라고 하는 사람 치고 가짜는 없다. 내가 진짜라고 말하는 사람이 실은 가짜

<외국기사, 시장에서 백남준 작품값>[예술 시장에서 최고작 무시되나?]
Everyone's Ignoring One of the Best Deals in the Art Market/Nam June Paik is in every art history book on the planet. Why isn't his market in the stratosphere?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인 백남준 작품 미술시장에서 놓친다. 2015년부터 백남준 대부분 작품 세계적 명성이 높은 가고시언 갤러리 전속작가가 되었다. 백남준 작품은 미국의 저명한 작가 Robert Rauschenberg 가격의 10분의 1 정도 가격에 팔린다. 백남준 작품이 예술사적 중요성에도 저평가되는 것은 대부분 수집가가 그에 대한 예술사적 인식 부족, 공격적인 갤러리 지원 부재,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하고 눈 앞에 이익만 생각해 작품의 장기적 전망에 대한 우려로 큰 것으로 인한 것 같다.
[평] 백남준 작품은 피카소처럼 정말 희귀한 보물 같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리랑 같이 전 세계의 인류를 위하 문화유산 같은 작품이다. 백남준 소장자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의 자부심은 1000배는 뛰어오른다. 그의 개념작품 속에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다. 21세기는 창의적 아이디어 맨이 승자가 되는 시대다. 비록 시장에서 백남준 가격이 높지 않다고 해도 그의 작품은 인류 문화유산이라는 면에서 가장 가격이 높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 같은 개념, 그런 개념 작품이 가격이 높을 수는 없다.

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7-05-19/num-june-paik-is-the-art-world-bargain-everyone-s-missing-ou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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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래 뉴욕 첫 전시 다이어그램> 사이버네틱스 아트의 백남준 방식의 난해한 공식[6] 뉴욕 간지 1년 후 1965년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백남준:전자아트>전 열다. 백남준. 기존 과학 질서에 대한 도전. 20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디오아트'와 '사이버네틱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새 장 열다.
너와 나, 사이버네틱스의 삶과 예술, 케이지, 맥루언, 위너, 루트 3.5 등등

[2] 과거와 현재를 근거로 미래의 궤적을 예측하듯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전위음악과 맥루언의 미디어 이론 그의 바탕은 니버의 사이버네틱스론을 응요하여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기를 통해 전자아트를 착안. 백남준 이 것을 어떻게 적용되고 어떤 영향을 줬는가. 호모 사이버네티쿠스 인터미디어와 인터 사이언스 '정보이론-피드백-로봇 공학-인공지능-사이버공간-네트워킹' 긴밀하게 연결하다.
[갤러리 보니노(Galeria Bonino)<?>] 개인전: 이탈리아 출신의 알프레도 보니노 보니노갤러리 대표는 뉴욕 외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브라질의 상파울루 등에도 분관을 두다. 뉴욕에서는 1960년부터 활동했다. 보니노 덕분에 백남준은 1965년 처음으로 ‘전자예술(Electronic Art)’ 전시를 열었다. 그해 1월 뉴스쿨(New School social Research)에서 무어맨과 공연하며 선보인 ‘자석TV’는 자석이 전자의 흐름을 바꿔 유기적 형태의 영상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작품이었다.

1971년 11월 23일 뉴욕 보니노갤러리에 모인 존 레넌, 오노 요코, 백남준, 그리고 그의 기술담당자 아베 슈야

아래는 백남준아트센터 미디어 생태계 국제 세미나 모습
1) 사이버네틱스와 2) 불교의 윤회(카르마) 환생 그리고 3) 미디어의 열린 회로 상통한다.

사이버네틱스 예술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극을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사이버네틱스 예술>, 1965[백남준=보들레르=사이버네틱스]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상징적 자연을 비디오 아트로 바꾸다.

[오감] 파동: 청각 촉각, 입자: 시각, 미각, 후각 : 멋 정신 VS 맛 물질 // 얼 정신 VS 알 물질

[1]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조응(Correspondance)>시에서 자연을 비디오로 바꾸다. 그리고 보들레르를 백남준으로 바꾸다. '상징시어'를 '전자아트'로 변형>백남준=보들레르는 쌍둥이다. 백남준은 보들레르의 상징적 자연을 비디오 아트로 바꾸다. 보들레르의 제자인 발터 벤야민도 마찬가지다.

[2] 백남준, 보들레르의 현대 상징시를 전자아트로 코드변경하다]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보들레르의 상징시를 백남준 사이버아트로 변형 백남준아트센터는 내부가 더 전자화면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중세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도 떠올리게 한다. 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
[3]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엽기적이다(Le beau est toujours bizarre)시인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때로 독이 되기도 하고 악마와 사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를 씻어낼 수 있다. 보들레르 시인론은 '타락론(prostitution)'이다. 자신을 거리의 여인처럼 타락시켜 이 세상의 타락을 씻어내려 했다. 이것은 원효가 타락을 통한 더 차원 높은 구도의 길을 찾는 방식과 같다. 역시 위대한 예술가나 성직자는 그런 면에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최고의 지성인이었으나 특별히 갈 만한 직장 없이 떠도는 도시를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산책자(flaneur)로 프리랜서라는 라이프스타일을 처음 만든 사람이다.

[4] 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 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경계 허무는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된 '전자 비전(Television 미래적 관점)'을 썼다는 점이다.

2019년 9월 28일(토) 10:00~17:20

백남준은 <미디어>를 도구가 아닌 문화가 형성되는 사회의 근본 구조로 바라보면서, 맥루언은 '미디어는 미디어다'라고 했지만, ‘미디어로서의 미디어’를 주목하는 미디어 생태학적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당대 대중문화의 플랫폼이자 이데올로기의 매개체로서 가정생활과 여가의 중심에 있었던 TV를 예술의 매개체이자 대상으로 삼아 수행적 이벤트를 만들어간다. 미디어 생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이번 강좌에서 10번 이상 소개한 TV 정원, 장소에 따라 그 분위가가 너무 다르다.

구겐하임

“생태학은 경건한 세계에 대한 관념이다. 그것은 세계의 기획, 전 지구적 순환, 인간 행동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다.” [...]

반대로 지극히 현대적인 오브제를 자연의 요소로 읽어낸 이들도 있다. 작가 제닌 기는 컴퓨터 등 미디어가 자연에서 비롯됐다고 가정한 ‘선구체’ 연작을 내놨다. 흙과 철가루, 전자석이 널려있는 바닥에 TV모니터, 스피커가 마치 채굴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체처럼 설치된 작품이다. 자성물질이나 철 같은 지구의 요소들이 환경, 인류와 호흡하면서 미디어를 탄생시켰다는 해석이다. 제닌 기 작가는 “자연과 인간도 교류하지만, 인간과 기술 사이에도 생태학적 관계가 있을 거란 호기심에 시작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암스테르담

지구와 자연이 주제인 전시답게 동ㆍ식물의 원형에 대한 탐구가 돋보인다. 백남준의 대표작이자 센터 1층에 상설 전시돼 있는 ‘TV 정원’(1974)을 하나의 생태현장으로 규정하고 이를 재해석한 이소요 작가의 ‘TV 정원: 주석’이 대표적이다. ‘TV 정원’은 나무, 풀과 현대적 영상을 지속적으로 비춰대는 TV브라운관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센터에 설치된 지 10여년이 흘렀으니 세균, 곰팡이, 버섯, 곤충 등이 자라고 있다. 이소요는 이 작품 속 생물들을 채취해 보존용액에 담가 놓는가 하면, 현미경을 설치해 생물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마치 한 생물학자의 연구실에 발을 들인 듯한 느낌이다. -한국일보 진지후 기자.

런던

[1] <이제 (미디어) 생태학은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 인류학을 다 아우르는 총제적 탐구의 설계도가 되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는 미디어 생태학적 시각을 드러냈다. 기술적 물질의 변화에서 단순히 더하느냐 혹은 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생태학적 문제로 봤다.>

[2] 백남준은 크민스터 풀러의 말을 인용하여, ‘경제학(Economics)’의 어원 자체가 ‘생태학(Ecology)’에서 왔으며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주거의 조건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총체적 탐구이며 설계라고 역설했고, 생존의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은 점진적으로 진화하는 인류의 지식 축적에 달렸으며 개인의 생존은 번영이냐 절멸이냐로 귀착되는 전체의 생존과 운명을 같이한다고 주장했다.

[3] 백남준은 그러면서 “생태학은 ‘정치’가 아니라 하나의 유일무이한 세계관”이며 “세계의 설계, 전 지구적 재생, ‘너 아니면 나’에서 ‘너와 나‘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했다. 백남준의 생태학이 예술 등 특정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각 분야에서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각 분야의 연구가 생명과 생존이라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수렴해야 하는 것이다.

[4] 백남준은 1948년에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니버가 발명한 사이버네틱스[사이버세상])라는 실험적 인식론을 수학적, 생리학적, 과학적 기술방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사유를 유도하는 시대의 패러다임 가상 디지털 세상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는 지식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내비치다.

[5] “당신은 당신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끊임없이 당신이 되고,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고 조각가가 되십시오" - 니체 [평] 결국 초인이라 자신의 삶에서 주인으로 사는 것을 뜻이겠죠.

<<<---[백남준&사이버] '사이버네틱스:전자관계망'--->>>
[1]백남준, 사이버네틱스를 순수관계망(NETWORK OF PURE RELATIONS)으로 보다. 다시 말해 '제어-통신 및 피드백'으로 본다. 백남준은 이것을 선불교와 카르마와 연결 그만큼 동서사상과 과거 현재를 연결된다. 모든 예술을 수렴하려면 사이버네틱스 기술이 필요하다. 불교의 제3의 길(환생)이기도 하다. 인류문명에서 우리의 상식과 다르게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2]사이버네틱스는 과학기술 인간화 예술화 연결화의 한 방편이다. 끊임없는 (상호의존적) 인과의 그물이다. 사이버네틱스의 기술보다 예술 즉 삶이 더 중요하다. 사이버는 무엇보다 열린 회로다. 이러 기술의 대표작이 바로 k-456 역사에서 과거가 필요하듯 이 기술에서 피드백이 필요하다. 선순화 메커니즘 TV부처는 피드백이라는 사이버네틱스 개념이 내장되어있다. 우연성, 비결정성, 비선형성을 갖추고 있다. 백남준에게 중요한 것을 '앎'이 아니고 '삶'이다. 즉 '사이버네틱스'라는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고 사이버네틱스라는 것이 예술이 되어 삶을 바꾸는 것이다.
[일상이 예술보다 중요하다. 백남준의 예술철학] 사람을 늙지 않게 하는 것 2-3가지 공부(독서), 운동 그리고 정신적 가치 추구 -김형석 철학자 100세를 넘기다앎보다 삶이 중요하다.  news.joins.com/article/23981265

<백남준 콜라주 드로잉 에로티시즘의 정수> 왜 25년 만에 공개(?) 

[1] 이경희 여사가 백남준의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겨우 일어나 거동을 시작했을 무렵인 1996년 가을에 이경희 여사에게 73장의 콜라주 드로잉을 보냈다. 왜?왜?왜? 남성이 가장 약해질 때 첫 사랑 혹은 어머니가 그린 것인다(?) 그런데 이경희 여사는 이 작품을 2019년쯤에 공개하다. 25년 만에 공개한 셈인데 왜 이렇게 늦었나 한국사회가 백남준보다 25년 뒤쳐지기 때문이다. 당시 이것을 공개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성의 표현의 자유가 제하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루트 3.5가 자주 등장한다.

[2] 여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사랑과 가장 황홀한 순간들(어린 시절 천국경험)이 담겨져 있다. 백남준은 성에서 촉이 예민했다. 예술적 에로티스즘에서 백남준을 따라갈 작가가 없다. 뒤샹이 그런 시도를 했지만 백남준만큼은 못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에로티시즘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능수능란해야 한다. 백남준은 이 드로잉을 나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했다나. 정말 그런가. 

[3] 백남준에게 루트 3.5란 뭔가? 백남준 1996년 이경희 여사에게 그려서 보낸 드로잉 편지에도 등장한다. 맥루언 루트 3.5라는 것이 있는데 1996년에는 이경희 루트 3.5도 있다. 이경희 여사에게 보낸 드로잉에도 나타난다."여기서 3.5를 수학적으로 풀면 세곱하고도 절반을 더 가지는 것이다. 시간이란 단순히 추상적인 영역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시간을 들여서 체험하고 살아온 사람의 느낌에 대한 부분이다" -김남수.

[백남준&사이버] <17> '위너-피드백-AI'시대 [백남준&사이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뭔가? 그 창시자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는 누구인가(?)

18살에 하버드에서 철학박사 받은 천재 수학자 "위너가 전자시대 기술적 내부를 건설했다(그는 전자시대 설계자였다)“ -백남준. 백남준은 호모 사이버네티쿠스의 전형. '인공지능-전자화-디지털'시대 II 결국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위성 아트 시대에 사이버 영토를 더 많이 차지하게 된다

백남준은 호모 사이버네티쿠스의 전형이다.

사이버 아트 혹은 위성 아트를 통해 지구 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문화 칭기즈칸 백남준. 1986년 바이 바이 키플링을 통해 이슬람 영토까지 품다. 지식과 정보 확장은 늘 즐겁다. 공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즐거운 축제 중 하나이다

사이버그 & 사이버네틱스 인간·동물·기계의 혼종, 사이보그 

[3]<오늘 포인트:백남준에게 중요한 것을 '앎'이 아니고 '삶'>

"그러나 사실 강자는 없는 것이다" -1984년 3월 23일 박경리. [평] 이 세상에 강자는 없다. 이 세상에 강대국은 없다. 요즘 미국을 보라. 백남준이 진정한 강자

<목포기행 이야기 백남준&김대중> seulsong.tistory.com/1355

 

[목포아트투어] 붉은 동백 햇살이 빚은 '풍경'

[2021년 1월 20일 목포 방문] 문화예술의 지방화 한국이 선진화되는데 급선무. 백해영 갤러리 서울본관 지방 순회전 등 시청 문화행정과들과 긴밀한 대화와 협의 예정이다. 목포엔 시가 소지한 문

seulsong.tistory.com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있다면 BTS를 광팬이었을 것이다. 서태지 팬이기도 했다

[1]<목포기행 이야기 백남준&김대중>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터넷 강국으로 만든 김대중 그리고 BTS&마이클 잭슨] 김대중의 위대한 점은 백남준처럼 대중문화를 제대로 이해했다. 서태지, 마이클 잭슨 생존하고 있었다면  BTS를 얼마나 사랑할까.

김대중 대통령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정보시대를 대비하다

[백남준&인터넷&김대중] 돌아가서 백남준 2000년 김대중대통령으로부터 금관문화훈장 받다. 그 수상의 동기: "백남준은 뉴욕 구겐하임 전과 새천년 준비위원 활동 등 공로로 김대중 정부로부터 2000년 '문화의 날'에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내가 이런 좋은 상을 탈 줄 알았다면, '백'씨 대신 '천'씨 성을 타고나 1000년 동안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더 만들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다.

[3] 김대중대통령은 백남준과에 속하는 인물, 정보마인드가 강했다. 정보와 지식 강국을 열망하다. 새천년들어서자 국민컴퓨터 보급과 함께 인터넷 ADSL 망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깔다. (1998년 8월 시범 서비스 시작, 1999년 4월 사용 서비스 시작)ADSL 정보시대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소통이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한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케이방역의 성공은 여기서 시작. [결론]지금 전 세계가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한국만이 민주주의을 복원하고 코로나 대비를 잘 하는 것을 바로 한글과 인터넷 때문이다. 가장 빠른 스마트폰으로 전 국민이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모든 사람은 지식근로자(지식노동자) 바로 그 자체이다.
[결론]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터넷 강국으로 만든 김대중 [코로나 포스트 시대] 이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이 한국을 모델로 할 수밖에 없다. 중국 빼고 한국은 경제와 코로나를 다 잡은 나라로 유일하다

<<다시 백남준 이야기로 돌아가서>>

[1] <맥루언 루트 3.5와&이경희 루트 3.5 다른 점 같은 점>공식 다시 등장 <25년 만에 공개된 백남준 콜라주 드로잉> 이경희 여사가 백남준의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겨우 일어나 거동을 시작했을 무렵인 1996년 가을에 이경희 여사에게 73장의 콜라주 드로잉을 보냈다.그런데 이경희 여사는 이 작품을 2019년 쯤에 공개하다. 25년만에 공개한 셈인데 왜 이렇게 늦었나 한국사회가 백남준보다 25년 뒤쳐지기 때문이다. 당시 이것을 공개할 수 없었다. 그만큼 성의 표현에서 뒤진 것이다.

1965년 백남준 뉴욕 전자아트 전 공식

[2] 여기에도 루트 3.5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사람이 거의 대부분을 찾지 한다. 백남준은 '성'에서 촉이 예민한 작가다. 예술적 에로티시즘에서 백남준을 따라갈 작가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뒤샹이 그런 시도를 했지만 백남준만큼은 못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에로티시즘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능수능란해야 한다. 백남준은 이 드로잉을 "나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했다.

루트 3.5란 뭔가?

[2]<맥루언 루트 3.5와&이경희 루트 3.5> 백남준 1996년 이경희 여사에게 그려서 보낸 드로잉 편지에도 등장한다. 맥루언 루트 3.5와 같이 1996년에는 이경희 루트 3.5도 있다 이경희 여사에게 보낸 드로잉에도 나타난다."여기서 3.5를 수학적으로 풀면 세곱하고도 절반을 더 가지는 것이다. 시간이란 단순히 추상적인 영역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 시간을 들여서 체험하고 살아온 사람의 느낌에 대한 부분이다" -김남수.

 

[백남준]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2013년 2월 3일 이영철 관장 인터뷰 원본 소개 당시 내용이 너무 많고 길어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제목 백남준 시대가 왔지만 백남준 연구는 없다>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②] 이영철 전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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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백남준&이영철] 백남준은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는 큐레이터 중 한 분
[01] 질문: 백남준아트센터 관장하실 때 편저로 <백남준의 귀환>을 내셨는데 왜 저서는 없죠?
대답: 양심상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남준이 그렇게 중요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그걸 모은 책이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저서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내서라도 급한 것은 이해하지만 어설픈 저서는 정말 곤란한 것이라 봐요. 백남준은 미국에서 40년 살았는데 그 나라에선 백남준에 대한 단일 연구 서적이 단 한권도 없어요. [피드백]이라는 중요한 책이 있지만 백남준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앞서 간 연구서입니다. 그 외엔 없습니다. 존 핸아르트라는 큐레이터가 전시 도록을 자신의 책 처럼 만들어 출간했는데, 내용이 솔직히 엉망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쓴 글도 아닌 것 같아요. 다른 연구자들 글을 모아서 자기 이름으로 냈어요. 그리고 프랑스에도 없어요. 독일에선 박사 논문을 출간한 저서가 한권 나와 있지만, 그 책의 발간 후 저자가 상당히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압니다. 비디오 아트를 누가 처음 시작했느냐를 놓고 논란을 유발시켰던 책이니까요. 백남준의 친구였던 볼프 보스텔이 연도를 조작해서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 아트 창시자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걸 고발했다가 저자가 독일 미술계에서 곤경에 빠졌어요. 그러니까 연구서는 없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한 카탈로그만 더러 있어요.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반면에 한국에선 잘 모르면서 그에 대한 저서들이 여러권 나와 있어요. 자신들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백남준 이름이 필요했던 책들입니다. 백남준 자신이 남긴 중요한 글들, 인터뷰들이 많은데 제가 그 책을 내기 전까지는 그분 자신의 책은 한권도 나온 게 없었어요. 백남준을 가장 존경하는 독일에선 백남준의 글 모음집은 몇 권 나와 있어요. 비엔나 현대미술관에서 63년 첫 개인전을 리바이벌하며 만든 책(도록 으로 나왔지만)이 다행스럽게 도움이 많이 되는 본격적인 책입니다. 백남준에 대한 저서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봅니다. 미디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뒤샹 보다 어렵지요. 그러므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백남준 서적들은 위험천만한 문제작들이라 봅니다. <백남준의 귀환>이란 책을 낸 배경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고, 장차 영어 독자를 위해 출간할 목적으로 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사되지 못했어요. 상황이 아주 복잡했고 골치 아픈 정치적 이유가 있었어요. 백남준 일을 하면서 너그러워 지는 게 아니라 깊숙이 원한이 생기더라구요. 세상을 확 바꿔버리고 싶은 생각이 더 크게 들고, 정치가가 되려는 생각을 왜 한번도 안했지? 하고 되물은 적이 많아요. 백남준아트센터를 경기도에서 만든 것은 절반의 비극과 절반의 희극이에요. 그리고 백남준 현상은 한국에선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아요. 슬프게도 헤밍웨이 소설 <바다와 노인> 같은 이미지가 떠올라요. 얼마나 끔찍이 외로웠을까. 온통 다 뜯어 먹히는 처절한 전장에서 홀로 선 그의 내면을 본다는 것 때문에 정말 날밤을 샌 적이 너무도 많아요. 그 순간들에서 저는 백남준을 보았지요. 정말로 이제 한국이 21세기를 생각한다면 백남준 연구를 위한 국제적인 페로우십 제도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마지막에 그걸 하려고 노력하다 아트센터를 그만두었어요. 무지한 자들과의 전투는 항상 고달파요. 협상도 어느 정도지 영혼을 팔 수는 없잖아요. 백남준의 첫 전시를 분석하는 책을 저서로 낼 예정입니다. 일본어와 영어로 낼 겁니다.

[02]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
사상은 어려운 것 아닌가요.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이지만 명확히 한계가 있지요. 어차피 아는 것만큼 뵈는 거니까 모두가 동일하게 강박증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봐요. 동서고금의 통섭은 평생 가는 과제일 테고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렵지요. 음식을 입에 떠먹여 달라고 불평만 하는 것은 재미없어요. 난해하면 문제가 있는 거라 여기는 포퓰리즘적 사고가 모든 분야에 만연해 있는 게 더 문제예요. 정서적 소통을 강제하는 것은 어떤 문제와 대한 진지한 접근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기도 합니다. 가령 이어령 선생님의 스타일로 백남준을 이해시키는 것이 표준이 된다고 누군가 생각한다면 곤란하죠. 청년 시절의 백남준의 고뇌, 역사적 책무감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죠? 백남준은 삶의 끝자락에서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성과 영성이 분리되지 않은 영매 과학자이자 인문학적 야만인 같은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신경 발작과 신체적인 전기 현상의 관계를 고민했으니까요. 작고하기 직전에 백남준이 했던 동영상 작업 속에 전기 신경 발작의 작품이 있어요. 서양 사람들이 그의 코드를 보지 못하는 까닭은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낯선 관계 때문이 아니라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 때문이라 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 볼 수 없다는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의 도움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의 도움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전체상이 그려지는 것이라 봐요. 서양 사람들이 주도해온 지난 이백 년 역사를 더 이상 믿을 게 없으니까, 새 그림 그려야 하는 거죠. 백남준은 이십 대의 나이에 그것 알았고, 알았으면 실행해야 하는 거고, 마음 약해져서 뒤돌아보지 말고 혼자 앞서 나간 거죠.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 중심의 예술 개념이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이거든, 니체는 그것을 계보학이라 불렀어요. 독일 시절에 백남준이 독일 친구들과 모여 니체를 읽었다고 해요. 우리에겐 역시 백남준의 사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리고 항상 중요합니다.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에 대해 자성해야 합니다. 그와 절친했다는 친구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03]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백남준이 큰 역할이 했다고요?
아무도 그 이야길 하지 않아서 이상할 지경이에요. 베니스에서 가장 큰 영예의 상을 받았고,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도 그 무렵에 있었고, 바로 이어서 백남준이 한국관 건립에 95퍼센트 공로(5퍼센트는 문광부의 기여)가 있었고 같은 해에 광주비엔날레가 만들어졌잖아요. 그 당시에 내부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말이 되어본 적도 없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백남준은 워낙 큰 인물이라 소소한 경과 이야기하질 않는 성격입니다. 왼손이 모르게 오른손을 사용하는 사람이죠. 소인배나 평범한 사람들이 흔히 하게 되는 생색이란 일절 상상도 못 할 분입니다. 광주비엔날레 인포 아트 전의 실질적인 기획은 백남준이 했다고 보아야지요. 미디어아트가 워낙 생소하니까. 그리고 백남준은 미디어아트의 정교수로는 세계 최초일 뿐 아니라 미국 내 미술대학들에 미디어아트 학과나 스튜디오가 생길 때 온통 자문역을 도맡아 했어요. <전 세계 돌아다니며>그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분을 ‘구루’라고 하지요. 광주비엔날레 인포아트 전에는 백남준의 친구와 제자들로 채워진 것입니다.

<인류학적인 이야기 하나의 예>
[1] 20세기 가장 위대한 서양의 인물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뿐이다. 그는 말했다. "야만을 믿는 그 자체가 최고의 야만이다" 스토로스 선사시대를 연구해 보니 (전쟁과 혁명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20세기가 얼마나 야만인가 특히 서양의 문화가 야만인가를 얼마나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무지한 사람이 야만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이다.

[2][백남준과 IMF] 백남준 한국이 1998년 IMF로 625 한국전쟁 이상의 참혹한 고통당할 때 한 위로의 말 “IMF 빚 갚는 것은 5년, 길어도 10년이면 끝날 거야. 예술은 그런 걸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예술이 상대하는 건 영원이야.”<예술세계 되짚어 보자> 3주기 맞아 회고 세미나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움츠러들어 있던 1998년 1월, 미국의 백남준(뉴욕 1964년 공연)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조국을 위로했다.

[3] 프랑스는 사전의 나라다. 18세기 백과사전파가 유럽에서 처음 생겼다. 사실 동양의 공맹사상을 접하고 만든 것이다. 하여간 프랑스의 세계적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국제 사전>이 나왔다. 한 학자를 연구하기 위한 사전이다. 역시 프랑스답다. 우리나라도 <백남준 국제사전> 나와야  www.cnrseditions.fr/catalogue/philosophie-et-histoire-des-idees/dictionnaire-international-bourdieu/?fbclid=IwAR2NDGTgUMlBsrD7Lb8cg25XyaWZLpc-Nj7UOwXeaklSR_sWTmRufDi-VcA  Dictionnaire international Bourdieu - CNRS Editions Dictionnaire international Bourdieu - (EAN13 : 9782271082039) édité par CNRS Editions - Près de 600 notices, une équipe de 126 auteurs venus de vingt pays et réunissant les meilleurs spécialistes de Pierre Bourdieu, sociologues, politistes, www.cnrseditions.fr

 

Dictionnaire international Bourdieu - CNRS Editions

Dictionnaire international Bourdieu - (EAN13 : 9782271082039) édité par CNRS Editions - Près de 600 notices, une équipe de 126 auteurs venus de vingt pays et réunissant les meilleurs spécialistes de Pierre Bourdieu, sociologues, politis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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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난번 강좌 백남준 어록에 대해<2부시작>
https://www.youtube.com/watch?v=m-MwqqpMBwc&t=51s 

[1]"백남준이 평생 해온 예술의 주제 중 하나가 소통과 참여 그래야 전쟁을 방지 가능
[2]예술가는 외줄 타는 사람.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게 예술 -백남준
[3] 오늘 2부 본론에서는 백남준의 말 어록에 대해서 소개:
백남준(1962) 30살 발언: "황색 재앙은 바로 나다(내가 서구를 다 쓸어버릴 황화다)" 
백남준(1992) 60살 발언: "서양의 룰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자신감 넘치다. 이 두 마디로 서구와 모든 게임이 끝났다.

백남준의 시간 과거(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현재가 유토피아, 미래는 지금
[0] 백남준을 연상시키는 글 1. "독재는 무지에서 피어난다" - 조지 오웰. 무지는 정보와 지식의 턱없는 결핍에서 온다. 가짜 뉴스에 속으면 오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많은 것은 그것 때문에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2. 공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즐거운 축제 중 하나이다. 3. 공자의 말씀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 참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해가 된다. 나이 먹어가면서 철드는 과정인가 4. “정신분석학은 무지를 치료하는 처방이다. 헛된 소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자크 라캉

[1] 白南凖의 生涯와 藝術 백남준은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공존.”라고 말한다.

[2] 백남준은 이렇게 말했다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

[3]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희랍인 조르바 그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사랑을 할 수 있기에 자유롭다.

[4] 예술은 밋밋한 이 세계에 양념과 같은 것이다. 이 상투적인 세계에 그나마 예술적 충격이 없으면 인간들은 정말 스스로 파멸할 것이다. 예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건조한 세상이 재미없다 보니 예술이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위대한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5]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은 있지만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러운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

[6]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 최초의 쌍방향 방송이다. 나는 이것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자랑할 수 있다. TV 문화는 레이더로 시작되었으며, 레이더는 쌍방향이다. 즉 TV는 쌍방향에서 시작된 것이다.

[7] 스즈키 다이세쓰와 같이 자문화를 파는 세일즈맨이 되지 않기 위해 통상 회피해 온 선禪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문화적 애국심은 정치적 애국심보다 더욱 해로우며 전자는 일종의 위장을 취한다. 특히 선의 자기선전(자기포기의 교리)은 선을 스스로 죽이는 행위이다. 선은 반아방가르드적이고 반개척자적이며 반케네디적이다. 선은 아시아의 빈곤에 책임이 있다. 아시아의 빈곤을 정당화하지 않고 어떻게 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1964

[8]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고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요.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을 좋아해요.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입니다. 대부분 읽고 생각해볼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입니다. 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중에서), 2001

[9]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1988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1] <센티멘털한 컴퓨터> "길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라고" 베블렌이 말한다. 나는 " 내 가슴에 비가 내리듯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린다"라고" 말하겠다."내 컴퓨터에 비가 내리네"가" 나의 비디오 첫 작품이 될 것이다. 그것은. 현상의 비(자연)와 컴퓨터 비(기계)의 혼합이다. 나의. 두 번째 작품은 센티멘탈한 컴퓨터 되다.

[2] 콜라주가 오일 페인팅을 대신하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 <기계의인간화 예술화>

[3] 사람들은 내게 왜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하느냐고 많은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들에게 생중계 위성방송은 나의 무모함에 와 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험을.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생방송은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현실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4] 인공위성 생중계는 베타멕스처럼 리와인드가 안 된다.

[5] 우리들의 인생처럼-내 인생의 하나의 행운은 존 케이지가 완전 성공하기 전에, 요셉, 보이스가 거의 무명일 때에 만나 놓은 것이다. 따라서. 금세기의 두 연장자와 역경 시대의 동지로서 동등하게 교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나는 한국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외국을 맴도는 문화현상 혹은 문화장사꾼이다.

[7] 한마디로 전위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8]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9]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1] 선생께서는 비디오아트가 앞으로 커다란 발전을 맞게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러리라 확신합니다.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 아트를 제외하곤 모든 것을 다 이뤄놓았습니다. 그는 입구는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지요. 그 조그마한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입니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입니다.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않았다”(1974년 이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 <백남준 :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2009

[2] 난 구라파에 가서 보고 음악이나 미술 수준에 관하여 매우 실망을 느꼈다. 내가 가서 본 르네상스 이후의 위대한 실물들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거대한 사원에 들어가서는 좀 위압감을 느꼈다. 그 위압감의 본질이 고딕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공간 처리에도 있겠지만 난 무엇보다도 스테인드글라스의 신비로움에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벽에 건 그림과는 달리 빛이 투과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빛이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저 건너 바깥에 있다. 그리고 그 바깥에 있는 빛 때문에 인포메이션이 생겨난다. 그래서 난 그걸 좋아했고 그것을 내 아트로 옮겨보았다.(김용옥, <석도화론>, 2001)
[3] 나의 실험적 텔레비전은 “완전 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1964

[4] 미국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항상 즐거워하거나 자극받을 필요는 없다. 미국에는 지루한 음악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부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지루한 음악을 작곡하지 않는다. 나는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나 자신도 가난하다. 나는 매 순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5]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 피카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르노와르처럼 화려하게 /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풀록처럼 간결하게 /제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텔레비전 스크린 캔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 백남준-아베 영상합성기”,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6]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1965 영원에 대한 숭배 인류의 가장 큰 과오, 우상숭배를 말하는가 아니면 영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메시지인가

[7] 나는 기계에 대한 저항으로서 기계를 사용한다. 1980

[8]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변화다. 백남준 강좌를 통해서 변화가 오면 성공이다
[9] 백남준 첫 전시 16개 개념 중 하나가 '내용 없는 시간(무시간)'을 착안하다. 백남준과 장자: 피리 속이 비어야(무음악)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바람(음악)을 만나야 울림이 생긴다(진정한 소통).
[1]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1984

[2]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한마디로. 전위 예술은 신화를 파는 예술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적인 실험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다.

[3] 만약 현대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인 것이다. 1986

[4]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만큼이 사기가 되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 월간<춤>, 1986년 11월. 요즘 가짜 뉴스의 홍수시대 

[5] 백남준은 한국이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재벌이 아니라 바로 시장통 사람들로 보다.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사람들 서민들 덕으로>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에서 찾는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은 이 문제를 1백 년 전에 이미 해결하여 놓았던 것이다. 일제 하에서도, 6·25 동란과 군사독재, 부정부패, 산업화, 재벌독점, 환경오염에서도 이 두 시장은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 불만 났다 하면 제일 먼저 터지고 타는 남대문 시장과 동대문 시장 불타 폭삭 주저앉았나 싶더니 다음날 여지없이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달라졌다고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1999년 2월 18일 백남준

[6] 1993년 휘트니베엔날레 서울 순회전을 기획하며 한국의 재벌은 결코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사람을 이길 수 없다(독점기업도 건드리지 못하는 양대 <남대문 동대문> 시장의> 기능을 우리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란의 *'샤' 왕조(1077년부터 1231년까지)가 결국 바자의 상인들에게 진 것처럼 말이다 *(페르시아어: خوارزمشاهیان) [...] 자본도 변변치 않은, 노력투성이의 경제라 시장상인은 아무도 무섭지 않고 특혜금융도 필요 없다 양대 시장이 거대 부패와 특혜융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 불만 났다 하면 제일 먼저 불타 폭사 주저 않았나 싶더니 다음날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이런 자유경제가 자본주의의 능률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한국을 지킬 것이다 -백남준

[7] 행복이냐? 아마… 배반이냐? 아마… 출세주의냐? 아마… 겁쟁이냐? 아마…

[8]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다.

[9]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다. 속이고 속는 것이다.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 넥타이는 멜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를 수도 있다.

[1] 창조가 없는 불확실성 없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

[2] 우리는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고 이 전람회를 끌어 온 것이 아니다. 청년들에게.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고 이 고생스런 쇼를 하는 것.

[4] 예술가는 외줄 타는 사람이다.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게 예술

[5] 백남준 과거 현재 미래: 과거(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현재가 유토피아, 미래는 지금이다.

[6]정치적 애국심보다 문화적 애국심이 더 많은 폐해를 낳으며, 문화적 애국심은 교묘하고 위선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조심스러우며, 또한 "선의 자기선전"은 선의 가장 어리석은 자살 행위라 말하며, 선의 핵심적인 두 가지 부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7]'황홀(ESCTASY)'이라는 단어 남을 황홀하게 할 때 나에게 최고의 황홀이 온다
이는 원래 그리스어로 eksisteanai(ek=넘어서는, 바깥의-histanai=세우다, 서 있다.)이다. 이 단어는 보통 시적인 영감의 광란, 또는 신성한 것에 대한 명상으로 인한 정신적 변화나 희열을 의미했다" 백남준에게 '황홀'이라는 단어는 매우 다른 듯한 두 상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란의 상태와 명상의 상태를 모두 '황홀'한 상태로 여깁니다.
[8] <백남준 전문가 평>현대 문화에서 비디오 아트가 크게 자리 잡은 것은 백남준의 예술과 놀라운 상상력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이용한 프로젝트, 설치 미술, 행위 미술, 공동 제작, 새로운, 예술 도구 개발, 교육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 매체 문화 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언어를 재해석한 선구자적 존재이다. -존 핸하르트. 아이폰은 백남준 아이디어다 -존 헨하르트. 예술가에게 실수는 오히려 천재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다. "남준 내겐 어머니 같은 존재" -장 폴 파르지에
[9] 전자가 과잉/흥분된 고양이라면 후자는 절제/집중된 고양입니다. 하지만 이 '황홀'의 상태가 정신적 변화로 이끈다는 점에선 둘이 같습니다. 이는 마치 굿과 명상의 효과는 동일하다는 식의 이야기로 들립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백남준이 말하는, 예술의 역할은 경험자로 하여금 '황홀'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단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즉, 예술의 도움 없이도 '황홀'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술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가장 행복한 자살 - 가장 어려운 반예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황홀'을 단지 비정상적인 상태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백남준은 사르트르의 보통 상태의 의식에 대한 분석에서 '황홀' 개념이 일상적으로 발현될 수 있다(혹은 이미 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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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사이버네틱스[사이버세상]과 이를 창시한 니버로 돌아가기>

[1]사이버네틱스: cybernetics)?[4]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뭔가(?) 그 창시자 니버는 누구(?) "위너가 전자시대 기술적 내부를 건설하고 있다“ -백남준

[2] 자연=인간=기계 삼위일체 즉 새로운 관계, 예술=기술=위성(사이버세상) 삼위일체

사이버네틱스예술는 전 지구적 순환을 꿈꾸며 인간의 행복변화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낙관주의자의 혁신적인 사유에서 비롯되었다. 상식을 파괴하고 기존의 가치에 도발적으로 도전한다. 우리는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우주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3] 사이버네틱스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두한 것으로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ener)에 의하여 창시되다. 그는 18세에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를 받은 천재로 원래는 수학자다. 전자계산기를 발명하고 이를 응용해 인공지능을 만든 장본인이다. 뉴턴 물리학의 인과성을 넘어 기계도 사람처럼 소통하고 사유할 수 있는 생명의 유기체로 봤고 그래서 '인간·기계·자연'을 하나로 결합하려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두하다. 전자계산기를 발명하고 이를 응용해 인공지능을 만든 장본인이다. 뉴턴 물리학의 인과성을 넘어 기계도 사람처럼 소통하고 사유할 수 있는 생명의 유기체로 봤고 그래서 '인간·기계·자연'을 하나로 결합하려 한다. 사이버네틱스의 3가지 핵심요소가 '컨트롤·커뮤니케이션·피드백'인데 이런 용어는 인터넷 시대의 쌍방적 소통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를 농담처럼 생사의 순환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인과의 그물망)'에 비유하기도 했다.
[4] 인공두뇌의 실현과 오토메이션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두뇌학이라고 요즘 그런 시대가 온 게 확실하다. 우리는 사이버네틱스라는 말보다는 사이버 세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의 영향으로 백남준은 사이버아트를 맨 처음 시도하다.
[5] 백남준은 1948년에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니버가 발명한 사이버네틱스[사이버세상]라는 실험적 인식론을 수학적, 생리학적, 과학적 기술방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사유를 유도하는 시대의 패러다임과 가상 (디지털) 세상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는 지식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내비치다. 전자시대의 새로운 개념어 필요.

[6]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매스메틱스(mathematics)의 전자화? 사이버네틱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생물의 자기 제어(自己制御)의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하여 통신·제어·정보 처리 등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두한 것으로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ener)에 의하여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공두뇌의 실현과 오토메이션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두뇌(인공지능)이라고 요즘 그런 시대가 온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사이버네틱스라는 말보다는 사이버 세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백남준의 뉴욕 보비노 갤러리 첫 전시 다이어그램>>

[1] 백남준은 1963년 독일 부퍼탈 첫 전시에서 '흑백TV'를 처음 선보였고 1965년 미국 뉴욕 보니노갤러리 전시 때엔 TV의 연장이라 할 '비디오'를 등장시킨다. 위와 아래 다이어그램은 그 당시 전시도록에 공식적으로 적어놓은 전자예술론이다.
[2]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 백남준은 1967년 <신동아> 12월 호에 '전자와 예술과 비빔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60년대를 읽은데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인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노버트 위너'와 미디어의 권위자 '마셜 맥루한'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  이 표는 백남준 1965년 11월 뉴욕 '보비노(Bobino)갤러리'에서 열린 전자아트전 도록에 수록된 것으로 이를 풀이하면 사이버화 된 예술의 델타 T값과 사이버화된 삶을 위한 예술의 델타 X값은? 여기 밑에 있는 당신에 위에 있는 나를 로그 하면? '존 케이지'에서 '맥루한'을 빼고 이를 다시 '위너'로 나누면 그 답은?이 표는 백남준 1965년 11월 뉴욕 '보비노(Bobino)갤러리'에서 열린 전자아트전 도록에 수록
[3] <위 뉴욕 첫 전시 다이어그램> 과거와 현재를 근거로 미래의 궤적을 예측하듯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전위음악과 맥루언의 미디어 이론 그의 바탕은 니버의 사이버네틱스론을 응요하여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기를 통해 전자아트를 착안. 백남준 이 것을 어떻게 적용되고 어떤 영향을 줬는가. 호모 사이버네티쿠스 인터미디어와 인터 사이언스 '정보이론-피드백-로봇 공학-인공지능-사이버공간-네트워킹' 긴밀하게 연결. 뉴욕 간지 1년 후 1965년 뉴욕 보니노갤러리에서 <백남준:전자아트>전 열다. 백남준. 기존 과학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20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비디오아트'와 '사이버네틱스'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새 장을 열다.

[1] 백남준 과학상식마저 뒤집다.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극을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사이버네틱스 예술>, 1965
[2] 백남준은 '전기시대(Control Machanism)'에서 '전자시대(Communication Process)'로 넘어가는 과정을 1948년에 발명한 니버의 사이버네틱스 개념을 통해 전자아트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붙여1965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서 열다.
[3] 백남준은 위너와 맥루언이라는 글에서 미디어(차거운 미디어와 뜨거운 미디어가 있다)가 지구를 연결하는 거대한 신경계인 것처럼, 맥루언의 미디어이론을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이론과 연결시키다.
[4] 1963년 이후 일본의 형님댁에 갔다가 뉴욕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각종 퍼포먼스를 펼치며 예술가로 자리 잡아 갔다. ‘작가들의 작가’였던 백남준에게 뉴욕의 유력 화랑인 갤러리 보니노(Galeria Bonino)가 개인전을 제안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알프레도 보니노가 대표. 뉴욕 외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브라질의 상파울루 등에도 전시장을 두다. 뉴욕에서는 1960년부터 활동했다. 보니노 덕분에 백남준은 1965년 처음으로 ‘전자예술(Electronic Art)’ 전시를 열었다. 첫 개인전 이후로 전자예술에 심취했다. 그해 1월 뉴스쿨(New School social Research)에서 무어맨과 공연하며 선보인 ‘자석TV’는 자석이 전자의 흐름을 바꿔 유기적 형태의 영상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한 작품이었다.
[5] 독학으로 전자공학을 연구한 백남준은 TV를 왜곡시켜 물속을 다니는 지직거리며 반복하는 영상 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화가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필법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니노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에서는 TV모니터에 덩그러니 달 하나 뜬 것 같은 작품도 선보였다. 
[6]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그의 발성에 보듯 음의 철학자인 백남준에게 달은 전통적 추억의 소재이자 자연의 숭배대상이며 그리움의 정서를 담고 신령스런 힘을 지닌 특별한 의미였다. 전시 개막식은 대성황을 이뤘다. 다음 날 뉴욕타임즈(NYT)는 백남준에게 극찬을 쏟아냈다.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와 비디오아티스트로서의 확신을 얻는 계기가 됐다. 이후 백남준은 본격적으로 전자TV를 이용한 비디오작품을 선보인다

[7] 그리고 백남준은 또 '랜덤액세스'나 '사이버네틱스'도 좋아했다. 이 이론은 60년대 유행한 '제3의 과학체계'로 놀랍게도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신물리학이다. 아래를 보면 백남준이 왜 이런 역발상적인 이론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조상인 기자 글 인용

[8]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극을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 백남준 <사이버네틱스 예술> [9]백남준은 플라톤, 니체, 루소, 헤겔, 맑스, 사르트르, 리오타르 등의 주제이기도 한 '약자의 힘(La force des faibles)'이라는 철학개념을 과학에서도 발견하다.

[1] 하이젠베르크 누구인가? <양자역학> 과학자들은 19 세기 말에 뉴턴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만 있다면 물리학의 모든 법칙들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역학은 입자 즉 눈에 보이는 역학을 담당하였고 맥스웰의 전자기학은 파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절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파동과 입자 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입자와 파동은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에는 치명적인 문제, 즉, 흑체복사가 있었다. [...]
[2] 이 이론은 빛이 입자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이로 인하여 빛은 파동이자 입자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불연속적인 값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양자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물리량이 연속 값을 취하지 않고 어떤 단위량의 정수배로 나타나는 비연속 값을 취할 경우, 그 단위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모든 물리량이 불연속적인 값을 가지며 이 불연속적인, 즉 양자화된 것들의 움직임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1]막스 슈티르너: 독일의 철학자로서 허무주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슈티르너의 주요 저서로는 《유일자와 그 소유》가 있으며, 이 책은 1845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다.

[1]백남준 에세이 3페이지에 나오는 이름 중 아는 사람 10%도 안 된다. 백남준 북한에서 재해석한 노자해설서까지 다 읽다. 벨 연구소 다니면서 공부 많이 하다. 해시시는 인스턴트 선불교인가?

[2] 사이버네틱스 또는 인공두뇌학(人工頭腦學)은 기계나 조직의 조합을 통해 통신과 제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오토마타와 로봇과 같은 컴퓨터로 제어된 기계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사이버네틱스라는 어원을 보면 키잡이, 조절기(governor), 방향타, 결정타에서 기원한다. 예로부터 현재까지 이 용어는 인공지능 복합성 이론 제어계 정보이론 시뮬레이션 시스템 공함을 통칭하기도 한다. 1956년 철학자 루이 쿠피냘(Louis Couffignal)에따르면 사이버네틱스는 '행위의 유효성을 보증하는 기예'로 정의된다.

[3] <사이버네틱스:전자관계망> 백남준, 사이버네틱스를 순수관계망(NETWORK OF PURE RELATIONS)으로 보다. 다시 말해 '제어-통신 및 피드백'으로 본다. 백남준은 이것을 선불교와 카르마와 연결 그만큼 동서사상과 과거 현재를 연결시키고자 한다. 모든 예술을 수렴하려면 사이버네틱스 기술이 필요하다. 불교의 제3의 길(환생)이기도 하다. 인류문명에서 우리의 상식과 다르게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사이버네틱스는 과학기술 인간화 예술화 연결화의 한 방편이다. 끊임없는 (상호의존적) '인과의 그물'이다. 사이버네틱스의 기술보다 예술 즉 삶이 더 중요하다. 사이버는 무엇보다 열린 회로.<예 로봇 K-456>

로봇 K-456 전자장치 철 알루미늄 고무 70*55*18cm 1964. 슈아 아베와 공동작

[1] [기계의 인간화&예술화]-기계와 소통하며 친하게 지내기,'로봇 K-456' 전자장치 철 알루미늄 고무 70*55*18cm 1964. 슈아 아베와 공동작, 백남준은 기계와 인간이 친하게 지내는 시대를 예견했다. 이제 인간은 기계와 같이 살아갈 운명이다. 그는 기계를 만드는데 기계적으로 만들지 않고 인격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2] 그는 또 기계의 예술화도 꿈꾸었다. 기계와 소통하고 대화하고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그리면서 로봇작품이 많이 만들었다. 기계에 신명나는 기와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기계가 예술이 되었다. 동양예술의 핵심인 '신령기화(神靈氣化)'가 여기에 적용.
[3] <사이버그[사이버버그사이버네틱스&선] 이러 기술의 대표작이 바로 K-456 역사에서 과거가 필요하듯 이 기술에서 피드백이 필요하다. 선순화 메커니즘 TV부처는 피드백이라는 사이버네틱스 개념이 내장되어있다. 우연성 비결정적 비선형성을 갖추고 있다. 
[3]백남준 전시의 단골손님으로 1964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6월 23일 휘트니미술관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선고를 받은 휴먼로봇 K-456 
[4] 백남준은 비디오가 시간의 매개변수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직선성을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있고 뒤바꾸거나 뒤집을 수 있으면 변형하고 변조할 수 있다고 봤다. [5] 1964년 미국으로 간 백남준은 인간을 위한 기술과 과학을 모색한 미국의 수학자 '위버(N. Wieber 1894-1964)'에 빠진다. 

[1] 백남준은 6·25 중 일본으로 가 현대음악을 공부했고, 1956년부턴 독일에서 현대철학을 연구했다. 거기서 '존 케이지'를 만나 동양사상을 새롭게 인식한다. 그에게 보낸 편지에선 TV가 미래매체가 될 거라 말한다. 1964년 미국으로 간 백남준은 인간을 위한 기술과 과학을 모색한 미국의 수학자 '위버(N. Wieber 1894-1964)'에 빠진다.

[2] 백남준은 이렇게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라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래서 백남준이 '현대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3] 로봇아트에서 인공생명아트(생명재창조)로 발전해야 한다. 예술은 더 이상 마술적, 종교적,상징적, 정치적이지 않다. -자크 엘루엘. 발명가로서의 예술가의 시대가 도래. 우리예술가들은 사회가 닌텐도보다 더 좋고 심오한 것을 발명하도록 도와줘야 -남준.
[4]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매스메틱스(mathematics)의 전자화? 사이버네틱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생물의 자기 제어(自己制御)의 원리를 기계 장치에 적용하여 통신·제어·정보 처리 등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두한 것으로 미국의 수학자 위너(N. Wiener)에 의하여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공두뇌의 실현과 오토메이션의 개량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두뇌(인공지능)이라고 요즘 그런 시대가 온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사이버네틱스라는 말보다는 사이버 세상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천장벽화를 사이버네틱스 아트로 변화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unonthetree&logNo=22069852970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여기서부터 2단계 더 쉽게 설명하기>>

 

백남준 일화와 되는대로의 어록

白南凖의 生涯와 藝術 백남준은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공존한다.”라고 말한다. “프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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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사이버] <17> '인공지능-전자화-디지털'시대

백남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 아니고 . 즉 사이버네틱스라는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고 사이버네틱스라는 것이 예술이 되어 삶을 바꾸는 것이다. 

<사진> 전자공학(물리학)을 프로처럼 구가하는 공학도로서의 백남준: 전자공학을 독학하다 학창 시절 물리학을 좋아한 백남준:백남준이 이런 과학이론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부인 '시게코'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학창시절 물리학자가 되고플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기계 다루는 데도 능했다. 'K-456'도 만들었고, 전시 땐 TV내부회로도 직접 조작했고, '아베'와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설계할 만큼 과학적 지식도 풍부.
[1] [사이버네틱스 예술과 백색소음(불확정성의 예술)] "백색소음 혹은 임의의 구조는 최대치의 정보를 담고 있다. 아래 1959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유화는 흥미롭게도 백색소음의 다양한 색채의 눈송이를 닮았다." -백남준

1959년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유화 다양한 색 속 눈송이 닮았다고 백남준 평하다

[2] 백남준에게 큰 영감을 준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와 미래사회를 미리 내다본 탁월한 미디어 학자 맥루언 그러나 백남준이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니버를 만나지 못했다면(나누기 하지 못했다면) 1965년 뉴욕 전시 전자아트 전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래> 공식은 1965년 뉴욕 전자아트 전시 도록에 나오는 것이다. 백남준은 앎보다 삶을 중시했다. 사이버네틱스한 예술보다 사이버네틱스한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3] <테크놀로지의 인간화 모색모색> 서양인들 비디오를 예술화 꿈도 못 꿨죠?" 이를 잘 설명한 게 이어령 선생의 탁월한 비유인데요, "비디오를 발명한 건 미국이고 이를 소형화(상업화)한 건 일본이고 이걸 예술화시킨 것이 백남준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죠.
[4] 테크놀로지의 인간화를 통해 기술에 대해 새롭게 접근한 건데 사람이 기술의 노예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 그래서 1965년에 '로봇 K-456'을 만들고 사람이 배설을 하듯 길거리를 걷다가 리모컨을 작동하면 콩이 똥처럼 떨어지고 또 오페라도 부르고 정말 환상적인 작품이었죠. 이게 백남준 최초의 로봇이에요. 나중에 구형 카메라, TV, 전축을 가지고 만든 TV로봇조각의 원형이죠." -김홍희

<<1965년, 백남준 본격적 사이버네틱스 전자아트 실험>>

[1] 1965년 샬럿 무어먼과 '로봇 K-456'이 백남준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다. 두 사람 모두 백남준의  악곡을 (다소 다른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24시간 해프닝'에 참여하다.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은 그녀의 유명한 투명 플라스틱 드레스를 입고 첼로를 연주하며 때때로 물통에 잠수한 다음 계속해서 물을 흘리며 악기를 연주하거나 백남준 등을 올라타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2] 1965년 10월 4일 '카페오고고'에서 비디오 첫선

[3]  새로 구입한 비디오테이트 녹음기를 찍은 자신의 초기 비디오화면에 나오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백남준(1965년 10월 뉴욕) 백남준아트센터소장앞에서 언급한 대로백남준은 1965년 '소니'가 미국에 처음 수출한 비디오카메라를 예약구입을 해놓고 연락이 오자 케네디공항에까지 직접 나가 그걸 찾아온다.
[4]맨해튼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침 교황 '바오로 6세'가 미국 방문 중이었고 그걸 카메라에 담아 65년 10월 4일 '카페오고고'에 상영해 비디오가 세계미술사에서 첫 등장한다. 비디오는 일방적 TV와 다르게 쌍방적이라는 점이 그의 예술에 날개를 달아준다. 대중을 조작하는 우상 같은 TV를 순식간에 전복시킬 대안이 나온 셈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사회변혁의 도구로 비디오를 마치 신이 내린 선물처럼 생각했다.

[5] 그러면서 백남준은 1965년 '카페오고고' 시사회에서 록펠러재단 기금으로 전자TV와 녹음기를 결합하는 5년간의 꿈을 이뤘다고 감격하며 이제 비디오의 작은 화면이 유화대신 음극관이 되는 비디오아트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아래와 같이 알렸다."전자음악10년이 지나면 전자TV시대가 도래한다. […] 콜라주기법이 유화를 대체한 것처럼 음극관이 캔버스를 대체할 것이고, 기존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붓, 바이올린, 폐기물 같은 것 대신 축전지·전열선 혹은 반도체로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

[1] 르네상스 인간으로서 백남준: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라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래서 백남준이 '현대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2] 우상파괴자로의 백남준 우상숭배는 인류의 영원한 질병이다
[3] 인류학자로서의 백남준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4] 인류학자로서 백남준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5] 백남준이 이런 과학이론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그와 동거 동락한 부인 '시게코'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학창 시절 물리학자가 되고플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기계 다루는 데도 능했다. 'K-456'도 만들었고, 전시 땐 TV내부회로도 직접 조작했고, '아베'와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설계할 만큼 과학적 지식도 풍부했다.

[6] 이 공식은 도통 알 수가 없다. '존 케이지'도 나오지만, 중요한 세 단어 '사이버네틱스'와 이를 창안한 '위버' 그리고 '맥루한'이 언급된다. '지구촌'이란 말을 처음 쓰고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을 남긴 세계적 미디어학자 '맥루한'은 유명하다.

[7] 사이버네틱스의 3가지 핵심요소가 '컨트롤·커뮤니케이션·피드백(쌍방소통)'인데 이런 용어는 인터넷시대의 쌍방적 소통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를 농담처럼 생사의 순환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인과 그물망)[관계망]'에 비유...

[1] 60년대 사이버네틱스와 철학, 예술 <사진> '사이버화 된 세대(Cybernated Generation)'라는 제목이 붙은 1965년 4월 2일 타임지 표지. 그 부제가 '컴퓨터사회(The Computer in Society)'다 당시 '사이버네틱스'가 대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60년대 '사이버네틱스(키잡이)' 개념은 '위버' 혼자 만든 게 아니라 광범위하다. 여기엔 수학자, 공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생태학자, 사회학자, 신경생물학자 등이 망라된다. 과학에 대한 민주적 사고라고 할까. 과학을 '자연정복론'이나 '기술결정론'에서 보지 않고 인간과 기계와 자연을 공생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로 놓았다.

[3]사이버네틱스와 예술을 처음으로 연결하려 한 이 분야의 이론가이자 작가인 '로이 애스코트(Roy Ascott 1934-)'는 백남준이 1966년에 선언한 '사이버화된 예술(Cybernated Art)'을 뉴미디어아트의 시작이라고 봤다.이런 개념은 정보화시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촉진제가 되어 정치, 사회, 철학, 예술에 두루 영향을 미친다. 

[4] 백남준의 '사이버네틱스(사이버화된) 예술'에 관한 언급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건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가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그리드를 첨가해 인류역사상 최초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라는 말이다. 노장사상을 통해 우리는 "약한 게 강한 걸 이긴다"는 역설적 진실은 들어왔지만, 과학적 실험을 통해 "약한 게 강한 걸 이긴다"는 사실이 증명됐다니 놀랍다. 과학제일주의와 기술만능주의가 주도되는 세상에서 백남준이 기존의 과학상식을 뒤집는 제3의 관점에 주목했다는 건 그의 성향으로 볼 때 매우 자연스럽다.

'세기말 남자' 1991

[1] '세기말 남자(Fin de Siecle Man)' 85 ×62 ×31cm 1991. '자석TV'를 업그레이드 한 것으로 TV화면을 작가가 자석으로 조작할 수 있다. 백남준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정보독점의 상징이고 전자매체의 총아인 TV의 확고한 기능을 순식간에 마비시키면서 관객이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는 길을 텄다. 무모한 기술적 오작동으로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 먹통 같은 TV를 아트로 바꿨다.
[2] 백남준은 비디오가 나오기 전부터도 TV를 이렇게 창조적 매체로 본 것이다. 백남준 연구가 이용우 씨는 백남준 예술에 대한 평가에서 "관객 참여방식에 의한 그의 미적 실험은 백남준 미학의 하이라이트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을 독재 또는 독백예술로 봤고,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이 관객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결국 예술의 계급화를 초래했다"라고 논평했다.

[3]백남준의 사이버네틱스 아트는 결국 1992년 자신을 동서 문명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작가 중 하나라고 평한 적이 있는 '오토 한(O. Hahn)'과 인터뷰에서 "비디오는 우리가 시간을 변형시킬 수 있는 유일한 매체로 현재를 과거로 과거를 현재로 되돌릴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프레드릭 제임스(F. James)도 그에 걸맞게 "그의 비디오아트는 시공간의 궁극적 경계선을 탐색하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논평했다.

[1] 인간·동물·기계의 혼종, 사이보그 이불 I '사이보그_W5' 199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식 사진 그즈음인 1967년에 페미니스트 '도나 해러웨이(D. Haraway 1944-)'는 본능이 없는 동물을 상상하기 어렵듯 기술이 없는 인간을 상상하기 어렵다며 '암컷·수컷'의 법칙을 체계화한 근대 과학주의를 해체하고 유인원과 인간, 인간과 기계, 남녀경계를 없애고 성차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변종과 괴물 같은 '사이보그'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사이보그의 지능과 잠재력이 인간 이상이라며 <사이보그 선언(1985)>에서 "여신이 되기보단 사이보그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고 또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우리는 저항과 재결합을 달성하기 위해 이보다 더 강력한 신화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2]백남준도 인간과 동물과 기계가 혼합되는 사이버네틱스 잡종인 이런 사이보그 출현에 동조했고, '무어먼'을 '뮤즈여신'보단 '전사여신'으로 변신시켜 백남준식 사이보그를 선보였다. 한편 한국에선 페미니스트 작가 이불이 이 '연작'을 발표해왔다.

<<색에서 빛으로 전기에서 전자로 전환>>--->>
[1] '기술의 인간화'로 사이버세계 추구 <사진>

백남준 I '테크노 보이(Techno Boy) II' 라디오, TV, 카메라, 조합(Antique Radios, Antique TVs, Antique Cameras) 2000. 미래전자소년을 형상화하다

[2] <기술의 노예화가 아니라 인간화, 과학의 폭력화가 아닌 예술화를 추구> 백남준은 그는 문명사회를 야생적 사유로도 다가갔지만, 첨단과학이론도 휴머니즘적 측면으로 접근했다. 기술에 대항하는 기술로서, 기술을 증오하기 위한 기술로서, 기계와 야합하지 않는 기술로서의 예술을 이야기한다. 그는 기술절대주의로 향하는 사회에서 부각되는 이런 시대의 우상을 추방하는 '셔먼 아티스트' 몫도 감당한다.이런 사고는 인간과 기계, 예술과 기술의 이분법을 깨고 기계를 인간으로 보고, 과학을 철학으로 보는 관점에서 온 것이다. 기술의 노예화가 아니라 인간화, 과학의 폭력화가 아닌 예술화를 추구한 셈이다. 그래서 색에서 빛으로 전기에서 전자로 전환시켜 기술의 인간화를 위한 예술적 실천을 가감하게 시도한다.

[3] <사이버네틱스는 결국 관계미학> '인터미디어'로 경계 넘기 더 나아가 인터사이언스 <사진>백남준 I 'TV부처' 부처조각과 2대의 TV 35×20×65cm 1992. UM 갤러리소장 서양하이테크와 동양사상을 만나게 하는 관계미학이다. 'TV부처' 버전은 다양하다. 백남준은 프랑스수학자 '앙리 푸앵카레(H. Poincaré 1854-1912)'가 "지난 세기의 전환점에서, 소위 말하는 물적 진보와 신문명을 이뤘지만 난 여기서 새로운 무엇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 것뿐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동과 서, 과거와 미래, 기계와 예술의 '인터미디어'를 추진한다.

[4] 이 인터미디어'는 백남준의 친구 '딕 히긴스(Dick Higgins)'가 1965년 창안한 것으로 '기존예술과 새로운 미디어 예컨대 시와 그림, 미술과 연극 같은 장르와 경계를 넘어 관계미학으로 예술(주술)과 기술을 융합시키는 총체예술(비빔밥)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이런 시도는 사실 첫 전시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기존음악에 만족하지 않고 피아노와 피아노 사이의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없을까 고민했다. 작곡된 걸 연주하는 게 아니라 연주하다 작곡이 되는 '랜덤액세스' 방식의 '무조음악'을 추구했다. 창작에서 그 과정과 거기서 유발되는 우연성도 중요함을 암시한다

인터미디어 지형도, 광범위하고 유연하다

[1] 딕 히긴스 인터미디어 차트 인터 미디어는 융합이라고 보다는 클로스 오버라는 어휘가 더 어울리는 표현 같다. Intermedia 는 원래 John Brockman  만든 용어로 1960 년대 중반 플럭서스 아티스트딕 히긴스 Dick Higgins  가 1960 년대 장르 간에 발생하는 다양한 학제 간 예술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

백남준 융합예술의 창시자, 김구림 총체미술의 실천가, 그리고 딕 히긴스(컴퓨터 과학자 외 미국의 예술가, 작곡가, 미술 이론가, 시인, 출판사, 판화 제작자, Fluxus 국제 예술 운동의 공동 창립자), 인터미디아 아트

[2]멀티미디어와 인터미디어의차이?

바그너의 총체예술에서 보듯 다양한 미디어가 존재하다. 발레 후 합창, 합창 후 연주 등등 어떤 형식도 다른 형식과 분리 되지 않는다.  액션 뮤직처럼 행위와 음악이 분리되지 않는다. 백남준 포퍼먼스를 보면 모든 행동이 서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쇼팽 연주하다가 피아노 넘어드리고 객석으로 내려가 케이지의 넥타이 자르고 투처의 머리를 감긴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리 집에 가서 전화를 건다. 일종의 관객을 외면한 연극과 같은 것이다. 무관중 연극과 유사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강좌가 바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흥적  변조의 가능성도 가능하다.

[3] 딕 히긴스, 인터미디어 선언문, '인터페이스' VS '인터미디어' 이런 대조항을 설명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호의존적 주체성(Interdependent subjectivity)'이 아닌가 싶다. 뉴미디어 시대가 활짝 열리다.

<<--> 반란자 교란자--> 파괴자 반항자>> 본문
[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 컬렉션] 매체와 신체가 환경이 될 때

 

[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컬렉션] 매체와 신체가 환경이 될 때 |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컬렉션] 매체와 신체가 환경이 될 때 2. 매체와 신체가 환경이 될 때 백남준은 1963년 3월 드디어 자신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을 부퍼탈의 갤러리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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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코뮌: 예술가들이여 방송국을 점령하라!

[1] 2006년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에서 백남준을 '성공한 반란자'라고 평가했다. 반란자들은 대부분 실패하는데 백남준은 끝까지 그 험한 길을 걸어갔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반란자-교란자-파괴자-전복자'의 기질이 매우 강한 예술가였다. 그런 기질이 어디서 왔나. 기마 민족 노마드인 몽골코드 때문인가. 그러나 칭기즈칸처럼 무력을 통해서 세계를 호령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통해서 세계를 호령하는 예술가였다.

[2] 2013년 백남준 아트센터 <부드러운 교란(Tender Disturbance) -백남준을 말한다> 전, 큐레이팅에서 출중한 역량을 보였다. 기획은 이유진 큐레이터. 이 전시를 위해서 많은 공부를 한 흔적이 보인다. 거의 박사학위 논문 수준의 글도 남겼다. 백남준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던 60년대 구미에서는 2차대전 이후 25년이 지나면서 신구세대 갈등이 극심했고 68혁명을 사회변화를 폭발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참여적 면을 강조했고, 청년 백남준이 꿈꾼 세상을 매우 이상적이었다. 그런 세상 구현을 위한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큰일보다는 작은 일 숨 막히는 세상 숨구멍을 내고 사회의 촘촘한 벽을 허물고 둘러 쌓인 사회에 작은 균열을 찾아 헤매는 존재였다. 부드러운 교란은 이런 점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백남준의 이런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가 언급한 예술의 불온한 역할은 기술과 과학이 지배하는 이성적 세계관을 깨는 일이라는 생각과 닮은 데가 많다

[3] [백남준의 한국출신 음악 스승들] 신재덕(1917~1987년 피아니스트. 일본과 미국에서도 공부, 이대 음대교수 및 학장직)-김순남(1917~1986년 동경제국음악학교 출신)-이건우(1919~1998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출신) 백남준 한국에서 최고의 음악가 연주자 작곡가 밑에서 공부를 하다. 백남준은 이런 수준 높은 음악공부를 통해 보다 진보적인 음악개념을 형성되고 결국 쇤베르크와 같은 전복자 미술가들과 만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4] 1) 철학의 교란자 맑스와 음악 교란자 쇤베르크 심취 2) 무음악과 액션 뮤직 그리고 비디오 아트로 서구미술의 교란 3) 성의 외설과 교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4) 사이버테닉스 교란 5) <전쟁방지를 위한 교란>감옥에서 정글로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4515

 

예술적 교란으로 사회의 금기를 깨다

[리뷰]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을 말하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6월 30일까지

www.ohmynews.com

[4] <상설전> '부드러운 교란'=백남준의 유쾌하지만 날카로운 사회적 의식을 담은 작품들과 그와 함께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과 풍부한 자료들을 선보인다. 백남준이 활동하던 1960~19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구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며 기존의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남준을 비롯한 아티스트들은 다수의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매체인 비디오를 사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비디오는 부조리한 세상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도구였다. 

'과달카날 레퀴엠'(1977) 주제가 반전사상이다

[5] 백남준은 '과달카날 레퀴엠'(1977)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격전지였던 과달카날섬에서 샬롯 무어먼과 함께 평화를 위한 곡을 연주하고 퍼포먼스를 했다. 퍼포먼스 영상은 전쟁 당시의 미디어 이미지들과 빠른 속도로 교차되도록 편집되었다.이 전시에서 백남준의‘과달카날 레퀴엠’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뉴욕 더 키친에서 '비디오 페스티벌: 라이브 비디오'의 일환으로 샬롯 무어먼과 초연한 'TV 침대' 도 만나 볼 수 있다. 68-77년 반전시기다.

[6] 이유진 큐레이터는 "백남준은 전쟁에 관해 직접적이고 신랄하게 비판하지는 않지만, 기억과 역사를 되새기는 행위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를 한다"면서"백남준의 이런 전략은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가들은 과격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을 통해 은연중에 사회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만들어내며, 영상뿐만 아니라 설치, 회화, 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사회에 대한 개입을 시도한다"고 말했다.

[7] 소리 소문 없이 교란 세계를 대혼란에 빠지게 한다 7) 최고의 교란은 국가 간 차이와 차별을 해소하면서 선진국 후진국이라는 경계를 허물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이 가장 앞서는 나라가 되었다. 백남준의 교란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적 고등 사기 때문이다. [교란] "내가 서양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유력한 이론가들이 대부분 좌파지식인이라는 사실이다. -백남준" 백남준은 좌우의 개념 구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서구가 만들어놓은 그런 위험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동양은 좌가 우고, 우가 좌다. 양이 음이고 음이 양이다. 서구의 이원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다. 인간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인간은 선하면서 악하고 악하면서 선하다. 새는 좌우 날개가 있어야 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가지만 좌우의 덫에 절대 걸리지 않는다. 물론 백남준은 언제나 약자 편이다. 백남준은 좌우를 다 가지고 노는 교란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