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뉴욕행] <백해영 갤러리 백남준과 친구들 기획, 백남준 강좌 19번째> '2015년, 뉴욕에서 백남준 7번 만나다' 입춘대길 새해 모든 이에게 대길(큰 행운을 열매 맺는 길)이 열리길 기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oG8rnXy38k&t=1962s
단색화 계열 작가 중 김창열 화백이 백남준과 가장 가까운 지우였다. 10주년에 백남준을 기리며 김창열 화백이 퍼포먼스를 하다. 이제는 김창열 화백도 이 세상을 떠났다. 갤러리 현대 입구에서
[세계 경제 혁신 지수] 한국 1위, 싱가포르 2위, 스위스 3위, 독일 4위 (10곳 유명한 글로벌 경제 단체의 통계 참고) 핀란드 8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은 여기에 끼지 못한다. -블룸버그 통신. 백남준과 김대중 덕분에 이 정도라도 되었다.<백남준,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년 작품. 20년 지난 지금 아래 성적표는 나쁘지 않다> 아직도 한반도 호랑이는 살아있다, 그 힘을 되찾고 있다 - 기마민족 스키타이왕 단군, 주몽, 원효, 세종대왕, 정약용, 백남준으로 이어진다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있다' 2020. 백해영갤러리에서 9월 전시
백남준은 호랑이처럼 오늘도 살아있다. 그는 우리나라를 문화국으로 세우고 기운생동과 신바람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우리시대의 호랑이다. 한마디로 세상에 기를 넣어주는 사람(animator)이다. 그는 자유분방한 기질로 한국적 파격미를 유럽인의 우상인 피아노를 깨부수는 등의 행위로 독일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백남준은 호랑이의 강하지만 부드러울 수 있는 기질을 빼닮았다.
또한 백남준은 단군셔먼의 신화를 전승한 예술가다. 남녀가 통정으로 서로에게 많은 기와 에너지를 넣어주듯이 백남준은 예술적 상상을 통해 우리에게 기를 넣어준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신령, 남준신당이 되다. 그러나 호랑이 같은 우리를 4대강국은 자꾸 토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아직도 분단국가다. 기차 타고 베를린 가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한반도는 아직도 세계의 갈등과 모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원래 샤먼을 가장 척박한 땅에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기위해서 새로운 삶의 대안을 주는 존재이다. 백남준이 그런 예술 샤먼이다. 단군과 주몽이 그렇다. 원효나 세종대왕, 이순신이나 정약용처럼
그가 한국의 문화콘텐츠에서 기사상과 샤머니즘과 선불교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제일 먼저 터득했다. 부처와 TV를 결정적으로 만나게 한 것은 참으로 쾌거다. 그는 결국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물질이 만나 비디오아트를 낳았다.
한국의 풍부한 종교적 다양성을 맛있게 비벼 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우리의 무의식적 신기와 샤먼의 전승 그리고 선불교적 상상력이 합쳐진다. 그는 부처 같은 동아시아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의 예술인류학, 고고학, 미디어미학 등 조명할 거리가 너무나 많다. 이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
[질문 1] 백남준은 왜 그렇게 과격한가? <백남준이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정도로 과격한 퍼포먼스를 서구에서 선보인 동기는 바로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식민지 시대 때 경험한 지옥 같은 한반도 상황에 대한 처절한 저항적 몸부림이자 예술적 절규라고 볼 수 있다>
[질문 2] 한류는 어디서 오나? [한류의 현대적 원류인 백남준] 가무(춤과 노래와 PERFORMANCE) 철학, 현묘(신비하고 깊고 묘한, 마치 소녀가 지닌 묘하고 신비함과 같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의 도, 풍유의 도, 유불선의 융합, 한류의 기저(base):신명의 기가 넘치는 샤머니즘: 멋과 맛(풍류) 서양에서는 니체가 유일하게 가무를 중시하다. 그는 철학의 예술화를 시도하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으로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백남준 오감이 예민하게 작동하는 가무가 함께 이뤄지는 축제주의자 풍류철학자다.
[5] 25년 만에 공개한 백남준 작품 속 나오는 루트 3.5의 비밀이 풀리는 것 같다. 유치원 동창인 백남준과 이경희 여사는 1984년 35년 만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그녀의 초대로 2.5일 플라자에서 만나다. 나에게 3권을 책을 주다. 그리고 백남준 전문연구J라는 명예를 주다.
[1] 백남준이 1963년-2005년까지 아베에게 일본어로 쓴 97편의 편지를 보냈다 그 중 하나인데 이경희 여사가 최근에 이 난해한 일본어를 번역했다. 백남준의 서체까지 꿰뚫어보는 이경희 여사가 아니면 번역할 수 없었다. 일본어에 정통한 교수에게 의뢰했지만 백남준의 일본어가 워낙 랜덤해서...번역을 할 수 없다고 해 이경희 여사가 하게 된 것이다.백남준 유치원 동창 이경희여사 초대로 만나다 소중하고 이경희 저 희귀한 백남준 관련서적 선물로 받다 아베로 부터 받은 일본어 아카이브
[질문 5] 문화인류학자 박정진 교수가 말하는 한국인의 새로운 철학은? 음악철학이다. 한국인은 철학을 통해서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 철학을 한다. 아래 노래가 그렇다 70년대 한국을 아래와 같은 노래로 철학하다. 그런 사유가 가사에 송두리째 담고 있다. 1950년생 서울음대 작곡가 출신인 이 노래의 작곡가 겸 가수인 김광희, 나는 그녀를 한국의 최고의 음악 철학자라고 본다. / 70년대 온 국민이 즐겨 불렀던 포크송 '세노야'를 작곡하기도 했다. 양희은의 노래로 대중에게 폭넓게 알려진 이 노래가 만들어진 것은 1970년 가을이었다. www.youtube.com/watch?v=A_fPgdZph9M
[질문 6] 백남준은 왜 1986년 이런 말을 했나?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만큼이 사기가 되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 - 백남준의 인터뷰 중에서 월간 <춤>, 1986년 11월. 요즘 허위 뉴스의 홍수시대 [진위를 알 수 없는 인간의 본질 어떻게 풀어낼 건가?] 진위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인 현대 문명의 최고의 과제다.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크르 문화이론이 호소력이 있는 이유다.
http://www.youtube.com/watch?v=7JI-EIDIz7g
[질문 7] 한국은 무엇으로 철학을 하는가? <소리의 철학, 풍류의 철학> BTS 한글, 한국 자모, 그 소리미학을 세계화하다. 잃어버린 풍류도와 가무철학을 글로벌시켜 세계적으로 복원시켰다? 비틀즈가 70년대 음악이 지구촌에서 최고의 철학, 50년이 지난 지금 '비티에스'는 21세기 지구촌에서 최고의 철학이 되었다.
<김광희는 소리 철학자다.>
[8] [백남준의 돈보다 축제?] 일상에서 축제를 일으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이다. 백남준은 바로 이런 철학을 근거로 예술을 한 사람이다. 축제란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는 진정한 종교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축제와 여성적 살림 철학은 완벽하게 하나다. 축제는 밥의 나눔과 말의 해방과 살의 소통에서 나온다. 사르트르가 한 말,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살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김광희 가수
[다시 묻는다 백남준은 왜 그렇게 과격했나?]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이 붙은 정도로 과격한 퍼포먼스를 서구에서 선보인 백남준의 무의식적인 동기는 바로 식민지 시대 때 경험한 한반도 지옥 같은 상황에 대한 내적 울분을 토해내는 예술적 절규였다>>
[질문 다시 백남준 과격성의 원인은?] <질문> 교란 미학을 대변하는 예술가 백남준 그의 과격한 퍼포먼스 그의 반란과 저항과 전복의 천재성을 통해 그의 한 면모를 보였다. 그 원인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백남준은 왜 그 시대에 서구에서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렇게 과격한 반항자가 되었나>
<대답> 국내 전문가들은 그의 예술세계 근간을 일제 치하에서 보낸 유년시절에서 찾았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 씨는 "백남준의 과격한 퍼포먼스는 식민지 시대의 선택 앞에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절규와 같은 것으로, 한반도 상황이 안겨준 상처가 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힘이었다. 백남준이 당시 폭압적 현실을 방관자적 입장에서 바라보려 했으나 시대의 폭력과 어둠에서 너무가 커 거기서 벗어나는데 한계 혹은 역부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결핍을 백남준은 예술적 행위와 저항적 사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열정이 평생 지속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대답> 백남준 청년기를 연구한 시각문화연구자인 김수기 도서출판 '현실문화연구' 대표도 "그는 한국의 근현대사 분기점에서 성장기를 보냈는데 그의 집안은 국내의 일반적 상황과는 달리 일제의 침략행위에 적극 가담해 제일가는 사업가로 발돋움한 아버지로 인해 가장 잘 사는 축에 속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야기된 내적 갈등이 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백남준에 대한 인물평>일본 미술사가 '야마무라'는 "백남준은 본래 작곡을 공부한 사람답게 시공간의 작동 방식에 극도록 섬세한 감각을 지녔다. 그의 TV 작업은 바로 '물리적' 음악을 통해 ***시공간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는 예술가였다"라고 지적.
[2]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연출 기획한 이동식 선생(서울대 영문화 출신) 블로그> [코로나 시대와 백남준]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보면서 나는 비디오 예술가로 알려진 백남준 선생이 생각났다. 지금부터 47년 전이니까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할 1974년에 백남준은 록펠러 문화재단에서 위촉받은 논문을 제출해 상금 1만 2천 달러를 받았다. 그 논문에서 백남준은 21세기를 위해 ‘전자 초고속도로’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남준 인터넷 예언 선언문 다시 번역하다.
“새로운 전자 초고속도로의 건설은 더 거대한 사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뉴욕과 로스앤젤리스를 강력한 송출 영역으로 운영되는 전자 텔레콤 네트워크로, 그리고 대륙간 통신위성, 도파관(導波管), 동축케이블망, 레이저 광통신망 등으로 연결하면, 경비는 사람을 달에 내려놓는 것만큼 들겠지만 그것으로 생겨나는 부산물에 의한 혜택은 훨씬 클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 사이를 컬러 화상 전화로 연결하는 회의도 상업적으로 전망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애초의 설치를 위한 구리 값은 들겠지만) 원거리 화상회의는 항공기 여행과 도시 거리 사이에 혼란스럽게 왕복하는 공항버스를 아주 영원히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다. 효율적인 통신은 어디에서나 사회적인 낭비와 모든 종류의 사고들을 감소시킬 것이다. 그 소득은 환경상으로나 에너지 분야의 현명함으로 보나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텔레컴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유일한 윤활제이자 보충제라는 역할을 다하고 새롭고 놀라운 인간들의 노력을 만들어내는 발판이 될 것이다.”
[2] 2000년 구겐하임전 자신의 작품 제작과정을 지켜보는 백남준 그의 표정은 많은 것을 말한다. 후회는 없다는 표정이고 흐뭇한 표정이기는 하지만 당시 건강상태가 안 좋아 굉장히 마음이 답답했을 것 같다. 신중한 낙관론자였던 그에게 못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으리라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가슴이 좀 아프다.
[3] 이영철 관장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범위 안에 있다며 그러기에 백남준은 '초국가적 장기 프로젝트'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을 쓰는 국립미술관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1] 백남준도 앤디 워홀 공장처럼 칼 솔웨이 갤러리에 작업 공장(1986-1991)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모습. 이때 후유증인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다. 좋은 작품 많이 만들다. 1993년 베니스 작품의 진원
[1] <6개 국어를 하고 세계 정세에 밝은 백남준 미국과 한국 정보부에 대한 경계가 심했다. 백남준은 사실 미국사회에서 위험한 인물로 볼 수도 있었다> 내(김홍희선생)가 백남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80년 그분의 10주년 해프닝 공연 때였다고 기억된다. 바이올린과 축음기를 깨부수는 역사적 작품을 재현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바닥에 널린 파편들을 주워 사인을 받으려 했으나, “공짜로 해 줄 테니 스튜디오로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조각마다 ‘백’ ‘남’ ‘준’이라고 일일이 사인해 주시고서는 “보석함에 보관하라”고 하셨다. 나는 남편(천호선)이 뉴욕한국문화원 문정관이어서 그분을 함께 만나곤 했으나, 당시 KCIA에 대한 선입견으로 한국인 인상이 좋지 않아 처음 한동안은 가까이 지내기가 어려웠다. -김홍희 <이 글에서 보면 백남준 한국정보부와 미국정보부 감시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블룸버그 기사> 백남준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인 백남준 작품 왜 미술시장에서 그 가치를 놓치나? : 2015년부터 백남준 대부분 작품 세계적 명성이 높은 가고시언 갤러리 전속작가가 되었다. 백남준 작품은 미국의 저명한 작가 Robert Rauschenberg 가격의 10분의 1 정도 가격에 팔린다. 백남준 작품이 예술사적 중요성에도 저평가되는 것은 대부분 수집가가 그에 대한 예술사적 인식 부족, 공격적인 갤러리 지원 부재,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하고 눈 앞에 이익만 생각해 작품의 장기적 전망에 대한 우려로 큰 것으로 인한 것 같다
[평] 백남준 작품은 피카소처럼 정말 희귀한 보물 같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리랑 같이 전 세계의 인류를 위하 문화유산 같은 작품이다. 백남준 소장자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의 자부심은 1000배는 뛰어오른다. 그의 개념 작품 속에는 무궁무진한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다. 성실과 인내보다는 21세기는 창의적인 아이디어 맨이 승자가 되는 시대다. 정착민의 성실과 인내가 아니라 유목민의 성취와 수행성이 빛을 보는 시대다. 비록 시장에서 백남준 가격이 높지 않다고 해도 그의 작품은 인류 문화유산이라는 면에서 가장 가격이 높은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 같은 개념이 그런 것이다. 그런 개념 작품이 가격이 높을 수는 없다. 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7-05-19/num-june-paik-is-the-art-world-bargain-everyone-s-missing-out-on
<부처의 가출과 백남준의 가출을 같은 것이다 돈으로부터의 탈출, 굶어죽더라도 예술을 해야겠다>
[질문 1] 백남준의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정체성은?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 백남준, 비디오아티스트라기보단 천재적 예술가라기 보다는 그는 뭣보다 축제주의자로서 '흥행사(entertainer)'였다는 것이 그의 본질이다. 백남준이 가는 곳에 늘 놀라운 축제와 예상 밖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천재적 기획자, 큐레이터였다.
[질문 1] 백남준 예술의 3가지 특징은? 1) 작품을 할 때 선사시대를 먼저 공부했다는 점, 백남준을 이걸 노스탤지어라는 말을 비유했다. 그는 한국의 원류를 유럽의 핀란드와 헝가리, 중남미의 칠레, 미국 원주민 인디언, 중앙아시아 스키타이, 훈족, 시베리아 타타르 족, 몽골 기마민족 등과 연결시킨다. 2)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예술을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발명하다. 지금 인터넷과 SNS는 다 백남준의 덕분인 셈이다. 3) 백남준은 가장 이상적 세계 유토피아적 세계를 꿈꾸다 그것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말이 바로 신석기시대다. 나의 TV아트는 신선기시대에 너무 닮았다. 신석기시대는 인류사에서 모든 이상주의와 유토피아(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원시 코뮤니즘 공동체를 포함해서)를 다 구현한 시대였다.
[1] 누구는 왜 백남준 관심? 어이가 없다. 인터넷을 만든 예술가가 백남준, 당신 주머니에 백남준이 들어있다. 그런 작가가 누구인지 공부하는 것은 당연지사. 우리는 모두 백남준의 은하계(Galaxy)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서구의 태양계 속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지다. 그 때문에 가장 빠르게 가장 쉽게 가장 싸게 미국 CIA보다 더 고급 정보와 지식을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미국 맥을 못 춘다.
[1] 내 마음속에서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는 끝없이 샘솟는다. 나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백남준이라는 '문화은행'에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대여받고 있다. 아무런 이자도 받지 않고 그것이 공짜이니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이라도 쓴다. 그는 일본에 가면 '일본의 백남준'이 되고 독일에 가면 '독일의 백남준'이 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의 백남준'이 된다. 프랑스도 백남준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다. 과거 파리대학에서 백남준 강좌를 20년 간 연 이유다. 그는 그렇게 온 인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그를 찾아 뉴욕에 간 이유다.
[2] <백남준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철학자였다> 백남준 아트센터 초대관장인 이영철 교수는 백남준 선생을 "진폭이 큰 예술가이자 창조적 몽상가"라고 소개한다.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도 그를 "시대의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미래를 치열하게 고민한 예언적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난도 잘 극복하는 자기 긍정이 강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또 그는 "백남준을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기벽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철학자"라고 정의한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소대가리 효과 혹은 사건으로(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대가리를 전시장 입구에 걸다 희생의 상징물) 서구의 태양계를 우주의 은하계로 바꾸다. 서양 중심의 미술사를 전복시키고 전 세계를 포함한 새로운 미술사를 쓰다. -박정진
지난 2월 6일에 본 [다빈치에서 마티스까지] 양평군립미술관 개관 9주년 기념전. '빛의 명화'전 2021년 2월 21일까지 이런 전시를 가능하게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당연히 회화의 패로다임을 바꾼 물감 페인팅에서 전자 페인팅으로 바꾼 백남준이다. 그의 아이디어로 이런 움직이는 뉴미디어 전시가 가능하게 됐다.
16세기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건설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가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백남준이 있었다. 백남준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통점은 과학과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텍스트, 이미지, 영상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우리는 4D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현대인들은 시청각뿐만 아니라 촉각, 미각, 후각을 동시에 충족시켜줄 새로운 매체를 모색 중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영상으로 오감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사람들은 ‘먹방’을 보면서 눈으로 맛을 음미하고, ‘슬라임’ 또는 ‘액체괴물’을 만지작거리는 영상에서 중독적인 촉감을 시청한다. 그리고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영상(Oddly Satisfying Video)’에서 깔끔하게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을 공감각적으로 느낀다. 영화산업에서도 IMAX와 ScreenX를 통해 시청각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4D 기술을 도입해 좌석이 움직이고 바람과 물이 흩뿌려지는 연출을 선보였다. 컨버전스 아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첨단기술을 활용해 시각에만 국한됐던 회화를 공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웅장한 음악을 삽입하고, 인터랙티브 존을 설치해 작품을 직접 만질 수 있도록 구성했다. 그리고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이 변형되는 키넥트 기술을 적용했다.
그러나 자극만을 좇는 행위가 바람직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먹방’과 ‘슬라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영상’에서 시청자는 감각에 완전히 압도돼 생각할 틈을 잃는다. 그들은 중독된 것처럼 바로 유튜브 ‘다음 동영상’을 클릭한다. 마찬가지로 산만한 시각효과와 감상을 왜곡하는 음악, 체험을 강요하는 코너 등 컨버전스 아트에서 관객은 능동적인 해석의 주체가 아니라 쏟아지는 자극에 둘러싸인 객체에 가깝다. 이런 환경에 노출된 관람객는 담담한 사유가 아닌, 더욱 자극적인 감각만을 찾을 뿐이다. -장영주
르네상스 맨의 전형들이다.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15100024
이중 정체성(과학과 예술의 마인드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의 소유자답게, 경계지대의 인물(클로스 오버 인간 경계에 넘어서는 인간)답게 백남준은 스스로에게 만능인의 자격을 부여하였다. 많은 인력과 막대한 경비를 요구하는 위성3부작이 입증하듯 그는 위대한 작가일 뿐 아니라 자신의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성사시키는 기획자이자 흥행사(entertainer)였다. 만능인이라는 점에서 그는 르네상스 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환기시킨다. 다빈치는 예술적 영감과 과학 정신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이자 권모술수와 정치에 능한 만능인으로서 르네상스의 이상적 인물로 평가되었다.
백남준 역시 고매한 예술가이자 성공을 추구하는 세속인, 사유하는 철학자이자 행동하는 정치가, 서구에 대한 누구보다 이해가 높은 지식인이자 동양적 선사로서 예술을 과학·기술·산업·유흥·정치·스포츠·대중매체의 영역으로 확장시킨 20세기의 만능예술가(Total Artist)였다. 고대와 중세의 문화적 과도기에 고대부흥과 모던인간, 이교도와 기독교의 양면가치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탄생한 천재 다빈치가 해체주의와 탈경계를 표방하는 포스트모던시대의 백남준으로 다시 태어난 것인가?
백남준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바로 현대판 다빈치(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건설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와 같은 과학적 예술가이자 예술적 과학자의 그런 우주적 비전이 그의 비디오아트를 가능케 한 만능적 초능력과 천재성이 아닐까 싶다? -김홍희
자신의 죽음마저도 사람들의 입가를 웃음보를 터지게 하는 백남준, 그런 천상의 유머감각은 못 말리는 것이다. 그는 흥행사(entertainer)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그만의 유머와 재치와 천재끼를 보여주다.
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1/02/06/PK2NWXB3HJD2ZLV2SAE4PHXSHQ/?fbclid=IwAR1-ZmmV64XOjNWMmD3kUSR1sePJFTIORNC5UHfS_5dCessweXsTr2XOdDo
비대면시대 이후 유튜브 전성시대를 맞이하다. <조수미> 선생도 드디어 유뷰브를 시작했군요. 닫힌 코로나 시대 열린 영상시대를 실감하게 된다. 1973년 백남준 1인 미디어 시대를 예언했는데 60년만에 그의 예언이 적중을 했군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q8A75z66oL5INmj5lGCAfg
[여기서부터 백남준 어록과 일담 추가] “프로이드의 마지막 책에도, 이 세상에는 에로스와 디스트럭션 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에로스는 건설이고 디스트럭션은 파괴가 되겠는데, 무엇이 건설이고 무엇이 파괴인가는 견해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썩는다는 것도 그래요. 그것도 박테리아 입장에서 보면 건설일 수도 있고 생식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최일남과의 대담 중에서, 1984) 모든 것에는 이중성 혹은 양면성이 있다는 소리죠. 백남준은“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공존한다.”라고 말한다.
“얼마큼 生이며 얼마큼 연출이며 얼마큼이 사기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 (1986년 Bye bye Kipling을 끝내고) 백남준은 심각하고도 진지한 모든 질문에 대해 언제나 정곡을 찌르는 은유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며, 냉소적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서양이 앞서고 동양이 뒤진다. 이런 것 없다. 그것은 일종의 편견일 뿐이다. 이것이 정말 진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소리죠.
[1] 백남준이 발굴하여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언론 정보학의 세계적인 명저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 1964)’의 저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 박사의 대화 습관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1] “나는 헐렁하게 살았고, 뭐로 남아도 남긴 남을 것이다.” 비교) 단군은 무당(샤먼-킹Shaman-King), 칭기즈칸은 범영토(눈에 보이는 영토)제국주의 무당이고, 백남준은 탈영토(사이버영토)제국주의 무당이다.
[1] 어떤 인물에 대한 이해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백남준은 애국주의를 혐오했다. 왜? 그는 한 국가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구전체를 통채로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구인 혹은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1] 문학을 통해 우리의 다른 삶들이 어떠한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하고,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며, 나아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철학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곳을 더 합친 학문이 바로 인류학이죠.
[1] 백남준은 그의 생애에 걸쳐 세상의 수많은 온갖 책을 통달하고 살았다.(독서광 책은 금 광맥이고 사상의 지도가 될 수 있다) 매일 새벽 4시경에 이르기까지 책과 시름하는 독서광의 일상을 반복하면서 책을 읽다 배가 고프거나 심심하면 택시를 타고 맨해튼 32가의 한국음식점을 찾아 비빔밥, 파전 등으로 요기를 하곤 했다.
[1] 옷을 입은 채로 아무 데나 쓰러져 자는가 하면 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본 적이 없었으며 잘 씻지도 않아 어떤 때는 눈곱이 발 등에 떨어질 정도로 외모에 무심했고 기상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목격자가 관장님 [평] 남의 눈치를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닌가 싶네요.
[1] 한동안은 창작활동과 일상의 시간절약을 이유로 전화를 받지 않고 팩스로 외부와 소통하여 미술관과 갤러리 관계자의 속을 태우기도 하였다. [평]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너무 나쁘면 전화보다 문자를 선호한다.
[1] 파블로 피카소는 생전에 극히 한정된 인원을 접견하면서 외부인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나 백남준은 세계예술계에서의 그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람을 구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고 만나 주었다. 특히 한국인이라면 신분의 지위고하 여부를 가리지 않았고 반가워했으며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고향생각은 감상적이기는 하나 자극이 되어 좋지!”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1] 백남준은 뉴욕타임스를 포함하여 3개 일간지, 8개의 주간지, 4개의 월간지를 구독하였다. [평] 백남준은 정보 아티스트 다시 말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시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소리다.
[1] 백남준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박람강기(博覽强記: 여러 가지의 책을 많이 읽고 그것을 잘 기억하는 것) 박학다식한 지식인이었으며 지성인이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지식인과 지성인의 모습이 아니었을뿐더러,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지식인과 지성인을 자처하지 않았다. [평] 백남준에게는 '앎'보다는 '삶'이 훨씬 더 중요했다.
[1] 그러나 “백남준은 자신을 학자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술을 과거와 미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술을 통해 특히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는 흥미가 있어도 역사학에는 전혀 흥미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역사학은 나무라든가, 대(竹)라든가 종이 위에 기록된 문자, 즉 랜덤 액세스(임의적인)에 의해 ‘사기’ 이후의 역사만을 다루기 때문.” [평] 백남준은 문서로 기록된 역사서에 대해서 불신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런 역사서는 대부분 민초들의 이야기는 빼고 승자들의 이야기만 기록했다고 봤기에
[1] “‘비디오 예술의 조지 워싱턴’ ‘전자예술의 미켈란젤로’라는 찬사에도 그가 참으로 좋아하는 분야는 비디오가 아니라 음악이며 연주였다. (사운드로 철학하는 예술가였다) 음악은 자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려는 데 그 본질이 있는 것이며, 행동음악을 통해 순간적으로 꺼져 없어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1] “그렇다면 그는 왜 비디오 예술을 하며, 그의 내면에서 연주와 비디오는 어떠한 것일까. 어처구니없게도 백남준은 사실 자신은 비디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텔레비전은 스포츠 중계 정도밖에는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밥을 먹여준 것은 비디오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비디오에 몸을 팔아먹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병기의 증언, 1984년
[1] “나는 그렇게 아카데믹한 사람이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저 신문이나 보고 아는 정도라고…신문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반영하는 건데…신문을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신문만 잘 읽어도 석학이 된다.” 도올 인터뷰
[1] 백남준은 뉴욕타임스를 하루도 빠짐없이 정독. 뉴욕타임스가 뉴욕에서 연 자신의 첫 비디오 아트 전시회를 호평해준 뒤부터 그는 이 신문에 전폭적인 신뢰와 애정을 보내며 늘 끼고 살았다. 어디 외출을 할 때도 꼭 가지고 다녔다. 뉴욕타임스를 보신다는 걸 남들한테 알리려고 그러는 겁니까 라는 질문에 백남준은 “배탈이 나서 배가 아플 때 덮기도 좋고 어디 누워 잘 때 깔고 덮고 자기도 좋아서 그래” 라는 말로 웃기다.
[1] 백남준은 그의 겸손과 달리,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변화와 혁명을 최초로 예견하였으며, 1974년 록펠러 재단에 기금을 받기 위한 프로젝트에서 전자초고속도로 정보통신망으로의 소통을 주장함으로써 인터넷의 최초 창안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년 전인 1973년에는 1인 미디어 시대를 예언했다.
[1]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음력 6월 17일) 종로구 창신동에서 당시 태창방직을 경영하는 갑부 백낙승의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수원 백씨 백윤수는 구한말의 육의전(조선시대 서울 종로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가지 종류의 왕가에서 사용하는 명주,종이,어물,모시,비단,무명 등을 파는 곳)에서 포목전을 경영하며 고종·순종의 국상 때,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 고관대작의 상복(喪服)을 납품하던 상인출신의 부호로서, 아흔 아홉 칸에 이르는 대궐 같은 창신동의 큰 대문 집(백남준의 표현)저택과 정릉의 별장, 교문리를 비롯한 전국 요지 곳곳에 많은 전답 등을 보유한 갑부였으며, 화신산업(종로2가 화신백화점) 박흥식과 함께 한국 최초의 재벌로 호칭되었다.
[1] 백남준은 다섯 살 무렵에 가족들과 금강산 유람한 것을 종종 얘기하며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어했다. 유치원을 입학하기 전인 6세 무렵, 천자문은 물론 사서삼경의 공부를 마쳤다. 한석봉 천자문, 천자문만 잘 알면 대학박사보다 낫다. 宇宙할 때 우(宇)도 집이고, 주(宙)도 집인데 어떤 차이가 있나? 宇는 공간의 집이고, 宙는 시간의 집을 뜻한다. 천자문을 작성할 때 공간과 시간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민했다는 소리다. 백남준은 평생 '시간의 문제(宙)'에 대해서 고민한 예술가다. 천자문은 천지와 우주라는 사물의 근원이 되는 말로 시작한다는 점이 놀랍다.
[1] 백남준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명동성당 근처의 애국유치원을 올드 모빌 캐딜락 자가용을 타고 다녔다. 백남준은 어려서 일본 고단샤(講談社) 그림책 보며 놀기도 하고 공부도 했던 일을 기억하곤 했다.*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를 모토로 전쟁 전부터 대중잡지 킹 등 다양한 잡지와 서적을 간행했다. "<요시카와 에이지 전집>, <일본어 사전> 등을 발간하는 한편, 다수 <문학상>을 주재. 세계 문학이나 사상 전집 접하다.
[1] 수송초등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경기 보통학교에 진학한 백남준의 학창시절을 기억하는 동기생들은 ‘말 수가 적고 수줍어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교복의 양 소매에 코를 잔뜩 묻혀 번들번들한 것이 특이한 정도였고, 수학을 잘하고 피아노 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한다.
[1] 사람들이 백 선생더러 천재라고들 하는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과찬의 말씀. 하느님의 조작이고 사람은 8할이 운수입니다. 우리 동기(경기중학)중 제일 똑똑했던 '우병근'은 돈이 없어 6·25 때 훈련받다가 폭사했다.” (최일남과의 대담 중에서, 1984)
[1] 백남준은 한국어, 일본어는 물론이고 독어, 영어, 불어, 중국어 등 6개 국어를 구사했다. 그중 일본어는 거의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구사했으며 독어와 영어로도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두 나라 언어로 책 혹은 편지를 쓰다. 불어 실력은 독어 실력은 아니었지만 중급 수준이었고 중국어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원서를 읽을 수 있었다.
[1] 백남준은 자그마한 키에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고 종교도 갖지 않았다.
[1] 백남준은 창신동 큰 대문 집으로 큰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러 오던 신재덕 선생(나중에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오재경 씨의 부인)에게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당시의 신재덕 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장안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 신재덕 선생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1] 신재덕 선생은 훗날 백남준의 작품 ‘두 스승’에서 존 케이지와 함께 작품화되는 인물이다.
[1] 백남준이 두고두고 애석해하는 것은 “연주자라는 건 발에 차이도록 많은 건데 제대로 된 작곡가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것이다. 당시에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세계음악사에 크게 기여할 음악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는 말을 자주 했다. 백남준은 김순남을 만난 본 적이 없었으나, 김순남의 동료였고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가르치던 이건우 선생과 신재덕 선생을 통하여 김순남의 음악을 잘 알고 있었다. 김순남과 이건우는 한국전쟁 중에 월북, 휴전 후인 1953년 10월 경 모스크바에 유학 중 귀국 명령이 내려져 미제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평양 근교에서 박헌영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어려서 백남준 피아노 선생 신재덕 여사> 백남준은 경기고 동창인 전 서울시장 염보현에게 장난을 쳤는데 그만 염보현이 그새 화를 못 참고 주먹으로 한방 날려 백남준 실신, 염보현은 복싱이 취미였다고>
피아니스트인 신재덕 여사(1917~1987년)는 "백남준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순진하면서 재미있는 학생이었다"라고 했다. 백남준 씨는 경기고 시절 동창인 염보현(전 20대 서울시장 1983년 10월-1987년 12월)에게 심한 장난을 걸었다가 혼이 난 이야기를 꺼냈다. 운동장에서 그의 주먹 한 방을 턱에 맞고 실신했는데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백남준 씨는 "복싱을 잘하는 걸 모르고 잠자는 사자를 잘못 건드렸다"라고 웃으며 "그가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비디오 철학에 대해서는 "싱겁기 짝이 없는 세상에 양념 한 가지 치는 기분으로 한다"라고 했다. ⓒ 전민조 다큐멘터리 사진가
[1] 백남준은 1967년에 쓴 ‘뉴욕 단상(斷想)’이라는 수필에서 ‘어려서 캐딜락을 타보았던 들 무슨 소용이요. 이병철의 장남인들 무슨 대수랴’는 표현과 “우리 집이 정월이면 장안에서 유명한 애꾸무당이 와서 굿을 했는데, 집안의 아녀자들이 죽 늘어서서 연실 두 손으로 비는 걸 봤다고, 내가 조금 일찍 철이든 편이라서 인민혁명이 일어나서 수원 백 씨 집안이 쫄딱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진짜 망하면 나는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했었다”는 말을 보면, 경기 보통학교 시절에 맑스의 열병을 앓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1] “6·25 때 우리 집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이, 집에서 키우던 스피츠를 구어 삶아 먹는 걸 보고 막시즘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무슨 놈의 휴머니스트, 로맨티스트들이 애완견을 구어 삶아 먹냐고” 백남준이 625 때 피난을 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이다. 물론 나중에 가족과 재회했지만...
[질문 1 아날학파란 뭔가?] 백남준을 공부하다 보면 한국 근현대사를 이 분야 전공 역사학자보다 더 많은 역사를 배우게 된다. 1946년 박정희 형 박상희가 대구사건에서 사망한 이야기 백남준이 이 집회에 행동대장이었고 백남준 집에 왜 김구, 박헌영, 여운형 등 당대 거물급 정치가들이 모였다. 등등 이런 방식을 프랑스에서는 아날학파(École des Annales)라고 한다. 한 개인을 통해 그의 나라와 당시의 세계사를 조명하는 방식. 대표인물에는 2세대 조르주 뒤비, 페르낭 브로델과 3세대 필리프 아리에스가 있다. 역사기술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새로운 역사학파다.
여기에 속하는 역사 학자들은 세대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1세대의 뤼시앵 페브르, 앙리 하우저, 마르크 블로크, 2세대의 페르낭 브로델, 조르주 뒤비, 피에르 고베르, 로베르 망드로, 피에르 쇼뉘, 카미유에르네스트 라브루세, 3세대의 필리프 아리에스, 마르크 페로, 에마뉘엘 르 로이 라뒤리, 피에르 노라, 자크 르 고프. 1세대와 3세대 아날학파는 심성사를, 2세대 아날학파는 경제사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앙드레 뷔르기에르, 로지에 샤르티에, 베르나르 르프티, 자크 레벨 등의 4세대는 심성사보다 문화적 전회, 언어적 전회를 강조했다.
[1] “사람 팔자 모르는게…나도 어쩌면 평생을 이북의 시골에서 음악선생이나 하다 말았을지 모른다.”
[1] “독일에서 음악공부할 때 명석한 지식인들이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이 벌어지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산·사회주의의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걸 지금도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허영이라고나 할까…맑스의 자본론을 사랑한다는 지식인들의 귀족주의와 허영심이 기묘하게 결합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1] “나는 실상을 이미 알고 환상을 버렸으나, 끼워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짐짓 모른 체하고 있었다.”
[1] “경기보통학교 시절에 천관우 선생에게서 노장사상을 배웠는데…얼마나 흥미가 있었는지 넋을 잃을 정도였다. 나중에 독일에서 유럽의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노장사상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걸 보고, 그들에게 노자·장자를 설명해 주니까 그제야 끼워주더라고, 그 걸 그렇게 써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노장사상은 다분히 냉소적이다.
[1] 현실을 벗어나 사회를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독설을 퍼붓고 권력을 비웃고 권력자를 조롱한다. 반면에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온갖 부류의 인간군상을 총망라하며 얽히고설킨 인간사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1] 백남준은 책을 쓰신 게 있냐는 물음에 “게을러서 쓴 게 없고 사마천의 사기에 관하여 일본어로 쓴 게 있는데, 아마 사기에 관해서는 서울대학교 교수보다 나을 거”라며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있는 사마천의 사기를 통독했음을 내비쳤다.
[1]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노장사상과 그 방대한 사마천의 사기를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외워야 써먹지!” 하면서…
[1] 백남준은 경기 보통학교 시절에 우익 학생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하교한 일을 계기로 아버지 백낙승과 함께 1949년 홍콩으로 건너가, 로이든 스쿨에서 1년 남짓 공부하게 된다. 한국전쟁 직전에 큰 형의 아들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1] “내 아버지가 친일파였다. 친일파도 그런 친일파 일수가 없지…”“비행기를 헌납하고 전쟁 공채를 많이 사주고 했으니까…”“나는 아버지를 몹시 싫어했다.”“나는 아버지와 얘기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니까 장사를 하려면 거짓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나는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그나마 예술가가 되다.”
[1] “객지에서 많은 고생 겪으면서 독립운동하던 분들이 우리 집에 많이 왔다. 고하 송진우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아버지한테 돈을 받아갔다. 집에 목탄차를 포함해서 12대가 넘게 있었는데…그분들이 활동자금으로 쓴다며 몇 대를 가져가고 그랬다.”
[1] 해방 이후에는 몽양 여운형이 식객으로 백남준 선생의 집에 반년 넘게 기거하기도 하였는데, 바깥 소식을 알기 위해 단파 라디오를 구입해달고 하여 백낙승 사장이 어렵게 구해다 주었으나, 도무지 언제 무슨 방송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미국의 소리조차 들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1] 백남준의 6·25 때 기억으로는 뷰익을 타고 트럭에 세간을 부려서 대전까지 내려왔는데, 차가 더 이상 못 간다고 해서 기차 한량을 대절하여 부산으로 내려와 얼마간 지내다 배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갔다고 한다. 피아노까지 챙겨서 내 뺏다. 당시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고, 배에 다른 집안도 많았다.”
[1] 1950년 한국을 떠난 백남준은 35년이 흐른 1984년 첫 귀국을 한다.
[1] “나는 언제나 극단의 가치에 흥미가 있었다. 원래 예술이란 본능을 따르는 행위인데, 나도 내가 하는 일이 처음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1] “유럽을 떠돌며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예술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명으로 인생을 마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 “목적은 없어요. 난 원래 어리광을 부리며 자란 놈이라,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거든요.”
[1] “유아성(乳兒性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예술가가 되지요. 어른이 된 놈은 장사꾼이 되지요.”
[1] “민주주의 상징어는 관용(tolerance)인데, 미국이 어디 민주주의입니까? 귀족주의도 그런 귀족주의일 수가 없지요.”
[1] “역사는 이긴 놈이 쓰는 거지요. 뉴욕은 승자의 나라입니다. 제아무리 똑똑해도 진 놈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백남준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서인 사기를 믿지 않았다.
[1] “사실 경제학자나 정치가들은 모두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끝까지 싸운 것은 예술가들뿐입니다.”
[1] “서양사상의 두 줄기는 희랍 사상과 히브리 사상인데… 히브리 사상은 동양사상과 꼭 같거든요.”
[1] 자신의 처지(인생 경험)를 두 가지 속담이 비유했다. 1) “원님 덕에 나팔 분다.” 2) “방귀가 잦으면 똥 싸기 쉽다.”
[1] “예술이 뭡니까?” 하는 도올 김용옥의 물음에 “그 거 얘기하려면 3박 4일인데 그 걸 이 자리에서 어떻게 다 얘기합니까? “그러면 비디오 아트가 뭡니까?”라는 물음에 “그것도 3박 4일인데, 나더러 무슨 얘기를 하라는 건지…”
[1] 선생님의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는 “메시지는 무슨 메시지… 메시지를 전하려면 말로 하지, 왜 어렵게 작품으로 합니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흥미도 없고, 돈 많은 할리우드 영화업자에게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1] “몬드리안은 무엇을 그렸나? 칸딘스키는 무엇을 그렸나? 우선 이렇게 묻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새 미디어의 창조적 가능성을 실험해 가면서 미디어 자체를 메시지에 일치시켜 나가겠습니다.”
[김훈의 질문 1] 예술은 인간의 현실을 감당해 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하고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한국문학을 어디까지 읽었습니까?라는 당시 김훈의 시사저널 편집국장 시절 질문에
<대답>“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김기림을 읽었는데, 그중에서 최고는 단연코 정지용이었습니다. 정지용은 언어의 의미와 언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모두 장악한 시인으로 나를 매료시켰습니다. 나는 정지용이 주는 언어의 가파른 시각적 이미지에 매료돼 있었습니다. (1995년 10월 서울)
[1]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대한 생각은? “그것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1년, 2년을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술의 시대성·민족성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렇게 팔자가 좋지 않아서, 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 1956년 현대음악의 본고장 독일로 건너간 백남준은 “내 삶은 1958년 8월의 어느 날 저녁, 다름슈타트에서 시작되었다.”라는 표현으로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와의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존 케이지는 한마디로 서양 도인이다.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난다.
[1] 존 케이지는 무조음악을 창안한 음악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수제자이며, 컴퓨터에 토정비결을 입력해 놓고 그걸 이용해 작곡을 하는가 하면, 동전을 던져 표리에 따라 작곡을 했다. 무결정성을 표방하며 소음도 음악이라고 주장하는 아방가르드와 액션뮤직의 창시자라고 백남준은 그의 스승을 설명했다.
[1] 존 케이지의 유명한 4분 33초(세상의 모든 만물이 얼어붇는 시간?)는 교향악단 혹은 피아니스크가 4분33초 동안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작곡으로, 4분 33초를 초 단위로 환산하여 - 273’C가 세상의 모든 만물이 얼어붙는다는 의미로 작곡한 존 케이지의 대표작이다.
[1] “서양 아방가르드의 정신적 핵심부에는 불교의 공(空: 진리 혹은 공즉시색) 사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플럭서스 운동은 50년대 말과 60년대 초반에 걸쳐 그룹으로 조직되어 뉴욕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활동한 극단적인 반예술 전위 운동이다. 그런데 이 예술운동은 노자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요. 노자의 한 줄은 장자의 백 페이지인데…, 플럭서스 운동의 예술가들과 노자를 읽고 토론을 많이 했습니다.”
[1] 회원으로 조지 마치우나스, 칼 스톡하우젠, 백남준, 요셉 보이스, 조지 브레이크, 샬럿 무어먼, 오노 요코 등 60년대 전위 예술의 중요 음악가, 화가, 시인, 무용가, 영화작가 등 전 예술 분야에 걸쳐 있으며, 반예술적·반문화적 전위를 지향한다. 이들은 사상적으로는 아나키즘(anarchism)을 지향한 것으로 보였는데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음으로써, 한정되지 않았고 스스로도 국한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분권주의 지방자치를 옹호했다.
[1] 백남준은 고급화 귀족화 하는 예술에 대한 반항과 일침으로 먹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글을 쓰는가 하면 도끼로 피아노 부숴버리기, 바이올린을 내리쳐 박살(One for Violin, 1962년 5월, 독일 뒤셀도르프 카머슈필레 극장) 내는 등의 happening과 performance를 펼치며 명성을 얻어갔다. 그리고 “독일에서 데뷔할 생각이 아니었다”
[1] 1962년 3월 큰형 백남일이 쾰른에 왔다. “큰 형은 내가 만들어놓은 잡다한 것들로 어수선한 쾰른 근교의 스튜디오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나에게 ‘한 달에 얼마를 쓰느냐?’라고 물었다.” “형이 한 달에 250달러를 보내주지만, 그것 가지고는 많이 힘들어. 50달러만 더 보내주면 고마울 텐데 라고 대답했다.” (백남준의 증언, 1986) 1962년 가을, 한 통의 편지와 함께, 큰 형으로부터 백남준에게 돈이 왔다. “너에게 보내줄 수 있는 마지막 돈이다. 더 보내주지 못해 미안한다. 건강 조심해라.”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유학시를 형이 지원하다. 뉴욕에 가서 피자 한 조각 먹을 돈이 없어 다락에서 라면 먹었다.
[1]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자 어떻게 하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주식에 투자하다. 마지막 종잣돈을 불려볼 욕심으로 오스트리아 은행 주식 등 3군데의 주식을 매입하고 얼마간을 기다렸다. “두 곳은 망하고 오스트리아 은행 주식은 3배가 됐지. 결과적으로 본전치기를 한 셈이다.”
[1] 당시의 독일을 포함 한 유럽은 전후의 궁핍과 가난으로 웬만한 집도 TV를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백남준은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살 수 있는 TV 수상기가 13대였는데, 다음 달은 뭘 먹고살지, 집세는 어떻게 내나 하면서도,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 TV 수상기 13대를 샀다.
[1] 백남준 집안의 가풍과 가세는 50년대까지만 해도, 사업상 곤란한 지경에 이른 조선일보의 방일영 사주에게, 그의 경기 보통학교 동창인 백남준의 형 백남일이 “이 보게, 자네! 조선일보가 망하면 할아버님을 무슨 면목으로 뵈려고 그러나!” 는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네며 각서 한 장 안 받고 거금을 융통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건재했다. 1951-1952년 사이
[1] 백남준의 가계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친일파와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패가망신. 부친 백낙승은 자기 소유의 건물 화장실에서 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했으며 백남일이 관리하던 남은 유일한 재산은 시청 앞 백남 빌딩이었다. 백남준은 훗날 모친상에도 그랬지만 귀국하지 않았다. 백남준은 연이은 집안의 몰락과 부친의 사망에 따른 생활고를 겪었다.
[1] 백남준은 마지막 종잣돈을 불려볼 욕심으로 오스트리아 은행 주식 등 3군데의 주식을 매입하고 얼마간을 기다렸다. “두 곳은 망하고 오스트리아 은행 주식은 3배가 됐지. 결과적으로 본전 치기를 한 셈이다.”
[1] 당시의 독일을 포함 한 유럽은 전후의 궁핍과 가난으로 웬만한 집도 TV를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백남준은 가진 돈을 몽땅 털어 살 수 있는 TV 수상기가 13대였는데, 다음 달은 뭘 먹고살지, 집세는 어떻게 내나 하면서도,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 TV 수상기 13대를 샀다.
[1] 13대의 TV를 전시장에 깔아놓고 엎어놓고 뒤집어 놓은 것이 예술사에 그 유명한 비디오 아트의 첫 전시회인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이었으며, 1963년 3월 22일 라인강 근처의 작은 산업도시, 엥겔스의 고향 부퍼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훗날, 학자들과 평론가들은 TV 13대의 의미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백남준은 첫 전시에서 소대가리 효과(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대가리를 전시장 입구에 걸다 희생의 상징물) 서구의 태양계를 우주의 은하계로 바꾸다. 서양 중심의 미술사를 전복시키고 전 세계를 포함한 새로운 미술사를 쓰다. -박정진
[1] 이 이야기는 다시 구성해 보면? 구보다 시게코와의 뉴욕 생활 중에는 생활비도 떨어지고 집세도 밀리는 일이 다반사로, 살림살이가 근근하여 심각한 경제적 고통을 받았다. 유산을 정리한 것이 조금 남아, 도쿄의 형으로부터 5만 불을 보낸다는 연락을 받고 찾으러 나간 백남준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시게코는 집에 들어서는 백남준의 손에 들려있는 낡아빠진 골동 불상을 보고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5만 불 어쨌냐?”는 다그침에, 백남준은 천연덕스럽게 “5만 불을 은행에서 잘 찾아가지고 오다가 골동상에 들렸는데, 이 불상이 마음에 들어서 그냥 다 주고 샀어!”라고 하지 않는가! 훗날 그 낡아빠진 골동 불상이 수많은 예술평론가가 극찬에 마지않는 백남준의 기념비적인 대표작 ‘TV부처’의 오브제가 됐다. -시게코의 증언
[1] 백남준이라는 예술가가 벌인 작은 일화는 이제 역사가 되었고 이 역사는 다시 신화가 되었다. 신화는 다시 우리들의 추억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백남준이 발산한 빛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들의 마음속에 사람마다 다른 변주곡으로 울려 퍼질 것이다. -잡글 공작소 한진혁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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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입성> 전 이야기[백남준&뉴욕행] '반세기 만에 백남준 뉴욕 상봉'
[0] 2015년에 6월 한 달 수박 겉 핥기 식 백남준 리서치로 둘러본 뉴욕, 1) 뉴욕, 일상이 축제, 구석구석 골목마다 작은 축제가 일어나는 도시, 2) 800개의 언어가 소통하는 다인종 다문화 도시 한국어가 8위 순위, 3) 세계 금융(돈) 좌우하고 세계 미술(미) 진원지. 4) 반면 그 화려한 빛만큼의 디카 들이대기 민망할 정도로 황량함도 어린 Bronx두 얼굴을 가진 뉴욕이다.
백남준 탐색 기사 후반부를 쓸 무렵, 나는 무심결에 백남준이 "날 더 알고 싶으면 뉴욕에 한 번 와 봐"라는 환청을 들은 것 같다. 2013년 백남준 오마이뉴스 원고의 알찬 마무리 위해 백남준 리서치 위해 뉴욕 한 달 체류를 결심했다.
[1] 뉴욕에서 잠자리는 페이스북 친구 김세진 작가의 소개로 미국 작가 '로드니 딕슨(R. Dickson)' 집으로 정해졌다. 미국 가는 길에 잠시 캐나다 큰집 형 사는 집 일주일간 방문, Splendid 캐나다 청정한 공원 풍경, 1999년에 봤을 때와 같았다.
여기는 캐나다 작은 도시 Stratford 이 도시의 연극으로 유명. Stratford라는 도시명은 셰익스피어 고향
[1] 미국작가 '로드니 딕슨'이 직접 케네디 공항으로 마중 나와 내 첫인상은 "여기서 내가 어떻게 살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들었다. 뉴요커 화가 '로드니 딕슨' 집에 머물다]
로드니 딕슨 소개? 2015년 6월 4일 날 브루클린 집에서 찍은 북 아일랜드 출신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 그는 매우 관대하고 작품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다. 언제나 방문자로 넘친다. 주소: 주목받은 미술거리 '윌리엄스버그'에서 멀지 않은 브루클린 '앵거트(Engert) 애비뉴'. 작업실이기도 한 그의 집에는 오토바이광답게 오토바이가 서너 대 있었다. 욕실 튜브도 없을 정도로 생활이 검소 부엌, 방 3개가 있었다. 영국 귀족 같은 그의 부인 '줄리엣 혼(J. Hone)'와 같이 사는데 그녀 역시 작가다.
로드니 집에는 6월 4일 마침 그날 하와이비엔날레 총감독 '베이사'가 하루 머물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맨해튼 시내를 안내할 테니 무조건 따라오란다. 그는 버스 타는 요령과 지하철 타는 방법 등을 일러준다. 뉴욕 버스를 처음 타봤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가 뉴욕 지하철 한 달 권도 구입했다. 내 신용카드로 넣으니 바로 결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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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입성> 후 이야기 [백남준&뉴욕행] '반세기 만에 백남준 뉴욕 상봉'
[1] 뉴욕 지하철
난 11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지하철을 처음 타봤는데 그야말로 철공소 그 자체였다. 굉음이 심해 귀를 막아야 한다.110년의 역사를 가진 뉴욕 지하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표정, 언어, 패션, 사고방식이 다 다르다. 거리 예술가에 대한 기부가 생활화되어 있다. 뉴욕 지하철은 24시 체인점처럼 24시간 운행하다.
'유니언 스퀘어' 역을 지나 *맨해튼 중심가 *록펠러재단에서 뉴욕 한국식당 '돈의보감( Dons Bogam 17 E 32nd Street New York, NY 10016)'으로 들어섰다. 맛이 궁금했는데 서울과 똑같았다.
이 한국식당에서 나는 '베이사' 친구인 큐레이터 겸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는 이혜원 선생과 캐나다·유럽을 오가면 작가 겸 전시기획자인 '나오미 캠벨(N. Campbell)'과 유엔위원회 중 한 단체의 회장 '알바레스'도 만났다.한국식당에서 처음 나를 만난 나오미 '뉴욕현대미술관(모마 MoMA)'을 안내 발 벗고 나섰다.
<<여기서부터 시간별이 아니고 랜덤하고 소개>>
뉴욕 맨해튼 대표적 화랑가 '첼시': 그날 오후에 나는 이전에 자동차 도색공장 거리였던 '첼시(Chelsea)' 화랑가를 방문했다. 이 구역은 과거 뉴욕 미술가로 유명한 '소호(Soho)'구역을 대신한다. 소호가 고급 상가로 바뀌면서 땅값이 오르자 1994년부터 임대료가 더 싼 첼시로 옮겨졌고 다른 갤러리도 같이 이사했다. 여긴 지금 '가고시언', '페이스' 등 많은 갤러리가 운집해 있다. '303갤러리(West 24 Street)'는 내가 첼시 구역에서 아는 유일한 갤러리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만나 알게 된 이 갤러리 공동 디렉터 *'캐서린 에드먼(Kathryn Erdman)'만나 반가웠다. 첼시 중간에 위치한 이 갤러리는 꽤 고급스럽게 보였다.
'페이스갤러리'에서 본 '이우환전'
6월 첼시전시 중 가장 눈길을 잡은 건 단연 *'이우환'전이다. 이 전시는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렸다. 그의 설치작품은 돌과 철의 스캔들, 한 경지에 오른 고급스럽고 미니멀한 관계 미학의 승리다. 여기 첼시 화랑가엔 '뉴욕(두산)' 등 한국 갤러리도 있다. 첼시미술지역 아직 정비가 다 끝나지 않아 아직도 어수선해 보이나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분위기는 확 다르다. 여기가 또 명소인 건 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2층 산책로 때문이다. '하이라인 파크' 여기서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 2층이라 공중에 떠있는 생태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 전망대 역할을 한다. 이것의 벤치마케팅이 서울역 고가도로죠.
<하이라인 파크 아카이브>"맨해튼 남서부를 관통하는 이 고가 공원은 80년 넘은 녹슬고 페인트 벗겨진 고가철로를 개조한 것이다. 2009년 처음 일부가 공개되었고 두루 입소문이 나, 이제는 뉴욕의 명소가 됐다. 1999년 시민단체 <하이라인의 친구들>이 결성되어 20년간이나 긴 준비 끝에 벌어진 이곳을 공원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로 지금은 야생식물 등도 자라게 되었다. 뉴욕 시는 아이디어를 공모해 34개국 720개 팀 응모에 참여했다. 2006년 착수 2009년 일부 개방했고 2011년 나머지 구간 완공했다. 총연장 2.3km, 5000만 달러 투자했다. 여기서는 상행위를 할 수 없다. 뉴욕 시는 부수고 짓는 것보다 있는 건물을 가능한 재활용한다. <뉴욕타임스>는 1억 5천 달러 투자해 7배인 20억 달러의 효과를 냈다고 보도" 도시재생 성공사례
<축제 하나> 뉴욕 근교 브루클린에서 요즘 각광받는 미술 구역 '부시윅'
뉴욕 근교 브루클린에서 경험한 '부시윅(Bushwick)'이다. 6월 6일 오후에 첼시를 보고 나는 피곤한 채 귀가했는데 로드니 집 절친인 *브래드 다비(B. Darby)가 '2015년 부시윅 오픈 스튜디오(Bushwick Open Studios 2015)' 축제에 날 안내받았다. 이곳은 '제2의 윌리엄스버그'라고 불린다. 그 화끈거릴 정도로 작가들 열기기 대단하다. 작가로 발돋움하려고 밤낮없이 혼을 불태운다. 한국과 미국 그 작가 수준을 떠나서 우선 작가의 수에서 너무 많았다.
2000년부터 과거 제조업 공장지역이었던 이곳이 예술가의 작업실로 재탄생된 것이다. 굉장히 활력이 넘쳐 보인다. 여길 보면 서울 '문래동 예술촌'이 생각났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더 넓고 크고 튼실하다. 무엇보다 작가들은 충분히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이곳을 방문해 유쾌해지는 건 바로 이런 작가들 때문이다.
<축제 둘> 뉴욕 윌리엄스버그 근처 6월 예술축제 중 한 컷, 브루클린 1)윌리엄스버그 2)부시윅
<뉴욕에 가야 하는 이유는 뉴욕이 좋아서가 아니라 뉴욕이 아니면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거리에서 열리는 NORTHSIDE FESTIVAL 참가했을 때 2015년 6월 16일에 찍은 사진이다. seulsong.tistory.com/156
<축제 셋>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만난 백남준의 절친인 오노요코전(2015년 6월 14일) 보다
모마 2번 방문 2차 때는 2015년 5월 17일부터 9월 7일까지 열린 '오노 요코 개인전(Yoko Ono, one woman show 1960-1971)' 전시물 중 하나 전시 사이 백남준 전문가 아이리스 문의 초대로 갔다. 트 http://www.moma.org/calendar/exhibitions/1494?locale=en
2015년 6월 14일 뉴욕 모마 오노 요코 전시 한국 기준으로 치면 성적으로 노골적이고 좀 야한 작품이 많다. 한국에서 전시 불가능할 것 같다.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물을 가지고 전시를 하다. 그러니까 야하죠.
나는 앤디 워홀이 오줌으로 만든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번 모마 전에서 그녀는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물을 모아서 작품을 만들었다. 물방울 하나로 바위를 뚫는다는 노자 사상의 메타포이다. 느리지만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의 몸에서 나오는 물은 생명의 원천이고 새 생명을 잉태시킨다는 메시지다. 하여간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마치우나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은 오노 요코는 분명 20세기 미술혁명의 진원지다.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실험정신을 번뜩였는데 작품 주제 역시 몸이 가장 중요한 화두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금기에 저항적이고 에로틱하다. 하긴 서양미술사에서 여성의 '버자이너'를 주제로 하는 것은 하나의 오래된 전통이다.
현대미술의 아버지 '뒤샹'의 '변기'는 또한 여성의 버자이너를 상징한다. 파리 한 마리가 여성의 버자이너를 천천히 지나가는 오노 요코의 영상은 '시케코'의 '버자이너'보다 더 세 보인다. 서로 경쟁인가? '나를 찢어라'와 같은 작품명도 도발적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가 충만했던 60년대 히피 시절 그때가 어떻게 보면 미국의 최고 전성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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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1TPj9yUljnE&t=23s
여기서 <2부 본문> 백남준과 뉴욕 본격 이야기 -
<뉴요커 작가 집에서 처음 2주간 머물다><나머지 2주는 브루클린 유스텔에서 보내다>
로드니 딕슨(Rodney Dickson) I '무제' 합판에 유화(oil on board) 2014. 색을 긁어내면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다. 그의 작업방식은 캔버스나 패널에 바탕색을 두껍게 칠하고 난 다음 며칠 뒤 그림 앞에서 긴 침묵과 오랜 명상의 시간을 가진 후, 준마처럼 캔버스로 달려가 그림을 그리거나 고치는 방식이다. 그 행위 자체가 그야말로 퍼포먼스 아트다.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그렇게 자신의 몸을 던져 그리는 드라마틱한 방식이 인상적이다.
[작가소개] 1956년 생 1979–1983년 영국 리버풀 폴리테크에서 순수미술 전공 [수상경력] 2011년 '폴록 크라즈너(Pollock Krasner)상', 포드재단기금 등 [전시경력] 2015년 독일 쾰른전시 2004년-2014년까지 2년마다 5번 이상 뉴욕전시, 2005년과 2003년 일본 동경에서 전시, 중국과 멕시코, 베트남 등 국제적 전시를 해왔다. 한국에도 해인사 아트프로젝트로 참석한 적도 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18년째 작업을 하고 있다. 다행이 한국인 컬렉터가 정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한다.
그의 그림은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열려 있다. 추상화이지만 작업을 할 때는 그에게는 구상과 추상, 표현주의와 사실주의의 개념도 없다. 다만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할 뿐이다. 광부가 광맥을 찾듯 그는 날마다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찾는다. 오래 기다리다 보면 뭔가를 순간적으로 우연히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그는 거기서 기적 같은 어떤 영감이나 관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의 '서사가 있는 사건'처럼 보인다. 조각을 하듯 회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속도감도 빠르면서 느리고, 그 분위기가 고요하면서 격렬하다. 색의 주조가 왠지 어둡고 무거운 건 아래 글을 더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작업을 하다가 몸의 에너지가 다 소진돼 죽음이 온다 해도 그걸 그만둘 것 같지 않게 보인다. 그의 방식은 예측하기 힘들고 무조건적 혹은 무목적적이다. 캔버스에 자신이 경험한 삶의 희로애락을 색의 뉘앙스를 살려 담으려 한다. 무엇보다 그는 그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중시하고 즐기는 '도상미술(途上藝術)'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대해 "나는 시대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다. 오직 나만의 길을 갈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쇼크와 충격을 주기를 원한다(I would like to be shocked or surprised by my work)"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 나름의 치열한 정체성과 차별성과 고유성을 찾아가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지만 그에게도 인생이 짧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그림에만 몰두한다. 그의 인생사용법은 '카프카'의 말처럼 자신을 비누처럼 써버린다. 일종의 투신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물감을 아낌없이 쓸 여유는 그에게 충분하다. 그는 창작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오토바이 레이싱으로 해소하는 것 같다. 작업방식에 있어서 처음에는 서양식 더하기를 했다가 나중에는 동양식 빼기를 하는 플러스보다 마이너스 미학이 더 강세라고 할 수 있다. <이 작가의 핵심> 어느 순간 그 더덕더덕 붙어있는 물감을 다시 긁어낼 때 만나는 기적 같이 찾아온 황홀경, 그때 그는 색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빛(Light)을 발견한다. 물감으로 표현한 비디오아트 같은 뉴페인팅이다.
그는 작품에서 빛을 발견하는 순간에 맛보는 경이로움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새벽, 황혼, 자정, 정오에 내가 발견한 너무나 매혹적이고 강렬한 빛은 내 눈을 멀게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이미지 작업을 말살시킬 정도로 말이다(The artist writes, Dawn, dusk, night time, mid day: the light is sometimes so intense and magical, it obliterates almost all imagery in my work-just a blinding light)" -작가의 statement
그는 단연코 반전(anti-war)작가다. 왜 그럴까? 거기엔 사연이 있다. 로드니는 1956년 북아일랜드 출신이다. 아일랜드는 700년 이상 영국식민지였다. 나라가 독립될 때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영국에 편입시켰는데 30년(1968-1998)간 처참한 '내전(The Troubles)'이 있었다. 이를 반대하는 반영파(공화파, 가톨릭)와 이를 찬성하는 친영파(왕당파, 개신교)의 분쟁으로 사망자 3천5백 명, 사상사 5만 명이 발생했다. 이를 10대부터 30년간 이를 봐온 작가로서 폭력은 답이 아님을 깨닫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평화적 예술방식을 취한다. 그는 지금 뉴욕에서도 맨해튼이 아니라 브루클린에 사는데 이런 장소성은 무의식적으로 아일랜드의 비극성과 맞물려 있다.
이런 체험이 그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줬나. 그는 미국친구도 많지만 그 못지않게 주변에 소외된 사람에 대한 연민과 관심이 높다. 그는 중국 거주 작가도 했고, 베트남에서도 전시를 했지만 그래 선가 아시아 그 중에서도 특히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좋아하고 아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다. 그는 뉴요커 작가이면서도 브루클린적인 요소를 즐긴다. 도시적인 것에만 정신을 빼기지 않고 여전히 고향인 아일랜드의 전원풍경을 좋아한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능력 관대한 열린 마음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온 것이리라. 그는 요즘 참 보기 드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작가이다.
<백남준 자취 찾으러 뉴욕, 오길 잘했다>뉴욕에서 백남준 7번 만나다. 위싱턴에서는 못 만났다.
<여기서 백남준 만나다 1> 백남준 살았던 소호 '머서가(街)' 방문
맨해튼 머리(Murry)가(街) CTL회사, 이곳은 전자아트작품을 복원 수리하는 곳. 아래 스튜디오 내부
뉴욕 와서 6월 12일 분주했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백남준 발자취를 확인하는 것인데 10일이 지나도록 별 성과가 없었다. 이를 눈치 챈 라파엘레는 백남준이 TV가 고장 나면 가던 맨해튼 *CTL로 날 초대했다. 이 회사는 1968년부터 운영해온 곳으로 비디오 복원 스튜디오다. 여길 들어서니 백남준 판화도 벽에 걸려있었고 그의 체취도 풍겼다. 라파엘레와 2번째 대면이었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6월 7일 로드니 집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고 인터뷰도 약속받았다. 그녀는 7년간 백남준 조수를 한 미국작가로 전자아트작품을 복원하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2007년 삼성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순회전 때도 한국에 왔고 그 후 한국을 8번 방문한 적이 있어 날 편하게 대해줬다.
뉴욕 와서 백남준 발자취를 찾는데 처음엔 성과가 없었다. 백남준의 조수였던 '라파엘레 셜리'는 날 우선 백남준이 TV를 수리할 때 다니던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브루클린'미술관을 둘러봤지만 백남준 작품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휘트니' 미술관을 갔는데 거기서 백남준 작품을 왕창 만났지만 여기서 처음 백남준을 만나 너무 반가웠다. 백남준 TV 수리하느라 여기를 얼마나 왔다갔다 했겠는가.
뉴욕 캐널 스트리트여기에 가면 TV 전자제품 상가가 몰려있다. 캐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운하를 복개해 만든 거리다. 미국판 청계천 전자상가다. 백남준 이 근처에 작업실이 있었다. 2015년에 가본 적이 있다. 플럭서스 본부에 이 근처(359번지)에 있다. 과거에는 섬유공장이 많았던 곳이다. 이 근처 차이나 타운 이탈리아 타운 소호스트리트가 맞닿아 있어 여러문화의 뒤섞인 곳이다.
<여기서 백남준 만나다 2>
그리고 난 어떻게든 백남준 부인 시게코도 만나 보려했는데 당시 시게코 여사는 위중한 상태라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라파엘레의 중계로 그 후에도 몇 번 만나려 했으나 결국 못 만났다. 안타깝게도 시게코 여사는 결국 내가 귀국한 후 1달 만에 작고했다. CTL를 나와 백남준자택 *5층(소호 머스가[街] 110)으로 갔다.
라파엘레가 같이 가자는 뜻을 난 그녀가 바쁘다는 말로 오해해 혼자 갔다. 이 지역은 지금은 번화가지만 당시엔 가난한 예술동네였다. 백남준은 건축 전공한 '플럭서스' 창시자 '마치우나스'가 잠시 임대업을 했는데 그때 싸게 구입한 것이다. 그 집을 보니 백남준을 만난듯 속이 후련해진다.
난 여기를 나와 '그리니치빌리지' 지나 *'유니언스퀘어'로 잠시 구경 나갔다. 이곳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터질 때 목소리를 내는 곳이다. 19세기 후반 노동조합원이 이곳에 모여 파업을 선언하고 출정식을 했고, 2001년 세계무역센터가 테러공격을 당했을 때 뉴욕시민들 촛불을 들고 희생자를 애도한 곳이다
<여기서 백남준 만나다 3> 뉴욕 3주째부터는 이 학교 근처에 체류하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 미술대학' 입구
그 다음날, 난 로드니 집에 너무 오래 폐를 끼쳐 이사를 했다. 내가 옮긴 곳은 로드니 집에서 가까운 '코지어스코(Kosciuszko)' 하우스, 이곳은 2층 침대를 여럿 놓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숙박비가 싸다. 애용자는 주로 20대, 이 집주인이 프랑스어에 능통해 프랑스 친구가 많다. 가까이 유명한 *플랫(Pratt)미대가 있어 아침마다 조깅을 다녔다.
이 플랫미대는 처음에는 공대였다고 미대가 된 대학이라는 말을 이 학교직원과의 짧은 인터뷰에서 들었다. 산업화에서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생긴 자연적 현상이다. 이 대학은 백남준과도 관련이 있다. 백남준은 이 대학 학장도 했다. 그리고 'L. 부르주아, F. 스텔라' 등 거장들이 여기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백남준도 1998년 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백남준 만나다 4> 백남준 7년 조수한 라파엘레 셜리 만나다 그녀와 인터뷰 여러 곳에서 소개
▲ 백남준 조수를 7년을 한 라파엘레 셜리과 백남준, 작업실에서 공동작업을 할 때 모습 1999년ⓒ Raphaele Shirley
난 이날 귀가했다 오후 윌리엄스버그 '벤타나(ventana)244' 갤러리에서 열리는 라파엘레전을 보기 위해 다시 그녀를 만났다. '윌리엄스버그'는 맨해튼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 안 되는 곳에 있는 뉴욕의 새 미술 명소다. 차별화된 분위기는 서울 홍대 앞을 연상시킨다. 이 전시는 개인전은 아니고 4인 전, 제목이 '방화와 초토' 범상치 않다. 전시장에 한 멋진 흑인 여성이 들어왔는데 그녀는 내가 시내에서 한복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봤단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라파엘레는 백남준 영향으로 융합사상을 암시하는 *원형작업이 많다.
<구겐하임에서 백남준 만나다 5, 셜리를 백남준 대신 나를 구겐하임에 초대>
그리고 뭣보다 고마운 것은 백남준 조수를 7년간 한 백남준 조수였던'라파엘레 셜리'와 뉴욕 작가들과 나눈 진한 우정" 남편 '마이클 사르프(구겐하임 기술 시니터 큐레이터)'가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 작은 파티를 열어준다며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
그리고 '셜리(R. Shirley)' 집에 2번 초대됐고 남편인 사르프(M. Sarff)는 구겐하임 임원이라 날 구겐하임 오프닝 리셉션에도 초대했다. 셜리와 인터뷰 문제로 마지막 만나던 날 남편도 동참해 간소한 이별 파티를 열어줬다. 그는 내게 '모마 별관'에서 열리는 '임흥순' 작품을 꼭 보라고 추천해 다음날 갔으나 쉬는 날이라 못 봤다. 한 달이지만 이들을 알게 된 건 큰 선물이었다. 백남준이 보이지 않게 도와졌다는 생각이 든다. 백남준은 생존 시 세계적 작가들과 각별한 '우정의 철학'의 나눴는데 그런 단면을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었던 게 이번 뉴욕 미술기행의 최고 성과가 아닌가 싶다.
난 이사 간 내 방 침대를 정리하고 '그린 포인트(Green Point)'에 사는 라파엘레 집에 초대를 받아 거기로 갔다. *그녀는 내게 백남준과 같이 작업을 할 때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공개하며 날 위로했다. 이 사진은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이 없단다. 너무 고마웠다. 그녀의 남편인 '마이클 샤프' 씨는 마침 구겐하임미술관 시니어 매니저로 조용한 내면을 갖춘 신사였다. 날 반갑게 맞이하더니 며칠 뒤 세계10대작가에 속하는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전'(6.26–10.12) 오프닝리셉션에 날 초대하겠단다. 나는 그런 인연으로 운 좋게 구겐하임 오프닝리셉션에서 참가했고 그곳 문화계 인사와도 만났다.
달팽이꼴 '구겐하임미술관' 찾다
2015년 구겐하임그룹전에 출품한 양혜규 색면작품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목소리와 바람' 2009
나는 여길 나와 같은 뮤지엄 구역인 *'구겐하임미술관'으로 갔다. 옆에 '센트럴파크'도 보인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진 않았다. 'F. 로이드라이트'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백남준, 이우환의 회고전이 열린 곳이라 우리에게도 이 이름이 익숙하다. 백남준이 여기서 뉴밀레니엄 회고전을 열 때 이 공간을 가장 창의적으로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미술관은 아주 세련된 벽색과 전시방식이 특이해 신기한 분위기를 준다. 올라가면서 보고 내려오면서 반추하듯 그림을 다시 보니 그림 감상 효과는 2배로 높아진다. 천장이 돔 양식이라 하늘로 승천하는 착각에 빠지게 해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내가 갔을 때 그룹전이 있었는데 한국의 '이불'과 '양혜규'도 참가하고 있었다. 뿌듯했다. 양혜규 작가가 특히 돋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겐하임 소장품이다. 추상 색면을 응용한 그의 블라인드 색면에는 선풍기가 붙어 있어 소리도 들리고 바람이 불면 착시현상으로 색도 달라 보인다. 향 분사기가 있어 실제 향기도 난다. 이 작품은 이렇게 오감을 자극하며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1] 황홀한 '아델 블로흐-바우어 초상화' 구겐하임 옆에 있는 독일미술관
맨해튼 뮤지엄마일(거리)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 입구 독일어권 미술관 축소판
뉴욕 온 지 20일, 뮤지엄마일(거리)에 위치한 '노이에 갤리리(뉴갤러리)'를 소개한다. 구겐하임미술관과 가까이 있어 찾기 쉽다. 입구에 갤러리 간판 글씨가 금빛으로 반짝인다. 이곳은 뉴욕사업가 윌리엄 S. 밀러의 고급저택이었다가 후에 '해운·철도왕인 'C. 밴더빌트'에게 팔렸고 다시 유대인연구센터로 넘어갔다. 1994년에는 아트 컬렉터인 '로날드 로더(R. Lauder)'와 아트 딜러인 '서시 사바르스키(S. Sabarsky)'가 이 건물을 매입해 2001년 독일·오스트리아 전문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
루브르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볼 수 있듯이, 이 미술관에서 구스타브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바우어초상화(일명 황금여인)'을 볼 수 있다. 클림트는 여성의 관능미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00년 전 작품인데도 매우 모던하다. 장식미술과 순수미술의 절묘한 교합이라고 할까.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전율이 왔다. 이 '황금여인'은 2006년에 로날드 로더가 회화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에 구입한 소장품으로, 모마에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비길 만하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고전적 모더니즘, 우키요에, 비잔틴 프레스코 등 고전과 현대의 기법이 총동원됐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세계를 연출한다.
클림트는 '에로스'를 인간의 본성으로 봤고 정신분석에도 관심이 있었다. 현실과 환상, 죽음과 염세주의, 관능과 에로티시즘이 그의 화풍의 주조다. 그는 '분리파'로 기존 화풍과는 달랐다. 이밖에도 '에곤 실레', 클림트의 제자인 '코코슈카' 등도 전시된다. 마침 러시아 추상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상관관계를 조명하는 전시도 열렸다. 그리고 오후엔 뉴욕 번화가이고 뉴욕 지하철노선이 가장 많은 다니는 '타임스스퀘어'로 잠시 갔다. 휘황찬란한 홍보전광판으로 1년에 거두는 광고료가 7000만 달러(800억)라니 놀랍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록펠러센터'도 보인다. 114번 '퓰리처상'을 받은 세계적 정론지 '뉴욕타임스'가 이 근처에 있다. 그래서 스퀘어 앞에 '타임스'가 붙었다.
<여기서(휘트니미술관) 백남준 만나다 5>
'휘트니미술관'에서 백남준 'TV자석' 만나다
▲ '휘트니미국미술관'에서 만난 백남준 비디오아트 초기 대표작 '자석TV' 내 한복은 뉴욕에서 만난 아티스트의 사인으로 얼룩지기 시작하다 여기서 정말 백남준을 만나다. 그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 잘 왔구나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6월 20일 토요일 느긋한 마음으로 아침 일찍 *'휘트니미국미술관'을 갔는데 이사 간 걸 모르고 옛 미술관이 있는 5번가로 갔다가 돌고 돌아 지하철을 타고 새로 지운 휘트니미술관(99 Gansevoort St.)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새로 이사 간 휘트니미국미술관은 첼시와 소호지역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시도 밤 10시까지 개방되고 활기찬 분위기다. 이곳을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우선 허드슨 강변을 볼 수 있고 먹자골목이 있고 노상카페엔 주말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새 미술관 분위기는 유쾌했다. 예술은 페스티벌이다. 삶의 생기를 얻는 문화발전소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 2011년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미술'전 때 본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3층에 올라갔는데 거기 백남준 작품이 있어 너무 기뻤다. 여기 소장품으로 백남준의 혁명적 예술을 상징하는 쌍방소통이라는 철학을 반영한 'TV자석'이었다. 이 작품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개념을 완벽하게 보여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리고 1982년 '휘트니비엔날레' 때 출품한 TV모니터 40대를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비라미드(V-yramid)'도 봤다. 오늘은 정말 힘들게 뉴욕에 온 것을 보상받는 감격스런 하루였다. 오래간만에 백남준 여러 번 보다.
[1] 뉴욕 최고 문화명소 '모마(MoMA)'
뉴욕에서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최고 문화명소다. 데이트 족도 많다. 역시 여기서 본 최고의 작품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20세기 입체파는 확실히 미술의 혁명이었다. 이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생해서 뉴욕에 온 보람을 느꼈다. 피카소에 이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도 역시 강렬했다. 잔잔한 여운과 격정적 열정이 뒤섞여 있었다. 작가의 주관적 관점이 돋보였다. 생존에 작품이 거의 팔렸지 않았기에 고흐는 정말 자신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림을 그린 듯하다.
<회화에서 엄청난 실험 다양한 시도 그리고 비디오아트 나왔다>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에도 영향을 준다. 마그리트, 칼로, 샤갈, 세잔, 후안 미로, 자코메티, 뒤뷔페, 클림트, 앙소르와 모네의 '수련', 키리코의 '러브 송 ', 마티스의 '댄스' 등도 봤다. 이제 모마 작품은 100년이 다 되었다. 이 중에서도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폴 고갱이 압권이다. 2차 방문 땐 미국 거장 폴록, 로스코, 라우센버그 등도 감상했다.
여기서 특히 폴록의 '가을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2차 대전 후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물 붓듯 하는 '액션페인팅'의 추상표현주의를 창시한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폴록만의 카리스마가 넘친다. 이건 절대 유럽에서 나오기는 힘든 화풍이다. 절정기에 차 사고로 죽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는 작품에 진전이 없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6월 14일에는 다시 모마에 갔는데 백남준과도 각별한 관계였던 '오노 요코 개인전(1960-1971)전'이 마침 열리고 있었다. 우리시대의 마녀라 불리는 그녀의 60년대 퍼포먼스와 오브제아트를 소개하는 전시로 우리나라 19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파격적이다.
<여기서(뉴욕공공도서관)에서 백남준 만나다 7> 책 좋아하는 백남준 여기에 자주 방문
'뉴욕공공도서관'과 '그랜드 터미널' 뉴욕 공공도서관 3층에서 홍보요원이 관광객에게 정기적으로 도서관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이번에는 '뉴욕공공도서관'을 가보자. 이 도서관은 1911년에 개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접속이 가능하단다. 90곳 분관과 전문연구도서관 4곳이 있고, 셰익스피어원본, 구텐베르크성서 등 희귀본도 있단다. 장서가 5300만 권 정도로 최근엔 디지털도서관도 열었다.
여기 입구에는 두 마리 사자상이 있는데, 하나는 '불굴의 정신(fortitude)' 또 하나는 '인내(patience)'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독서할 때 가장 필요한 미덕이죠. 세계공황 때 붙여진 이름이라니 더 공감이 간다. 하긴 공부할 때 꼭 필요한 덕목이다. 뉴욕커들,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땐 '센트럴 파크'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싶을 땐 '퍼블릭 라이브러리'로 가면 된다. 백남준도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게 정보라고 했지만 우리가 미국에 유학하는 이유도 실은 이곳 정보와 자료 때문 아닌가. 한국에도 없는 우리 자료가 여기서 발견되는 건 우연만은 아니다. 이런 문화발전소는 미국을 최강국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 이리라. 여기선 도서관 홍보요원이 정기적으로 나와 관광객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도서관 현황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내가 그의 말을 다 이해는 못 했지만 뉴욕의 자존감은 여기서 나온다. UN 근처 이 정도의 도서관이라면 자랑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자부심은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길 나오면 100년 전에 지워진 '그랜드센트럴터미널'이 보인다. 건물이 파리오페라양식이라 멋지다. 여기선 시민결혼식도 한다. 조금 더 가면 UN도 나온다. 난 호기심이 발동해 출입구보안검사를 통과한 후 UN빌딩 안으로 들어갔으나 대기시간도 길고 내 취향에 맞지 않아 UN내 미술갤러리에서 '루지에로(F. Ruggiero)'의 인물전만 보고 나왔다.
[1] 뉴욕, 문화1번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방문
뉴욕의 미술명소 1번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입구
16일은 미국의 루브르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여기는 그림뿐만 아니라 옛 악기류와 무기류도 전시하는 일종의 인류학박물관이다. 200만 점 소장한 이 문화 보물창고가 있기에 뉴욕에 그렇게 사람이 몰리는 것 아닌가. 처음 입구에 들어가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 잉카제국과 *로마조각 *미국역사화 등을 볼 수 있다.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유럽 17세기 이탈리아미술관, 18세기와 19세기 유럽과 프랑스미술 그중 역시 인상파가 익숙하다. *'세잔, 모네'가 특히 많고 '도미에, 로댕, 고갱, 고흐, 마티스, 뷔야르, 르누아르, 로트렉, 피카소, 레핀' 등도 볼 수 있다. 특별전으로 중국고대문화와 현대패션을 접목한 '중국특별전'은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중국이 경제 강국이 되면서 그 관심도 높아진 것이다. 오래전부터 엄청난 문화공세를 해 온 일본을 능가한다. 안타깝게도 삼성이 마련한 한국관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2] '바스키아'의 고향 '브루클린미술관' 탐방 바스키아 전
모마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 장소성으로 여성, 흑인, 아시아 등 소수민족을 대변하는 미술관이라는 인상을 준다.새로 이사 온 곳에서 하루 자고 난 다음날 *'브루클린미술관'을 방문했다. 면적이 5만2천m2 되는 큰 미술관이다. 맨해튼 특히 페미니즘미술이 강했다. 이 미술관을 꼭 가야하는 이유 하나를 발견했다.
▲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I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 복합매체 1979. Collection of the Brooklyn Museum 페미니즘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특별전시실>미국 페미니즘미술의 전설적 인물인 '주디 시카고'의 '디너파티'를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이 미술관 최고의 소장품이다. 주디 시카고는 1971년과 1979년에 '디너파티'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100여 명의 여성자원자가 함께 수놓기와 도자기제조 등의 작업으로 페미니즘 미술의 최고 걸작을 남겼다. 이 작품은 도자조각으로 식탁보 위 접시에는 생명이 잉태시키는 여성의 음부를 꽃처럼 제작해 여성의 당당함을 과시하고 여성이 남성의 욕망 대상이 아니 주체적 존재임을 보여준다. 테이블을 살펴보면 유명한 여성작가인 '버지니아 울프'나 고대여성시인 '사포' 등 그밖에도 999명의 위대한 여성이름을 도자기타일로 만든 바닥에 새겨놓았다.
<특별기획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알려지지 않은 그의 노트북 <Basquiat: The Unknown Notebooks April 3–August 23, 2015> 바스키아전 열려 그의 고향에서 제대로 작품 보다
마침 바스티아 전이 열리다.
[3] 신개념 미술관, '뉴뮤지엄' 정면모습, 마치 장난감 상자를 쌓아올린 것 같다 박스 대충 쌓아놓은 듯, 무슨 빌딩일까 뉴뮤지엄 등 탐방
다음 날 아침 서둘러 '바우어리(Bowery)'거리에 있는 '뉴뮤지엄'로 향했다. 기존의 미술관개념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뉴(New)'를 붙인 것인가. 그건 아마도 그림의 개념이 변하는 시대에 전시의 개념도 시대정신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의도이리라.이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이미 현대미술이다. 일본 SANAA 설계사무소 '니시자와 류에'와 '가즈요'의 합작으로 지운 것으로 후에 건축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프리츠커상'도 수상했다. 7층인데 각기 다른 8개 사각형을 대충 쌓아올린 것 같아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다.
휘트니미술관에서 1967년부터 10년간 큐레이터였던 '마샤 터커(M. Tucker)'가 1977년에 이 미술관을 설립했다. 그녀는 여기서 20년 간 이 미술관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고 그 결실로 2005년엔 뉴욕 시와 카네기재단으로부터 2천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기도 했다.내가 갔을 때 '신표현주의·신야수주의'로 불리는 1954년 출생한 독일화가 '알베르트 욀렌(A. Oehlen)' 전시 등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뒤셀도르프 미대교수로 '지그마 폴케'와 친구이기도 하다. 작품명이 '중독금속(Der vergiftete Asket)'인 것도 그렇지만 그의 화풍이 매우 독특한데 드로잉과 페인팅을 동시에 진행하는 그만의 방식 때문인가보다.
[4] 맨해튼 번화가에 있는 '프릭 컬렉션(Fric Collection)' 입구
최고 부호저택이 '프릭 컬렉션'이 되다. *맨해튼 번화가에 있는 '프릭 컬렉션(Fric Collection)' 입구와 돔 방식으로 된 내부(왼쪽)/이번엔 뉴욕에서 땅값이 제일 비싼 5번가에 있는 '프릭 컬렉션(Fric Collection)'를 소개한다. 이곳은 미술관이 아니고 컬렉션이다. 왜 그런가? 이곳은 원래 석탄왕 '헨리 클레이 프릭'의 개인저택이었으나 1913년 프릭의 유언대로 미술관이 되었고 1935년에 처음 공개됐다. 뉴욕의 최고부호저택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면 여길 가보면 된다.안으로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가구와 고색창연한 고서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도자기와 로마시대 조각, 로코코 프랑스식 가구와 잘 다듬어진 정원과 연못 등도 볼 수 있다. 베르사유 궁 축소판 같은 이 개인저택 미술관은 그 나름의 위엄과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소장품으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 '벨리니', 네덜란드 거장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와 격변기의 '고야' 그리고 로코코시대 '부셰', 영국의 '터너'와 '컨스터블' 등이 있다. 사전에 정보가 부족하면 이런 유명작가의 명화도 그냥 놓치고 지나갈 수 있다.
그중 명암대비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잘 묘사한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외부의 빛이 스며드는 창문이 나오는 그림이 많이 그린 베르메르의 '군인과 웃는 소녀'가 유명하다.여길 나오면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센트럴파크'이 나온다. 거기에는 조깅하는 사람과 관광객 등으로 넘친다. 21세기 도시에 관광마차가 다녀 이색적이었다. 어느 가장이 내게 가족촬영을 부탁해 응했더니 이번엔 날 찍어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어 사진 한 장 건졌다.
[5] '쿠퍼-휴이트 디자인미술관(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쿠퍼-휴이트 디자인미술관'은 디지털 놀이터: 관객이 색 배합을 경험해 보도록 한 전시실 장면. 쿠퍼-휴이트 디자인미술관입구 파사드(아래)
다음날은 특별히 '쿠퍼-휴이트 디자인미술관(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을 가봤다. 우선 건물의 파사드가 멋지다. 이 미술관은 현재 25만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단다. 이곳은 미국문화기관 연합체인 '스미스소니언협회'에서 운영하고 있어 매년 내셔널 디자인 어워드(National Design Awards)수상자를 선정 발표한다.전시장으로 들어가면 상단에 디자인 원칙이 적어놓고 그 개념에 맞게 작품을 전시해 놓아 매우 교육적이다. 미술관 측은 입장객에게 '디지털 펜(Pen)'을 주고 각자 좋아하는 디자인을 스캔하고 그걸 재 디자인해 보는 기회(일종의 인공지능 디자인)도 제공해 디지털 놀이터임을 실감나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이 미술관을 막 들어서는 순간, 뜻밖에 서울에서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 세계적 석학 '기 소르망(Guy Sorman)' 박사와 그 부인을 만났다. 내가 사진을 찍겠다니 좋단다. 부인이 패션디자이너라 그런지 부부가 멋쟁이다. 나는 세계적 석학이라는 불리는 사람도 저 나이가 되도록 현장을 저렇게 누비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니 그의 열정이 부러웠다. 누구는 보수적인사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이렇게 지적 호기심이 넘치고, 유머와 통찰력이 넘치는 학자는 드물 것이다. 그는 한국경제를 20년간 연구했는데 이를 위해 먼저 한국문화를 깊이 살폈다고 한 인터뷰를 읽어본 적이 있다. 그래선가 그의 한국문화 이해 수준이 높다. 그는 '달 항아리'를 한국문화의 최고 브랜드로 본다. 또한 한국경제가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 유교 윤리를 바탕으로 한 2) 한국노동자의 헌신성에서 왔다고 본다.
[6] 명문 미술 학교'아트 스튜던트 리그(ASL) 입학 절차가 간소한 '아트 스튜던트 리그': )'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1949년 작 '세탁(Wash)'
이번에는 뉴욕 맨해튼번화가 브로드웨이 웨스트 57가에 위치한 미술학교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 League of New York/ASL)'를 가보자. 여긴 2번 방문했다. 이 학교는 입학 자격 조건이 까다롭지 않고 비전공자도 입학이 가능하다. 한마디로 열린 학교다. 석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오고 고졸생도 온다. 학교 운영을 학생 스스로의 선택에 맞출 정도로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학풍이다. 정규수업도 있지만 원하면 한 과목씩 티켓을 끊어 들을 수도 있다. 과목당 수업료는 7만 원에서 28만 원까지 한다.
그렇다고 이 학교 수준이 낮은가. 절대 아니다. 미국의 기라성 같은 작가 '조지아 오키프, 사이 톰블리, 라우센버그, 잭슨 폴록, 알렉산더 칼더, 마크 로스코' 등이 다 여길 나왔다. 내가 뉴욕에서 알게 된 나오미 작가도 여기 출신, 모교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2번째 방문, 교내갤러리에서 '전쟁과 미술(On the Front Lines)' 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학교 출신인 '라우센버그'의 1949년 작 '세탁(Wash)' 보니 속이 후련해졌다.
<<왜 뉴욕에 가야 하나? 언제 가는 것이 좋은가? 역시 6월이 아닌가>>
이번 30일간 뉴욕 체류 동안 만난 뜻밖의 미국작가들이 나의 미술기행을 풍성하게 해줬다. 뉴욕의 작가들 하나같이 일상을 축제로 바꾸는데 귀재라는 생각이 들었다.한 달 간 내가 알게 된 미국 작가로는 보름간 내게 방을 제공한 1) '딕슨(R. Dickson)부부' 그리고...
2) 날 자신의 작업실에 초대한 젠센(E. Jensen), 3) 날 '부시윅 오픈스튜디오'로 안내한 딕슨의 절친이면서 작가인 '다시(B. Darcy)', 4) 그리고 날 '모마'로 가이드한 나오미 캠벨(N. Campbell) 등 너무나 고마웠다.
휘트니 미술관에서 만난 미국의 품격 있는 컬렉터의 아주 우아한 모습과 미소가 인상적이다. 내가 입은 한복에 찬사를 보냈다. 게다가 5) 전에 한번 전시장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지하철에서 잘 못 내리는 바람에 우연히 재회했다. 그녀는 마침 맨해튼의 한 전시장으로 가는 중이었고 그녀는 나와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당돌한 20대 뉴요커 작가 겸 큐레이터인 클라우디아 보셴(Claudia Beauchesne)도 만났다. 그녀는 플랫 인스티튜드에서 회화 디자인 건축을 전공했단다. 이밖에도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진 많은 뉴요커들게 다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아 또 있다 대지 미술을 하는 스코트랜드 출신의 작가 Patricia Leighton 나중에 2018 강원 국제 비엔날레에서 다시 만나는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대지미술 작가 Patricia Leigton 2015년 미국 작가 로드니 딕슨의 소개로 뉴욕 맨해튼 중심가 있는 그녀의 레지던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2018년 강원 비엔날레에서 다시 만나 감격스러웠다.
<워싱턴 DC에서 백남준 못 만나다> 백남준 흔적을 찾아 하루 '워싱턴DC' 방문: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국립아카이브박물관(The National Archives)'건물 전경
귀국 날이 다가오자 난 다음날 하루 백남준의 '전자초고속도로'와 '엄마'를 보기 위해 워싱턴DC로 떠났다. 하루 전 메일로 버스 예약을 간신히 했으나 관람시간 착오와 늦은 일정으로 '국립아트미술관'에 소장한 백남준 작품은 못 봤다. 나중 알고 보니 내가 제시간에 갔어도 내부공사라 볼 수 없었단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다. 하긴 여기 제대로 보려면 1주일 코스다. 짧은 시간에 워싱턴시내와 '백악관'도 잠시 봤다. 여기서 전자초고속도로와 엄마를 보려갔지만 일정이 바쁘고 미술관 수리중이라 보지 못했다.
[엄마의 포근함 조국에 대한 향수 귀향에 열망 그리고 어린 시절 그 아이들의 목소리 귓가가 울린다]
<엄마>는 한복을 입은 세 소녀들이 즐겁게 뛰노는 영상 모니터 화면 앞에 살구빛의 옛 모시 두루마기를 겹쳐놓은 설치작품이다. 대나무 막대 옷걸이에 팔소매를 벌린 채 걸린 두루마기 천을 통해 영상을 비추면서 ‘엄마’를 외치는 아이들 목소리, 북채 소리 등을 함께 들려주는 얼개다. 두루마기 아랫자락 속 섶에 흰 글씨로 백남준의 서명이 쓰여져 있다. 하쿠타는 “지난해 10월30일 완성한 뒤 고인이 서명한 마지막 작품으로 귀향에 대한 작가의 소망을 천진한 아이들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백악관은 규모가 작아 마음에 들었다. 역시 민주국가구나 싶었다. 백악관 앞엔 미국독립운동의 영웅인 '프랑스 출신의 라파예트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미국이 독립운동을 하다 질 뻔한 위기의 순간에 프랑스에서 건너와 미국을 승리로 이끌어내 유명하다. 바로 그런 흔적이다
그래서 미국 지명에는 그의 이름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미국의 '팔만대장경'인 '국립아카이브박물관'과 '국립자연사박물관' 그리고 백남준 작품이 소장된 '워싱턴 국립스미소니언 미술관' 등 관람은 다음으로 미뤘다. 워싱턴은 미국수도답게 반듯하고 모범적이나 뉴욕보다는 심심하고 허전했다. 또한 워싱턴은 정치 도시라 그런지 뭔가 딱딱한 감을 준다. 그방 다시 뉴욕이 그리워졌다. 이런 정치적 긴장은 없어 그냥 마음이 편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나온 뉴욕 컬럼비아 대학 구내 대학 미술관 있다.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상징물인 '지혜의 여신상(Alma Mater)'과 뒤로 보이는 '로우기념도서관(Low Momoria Library)'
다음날 나는 미술관을 잠시 접고 분위기를 바꿔 1754년에 설립된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했다. 이 대학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오바마 대통령 등 엘리트를 배출한 명문대학이다. 뉴욕에는 이 대학 말고도 중산층이 가는 '뉴욕대학'과 서민층이 가는 '뉴욕시립대학'이 있고 한편 급진적이고 실험적 학풍을 갖춘 '뉴 스쿨' 등도 있다. 컬럼비아 대학은 학부과정이 8400명, 석박사과정이 1만9500명이다. 학비가 사립학교라 비싸다. 학부는 5만 달러, 석박사과정은 6만 달러라니 미국중산층에게도 버거운 돈이다. 맨해튼거주자 5명 중 3명은 대학 출신이고, 그중 4분의 1은 대학원 이상의 학위를 취득했다니 역시 뉴욕이 미국에서도 가장 고학력 도시라 할 만하다.이 대학은 '68시위'로 유명하다. 당시 학생운동은 전 세계적이었다. 처음엔 대학근처 모닝사이드공원에 예정된 체육관 건립이 흑인할렘지역의 커뮤니티를 위축시킨다는 이유로 촉발됐다. 그러다 나중엔 대학이 '미 국방연구소(think tank)'와 협업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대학본부 등을 점령하며 일어난 과격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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