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전자굿] <12강> 가장 세계적, 아니 가장 한국적(?) 백남준
백해영갤러리 백남준과 친구들이 마련한 12번째 백남준 강좌(lecture performance)
옷차림부터 전형적인 한국노총각풍 짧게 깍은 머리말을 할 때 침을 튕기며 눈을 다정하고 정열적이었다. 말솜씨가 독특하고 위트가 넘쳤으나, 서구적 세련과 예리함이 없이 구수한 빈대떡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듯한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 황병기 선생 뉴욕에서 1968년 처음 봤을 인상기
[1] 오늘은 제목이 [백남준&한민족&전자굿] 정도로 하면 어떨까. 부제가 백남준은 가장 세계적, 아니 가장 세기적 아니 가장 한국적 (혹은 아시아적)이다. 우리는 그가 세계적 작가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전자샤먼으로 그는 가장 한반도적이다. 여기서 세기적이란 시대정신과 시사에 밝은 작가(Information Artist)라는 뜻이죠. 신화와 역사와 서사, 그 이상 이제 정보가 석유를 대신하는 시대라고 말하다. [제안]<굿의 예술화 추구한 백남준 아트> 그의 샤머니즘 연구는 한국인이 해야
https://www.youtube.com/watch?v=BTp7Wr2FxzI&t=8s
[2] 아래는 미술평론가 '최광진'의 글. <한국인으로서 20세기에 가장 뚜렷한 족적은 남긴 예술가는백남준이다. 그의 국제적 성공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다. 그의 예술적 뿌리는 어린 시절 체험한 한국의 무속문화(샤머니즘)에서 비롯.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을 소통시키는 무당처럼 그는 방울(거울) 대신 비디오(TV)를 이용하여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소통시키려고 했다>
[3] <긋으로 보는 백남준의 전자 아트 읽기> 박정진(문화 인류학자). 미국과 유럽 미술사가들이 백남준 연구에 한계점은 그들이 동양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지 않듯 백남준의 핵심사상이 굿 미디어론을 이해하기 힘들기에. 물론 서양 인류학으로 접근하기 할 수 있 수 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백남준 연구는 한국인이 유리. 백남준의 전자 굿 이해 없이 백남준 이해는 불가능. 그런 면에서 박정진의 백남준 연구는 돋보인다. "서구 중심주의 벗어나 전 세계 문명사를 치우침 없이 조명"라는 평가를 받다.
백남준 예술계보학은 동서에 다 통했다
사진 1990년 7월에 보이스를 추모 진혼굿 퍼포먼스를 준비 한복 입고 피아노 앞 백남준 사진
<백남준 유럽에서도 통하고 아시아에서도 통하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통하는 작가>
[1] [유럽문명사 변천과정] 처음에는 탈레스(Thales) 철학자 우주만물(그리스 물[things] 철학)-전능한 신(중세)-합리와 계몽(데카르트, 볼테르)-인간의 존엄과 인간소외와 계급 없는 인간해방-삶의 주인으로 살기(칸트, 맑스, 니체)-언어와 소통과 일상(구조주의, 실존주의)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 하버마스의 생활세계[Lebenswelt 약자의 힘 등장])-미디어(복제, W.벤야민, 맥루언, 백남준)
[2] [동양문명사 변천과정] 춘추전국시대 하도 사람을 많이 죽이고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한 후 나온 대안이 바로 공자의 예법(인의예지)과 그리고 노자의 도(무위자연), 그리고 동양의 전반적인 인문학 정신이 직관적이고 추상적 시의 정신(L'esprit Poétique) 그리고 결국 우주와 인간을 춤추게 하는 생명력의 근간인 신명&인류의 영원한 종교이자 사상이자 철학인 샤머니즘 그리고 디지털 노마드 정신(백남준) 등이 아닌가.[3] 백남준 동서양에 다 통한다. 동서양을 넘어 세계적이고 시대정신을 꿰뚫은 안목을 가져 세기적이지만 그보다 더 한국적 작가였다 그는 삼국유사를 자주 인용. [천문] 가장 한국적 나는 항상 별과 함께 태어나다(에고=별)<한국인은 항상 천문학과 함께>. (시작할 때 시(始)자에 여자 변이 있다 왜 우주생성) 1984년
[백남준 일본인 부인 시게코, 한국을 주제로 한 작품 남기다]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한국의 무덤이다. 시야가 탁 뜨이고 지상의 모든 우주 기운을 품은 양지 바른 곳에 작은 봉우리 같은, 고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한국의 무덤이다. 백남준의 부인 시게코 1984년 한국을 처음 방문해 가장 반한 게 바로 한국무덤이었다. 그 인상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래 작품을 남겼다.
[5] 가장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과 그의 부인 시게코 작품 '한국 무덤' 남편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 1993년 작 "한국의 산하는 나의 마음을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시게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게코 작품. 전자 아트로 그린 한국의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무덤 이미지. 한국의 무덤 정말 아름답다 황홀하다 가장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무덤의 곡선이 완면하고 너무나 부드럽다는 느낌,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다. 각진 곳이 없다.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모습 그 자체이다. 고조된 물아일체의 미학, 그 절정을 보여준다.
가장 한국적 백남준 그러나 인맥은 세계적
1992년 백남준 회갑, 경주에 가서 찍은 기념사진, 이 사진은 이용우 선생이 가지고 있다. 백남준과 관련된 사람들 100여명 백남준 보편적 인간주의 때문인가! 아니면 한국적이기 때문인가! 정보시대 정보수집능력이 탁월했다. 휴먼 네트워킹도 마찬가지다
[1] 1992년 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갑 회고전이 준비되고 있었고 이 전시 부대행사로 '현대미술 세기의 전환 20~21세기 국제 심포지엄'이 1992년 7월 30에서 8월 1일까지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백남준 연구가인 장 폴 파르지에 교수 외 한국 측에서는 이용우·유홍준·서성록·송미숙·윤범모·정영목·김홍남·김홍희 등이 참석했다. 그때 경주에 가서 찍은 기념 사진 당시 한참 한국이 세계화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당대 최고의 미술관계자들 다 경주로 모이게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은 세계 미술계에서 가볍게 볼 사람은 없다. 김홍희, 이용우는 물론이고 핸하르트(미국국립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등 저명인사 수두록. 김승덕 디렉터, 김창실 대표, 장폴 파르지에(파리8대학교수 백남준연구가), 에디트 데커(백남준 독일박사),
[2] 그 밖에 백남준과 인연자 관련자: 박영덕 마르셀 뒤샹,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워홀, 바스키아, 사르르트, 샬럿 무어먼, 머스 커닝엄, 라운센버그, 맥루언, 보들레르, 쇤베르크, 오노 요코, 아베, 마치우나스, 슈톡하우젠, 바우어마이스터, 사카모토 류이치, 존 레논, 위노, 긴스버그, 노만 밸러드, 앨런 카프로, 프로이트, 맑스, 아도르노, 비올라, 장자, 노자, 선불교 선사, 레비 스트로스, 괴츠 칼 오토, 니체, 헤겔, 피에르 레스타니, 바르톡, 베르그송, 벨헤름 장 피에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원효, 서경덕, 다산 정약용, 도올 김용옥, 예를링 롤프, 이건우, 이우환, 장 클로드 크리스토, 포르트너, 플럭서스와 그의 사람들, 하긴스 딕, 시게코, 보스텔, 만프레트 레베, 데이빗 보위, 스즈끼 다이세쓰 1870-1966 히데오 우치다, 요헨 시유어라커, 폴 게린, 노만 밸러드, 마크 파스팔 신시내티대 교수, 라파엘레 작가, 토머스 크렌스(Thomas Krens), 존 핸하르트,김홍희, 자니스 거이(Janice Guy) 이유진 큐레이터, 키플링, 1995년 백남준과 미국의 신시아 굿맨(오른쪽) 전 IBM미술관 관장 계속이어서 김승덕 디렉터, 김창실 대표, 장폴 파르지에(파리8대학교수 백남준연구가), 에디트 데커(백남준연구로 독일박사학위), 최재은, 헤어조겐라트(Wulf Herzogenrath 백남준 연구가), 브레멘미술관 관장 베를린 국립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뉴욕 모마 큐레이터), 클라우스 부시만(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창시자), 송미숙(미술평론가), 와타리(개념미술의 대가), 김흥남, 어빙 샌들러(뉴욕주립대학교수), 보니토 올리바(트랜스아방가르드 평론가 베니스비엔날레 총책임자), 아키야마. 자루, 허누타, 한스 베르너 슈미트, 글룩, 루시 샌들러, 리트, 하트니, 마뇨 등등
우주 저편에서 내게 오는 태초의 전자 웨이브 WAVE 파동
어제 NMARA(뉴미디어아트연구회) 10주년 컨퍼런스 <우리는 열린 회로 안에 있다: 백남준과 뉴미디어> 결론: 백남준 이름이 학술대회도 놀이터 재미있다 http://www.ai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848
[1] NMARA(뉴미디어아트연구회) 10주년 컨퍼런스 <우리는 열린 회로 안에 있다: 백남준과 뉴미디어> 대표 김경미 서울대 뉴욕대)ZOOM으로 <간단 소개> 한마디로 백남준은 재미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말이 되고 다 통하는 콘퍼런스 놀이터. 왜 백남준인가? 한국의 미디어 작가 이론가들 총동원
[2] 컨포런스 <50년 전 백남준 탁월한 미디어 이론가로서 미디어 불평등 해소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아래의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디어 상호작용 속 편향 배제 왜곡이 너무 쉽게 일어날 수 있음을 꼬집고 있다. 백남준 1970년 공영방송이 오히려 반소통(dis-communication)으로 가는 점에 경고하다. 유럽공동시장처럼 공영방송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비디오 공동시장이 되어야 한다. 공영방송은 무엇보다 소통의 격차를 줄이고 소통의 원활함을 촉진해야 한다. 비디오 공동시장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세계평화(전쟁반대)와 지구생존(생태보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3] 이원곤 Won Kon Yi 이 연구는 음극선관(陰極線管, CRT)와 50년 대에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를 이용한 B. 라포스키(B.F.Laposky)의 ‘전자추상‘(Electronic Abstractions). TV수상기를 최초로 화랑에 전시한 백남준의 «음악의 전시»(1963)로 이어지는 흐름과 그 미학적 관심에 대하여 조사하였다. 지금까지 백남준과 B. 라포스키가 비교되거나 같은 문맥에서 다루어진 연구사례는 없으나, 1963년의 <음악의 전시에 출품된 13대의 TV수상기 중에서 3대를 사용해서 시도했다고
[4] 강수미 Su Mi Kang Freedom in the Nam June Paik’s Art: When He cut off John Cage’s Tie 발표자 | “여성용 카니발이 있었는데 그날은 여자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남성의 넥타이를 자를 수 있었다.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상징으로서 말이다. 백남준은 바로 이것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은 단순히 넥타이를 자른 게 아니라 쾰른의 민속적 풍습도 같이 연계시켜서 넥타이를 자른 것"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5] 유라시아 강조하다. 유럽과 아시아 연결하려고 했고 보이스, 더 나아가서 미주와 아시아를 연결하려고 했다. 샬럿과 존 케이지 와 했다. 21세기 실크로드는 전자 초고속도로로부터 The Electronic Superhighway as the 21st century Silk Road 발표자 | 최태만 Tae Man Choi 국민대 교수
[6] 1) 김금미 Art&Archive 대표(최근 홍대에서 백남준 논문 박사), 영문학도 답게 시적 해석: ‘인연이 빚어내는 모레의 빛: 백남준의 소통’이란 주제를 제시한다. 2)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과학사·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는 ‘사이버네틱스와 예술’에 대한 발표를 맡는다.인 3) 이영준(기계비평가 겸 항해자) 계원예술대 교수도 발제자로 참석해 ‘백남준의 TV를 위한 선에 대한 해석’을 발표한다. 4) 강미정 서울대학교 강사는 ‘다음 세기 시각예술에서 누가 스콧 조플린이 될까? - 5) 김경미 대표 백남준과 코로나 대유행 시대의 예술’을 주제로 오프닝 발표 이후 첫 발제를 담당한다. 6) 최태만(국민대 교수)가 ‘21세기 실크로드는 전자초고속도로로부터’를, 7) 곽영빈(연세대 교수)가 ‘인류학도 아니고 엔트로피학도 아닌: 백남준의 기계 생태학을 향하여’를, 8) 정연심 전방위 맹활약 하는 홍익대 교수는 ‘백남준의 포스트비디오, 포스트프로덕션’을 주제로 발제한다. http://www.ai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4848
[7] 질의자: 이현진 연세대 교수, 김현주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교수, 지하루 OCAD대 교수, 이준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예승 서울대 강사, 이상민 광운대 강사, 강은수 CMU 교수, 김영희 홍익대 교수, 손미미 김치앤칩스 미디어 아티스트, 강지영 단국대 교수가 참여한다. 김대표는 “사이버네틱스와 AI의 차이에 대해서도 논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사운드 생물체 아트(?) 백남준 1984년 <유전생물학>를 예견했는데 그런 것과 유사한 개념이네요.
[백남준과 나] 1949년 백남준과 1959년 나
[1]1949년과 1959년의 차이 백남준 비행기를 처음 탄 것은 17살, 1949년 11월 오리엔트 에어라인 소속의 DC 4. 백남준 그때 처음 빨간 립스틱을 바른 금발의 미녀를 봤다고 말한다. 나는 10년 후 1959년 처음 비행기를 타보다.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데 당시 한국의 남해안 지역은 <사라호(1959년 9월)> 태풍 피해로, 대규모 침수지역이 되어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 그래서 처음 김해공항에서 아버지와 함께 비행기를 타다.
[1] 우주 저편에서 내게 오는 태초의 전자 웨이브 WAVE 파동 감지되다
[2] 백남준 작품은 20세기 거장의 모든 작품과 통한다. 이 작품(필름을 위한 젠)
르네 마그리트와 상통하는군요 하나는 그림자 회화방식(dépaysement) 또 하나는 전자(영상)회화방식이다
[3] 백남준의 비디오는 신에 도전하는 한 장치였다. 백남준은 인간이 어떻게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고민하다. "그렇기에 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기계인 비디오를 통해 시간을 끌어당기고 압축하고 잘게 절단함으로써 시간에 리듬감을 주고 뒤엎어가면서 시간의 법칙을 깨야 한다"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백남준)
[4] 백남준 용어: '랜덤 엑세스(무당)', 서양 이분법을 깨는 백남준의 비밀병기(?)-시공간을 초월하는 유비쿼터스-무작위 접속을 뜻,인생에서 만나는 우연적 인연(카르마) 무질서의 미학: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난지 예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설명하기 힘들 것으로 백남준 말대로 5차원 사기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사실 오작동하는 디지털적인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오류에서 언제나 새로운 창조가 나온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일종의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교란이다.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선보인 첫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램던 액세스라는 개념은 사실 그 해석이 다양한다. 백남준, 해프닝, 사건 터지지 않으면 비예술이 된다.
둘: 백남준 성(Sexuality) 미학을 첨단의 현대예술(액션뮤직)로 승화
[서문 1]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서문 2]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성을 음악에 도입하려 했던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어 존 케이지도 자신의 음악에 도입하지 못한 요소였지. 그는 가능하면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지. 우리의 이러한 의도는 케이지 개념을 확장시켰다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가 성취한 것에 대해 정통 존 케이지 파들 질투를 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 -1968년 6월 14일 백남준이 무어먼에게 보낸 편지 글 중에서 발췌. 다시 말해 1967년 액션 음악의 표현 영역 확장 미국미술 기여 앤디 워홀도 못하고 존 케이지도 못했다.
[1]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백과 무머먼 액션 뮤지 앙상블 왕성 전성기 1) 지난번에 뺀 것 백남준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육체(corps)'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체(chair)'를 표현했다. 그것의 차이는 뭔가? 육체는 상업적 대상 다른 사람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신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체>를 말한다. 백남준은 1967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스캔들 이후 큰 홍역을 치르고 그것이 수습된 후에 무어맨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다.
"또 음악에 섹스를 도입해 샬럿 무어먼과 행위음악을 시도했고,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전자음악을 전자비전(영상)으로 확장시키면서 장르개념을 넘어섰죠. 그렇게 해서 탈장르적 비디오를 창안했어요. 미술이라기보다 확장될 개념의 미술로 자연스럽게 옮겨진 거죠."
[2] <백남준은 남성과 여성을 굳이 구별하지 않고 그 경계를 없애다 그러다 보니 불가능한 성의 아트를 추구하다. 그럼 면에서 매우 선각적 페미니즘적 안목> 백남준의 ‘자유’ 그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을 때
[3] 정치혁명과 성 혁명 맞물려 있다. 68혁명 실패 그러나 여성의 위상이 부각되다. 여성이 성적으로 행복해야 인류가 행복하다. 인간이 성적으로 행복하지 않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는 소리. 백남준과 통한다(?). 여성이 성적으로 행복해야 인류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백남준(?) 백남준이 성 해방을 강조한 건 자본 비판과 관련이 있다. 진정한 성적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임을 선언하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성 관계는 없다=성은 죽었다(Il n'y a pas de rapports sexuels)”라고 선언하다. 자본은 인간의 최고 행복 중 으뜸인 성의 환희를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성이 자본에 의해 소비상품으로 팔려나가고 있음을 꼬집다. 유흥업만 돈을 벌다. 모든 정치혁명 뒤에는 성 혁명이다. 정치 억압만큼 성적 억압은 비례(?).
[4] 신자유주의 문제 중 하나는 성적 행복지수가 높지 않다. 스트레스와 과로와 소외 심하다. 몇 주 전 캐나다 <라 프레스>지. 미국의 동유럽 문화를 연구하는 여성 인류학자가 발표한 최근 논문에 의하면, 동구 여성이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보다 과거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성적으로 더 행복했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평] 치열한 경쟁과 스트레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 남성에게 성적으로 행복하기란 쉽지 않다. 역설적으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흥업이 발달할 뿐. 윤리문제가 아니라 생리문제, 행복의 문제다
[5] 이런 비숫한 주제로 시를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199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의 일부는 이렇다. "수천 년 전에 생의 도둑<거대자본>에게 빼앗겼던 우리들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듯이 둘을 옷을 벗고 키스했다. 뒤엉킨 두 알몸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하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다. 둘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성이 자본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선사시대로 돌아가자는 소리로 들린다. 성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명시다.
[6] 결론: 정음 정양(음양조화) 철학은 쉬운 것, 우주와 남녀의 음양 원리를 아는 게 철학이다. 철학을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 음양 조화가 중요한 게 여기서 나온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잘 합쳐지면, 제로점(완벽한 세상)이 나온다. 여성이 성적으로 더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염원 담겨 있다 철학은 쉬운 것, 'TV정원' 자연(음) 반, 문명(양) 반 조화, 백남준 생태주의 철학 반영(?).
미술사의 일면 형과 색과 빛 이제는 전자빛
<지난 시간 리뷰> [백남준&색채론(Eros)]다음 백남준은 색깔을 색으로 보다 비디오에서 백남준 전문가 장 폴 파르지에 촬영 색이 왜 중요한지 설명하다 www.youtube.com/watch?v=2pYAUppfiXk
원문을 보면 (De la couleur dans la video vient de ce que la couleur est une fonction primaire du sexe 컬러는 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함수(기능)이다 비디오 아트에도 해당된다) 또 백남준의 맥루한, 맑스, 존 케이지, 마치우나스, 앤디 워홀, 슈톡하우젠, 스탕달, 발레리, 론 자아(에고)론, 돈에 대한 철학 등이 언급하면서 너스레를 떨다. [결론] 백남준은 소유적 미술을 비소유적 미술로 바뀌려고 했다. 무소유적인 음악적 미술로 바뀌려고 했다. 실제로 불가능할 수 있지만 앞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1] 동양의 색에는 색동이 있고 오방색, 동양은 색을 색으로도 보고 섹스로도 본다. 사람의 얼굴 색채를 보죠. 원문을 보면 (De la couleur dans la video vient de ce que la couleur est une fonction primaire du sexe) 컬러는 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함수. 또 백남준의 맥루한, 맑스, 존 케이지, 마치우나스, 앤디 워홀, 슈톡하우젠, 스탕달, 발레리, 무아(에고)론, 돈 철학 등 언급 [결론] 백남준은 소유적 미술을 비소유적 미술로 바뀌려고 했다. 무소유적인 음악적 미술로 바뀌려고 했다. 불가능보이지만 가능성있다.
[2] 우선 백남준에게 색깔은 시간(역할)을 한다고 봤다. 모든 사물이 봄에는 그린과 푸른색이 되고, 여름에는 빨간색이 되고, 가을에는 회색이나 누런색이 되고 겨울은 흑백이 된다. 이렇듯 백남준은 색채와 시간(계절)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에서 색깔은 시간을 의미한다(color=time) 그리고 동양사상을 설명하면서 색을 성으로 보다. 사람을 볼 때 색채가 중요하다. 안색을 보면 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과 관련된 이야기>
[1] (1984년 6월 2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백남준 35년만에 귀국했을 때 조선일보 정중헌 기자와 백남준 인터뷰하다. 내가 80년대 교사 시절 이 신문을 스크랩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신문조각이 너덜너덜하다. 여기서 백남준 앞으로는 <유전자 예술>이 나올 것이라 예언했다. 난 깜짝 놀랐다. 당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인공지능예술>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2] 무엇보다 무중력 예술인 춤(시)과 노래를 경쟁력을 가질 것이다. -백남준. 철학의 종합=시이고, 그리고 예술의 종합=음악이다. 김홍희 말 인용. 우리의 맥박, 호흡이 다 음악의 소스가 되는 비트음악이죠. 음악적 음악이 아니라 소리의 음악, 그러다 보니 신체의 리듬부터 자동소리, 기침소리 같은 일상의 소리를 다 음악의 범주에 포함시킨 거죠. 미리 작곡하여 연주하는 게 아니라 소리에 도전하다 작곡을 하는 방식, 존 케이지는 주역에 나오는 우연성, 비결정성 요소를 도입해 작곡을 했는데, 백남준은 그런 사상에 경도됐죠.
[3] 말하자면 동양정신에 빠진 서구인 철학자에게 서양문화에 젖어있는 한국인이 반대로 큰 영향을 받은 거예요." 침묵도 소음도 포함되는 확장된 음악인가요? "아무리 정적이라도 들리지 않는 소리의 전파가 있고, 아무리 침묵이라도 나의 호흡소리 있는 거잖아요. 침묵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침묵음악이 된 거죠. 이런 음악철학은 결국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거죠. 백남준은 더 나아가 음악에 행위를 집어넣었어요. 이른바 행위음악인데 그 행위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게 특징이에요.
[5] <인류 최초의 불의 발명과 20세기 비디오아트의 발명은 동등한 가치다> 백남준 'TV 촛불' 이 작품에서 촛불은 인류를 구원하는 빛의 잉태를 상징하는 매개체이다. 여기서 구석기 시대의 불의 발견과 같은 혁명이다. 그런데 백남준의 촛불은 그냥 촛불이 아니고 전자 촛불이다.
[6] 백남준은 1981년에 쓴 「말에서 크리스토까지」에서 ‘전화가 발명되기 전까지 말이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기 때문에 비디오연구는 타는 말 연구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C 1000년경, 인간이 말을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운송혁명이 일어나고 속도감각 또한 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6] 1974년 백남준은 록펠러재단의 예지원 프로그램에 「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21세기는 불과 26년밖에 안 남았다(Media Planning for the Post Industrial Society: The 21st Century is now only 26 years away)」를 제출했다.
『대종교요감』에 의하면, “천부경은 한배검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천하만민을 교화하는 데 ‘조화의 원리’, 즉 우주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으로, 1에서 10까지의 수리(數理)로 천(天)·지(地)·인(人) 삼극(三極)의 생(生)·장(長)·노(老)·병(病)·몰(歿)의 무한한 반복의 경위를 설파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 구성내용을 보면 一에서 三으로 오고 三에서 一로 가는 ‘一·三, 三·一’의 원리이다.
[7] <백남준과 천부경> [그렇다가 아니다. 아니다가 그렇다. 혹은 규정된 세계와 규정되지 않는 세계의 공존을 말한다] <천부경>.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경전. 그러나 우리는 천부경에 대해 전혀 모른다. 천부경 1장 1절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 하나가 시작하나 시작이 아니다. 천지가 창조되었으나 창조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이중성, 역설,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리다. 이것은 성서에 태초에 천지가 창조했다. 언어가 있었다. 그런 분위기다. 인생을 겪어보니 모든 것이 다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8] 백남준은 타계하기 1년 전에도 뉴욕 자택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왜? 그때 적어 놓은 "백남준은 (우둔한) 바보"라는 글귀가 보인다. 천재만이 자신을 '바보'라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시대는 머리와 마음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손과 발만을 사용하는 바보가 되라는 소리다. 그것이 21세기를 천재로 사는 법인가 백남준이 퍼포먼스를 하는 이유는 죽는 날까지 관념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의 촉감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 가장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비교(최광진, 파르지에)
빙어: 나의 몸을 비워, 타인의 영혼 또는 영(악령)이 들어가는 현상
[1] [백남준] 요셉 보이스, 여러 번 비교 이번에는 앤디 워홀의 차이 왜 백남준이 요셉 보이스보다 한수 위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 다 가장 정치적 예술가다. 정치의 예술화(민중미술)가 아니고 예술을 정치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보이스는 독일 녹색당 창시자로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하면서 정치적 예술가였다면, 백남준은 전혀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정치적 예술가였다. 그런 면에서 요셉 보이스보다 한 수 위다. 앤디 워홀은 보이스보다 한 수 낮은 정치 예술가 왜냐하면 낫과 망치를 노골적으로 그렸기에.
둘, 가장 한국적인 백남준과 가장 프랑스적인 '샤를 보들레르' 통하다
[1] 백남준의 또 다른 스승은 보들레르 발터 벤야민이 그랬듯 말이다. 시대를 꿰뚫는 '견자(見者 visionary)': 보들레르와 백남준 "어둠인지 빛인지/광막한 어스름의 깊은 합일 속에/긴 메아리 멀리서 잦아들듯/색채와 소리와 향기가 서로 상응하네" -보들레르의 대표시 <상응> 중에서 백남준의 글 암호코드 중 위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며 그가 보여준 비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P185> 백남준은 그의 전자아트에서 유럽성당에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보들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1-1] 중세건축에서 스며드는 빛이 연출하는 짜릿한 전자 황홀경과 '색깔·소리·향기'의 언어에 '시각·청각·촉각'을 결합한 보들레르 시에서 융합의 미를 발견한 것인가. 다만 백남준은 그런 요소를 전자방식으로 바꿨다. 백남준과 보들레르의 같은 점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관점(비전)'에 있다. 보들레르의 제자 랭보는 이런 예술가를 '견자(見者 visionary)'라 했다. 반면 두 사람의 다른 점은 보들레르가 반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상징적 '시적 비전'을 썼다면, 백남준은 경계를 허무는 반위계적이고 비선형적인 사이버화된 '전자 비전(Television)'을 썼다는 점이다. [백남준의 낙관론_내일 아름다울 것이다]
셋, 백남준과 뒤샹 비교: 둘 다 여자 되려고 해, 그 차이?
[1] 그의 마지막 작품 '에탕 도네(Étant donnés)'는 학생들에게는 19금이다 <이 미스테리한 미완성 작품 에탕 도네를 완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관객들> 뒤샹은 서양미술의 끝판을 가다. 이를 넘어설 예술가가 필요했다 [2] 뒤샹은 남자이지만 여자라 되려고 할 정도로 여장을 하면서까지 여성적인 것을 동경하고 있었지만, 이 유작을 보면 그럼에도 상당히 남성적이다. 뒤샹, 백남준 다 여자 되려 했는데 그 차이는 뭔가? 백남준과 샬럿 무어만 퍼포먼스 장면 그런 면에서 뒤샹이 제3의 성을 이야기했다면 백남준은 제 4의 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뒤샹은 남성으로 여성이 되려고 했고 백남준은 아예 처음부터 여성으로서의 남성이라는 전제 하에 여성이 되려고 한 것이다.
[2] 뒤샹은 이렇게 자신을 여성적 페르소나로 변장시키는 것을 즐겼다. 동시에 그는 모나리자를 '남성적 페르소나'로 바꿔 그리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성 역할을 넘어서는 '제3의 성'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최근 독일헌법재판소에서는 이런 제3의 성을 합법화
[2] <결론> 뒤샹과 백남준 두 작가는 여성적인 것에 관심이 높다는 면에서는 둘은 같다. 뒤샹은 여장으로 여성적인 것을 동경했지만 그럼에도 '에탕돈네'를 보면 여전히 남성적 시선이다. 그러나 여성성의 상징인 달 작품을 많이 했던 백남준은 유작도 '엄마(2005)'다. 백남준은 처음부터 '여성주의'다. 뒤샹이 '제3의 성'을 창안, 백남준은 '제4의 성'을 상상<가설>
[3] 그러나 백남준 유작이 '엄마(사진 아래 있음)'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아기가 되어 엄마와 대화를 하는 드로잉을 그리고 있다. 달의 예술가인 백남준은 처음부터 여성주의적이다. [4] [부처 백남준] 수월관음보살도' 비단에 색, 103.5×53cm, 호암미술관(오른쪽) '수월관음보살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색 114.5×55.6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수월관음보살(水月觀音菩薩)'백남준, '수월관음보살' '수'는 물이다 여성이다. '월'은 달이다 여성이다. '관음'은 역시 여성이다' 이런 여성적 요소가 다 합쳐진 '수월관음보살'은 제4의 성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 뒤샹은 제3의 성이고, 백남준은 제4의 성이다.
넷,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과 발터 벤야민(앤디 워홀) 그리고 아도르노
[1] <백남준과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차이> 20세기 초 대중문화를 둘러싼 벤야민(W.Benjamin)과 아도르노(T. Adorno)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과연 대중문화가 가능하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두 사람은 정반대의 전망을 내놓았다. [아도르노] '대중'과 '문화'는 전혀 호환될 수 없는 개념이라면서 대중문화의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전망. 문화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의지의 산물인데, 대중들에게 주어지는 대중문화란 삼키기 좋게 적당한 규격으로, 적당히 달달하고, 고소한 맛으로 가공돼 음식을 입에 넣고 씹을 활동(저작)도 필요 없이 목구멍으로 넘기도록 돼 있는 가공물이라는 것. 결국 대중들 앞에 내놓은 문화라는 것은 거위의 목 안으로 부어 넣는 사료와 같은 것이라는 비판인 셈이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를 단지 '문화산업'으로만 보다.
[벤야민] 이에 반해 대중의 힘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면서 당시의 상황과 달리 대중은 언젠가 문화를 능동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라고 낙관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도 소수자들의 전유물이던 시대가 있었지만, 예술품이 대규모로 복제되고 공장에서 양산되는 시대에 예술과 문화는 새로운 형태로 본질적인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수 귀족의 요청으로 그들의 살롱에서 연주되는 형태로나 가능했던 음악이 지금은 무한 복제되면서 누구나,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렇다고 오늘날 예술이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권력이 과거에는 소수자의 전유물이었지만 다수의 국민이 공유할 수 있었듯이 문화 역시 이러한 대중들의 주체적 공유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벤야민은 꿰뚫다.
다섯, 한국적 작가 백남준과 일본적 패션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1] 두 사람은 많이 닮았다. 선형보다 비선형 패션이다. 백남준 닮았다. 백남준의 함수(fonction); 입력(input)과 출력(output) 중간에 있다. AI는 함수다. 밥이 입력하면 똥이 출력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몸 안에 오장육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함수이고 AI다. Data=입력(input)+출력(output), 가장 간단한 함수(곱하기와 더하기=change) y(출력)=ax(입력)+b. 함수란 다시 말해 어떤 함(box)에 뭘 집어넣으면 그 속에서 변화를 준다.
[2] 곱하기와 더하기는 선형(Linear)이고, 빼기(무소유·무음악)와 나누기(공유·네트워킹·소통)는 비선형(non-linear)이다. 백남준 함수: 비선형(?). 랜덤엑세스 아래 비선형 이미지 랜덤 액세스는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무한제곱: 백남준의 시간론> 작품 비선형 같은데 사실 나는 거의 모른다.
[3]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 정신이 있다. 다시 말해 백남준에게는 미술이 다 하면 음악이 되고, 음악이 다 하면 미술이 된다. 백남준에게 미술은 무엇보다 음악이다. 백남준의 첫 전시가 음악의 전시인 이유다.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이 칸딘스키와 쇤베르크이다. 그런데 칸딘스키와 쇤베르크는 절친이었다. "궁즉통 극즉반(窮則通 極則反): 궁하면 통하고, 극에 달하면 반전시킨다"이라 -한국에 17년 근무한 영국기자가 본 한국인 최고 지혜다.
여섯, 가장 한국적 작가 백남준과 한국의 김기덕 감독
<백남준과 고 김기덕 감독은 어떤 인연이 있었나?>: "초딩 출신인 김기덕 감독, 백남준에 관한 기사를 읽은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1990년 파리로 떠나 미술 공부를 했고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김 감독은 1960년 12월 20일 경북 봉화에서 태어난 가난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1950-1953) 전쟁 중 부상을 당했고 성격이 난폭했다고. 어머니는 거의 장님. 김 감독은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 일 했다. 5년 동안 해병대에서 복무, 복음주의 신학교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센터에서 일하다 -르몽드. 김기덕 은 학력이 초딩 졸업이 다다. 한국의 백남준에 관한 기사를 읽은 후 백남준 작품을 보고 크게 영감을 받아 1990년 프랑스로 무조건 그림 공부를 하러 떠나다(Il se lance en parallèle dans la peinture et, après la lecture d’un article sur le pionnier de l’art vidéo, le Sud-Coréen Nam June Paik, part en 1990 pour Paris où il étudie les beaux-arts. -Le Monde) 두 천재는 거의 동급. 한 사람은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또 한 사람은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물론 그 급이 다르나, 상으로만 보면 비슷하다.
일곱, 한국적 예술가 백남준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술혁명
*백남준 혁명 이미지(미술, SIGHT)를 사운드(음악, SOUND)로 패러다임 전환
[1] 백남준 첫 전시가 음악의 전시(EXPOSITION OF MUSIC)다. 예술의 남성적인 예술을 여성적 예술로 바꾸다. 무엇보다 미술마저도 음악으로 바꾸다. 음악을 통해서 물감회화(추상)를 한 사람 칸딘스키 음악을 통해 전자 회화를 비디오아트 바우하우스 유희정신 춤에서 시작 춤으로 끝난다. 시각예술의 위상 차이를 거부하다./양혜규 뉴모마에서 전시 핸들 손잡이 바우하우스의 유희정신의 재해석인가
[2] 비디오아트의 발명가, 텔레비전을 기반으로 한 전자 그림, 이미지와 사운드를 해킹하고 조롱하면서(일종의 해커로 보다) 다소 무질서해 보이는 다다(Dada)로부터 강하게 영감을 받은 1990년대 빌 클린턴으로부터 초대받고 정식 만찬에서 바지를 내린 유일한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였다,
[1] 백남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술관 재미
[참고] 최광진 미술평론가 한국미의 4요소 1) 신명 Super Aesthetic Energy for overcome the hardship in daily life and animate feast-causing emotion 2) 해학 Humor and wit for ridicule and satirize absurd society and corrupt political power. 3) 말과 글과 작품이 단순·소박 Natural Simplicity 4) 평온(평화)과 공존의 철학 Silent Resonance, and Serenity in mind for realize the Philosophy of coexistence
하나, 가장 한국적 예술가 백남준, 가장 한국적 이경희 여사
[1] <백남준이 애국하는 방식은 자신이 세계미술계에서 더 유명해지는 것> 그러면서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경우에 있어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은 투사나 열사가 되는 게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더욱 유명해지는 것'이라고" 말하다
[2] 백남준은 자신을 '어릿광대'로 비유하며 자기의 예술은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지구촌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84년에 <굿모닝 미스터오웰> 86년에 <바이, 바이 키플링> 88년에 <손에, 손잡고> 같은 위성아트 연작을 남긴 것 같아요. <손에, 손잡고>는 구소련과 중국이 참가해서 아주 큰 이슈. 구소련에서는 사전검열 없이 생방송되어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고요. 세계적으로 히트하려면 사람들이 얼떨떨해 할 정도로 재미있게 대중예술 위주로 편성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백남준은 '위성아트'로, 난 '꼭두극'으로 한국 알리다- 백남준은 '작곡가'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경희 여사는 '약학도'에서 '꼭두극 연출가'로 변신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두 분 비슷한 점이 많네요?"글쎄요. 그리고 보니 그렇네요. 나도
[3] 백남준의 한국화 <이경희 설명> 왜 '굿의 예술화', '민속학' 등을 중시했는데 생각하시는지요?
"백남준의 작품에는 한국에 대한 전통, 민속놀이 같은 것이 많이 소재로 돼 있습니다. 어려서 '큰대문집'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굿을 했는데 그때 본 무당에 강한 인상이 어른이 돼 비디오 아트에도 많은 소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의 무당이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애꾸무당'이었다며 애꾸무당의 얼굴이 TV프레임 속에 있는 스케치를 그 자리에서 그려 주는 순발력을 보고 함께 있던 분들도 놀랬어요.
둘, 백남준과 이경희 여사 사실상 첫사랑
백남준과 이경희 여사에게 '춘(春)' 느끼다.
[1] 백남준과 이경희 여사와 '춘(春)' 백남준 인간의 행복 관심 높다. 성 문제 예민할 수밖에 그런데 백남준이 1968년 국내 <공간>(8월호) 잡지에 '뉴욕 단상'이란 제목으로 투고를 했는데 거기에 내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 중에 숨바꼭질하다가 내가 이마를 다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그 어린 나이에 여자 친구에게서 '춘(春)'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느꼈다는 말인데 얼마나 성숙한 일입니까. 모차르트가 그랬듯 천재는 일찍 성이 발달한다고 하는데 백남준도 그랬나 봅니다.“
[2] 백남준은 첫 전시 개념 중에 유치원 시절을 '유토피아'로 봤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유치원은 일종의 유토피아였을 것입니다. 1963년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의 포스터에 보면 16개 주제가 네모 칸에 적혀있는데 그 첫 주제가 바로 16개 개념 중 '어른을 위한 유치원(Kindergarten der Alten)' 나온다.
[3] 이경희 여사는 백남준과 명동성당 건너편에 있었던 '애국유치원' 동창이다. 당시 한국에 캐딜락이 두 대밖에 없던 시절 백남준 집에 그 차가 한 대 있었는데 이 여사는 그 차를 타고 유치원에 같이 다녔다고 한다. 두 집안의 어른들끼리는 정혼을 맺어 이 여사가 백남준 집에 놀러 가면 "남준이 색시 왔네"라고 말했단다.
[4] "어려서 남준네 가면 '색시 왔네' <인터뷰 일부>
질문: 백남준의 유치원 시절 이야기를 좀 부탁합니다?
대답:"백남준은 창작활동에서 유치원 때 기억이 꽤 많이 아이디어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술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경험한 것에서 영감을 창출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렸을 1930년 후반에는 유치원 다니는 게 흔치 않았습니다.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었고 나도 무남독녀 외동딸인데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생이었고 어머니가 동덕여중을 나온 신여성이라 딸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면서 을지로 2가 명동성당까지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겠어요.
[5]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낼 때 우연이기는 하지만 우리 둘은 많은 면에서 닮아있어 거기에 뭔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꼭두극·사물놀이·남사당 풍물패 유럽공연을 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셈인데 그런 것이 백남준의 예술적 시도에서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내가 꼭두극단을 만들고 자문을 얻어 '인형극'이 아니라 꼭두놀음패 '어릿광대'라고 지었는데 백남준은 스스로를 '무당'이나 '어릿광대'라는 비유했잖아요. 더군다나 백남준이 한국에 온 첫해인 1984년 내가 제작한 꼭두극 '양주별산대'를 가지고 동독 드레스덴에서 열린 '세계꼭두극페스티벌'에 참석하게 됐는데 당시로는 동구권 참가라 우리나라에도 역사적인 일이었지요.
국가지원 없이 나 혼자서 해나가기가 힘들다니까, 백남준은 '경희가 굉장한 일을 하는데 내가 뭘 도와줄까?' 하더니, 마침 자기가 조금 후에 문공부장관을 만나러 가니 도움을 청하겠다는 거예요.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아니, 고국에 돌아와서 문공부장관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런 자기의 유치원 친구를 도와달라고 한다니 그게 말이 안 되지요. 1984년 독일 유럽공연을 잘 마쳤더니 연말에 백남준이 나에게 '구라파 순회공연 축하!'라고 쓴 엽서를 보내줬어요. 우린 이상할 정도로 상통하는 데가 많아 보입니다.“
셋, 이경희 여사와 인터뷰 일부
[1] 백남준과 이경희 기지 넘치는 말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좋아하시는 게 있다면?"'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가난한 사람,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뿐이다' 등이다.
[2] <이경희> 백남준은 아이디어가 많은 천재인데 왜 머리보다 몸을 중시했나요? "왜 몸이냐고요? 백남준은 인간의 본능을 그대로 귀하게 여기며 살아온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머리가 쉴 새 없이 전기스파크 같은 불꽃을 일으켜도 그는 몸을 먼저 주제로 삼은 것 같아요.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런 생각을 몸으로 실현하고 행위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나는 백남준의 이런 실험이야말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을 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넷, <이경희 여사 누구인가?>
"수필가이자 한국 꼭두극의 선구자 이경희 여사 유사(唯史) 이경희(李京姬)는 1932년 12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 2학년 재학시절부터, KBS 라디오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답' 등의 프로그램에 '박사'로 출연하기 시작하여 KBS TV의 '나는 누구일까요?' '나의 직업은'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 주별산대'로 주목을 받았다. 88년에는 '서울국제꼭두극페스티벌'을 유치했다.[9] 이경희 여사는 서울대에서 약학을 전공했으나 대학 2학년 때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어 KBS 라디오 '스무고개' '재치문답' 등 20년 가까이 방송패널로 출연했다. 후에 세계여행을 주제로 한 기행수필가로 변신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국꼭두극'을 알리는 문화대사 몫도 톡톡했다.
다섯, 한국적 예술가 백남준과 창의적 큐레이터 이영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 <내질문> 백남준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뭘 해야하나?
<이영철>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걸 누가 만든 겁니까?)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문화로 최고가 되는 나라)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https://www.youtube.com/watch?v=MW09uo1Mq4A&t=10s
@2부@ [백남준&한반도] <12강> 가장 세계적, 아니 가장 한국적(?) 작가
*백해영갤러리 백남준과 친구들이 마련한 12번째 백남준 강좌 <본론>
백해영 갤러리에서 마련한 12번째 백남준 강좌(lecture performance)
[1] 제목이 [백남준과 한반도&한민족&전자굿] 정도로 하면 어떨까요? 부제가 백남준은 가장 세계적, 아니 가장 세기적 아니 가장 한국적 (혹은 아시아적)이다. 우리는 그가 세계적 작가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다. 그러나 전자샤먼으로 그는 가장 한반도적이다. 백남준에 대한 총정리? 여기서 세기적이란 시대정신과 시사에 밝은 작가(Information Artist)라는 뜻. 이제 정보가 석유를 대신하는 시대라고 말하다
[2] 미술평론가 최광진의 글.
<한국인으로서 20세기에 가장 뚜렷한 족적은 남긴 예술가는 바로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이다. 그의 국제적 성공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다. 그의 예술적 뿌리는 어린 시절 체험한 한국의 무속문화(샤머니즘)에서 비롯된다.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을 소통시키는 무당처럼 그는 방울(거울) 대신 비디오(TV)를 이용하여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소통시키려고 했다>
6개국 하는 한국적 작가가 될 수 있어
[1] "외국어 잘 해야 모국어 잘 한다" -괴테. 이 말은 외국어를 잘 해야 한국어도 잘 하고 한국어를 잘 해야 외국어도 잘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걸 다른 말로 해석하면 "가장 한국을 많이 알아야 가장 세계를 많이 알 수 있고, 가장 세계를 많이 알아야 가장 한국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백남준과 프랑스어 백남준 미래를 준비하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상당한 인물] <백남준 일본으로 건너갈 때 가장 챙긴 것을 바로 불어사전> "서울을 떠나던 날 남준은 생생하게 기억했다. 북한군이 대문을 박차고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 남준은 아버지 명령에 따라 급하게 짐을 꾸렸다. 가방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머리가 뒤죽박죽되는 순간 남준은 책꽂이에 꽃혀 있던 불어 사전을 날쌔게 집에 그 안에 넣었다. 당시 불어공부에 재미를 들인 그가 애지중지하던 사전이었다" -<나의 사랑 백남준> 중에서
[3] 그는 6개 국어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페북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4] 백남준은 정보에서 무지한 것이 죄다라고 본다. 세계적이란 6개국어 했고 전 세계 신문을 읽고 6차원의 세계 그리고 가장 세기적이다 세계 시사에 밝다 시사와 정보(INFORMATION 아티스트)에 밝은 작가다. 정보를 가장 중시한 예술가다. “정보는 공식적으로 대체 에너지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정보는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꾼다. 댄서와 요가수련자는 200칼로리로 엑스타시를 맛본다.
[5]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 무당의 춤 기원 몽골코드: 백남준 남다른 감정으로 돼지머리를 놓고 추는 무당의 춤에서 신명의 음악적 원리를 파악하다. 그는 무당의 박자가 중국 아악의 리듬과 달리 싱커페이션(syncopation: 당김음이 있는 3박자, 5학자, 7박자로 이어지는 음악/센박과 여린박의 위치가 바뀌는 현상)를 간파했다. 이것은 뒤의 음을 당겨서 엇박자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인데 이러한 한국 특유의 무속음악에서 그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선과 다른 역동성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백남준은 "한국이 국제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예술은 춤과 음악과 무당 등 시간 예술뿐이다"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최광진
샤머니즘: 자발적으로 황홀한 엑스터시에 이르게 하는 접신술
[1] <나는 백남준이 한국무속을 창조적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친다. 얼마나 난해한 작업인가. 경이롭고 놀랍다. 그가 천재임을 직감한다> 요제프 보이스를 추모하는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를 행하는 중인 백남준
[2]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찍 한국을 떠난 덕분에 한국인의 원형적 심성과 내면을 가장 잘 보존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만든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기억과 한국의 문화적 유전자를 대면케 되는 것이다.” _이어령
[3]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_백남준
[4] 백남준 한국적 결국 우랄알타이 중앙아시아 <몽골계-몽골코드>에서 왔다
[흥미로운 이야기] 한 몽골인 여성, 자가 유전자 검사를 해 보았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오다. 27% 한국인 유전자, 22% 몽골인 유전자 등등. 백남준 말이 과학적유전자로 봐도 맞는군요.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백남준 www.youtube.com/watch?v=y2-Ln67temk
고대 그리스 종교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는 약물을 이용하여 엑스터시 상태에 이르렀지만 빙하기 시베리아 지역에 갇혀 있던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추위에 견디기 위해 호흡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호흡과 명상을 통해 병을 고치고 미래의 사고를 내다보면 삶의 역경을 극복했다.
식량과 사냥감을 찾아 이동의 때를 알아야 했던 이들에게 샤먼의 능력을 절대적이었고 그래서 천신과 소통할 수 있는 샤먼이 가장 높은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북방계 몽골로이드가 아시아전역에 퍼졌고 샤머니즘은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되어 전파되었다. 유목 생활을 하면서 샤먼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선하던 몽골로이드는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손의식을 가졌다. -미술평론가 최광진
[5] [충북대 박선주 교수 북방계 <몽골로이드>] 세계 고고인류학계는 이의 원인을 기후요소 중 마지막 빙하기와 관련이 있다고 보다. 지구 마지막 빙하기(일명 뷔름기)는 대략 3만~1만년전 동안 진행됐다. 이때 시베리아 등 지구 북반구에 살았던 몽골로이드는 '혹한'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몽골로이드는 혹한에 굴복하지 않고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5] 그 결과, △지방이 많은 눈꺼풀(쌍꺼풀이 적은 이유) △햇빛을 더 얻기 위한 밝은 피부(비타민D와 관련) △열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통통한 몸매(일명 숏다리 이유) 등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밖에 가늘고 작은 눈, 낮고 작은 코, 칼귀, 비교적 얇은 입술 등도 모두 혹한에 적응한 결과라고 고고인류학자들 의견이다.
[5] <유전학적으로> 이들은 "큰 눈은 눈에 반사된 자외선 때문에 눈 손상시킬 수 있고, 오똑한 코와 두꺼운 입술은 동상에 걸리기 쉽다"고 밝히고 있다. 또 "얼어 딱딱해진 고기를 씹다보니 자연스럽게 턱과 어금니가 발달됐다"며 "여기서 획득된 성질이 유전학적인 표이를 거쳐 북방계 몽골로이드의 인종적인 특징이라고 설명.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1만년 전 지구 마지막 빙하가 물러가자 그들의 생활영역을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확대. 국내 선사고고학자들이 "지금 한반도 사람의 직계 조상은 구석기인이 아닌 신석기인"이라고도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 그의 애독서 '삼국유사'
[1] 가장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 그의 애독서는 '삼국유사', 그는 이 책의 에센스를 꿰뚫고 있었다. 도울은 왜 백남준을 가장 한국적인 작가로 왜? 서울 종로구 양반 아들도 그렇지만 그는 전통적 인간으로서 지니는 모든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한다.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일찍 서구에 개명된 것이 아니라 한국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인의 순수성을 더 잘 보전하는 고전인이었다. 그의 말씨와 행동은 1949년에 멈춰버린(서울 양반 말투와 행동거지)
[2] 백남준와 동양사상(노장), 경기고 다닐 때 동아일보에 계셨던 한문 선생 '천관우'에게 노장을 배웠다고. 노자는 '5천자'도 되어 있어, 아주 짧고 명확해(clear). 그런데 장자는 좀 어려워, 노자를 뻥 튀기면 장자가 돼. 그런데 그냥 튀긴 것이 아니고 장자에는 판타지가 들어가 있어. 장자의 판타지는 무시무시해. 하여간 미우주항공국(NASA)에서 일하는 사람들(항공 공학자, 우주 물리학자) 등보다 스케일 더 크거든. 장자에게서 배울 것은 시공간에 대한 거야. 시간하고 공간이 따로 놀지 않고 같이 놀아. 그리고 그 스케일이 커. 하여간 무시무시하지. 그런데 장자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이 있어. 그게 바로 일연 스님이 지운 <삼국유사>야. 정말 대단해. 우리민족이 참 판타지가 있는 민족이거든. 노장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몰라. 나도 영향을 받았어.
[3] 백남준은 왜 그토록 삼국유사에 미쳤는가? 예술은 도덕적(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것 아니다> 김훈과 1995년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1992 도올과 인터뷰에서 밝히다. 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98635
광주 비엔날레 참가한 백남준 “나의 예술은 의미 벗어나기” -시사저널: 백남준은 심각하고도 진지한 모든 질문에 대해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질문자들이 미리 설정한 의미와 개념을 그는 언제나 비켜간다. 그는 기존의 의미망에 포착되기를 사절하고 있다. 그래서 백남준 반면 '삼국사기(고급관료가 쓴 김부식 저)' 백남준 이 문서를 엄청 싫어하다. 역사 기록은 승자의 문서라고 본다. 그래서 중국 <사기>마저도 싫어한다.
[4] 김훈 질문: 예술이 인간의 현실을 감당해 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하고, 당신은 자신의 예술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백남준 대답: 그것도 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1년, 2년을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술의 지역성·민족성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팔자가 좋지 않아서, 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백남준은 이런 말도 했다. "문화적 애국주의는 가장 나쁜 것이다"
[5] 백남준 같이 센 발언을 한 사람은 인류사에 없다. 백남준이 툭 던진 말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예컨대 "세계일류가 되면 나라고 뭐고 없다고" 또 이런 말도 했다. "민주주의가 뭐냐고? 말대꾸하는 것(댓글)이다" 그리고 30살에 "내가 문화칭기스칸이 되어 전 세계 미술판을 쓸어버리겠다(황색재앙)" "예술이 뭐냐고?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하는 것, 속고 속이는 (고등)사기" "서구와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룰을 바꿔라 "
[6] <호랑이는 살아있다> 2000년 작품. 2000년 0시에 전 세계 공개, 이 위성 아트는 새 천년 첫날, 전 세계 77개국 방송망 탔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도 많지만 백남준은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는 남북의 사람들은 아직도 기죽지 않았다>를 1999년 자정 12월 31일 자정부터 2000년 1월 1일 위성 아트로 선보였다. 호랑이는 만담 속에 강자입장을 대변하지만 여기서는 약소국이라는 한국의 강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호랑이는 백남준 자신을 말한다. 한국 호랑이와 서양 사자가 싸우는데 결국 호랑이가 사자를 이기는 장면이 나온다.
[7] 백남준이 북한의 영상을 여기에 활용. 연출이 아니고 진짜로 느껴진다. 사자는 슬슬 도망간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는 뭔가? 백남준 새 천년을 맞아 1999년 자정 12월 31일부터 2000년 1월 1일 위성 아트로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선보였다. 백남준 왈 "한반도에 아직 호랑이는 살아있다" 이 작품이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남북 대치라니 답답하다. 종전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면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만 생기고 한반도 평화가 더 가까이 올 것인데 갑갑하다. 백남준은 "드디어 호랑이가 제대로 운다"라고 좋아했다. 백남준은 우리가 한반도에 분단국으로 살아가지만 아직 우리는 기죽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선언
구겐하임 회고전도 백남준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돌아가
<1> 하나,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서 <유럽> 쳐들어가 서양 미술판을 갈아엎다.
<2> 둘, 1973년 백남준 '글로벌 그루브'를 통해 서양에 <동양> 문화를 소개하다.
<3> 셋, 1984년 백남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서 위성 아트로 <세계>로 예술을 확장하다
[1]*추가 이경희 여사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다"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밤 35년 만에 귀향했다. 6월 30일 출국하게 된다. 그때 배웅하러 나간 이경희 여사와 유치원친구 박한수(왼쪽)씨 그리고 백남준이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각자의 궤도를 돌다 1984년 35년 만에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습니다. '유치원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2] 한국이나 중국에도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매년 태음력으로 칠월 칠석에 두 개의 별 '견우와 직녀' 만났다는 이야기다. 두 별이 한여름밤에 만나면 훼방꾼들이 보지 못하게 <구름>이 그들을 가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떠나야만 하는 연인을 축복하기 위해 단물 같은 <비>가 내린다. 그래서 동양에서 칠월 칠석의 밤이 젊은 남녀에 의해 경축되는 시간이 되었다 백남준 유명한 작품 <1984년 (1월 1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아이디어 여기서 온 것이다. 백남준의 말
[3] <백남준과 천문학> <천문학과 음양오행론 태극 사상> 고조선 고구려 등 오랫동안 북두칠성을 믿었다. 북두칠성에도 음양과 오행이 들어가 있다. 한국인의 신앙관에서 이것을 빼놓고 상상할 수 없다. 우리 문화는 모두가 이것과 즉 천문학과 관련이 되어 있다. 조선이라는 한자의 朝 자에서 보면 역시 북두칠성 한자가 들어가 있다. 흔히 우리의 어른들은 칠성님에게 빈다는 말을 한다. 대인은 천문을 통해 한 해를 통째로 보고 살았고, 현대인은 분주하게 하루하루 앞만 보고 산다. 한국은 천문학의 나라 모든 이야기는 별과 해와 달에서 기원한다.
[4] 동의보감도 천문학으로 푼 의학서이다. 백남준의 위성아트도 천문학으로 푼 예술이다. 절에 가보면 대웅전 뒤편에도 칠성각(칠성신)이 있다. 그만큼 이 신앙은 한국인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 우리에게 칠성신은 우리의 생사를 주관하는 신이기에 우리는 죽을 때 관 속에 칠성판을 둔다 http://blog.daum.net/skachstj/16457930
<바이, 바이 키플링>
<1> 1986년 동서양의 만남과 소통을 주제로 한 <바이, 바이 키플링>에 나오는 장면 중 남대문시장의 미꾸라지장사·옷 장사 등의 영상이 방영된 적이 있는데 왜 그런 후진국 모습을 담았냐고 비난을 하니까 '궂은 것을 피하면 후진을 벗지 못한다, 남대문시장 풍경은 미국에 없는 퍼포먼스여서 재미있어 찍은 것'이라고 말했어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서양에 <유라시아><홍익사상>
<1>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서양에 <유라시아>를 이야기하다. 거기서 영감을 얻은 전사 초고속도로를 만들다. *단군 스키타이 아래. 백남준 스키타이 단군 1993년과 백남준의 홍익사상
하나, 1993년 작가의 전기개념 유라시아 초원도속도로 전자 고속도로
둘, 단군 스키타이 왕: [1]1993년 제 13회 베니스 자르디니공원 숲속 언덕에 전시된 백남준 단군 스키타이 왕, 이 단군상은 배를 타고 지날 때마다 서치라이트가 된 두 눈으로 푸른빛을 강력하게 발산하여 마치 베니스의 상징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 이경희 <지금 막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 도 착륙한 우주인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단군은 역사이다. 다만 신화적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을 부정한다.
[2]기마민족에게 '등자(말을 자유자재로 조정)' 발명은 혁명이었다> '스키타이 단군' 스카타이가 스키타이 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말을 쏘는 자 궁수라는 말도 있다. 말을 자유자재로 통제하는 <등자>는 흉노가 발명한 것이다. 흉노시기부터 신격화된 하늘을 텡글리라고 하는데 텡글리는 단군의 어원. 그러니까 단군은 '천자'가 되는 것이다. 백남준의 스키타이 단군. 스쿠터는 스키타이에서 왔다.
[3]"전 세계 창조 신화 중에서 홍익사상처럼 온 인류에게 두루 도움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높은 이상의 이념으로 출발한 고대국가는 없다" 토인비. 백남준은 이런 이상을 1970 TV Commune에서 시작해 1993년 인터넷 전자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로 완성하다.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때, 스키타이 단군을 출품한 이유일 것이다.
[4]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단군왕검을 형상화한 작품 '(전자) 단군 스키타이' 백남준은 단군을 유라시아를 연결시켜주는 미디어(match maker)로 봤다. 백남준은 고조선 단군시대로 돌아가는 그 순수한 원래의 기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 다산의 시에도 보면 고조선 단군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메시지가 보인다. 그 시대만 해도 한국인의 기상과 패기가 넘쳤는데 처음 시작한 우랄 알타이 국가에서 밀리고 밀리고 밀리고 해서 결국 한반도에 갇혀버린 것이다. 결국 그것 마저 반쪽이 나고 말았다. 여기에는 백남준이 말하는 싸우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탈영토제국주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가 인터넷 강국으로 높은 교육열과 고급 정보와 지식을 통해 전 세계에서 지적 제국으로 전 세계 평화와 공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과 제안을 엿볼 수 있다
[5] <인류학> <백남준과 신석기와 정보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최고급 정보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칭기즈칸. 정치인보다는 예술가가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에 대해 호령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혁명과 정보화 시대 혁명은 어딘지 닮다. "나는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백남준
백제와 고구려 그러나 신라 김씨 왕조는 스키타이 계열 흉노의 왕인 <김일제>가 시조다. 4. 문무왕 비문에 신라 김씨왕조 시조가 투후 '김일제'(흉노족, 실제하는 인물. 중국 감축성 [과거 흉노의 땅]에 가면 그의 동상도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일제는 북방 아시아에서 강국의 왕이었으나 한무제와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중국으로 끌려왔고 그러나 한무제를 반란군에서 구해줘 그는 거기서 벼슬을 했다 또 다시 난이 일어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신라 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마한이라는 부족 공동체 국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내려올 수가 없었다. 스키타이 흉노족 한반도 동쪽으로 이주해 세운 왕조이다. 그래서 신라의 언어는 백제와 고구려와 언어가 완전히 달랐다. 무덤양식도 완전히 다르다. 흉노의 양식이다. 신라 금관이 나온 무덤의 구조도역시 그렇다. 흉노는 유목민이라 이통할 때 금을 가지고 다닌다. 금을 숭상하는 민족이다. 신라의 수도가 금성인 이유다. 반면 백제와 고구려는 금관이 없다.
1.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 비문에 보면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는 유목민 흉노의 왕인 <김일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역사적 유물과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다면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대혼란이 온다면서 거부한다. 많은 역사학자들, 김알지를 신라 15대 왕으로 보다. 혹은 그렇게 추론. 200년전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한 흔적이 그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2. 흉노 유물의 전통, 동복(청동솥) 항상 말 뒤에 싣고 다녔단다.
흉노 유물의 전통, 동복(청동솥) 항상 말 뒤에 싣고 다녔단다. 금령총 기아 인물형 뒤에 '동북'이 보인다. 여기 인물은 흉노족 얼굴이다. 동복은 흉노족 전통인데 아래 2번째 사진은 흉노 오르도스 동북이고 3번째 사진은 김해에서도 발굴된 동북이다. *동복(銅鍑): 말 그대로 청동솥. 이 동복으로 밥을 먹거나 국을 끓여 먹으며 말 뒤에 이동하는 밥통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제례 때 어떠한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김씨는 금(황금)의 숭배에서 왔다. 금 숭배는 흉노족의 특징이다. 신라 금의 나라다. 김일제 흉노의 왕의 태자였으나 한무제의 포로 중국에 노예가 되었다가 무제 암살하려는 반란군은 제압해 오히려 무제로 부터 포상을 받고 벼슬도 받았다. 중국 황제는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여 '김'씨가 중국에서 생긴 것이다. 지금 중국에 김씨 집성촌으로 살고 있다. 알타이는 금의 산(Golden Mountain)이라는 뜻이다. 김씨는 금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라의 수도가 금성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4. '훈족'과 '흉노족'의 차이는 뭔가? '훈족'(헝가리도 훈족에서 왔다 우리가 헝가리와 유사한 민족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은 로마는 멸망시킨 서유럽 유목민이다. 흉노는 훈족과 같은 계열로 북방 유목민 중앙아시아 유목민이다. 북방 우랄 알타이 스키타아와 같은 민족이다. 백남준 <스키타이 단군>이라는 작품이 나온 것을 이런 배경이 있다. 이곳은 서양인 유골과 동양인 유골이 거의 같이 나온다. 그러나 동서문화가 융합된 유라시아 혈통권이다. 실크로드는 중국보다는 흉노적이 개척한 북방 유목민의 로드이다. 흉노적이라는 말이 뉘앙스가 안 좋다. 그건 중국이 흉노족을 비하하려고 쓴 용어다. 김씨왕조는 유목민 흉노의 왕인 <김일제> 혈통에서 온 것이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 비문 기록과 중국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한 중국 탁본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p0K80v4XYg
6. <낙랑(위만조선의 유민 중 하나라 고구려 평양 지역 근교에서 살다가 결국은 당시 강대국인 고구려에게 망하다) 아래 낙랑 금제 띠고리(첫번째 사진)>는 사실 가장 전형적인 흉노식 패턴 장식을 따른 것이다. 좁쌀 모양을 한 '누금기법'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신라금관 목걸이가 되었다. 신라금관도 마찬가지다. 신라금관은 흉노 유물방식을 가지고 있다. 흉노적이 가장 좋아하는 게 금 왜 유목민에게는 가지고 다니기 가장 편하기에 금을 숭배했다)이고 장식과 문양은 사슴뿔 모양(신라금관 장식이 여기서 오다)이 메인이었다. [6] brunch.co.kr/@seulsong/360
백남준도 스키타이인 즉 북방 흉노족이 한반도 남단 즉 신라에 내려와 정착했다. 그리고 사슴뿔 모양의 순금왕관 즉 신라 금관을 썼다. 그런데 이런 왕관의 예술양식은 중국이나 일본과 완전히 달랐다. 왜냐하면 북방 스키타이 방식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다.
Couronne Époque des Trois Royaumes (1er siècle av. J.-C. -7° siècle), royaume de Silla, 5.-6° siècle Bronze doré Avec leur décor d'arbres stylisés aux formes géométriques, leurs pendants ornés de pende&ques qui encadrent le visage et se terminent par un mo-tif de feuille martelée dans le bronze, les couronnes de Silla sont les plus spectaculaires de l'époque des Trois Royaumes. Elles frappent par leur légèreté et leur magnificence, typiques d'un luxe volontiers barbare et suggèrent des connexions lointaines avec la Sibérie, sur fond de chamanisme. Retrouvées sous des tumulus monumentaux, elles accompagnent le défunt dans son dernier voyage. Achat, 1954, Tokyo, MA 1642
Crown Period of the Three Kingdoms (1st century BC -7th century), kingdom of Silla, 5th-6th century Gilt bronze With their decoration of stylized trees in geometric shapes, their pendants decorated with pendants that framing the face and ending in a hammered leaf motif in the bronze, Silla crowns are the most spectacular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y strike by their lightness and their magnificence, typical of a deliberately barbaric luxury and suggest distant connections with Siberia, against a backdrop of shamanism. Found under monumental burial mounds, they accompany the deceased on his last journey. Purchase, 1954, Tokyo, MA 1642
[7] 1993년 이경희 여사,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된 백남준 작품 참관하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백남준은 역시 한국인이었다" 왜? 1993년 제 13회 베니스 자르디니공원 숲속 언덕에 전시된 백남주 단군 스키타이 왕, 이 단군상은 배를 타고 지날 때마다 서치라이트가 된 두 눈으로 푸른빛을 강력하게 발산하다. 마치 베니스의 상징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 이경희 <지금 막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달에도 착륙한 우주인 모습으로 표현한 작품> 단군은 역사이다. 다만 신화적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 부정한다.
[8] 백남준의 인류애가 담긴 인터넷 코뮌(인류공동체)정신은 바로 <홍익인간>에서 왔다. 이 세상의 많은 신화 중 홍익인간처럼 그 스케일이나 포용성이 넓고 깊고 그 이상이 높은 것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우선주의적이다. 자기 민족만 아니라 주변 이방인 폭넓은 이웃들과 더 넓게는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는 건국 이념은 그 어느 나라도 가질 수 없는 평화공존의 사상이다. 백남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이런 단군을 영웅화해서 <전자 스키타이 단군>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한 이유다.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회고전
[1] [엑스트라]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회고전 약 25만명 입장하여 구겐하임 입장기록을 갈아치우다. 백남준 여기서 비디오 아트 포스트 아트로 새로운 레이저 아트를 본격적으로 시도. 백남준은 죽음을 생각했는지 성서 인물인 야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야곱의 임무는 천신과 인간을 네트워킹 시키는 셔먼처럼 지상과 천상을 네트워킹 시키는 매치 메이커로 여기서 등장. 지상에는 100개 TV 꽃밭이 있고 그 지상에서 7층 높이의 천상으로 쏘아올린 레이저가 하늘을 상징하는 원을 그리고 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
[2] 지상에는 하이얀 TV 꽃이 피어 있고 천상에는 연두색의 레이저 별이 떠 있다. 여기 지그재그 방식의 기발한 레이저 사다리는 하늘과 땅을 잇는 천지인 사상을 구현한 것. 하늘과 땅을 잇는 샤먼의 미디어 역할에 대한 조형적 발상에서 왔다. 끝으로 순환적 원리를 창안한 천재적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라이트의 둥근 달팽이 모습과 너무 잘 어울린다. 6개국어를 하는 지구촌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축제를 벌리고 문명의 갈등을 치유하며 신명나게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재미있게 살다가 하늘과 승천한 전자무당이었다
[3] 이경희 여사가 2000년 '백남준 이야기'를 다급하게 쓰게 된 동기] 2000년 구겐하임 개인전 제작과정을 지켜보는 백남준, 당뇨가 심해 이때부터 한쪽 눈이 거의 안 보이기 시작하다.구겐하임 이때부터 눈에 잘 안 보이다. 10여 년 간격으로 백남준 관련 책을 두 권 내셨는데 그의 차이점은 뭔가요?"백남준이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부터 자기와 내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는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 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한국인의 정서로는 '나와 남준 같은 사적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부끄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에도 백남준은 어린애처럼 몇 번이나 조르듯 떼를 쓰며 '내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0년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회고전에 갔을 때 보니 백남준이 나를 금방 못 알아보는 거예요. 처음엔 비디오아트전시라 내부가 좀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백남준이 당뇨로 눈이 잘 안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런 세계적 회고전을 열 수 있다니 생각하니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어요. 그가 내게 부탁한 책을 낸다 해도 읽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싶어 그해 다급하게 낸 책이 바로 <백남준 이야기>(2000)입니다. 11년 후 그의 탄생 80주년을 맞아 그의 예술세계에도 접근하고자 <백남준 나의 유치원친구>(2011년)를 냈다
[4] 2000년 뉴욕 구겐하임 회고전에서 히브리 민담을 근거로 가장 한국적인 천지인 사상을 예술로 꽃피우다. [유럽-동양-세계(위성)-한국,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 제사 때 사용하는 쨍쨍 소리가 나는 놋그릇을 예술화하고, 지게 위에 지구본을 올려놓고 전 세계를 유목하는 자의 모습을 재현한 퍼포먼스 아트에 활용한 사람은 백남준 밖에 없다. 위는 2019년 백남준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놋그릇이 등장했다.
엄마 유작 가장 한국적인 작품
[1] 백남준 유작 '엄마(Ommah)' 2005 세계적인 작가 이전에 가장 한국적인 작가, 백남준,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명은 '엄마(Ommah)' 그냥 한글로 적는다. 백남준은 막내였기에 엄마의 사랑을 유난히 많이 받았다. 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는 전 세계인에게 '엄마'라는 한국어를 퍼트리다. 영어의 맘(Mom)과 비슷하지만, 한국의 엄마는 좀 다르다. 서도호의 한복으로 지운 한옥 작품이 여기서 영감을 받았나.
그러나 백남준, 국제주의&국수주의 구분, '애국주의' 경고장
[1] [백남준&조국애] 국제주의와 국수주의 구별해야 한다. 한국에서 국수적 목소리 너무 크다 문화적 애국주의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 나치즘 세계미술과 동네미술 구별하지 못한다. 1993년 미국미술 한국 집수입하다. 가장 한국적 가장 세계적이다.
[2] 백남준 국수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 백남준 인류학 열심히 공부한 흔적을 아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신라왕관(금관)은 북방 스키타이(사슴뿔 모양)에서 온 것이다.
[3] 국경 없는 인류공동체 국수적이거나 고립적이지 않기 위해서 1974년 백남준이 록펠러재단에 제안한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초고속도로)' 개념이 여기도 나온다. 1993년 '전자초고속도로(부제,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라는 작품으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인터넷 개념의 예술화였다.미 제국주의는 지나치게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고만 하기에 지구촌에서 인심을 잃고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몽골제국이 최고였을 때, 주변 국가에 대해 관용 정책을 썼을 때였다> 몽골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말이 가장 빠르기도 했지만 역참제도 Networking station가장 발달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 가장 빨랐다. 몽골 제국을 만든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고쳤다. 몽골, 즉 원나라가 남긴 주요한 업적 가운데 역참제도 <사진> 위 칭기즈칸, 아래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다.
[4] 그는 6개국를 하는 노마드 작가였기에 사고에 있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누구도 추종하기 힘들었다. 그가 예술적으로 상상한 미디어의 세상, 다시 말해 인터넷 등 쌍방형 소통의 세상에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백남준의 은하계에 산다. "아이폰은 백남준의 아이디어다" - 핸하르트(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수석큐레이터, 백남준전문가)
백남준의 인류학적 접근
[1] <인류학> "나는 TV로 작업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백남준 <백남준과 신석기와 정보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최고급 정보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칭기즈칸. 정치인보다는 예술가가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에 대해 호령할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혁명과 정보화 시대 혁명은 어딘지 닮다.
[2] 백남준의 별자리는 북두칠성이다. 한국의 작가(예술가)들 행복하다. 그가 우리에게 세계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고 본보기가 된다. 우리가 기댈 큰 빽(배경)이 있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이제 백남준도 넘어서는 작가가 나와야 한다.
[3] 인류학에서는 원시종교와 고등 종교를 구분하지 않는다. High Art와 Low Art를 구분하기 힘든 시대. 무교는 모든 종교의 원형.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교가 망한 적은 없다. 왜 여성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불교 유교 선교(도교)는 몇 번씩 망했다. 백남준은 무교(샤머니즘)를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형으로 보다.
백남준과 도올 선생 이야기 한토막
[1] <김용옥> 남준: 강남 아파트촌 같다. 참 널찍하고 어마어마하다. 뉴욕에서 이 정도의 다운타운 아파트 살려면 여우둔갑 여러번 해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수준이 일본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데 한국사람이 사는 평균점수는 10배나 된다. 그러니 우리민족이 얼마나 우수한가? 10분1 돈가지고 십배는 잘 산다. 일본 가보면 답답하고 숨학히고 정말 처량하다. 일본에서 오래살면 조그맣게 되고 불쌍하게 된다.
인색하게 되고 삶의질이 아주 떨어진다. 좀 못살아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우리민족이 더 슬기롭다. 그대신 일본은 우리보다 공중시설이 더 잘 되었다. 일본은 집이 너무 형편이 없어서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밖에서 노는 습관이 있다.그래서 신주쿠같은 유흥가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은 집에서 시간을 더 보낸다. 하여간 강남 아파트촌은 토지이용도가 높지 않은가.
[2] 백남준: 정말 잘 한 짓이야. 대학에 있는 사람은 정직한 인생을 살 수가 없어. 대학에 들어있는 Information 전부 왜곡이 되거든. 어떻게 그 속에서 창조가 나올 수 있겠어. 대학을 때려쳐보지 않는 사람치고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사람은 없다고. 우리는 학문을 하면 안돼 살아있는 진실을 찾아내야지
한국적 작가 백남준의 수난과 수모
[1] [청와대 백남준 작품<비디오산조> 진작 설치해야 했었는데 설치하고도 전기세가 아까워서 전시를 못하나 이 정도 전기소비야 국민이 이해하지 않나-경향신문] 지난달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동된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비디오 산조. 지난달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면에 설치된 12인치 컬러 브라운관 83대 화면이 켜졌다. 전원을 공급하지 않아 꺼진 상태로 있던 평소와 달라 눈길을 끌었다.눈여겨 보지 않으면 쉽게 지나치게 되는 이들 브라운관은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비디오 산조(散調)’다. 청와대의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이 1990년에 준공될 때 같이 설치된 이 작품은 브라운관에서 형형색색의 화면이 나오면서 우리의 전통 가락 산조의 흐름을 형상화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3일 “작품이 작동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잠시 전원을 공급했다”고 설명했다.
[2]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수난 모멸을 당하다. 다다익선 지금 수리중이다.
[3] <최 작가 들려준 이야기> 최울가 작가의 고백 ; 돌아가시기 2년 전에 뉴욕 소호(지금은 번화가)에 비가 내렸는데 애기 유모차에 타시고 반쯤 비를 맞으면서 가시길래 "선생님 건강 괜찮으세요?" 물으니 "어 괜찮아!" 하시면서 도움이가 끌어 주는 유모차를 타고 가시는 모습이 나와는 마지막 인사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국가가 저렇게 큰 거인 하나를 돌봐주지 못하다니 일본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텐데(J.Foundation) 싶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대한 원망 예술을 모르는 무지함이 저 큰 대가를 저렇게 버리는구나 싶어 그 답답한 심경은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종일 비가 내렸고 난 온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보내던 기억 난다
백남준과 아시아(중국고대사)
[1] 디드로는 세게백과자선은 지금으로 말하면 인터넷이었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백과사전에 담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가능했다. 요즘 말하는 집단지성을 유발시킨 것이다. 백남준은 로봇이 원작이고 이것은 판화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백남준은 아시아에 이미 백과사전이 있었다는 것을 서양인들에 보여준다. 그게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다.
[2]<프랑스혁명> One word is 1,000 dollars"는 여씨춘추에 나오는 고사인 '일자천금(一字千金)'을 영어로 바꾼 것. 백남준의 방대한 독서량을 알 수 있다. 《여씨춘추》는 기원전 239년 중국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주도하여 편집한 백과사전이다. 총 26권 160편으로, 연감에 해당하는 기(紀) 12권, 보고서에 해당하는 람(覽) 8권, 논문에 해당하는 론(論)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은 이들 중 12기(十二紀), 즉 기(紀) 12권의 요약이라고 한다 다루고 있는 학설 중에는 도가(道家)의 것이 가장 많고 유가(儒家)·병가(兵家)·농가(農家) ·법가(法家)의 주장과 이론도 섞여 있다. 여불위는 이 책을 진의 수도 함양 저잣거리에 전시해 놓고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고칠 수 있다면 천금을 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때문에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4] 백남준 장자크루소(프랑스혁명 200주년 프랑스정부가 의뢰한 본 작품은 아니고 그걸 판화로 바꾼 작품)를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다 백남준은 루소를 노자와 연결시키고 있군요 자연모태(Mother Nature)로 돌아가자는 생태주의적 관점도 엿볼 수 있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죠. 그리고 보니 오늘이 프랑스혁명기념일이군요. 루소는 맑스에 비교되죠 프랑스혁명의 정신적 철학적 배경을 제공한 사람이죠. 루소의 특징은 혁명가임에도 혁명가같이 보이지 않는 점이 장점이다.
[5] 백남준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전자로봇 작품을 의뢰받으면서 디디로 작품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중국은 서구보다 2000년 전에 이미 '백과사전'을 만들었다". 중국의 백과사전인 <여씨춘추>는 BC 239년에 만들어졌고, 유럽(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디드로, 루소, 케네, 볼테르)에서 만든 '백과사전(encyclopædia)'은 18세기(1757년)였다.
[6]<당대 유럽의 최고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송과 명 나라의 '이학' 즉 성리학에서 서양의 '이성'이라는 말을 발명하다> 17세기-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운동은 공맹의 서적이 유럽에서 번역, 일어난 운동이다. 중국의 고전인 대학이 유럽에서는 1592년 처음 번역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이 아시아에 비해 문명이 많이 뒤떨어졌죠. <아래> 1687년 출간된 쿠플레의 저서인 <중국의 철학자 공자> 당시 중국의 공맹사상은 독일 철학자 칸트에게도 영향 주다. 유럽이 아시아에서 비해서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한국적 작가 백남준과 '한국-아시아-유라시아'
[유라시아대륙철도] 익산에서 런던까지 10일11일 차비 95만
하나, "21세기 유라시아 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백남준 60년 전 예언이다)"
[1]유라시아 길이 열리는 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일단 북으로 가는 길이 열려야 유라시아 길이 열린다. 백남준 1960년대부터 유라시아 길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다. 우리의 기원은 페루까지 간다. 그리고 핀란드, 우랄 알타이, 헝가리, 시베리아, 훈족, 타타르, 몽골 그리고 한반도까지 하나였음을 강조하다
[2] <유라시아를 상징하는 초원고속도로를 지나는 코끼리 형상화>이 작품의 백남준 메시지는 이제는 활발한 유라시아 교류를 하라는 것. TV 부처의 연장선 상의 작품이다. 긴밀한 동서 접촉 권유. 목포- 평양과 천진을 지나 혹은 부산-원산 블라디보스톡을 지나 중앙아시아 고비사막을 지난 우랄 알타이 산맥을 넘어 바르사바와 베를린까지 가라고 권유하고 있다 <아래> 293×633×153cm 백남준 I '코끼리 마차(Elephant Cart)' 혼합매체 1999-2001. 백남준아트센터소장
[3] 초원 고속도로 고비사막(코끼리)을 지나 동서 문명을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처음 시작했고 유라시아시대가 열렸고 지금은 전 세계 지구촌이 하나로 1초 안에 통할 수 있는 슈퍼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열렸다. 아래 작품은 또 하나의(제2의) 'TV부처'로 유라시아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전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킹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동양이 서양을 이끌어가는 모습이다.지금 지방자치도 유라시아 철도 연결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일이 걸림돌이다. 유럽은 대환영이다. 중국은 이에 대비해서 중동과 전국의 초고속기차와 도로를 만들고 있다. 중동에는 중국이 공짜로 고속도로를 만들어주고 있다.
[4] 백남준과 유라시아 60년 전인 60년대부터 시작, 문화의 통로
[백남준과 유라시아 60년 전인 60년대부터 시작, 문화의 통로로 생각하다 1993년 베니스에서 작품으로 발표 그리고 또 30년이 지났다] 1993년 백남준 자르디니 숲에 만든 백남준의 통로는 '아시아로 가는 길'을 뜻한다. -이경희 여사. 프랑스 기자(Alison Sarah Jacques)와 백남준의 인터뷰에서 가져온 글이다. *세기말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것은 20세기(산업시대)가 가고 21세기(정보시대) 새로운 세기가 온다는 말이다.
[5] [백남준 한반도와 유라시아 네트워킹 철도 시대를 60년 전부터 시도] 1963년 백남준과 보이스와 함께 유라시아 지도를 그리다. 보이스 2차대전 조종사로 전투 중 러시아 우알 알타 지역 크리미아 반도 근처 추락해 유목민 타타르 족과 극적으로 살아난다. 그들이 지극정성으로 보이스를 치료했기에 그때부터 보이스 유라시아와 샤머니즘을 그의 예술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다. 백남준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 고속도로를 상상하다. 6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 이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철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보이스와 백남준>1. 보이스는 1959년, 처음 백남준을 데뷔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에서 봤고 2. 1961년, '제로 그룹(Zero Group)' 오프닝 파티에서 백남준의 성 Paik를 불렸다. 3. 1963년, 백남준 첫 전시에 나타나 부수려고 준비한 피아노를 먼저 부수고 있었다. 백남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6] 몽골제국이 13세기 초, 세계를 지배한 건 가장 빠른 말로 기동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칭기즈 칸부터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까지 새로운 정복지가 생겨날 때마다 '역참(驛站制)'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몽골 전국에 역참이 1519곳에 이르렀고, 말(나귀) 5만여 마리, 소 9000마리, 배 6000척 수레 4,000량, 등을 대기해두었다. 이를 토대로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교통네트워크를 창출.
[7] 파미르고원을 넘어 실크로드를 왕래하는 상인의 증가는 물론이고 유럽의 선교사, 여행가들이 속속 동방세계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세계지도가 나오고, 대 여행시대를 열리고, 세계사가 쓰였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다. 백남준은 몽골제국이 이렇게 동서 교류의 통해 최초로 '지구촌'을 실현했고, 또한 시베리아에서 네팔, 한국, 라플라드(핀란드), 페루 등을 누비며 '초원고속도로'를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런 인류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예술을 접근했기에 이렇게 '비저너리' 아티스트로서 내일을 멀리 내다보는 'TV(Tele 멀리, Vision 보다)전자아트'를 발명할 수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유라시아 전시]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유라시아 전시]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Kublai Khan) 시대의 문화의 예술1215년 9월 23일-1294년 2월 18일은 몽골 제5대 칸 13세기 중국의 원나라 Yuan Dynasty 창립자, 당대 문화예술을 소개하다. Kublai는 상대적으로 현명하고 자애로운 통치권 가졌으며, 그의 룰은 효율적 인프라 개선, 몽골 우편 시스템 및 대운하 확장 포함, 종교적 관용, 과학적 발전(중국 달력 개선, 정확한 지도 및 기관)으로 차별화하다. 금 보유 및 무역 확대를 뒷받침하는 지폐 만들다. 많은 중국 체계와 이상을 채택하고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Kublai와 그의 몽골인은 중국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관습을 유지하고 중국 생활에 동화되지 않았다. 1275년 마르코 폴로 (Marco Polo)는 Kublai Khan의 궁정에서 만나다. 젊은 베니스인은 통치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신뢰를 받아 원 나라에서 여러 외교 및 행정직으로 임명되었다. 약 16 년 중국에 머물다 베니스로 돌아갔다.
세계정세를 탁월하게 조명하는 인류학
[1]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치명적으로 허약한(vulnerablity) 취약계층[The vulnerable] 즉 이름 없는 이웃들과의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다. 우리는 그런 거짓 포장을 벗겨냄으로써 서로의 벌거벗은 얼굴 없음(facelessness) 마주하고 각자를 취약한 존재로 재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서로를 공유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 양혜규의 백남준의 인류학에 대해 쓴 글
[2] <내질문> 백남준의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이영철>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이에요. 역사학적 관점이 아니에요.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기존체계와 질서의 교란자로서의 백남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기가 횡행하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술가는 그 모든 사기를 사기 치는 교란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백남준의 예술가론은 교란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백남준의 사기론은 교란자의 미학이에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백남준 예술가 총정리 총결산
[서론] "20세기 전반은 피카소, 20세기 후반은 워홀, 그리고 20세기 전체를 뒤샹의 시대라 부른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백남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진중권 [1] <백남준 누구 어떤 예술가 어떻게 결심> 나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예술가가 되어야 겠다 –백남준. 아버지처럼 사는 것을 싫어했다.
[2]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한이 많은 사람이다. 여기서 한은 복수나 원한이 아니고 최고로 승화된 가장 수준높은 정서인 것이다. 한을 정을 승화하는 비슷한 그러한 삶에 대한 태도가 아닌가. 백남준의 한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아버지 같이 돈에 얽매이는 것 부자로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가가 된 것이다. 일제시대 부자가 된다는 것은 일본정부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았기에.
[3]그는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만난 지식인 중 최고는 맑시스트였지만 결국 백남준은 그런 그마저도 능가하는 최고 예술가가 된 것이 아닌가. 그가 1996년 지나친 작업 과로로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도 휘파람 불며 한 말이 바로 "I am happy" 이 말은 연발했다고. 즉 인생이란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가장 창의적인 인간이 될 수 있고 그때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 아닌가.
[4] <예술목적> <백남준, 현대미술을 의심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미개척지> "나는 처음 작곡가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미학자, 산문가였죠. 마치우나스나 나나 정식으로 특정한 예술을 배운 적이 없어요. 행위 예술을 했지만 배우는 아니었다. 한번도 배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TV를 연구했죠. 누구나 당연한 듯 TV를 보죠. 나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순수한 플럭서스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어요.플럭서서는 바로 처녀지로 가는 길이잖아요. 거기에 처녀지(아무도 가지 않는 곳) 있었어요. 그러니 갈 수밖에 없었죠. 에베레스트 산과 같아요. 산이 있으니 그냥 올라가야 하잖아요". - 리비어와 인터뷰 1974년 백남준
[5]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지루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꽉 막힌 생각을 열어 끝어진 곳을 잇기를 좋아했다. 그는 무미건조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대혼란이 왔다. 획일적인 것이나 일사불란함 같은 것을 때려부셔 버렸다. 백남준은 예술가 역할 중 하나로 교란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서구에서 종교화된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또 하나는 전쟁과 미움과 갈등으로 끊어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일을 좋아 했다. 백남준은 너무나 넓고 크고 깊고 광활한 세상과 그 모든 인간과 우주를 다 담고는 남을 수 있는 '무봉탑' 같은 세상(해원상생)을 열망했다. 백남준은 선시 중 하나인 이음새가 없는 무동탑, 시를 좋아했다. 이 시는 부처님이 말하는 우주 만물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사상 함유. 백남준 이에 크게 공감 전자 인터넷을 발명하다.
한국적 예술가 백남준, 9가지 얼굴
<서문> 예술가는 왜 바보 노릇을? 진정 현명해지려면 어리석어야 한다. 예술가는 합리성에 미쳐버린 사회를 바보짓으로 심판한다>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책에서 아도르노(1903-1969)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짐승·바보·광대가 되는 모양새, 이런 '어리석음'이 바로 현대예술의 특징이다. 합리성에 광적으로 미쳐 이를 추구하는 현대의 눈으로 보면 예술은 어리석어 보이나 진정 현명해지려면 어리석어야 한다. 예술가는 이렇게 어리석은 것으로 합리성에 미쳐버린 사회를 심판한다"
<1> 문화민주주의자 백남준 : 문화민주주의 독일의 개념 미술가 요셉 보이스를 연상케 한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 여기서 쌍뱡형 소통을 강조하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말대꾸하는 것"그는 회화나 조각 뿐 아니라 강연, 교육, 정치, 행동, 무엇이든 다 미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술의 탈신비화 특권화 귀족화를 반대하다. 결국 예술가란 날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2> 축제주의자 백남준: 돈보다 축제가 먼저다 일관되게 삶의 향유를 최우선으로 두는 축제주의자였다. 백남준 왈 <돈보다 축제>, 백남준 스승인 보들레르 왈 <돈보다 자유> 두 사람의 사상의 기반은 바로 무소유주의. 사유재산 인정하지 않았다. 역시 무소유주의. 비무장이 가장 무서운사람이듯 무소유주의가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다. 이 세상에 축제 아닌 것 없다. 모든 것이 세계적 사건 일거수일투적 예술행위다. 최치원의 풍류도에 21세기적으로 실천자다. 백남준은 니체의 후예 계복학에 속한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을 서양 철학자에 비유한다면, 디오니소스적 축제를 찬양한 '니체'에 가깝다. 백남준은 '돈의 지배'보다는 '축제의 회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 왜(?)예술은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남준은 마음보다 몸, 정신보다는 육체, 관념보다는 성애, 돈보다는 축제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3> 전자무당 퍼포먼스 아티스트(축제주의자 백남준 연장) 굿의 예술화·현대화를 실험한 백남준(1990) 백남준은 작품을 할 때 샤머니즘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고백한다. 그는 굿을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지로 봤기에 거기에서 예술적 상상력과 창작의 에너지를 얻는다. 백남준의 '굿'에 대한 높은 자부심 백남준은 전자샤먼이기에 그의 추모굿에 TV가 빠질 수 없다. 사진에 삼성TV가 보인다. 백남준은 1987년 이전에는 소니를 쓰다가 그 이후에는 삼성을 썼다.
<1-0>[참고] 백남준 집안은 음력시월상달에 굿판을 벌였단다. 부잣집답게 동네사람들 다 모아 한바탕 축제를 벌이고 크게 대접을 했단다. 이런 경험은 그의 '굿 미학'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1-2> 시게코는 백남준이 굿을 종교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예술적 영감을 얻는 소재로 삼았다고 봤다. 그가 미친 듯 무대 위를 뛰어올라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샬럿과 함께 공연하는 순간을 볼 때면 백남준은 영락없이 신들린 무당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백남준 안에 있는 '신기(神氣)'를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남준은 한국의 샤머니즘에서 천지인이 하나라는 우주 만물의 원리, 거기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생동, 신명 나는 삶의 축제의식을 예술과 접목. 백남준은 샤머니즘이 무에서 유를, 물질에서 정신을, 죽음에서 생명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예술가로서의 무당을 역할모델로 삼았다.
<1-3> 사실 우리의식 속에 유교나 불교보다는 샤머니즘적 뿌리가 더 깊다. 한 정서가 깊은 우리에게 체질상 더 맞는 관점일지 모른다. 죽은 자와 만나 생전에 불통으로 쌓인 오해를 풀고, 서로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상생. 게다가 샤머니즘에는 '경천애인(몽골어로는 '탱그리')' 같은 따뜻한 인류애도 담겨 있지 않은가.
<1-4> 백남준은 차별화된 '전자샤먼'이다. 왜 샤먼 아티스트가 되려 한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굿은 자기 예술의 원초적인 공간, 마치 시원지와 같기 때문이다. 그럼 전통 무당과 그는 뭐가 다른가. 전통악기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피아노 같은 현대 악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TV 등 첨단기술로 무장한 '전자' 무당이라는 점이다. 그는 그렇게 종교성·예술성·과학성을 고루 융합시켰다.
<1-5> 백남준 굿에는 현대문명의 이기인 피아노와 TV도 나오지만, 전통 굿에 나오는 요강, 제사에 쓰는 놋그릇, 담뱃대, 유년의 추억이 담긴 대야, 요강, 제기 등이 등장한다. 일종의 백남준식 오브제 아트다. 백남준은 직접 삿갓을 쓰고 나와 굿을 진행했다. 거기에 한국인의 생명줄인 쌀이 빠질 수 없다.백남준의 '유희정신, 광대정신, 샤먼정신'과도 통한다.
<1-6> 백남준은 1984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매스게임이 아니다"라며 "페스티벌 잔치 즉 굿이다, 다시 말해 광대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이렇게 굿을 예술로 봤고 이를 현대화하려 했다. 거기에 담긴 미학은 바로 디지털 시대에 더 맞는, 순차 없이 무질서하게 접근하는 '랜덤 액세스' 방식
<1-7> 굿은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서구인도 이를 인지해가고 있다. 백남준이 이런 방식에 주목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서구인은 오랫동안 '과학주의·합리주의·이성주의'가 최고라고 믿어왔으나 그 결과는 처참한 세계전쟁이었고, 유대인 대량 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이었다.
<1-8> 이런 문제를 일찍 인지한 서양인이 바로 '존 케이지'. 그래서 그는 잡음이나 침묵도 음악으로 봤다. 백남준은 그런 점 착안해 영감을 얻으면서 자유를 맛본다. 서양의 '노이즈'와 한국 샤머니즘은 닮은꼴이다. 기존의 질서와 규칙을 넘어 시공간이 뒤죽박죽된 것 같으나 어느 순간에 하나가 되면서 빅뱅이 일어난다.
백남준은 이토록 한국의 무속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다. 시게코의 저서 <내 사랑 백남준>을 보면 백남준은 한국의 굿에 대한 자부심이 너무 커 시게코와 의견충돌로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오죠.
백남준 말하길 "일본의 선(禪)도 좋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에 비하면 무척 따분하지"라고 하자, 시게코가 "무슨 소리예요, 둘 다 각자의 이론과 배경을 가진 철학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어요"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백남준이 다시 "절대 아냐! 한국샤먼이 훨씬 창의적이지"라고 맞섰다.
"한국의 무속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마디로 소통이야.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이지.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선과 선을 이으면 면이 되고 면은 오브제가 되고 결국 오브제가 세상이 되는 거지.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한국의 무속은 따지고 보면 세상의 시작이 아니겠어!"
<1990년 보이스 추모굿>그날 백남준의 보이스 추모굿은 정말 완벽했다. 현장에서 굿 장면을 찍은 사진가 최재영 선생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엄하면서 익살스러운 해원(解寃)마당을 이끌던 백 선생의 표정과 몸짓은 신들린 큰 샤먼과 같았어요, 취재하러 갔지만 저도 곧 굿판과 하나가 돼 카메라로 그 분위기를 빨아 들였죠"라고 증언했다. 백남준이 샤머니즘에 매력을 느끼는 건 역시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게 다리를 놓기 때문이다. 쌍방적이고 수평적인 민주적인 소통방식. 샤먼과 관중이 일심동체가 되어 몸과 마음이 교류하는 '네트워크' 때문이다. 백남준은 거기서 원시적 생명력과 예술적 착상·영감·쾌감을 경험한 것같다.
<4> 전자공학(물리학)도 전문가처럼 구가하는 백남준: 전자공학을 독학하다 학창시절 물리학을 좋아한 백남준:백남준이 이런 과학이론에 빠질 수 있는 이유는 부인 '시게코'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학창시절 물리학자가 되고플 정도로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기계 다루는 데도 능했다. 'K-456'도 만들었고, 전시 땐 TV내부회로도 직접 조작했고, '아베'와 함께 비디오합성기를 설계할 만큼 과학적 지식도 풍부했다.
<5> 르네상스 인간, 백남준: "과학자에게는 예술이 마법이고, 예술가에게는 과학이 미스터리다"라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어서려 했다. 그래서 백남준이 '현대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위너는 르네상스 인간 하버드 철학박사 수학자다.
<6> 우상파괴자, 백남준: 우상숭배는 인류의 영원한 질병이다. 부처의 목마저 치다. 1993년 베니스에서 그런 퍼포먼스를 하다. 1962년-1963년 독일에서 '플럭서스' 운동할 때 그들이 신주처럼 떠받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부순 건 이 시대 우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표현한 것이잖아요. 기존의 질서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상징을 파괴해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가 펼쳐 보이다.
<7> 인류학자, 백남준: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가다.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죠.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이다" -이영철
<8> 기존질서의 교란자, 백남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기가 횡행하기에 그것을 극복하려면 예술가는 그 모든 사기를 사기 치는 교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백남준의 예술가론은 교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백남준의 사기론은 이런 교란의 미학과 관련이 있다. 백남준이 이런 해프닝을 도발한 건 성적 억압을 일상화하는 기존 사회의 통념을 깨는 예술적 교란-극단적 관념주의(나치즘 엄격 획일적 사회) 근단적 성의 예술 대응하다. P 심포니. 이점에 대해서 뒤샹의 차이를 이야기할게요.
2018년 11월 6일 국회도서관 김형순, 김순주, 김찬동, 이지호
<9> 그는 이미지로 사운드로 바꾼 융복, 예술가
백남준 첫 전시가 음악의 전시(EXPOSITIO OF MUSIC)다. 이미지를 추방하고 사운드를 영접하는 전시 "나의 TV는 물리학적 음악 -백남준" 게다가 TV=악기로 보다. 백남준은 '이미지(Image)'를 '사운드(Sound)'로 코드 변경하다. 우리는 이미지를 중시하는가 사운드를 중시하는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서양은 언어가 존재의 집이 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존재 속에 언어가 있다. 서양은 세계 속에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 속에 세계가 있다고 본다. 자연은 진화하고 언어는 문화 한다. 신바람은 오르고 내리고 혹은 신바람이 난다(수평). 신바람은 우주가 하나로 공명하는 것을 말하다. 우리는 신바람과 풍류도 그리고 기운생동을 중시한다. 그래서 백남준은 TV를 물리적 음악이라고 하다.
<엑스트라> 가장 한국적인 예술가 백남준과 비슷한 천재 작곡가 윤이상
[1] <일화> 질문: '윤이상 선생' 국내 초청 건으로 잘못 말했다 큰 곤혹을 치렀다고요? 대답(이경희여사) "1994년 '윤이상음악제' 때 정부가 윤이상 선생을 초청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날보고 말리라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여론도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백남준에게 전화가 왔기에 '윤이상 선생과 퍼포먼스를 안 하는 게 어때요'라고 의견을 말했더니 백남준이 너무나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립니다./백남준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윤이상 선생은 한국이 낳은 금세기 최고의 음악가다, 선생과 나는 예술장르와 생각은 달라도 한국의 예술가라는 점에서 같다,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페스티벌에서 만난 후 깊은 정신적 교류를 가졌다'고 하면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와 상상력이다, 이데올로기·제도·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백남준 비디오아트는 지구촌 모든 대립과 갈등과 경계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인류공동체로 소통케하는 신명나는 세계적(global) 전자굿판이었다. 최치원이 말하는 가무의 능숙한 멋과 맛을 내는 그런 풍류의 달인이었다. 그의 소통방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을 웃음판으로 바꾸는 촉진제인 해학 풍자 익살의 방식 즉 유머(fun, fun, fun)의 정신이었다. 신명은 역경을 땔감 삼아 생의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에/
그리고 전시가 끝난 후 직접 쓴 글에서도 '지금 곧 유토피아'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의 '지금'이라는 건 아이처럼 깨어 있는 순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돼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걸 유치원 시절의 특권으로 본 것이죠."
백남준 유학을 안 가고 서울대, 홍대, 예종에 갇혔다면 '비디오아트'를 창시할 수이었을까. 독일 대학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 있다. 그럼에도 독일 명문인 뮌헨 대학(이 대학 노벨상 수상자 42명 정도 되는)조차도 발로 차고 나왔다. 너무 보수적이라고 다른 대학 프라이부르크로 옮기다. 백남준은 유럽미술을 조롱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비디오아트가 가능(?)
한 몽골인 여성, 자가 유전자 검사를 해 보았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오다. 27% 한국인 유전자, 22% 몽골인 유전자 등등. 백남준 말이 과학적유전자로 봐도 맞는군요.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백남준
다시 말해서 백남준이라는 존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근대적 번용 과정에서 축적된 새로운 문화 측면의 가장 밝은 측면 19세기말 동학-19세기 여명기중엽 최한기, 이제마로부터 시작해 20세기에 많은 개화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각성된 문화 여명기에 폭발적 창조성과 그 맥락, 그 패기, 그 에너지를 받았다. 또 그가 서구의 가장 전위적인 흐름과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인류보편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8년 이야기 백남준 쿄토상 수상 연설 제목은 <노버트 위너와 마셜 맥루한-커뮤니케이션 혁명>이었다. <상금 40만 달러(약 5억 원)> 아래 공식에 위너와 맥루한이 나오네요.
[예술과 과학의 연금술] 과학이 발달할수록 예술이 발달하지 않으면 전쟁이 난다. 예술은 놀이가 되다. 과학은 예술이 되다. 음양의 조화처럼 예술과 과학의 조화가 필요하다. 백남준은 예술 50% 과학 50%를 추구한 미술가다. 음양의 조화를 맞춘 것이다. 백남준의 <TV 정원>이 그런 작품이다. 자연(nature) 50%, 과학(science) 50% 그래서 예술이 100%가 된다. “천부경은 한배검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천하만민을 교화하는 데 ‘조화의 원리’, 즉 우주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으로, 1에서 10까지의 수리(數理)로 천(天)·지(地)·인(人) 삼극(三極)의 생(生)·장(長)·노(老)·병(病)·몰(歿)의 무한한 반복의 경위를 설파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 구성내용을 보면 一에서 三으로 오고 三에서 一로 가는 ‘一·三, 三·一’의 원리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천부경(天符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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