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엉뚱한 상상력이 발동하다 심오하다고 할 필요는 없지만 철학적으로 따지만 그 사유가 매우 깊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백남준은 여기서 인터넷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전자초고속도로 즉 이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소통 유통 변통 형통 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소재가 자동차다. 1993년 대전 엑스포에 설치한 작품들 인간과 기계와 자연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또한 서로 연결되어 하나임을 보여준다.
<2부>
백남준은 2004년 10월 뉴욕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친조카 켄 백 하쿠타(오른쪽)의 머리 위에 페이트칠을 하는 등 생전 마지막 공식 기자회견과 공식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듬해 1월 고석만 연출과 인터뷰에서도 약식으로 비슷한 퍼포먼스를 해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아래 댓글에 사진)
백남준 선생 쪽에서 연락이 왔다.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미국 뉴욕으로 오라는 거다. ‘백남준 선생이 당신에게 유언을 하겠다’는 메시지다. 백 선생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번 인사를 나누었고, 뉴욕의 한식집에서 같이 곰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내게 ‘유언’을 남긴다는 것인가? 이모저모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마도 EBS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리라. 곧 뉴욕으로 가겠다고 답신을 보낸 뒤, 백 선생에 대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일정을 재촉하더니, 개인적인 유언 발표 대신 공개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로 전환하겠다고 알려왔다. 실제로 2004년 10월 백 선생은 마지막 공식 퍼포먼스를 했다.
2005년 1월, 백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기 꼭 1년 전이다. 뉴욕 소호거리의 ‘백남준 메인 스튜디오’. 창고를 개조한 듯 거친 목조건물에 100명 정도의 기자가 꽉 찼다. 매니저인 켄 백 하쿠타는 76개 나라에서 150명이 왔다고 했다. ‘켄’은 형의 아들로, 백 선생의 친조카다. 이윽고 백 선생이 켄과 나를 중심에 불러 세우더니 1970년대 선보였던 풍금을 넘어뜨려 부수고 페인트통을 붓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내 양복 위로 붉은색과 노란색 페인트가 뿌려졌다. 켄에게는 머리 위에 뿌렸다. 당황스러웠다. 퍼포먼스가 계속 진행 중일 때 뒤켠으로 나와 양복의 페인트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50대의 키 큰 큐레이터 ‘미스 최’가 나를 힐책했다. “그 옷을 마네킹에 입히면 가격이 얼마나 나갈지 모르는데 무슨 짓이냐?” “출장 왔기 때문에 내일 당장 입을 옷이 없다.” 그 꼴을 2층 난간에서 지켜보던 고양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2005년 1월 뉴욕에서 자신의 4개 스튜디오를 돌며 마지막 인터뷰를 한 백남준(오른쪽)은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고석만(왼쪽) 연출의 요청에 “나는 바보야”라고 답했다. 사진 왼쪽 구석으로, 큐레이터 최아무개씨와 친조카 켄 백 하쿠타의 모습도 보인다. 이비에스 제공
다음날 백 선생은 우리에게 하루 종일 시간을 할애했다. 선생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흑인 여성과 부인 구보타 시게코, 켄, 그리고 켄의 아들이 기록촬영을 하며 뉴욕에 있는 4개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다 돌았다. 활동 연대별로 작품이 채워져 있었다. 설명은 주로 켄이 하고 백 선생은 끄덕끄덕 확인하고 간혹 거드는 식이었다. 이때 이미 모든 저작권은 켄에게 양도한 듯 보였다. 켄과 구보타 시게코 사이에 냉기류가 느껴졌다. 백 선생의 말씀, “예술은 사유재산이 아니다”. 투어의 마지막, 노을빛이 깊게 드리우는 그곳을 ‘제4 스튜디오’라 불렀다. 작지만 초창기 작품이 모아져 있어 정감이 넘쳤다. 선생께 마지막 인터뷰를 하겠노라며 자리를 잡았다. “우매한 질문 같습니다만, 선생님의 일생을 한마디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선생은 의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더니 “내 일생? 내 일생? 나는… 나는, (절규) 나는 바보야~.” 그 순간 카메라로 얼굴을 줌 인 하고 싶었다. 사인을 주려고 카메라 쪽을 보니 이미 줌 인 하고 있었다. 고개를 반쯤 젖히며 기성에 가깝게 ‘바보야~’를 길게 내뱉는 백 선생 자신이 연출자였다. ‘백남준 다큐’의 마지막 장면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1월 뉴욕에서 고석만과 이비에스 촬영팀이 찾아간 백남준의 한 스튜디오의 벽에도 그는 낙서처럼 ‘백남준은 바보다’를 써놓았다. 이비에스 제공
백남준이 활약하던 유럽의 1960년대는 황폐했다. 현대미술은 답보 상태였다. 개념미술 아니면 설치미술, 그도 아니면 개념 플러스알파 수준이었다. 동의어 반복이었다. 다들 말했다. “예술은 죽었다.” 참담했다. 그때 치고 나온 것이 ‘플럭서스 운동’이었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움직이는 미술, 변화하는 미술, 플럭서스 운동을 제창하고 나온 것이다. 무대에서 미술과 퍼포먼스가 이뤄지고, 비디오아트가 창안되었다. 현대미술은 ‘형’의 빈곤과 ‘관념’의 과잉이지만 ‘현대인’은 지성의 빈약과 물질의 과잉이었다. 예술이란 세상을 내 시각, 내 철학으로 보고 이미지화하는 것 아니겠는가? 백남준은 나아가 물리학에서 ‘프랙털 이론’을 끌어들여 파도 같은 “프랙털 아트”를 창안해냈다. 거북선의 이미지를 프랙털 아트로 풀어낸 ‘터틀십’이 대표작이다. 그때 이미 백남준은 주창했다. ‘기술의 발전이 예술을 구원한다.’ 오늘날 ‘키네틱 아트’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헤드라이트를 수십개 모아 소형차만하게 만든 다음, 그 속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하면 괴물체가 형형색색으로 변하며 움직인다. 최우람의 작품이다. 미래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온다. 1960년대의 백남준은 오늘을 내다보고 있었고, 그 융합정신을 오늘의 이비에스에서 꽃피우고 싶었다.
[이용우 지음 백남준 책] 백남준 언어가 낡은 것이 아니라 우리언어가 그만큼 많이 망가졌다는 소리인가 외래어와 서양개념에 점령 당한 상태 즉 언어의 식민지상태일 수도 있다 / 문학평론가 김현은 백남준의 언어방식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솔직하고 억압적이지 않다" 좀 길지만 아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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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않지만 그의 말하는 방식만은 높이 평가한다. 그의 말은 솔직하고 억압적이지 않다. 〃비디오예술은 쇼〃서 역설적공감〃 나만옳다〃풍조에 반성의 자극
때로 그의 말은 해학적으로 들리기 까지 한다.
억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높은 평지에 이른 사람들이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모습이다.
백남준은 그의 비디오예술을 스스로 쇼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 쇼는 구경거리라는뜻이다.
구경거리라는 말을 그는 별다른 부끄럼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의 구경거리는 위락적이며 소비적인 구경거리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보게한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며 그의미를 곰곰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반성적인 구경거리다.
연초에 방영된 한 쇼에서 그의 쇼가 반할리우드적인 쇼라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나는 할리우드에서 재미있는 쇼를 만들면 재미없는 쇼를 만들고 거기에서 재미없는 쇼를 만들면 재미있는 쇼를 만든다라는 그의 말은 그의 쇼가 비판적쇼임을 입증하는 것인데 그런 말을 할때도 그의 말은 억압적이지 않고 진솔하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다.
예술을 엄숙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그는 아무 부끄럼없이 예술이란 지루한 삶을 맛나게하는 양념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서구 부르좌의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영위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삶이므로 예술은 양념이상의것이 되어야한다라는 반론이 성립안되는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백남준의 말에서 감동한 것은 말하는 방법의 자연스러움과 솔직함이다.
그의 말에 찬성하건 안하건 그가 말하는 것을 듣거나 보고있으면 즐겁다.
그 즐거움은 그가 비억압적으로 말하고 있는데서 생겨나는 즐겨움이다.
내의견에 대해 뭐라고 말해도 좋다.
나는 내생각을 그대로 말할 따름이다라는 것을 그의 말은 드러낸다.
그 비억압적인 태도는 말을 즐기는 태도다.
말은 원래 억압적이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의 제도라는 것을 못느끼게 하는제도다.
「나는 학교에 간다」는 말은 맞고 「학교가 나를 간다」 는 말은 맞지않다.
왜? 먼저 것은 자연스럽고 뒤의 것은 자연스럽지않기 때문이다.
말은 자기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게하는 인공물이다.
예술은 넓은 의미에서 그말의 제도성을 부숴버리려는 달성하기 힘든 욕망을 동인으로 간직하고 있는 제도다.
그것은 제도를 파괴하려는 제도다.
예술, 좁게 말해서 문학은 말의 파괴서 인정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두드러진 제도다.
예를들어 시에서는 때로 말의 문법이어긋나기도 하며, 소설에서는 실제로 일어날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제도가 제도를 파괴하는 제도서 만들어낸것은 역사의 간계이겠지만 사회는 문학이나 예술같은 제도를 만듦으로 사회의 부정적 폭발을 어느정도는 해소한다.
문학이나 예술은 제도의 부정성을 흡수하는 압지와도 같다.
문학, 예술이 그런 역할을맡을수있는것은 그것이 말의억압성을 최대한으로 줄이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하면 안돼」라는 말은 「그런 것을 하면 안돼」 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문학작품은 그런 말을 하면안돼라는 말을 하지않는다.
문학작품은 그런 억압적인말을 하는 대신 그것을 즐기기를 바란다.
그것이 작품이 말하는 방식이다.
아무리 자기가 좋은 이야기를 하고있다고 생각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수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좋은 이야기 자체가 억압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성이 불가능해진다.
백남준의 말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대개는 진솔하고 힘있다.
그는 옳은 소리를 억압적으로 되풀이 하지 않는다.
옳은 소리만을 목청 높여 말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방식은 억압적이다.
다시말해 위선적이다.
거기에는 회의가 없기 때문이다.
말을 억압적으로 만드는것은 공식문화에서는 눈치이며 비공식문화에서는 확신이다.
「이런말을 하면 안되지」 라는것은 눈치이며 「이런말만 해야지」 라는것은 확신이다.
눈치 잘보는 사람의 엄숙주의와 확신에 찬 사람의엄숙주의는 억압의 동일구조다.
나는 누구나 비억압적으로말하는 사회에서 살고싶다.
나는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않은 사회에서 살고싶다.
다시 말해 백남준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고싶다.
그것이내가 꾸는 예술의 꿈이다. 김현 <서울대교수·문학평론가>
한국의 재벌은 결코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 사람을 이길 수 없다(독점기업도 건드리지 못하는 양대 <남대문 동대문>시장의 기능을 우리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란의 *'샤' 왕조(1077년부터 1231년까지)가 결국 바자의 상인들에게 진 것처럼 말이다 *(페르시아어: خوارزمشاهیان)[...] 자본도 변변치 않은, 노력투성이의 경제라 시장상인은 아무도 무섭지 않고 특혜금융도 필요없다
양대시장이 거대부패와 특혜융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 불만 났다하면 제일 먼저 불타 폭삭 주저않았나 싶더니 다음날 제일 먼저 문을 여는 곳 전통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지 않는 이런 곳을 경제속도가 방치하면 근본을 잃는다. 이런 자유경제가 자본주의의 능률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한국을 지킬 것이다 -백남준
<북방동물은 강(强)과 더불어 꾀가 있어여 한다. 강한 개인 개인이 독립, 자주하여 경쟁하는 21세기에 우리 한국인의 활약과 활력을 기대한다 1999년 2월 18일 백남준> 어쨌든 백남준은 1999년 말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에게 과제를 주다.
"그러면 왜 우리단군은 이스라엘의 모세처럼 세계적 거물이 못되었느냐? 삼국사기가 구약성서에 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민족의 유리표방을 거치지 않고 그래도 안정된 중견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개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유대인만큼 문화나 과학에서 세계사에 기여하지 못했다. 21~30세기 한국인의 과제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 우리는 강대국 속 분단국가에 살면서 어느 나라보다 많은 고통을 받았기에 그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 그것도 부족하면 미디어 그 자체인 백남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다. 미디어란 '영매(靈媒)', 중매자(meditator)', '매치메이커(match maker)', '피스메이커(peace maker)'로도 해석되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런 미디어가 돼야 한다.
백남준도 "한국이 20세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에는 크게 성공할 것이다" 하지 않았나. 우리도 백남준이 앞서 보여준 삶을 본받아 오랫동안 나라 없이 떠돈 유태인이 인류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듯 21세기에는 우리도 세계문명사에 기여해야 한다. 우선은 주변 4대강국에 도움이 되는 통일을 슬기롭게 유도해 세계평화에도 촉진제가 돼야 한다.
<백남준 주제는 왔다갔다 통신 소통 유통 이런 것이 그의 관심거리다>1993년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 행사요원들과 작업하는 모습 진짜 장난꾸러기는 여기에 있군요 이것 타고 울람바토르에서 베니스까지 왔다갔다 하겠다는 소리죠 노마드 작가로서 재미있는 점은 자연 반 문명 반 둘의 조화에 두고 있다. 뒤에는 바로 단군이 보이네요 정식이름은 스키타이 단군이죠 즉 우리가 유목민의 후손을 말하고 있다
<3부>
이런 점에 대해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도 인터뷰에서 한마디 보탠다.
"제가 깨닫는 건 유태인이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세계문화사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걸 보면서 그들이 뿌리 뽑힌 삶을 살았지만 '약자의 힘(철학용어)'을 발휘했다. 우리도 그게 가능하다. 20세기 당한 고통만큼 21세기에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이영철 초대관장은 우리에게 숙제를 준다. 서양의 유명미술사가가 쓴 책 중 백남준 깎아내리는 예는 많단다. 예컨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등이 쓴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보면 백남준을 '플럭서스'의 한 회원으로만 봤고 그의 예술파트너 '샬럿 무어먼'을 성적 대상화했다니 놀랐단다. 우리가 백남준을 연구하고 탐구해야 하는 이유다.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골자를 아래처럼 요약, 그는 분명 감각적 쾌락주의자다.
"카타르시스, 순간의 환희, 모든 감각의 만족, 전인격 총체적 개입, 극도의 전자적 충동, 두뇌의 전기자기 진동, 직접접촉예술, 전자와 생리학의 시뮬레이션,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초고속도로), 정신의 사이버네틱스, 인공신진대사, 다매체 다방향 상응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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