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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중요전시행사

한국 근현대사 여성적 서사(herstory) 다시 읽기

[신여성 도착하다_한국 근현대사 여성적 서사(herstory) 다시 그리다_<사람성원리>]전

-근대기는 미술뿐 아니라 영화, 광고,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여성의 신체가 이미지로 소비된 시대

[관련뉴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262126015&code=960202


기자간담회

덕수궁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2017년 12월 21일(목)부터 2018년 4월 1일(일)까지 대중매체 자료 500여점 공개, 특히 정찬영의 <공작>(1937),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60년’展 이후 45년만의 공개하다. 68점 소개하다.

<부인> 표지화 노수현 개벽사 1922.7 I <부인> 표지화: 노수현 개벽사 1922.8

[요약] 근대기의 시각문화를 통해 신여성(新女性)을 조명한 국내 첫 전시_역사, 문화, 미술의 근대성을 남성이 아닌 여성을 통해 가시화와 근대기 신여성의 등장, 존재, 의미를 보여주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소개하다.

*신여성이란? 근대적 지식과 문물, 이념을 체현한 여성을 일컫는다. 1910년대 여자 일본유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초 중등교육을 받은 여학생들과 여성 민권과 자유연애를 주창하는 ‘신여자’를 뜻하는 경향이 컸으나, 점차 양장을 입고 단발을 한 채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서구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모던걸’, 나아가 시부모와 떨어져 단가살림을 하면서 애정적 부부관계를 운영하는 ‘양처’의 의미를 포괄하는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세계사 차원에서 보면 신여성은 1890년대 영국의 ‘New Woman’ 열풍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아이콘이다. 공통적으로 근대적 지식을 소유하고 경제적 독립성을 누리고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존재를 벗어나 소비와 유행의 주역으로서 새로운 가치와 태도를 추구한 여성들을 일컬었고, 각 사회마다 이 여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신여성의 의미와 논란은 비서구식민지사회에서 그 내용과 초점이 다르다. 영국에서는 치마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신여성을 기존의 남성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데 비해, 식민지 조선에서는 구조선 사회를 벗어나 근대적 이념과 문물을 추구하는 존재로 형상화했다. [미술관자료]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인사말

19세기 유럽이나 미국에서 불평등 사회 자유와 해방을 위한 여성운동 신여성이 있었다. 한국은 1910년 이후 신여성 일제강점기 사회적 주체 신여성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주체로서의 신여성을 주제로 순수미술로 조망한 것은 처음이다. 신여성 현실과 이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간극이 있다. 일본 동경미술대학과 미국 플로리다 대학 소장품도 일부 왔다. 근대를 현대로 그리을 통해서 가져오기 신여성은 신인류다

<신여성> 표지화 안석주 개벽사 1924.6 I <신여성> 표지화: 김규택 개벽사 1926.4

조선시대까지는 열녀전이나 풍속화, 미인도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 재현 전통이 부재했다. 여성이미지가 공적인 영역에서 시각적 볼거리로 재현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딱지본 소설의 표지화나 '대한매일신보'나 '매일신보'의 상품 광고 등에서 부터였다.

1920-30년대는 신문과 잡지의 출판이 활발해지고 영화 공연과 박람회 등 시각적 대중문화가 형성되면서 여성이미지는 매혹의 서구 문물과 상품, 소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기호로서의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 조선미술전람회나 각종 사진공모전 등을 통해 여성은 이상적 ‘미인’, ‘향토적 정서’ ‘조선 전통’ ‘근대적 취미’ ‘현모양처’ 등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수없이 만들어졌다. '신여성', '별건곤' 같은 대중잡지들의 표지화, 만화, 컷 등을 통해 재현된 여성이미지들은 실제로서의 여성이기보다는 굴절된 식민공간 속에서 따라가야 할 서구문명에 대한 선망과 좌절, 욕망을 투영하는 담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김주경 I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97.5*130cm1929

나라마다 신여성(교육과 자립)에 대한 성격이 다르다. 독일의 신여성은 화이트 컬러지만 고등교육은 받지 않았다. 한국은 1890년대부터 일본에서 수입한 것이고 현모양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딪치는 것들이 많아 신여성을 정의하기 어렵다.

대중소비사회가 되면서 모던 걸 등장하게 된다. 이율배반 남성 서사를 벗어나 여성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삼은 시각예술로 거의 처음 있는 전시다. 사운드+유행가+이미지+내러티브가 복합적 요소가 가미된 전시회다. 젋은 작가 신여성을 재해석한 현대작품도 선보인다.

젊은 세대나 기성세대나 신여성을 비하하다

1930년대 바이올린을 든 신여성을 보고 나이든 어른은 저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결혼을 하겠나라고 비아냥거리고 . 젊은 남자는 참 예쁘고 통통하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라도 한번 해볼 텐데 라고 성희롱을 하다 –나혜석의 삽화

[1부] 여성잡지가 나오기 시작하다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여성 잡지들

당시 여성은 거의 문맹이었다. 사회활동 전문적 사무직 여성(일본여성) 실험성(여성) 아르 누보 영향을 받은 지금 봐도 조금 야한 분위기의 잡지도 선보이고 있다

<사람성 원리>를 강조하다. 여성의 취향과 교양이 문제가 된다. 여성의 자립이 중요해지다.

교양강박 1931년경에도 키스 걸이라는요즘의 키스방 같은 것도 있었다. 찻집 아가씨 같은 대중가요도 등장하다. 여우 목도리 유행하다. 해수욕장 풍경도 나오다. 노동과 여가를 즐기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음악감상도 중요하게 되다 패선과 화장 서구화가 근대화였다 대가족이 아니고 핵가족이 신가정이다.

구성에 대한 신여성의 도발성을 엿불 수 있는 여성지 표지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체결론 매매혼 강제결혼  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주로 남성 예술가이나 대중 매체, 영화 등이 재현한 ‘신여성’ 이미지를 통해 신여성에 대한 개념을 고찰한다.

중경(1928-1999) I '애인 모자 쓴 여인' 170*30cm 1937

태소 주경(泰素 朱慶, 1905-1979)은 한국 초기 추상화를 처음 시도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고희동, 이종우로부터 지도를 받고, 이후 일본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와 조각, 판화를 배웠다.

위 작품은 안정감 있는 구도로 앉아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비교적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갈색조의 전체적으로 어둡고 절제된 색조는 작품에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멋스러운 모자를 쓰고 서구식 복장을 한 여성의 시선은 정면을 보는 대신 화면 왼편을 향하고 있으며, 세련되게 화장한 듯한 그의 얼굴은 담담한 표정을 띠고 있다. ‘애인’이라는 작품 제목은 자유연애가 점차 보편화되어가던 당시의 변화해가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별건곤'(표지화: 안석주), 개벽사, 1933.9., 오영식 소장 자유 연애룰 부추기는 여성월간지

‘별건곤’은 별세계, 별천지라는 뜻으로, 개벽사에서 발행한 대중적 시사종합잡지이다. 처음에는 교양잡지로 시작했다가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남성독자를 대상으로 오락성이 대폭 강화되었다.

표지의 여성은 짧은 단발머리에 육감적인 몸매, 서양식 치마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양산을 든 모던걸이다. 이 여성은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 앞서가고 남성은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포장된 물건을 들고 땀을 흘리며 뒤따라 간다. 여기에는 부유한 모던걸과 그에 종속된 듯한 남성이 대조를 이루면서, 여성상위시대의 예고편이다

그러나 이 풍자는 비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화적인 발랄함과 결합하여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잡지의 주요 내용을 차지하는 ‘에로와 그로’ 풍의 소문과 기담, 도시적 가십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별건곤'이 발행되던 1930년대에는 다양한 모던걸의 이미지가 가벼운 취미오락의 기호로서 대중적 잡지의 표지에 등장하여 남성독자에게 소비되기 시작했다.[미술관자료]

김인승 I '봄의 가락' 캔버스에 유채 167*207cm 1942

교육과 계몽, 현모양처와 기생, 연애와 결혼, 성과 사랑, 도시화와 서구화, 소비문화와 대중문화 등의 키워드로 점철된 신여성 이미지는 식민 체제하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이념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각축을 벌이는 틈새에서 당시 신여성을 향한 긴장과 갈등 양상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나혜석 자화상

정월 나혜석(晶月 羅惠錫, 1896-1948)은 근대기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이며, 다양한 활동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주장한 근대 여성운동가이다. 1913년 동경의 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유학하고, 귀국 후 1921년 여성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28년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혜석의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다소 어두운 색조와 분위기로 표현함으로써 근대로의 변혁기를 살아가는 1920년대 한 명의 지식인이자 예술인으로서의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우울을 보여준다. 한국 근대 여성화가의 첫 자화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이 작품 속에서 나혜석은 스스로를 직업 화가로 그리기보다는 보라색 양장을 하고 짧은 머리를 한 근대적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

나혜석(1896-1948 미술)

[보충자료]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동경의 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서양화부에 입학했다. 1914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1918년에는 동경 여자유학생 친목회 잡지 <여자계>에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조직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 가량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1921년에는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서 국내 최초로 유화 개인전을 개최했다. 같은 해 만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이래 해마다 입선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23년 모성 신화를 부정하는 글,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했다. 1927년 남편과 함께 구미로 여행을 떠나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1929년 미국을 거쳐 귀국 후, 수원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를 열다.

1930년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남편과 이혼, 1933년 종로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대중잡지 <삼천리>에 조선의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혼 고백장'(1934), 정조 관념을 해체할 것을 주장하는 '신생활에 들면서'(1935)를 발표하면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박래현 <예술해부괘도(1) 전신골격>(1940) 등 국내 미공개작 최초 공개,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은 평남 남포에서 태어나 전북 군산에서 성장했고, 서울의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2년간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1940년 동경의 여자미술학교(당시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여자미술학교의 한국인 여성 유학생 대다수가 자수과를 선택했던 반면, 박래현의 경우 사범과 일본화부로 진로를 정했는데 이는 한국인 유학생으로서는 남녀 통틀어 최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946년에는 수묵채색화가 김기창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1940년대 말부터는 남편과 함께 면 분할에 의한 입체주의적 화면구성의 실험적 수묵채색화를 모색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먹과 동양화 물감만을 고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천, 실, 털실, 엽전 같은 물질을 작품에 도입하여 태피스트리를 제작하거나,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동판화, 석판화, 실크스크린, 메조틴트 등 다양한 판화를 제작하기도 하는 등 장르와 매체를 넘어서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12차례나 부부전夫婦展을 열었던 점은 과거와 달라진 여성 예술가의 위상을 시사해준다.

<예술가의 연애와 결혼>

이쾌대 I '여인의 초상' 캔버스의 유채 45.5*38cm 194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창조적 주체로서의 여성의 능력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상당히 희귀한 편이다,

1930년대 여가수들 왼쪽으로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이준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출처: 이난영 전집 유정천리 2016

국내에서 남성 작가들에게 사사한 정찬영, 이현옥 등과 기생 작가 김능해, 원금홍, 동경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출신인 나혜석, 이갑향,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과 전명자, 박을복 등 자수과 유학생들의 자수 작품들을 선보인다.

180명-200명 이를 통해 근대기 여성 미술교육과 직업의 영역에서 ‘창작자’로서의 자각과 정체성을 추구한 초창기 여성 작가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결혼 정조와 문답 독본이 등장하다 딱지본 포켓용 신여성의 비참한 자살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김은호 I '미인승무도'(1922)' 비단의 채색 272*115cm 1922 플로리다 대학 사무엘 하른 미술관 소장. 이 작품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다.

서화미술회에서 안중식(安中植, 1861-191), 조석진(趙錫晉, 1853-1920)의 가르침을 받아 그림에 입문한 이당 김은호(以堂 金股鎬, 1892-1979)는 곧 어진화사로 발탁되는 영광을 얻었고 이후 빠른 시일안에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1924년부터 고려미술원에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25년부터 3년간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일본화를 공부하고, 1927년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 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 교수 등을 역임했다.

화면의 중간 즈음에서 비스듬히 내려 뻗친 오동나무 아래에 두 명의 여인이 승무를 추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 <미인승무도>는 1922년 제1회 조선미전에서 4등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수하미인도(樹下美人圖) 형식의 전통적인 구도를 일부 차용하고, 오동나무에 괴석, 소철, 대나무가 있는 정원과 난간으로 둘러진 공간으로 화면을 효과적으로 구획하여 장식성을 보여주었다. 최고급 비단에 장황기술도 최상급이어서 김은호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조선미전 도록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는데 2004년에 처음 그 소재지가 확인되었고, 이번 전시에서 국내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의 여성 미술가들” 일본유학파가 생기다.

가정도감 1924-1942

딱지본 소설과 출판형태가 유사한 일종의 가정백과사전이다. 주로 한글과 셈법, 각종편지 관혼상제 등의 의례절차를 비롯하여 각종 행정서식과  점치는 법, 응급처치, 지리 정보 등 실용적 목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찬영 I '공작'(1937),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60년’展 이후 45년만의 공개

정찬영(鄭燦英, 1906-1988)은 1906년 평양 태생으로 1925년 경성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그림에 입문하였다. 1926년 당시 채색화가로 저명했던 이영일로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이후 작품세계의 가닥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승의 화풍을 기반으로 한 세밀한 채색화조화를 통해 제8회(1929), 제9회(1930) 조선미전에 입선하며 두각을 나타냈으며, 제10회 서화협전(1930), 제10회 조선미전(1931)에서 각각 특선, 제14회 조선미전에서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기성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30년 도봉섭과의 결혼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지속하며 조선미전에 출품하였던 점은 전근대의 여성과는 차별되는 신여성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딸을 낳고 나서 얻게 된 외아들의 돌잔치를 하고 난 후 기쁜 마음을 화사하게 깃을 편 공작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제16회 조선미전의 입선작이다. 창경원에서 활짝 날개를 편 공작을 한 달 이상 사생하여 이 병풍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노년기까지 거실에 늘 이 작품을 두었을 정도로 평생 사랑했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지만, 남편을 내조하면서 네 자녀를 잘 길러 정찬영은 ‘신가정’의 모범적인 주부이자 여성화가로 근대 문화예술계의 인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남편이 북으로 납치되어 네 자녀를 키워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작품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

<여자미술학교(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의 자수화>

박을복 I '표정' 천에 자수 92*110cm 1964 공예작품

동경의 여자미술학교(현 女子美術大學) 출신인 나혜석, 이갑향,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과 전명자, 박을복 등 자수과 유학생들의 자수 작품도 선보인다.

일본 여성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작가들 소개

천경자 I '언젠가 그날' 종이에 채색 195*135cm 1969

여성신교육 확대

[신여성과 기생] 당시 일반 여성들 거리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기생 중 일부가 예술가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중 그림을 그리는 여성도 있었다. 관기제도 이후에 기생은 근대의 유흥문화 속 성적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 영화 대중가요 춤 그림 등에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기도 했다. 당시에 거리에 나갈 수 없는 여성을 대신해서 기생들(total artist)이 그림을 그리다

기생 김영월 연도미상

관기제도의 소멸 이후 근대기를 살아갔던 기생은 근대의 유흥문화 속에서 시각적 볼거리의 대상이자 성상품으로 전락하기도 했고, 패션, 영화, 대중가요, 춤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면서 대중문화를 주도하기도 하는 등 복합적 양상을 띠었다.

1920년대 여학생 집단이 새로운 여성군으로 등장한 이후, 뾰족구두에 통치마 차림을 한 기생이 여학생과 구별되지 않는 것 자체가 사회적 논란이 되는가 하면 철폐되어야 할 구습으로 배타시 되었다. 교육받지 못한 여성, 그리고 기생으로 대표되는 구여성과 교육받은 신여성 간의 이분법적 대립은 원시와 문명, 전통과 근대 간의 대립, 갈등을 담고 있었다. 미술전람회 속에 기생이 재현될 때는 기생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조선 춤, 또는 지켜야 할 조선 전통과 동일시되는 한에서였다.

정찬영 I 한국산 유독식물을 위한 밑그림 1933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작품 설명하다

[전시를 말하다(MMCA토크)] <1월 날짜 미정> 제목: 근대 경험의 만화경, 신여성-식민지 조선 신여성의 삶과 이미지 강연자: 김수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 <2월 날짜 미정> 제목: <언니는 풍각쟁이야: 재즈로 듣는 신여성> 강연자: 장유정(단국대학교 교수) - 재즈 공연 형식으로 진행(연주자: 주화준 트리오) <3월 날짜 미정[1]> 제목: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기 여성 미술가들> 강연자: 권행가(덕성여자대학교 강사) <3월 날짜 미정[2]> 제목: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 신여성장, 여배우와 모던걸> 강연자: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날짜 미정> 제목: 학예연구실장이 들려주는 전시이야기 강연자: 강승완(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오지호 I '처의 상' 72*52.7cm 1936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 : 5인의 대표적 신여성(다섯 명의 신여성 나혜석(1896-1948, 미술), 김명순(1896-1951, 문학), 주세죽(1901-1953, 여성운동가),

남성 중심의 미술, 문학, 사회주의 운동, 대중문화 등 분야에서 선각자 역할을 한 다섯 명의 신여성

최승희 사진 '야외무용'과 '보살춤' 1942 광주시립미술관

최승희(1911-1969, 무용), 이난영(1916-1965, 대중음악) 집중 조명하다.

당시 찬사보다는 지탄의 대상이었던 이들 신여성들은 사회 통념을 전복하는 파격과 도전으로 근대성을 젠더의 관점에서 다시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에 현대 여성 작가(김소영, 김세진, 권혜원, 김도희/조영주)들은 5인의 신여성을 오마주한 신작을 통해 당시 신여성들이 추구했던 이념과 실천의 의미를 현재의 관점에서 뒤돌아본다.

최승희(1911-1969, 무용)

1926년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石井漠, 1892-1962)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경으로 건너갔다. 곧 주연급 무용수로 발탁되고 후진을 지도할 만큼 급성장했다. 1929년 귀국하여 경성에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전국을 순회하면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쳤다.

1931년 문학가 안막(안필승, 1910-?)과 결혼하고 딸을 출산했다. 1933년 이시이 문하로 재입문한 후 이듬해 동경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열었다. 전통춤을 현대화하는 데 성공하고, 1936년부터 유럽과 미국, 중남미에까지 진출하여 ‘동양의 무희’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중일전쟁 중 일제의 강요로 중국에서 일본군 위문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1946년 남편과 함께 월북하고,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공훈배우(1952), 인민배우(1955)란 칭호를 받았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최승희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김명순(1896-1951, 문학)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1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근대학문을 접했다. 1917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청춘'의 현상문예에 단편 '의심(疑心)의 소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1918년에 떠나 음악을 전공한 두 번째 일본 유학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창조'와 '폐허이후'에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1920년대 중반 나혜석, 김원주(1896-1971)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해 1세대 여성 문인으로 함께 거론돼 왔다. 그러나 논설과 평론 등을 통해 여성 문제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냈던 두 여성과 달리 김명순은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데 매진했다.

1922년 '개벽'에 게재한 번역시 '대아(大鴉)', '헤렌에게', 번역소설 '상봉(相逢)'을 통해 애드거 앨런 포우의 작품을 조선에 처음 소개하였고, 1923년 발표한 희곡 '어붓자식'은 여성이 발표한 최초의 희곡 작품이다. 1925년 발간한 '생명의 과실(果實)' 또한 여성 최초의 창작집이며, 시, 소설, 수필(감상)을 모두 싣고 있다.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1929-30)을 출간하는 등 20여 년 동안 소설, 시, 수필, 희곡, 평론 등 170여 편을 창작했다. 서녀(庶女)라는 이력과 연애 등 개인사에 대한 세간의 소문과 그로 인한 편견이 김명순의 문학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가로막아왔으나 선구적인 근대 여성작가이자 번역가로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 말 일본으로 떠나 1950년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세죽(1901-1953, 여성운동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의 영생여학교에 다니다가 경성의 중등학교로 진학했다. 이 시절 3·1 운동에 참가하여 구금되면서 학업을 중단하였고, 1921년 상해로 유학을 떠나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후 상해를 무대로 항일과 조선공산당 조직 활동을 하던 중 박헌영(1900-1955)을 만나 결혼했고, 1925년 허정숙(1902-1991)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을 설립한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김활란 등과 함께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를 결성하였다. 1928년 일제 경찰을 피해 만삭의 몸으로 박헌영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고, 모스크바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2년 당 재건을 위해 옮겨간 상해에서 박헌영은 다시 체포되었고, 1934년 박헌영의 사상적 동지였던 김단야(1899-1938)와 재혼했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여성주의자다. 단발과 자유연애를 옹호했고 무산자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Socialist Feminist/SF) 주세죽이 기획하던 새로운 사회, 그리고 과학소설(Science Fiction/SF)의 미래 사회. 이 중첩(superposition)의 세계가 SFdrome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코즈모드롬(Cosmodrome)이라는 우주 발사기지가 있다.1937년 김단야가 일본 간첩 혐의로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주세죽 역시 체포됐다. 스탈린 정권에 의해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1938년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됐다

이난영(1916-1965, 대중음악)을 조명한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에 입단하고, 태평레코드사에서 취입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였다. 오케레코드사에서 <향수>(1933), <고적>과 <불사조>(1934)를 연달아 내면서부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935년 조선일보가 실시한 향토노래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문일석의 노랫말에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이 곡을 붙여 만든 <목포의 눈물>을 취입해 가요계의 샛별로 등극했다.

1936년 오케레코드사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김해송(1911-?)과 결혼하여 신민요와 재즈 등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힘썼다. 1939년 무렵 박향림, 장세정 등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 일원으로서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레뷰쇼를 선보였다. 해방 후 남편과 함께 KPK악극단을 이끌며 새로운 유행을 이끌었으나, 한국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되어 홀로 악극단을 운영했다. 1953년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조카(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기획, 결성하여 미국으로 진출시키기도 했다.

[보충자료] 가수 이난영이 1939년 녹음한 블루스 곡 <다방의 푸른 꿈>에는 다양한 경로들이 존재한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강제 이주 후 몇 세대를 거쳐 만들어진 미국 흑인들의 낯선 음악, 사교댄스의 라이브 무대 음악으로 받아들여진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블루스, 근대 도시에서 생겨난 상실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오디오-비디오 설치 작업 <모르는 노래>는 이처럼 상이한 경로들을 포함한 이난영의 목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회전하는 무대 위에서 계속하여 다른 얼굴을 끌어들이며 갱신된다. 실제 이난영의 무대 의상과 함께 재현되는 이미지는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했던 이난영의 ‘꿈’ 을 불러낸다.

[4부] 독립여성 신여성 여성학교

독립여성 신교육을 받는 신여성

전시 개막식 당일인 2017. 12. 20.(수) 오후 4시에는 공연 〈신여성 노래하다〉(장유정 기획)가 있을 예정이다.

변월룡 I '최승희 초상' 캔버스에 유채 118*84cm 1954 개인소장

또 전시 기간 중 〈MMCA 토크〉를 통해 사회학, 미술사, 영화사, 대중가요사의 관점에서 신여성을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신여성의 취미>

나팔형 축음기 1910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소장

이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감독, 1934)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변사 상영(김태용 감독 기획)을 2018. 1. 6.(토) 오후 7시에 서울관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진행한다.

김기창 I '정청' 314*159cm 193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