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단색화인가? -윤진섭·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호남대 교수 200자 원고지 40장 정도의 분량 // 명문이다. 윤집섭 미술평론가의 공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 프랑스의 '인상파', 독일의 '표현파', 미국의 '팝아트', 일본의 '모노하'가 있다. -Art in Culture 2012. 06
그런데 한국에는 '단색화(처음에는 '단색파' 요즘 '단색조 회화'도 있다)'가 있다. 단색화는 직역을 하면 실패다. 포괄적으로 봐야 한다. 서양에서 아직 단색화를 잘 모르지만 이 용어가 가지는 결함에도 우리 시대가 이 용어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아래를 클릭하면 전체 내용을 다 볼 수 있다. 2000년 한일 간 '단색화'와 '노모하' 비교에서 이 논의가 시작되었다.
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 Korean Monoch rome Painting)>전(3. 16~5. 13)이 드디어 두 달간에 걸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 전시에 초빙 큐레이터 자격으로 참여한 나로선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시는 기획 자체로만 볼 때는 준비 기간이 약 1년여에 불과하지만, 그 시발(始發)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이 그것이다. 운 좋게도 이 역사적인 전시의 기획을 맡게 된 나는 일본의 모노하(物派)와 한국의 단색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에 걸친 일본의 모노하와 이와 비슷한 시기에 태동한 한국의 단색화는, 사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큐레이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전시 기획을 해 보고 싶어 할 ‘꿈의 전시’이다. 그 이유는 우선 전시에 소요되는 어마어마한 비용뿐만 아니라, 행정적 지원이 없이 독립적으로 추진하기에는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도처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광주비엔날레의 후광이 없었다면, 이우환을 비롯하여 스가 기시오(管木志雄), 세키네 노부오(關根伸夫)와 같은 일본 모노하의 거장들이 선뜻 초대에 응했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때, 12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뒤돌아 봐도 역시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광주시립미술관 1층 전관을 사용한 문제의 이 전시를 통해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는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대규모로.
단색화를 단색화라 부르다! ‘Dansaekhwa’
역사적이라 함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한일 양국 현대미술사의 중핵을 차지하는 이 두 사조는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 꿈틀댄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기체적 특성을 지닌다. 죽었는가 하면 다시 호출되어 그 의미가 되새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일본의 모노하는 ‘Monoha’라는 영어명으로 해외전이 열리고 외국의 미술전문지나 신문에도 그렇게 표기되고 있다. 그에 반해 단색화의 경우 우리 스스로 모노크롬이나 모노톤, 단색화, 단색조 회화 등등으로 통일감 없이 산만하게 불러 왔다.
2000년 4월 어느 날,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의 큐레이터로 도록의 영문 교정을 보던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우리의 단색화를 ‘모노크롬’이니 ‘모노톤’ 회화라고 부를 것인가? 서양의 모노크롬 회화와는 뚜렷한 내용적 미감적 이념적 차이를 지니고 있는 우리 고유의 예술적 산물을 과연 그렇게 포장해도 되는 것인가? 순간, 나는 이제까지 생각해 온 어떤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단색화를 ‘Dansaekhwa’라는 고유명으로 표기하는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 실행에 옮기자. 그래서 나는 거사(?)를 하는 심정으로 도록 원고의 영문판에 나오는 수많은 ‘Korean Monochrome’이라는 번역어를 모조리 ‘Dansaekhwa’로 바꿔버리고 말았다. 이 교정원고가 이번 전시의 아카이브에 전시되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은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놨으니,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일.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여러 지면을 통해 이 용어의 사용이 갖는 의미를 역설했고, 그동안 십수편에 이르는 크고 작은 글 속에서 단색화를 ‘Dansaekhwa’라는 고유명으로 표기했다. 물론 단 한 명의 동조자나 메아리조차 없는 나 혼자만의 고독한 외침에 불과하였지만 말이다.
어떤 주장이 파급력을 갖기 위해서는 현장이 필요하다. ‘단색화’의 경우 당연히 전시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게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미술비평과 전시기획을 병행하는 독립큐레이터인 나에게 미술관에서의 전시는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窮卽通)”던가. 마침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품을 활용하여 외부 큐레이터에게 전시 기획을 맡기는 ‘초빙 큐레이터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내가 꿈에 그리던 <한국의 단색화>전을 기획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 제도 덕분이다. 나는 기획안을 가지고 미술관 관계자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배순훈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내가 본 배 관장은 대기업의 회장과 장관을 역임한 인사인 만큼 열린 시각과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 나는 작년 5월 배 관장, 이지호 학예팀장, 그리고 많은 학예연구사와 미술관 관계자들 앞에서 전시 기획에 관한 발표를 했다. 그 후 개인적인 준비기간으로 서너 달을 보내고 초겨울에 접어들면서 전시 준비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단색화의 대표급 작가들의 질 높은 작품이 다량으로 소장돼 있었다.
이번 전시는 곽인식 권영우 김기린 김장섭 김환기 박서보 서승원 윤명로 윤형근 이동엽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최명영 최병소 하종현 허황 등 17명에 이르는 1세대 작가의 1970년대 및 그 이후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산금 김춘수 김태호 김택상 남춘모 박기원 장승택 등 2세대 작가의 출품작이 소장 작품들로 채워졌다. 그 비중이 약 70%에 달한다. 더구나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은 그 질에 있어서나 작품 크기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김환기의 대형 작품이 없는 것, 김기린의 작품이 균열이 심한 것 등이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문제는 개인소장자(김환기의 경우)의 도움과 리움 삼성미술관(김기린의 경우)의 협찬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기획의 초기 단계에서 이 전시의 타이틀은 ‘한국의 단색화’였다. 그러나 전시 기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중에 있을지도 모를 해외 전시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단색파(Korean Dansaekpa: The Korean Monochrome Move ment)>로 명칭을 바꿀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한국의 단색파’로 이름을 고쳤다. 그 이유는 1세대 작가들 전원이 지금도 같은 경향의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 1980년대 이후 등장한 2세대 작가들이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단색화는 죽은 과거의 스타일이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이 용어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나는 전시의 타이틀로 이 명칭을 확정하고 계획을 밀고 나갔다. 연초에 보도된 신문기사에서 ‘한국의 단색파’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 타이틀이 다시 ‘한국의 단색화’로 바뀌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그렇게 타이틀이 확정되고 포스터 디자인 시안이 나왔을 무렵, 어느날 정형민 관장이 전화했다. 아무래도 이 전시가 ‘단색파’라는 타이틀로 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느냐는 조심스러운 의견이었다. 서로 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결국 나는 정 관장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했다. 특히 입체작품을 출품한 김장섭과 최병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출품작이 회화인 점도 ‘단색파’를 고집하기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무리가 따랐다. 나는 미술사를 전공한 정 관장의 조언을 지금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전시 기획이란 무수한 의견과 견해, 아이디어의 총합이 아닌가. 단지 향후, 1970년대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 나타난 입체적 경향과 설치를 포함한 보다 대규모의 전시가 가능하다면 다시 이 타이틀을 살려, 보다 정교한 대규모의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 특히 ‘단색파’의 해외전은 단색파를 둘러싼 한국 현대미술의 저력을 유감 없이 보여 줄 것으로 확신한다.
단색화의 뿌리줄기를 찾아서
1970년대 중반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나는 ‘단색파’의 태동 과정을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어떻게 시작돼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 이면을 좀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기획자로서 나는 내가 모르는 부분은 작가들의 회고담이나 증언, 서적을 통해 보충해 나갔다. 1970년대 중반 당시는 인사동에 화랑이 10여 개에 불과할 정도였다. ‘미술시장’이란 용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래 위층 합해서 도합 8개의 전시실을 갖춘 덕수궁 석조전에 들어 있었다. 거기서 때만 되면 어김없이 <앙데팡당>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과 같은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가 열렸다. 얼어붙은 공안정국 치하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작품은 알아서 ‘자체검열’을 하며 전시를 꾸려 가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붉은색은 북한 공산당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빨간색을 많이 쓴 추상 작품들이 <국전>에서 줄줄이 낙선하던, 실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다.
인사동 조계사 맞은편에는 일본식 목조건물인 미술회관이 있었는데, 그나마 이 정도가 거의 유일한 공공 전시관으로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전시의 갈증을 풀어 주고 있었다. 이 빈약한 미술회관이 동숭동 문예회관 옆(현재 아르코미술관)으로 옮겨 간 것은 1980년대 미술의 폭주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런 미술회관이 동숭동으로 옮겨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린 <현실과 발언>전의 무산은 당시 공안통치하의 정부가 가한 미술 탄압의 첫 사례였다. 이른바 민중미술의 전조였던 것이다. 그 몇 년 뒤에 불어 닥친 것은 민중미술의 거센 바람이었다. 소위 <힘>전 사태로 대변되는, 한 치의 앞도 가늠이 안 되는 황사 바람 속에서 미술인들은 이리저리 내달으며 이념의 편 가르기를 시도했다.
한국의 단색화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숱한 논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불씨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나는 전시에 관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단색화의 면모를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①일체의 구상성을 배제할 것 ②창작열과 실험성이 197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작가에 치중할 것 ③전기와 후기 단색화을 통해 시대의 변화는 물론 변모된 미의식과 감각, 재료의 차이를 보여 줄 것 ④단색화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공통분모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할 것 ⑤서양의 모노크롬과 한국의 단색화 간의 미학적 이념적 차이에 주목할 것 등 내가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견지한 관점이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우선 이 전시에 할당된 2개의 기획전시실이 모두 합해서 1,200평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단색화라고 하는, 약 40여 년에 걸쳐 지속된 미술상의 흐름을 담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초대된 작가 수가 전후기 합쳐서 31명인데, 이 작가들만으로 그처럼 다양한 양상과 갈래를 보여 준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는 특히 전시 작품의 효율적인 공간 배치와 작가당 출품작 수의 적절성을 놓고 볼 때 심각하게 고려될 사항이다. 무엇보다 전시 기획은 일종의 기술이 아닌가. 특히 이번의 경우처럼 회고적 성격이 강한 전시일 경우 자칫 잘못하면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을 터였다. 이른바 백화점식의 나열로 갈 것인가, 아니면 큐레이터의 독자적인 시각에서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큐레이팅의 개념을 선명하게 보여 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큐레이터라면 누구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초미의 문제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따라서 가지치기가 불가피했다. 떠오르는 많은 좋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모두 담아 내는 문제는 전시공학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쉽지만 이 작가들에 대해서는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 못지않게 신경을 쓴 부분이 아카이브이다. 작가와 작품, 그리고 하나의 이즘이 태동하게 된 배경과 전개 과정을 증언해 주는 온갖 자료의 총화인 아카이브는 전시기획자가 전시와 서문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참조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홀은 아카이브 공간으로는 최적의 환경과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나는 이곳을 주목했다. 1전시실과 2전시실 사이에 위치한 이곳은 드넓은 1전시실을 둘러본 관객들이 피곤한 다리를 쉴 겸 쉬어 가면서 자료를 살펴보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게다가 중앙홀 뒤편의 넓은 채광창에서 쏟아지는 밝은 햇빛은 전시실의 인공조명에 싫증이 난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곳에 약 3백여 점에 달하는 각종 도록과 신문 및 잡지 기사, 드로잉, 작가 내지는 미술관계자의 영상 인터뷰가 제시되었다. 벽에는 한국 단색화의 특징과 본질을 규명한 미술평론가 내지는 미술사가의 어록을 인쇄하고 주요 전시 연보도 제시했다.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이너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구현된 아카이브실의 가늘고 긴 문은 1전시장과 2전시장을 8자로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른바 순환의 논리다. 두 개의 전시실을 둘러본 관객들이 다시 1전시장 혹은 2전시장을 둘러보려고 할 때 곧바로 전시실 정문을 통하지 않고 이 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관객들은 마치 대기를 순환하는 공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전시를 재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문의 뒤편, 그러니까 아카이브실의 전면에 내가 구상한 ‘단색화의 뿌리줄기 개념도’가 거대한 무광의 MDF 벽면에 인쇄되었다. 이 지도는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오래전부터 자리잡아 왔을 터이지만, 정착 떠오른 것은 도록이 편집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갑자기 이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순간,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실 테이블에 앉아 일을 보던 나는 종이를 펼쳐 놓고 색연필로 이 뿌리줄기 개념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단어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단색화을 비롯하여 몸, 모노크롬, 선(線), 우주, 모노톤, 바람, 비물질화, 오방색, 범자연주의, 촉각, 음양오행, 임시임장성, 현상학, 수행성, 무위자연 등등 약 49개에 달하는, 한국의 단색화나 서양의 미니멀리즘 내지는 모노크롬 페인팅을 기술할 때 흔히 만나게 되는 빈도 높은 용어들을 선택, 무작위적으로 배열한 후 연결시켰다. 그 샘플이 무려 6종인데 그중에서 잘 된 것을 골라 아카이브 벽에 인쇄한 것이 바로 ‘단색화의 뿌리줄기 개념도’인 것이다.
이 지도는 서양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아트가 르네상스 이후에 전개된 선형적 구조의 끝물인 점에 반해, 한국의 단색화는 우주를 순환으로 본 주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것은 서양의 미니멀리즘처럼 지배 논리의 산물이 아니라 상생의 구조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성좌처럼 끊임없이 유동하며 교호(交互)와 순환, 상생의 미학을 개념화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구조가 아닌, 다차원적, 다시점적, 우주적 내지는 대지적 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서구의 원근법이나 합리적 공간에 지배된 과거의 틀을 벗어나 ‘잃어버린 풍경’을 찾기 위한 독자적인 모색의 발로이기도 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단색화의 뿌리줄기 개념도’가 장차 우리가 세계의 시민이 되기 위해 나아가는 데 필요한 한 장의 지도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로
전시에 맞춰 개최된 국제학술세미나에 초청 연사로 온 리차드 바인(《아트인아메리카》 수석 편집장)의 조언처럼, 이제 우리는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좁은 지역에 머물며 서로 아옹다옹할 것이 아니라, 한국미술에 대해 이해도 부족하고 적대적인 생각을 지닌 반대파들이 득실거리는 세계무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끊임없는 설득과 토론, 논쟁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우리의 언어를 세계의 보편적 언어로 만들어 서로 소통하고 그 열매를 함께 나누는 보다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단색화를 ‘Dansaekhwa’라고 호칭하는 일이 시대착오적이거나 국수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것은 시대착오적이지도 국수주의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문화는 그런 것이다. “언어가 의식을 지배한다”는, 오래 전에 내가 쓴 명제를 상기한다면 단색화를 서양식 개념의 ‘monochrome’이 아닌 ‘Dansaekhwa’로 표기하는 일은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다. 이 전시에서 봤듯이 오랜 기간을 거쳐 숙성된 우리의 미적 산물들을 단지 서구의 화풍에서 촉발되었다는 이유로 모노크롬의 범주 속에 가둔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것을 가지고 서구의 우산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얼마 전에 샘표식품이 이제까지 해 온 간장의 영어 표기를 일본식 ‘soy sour ce’가 아닌 ‘Ganjang’으로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서양 사람과 영어 회화를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간장을 ‘소이 소스’라고 말한다. 과연 그것이 합당한 일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한국의 전통 간장은 왜간장과 역사와 제조법은 물론, 맛 향기 영양 쓰임이 서로 다르다. 그것이 문화의 차이이며,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차이들이 모여 이루는 세계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번 전시의 공간을 구상하면서 나는 한국의 반가(班家) 전통 기와집을 생각했다. 문을 열어 놓으면 하나로 관통하는 탁 트인 공간 구조는 한국 전통 건축의 백미이다. 그것은 서양의 폐쇄적인 구조가 아닌, 개방적이며 순환적인 구조적 특징을 보여 준다. 이른바 ‘차경(借景)의 미’인 것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타나는 중정(中庭)과 다시 만나는 크고 작은 문들의 연속, 그것을 어떻게 단색화 작품들과 조화를 시킬 것인가 하는 점을 전시 준비 기간 동안 내내 고심했다. 다행히 국립현대미술관 디자인팀은 나의 이 컨셉트를 잘 구현해 주었다. 1전시실의 두 번째 방에 걸린 윤형근의 작품을 보고 나서 일(1)자로 탁 트인 공간 저 멀리 뻥 뚫린 사각 문 사이로 보이는 윤형근의 또 다른 작품은 바로 이 ‘차경’의 공간이 보여 주는 미의 진수이다.
이번 전시를 둘러본 많은 미술 전문가들이 들려 준 의견은 대략 전기 단색파 작가들에 비해 후기 단색파 작가들의 작품이 예쁘게 길들여져 있다는 쪽으로 집약된다. 이우환 선생은 강연에서 전후기 단색파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부정의 정신의 결여를 꼬집었다. 1970년대 단색파 운동의 초기에 충만했던, 침묵을 통한 저항과 부정의 정신이 더 이상 엿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시간이 지나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작품의 내용도 변질돼 갔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의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단색파 작가들은 지하로 잠적해 들어가 개인적인 양식화의 시기를 겪었다. 1980년대 이후에 단색화를 시작한 작가들은 플랙시글라스를 비롯하여 레진, 우레탄 자동차 도료 등 다양한 산업재료를 작품에 활용했다. 전기 단색화 작가들 중 일부는 공예품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진 작품들을 양산했다. 한국의 단색화가 그 자체 내에 문제를 지니고 있다면 바로 이 같은 부정의 정신의 결여일 것이다.
끝으로 이번 <한국의 단색화>전의 도록에 쓴 나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한국의 단색화>란 타이틀을 내건 이번 전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다. 환영한다. 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불 꺼진 모더니즘의 잿더미를 뒤져 하나의 불씨라도 건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가치 기준이 실종돼 지향점이 없는 이 자유방임의 시대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한 예술의 참 기능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이 전시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40년에 걸쳐 이룩한 ‘마음의 풍경’이다. 그것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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