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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그의 동반자 시게코 우리가 잘 모른다

우리는 시게코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그 집안을 보면 상당히 지식인 층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화가였고 그래서 미술지망생인 시게코 생애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고 그의 아버지는 도쿄대학 출신으로 중고교장이었다. 어머니는 갑부집안 딸이었다고.

시케코를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여자라고 투덜거렸지만 딸이 미술 한다고 하니 적극 지원했고 아버지가 딸을 위해서 지방 교장이었기에 동경에 가서 일본 최고대학 나온 미대생을 교사를 모시기 위해 동경 출장 갈 정도 그게 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게코는 타고난 반항적 소녀였고 그래도 공부는 1등을 했다고 중고시절 우리나라로 치면 성인용 국전(일본 중앙미술전)에 학생이 출품을 해 입선도 했으니 천재 소녀가 태어났다고 일본 신문에도 나고 그랬다고 그러나 반항적인 기질에 시게코는 당시 일본 최고 학벌을 나온 지식인과 어울리지 않게 백남준은 과격한 포퍼먼스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자신과 코드가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백남준 외모 등에 그를 마치 프랑스 시인 랭보처럼 봤다니 그녀에게는 백남준이 그 시대의 욘사마였던 것이다. 사실 플럭서스를 같이 했지만 이게 반 자본주의 미술이었고 그러니까 사실은 좌파미술 운동이었던 것이다 <아래 1964년 시게코가 동경 '나이쿠아 갤러리'에서 기획한 퍼포먼스 작품 '연애편지' 주 한 장면 당시일본에서는 아주 과격하고 파격적인 해프닝 아트였다고 구겨진 신문지 위에 시게코 당시 일본 미술평론가들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백남준은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했단다>

시게코 여사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인터뷰(다른 기자들과 함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참 말을 잘 한다. 아주 쉽게, 아주 짧게, 아주 선명하게, 알아듣기 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시게코 여사도 평생 가난한 남편 만나서 고생을 많이 해 지병이 많았다. 물론 백남준도 예술가 아내를 얻었기에 밥 제대로 얻어먹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케코 여사 백남준 주변에 하도 여자가 많아서 그거 막느라고 평생 고생이 무지막지했다
아래는 <내한한 구보다 시게코 여사 인터뷰> 2015년 7월 19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구보다 시게코 여사가 기자간담회를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백남준이 살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은, 그의 80회 생일 소감은?
"남준, 당신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요.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당신도 여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아요. 백남준 어머니는 점을 잘 보셨는데 백남준은 집 없이 부랑아처럼 세계를 돌아다닐 거라고 무당이 예언했는데 어느 정도 맞췄어요. 백남준은 TV를 가지고 전 세계를 집시처럼 돌아다녔어요. 백남준은 공장 같은 곳에서 살았는데 지금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너무나 좋은 이 집에 모셔져 있느니 여기가 정말 백남준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트센터 관계자분에게도 감사드리고 싶어요"

- 백남준은 어떤 예술가였다고 생각하는지?
"나와 백남준은 우선 플럭서스(fluxus) 멤버이자 같은 예술적 동반자였죠. 나와 백남준은 이미 행위미술에 공감하여 어려운 시절을 같이 동고동락했어요. 플럭서스 운동이 결국은 비디오아트로 발전한 거예요. 일본에 있을 때부터 백남준을 알았지만 처음 만난 것은 1964년 뉴욕에서고 거기서 슈아 아베도 만나 '456로봇'도 만들었어요. 비디오아트는 초반에는 그 TV자체가 이동하기 어렵고 무겁고 잘 망가져 정크아트(junk art)로 취급당했기도 했죠.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에 그것을 옮기느라 백남준이 고생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인정을 받지만 당시에는 백남준의 존재 자체를 거의 몰랐어요. 비디오아트가 저급예술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급예술이에요. 그는 남이 가지 않은 예술을 개척한 선구자로 21세기의 문을 열었죠"

- TV와 로봇에게 생명을 넣은 방식의 예술을 서구에서 어떻게 봤는지?
"백남준은 기술의 인간화를 지향했고 예술의 휴머니즘을 중시했어요. 기술은 단지 도구로 볼 뿐이에요. 그는 낡은 것은 파괴하는 창조자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어요. TV정원이나 TV부처도 다 그런 정신을 발휘한 거죠. 하이테크를 그냥 도구로 이용했어요. 그리고 백남준은 샤머니즘 요소가 강했고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것에도 심취했죠. TV를 부수는 행위가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수행이나 명상이었을 거예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 사고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샀죠."

- 백남준이 어디엔가 살아있다면 뭘 할까?
"백남준은 아직도 마이애미 집 근처 어딘가 해변에 있을 것 같아요. 백남준은 50대가 되어서야 귀향했는데 그때 선친 묘지에 갔어요. 그 주변에 무명무덤이 많았고 너무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백남준은 무명무덤처럼 초야에 묻혀 사는 식이 아니라 내 옆에 카트린 이캄 작가도 같이 지내 알겠지만 파리나 뉴욕파티에 즐겨 참가하는 축제주의자였어요. 여러 곳을 두루 다니는 것이 그의 방식이고 세상을 사는 프레임이자 소통방식이었죠. 그가 지금 살아있어도 역시 그랬을 거예요."

백남준와 시게코가 결혼한(법적 부부가 된) 이유는 의료보험증 때문이다.

백남준을 14년간 시게코가 따라가녔다 어느 정도는 맞다. 둘은 코뮌(동거)이었지만 사실 시게코는 남자쪽에서 열렬히 구애해 하버드출신 미국인 갑부와 결혼한 적이 있다. 시게코 시부모와 맞지 않아 튕겨 나왔다. 백남준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 백남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남준 독신주의자 예술가에게 자식은 작품이고 그런데 어느 날 시게코 아이를 가지고 싶어 병원 검사했는데 암 진단 받고 애를 못낳는다고 의료보험 없이 치료 포기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마침 백남준 전 소속사 직장에서 만들어 준 의료보험증이 있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해서 법적 부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