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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피아노 걷어차고 요강으로 연주하는 백남준

[백남준추모5주기] 피아노는 걷어차고 요강으로 연주하는 백남준 
[최재영의 사진 첫개인전] <백남준 굿> 갤러리아트링크에서 2011.01.25-02.13 


백남준의 전자굿

미국무당 살럿과 한국무당 남준의 기막힌 앙상블 

갤러리 아트링크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17-6 전화: 02 -738-0738 홈페이지: www.artlink.co.kr 

백남준에게 굿은 모든 예술의 원초적 근원이었다[巫舞] 
(To Nam June Paik the shamanistic ritual of Good is the primitive source of art) 

최재영이 다소 늦은 감 있게 첫 개인전으로 준비한 이번 전시는 2006년 1월29일 작고한 백남준의 5주기를 맞이하여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최초로 공개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사진을 선보인다. 백남준 생일이었던 1990년 7월 20일 서울 현대화랑 마당에서 호형호제하던 요세프 보이스를 기리며 펼친 백남준의 주술적 행위예술을 촬영한 것이다. 

[작가소개] 최재영(1952년 경북생)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 동아일보 사진부기자(1976)로 입사했다 중앙일보(1978)로  옮김. '한국보도사진전'에서 금상, 은상, 동상 등 다수 상을 수상. 이탈리아 토리노시 테조리에라 전시관에서 초대사진전(KOREA 2002.12), 동강국제사진제(2010)에서 '그대 이름은 여자전' 등 기획전. 중앙대 사진학과 겸임교수(2003-2009) 현재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사진국장 

천연덕스럽게 굿을 시행하는 백남준 그는 가장 한국적 멋과 정감이 넘치는 사나이가 되다 

이번 사진전은 백남준이 추모했던 요셉 보이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시한 굿판을 최재영사진가가 찍은 것이다. 예술의 영속성과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존재적 애도라고 할 수 있다. 총 20여 점으로 구성된 이번 사진전은 '굿'이 백남준예술에 얼마나 막중한 영향력을 주었으며 신명의 의미가 현대미술 속에서 어떻게 융해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명 난 백남준의 익살스런 모습에서 우리는 예술화된 생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는 굿을 통해 실제적(real) 순간과 연출된(performative) 순간을 잘 비벼 맛있게 해 먹는 그의 넉살과 재치 그리고 그의 예술가로서의 역량이 놀랍다. 이런 두 가지 요소의 결합과 분리를 통해 흡수되고 변화되고 동화하는 과정을 포착할 수 있고 바로 그런 점을 사진시각적 감성으로 잘 잡아낸 최재영사진의 핵심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굿 퍼포먼스는 지상의 인간이 천상과 연결해 펼친 놀라운 상상력이 이 세상 공간의 연출이다. 그는 넘나들었고 그는 죽고 살았다. 최재영 사진들은 삶과 죽음과 교류와 황홀한 접신을 예술로 형상화한 천재의 날카로운 편린을 붙잡다. 이것은 인간을 뛰어넘은 초인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위대한 아트 엑소시스트 백남준이여 - 초인 백남준[미술관자료] 


굿이란 위선적 허위세력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깨고 그 판을 뒤엎거나 내동댕이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류학적으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같다. 귀신세력과 신명세력이 치열한 전투를 벌리다가 결국은 신명의 기운 귀신의 위세를 누린다는 것이 또한 굿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기의 주도권을 되찾는 것인데 그러나 굿의 본정신은 이미 많이 사라졌고 박제화되었다. 일본강점기와 일부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그  본질이 축소왜곡되고 훼손되었다. 

여기서 백남준은 기의 본질을 회복하고 전통의 굿의 고수들 앞에서 전혀 새롭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통해 기의 위력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굿(샤머니즘)과 피아노, 부처와 TV 등 도무지 같이 놓을 수 없는 두 요소를 같이 노을 수 있는 안목, 비빔밥 정신이 한국적 상상력의 극치다 

한 삽의 흙 가슴에 받아라 흙이 죽임이고 흙이 생명이다. 흙이 불이고 흙이 물이다. 흑흑 우는 게 흙이고 흐흐 웃는 게 흙이다. 죽임이 웃고 삶이 운다. 소원을 묻고 꿈을 묻어라. 너도 흙이고 나도 흙이니 너를 가슴에 묻고 나를 네 속에 묻는다 - 한 삶의 흙[미술관자료] 


[정재숙기자] "백남준을 찍는데 카메라가 신들린 듯 춤췄다" 
http://news.joinsmsn.com/article/aid/2011/01/19/4610395.html?cloc=olink|article|default 

죽은 소리야 허기를 채워라. 피아노 위에 고봉밥 놓았으니 저승 먼 길 돌아오느라 주린 배 채우거라. 평생 밥그릇에 묶은 삶 숟가락에 붙은 밥 뜯기 바빴으나 자 이제 숟가락을 꽂으니 허공을 퍼 먹어라. 밥에 케첩 발라 글로벌 음식을 다 맛보아라. 흠향 네 밥이 내 밥이다. 내가 먹고 네가 먹자. 내 살을 네가 먹고 네 넋을 내가 먹자. 삶과 죽음이 밥그릇에 비벼지니 배고프다. 친구야! - 피아노 위에 제삿밥 [미술관자료] 

굿이란 무엇보다 식사와 제사가 하나 되는 곳에서 삶의 멋을 회복하는 것이다 

굿이란 남이 주어진 판을 깨고 자신이 스스로 판을 이루는 과정인데 그 시대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 예컨대 독재, 독점, 독선 의 논리를 휘두르는 세력을 작살내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해방감을 맛보고 맘판 놀이굿을 벌리는 것이다. 맘판 놀다보면 그 속에 화해와 대안이 형성되고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와 에너지를 충전하여 삶의 힘겨움과 안타까움까지도 인정하며 보다 차원 높은 긍정으로 나아가 세상을 신명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을 얻은 것이다. 

백남준의 굿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TV를 도입하여 과거의 푸닥거리식의 굿을 추방하고 전혀 새로운 창조적인 굿을 연출하여 전통굿을 현대화하고 세계적인 퍼포먼스예술로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굿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정신 즉 죽은 자와 산자가 대화하는 방식을 통해서 인류의 과거와 역사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원시와 첨단문명이 또한 다시 만나게 된다. 구질서를 파괴하고 신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요셉 보이스의 모자(중절모)가 그의 상징인데 여기서도 피아노 위에 그의 모자가 놓여있다. 왜곡 별진 굴절된 일그러진 것을 펴는 것이 또한 굿의 정신인데 백남준은 요셉 보이스의 죽은 영혼을 복원하고 다시 그의 생일날 그를 되살려내어 그에게 말을 걸며 새로운 창조의 기운을 얻으려고 한 것 같다. 


백남준의 굿에서 특징은 놋그릇 요강 담뱃대 갓 한복 쌀(밥) 가위 등의 소도구가 중요한데 뒤샹의 변기처럼 다중적인 해석이 가능한데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없애는 그래서 과거를 끊어내고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의 상징성과 은유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신명(神明) 유년의 기억 난타의 기질이 되살아나다- 제의음악을 장죽을 물고 대야, 요강, 주발, 머리를 치다. 


굿이란 무엇보다 기운을 차리는 예식이자 통과의례다. 삶이 피폐하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 같이 모여 고민을 집단적으로 푸는 것이다. 그래서 굿의 원형은 당연히 개인굿이 아니라 대동굿이다. 대동이란 말 그대로 크게 하나가 되는 것인데 요즘은 그런 것이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굿이란 미신이 아니며 일종의 사회적 공적 혹은 공공의 적을 추방시키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것 아니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몸을 푸는 것 요즘말로 열 올리기(warming-up)라 할 수 있다. 


굿에서는 무엇보다 살기를 추방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요셉 보이스를 죽인 기세를 꺾고 새로운 삶의 기운을 다시 불어넣는다고 할까. 살기라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지만 독재시대에는 억압과 착취와 지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지금은 자본독식과 무한경쟁이라는 귀신이 너무나 사람들의 괴롭히고 지배하고 있으니 바로 우리시대의 우상이자 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이다. 태어난 목숨은 실낱같이 이어져 제 멋대로 펄럭이는 듯하지만 때가 되면 가위가 나타나 다 자르다. 가위를 피해간 목숨이 있는가. 가위를 비켜간 운명이 있는가 삶은 잘린 죽음이고 죽음은 잘린 삶이다. 오호 친구가 오는구나 죽음을 잘라야지 길게 뒤틀려있는 시간을 잘라야지 죽음 자르면 그게 삶이다. 그게 부활이다" - 하늘의 가위[미술관자료] 


굿이란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해 푸대접 받는 것을 참대접 받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것을 자기기 위해서 결단하는 의식이다. 쉽게 말하면 죽어가는 일상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새로 살려내기 위해서 집단적으로 다짐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대단한 축제성과 단결성을 발휘하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적을 막아내기 위해서 전투신명까지 필요하게 된다. 

삶은 한 줄기 불이다. 꽃도 별도 다 불꽃이다. 불은 존재를 태우고 모양을 없애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불이 타오르지만 모든 존재는 내려앉는다. 연기 속에 추억이 깃들고 연기 속에 공포가 깃들고 연기 속에 슬픔이 들어와 앉는다. 한 줄기 연기가 여러 줄기로 흩어지니 네가 내 몸을 내가 네 전생이다. 연기는 연기(緣紀)다. - 불과 연기 [미술관] 


삶과 예술 죽음도 예술인데 굿판에서 소통이 가장 잘 된다. 죽은 자는 말하고 산 자는 춤을 춘다. 온몸이 굿판이다. 기억이 몸을 움직이고 우정이 가슴을 뛰게 한다. 이것은 예술이고 융합이다. - 시인 이빈섬 


굿은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밀려남(소외 왕따)에서 벗어나 다시 각자가 제 자리를 찾는 것이다. 세상이 모두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당찬 다짐을 하고 삶의 지혜를 모아 집단지성으로 삶을 살려내고 삶의 리듬과 축제를 되찾는 의례다. 각자의 주체성을 훈련시켜 진정한 공동체적 신명과 신바람을 일으키는 것이다. 


굿을 영어로 '중간적 행위(Mediumistic Practice)'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결국 산자와 죽은자를 연결시켜 대화하도록 하고 서로 오해를 풀고 소통의 장을 펼쳐 화해하고 원한을 푸는 중매자를 뜻한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영매자만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정신은 바로 현대미술의 퍼포먼스와도 그 정신이 통한다. 굿쟁이는 영매를 통해서 이 지상을 구원하듯 행위예술가는 예술적 영감을 통해서 새로운 작품을 구현한다. 

굿이란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 똑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건강한 철학과 구체적 방안으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는 자리다. 그런데 여기서는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이 절대평등의 경지가 되고 같은 노는 것이고 굿을 끝내고 나서 음식은 다 골고루 나누어 먹는다. 그런 분위기 속에 신명을 체험하고 다시 삶의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일체(一體)로 통하니 시원하구나 

각자마다의 한맺힘이 풀리면서 신명이 나고 탄성과 환호를 지르고 난장을 통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상상력을 무한정으로 확대하는 일이다. 그래서 일상에서 얻은 병이나 한, 살기나 액을 말끔히 씻어내는 정화의 제례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집단적으로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질곡과 과로를 풀고 삶을 재충전하여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요셉 보이스의 모자가 보인다. 죽은 자를 만나 산 자들이 새롭게 신명과 해방의 삶을 살아가도록 재촉하는 행위이다. 산자인 백남준은 죽은 요셉보이스를 굿으로 다시 만나 그와 소통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기운과 용기를 얻고 삶을 보다 활기차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축제의 한마당을 펼치는 것이다. 


일체(一體) 남준과 보이스가 일체가 되다. 내 갓에 네가 앉았으니 두 사람이 한 사람이 되다. 네 육신에 내 영혼을 만나 접신하니 마음이 떠는구나. 배고프구나. 네 배고픔을 내가 채워주고 싶구나. 인간은 일체다. 만물은 화해다. 굿은 이어주는 것이고 굿은 good이다. 굿은 궂은 것이니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는다. 


백남준은 한국의 굿과 서양의 아방가르드의 유사성을 깨닫고 플럭서스와 해프닝미술의 근간으로 삼는다. 1960년대 독일이라는 나라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혀 놀지를 못했다. 그래서 전위예술가들이 맘판놀이굿을 벌렸는데 거기서도 백남주는 노는데 1등이었다. 서양의 놀이예술가들이 모두 그에게 항복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남준의 굿의 정신의 계승자이자 신명의 에너지를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와 해프닝으로 시작하여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은 혼란이나 무질서 파괴를 상징하는 굿을 통해 현대미술의 코드를 발견한다. 그것을 바로 대중과의 상호 접근성, 참여성, 행위의 비결정성, 우연히 일어나는 동시성. 삶의 수행성 한마디로 랜덤 액세스라는 미학을 도입하여 서양미술의 막다른 골목에 비상구를 열어주었다. 그의 미학은 이렇게 액션 아트이고 이런 것은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액션 누드화와 맥을 같이 한다. 


1990년 백남준, 죽은 친구 요셉 보이스를 살려내다[生死] 
(In 1990, Nam June Paik brings his friend Joseph Beuys back from the grave) 

백남준은 그와 예술적 쌍동이이자 라이벌인 요셉 보이스를 만나 서로 예술의 상생과 상승효과를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1990년 백남준 생일날 보리스 추모굿판을 벌리게 된 것이다. 보이스는 백남준이 무명일 때 같은 플럭서스회원으로 그의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최대의 지원자였다. 그 낯선 독일 땅에서 그의 진정한 형님이었던 것이다. 

1984년 일본 소케츠미술관 공동공연에 둘의 정말 완벽한 하모니로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이렇게 서로 호형호제하던 백남준은 1986년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굿을 제안하였고 몽고지방의 무속신앙에 관심을 보인 보이스는 이에 흔케 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해 1986년 갑자기 사망하고 만다. 그 둘의 꿈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백남준의 고 보이스 4주기인 1990년 백남준 생일날 그를 위한 위령제 성격의 굿을 벌린 것이다 

보이스의 2대 퍼포먼스는 늑대를 주제로 한 것이다. 그는 알래스카공항에서 늑대박제에만 매혹되었다. 미국의 뉴멕시코 주 미국인디언중심지에는 코요테(Coyote)늑대를 토산물로 한 것이 부지기수다. 티셔츠, 목걸이, 자기, 토기에 이곳은 코요테를 벗으로 해서 자라고 백님 미국인은 코요테를 마구잡이로 죽인다. 그래도 코요테는 늘어난다. 그 질긴 생명력은 만주벌판에 기인된 한국인의 2백만 명으로 번창하여 연길대학을 경형하는 성공에 통한다. 늑대가 우는 차량함은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 1악장에 비등하다. 청선 보이스는 타르타르인촌에서 배운 것은 몽고굿과 더불어 늑대의 처량한 울음이었으리라. - 백남준의 <얼(정신), 얼음, 어른(장자), 얼은 미디어 즉 굿> 중에서



최재영의 백남준사진은 독일에서 그의 행위예술을 찍은 피터 무어(Peter Moore) 나 만프레드 레베(Manfred Lebe 2007년에 한국방문)와 80년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백남준을 찍은 임영균작가와 도 다른 차별된 한국적 사진예술의 미학, 소박하면서도 정감어린 사진으로 잘 보여준다. 보도사진에서 채득한 모든 기술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경험한 영혼의 기운까지 다 기울여 찍은 사진이다. 

최재영 작가의 사진미학은 매우 한국의 원초적 색채와 냄새가 물씬 나고 극적이면서 자연스럽고 백남준의 익살과 해학과 함께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매력과 예술가로서의 카리스마를 한국적 정감에 맞게 잘 연출하고 다큐사진이면서 그 이상을 뛰어넘는 예술사진으로 승화시켰다. 시각만 아니라 촉각까지 자극하는 사진이다. 사진을 진실을 찍어내야 하지만 그 이상이다. 


백남준의 굿판에서는 사진에서 보듯 그릇과 요강이 나오는데 그것을 바로 악기의 역할을 한다. 정작 악기인 피아노는 관이 되어 있고 이것은 서양의 근대의 상징으로 이를 장례치는 것 제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행위예술은 백남준의 모든 굿판에서 일관되게 행해진다. 즉 서양 중심의 예술판을 뒤집어놓는 것이다. 

일종의 파란이나 파토하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는 백남준은 한국이 세계미술판에서 제 목소리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일종의 세계미술헤게모니를 되찾기 위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동서를 넘어 미술과 음악 예술과 과학도 뛰어넘는 시공을 초월하는 스케일이 웅장한 예술을 창안하여 세계적 작가로 부가되어 우뚝 솟아오른 것이다 


갤러리아트링크(www.artlink.co.kr) 안국동 17-6 02) 738-0738 
총괄기획: 문인희(Inhee Iris Moon) 
오프닝 리센션및 추모제 2011.01.25 오후 3시33분 
진혼무:임이조 굿:이수연, 황진경 이별가: 정경숙 국악: 곽효상, 이주성, 감치이 서예: 문동원 기획: 강현중 


어려서 기억인데 우리집에서는 1년에 한 번씩 무당을 데려다 굿을 했다. 아마 집의 일이 잘 풀리라고 하는 재수굿이었을 것이다. 구태여 내가 한국춤에 대한 체험이 언제냐고 물으면 이때부터를 꼽을 수 있겠다. 그때 단골로 오는 무당이 애꾸여서 우리는 그를 애꾸무당이라고 불렸다. 음식을 차려놓고 징 치고 북치고 하는 것 좋아서 본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춤을 추니까 볼 수밖에 없었는데 어떻든 인상에 남는 일이다. 나는 나의 비디오프로그램에 오락적인 요소로서 우리춤을 가미한다. 우선 재미있으니까. 이 그림은 유럽에서 한 번 그렸고 이번이 두 번째다. - 백남준 1985년 8월 <월간 춤>의 글 중에서   

백남준의 소꿉친구 이경희여사께서 고백남준추모 5주기를 맞아 1월29일 제례를 올렸다(사진 백남준아트센터) 

신묘년 양력 1월 29일 갑신일에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권영빈은 백남준선생님께 밝혀 고합니다. 

올해로 서세하신지 어언 5년이 되고 돌아가신 날이 돌아왔습니다. 송구하게도 유지와 친우들이 모여서 간단하게 추모하는 고유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영원이 사시는 집이 완공되고 개관한지 불과 수년 밖에 않았지만 한국문화를 부식시키고 찬연하게 하는 본연지처가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것을 추모하는 마음 저 하늘 같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맑은 술과 작은 정성을 올리오니 흠향하소서! 


이날 KBS MBC SBS 등 한국방송언론매체가 나 왔다. 최재영의 작품을 보는 순간 마치 백남준의 굿을 직접 보는 것 같은 착가에 빠졌다. 최재영작가는 나에게 직접 그 당시의 상황을 일어준다. 일단 그 날도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왔는데 일체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운 좋게 최작가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안잤고 늘 필름을 최대로 많이 가지고 다니는 덕분에 그리고 망원렌즈 사진기 등 모든 장비를 다 구비한 준비된 촬영이었기 때문에 좋은 장면들이 많이 찍혔단다. 

진혼무(Dance for the repose of the deceased)를 추는 임이조 서울시무용단장 

갤러리 아트링크 가운데 마당에 벌어진 백남준 추모굿이 열리는 곳 음악연주자들과 제례음식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만신 이수연 

한국의 무속신앙은 불교(4세기)와 성리학(neo-confucianism, 신유교 14세기)이 도입된 이후에 국가적 종교전통의 총집합소가 되었다. 무속신앙은 20세기 초부터 민속학자의 주요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무속인 중에 2/3가량은 여성무당이다. 그들은 초자연적 세계와 특별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도의 여러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구전전통이나 특별한 무용, 음악 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속인은 5천만 정도로 추정되는 남한인은 현재적 발전상황에 대단히 잘 적응하고 있다. - <인류학사전>(집필자 기예르모 A. Guillermoz) 중 한국편 

굿소리 음악연주자들. 장구: 이주성 징: 김차이 만수받이 소리: 원미희, 박지연, 정유나 

외국인도 제의에 음복을 하고 절을 하며 영신하다 


만신 이수연의 굿, 현재 경기도 양주에서 무업의 일가를 이루다 경기이북 굿 계승자 

백남준 넉받이 대감거리를 시연 중이다. 깃발을 관객에게 고루게 하여 점을 치는 것이다. 일종의 덕담이다. 

이수연 경기이북 굿 계승자의 작두타기 

이수연이 굿이 절정에 올라 작두타기를 시작하다. 가운데 카메라 두 대를 매고 웃으시는 분이 바로 최재영 선생이다. 정말 사진을 열심히 찍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 

아무튼 이제 결론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문화전쟁시대 특히 한중일의 세계주도권을 다투는 시점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굿이 가지고 있는 살림과 생명의 철학을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21세기 시대정신에 맞게 바꾸는 재창조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굿에서 가장 중요한 건 뒷풀이다. 그리고 참여와 나눔이다. 굿이 끝나면 음식은 나눠 먹는다. 사진 양시영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