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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랩소디

[백남준] 몸의 악기로 미술오페라를 하다

[백남준]-몸의 악기로 미술오페라를 하다 
고등 사기꾼 백남준(1932-2006)이 남긴 유쾌한 말과 행동, 잊을 수 없는 흔적과 추억들 

'오페라 섹스트로닉' : 섹스 혹은 몸의 악기로 오페라를(?) 정말 멋진 말이네. 포스터

땅에 끌리는 바이올린 1975


백남준은 삶 자체를 예술의 질료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소재를 늘 참신한 예술의 형태로 만들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재활하는 과정에서 그가 받은 비디오 '성적 치료(Sexual Healing)'를 2003년에 뉴욕 맨해튼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하기야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로 백남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본 그의 일본인 아내 시게코는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진정한 허니문이 온 것 같다"며 말년에 그의 더없이 충실한 동반자가 되었다. 
남준은 처복도 많지(?). 

1996년 뇌졸증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백남준은 입버릇처럼 "'병'이 나으면 '연애'를 할 것이라고 말했고, 젊은 여자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늘 곁에서 헌신적으로 병간호를 해오던 '뚱보 아내'가 들었으면 너무 서운한 말들이겠죠. (남자는 다 그래!)

로봇 K_456과 백남준과 무어만 1964

 
이 말은 백남준과 같은 패거리였던 프랑스 예술가 벤 보티에(Ben Vauthier)가 이미 한 말이다. Parfois je préfère les femmes à l'art. (Sometimes I prefer the women to the art) "나는 가끔 예술보다 여자가 더 좋아"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한다는 말에 그는 말한다. "나 천재 아니야, 바보야 바보, 미친 놈"  아래 '광인 백남준' 사진 참고. 

그는 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라는 게 사실은 사고파는 문제와 다름이 없는데, 예술을 만드는 놈은 4백만 명인데, 그것을 사는 놈은 4명도 안되거든. 그런데 텔레비전은 4개 회사가 4백만 대를 만들고, 또 사는 놈도 몇 백만이나 된다. 예술이라는 게 본래 생활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 우리의 정신이 많이 진보되면 보통 오락으로는 성에 안 차잖아! 그때부터 고도의 물건을 찾는 거지. 그러니까 취미의 고급이 예술 시장인 셈이야" 

'예술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험난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유명하게 되었나요?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재수가 좋아서 그렇게 된 거야" 

보이스 <죽은 토끼> 1965

예술을 사기라고 외친 그에게 예술가에 대해서도 물었더니 왈 "예술가는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하는 존재야" 
그가 좋아한 사람들  우선 줄리아드 출신 샬롯 무어만이라는 여성 첼리스트가 있다. 그는 무어맨이라는 여성 첼리스트와 반나(半裸)로 뉴욕의 멋쟁이 관객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녀가 애인이 아니었는가? 그 때는 총각 때니까? 

또 그가 좋아했던 친구 요셉 보이스, 백남준은 2차 대전 중 중앙아시아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타타르족의 보살핌으로 회생한 후 샤머니즘에 경도된 보이스에게 분신과 같은 혈육애를 느꼈다. 

[위에 사진 설명] 요셉 보이스 <죽은 토끼를 어떻게 그림을 설명하는가(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are, 1965)>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머리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쓴 채 한 발에는 펠트를, 다른 발에는 쇠로 창을 댄 신발을 신고 죽은 토끼를 안고 약 2시간 동안 미술관의 그림을 토끼에게 설명한 퍼포먼스이다. 또 그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행동적인 그의 예술관은 개념미술 행위예술 환경예술을 비롯 독일 신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 1990

그가 죽은 후 한국에서 요셉 보이스를 위한 추모굿(1990년 현대화랑)을 열어주었다 백남준의 그에 대한 한국적 우정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이라는 도시의 한 화랑에서 동양의 한 젊은이가 첫 비디오 개인전을 열고 있었다. 이 개인전은 세대의 피아노, 열세대의 텔레비전, 그리고 갖 잡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 머리를 함께 전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게다가 개막하는 날 젊은이의 절친한 친구 보이스가 날선 도끼 한 자루를 들고 나타나서 전시된 피아노 한대를 부수어버렸다. 

전시내용도 충격적이었지만 도끼로 피아노를 부순 해프닝은 두고두고  유명한 일화로 남게 되었다. 전시장의 주인공은 바로 젊은 동양의 촌닭은 백남준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 보이스. 이 둘은 지구상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들에 속하는 족속들이었다. 서양사람들이 숭고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피아노를 막 부수니 말이다! 이는 기존의 모든 예술을 도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피아노산소 1985

백남준은 원래 피아니스트였는데 이처럼 행위예술, 비디오아트 등과 같이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세계적 인사가 된 예술가이다. 미술평론가 김홍희는 그를 '현대예술의 개념 바꾼 문화외계인'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백남준의 예술적 샤머니즘에 대해서 다소 엉뚱한 말을 했다. "그의 비디오에 한번 찍히면 결코 죽지 않는다." 


1998년 6월 김대중 대통령 방미에 맞춰 백악관에 초대받은 백남준은 클린턴 대통령 면전에서 그와 악수하다가 바지가 흘러내렸다. 참석자들 말로는 "그가 속옷도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왜 그랬을까? 일부에서는 연이은 섹스스캔들에 시달렸던 클린턴을 '빗대어' 이 같은 '퍼포먼스'를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 

그는 마르셀 뒤샹-존 케이지-요셉 보이스 정신을 이은 플럭서스(Fluxus) 족보에 속한다. 

TV안경을 쓴 첼로리스트 무어만 1971


그러니까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반항파다. 그에게 자신의 뿌리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 존 케이지다. 그는 노자풍의 도교, 젠(선불교) 사상, 주역 등 동양사상에 비견될 비-고정성 개념을 통해 생 공연 예술의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이스가 중심으로 독일에서 이끌던 전위그룹 '플럭서스' 친구들은  남준이 뉴욕에 있을 때도 강력히 후원했다. 

첫 제목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1967년 성행위도 최고의 퍼포먼스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뉴욕 '오페라 섹스트로닉'을 공연을 하다가 경범죄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클래식 첼로연주자인 '샬롯 무어맨'이 실제 나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별명이 붙었다. 이 세상에서 백남준처럼 우주적 긍지와 자부심이 넘치는 사나이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완전 나체의 여자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섹스 퍼포먼스를 연주처럼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2002년 7월, 

내 팔을 자름 1967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가 인터뷰에서 "가슴을 과감히 드러내놓고 연주하던 여성 첼로 연주자 샤롯 무어만과  뉴욕에서 자주 퍼포먼스를 함께 했는데 '애정' 관계는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독일에서 한 번 있었지. 주차된 차 안에서…"라고 익살을 떨며" 아내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단다. 
그의 열린 마음, 부잣집 아들로 구김살 없이 자란 성격 덕분에 이런 자유분방한 전위서클의
 '무서운 아이들(앙팡 테리블)'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백남준의 친구 요셉 보이스에 열광할까? 보이스의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그 이면에는 절대적인 미, 진정한 미의 극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20세기 중반을 전후로 하여 철학가들이나 사회학자들은 근대성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다. 이성에 의해 행해진 폭력을 연구하였으며, 과학이 꼭 인간을 진보하게 만들진 않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여러 구속여건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를 바랐다. 

백남준의 난해한 자기 예술의 해설 한 토막... "하나의 원이 있다. 예술이다. 또 하나의 원이 있다. 통신이다. 이 두 원이 겹쳐지는 대추씨 같은 모양이 바로 비디오아트다. 비디오아트는 대추씨처

의미 없는 그림 1987

럼 딱딱하다.." -백남준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 

그는 1984년, 34년 만에 귀국해 어느 기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예술이란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사기 그 중에서도 고등사기다." 

그리고 1995년 김홍희씨와의 인터뷰에서도 한국의 비빔밥 정신을 높이 샀다. "우리나라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뒤지지 않는다. 비빔밥은 참여예술이다." 

1984년 아침 그는 진정한 의미의 '신세대, 신인류, 신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 관점을 보인 오웰 소설을 뒤집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비디오아트 공연 때문에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섰다.
 

광인 백남준 1960년

극과 극은 통한다는 그의 첨단 예술의 재료는 먼 과거의 한국의 전통 속에서 찾았다. 이것은 마치 새롭다는 것은 선(善)이고 낡은 것은 악(惡)이라는 새로운 편가름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것 속에 낡은 것과 낡은 것 속에서의 새로움을 발견했다. 
[
옆사진 해설] 이를 확대해보면 <Yellow Peril, c'est moi> 영어와 프랑스어가 보인다. 여기서 옐로는 무슨 뜻인가! 황색종을 뜻하는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하여튼 잘 모르지만 '난, 아시아에서 온 위태위태한 놈'이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싶다. 

더 나아가 새로움과 낡음이 하나에서 온다는 생각 동양적 일원론, 그 조화와 균형과 물아일체의 예술 속에 인생이 인생 속에 예술이 있음을 증명했다. 

우선 해프닝은 집단참여 예술로서, 굿은 민중적 기복이나 집단정화를 위한 사회적 퍼포먼스

색칠한 아이 1986

로서 소통과 참여의 맥락을 같이한다. 무복, 무악, 무화, 무가, 무극, 무담, 무언 등이 다 총체적 문화집합으로 보았다. 
다양한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인터-미디어가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비-결정적인 해프닝의 현장미학에 좋아했다. 각본에 의존한 위계적인 종합 예술인 연극, 오페라와 같은 전통공연예술과 다른 점이다. 

'퍼포먼스와 해프닝과 굿'은 그에게는 하나이다. 백남준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과 함께 동시성, 통시성을 담보하는 해프닝, 비디오 시간성에 주목하면서 현대 속에 '생(生)'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나 비디오의 생중계 방송같은 곳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았다.(위 샤머니즘부터 여기까지는 김홍희씨 글 인용) 

백남준은 어쩌면 예술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예술가든 예술로 '생활'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다 보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뉴욕의 한 전시장에서 만난 한국인 화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작품을 싸게 팔고 개막식 파티를 많이 찾아 다녀야 하며, 여행을 많이 다니되 작품과 함께 다니라"
 

[저작권] 백남준과 백남준도 인정할 정도를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야! 이것도 고등사기다. 

TV 정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