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런던 테이트 모던 백남준 회고전 오프닝 행사가 있는 날인데 못 가서 아쉽다. 우리가 기대한 만큼 전시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백남준을 잘 모르는 영국인에게는 강력한 인상을 주리라. 17 October 2019 – 9 February 2020 Supported by Terra Foundation for American Art, with additional support from Tate Patrons Open daily 10.00 – 18.00 and until 22.00 on Friday and Saturday For public information call +44(0)20 7887 8888, visit tate.org.uk or follow @Tate #NamJunePaik
<'달은 가장 오래된 TV' 1967년 작. TV는 달을 기계화한 것이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월인천강지곡(1568)'을 읽고 영감을 받은 것이다. 백남준은 달빛 아래서 강물처럼 흐르는 우리나라 최초 한글시 '월인천강지곡(악장체 1568)'을 좋아했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정말 고품격 건물이다. 현대판 문화유산이다. 피아노와 TV 화면을 연상시키죠. 구름이 백남준 TV 화면(백남준아트센터 파사드)에 그대로 드리우고 있네요> 사진은 경기도 정윤서 청소년 기자 청소년이 찍은 사진이라 신선하네요
백남준이 우리에게 준 선물, 제1회 국제세미나 2008년 이때 정말 재미있었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 관장의 첫 강연, 역시 백남준 냄새가 물씬 난다. 격이 없고 유머와 상상력이 흘러넘친다. 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강연 제목은 '월인천강, '달에 홀린 광대(피에로)'다.
그는 백남준선생을 "진폭이 큰 예술가이자 창조적 몽상가"라고 소개한다.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도 그를 "시대의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미래를 치열하게 고민한 예언적인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난도 잘 극복하는 자기긍정이 강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또 그는 "백남준을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기벽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철학자"라고 정의한다.
'월인천강지곡(1568)' 세종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시
특히 그는 백남준을 "동양인답게 달에 탐닉하여 즐기는 자"라고 말한다. 1969년 인류가 최초로 달을 밟은 날(7월 20일)이 그의 생일이다. 그는 이상하게 달과 인연이 깊다. 백남준은 달빛 아래서 강물처럼 흐르는 우리나라 최초 한글시 '월인천강지곡(악장체 1568)'을 좋아했다. 달은 천개의 강을 비추는 '부처'를 뜻하고 강은 '민중(중생)'을 뜻하다. 달빛에 어린 광대인 이 천재 예술가는 거기서 놀기를 좋아했다.
백남준은 또한 30년대 일제강점기에 아방가르드시인 이상을 좋아했다. 그는 백남준 이전에 이미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다다이즘의 창시자 아니었던가.
'달은 가장 오래된 TV' 1967년 작. TV는 달을 기계화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 제목이 얼마나 멋진가. 요즘은 진짜 TV를 보지만 과거에는 달 TV보며 정월대보름과 한가위를 즐기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TV가 없기에 각자가 스스로 대본을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낭만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대인지 모른다.
그는 이런 달빛문화를 TV에 비유하면서 '비디오아트'를 창시했다. 이는 서양의 TV에다 동양의 달의 정서를 비빔밥처럼 맛있게 비벼 새로운 미술장르를 빚어낸 셈이다. 백남준은 '왜 안 되는가(Why not?)'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인이라고 안 된단 말인가? 백남준은 이 세상에 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다가 하나의 별처럼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천재성이다.
백남준의 신화적 사고를 이제는 정말 인류학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백남준은 시공을 초월하여 집이나 고향에 대한 개념 없이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그리고 세계시민으로 시대정신을 꿰뚫어보고 탐색하는 첨병이었다.
<백남준의 에로티시즘 미학> -'우정과 네트워킹의 천재 백남준' 한복 입은 백남준
백남준(Nam June Paik 1932~2006)이 생전에 주변에서 그의 기념관이야기가 나오니까 혹시 그런 공간이 생긴다면 '백남준이 오래사는 집'이라고 이름을 붙여 달라고 했단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바로 그의 뜻을 받들어 세운 그가 숨 쉬는 문화공간이다.
백남준 아트센터 2003년 국제공모에서 독일의 젊은 건축가 크리스텐 쉐멜(Kirsten Schemel)이 대상을 차지했으나 그가 제시한 공사비가 720억을 준비위원회가 360억밖에 확보 못해 무산되는가 했는데 쉐멜 스탄코빅 건축사무소에 같이 일하는 마리나 스탄코빅(Marina Stankovic)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스탄코빅의 말에 의하면 미술관 건물을 위에서 보면 'P(Paik)'자가 보인단다. 그랜드피아노의 모습을 하 스탄코빅 ⓒ 국민일보
고 있고 주변 자연과도 어울리게 설계하여 주변의 산자락이나 아트센터가 보기에도 거슬리지 않는다.
백남준아트센터는 경기도의 보물이다. 21세기 창의성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초중고에서 이 아트센터를 보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싶다. 그렇게 하면 문화독재가 되겠죠. (하하하)
이런 문화공간이 주는 경제적 이득이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개관식 때 가보려고 했는데 미루다가 이번 백남준 추모 3주기 제1회 국제세미나를 계기로 찾게 되었다.
백남준과 정약용이 만난다면 - 남준기자가 정약용선배와 인터뷰
국제세미나 이야기하기 전에 백남준(1932~2006) 이야기를 조금만 하자. 그는 태창방직을 운영하는 거상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7번째로 1953년 한국여권을 받은 사람이다. 자가용 수리공이 여럿 있는 부자였다. 백남준(白南準)의 주변인물로는 아내 구보다 시게코씨와 그의 조카 캔 백 하쿠다(白健)씨 그리고 그의 작업의 기술적인 면을 돕는 엔지니어 슈아 아베 등이 있다.
정약용의 '거중기' 밧줄과 도르래로 물건을 들어올린다.
그는 아마도 창의적 인물은 좋아했을 것이다. 그의 로봇 작품 중에는 스키타이왕 단군(1993), 이율곡(2001)이나 세종대왕이나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등 그런 인물이 많다. 정약용(1762~1836)은 그 중 하나이다. 정약용은 천재다. 과학자이자 발명가이고 다수의 사회경제서적을 낸 석학이고 민중시인이다.
그의 최고발명품은 '거중기'로 세계문화유산인 수원성은 이것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약용이 외국의 문물을 직접 접한 것은 아니지만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엄청난 독서와 깊은 사색을 통해 창의적 사상과 발명품을 낳았다. 170년 세월의 차이가 있지만 백남준과 정약용이 만나면 서로 말이 너무 잘 통할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궁금해진다.
정약용의 스케일은 백남준 못지않다. 그는 한반도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다. 그리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알았다. 아래와 같은 그의 시를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다.
백남준 I '정약용' 로봇설치작품 1993년 작
'안타까운 마음을 읊은 시(述志)'
아아! 우리 겨레여!
마치 자루 속에 갇힌 것 같구나
삼면은 바다도 둘러싸이고
북방은 높은 산으로 가렸으니
사지(四肢)는 항상 오므라들고 굽혀져서
기개(氣槪)와 뜻을 어디서 편단 말인가
성현(聖賢)은 만리(萬里) 쪽에 있으련만
누가 능히 이 어둠을 열어주나
고개 들어 세상 보니
견문은 좁고 정(情)이 흐릿하구나
남의 것 모방하기에 급급하고
제 것을 갈고 닦을 겨를이 없구나
백성들 입안에 재갈을 물리고
어리석은 것 하나 받들게 하네.
차라리 단군 때의
질박(質撲)한 고풍(古風)이 그립구나- <여유당> 전집 중에서
백남준, 세계 호령한 문화의 칭기즈칸- 백마타고 오는 초인
백남준은 정약용이 아니라 칭기즈칸과도 비교될 수 있다. 칭기즈칸은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했지만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로 세계를 평정했다. 우리가 세계적으로 호령을 칠 수 있는 것은 문화와 종교뿐일 것이다. 백남준은 이를 증명했다. 백남준은 칭기즈칸보다 위대하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유목민이라는 점이다. 백남준은 자신을 '정주 유목민(Stationary Nomad)'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사실 그는 한국에서 도망치거나 혹은 도피하거나 한국에서 튕겨나간 것이다. 그가 출세를 원했다면 명문학교를 나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리에 올랐겠지만 그런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백남준은 음악과 사상으로 그의 예술과 철학을 시작하였고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만 하다가 죽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구촌을 누볐다. 그는 세계적 예술가 혹은 광대이자 무당이 되고 싶었다. 그의 악동 같은 장난기와 판소리에 맛볼 수 있는 익살과 해학, 풍부한 종교성과 한국적 멋 그리고 전방위적 에로티시즘은 결국 세계와 통했다.
백남준이 우리에게 준 큰 선물 - 추모3주기 제1회 <백남준의 선물> 국제세미나
제1회 국제 세미나 주제의 백남준의 선물
지난 2월 4일과 2월 5일 백남준 추모 3주년 제1회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의 중요한 화두는 '시간성'이었다. 나는 5일 세미나에 운 좋게 참석했다.
행사 진행 http://njp.kr/root/festival/html_kor/station_4.html
발표 내용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07651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존경)은 끝없이 내 마음에서 샘솟는다. 나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백남준이라는 '문화은행'에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대여 받고 있다. 아무런 이자도 받지 않고 그것이 공짜이니 정말 미안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이라도 쓴다.
그는 일본에 가면 '일본의 백남준'이 되고 독일에 가면 '독일의 백남준'이 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의 백남준'이 된다. 프랑스가 백남준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다. 그는 그렇게 온 인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Mary Bauermeister) 1960년대
이번 세미나에는 1960년대 독일 전위예술계의 프리마돈나였고 백남준의 애인 같은 친구였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도 참가했다. 마리는 백남준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는 젊었을 때 만났다. 여기서 나는 다만 인간으로서의 그를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대단한 정신이었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예술가였고 장인이었고 퍼포머(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
백남준 아트센터 2층 회의실 입구의 비디오작품
2층 회의실로 들어가다 보면 이런 화면을 볼 수 있다. 물론 움직인다. 미술에서 시간의 제약을 없앤 이가 바로 백남준이다. 그의 무기는 누구에게나 편하게 대해준다는 점이다. 그는 예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사회의 의사 혹은 무당이었다. 또한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흥미를 유발하는 재료로 보았기에 그에게는 장애물이 없어 보인다.
그는 만사에 낙천적이다. 그만큼 고민을 철저히 했다는 뜻이다. 그러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만큼 선(禪)의 수행자처럼 마음이 비웠고 비무장상태였다. 그러나 지적인 면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날카롭고 예리하다. 그에게 질문을 던져 이기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욕무심이기 때문이다.
이번 국제세미나 제목이 <백남준의 선물 1>이다. 백남준은 우리에게 선물보따리를 가져다 준 셈이다. 우리는 그 선물을 받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 내용이 뭔지 차분히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깨우쳐 나가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계속 더 좋은 선물을 받을 것이다.
동서양 친하게 지내는 징검다리 놓다 - 백남준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천재
세미나에 대해 안내하는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장 토비아스 버거(Tobias Berger 1969~)
백남준의 '무량광명', '무량수명'정신에 맞게 백남준 아트센터 수석큐레이터(학예실장)는 이방인 토비아스 버거가 맡았다. 그는 독일 비스바덴에서 태어나 독일 루드대학에서 미술사와 경제학을 전공했다. 한국과는 2000년 광주비엔날레와 2006년 부산 비엔날레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토비아스 버거씨는 2005년부터 홍콩에 있는 파라사이트 아트스페이스 관장 겸 큐레이터 일해 오다가 지난 9월부터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수석큐레이터로 일하게 되었다.
Tobias Berger, born in 1969 in Wiesbaden. After graduating in art history and economic science from the Ruhr-University Bochum(1991~1998), Berger completed the DeAppel Curatorial Training Programme in Amsterdam in 1998/1999. He then worked as a curator at the Museum Fridericianum in Kassel until the end of 2001, where he was responsible for a number of exhibitions including 'Change is Good(1999/2000)', 'Flexibilitätsversuche(2000)' and 'German Leitkultur(2001)'.
백남준은 그의 집에서 독일인과 한국인이 서로 사이좋게 일하게 한다. 국적이 달라도 잘 버무려 더 맛있는 비빔밥을 만든다. 바로 그의 평화공존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큐레이터도 한 사람이 더 두고 있다. 원수지간(?)에 가까운 한국인과 일본인도 여기서는 잘 지낸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독일만큼 백남준과는 인연이 없지만 네 나라사람들도 여기 모이면 더 없이 가까운 동료가 된다.
달빛 아래 춤추는 광대, 왜 안 돼(Why not?) - 한국인의 긍지를 심어주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이영철관장의 첫 강연, 역시 백남준 냄새가 물씬 난다. 격이 없고 유머와 상상력이 흘러넘친다. 말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강연 제목은 '월인천강, '달에 홀린 광대(피에로)'다.
그는 백남준선생을 "진폭이 큰 예술가이자 창조적 몽상가"라고 소개한다. 모 일간지 인터뷰에서도 그를 "시대의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미래를 치열하게 고민한 예언적인 예술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고난도 잘 극복하는 자기긍정이 강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또 그는 "백남준을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기벽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철학자"라고 정의한다.
'월인천강지곡(1568)' 세종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시
특히 그는 백남준을 "동양인답게 달에 탐닉하여 즐기는 자"라고 말한다. 1969년 인류가 최초로 달을 밟은 날(7월 20일)이 그의 생일이다. 그는 이상하게 달과 인연이 깊다.
백남준은 달빛아래서 강물처럼 흐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시 '월인천강지곡(악장체 1568)'을 좋아했다. 달은 천개의 강을 비추는 '부처'를 뜻하고 강은 '민중(중생)'을 뜻하다. 달빛에 어린 광대인 이 천재 예술가는 거기서 놀기를 좋아했다.
백남준은 또한 30년대 일제강점기에 아방가르드시인 이상을 좋아했다. 그는 백남준 이전에 이미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다다이즘의 창시자 아니었던가.
'달은 가장 오래된 TV' 1967년 작. TV는 달을 기계화한 것이다.
그의 대표작 '달은 가장 오래된 TV, 제목이 얼마나 멋진가. 요즘은 진짜 TV를 보지만 과거에는 달 TV보며 정월대보름과 한가위를 즐기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TV가 없기에 각자가 스스로 대본을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낭만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대인지 모른다.
그는 이런 달빛문화를 TV에 비유하면서 '비디오아트'를 창시했다. 이는 서양의 TV에다 동양의 달의 정서를 비빔밥처럼 맛있게 비벼 새로운 미술장르를 빚어낸 셈이다.
백남준은 '왜 안 되는가(Why not?)'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인이라고 안 된단 말인가? 백남준은 이 세상에 와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다가 하나의 별처럼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천재성이다.
백남준의 신화적 사고를 이제는 정말 인류학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백남준은 시공을 초월하여 집이나 고향에 대한 개념 없이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그리고 세계시민으로 시대정신을 꿰뚫어보고 탐색하는 첨병이었다.
'소통과 참여' 말하는 평화주의자- 쌍방형 문화창조의 전형
세미나에 빠진 관객들 I 천재가 사라진지 3년 그에 대한 오마주는 세월이 갈수록 커진다.
이번 세미나를 들으니 역시 백남준의 키워드 '소통과 참여'가 생각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소통이란 일방형 지배소통을 깨는 쌍방형이다. 민주주의의 구현하는 제1의 원리이다. 이런 정신으로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시대를 방관하지 말고 참여해야 한다고 본 것 같다. 그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평화주의자다.
백남준은 한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지식인들이 그랬듯 초기에는 마르크시즘에 심취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만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경제를 살리는 것은 재벌이 아니라 남대문 동대문시장 사람들이다"라고
자본주의는 그 자체모순으로 인간의 얼굴(분배정의)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악마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는 지금 위기다. 예술이 좋은 점은 자본주의의 논리가 안 통한다는 점이다. 정말 다행이다.
백남준 아트센터 정면 안쪽 모습
백남준아트센터의 2층 강의실에 왼쪽에는 이런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성스럽게 보인다. 백남준의 생존모습을 TV로 보는 것 같다. 그의 비디오아트의 영상미학을 실감나게 살렸다고 할까. 실크스크린으로 된 격자무늬는 안팎으로 불빛이 서로 교차하면서 반응하는 실루엣이 신비롭다.
모 일간지에서 백남준아트센터를 소개하면서 이 공간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전시관바닥에는 길을 인도하는 화살표도 없다. 그러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을 관객 스스로 되묻게 한다. 전시장은 백남준이 그랬듯이 적극적으로 시간 속에서 길을 잃기를 권하고 있다"
천재는 원래 바보야! - 참으로 강한 자만이 바보가 될 수 있다.
천재도 때론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백남준
백남준은 삶과 예술을 창조하는 광대였다. 그의 바보짓이 너무나 우스꽝스럽다. 그의 '맘판놀이굿-난장굿'에서는 이런 병신춤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런 면에서 '천진(天眞)'의 세계를 꿰뚫고 있다. 말 그대로 '하늘의 진리'아닌가.
- 백남준은 누구인가요? "난 바보라고" - 왜요? "바보니까 바보지. 바보야 바보. 미친놈" - 젊어서 미친놈 소리 많이 들으셨죠? "그럼. 미국에선 아직도 미친놈이래" <2004년 조선일보인터뷰> 중에서 [점심식사] 아트센터에서 간단한 음료
백남준의 많은 흔적이 새겨진 도형들
아트센터에서 점심 용 간단한 식사가 준비했다. 지하 휴게실로 가다보면 위에서 보는 대형 도판이 나온다. 이 벽면에는 일련번호에 따라 백남준의 관련된 자료와 기록들이 그득하다. 일종의 '아카이브(데이터베이스)예술'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의 상상하게 하는 TV 화면으로 그의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보물창고이다.
지하1층 휴게실에서 점심식사 풍경
백남준과 경기도도민이 준비한 점심이다. 푸짐하지도 않았지만 모자라지도 않았다. 초밥, 떡, 케이크 그리고 오렌지주스 등 소찬이지만 알차다. 백남준의 이름으로 만나 사람들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점심식사 후] 전시장 관람
상설기획 전시실과 자료실, 창작공간실, 교육실, 수장고 등이 있고 1층 로비로 들어서면 'TV 물고기' 'TV 시계' 등 작품 67점과 비디오아카이브 등 모두 2285점이 전시되어 있다.
현대문명, 소대가리와 물 없는 물고기 - 상생과 공존의 미학
소머리(1963)와 TV 물고기(1)
1층에 들어서면 보이는 'TV 물고기' 여기서 물은 여자의 자궁이고 물고기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둘이 있어야 생명이 태어난다. 음양의 조화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소머리. 그는 1963년 독일 파르나스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열 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갤러리 입구에 걸었다. 극동에서 온 무명작가인 백남준은 서양친구들에게 선보인 충격적 테러이자 서양미술의 모가지를 떼버릴 있다는 자신감의 표시이자 야심찬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그는 이제 자유롭고 독립된 작가로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갈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예술이라는 자동차를 타고 제 마음대로 시동도 걸고 드라이브하겠다는 뜻이다. 데뷔를 위한 아그레망을 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충격적이고 파격적이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 굿판에서 흔히 보는 돼지머리 걸기로 봐도 좋을 것이다.
TV 물고기(2)
TV와 물고기의 접촉(conjunction) 여기에 또한 춤추는 광대가 등장한다. 자연과 문명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서로 잘 놀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물에 물고기처럼 우주에서 인공위성이 되고 싶어 했다. 뒤에 보이는 성벽과 창문 그리고 물고기 모두 잘 어울린다. 바다의 심연에 대한 무한대 동경도 서려있다.
태어나기 전 탯속 엄마와 대화하기- '태내자서전' 1981
'태내자서전' I 1931~1932년판 '뉴욕타임스'에 백남준글씨 1981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유리가 덮인 뉴욕타임스, 백남준과 관련된 기사를 모은 것인가 했더니 그것이 아니고 백남준이 태어나기 전 뱃속에서 엄마와 나눈 가상이야기를 언급한 자서전이다. 비디오아트 창시자다운 기발한 발상이다.
그 내용은 위에서 보듯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남준이 "엄마 난 나중에 무엇일 될까? 하고 묻자 그의 엄마는 "넌 앞으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가 될 거야((Mother said, you will start a Video Art)"라고 내용이다. 그의 재치가 대단하다. 또 이런 내용도 있단다. 남준이 엄마에게 "세금이 뭐야?"라고 물으니 엄마는 "갈취란다" 그의 유머감각이 빛난다.
[백남준의 유일한 라이벌,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 I '주어진 영상자료들(Etant donnes)' 필라델피아미술관 출판. Apart from being a piece about gaze and looking, it is also about what we cannot see. I found myself more preoccupied with what I couldn’t see, than with what was given to me. I wanted to see the head of the woman, even though I knew that, no matter how much or how I moved, I would not be able to.
사실 그에게도 라이벌은 있었다. 바로 뒤샹이다. 백남준은 모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다 이뤄 놓았다. 그는 입구는 아주 커다랗게 만들어 놓고 출구는 작게 만들어 놓았다. 그 조그만 출구가 바로 비디오아트이다. 그리로 나가면 우리는 마르셀 뒤샹의 영향권 밖으로 나가는 셈이다"
그리고 백남준은 존 케이지와 요셉 보이스와 치열하게 대결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스승으로 요셉 보이스를 절실한 친구로 혹은 동료로 대했다. 그들을 매우 존경하고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로 자신감을 피력했다. "뒤샹조차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100년이 걸렸다. 나는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 2032년에 사람들은 '더러움'을 보여주는 나의 날림의 미학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위상변화 : 뒤샹과 백남준의 대결구조]
왕싱웨이(Wang Xingwei) I '늙고 불쌍한(가련한) 해밀턴(Poor Old Hamilton)' 220×280cm 1996 중국 신세대 작가 왕싱웨이의 이 작품은 아시아와 유럽과 위상변화를 풍자한 독창적 작품이다.
'늙고 불쌍한 해밀턴'은 '유럽'을 상징하고 마르셀 뒤샹의 대표작을 깨뜨리고 울고 있는 아이는 '아시아'를 상징한다. 유럽의 해밀턴은 사고뭉치인 아시아의 아이를 야단치지만 그 아이는 딴청을 부린다. 그 아이는 누구인가? 유럽의 최고 작가 마르셀 뒤샹과 아시아 최고 작가 백남준을 대결구조가 끌고 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20대 천재, 독일에서 꽃피다 - 일본에 갇혔다 유럽에서 풀려나다
'손과 얼굴(Hand and Face)' 1961(29살 때) I 고뇌하며 깊은 성찰에 빠진 20대 모습
그를 다시 요약해보면 철학자, 미학자, 인문학자, 미디어아티스트, 열렬한 연애주의자, 맑시즘의 옹호자, 에로티시즘의 신봉자이다. 그는 천재시인 랭보를 연상시킨다. 나는 한 번도 그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이 장면은 예외다.
아 그리고 그의 어록 중 백남준아트센터에 홈페이지에 있는 것 몇 개를 여기에 소개한다.
[백남준 어록] - 나의 '실험적 TV'는 '완전범죄'를 가능케 한 세계최초의 예술작품이다.
-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 전자석을 이용한 진폭의 발생은 전자 선(禪)의 창조를 가능하게 했다.
-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전자기술을 인간화한 좋은 보기이다.
-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거대한 기계의 도움으로 기계를 반대하기 위한 나 자신의 기계를 창조했다.
-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다. 한국에 묻힐 것이다.
-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은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서 찾는다. 세계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의 기능인데 두 시장은 이 문제를 100년 전부터 해결해놓았다
음악을 미술로 코드전환 - 시공간 넘나들며 장르파괴
'TV 자석' 전자파로 TV에 그린 그림
백남준은 원래 작곡가였다. 그러던 그가 미술가로 변신한 것이다. 마치 김민기가 화가였다가 작곡가가 된 경우처럼 말이다. 하여간 일종의 창조적 진화이다. 시간예술과 공간예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 장벽을 허물었다. 여기서는 소리가 화면이 된다. 대단한 혁명이다.
기계의 인간화, 예술화 - 기계와 소통하며 친하게 지내기
'로봇 K-456' 전자장치 철 알루미늄 고무 70*55*18cm 1964. 슈아 아베와 공동작
백남준은 기계와 인간이 친하게 지내는 시대를 예견했다. 이제 인간은 기계와 같이 살아갈 운명이다. 그는 기계를 만드는데 기계적으로 만들지 않고 인격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그는 또 기계의 예술화도 꿈꾸었다. 기계와 소통하고 대화하고 친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그리면서 로봇작품이 많이 만들었다. 기계에 신명나는 기와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기계가 예술이 되었다. 동양예술의 핵심인 '신령기화(神靈氣化)'가 바로 여기에 적용되었다.
돈의 지배냐! 축제의 회복이냐! - 에로티시즘은 성과 죽음도 넘어선다.
'영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 1962. 백남준 첫작곡. 이 사진은 1965년 퍼포밍. 동서양의 이런 젊은 남자들을 다 모아 누드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백남준의 괴력과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처녀작곡] '하늘로 솟는(?) 페니스 심포니(young penis symphony 1962)'
그가 동경대학 음악전공한 자로써 첫 작곡의 제목은 '싱싱한 페니스로 하는 심포니연주'이다. 악기가 아니라 남자의 물건으로 연주하는 심포니라 그 제목이 얼마나 센세이션하고 충격적이고 예술적이고 도전적인가. 그야말로 제목이 예술이다. 위 사진은 백남준아트센터에는 없어 구글에서 가져왔다.
이런 예술이 돈을 벌어다 주지는 않는다. 특이한 것은 그의 유명세에도 그의 작품을 상품화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의 예술은 이렇게 돈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소유할 수도 없다. 그의 작품은 결코 자본적이지 않다. 그는 이렇게 현대문명을 비평한다.
돈보다 축제를 우선
그는 '돈의 지배'보다는 '축제의 회복'을 우선시한다. 마음보다 몸으로 하는 예술이다. 정신과 영혼과 관념을 거부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몸 철학에 가깝다.
만약에 그가 1962년 한국에서 이런 작곡이 발표했다면 분명히 음란유포죄(?)로 체포되었을 것이다. 하긴 미국에서도 1964년 샬롯 무어만과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렇듯 예술가란 아무도 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일종의 도착이고 도발이자 도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67년 중앙공보관화랑에서 젊은 작가 10여명이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라는 최초의 행위예술이 있었다. 1968년에는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이 부패한 '국전'을 풍자한 '한강변의 타살'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그 후에도 김구림 등 전위미술가들이 나타나 맹활약을 하고 70년대에는 작가들이 경찰에 체포되는 해프닝이 실제로 벌어졌다.
생명(EROS)은 음양조화에서 탄생 - 본래 예술이란 본능을 따르는 일이다(백남준)
오토 뮐(Otto Muehle) I 엄마와 아빠 포트폴리오 중에서 오토 뮐(Otto Muehle) 아카이브 1964(1)
이 작품 백남준의 전위미술운동의 동료인 오토 뮐의 작품이다. 요즘 인터넷포르노의 원조가 아닌가싶다. 예술가들이 40년 전에 하던 일이 이제는 세련되게 상업화되고 포장화 되었다. 1964년이니 선각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로는 빈축을 사거나 손가락질 받았겠지만 지금 보면 확실히 선각적이다.
하긴 이런 음양조화가 없이 어찌 창조가 이루어지는가. 다만 문제는 얼마나 창의적이냐가 문제다. 섹스를 인간을 가장 즐겁게 하는 놀이로 가장 창조적 노동으로 본다는 점이 재미있다. 이 문제는 100년 전부터 클림트의 그림에서 제1주제였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프로이트사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토 뮐(Otto Muehle) I 엄마와 아빠 포트폴리오 중에서 Otto Muehle Archive 1964(2)
위 남학생이나 아래 여자나 이런 몸짓에 호기심을 가지고 뚫어지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에로티시즘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다. 생사의 문제를 넘어 우리존재의 근간이 된다.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는 "에로티시즘은 죽음 속에서도 삶을 찬양하는 것이다(L'erotisme est l'approbation de la vie jusque dans la mort)"라고 했다.
과거에는 에로티시즘을 육체적인 것으로 한정했는데 현대에 와선 삶 전체와 연관시킨다. 우리 몸속에 정신과 영혼이 담겨진 것이다. 하긴 생명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진화할 수 없고 멸종할 것이다.
대지의 여신에 꽃대를 꽂다 -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다(클림트/피카소)
오토 뮐(Otto Muehle) I '은빛 엉덩이(Silver Ass)' 1965
[아방가르드 섹스예술 혹은 에로티시즘미학]
이런 장면을 보면 당시로는 확실히 획기적인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로렌스의 작품 <채털리부인>에서 이미 이런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꽃의 만발을 여성성기의 만발로 은유한다. 아름다운 인생의 찬가이자 생명을 얻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를 기억하는 굿판이다.
백남준, 부르주아계급 우상파괴자 - 난장굿과 피아노 때려 부수기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 1960. 백남준이 공연도중 관객에게 삼푸를 해주고 있다.
Random Access Music: Exposition of Music – Electronic Television 음악의 전시 1963 파르나스 갤러리.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Manfred Montwe)
멀쩡한 피아노를 때려 부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가격도 가격이지만. 그의 이런 정신은 당시 그의 동려였던 마리의 말대로 피아노는 당사 독일인의 부르주아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숭고한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유럽미술의 죽음을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는 혁명이었다. 시대의 통념을 깨려면 이런 행위는 필수불가결인지 모른다.
사회의 빈축을 사는 악동기질, 장난꾸러기 같은 괴상한 행동을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고 아무도 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이 전위예술가들이 아닌가. 그는 서양의 도구를 표적 삼아 동양의 괴력난신한 행위와 기상천외한 몸부림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피터무어 사진 I 미국 타운홀에서 퍼포먼스 중인 백남준 1968
그는 음악을 전공했기에 진정한 미술가가 되었는지 모른다. 전공을 코드 전환할 때 폭풍이 오는 것 아닌가싶다. 전공자보다 더 창조적인 경우를 허다하게 많다. 예컨대 시를 공부하고 미술을 하거나, 문학을 공부하다가 춤을 하거나 법을 공부하다가 음악을 하면 전혀 예상 못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과 비슷하다.
부서 버린 피아노. 일종의 전위음악으로 파괴연주
부르주의 문화의 상징을 피아노를 박살낸 백남준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의 호연지기는 칭기즈칸보다 더 용감하다. 물론 평화주의자로 물리적 폭력은 절대 쓰지 않는다.
백남준와 문화건달패, 플럭서스 - 60년대 전위적 앙팡테리블
'비스바덴 플럭서스' 퍼포먼스하는 장면들1962
그는 독일에서 당시가장 전위적 문화패거리인 플럭서스에 가담하고 맹렬한 활동을 하였다. 그들에게 전혀 손색이 없다. 여기에 요셉 보이스도 끼여 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이들의 강령은 이렇다. "그대의 에고를 가능한 억제하고 제거하라. 작품에 사인을 하지 마라. 아무것도 그대의 탓으로 돌리지마라. 탈개성화하라. 그대를 탈유럽화하라"
백남준 관련 자료 복사물 백남준과 관련된 여러 자료와 책자와 작품 그리고 흔적 등 데이터베이스를 출력하여 아무렇게나 펼쳐놓다. 그런 회화나 조각 등 자취는 뚜렷하게 남지는 않지만 그런 아이디어는 사라질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선(禪)의 시학 - 부처의 본심으로 돌아가자!
TV 부처(1) 1974년 작. 버전이 다양하다.
백남준은 불교 신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한국의 문화콘텐츠에서 불교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제일 먼저 터득했다. 부처는 아시아인의 영원한 스타다. 그래서 그도 그런 생불이 되기를 탐했는지 모른다. 부처와 TV와 결정적 만남은 참으로 쾌거다.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물질이 만나 새로운 비디오아트를 낳았다.
그러나 그의 불교에 대한 비판도 이에 못지않다. "선(禪)은 반(反)아방가르드적이며 반개척자적이며 반케네디적이다. 선은 아시아의 빈곤에 책임이 있다. 아시아의 빈곤을 정당화함이 없이 어떻게 선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물론 이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말이다.
금강경 사구게. 모든 법칙을 허깨비와 물거품, 그림자와 이슬 그리고 번개로 비유한다.
이런 시는 정말 '비움의 철학'과 '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잘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불교만큼 마음의 철학이 잘 갈고 닦아진 것은 없다. 그는 늘 이런 불교의 화엄과 관음세계를 꿰뚫고 있었다. 관음이란 민주의 고통을 觀은 보고, 音은 듣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음은 여자부처이다. 정말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의 유화작품 '천수관음'도 이런 생각에서 태어났다.
TV 부처(2) 폐쇄회로카메라 48*51*34cm
이 작품은 그를 관음이 되게 하고 부처가 되게 한다. 백남준의 자화상은 없지만 그는 이런 비디오작품을 통해 사진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지 모른다. 동양의 최고 스타에 동양의 최고 아티스트가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할 것이다.
[고흐는 부처를 닮았다] 작가모름 I 고흐의 자화상 패러디
고흐의 자화상을 해체한 그림이다. 사실 백남준도 고흐만큼 고뇌하는 인물이었지만 그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고흐도 역시 광인이고 천재이다. 여기서는 고흐가 마치 부처 같고 성자 같다.
그는 과격한 좌빨(?) - 그는 6 25 때 피난을 갔나 안 갔나?
68혁명 영상자료(1)
백남준이 1932년생이니까 일본강정기다. 그가 10대를 넘기는 예민한 시기였을 때 일제의 탄압에 극에 달했으나 워낙 거상의 집안에서 별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당시 대부분 지식인의 유행병인지 몰라도 그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가 18살 육이오가 터졌을 때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생각하는 그는 피난을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으나 급박한 현실에서 피난을 간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대한 함성호시인의 발표내용은 참신하다. 함 시인은 백남준의 말을 인용하며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진 것 같다고 진단한다. "어느 땐 나는 내가 잘못된 편에 속한 것 같이 느껴진다. 1950년 우리는 피난열차에 타 있었고 폭격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도피했고 난 내 자신이 어느 편이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참 냉소적이었다"
이러 상황에 대해서 <백남준의 치열한 삶과 예술>을 쓴 이용우의 책에도 백남준의 말이 언급된다. " 당시 내가 철저한 맑스주의자였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북한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이데올로기와 현실은 어긋난다(47쪽)"
68혁명 영상자료(2)
그리고 한국전쟁이전에는 이건우, 김순남과 같은 사회주의자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사실 음악의 마르크스인 쇤베르크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쇤베르크는 음악의 전혀 새로운 음계를 만들었다. 즉 12음계다.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높낮이를 없애고 평등한 음계로 만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요즘 정부기준으로 하면 좌빨인가. 또한 함성호시인은 백남준의 퍼포먼스가 과격한 것은 바로 이런 청년기의 고뇌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시대의 선택에서 도망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의 절규는 더 컸다는 것이다. 그런 난감한 상황이 그의 마음에 상흔(트라우마)도 주었지만 또한 그의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고 긍정적 결론도 내린다.
'68혁명' 당시 파리시가전 영상자료
백남준은 68년에는 미국(?)에 있었으니 '68혁명'을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으나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당시 파리시가전은 치열하다기보다 처절하다. 길바닥이 화약고처럼 완전히 절었다.
이후에 프랑스에서는 대학교육의 대개혁이 일어났다. 대학에서 모든 결정을 내릴 때 교수 반 학생대표 반이 참가하게 되었다. 40년 전의 일인데 획기적이다.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못가고 있다.
68혁명은 유럽사회를 모든 면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여성도 인간임을 선언한다. 남성중심의 성을 무너뜨리고 여성혁명을 가져온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 등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유럽지식인들의 90%이상은 맑시스트들이다. 사르트르(극좌파)를 비롯하여 데리다(맑시스트)까지 다 그렇다. 한국처럼 그걸 금기하는 나라다. 약자를 편드는 지식인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게 만든다.
코끼리 마차 속 - 우산 쓴 부처 왜?- 대자대비와 똘레랑스
'코끼리 마차' 18개의 TV 1999-2001
도전적이기도 하고 유희적인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코끼리와 마차, 우산 쓴 부처,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또 정말로 잘 어울린다. 우산을 쓴 부처가 올라 탄 코끼리 뒤에는 18개의 TV 상자가 있다. 코끼리와 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등의 영상이 들어가 덩치에 비해 귀엽다.
코끼리, 마차, 우산, 부처 이것들이 상징하는 것은 다 대자대비 아니면 관용(똘레랑스) 아니면 배려 등과 관련이 있을 거다. 우리사회를 조금이라도 행복한 유토피아를 만들어보려는 작가가 의도가 아닌가싶다.
'코끼리 마차' 18개의 TV 1999-2001 (부분)
TV가 종이를 대신하는 이미지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고한 작품이라고 할까. 움직이는 화면이라 참으로 멋지지만 사실은 현대미술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대사건이었다.
가장 미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이다 - 21세기 창의성교육 강조
이브클라인 I 퍼포먼스 제목 : 창의적 수업(?)
백남준의 창조정신은 교육을 통해서 계속 전승되어야 한다. 한국은 가장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만 가장 창의성이 없는 공부를 한다. 밑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벨수상자가 없음은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백남준정신이 가장 필요하다.
기계와 자연의 혼숙 - 동양미학의 핵심은 물아일체
'TV 정원' 1974년 작
간단한 개념 같지만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다. 동양의 전통인 물아일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자연에 품에 안긴 문명의 이기 둘은 서로 충동하지 않고 공존 공영한다. 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도 매우 자연스럽게 아름답다. 80여 대의 모니터로 구성되었고 계단을 반 층 올라가 보면 인공과 자연의 조화 속에 움직이는 영상미가 매려 될 것이다.
진정한 권력은 상상력에서 나온다- 문화강국을 역설
'권력은 상상력에서' 68혁명이 낳은 표어 중 하나
21세기는 상상력의 시대가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모든 권력은 창조에서 시작한다. 백남준은 그럼 면에서 21세기 칭기즈칸이다. 책을 쓴 사람이 발명품과 예술품을 만든 사람이 우리시대 최고의 권력자이다.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다. 이제 권력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이제는 블로거 한 사람도 방송 하나가 가지는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작가나 예술가는 하나의 정부이고 권력이다. 때로는 국가권력과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세월이 갈수록 국가권력은 맥을 못 추고 최소한의 법적 가이드라인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로미오 남준과 줄리엣 샬롯의 로맨스 - 둘은 수없이 예술로 섹스하다
'생상스를 위한 변주곡' 백남준과 샬롯 무어만 1964
그는 연애로 시작하여 연애로 끝났다. 그는 평생 연애쟁이 아니면 연애지상주의자이다. 백남준의 어린 연인은 그의 소꿉동무인 이경희여사다. 그녀에게서 '봄을 느꼈다'라고 고백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연애'라고 했다.
'살아있는 조각상을 위한 TV 브라' 1969 사진(피터무어). 백남준은 샬롯처럼 "센(?) 여자"를 좋아했다.
이 사진은 너무나 유명하다. 둘은 서로 궁합이 너무 잘 맞는다. 그의 애인 격인 샬롯 무어만은 실제로도 명문 줄리아드출신의 연주자이다. 백남준의 말에 의하면 우스갯소리인지는 몰라도 차안에서 딱 한번 그와 몸 연주(?)를 했다고 고백한다.
아트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TV 아카이브(1) 스미소니언과 공동자료화 함
백남준의 영원한 애인 샬롯 무어만과 백남준은 섹스를 하듯 그렇게 수없이 행위예술을 순회하고 다녔다. 유럽에 가서는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타고 이 짓을 했다. 하하하 여기 비디오작품은 후반기 것 같다.
새천년 선언: "종이는 죽었다" - 미래 예측하며 신석기로 역주행하다.
'BC 15000'와 '종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신석기시대와 통화하면서 21세기 종이 없는 시대와 소통하다.
'종이는 죽었다'라는 문자시대의 종언에 대한 선언이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종이신문이나 텍스트로 쓴 책은 죽었다는 뜻이다. 백남준 식 환경운동이기도 하다. 이미지로 보여주는 전자책이 나온다는 뜻이다. 인터넷시대를 예고한 말이다.
그래서인가 백남준은 현대는 전자공학적 상황에 노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예로 서양의 기술인 비디오가 중국의 애매한 시와 철학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서양의 상생적 만남을 뜻한다.
여기에는 그의 시간관도 언급된다. 1만5천 년 전 신석기시대를 상상할 수 있기에 미래도 예측한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는 넘어서 있다. 그리고 그는 "내일의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소통이야말로 전쟁예방의 지름길: 백남준의 평화철학]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 동서양의 소통이 현대문명의 핵심적 주제임을 강조한다. 위에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만약 동양이 서양을 알고 있는 지식의 10분의 1이라도 서양이 알고 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통은 바로 전쟁의 예방하는 지름길이라는 그의 평화철학이 엿보인다.
인간의 뇌처럼 복잡한 삶의 공식들
백남준은 이렇게 복잡한 공식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가능한 것은 바로 비빔밥 정신, 동서양의 화합정신 혹은 통합정신이다. 불교 언어로는 원융합일이라고 하는가.
7월 20일 그의 생일, 무슨 일이? - 재클린의 생일도 백남준과 같다.
'7월 20일' 1985년 작. 백남준의 생일과 관련된 인물과 난해한 공식이 보인다.
위에 보이는 백남준의 공식은 아인슈인이의 상대성원리를 연상시킨다. 물음표에서 거꾸로 물음표를 빼면 무한대가 된다. 정말 재미있는 가설이다. 백남준아트센터도 그런 개념을 깔고 있다. 기존 큐레이팅 방식으로는 백남준이 품었던, 시대를 앞서간 사고와 장르를 따라갈 수 없기에 고심 중이다.
제2 제3의 백남준 한국에서 나올까? -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창작보안법이 나와야
관객들에게 작품설명을 하는 도슨트(1) 로봇이 사람처럼 보인다.
관객들에게 작품설명을 하는 도슨트(2).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과거를 배우고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내다보는 최고의 교육장이다.
오후 시간 도슨트가 백남준 작품해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오늘은 사람이 상당히 많다. 이영철 관장은 모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괴짜들이 많이 몰려와서 제2, 제3의 백남준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물의 모델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로서 얼마나 축복인가!
이런 작품 앞에 서면 모든 사람이 남녀노소가 없이 하나가 된다. 사람들이 얼굴이 그지없이 편해 보인다.
백남준아트센터 내외풍경 - 건물전면은 비디오아트의 화면 연상
백남준아트센터 입구에서 잠시 바람을 쐬다.
백님준 관련 영어서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서적도 함께 하면 좋겠다.
아트센터 카페. 1층 로비를 들어서다보면 카페도 보인다. 야외카페도 있다.
[오후세미나 다시 시작]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것 - 문자시대는 가고 영상시대는 오고
바존 브락(Bazon Brock 1936~)의 초대강연
바존 브락은 현재 부퍼털 대학 미대교수로 1960년대 백남준이나 요셉 보이스 등과 함께 퍼포먼스나 해프닝에 참여했던 상당한 미술이론가다. 그의 강연은 예술을 종교로 비유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백지에 새 선을 긋는 사람 - 시대를 예측하는 힘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는 관객들
브락은 말한다. "진정한 작가란 백지에 아무도 그리지 않은 선을 매일 긋는 사람이다" 그와 함께 한 강연자라 그런지 관객들의 관심도 높다. 백지에 새 선을 긋는 사람이며 한 시대를 제대로 예측하여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길로 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예술가의 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최고의 교수가 되려면 학생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긴 인생이나 예술이나 시작만 있지 끝은 없는 것이 아닌가.
신랄한 비판 없이 진정한 낙관주의는 불가능 - 백남준의 웃음 속에 통렬한 비판이 서려있다.
2층 강의실 모자이크 격자무늬 창문. 오후햇살이라 벽면의 색과 형태가 달라 보인다.
브락교수는 "신랄한 비판 없이 진정한 낙관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백남준의 천진한 웃음 속에 언제나 치열한 고민과 예리한 문명비판정신이 서려 있다고. 인간에게 산재한 문제를 풀려면 언제다 다시 처음정신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시작이 반이라고 지금 시작하면 거기서 밝은 미래와 희망이 생기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말해 백남준 작품은 치열하고 신랄한 풍자와 야유가 있었기에 우리는 지상의 천국과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백남준의 예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만병통치 만사형통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소통과 참여'를 매개로 생활 속에서 꽃피워 온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 아닌가싶다.
'안심낙관(1999)'이라는 비디오작품이 <우리들병원>에 설치되어있다. 자신이 뇌졸중으로 쓰려져 오래 고생했지만 "병원의 역할을 환자를 안심시켜 낙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렇게 사회적 의사(무당)의 몫도 한다.
질의응답-세미나 마무리 - 턱없이 짧은 시간에 대답보단 문제제기
이진경(왼쪽), 바존 브락, 김남수, 이영철, 김진석
그리고 질의응답시간은 짧았으나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다만 너무 질문자의 폭이 좁았다는 점이 아쉽다. 백남준의 맑시즘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연구과제는 다음기회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진경 : 서울산업대교수 철학자 유목주의 코민주의에 관심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있다 I 바존 브락 : 1960년대 요셉 보잇 앨런 카프로 백남준과 해프닝 퍼포먼스 참여 미술이론가 부페탈 미대교수 I 김남수(사회자) : 무용평론가 백남준아트센터 공공프로그램 담당. 퍼포밍 아트에 전문가. 잡지<판> 편집위원 I 이영철 :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I 김진석 : 인하대교수 정치문화비평가 저서: <이상 현실, 가상현실, 환상현실> 등이 있음
2층 강의실 모자이크 격자무늬 창문과 같이 이야기하는 관객들
그리고 다시 날이 저물고 그을 추모하는 잔치로 사람들 마음이 부자가 되다.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자연 법칙 그리고 일체 상대적 관념과 잡념에서 벗어나 한 예술가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선물하였다.
지금 뭘 제일 하고 싶죠? "아, 연애" - 2004년 모 신문사 인터뷰
연애쟁이- 지금 무엇이 제일 하고 싶으세요? "아, 연애"
- 연애 많이 하셨잖아요."아직 부족해"
- 선생님 보고 다 천재라는데요. "나 천재 아니에요. 괜한 말이야"
- 미술사에 남을 위대한 예술가시잖아요."남긴 남을 거야"
- 어떤 예술가로요? "미디어 아티스트"
- 그냥 그렇게만 기억되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럼 어떡해"
-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어때요? "관계없어요. 난 내 일만 하면 돼"
- 연애 말고 예술 쪽에서 뭔가 하고 싶은 건 없으세요? "책 하나 쓰고 싶어. 내 자서전. 영어로 쓸 거야"
더 자세한 내용 여기 http://www.slrclub.com/bbs/vx2.php?id=nikon_club&no=7378
[다시 집으로] 아쉬운 귀가 백남준아트센터 전경 ⓒ Nam June Paik Art Center
이제 용인은 세계적 문화도시가 될 것이다. 독창적 큐레이터의 발굴도 과제이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이번 세미나를 위해서 주최 측에서 서울역 광화문과 강남에서 버스를 준비해주어 나도 거기에 덩달아 끼었다가 구경 잘하고 왔다.
'휴대폰이 예술이 되다(Cellphones turned art)' 백남준의 예술을 잇고 있는 후배작가들. 볼티모어미술관 고 백남준선생 ⓒ Baltimore Museum
참고: 순간의 빛에 영원 입힌 천재 백남준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20616081<ype=1&nid=006&sid=0106&page=1
참고: 백남준 독일시절 친하게 지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와 관련기사
http://news.mk.co.kr/newsRead.php?rss=Y&sc=50500012&year=2009&no=69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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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시소개 코너
'백남준, 강익중의 멀티플 다이얼로그 ∞' 2009년2월6일~2010년2월7일
▲ '백남준, 강익중의 멀티플 다이얼로그 ∞' ⓒ 국립현대미술관
기간: 2009년2월6일~2010년2월7일 작가: 백남준-강익중 장소: 과천국립현대미술관 문의:02)2188-6038 구성: 예술적 조언자였던 백남준의 작고 3주기에 즈음하여, 그를 헌정하는 일종의 오마주다, 지난 1994년 휘트니미술관 챔피언분관에서 역시 백남준과의 2인전 형식으로 열렸던 '멀티플-다이얼로그'의 후속전시다. 홈페이지: www.moca.go.kr
이번 전은 흥미로운 전시제목에 못지않게 그 의미가 다중(多重)적이다. 우선,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작가 강익중의 4반세기에 걸친 '3인치 작품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지는 일종의 회고전인 동시에, 백남준 작고3주기에 즈음하여 열리는 것이다. 또한 올해 개관 40주년을 맞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는 과천미술관과 함께 해 온 백남준 작 '다다익선'과 램프코어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는 의미도 있다.
'삼라만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익중의 3인치 작품 6만여 점이 오브제, 영상, 음향, 관객참여를 위한 미디어 설치작업 등과 함께 선을 보인다. 18미터 높이의 비디오 타워 '다다익선'을 감싸고 올라가는 램프코어의 나선형 벽면(총연장 200미터)에 설치되었다. 이 설치전은 또한 세대와 매체, 심지어 생사의 간격을 넘어서 이어지는 두 대가의 인간적 교감과 미학적 대화를 집대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램프코어는 관객들과 현대미술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상징적인 공간이자 전시실과 전시실들을 다채롭게 연결해주는 허브 공간이다. 관객들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명멸하는 백남준의 영상 메시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강익중의 3인치 작품들을 하나 둘 읽어가면서, 이들의 대화에 초대받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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