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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현전] 곽인식, 유리로 그린 파격적 오브제-페인팅

《곽인식》전을 6월 13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 《곽인식》전을 6월 13일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렸다.

-곽인식 유리로 그리는 파격적인 오브제 페인팅, 시대를 앞서가다

<곽인식의 분열을 봉합하는 미학> 좌우익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난관을 ‘균열’로 인식하고 그것을 ‘봉합의 미학’으로 극복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의지를 반영한다. 곽인식의 최고 걸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그는 붓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유리를 깨고 그것을 다시 꿰매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다 그의 독창적 페인팅 기법이다.

곽인식(1919-1988)은 일본미술계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로 사물과 자연의 근원을 탐구한 선구적인 작업 세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 예술적 성과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곽인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이번 전시는 국내와 일본에 소재한 곽인식의 작품 100여 점과 미공개 자료 100여 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곽인식(1919년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 1988년 도쿄에서 작고)전> 419혁명 때 남북통일 교류위원회 중 남북문화교류 촉직 위원회 남한쪽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매우 진보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작가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역시 만석꾼 대지주였다. 당시 일본에 유학(1937년 일본미술학교 입학)해 미술을 전공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이미 깬 사람이었다. 미술의 본성을 물성의 탐구에서 찾다. 그는 종이 대신 유리로 그것을 붓처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다.

일본에서 맹렬한 활동을 하는 곽인식에 관심이 있었던 백남준은 1993년 비엔나에서 그의 작품을 격려하는 편지(팩스)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일본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일본에서 작업을 한 것은 그의 유리로 그리는 방식의 회화가 아직 한국에서 발 붙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960년대 일본에서 동경올림픽이 열리고 모든 건축 등에 많이 쓰이게 되는 유리에 관심을 쏟았고 그의 그림의 먹과 같은 오브제 혹은 물성이 되었다 그는 유리가 너무 좋아서 거기에 얼굴을 비비기도 했단다 그는 유리를 깨고 그것을 그대로 봉합(꿰매는)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런 작품은 이우환 등에게 영향을 주다. 여기서 물성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몰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파리에서 작가의 모습과 일본에 유학했을 때 작가의 모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작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되는 이번 회고전은 곽인식이 탐구한 ‘물성’이 시대를 앞서 어떻게 발현되고 전개되었는지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라며 “일본과 한국 화단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곽인식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곽인식》전 개최] <삼부로 구성>

I. 현실 인식과 모색(1937년~1950년대 말) 아래작품 전시설명을 하는 박수진 학예연구관 그리고

곽인식, <인물(남)>, 1937-8, 캔버스에 유채, 91x72.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도쿄와 대구에서 제작된 초기 작업과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들이다. 곽인식은 1937년 도일하여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귀국,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1949년 일본으로 돌아간다. 1950년대 주요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거의 매해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물(남)>(1937-38)은 음영의 대조가 돋보이는 초기작이다. 독립미술협회전에 출품된 <모던걸>(1939)은 비슷한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기하학적 요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다

배경에 기하학적 형태와 면의 분할은 작가가 새로운 미술 사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1950년대에는 패전 후 일본의 불안하고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이 다수 제작되었다. 신체가 왜곡되어 눈알이 강조되거나 손발 같은 특정 부위가 지나치게 과장된, 초현실 경향의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작품>(1958)의 강렬한 붓 터치와 눈알의 과장된 표현에서 이러한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물질감과 원색은 이후 모노크롬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깨진 유리를 다시 붙여 그린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다 이것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가 물성 그 자체이다 그에게 미술은 물성을 탐구하는 것인가

II.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
곽인식이 작업에서 행위가 부각되고 물성을 드러나는 시기이다. 1960-61년에는 원색의 물감에 석고를 발라 두터운 질감을 표현한 모노크롬 회화로부터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유리병, 전구 등과 같은 오브제를 부착하고, 이후에는 유리, 놋쇠, 철, 종이 등 재료 자체에 주목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곽인식 작품 행위의 분수령이 된 깨뜨린 유리를 붙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제시한 작품들(1961-63년)을 집중 선보인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비록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나) 좌우익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난관을 ‘균열’로 인식하고‘봉합’으로 극복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의지를 반영한다. 실제로 이 시기 곽인식은 남북통일활동에도 앞장섰다. <평화통일 남북문화교류촉진문화제>(1961)에 참여하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계열의 미술가협회가 연합한 <연립미술전>(1961)을 기획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종이를 ‘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자른 작업을 선보이는데 이때 종이의 ‘원’은 평면이나 조각이 아닌 물질 자체로 제시된다.

III. 사물에서 표면으로(1976-1988년) 

위 작품은 곽인식의 작품 중에서 단연 최고다. 가장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로 만든 작품인데 마치 먹으로 찍어서 그린 추상화 혹은 서예 같은 착시 효과를 준다

1976년 이후 곽인식은 돌, 도기, 나무, 종이에 먹을 활용한 작업을 소개한다. 곽인식은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어 다시 자연석과 붙이거나 손자국을 남긴 점토를 만들고,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다시 나무 표면에 칠하는 등 인간의 행위와 자연물을 합치하려는 시도를 한다. 후기에는 붓으로 종이에 무수히 많은 색점을 찍어 종이 표면 위에 공간감을 형성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곽인식》전 개최] 곽인식(1919-1988)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대규모 회고전 2019년 6월 13일(목)부터 9월 15(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개최 1960년대 ‘물성(物性)’에 주목한 전위적 작품으로 일본과 국내 화단에 영향 [1] 국내 및 일본에 소재한 작품 10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 출품 [2] 미술관 역대 전시 중 최다, 48점 보존처리 및 한·일 미술계 심도있는 연구 아래사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미술관 측의 의뢰로 만든 야외조각

백남준 1992년 3월 2일 비엔나에서 보낸 메시지 팩스 여기에 보면 백남준은 곽인식과 20년 친구라는 기록이 보인다

곽인식의 대표작 중 하나 후반기에 이런 작품이 많이 팔려 생활이 좀 펴졌다고 한다.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인 작품이다 작품 설명을 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 연구관 박수진 // 1969년에는 종이를 ‘원’의 형태로 조심스럽게 자른 작업을 선보이는데 이때 종이의 ‘원’은 평면이나 조각이 아닌 물질 자체로 제시된다.

그는 일본에서 60년대 전위적인 갤러리로 자처하는 나이카화랑에서 전시를 하다. 이 갤러리에서 백남준 등도 전시를 했다고 한다. 그는 경제난 속에서도 1969-1975년 빼고 그는 꾸준하게 전시를 하는 일관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비록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나) 좌우익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시대적 난관을 ‘균열’로 인식하고‘봉합’으로 극복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의지를 반영한다.

그는 진흙은 종이처럼 펼친다 돌 유리 진흙 등은 그에게 하나의 종이와 같은 것이다 모노하 등에 영향을 주고 받다 /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를, 일본에서는 1970년대 모노하(物波, School of Things)가 국제적인 흐름에 조응하다.

곽인식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 깨진 유리로 만든 작품인데 마치 먹으로 찍어서 그린 추상화 혹은 서예 같은 착시 효과를 준다.

일본미술잡지<미술수첩 1969년 7월호> 소개된 그의 작업(사물의 언어를 듣다)하는 모습과 작품 그는 드로잉보다 사물의 사운드를 듣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곽인식은 1943-1945 수원 중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기도 했다.

말기의 그의 회화는 서광이 비치듯 밝아진다 그리고 설치작품 등등 // 작가는 원색의 물감에 석고를 발라 두터운 질감을 표현한 모노크롬 회화로부터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유리병, 전구 등과 같은 오브제를 부착하고, 이후에는 유리, 놋쇠, 철, 종이 등 재료 자체에 주목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 사후 오랜 기간 방치되었던 작품을 발굴하여 총 48점을 6개월간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하였다. 또한 곽인식의 조수였던 우에다 유조(갤러리 Q 대표), 후배 작가인 최재은을 비롯, 박서보, 김구림, 곽훈, 김복영 등 평론가, 작가들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곽인식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한국미술계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말 "우주 속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물이 존재한다. 나는 일체의 어떤 표현 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가 사용한 붓들 그가 남김 드로잉 등등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미술관 측의 의뢰로 만든 야외조각

<연계 학술심포지엄> 2019년 8월 초 예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소강당에서 대상/ 발표내용 [1] 1960년대 일본 상황과 유리 작업, 남북관계 (김현숙 미술사가) [2] 곽인식과 일본 작가들과의 교류, 물질 탐구(히토시 야마무라 도쿄도미술관 학예실장) [3]1970-80년대 곽인식 회화 (치바 시게오 미술평론가) [4] 곽인식 작품이 한국미술계에 미친 영향 (오광수 뮤지엄 산 관장)

곽인식 그의 유리로 그리는 파격적인 오브제 페인팅, 시대를 앞서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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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th Anniversary of Birth: Quac Insik // June 13–September 15,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