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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국현전시, 지칠 줄 모르는 미의 수행자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Playing with Color)'  <수정중>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일시 2019년 5월 17일(금)-9월 1일까지 2007년 경기도미술관에서 김홍희 관장이 기획한 박서보전 정말 훌륭했다

[진정 여기에서 그림을 보았노라] -2007.05.17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 경기도미술관에서 7월8일까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에 건립된 경기도미술관에서 5월11일부터 7월8일까지 '박서보의 오늘, 색을 쓰다(Playing with Color)' 전이 열린다. '색을 쓰다'에서 알 수 있듯 무채색의 모노크롬에서 색채의 모노크롬으로 전환한 박서보의 근작 8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색채가 흔히 정신적으로 승화된 사유의 색이라 평가받지만 이번엔 너무 빨아 닳아버린 서민들 옷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래고 유치해 보이는 색채까지도 캔버스에 도입해 가장 아름다운 색채로 끌어올리는 개가를 올렸다.

뜨거운 추상, 박서보

화가 박서보(76)는 40년간 하루 14시간 작업해왔다. 새벽 3시까지 작업을 하기에 그의 집을 사람들은 '도깨비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가 평생 보여준 참을 수 없는 열정, 그 예술적 진정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체력과 정신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작가도 작품의 양과 질에서 열의나 감각에서 그를 따라오기 힘들 것이다.

그는 1950년 홍대 동양화과에 입학했으나 육이오로 부산 피난시절을 맞았고 동양화과 스승인 청전 이상범선생이나 고암 이응노선생과 재회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서양화를 전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를 자신의 화풍을 국제화하는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그는 1956년 26살에 '반국전선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당시 한국전쟁이후 일체의 기존가치가 무용지물이 된 상황에서 과감하게 과거청산을 선언한 것이다.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제도미술에 대한 정면 대응은 바로 그의 예리한 미적 안목과 예언자적 기질을 잘 보여준 사건이다.

그는 그 후 60년대 한국에서 추상화(앵포르멜)를 다졌고 70년대 후반 탈이미지 시대를 거쳐 80년대 이후 묘법시대를 맞고 그의 묘법연작은 끊임없이 창조적 진화를 해왔다. 묘법(Ecriture 에크리튀르)은 프랑스어에서 온 것으로 쓰기(writing)에 가까운 뜻이다. 작가의 잠재된 마음과 무의식적 세계를 쓰고 또 지우는 묘법이라 할 수 있다.

박서보 색채의 창출

그의 색채는 40년간 진전되어 이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박서보만의 색채를 창출해냈다. 디지털카메라로 그의 색채는 잡히지 않는다. 단지 일부만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육안으로만 잡을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의 색채가 얼마나 까다롭고 복잡한 공정과 많은 수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논의는 많았지만 아름다움을 가슴으로 경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박서보의 그림을 보면서 감히 "이런 것이 아름다움이구나"하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그의 색채감의 그의 터프한 외모와 큰 덩치와는 다르게 감성만은 여성 못지않게 여리고 섬세해 보인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어렸을 때 집에서 닭을 잡아 어른들이 닭 머리를 비틀어주며 눌러보라고 하면 그것도 못하는 숙맥이었다고 한다.

색채가 미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감안할 때 현재 그의 색채감각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박서보의 전성기에 제작된 한국추상들이 경기도미술관이라는 멋진 전시장을 만나 관객들과 교감을 일으키며 놀라운 조응을 이룬 것은 작가나 관객 모두에게 큰 행운이다.

그의 뚝심과 인내심 천재적

그의 뚝심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 만하다. 하루에 14시간 고된 작업을 40년간 했다니 세상에 이런 고행이 어디 있나싶다. 그러나 그에게 이 작업은 하나의 축제이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놀이가 없다. 그래서 그는 노는 법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떤다. 노동과 놀이가 이렇게 완벽하게 하나 되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우리에게 한국추상화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박서보가 있다는 것은 소박한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박수근이 있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다. 고향이 경북 예천 산간벽지출신이라 그런지 뭔가를 끝까지 해 내는 뚝심과 지구력 그리고 인내심이 돋보인다. 바로 이런 점이 그를 대가로 만든 덕목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또한 이러한 끈질김은 작품의 완성이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독특한 동양적 예술관에서 나온 것 같다.

그의 뚝심은 그림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기록이 될 만한 것은 다 버리지 않고 모으는 수집광이다. 40~50년 이상 자신의 일기는 물론이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며 동료 화가들의 전시포스터 등을 고스란히 모았다. 기록의 힘과 예술의 영구성을 인식하고 실천하며 그는 살았다.

숭고함마저 느끼게 하는 박서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돌처럼 단단한 심정도, 꽉 막힌 마음도 무장해제 되듯 녹아버린다. 작가도 언급했지만 그의 그림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그의 색채가 주는 경이함과 황홀함이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아 그들을 깊은 심미의 바다에 빠지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지, 물아일체의 상징

박서보는 자연과 인간을 갈등과 대립으로 보는 서양의 이원론보단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려고 하는 동양의 일원론이 옳다고 봤다. 종이가 사람이고 사람이 종이라는 통합의 정신, 이런 면에서 그가 한지를 사용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는 이렇게 물아일체의 상징인 한지에 한국적 추상을 담았다.

한지는 천년을 간다고 지천년(紙千年), 정말 세월이 갈수록 중후해진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마음속에 파도가 일어나는데 이는 한지가 주는 설렘과 위력이 아닐까 싶다. 우리 심성에 딱 맞을 뿐 아니라 모성적 따뜻함까지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박서보의 한지 예찬은 끝이 없다. 하긴 이제 그의 한지추상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작가는 또한 동양적 여백의 정신을 살리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림 중간 중간에 돌기 없는 평평한 면을 그려놓고 있는데 이는 바로 그림의 숨통을 뜻한다. 그림도 숨을 쉬어야 편할 것이고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도 편해질 것이다

날 비우고 진정한 나 찾기

그림은 언어이전의 세계이기에 그의 작품을 논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다만 작가의 말을 빌린다면 그의 작업은 마음을 비우는 과정을 통해 무위자연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쌓고 다시 비우고, 채우고 또 비우고 하면서 관념과 속박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로움과 정신적 해방을 추구한 셈이다.

이런 정신은 이미 70년 후반부터 그리기의 무목적성, 무상성을 발표하면서 언급되었다. 또한 "나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라는 탈논리, 탈표현을 주장했다. 이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그린다는 역설의 논리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그림이 고품격으로 단순화지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에게 있어 그림은 이렇게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수신의 과정이다. 그는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비우며 참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도승 같다. 그러기에 그의 최고 적은 바로 '자기만족'이다. 그는 이렇게 예술을 한 것이 아니라 예도를 수행한 것이다.

마무리로 그의 작업과정과 업적에 대해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평을 인용해본다.

"정방향의 한지조각을 물에 불려 캔버스에 붙이고 이를 굵은 연필심이나 쇠붙이로 긋고 움푹한 이랑을 만들거나 밭갈이하는 것 같은 그의 제작방식은 각단위의 '충돌과 간섭' 통하여 화면전체에 유기적 '통일과 조화'라는 미적 효과를 창조했다."

덧붙이는 글 | <경기도미술관 소개> 주소: 경기도 안산시 동산길 36(초지동 667-1) 전화: 031-481-7000 http://gma.or.kr 전시설명: 화~금 오후3시 토, 일, 공휴일 오전11시와 오후 3시 관람시간: 오전10~오후7시(월요일 휴관) 관람요금: 일반 700원 청소년 300원 교통편: 지하철 4호선 공단역 하차 1번출구 초지운동장 쪽으로 도보 15. 나머지 홈 참고

박서보홈페이지 http://www.parkseo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