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남준랩소디

[백남준] 그가 평생해 온 예술주제 '전쟁방지'

비참한 학살이 일어난 세계 대 2차대전

"백남준이 평생해온 예술의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전쟁방지다" -소통이 결핍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백남준 식민지 시절 경기중고시절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은 세대다. 그의 전쟁에 대한 거부반응을 처절했다 그는 독일에 가서 그런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여유없이 노출시킨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테러리시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모든 Performance는 결국 전쟁악귀를 추방시키는 해방굿이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였던 과달카날 군도를 배경으로 '과달카날 레퀴엠(Guadalcanal Requiem) 1977작'을 제작하고 프랑스·인도·베트남 등의 여러 도시를 탐구하는 '비자(Visa) 1978'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쟁과 같은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매체로서 TV가능성을 적극 타진하려는 시도였다. -서울대 육영신교수 백남준 논문 진하게 된 부분은 다 육영신 교수의 글이다 나와 글과 그의 글이 뒤섞여 있다.

"정보의 결핍이 없다면 베트남 전쟁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백남준. 즉 미국이 베트남에게 진 이유는 바로 정보부족이라고 주장한다> <백남준은 결론적으로 모든 전쟁을 바로 정보부족에서 온다고 결론 짓고 있다. 백남준은 첫번째 전쟁방지책으로 인터넷 아이디어를 내고 그런 네트워킹 개념을 도입하다>

1964년 뉴요에서 백남준 식 반전 퍼포먼스

즉 전쟁의 그늘로부터 아직 벗어날 수 없었던 1960년대 초 독일에서 등장한 그의 TV들은 시각적인 비결정 성의 탐구를 위한 탁월한 매체이자 “일방향적 정보전달 방식”을 지닌 “현대사회의 독재자” 혹은 “반민주주의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처럼 백남준이 텔레비전을 예술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도구로서 간주하는 것은 단순히 독일시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1964년의 도미 渡美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그는 1970년에 작성한 글 「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 공동시장」에서 “정보의 결핍이 없다면 베트남 전쟁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정보의 불균형이나 타문화간 이해의 부족이 2차대전·베트남전과 같은 비극적 사건을 야기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해 주목된다.

백남준은 정보아티스트(information artist)로서 최고의 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가짜(허위)뉴스'다. 가짜뉴스 만드는데 천재 선동가는 바로 독일 나치 시절 '괴벨스'를 빼놓을 수 없다. 백남준의 미디어론은 이를 총공격하기 위한 무기였다. 

백남준 세계의 모든 미디어(방송 신문)을 5가지 단어로 요약한다. 1. 섹스 2. 폭력 3. 탐욕 4. 허영 5. 속임수(백남준론 중 가장 유명한 백남준_말에서 크리스토까지 66쪽에 나옴) 다시 말해서 그는 미디어의 맨 얼굴을 일찍이 읽고 있었다. 맥루한이 말한 "미디어는 메시지다"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쾨프닉은 백남준의 텔레비전 작업이 배태된 역사적 공간의 이슈들과 유리되지 않을 것을 촉구하면서 백남준이 포스트 파시즘 시대 텔레비전 스크린의 역할에 대한 나름의 논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같은 쾨프닉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백남준이 《음악의 전시》를 개최한 1960년대 독일에서는 과거 나치독일의 언론통제와 텔레비전 연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텔레비전을 세뇌의 도구로서 간주했던 데 대한 반작용으로 당시의 텔레비전 방송은 시청자들에 대한 교육적인 책임이 크게 강조되고 있었다

실제 독일 내에서 텔레비전을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 간주하기 시작한 것은 2차대 전기 나치에 의해서였다 선전성 宣傳省 과 괴벨스를 중심으로 한 텔레비전의 개발은 나치독일의 기술적 우월성을 홍보하고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에 따라 텔레비전을 보는 관람자가 스크린을 수동적으로 응시하고 투사된 이미지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연구의 방점을 두었다

또한 텔레비전보다 일찍이 보급된 라디오는 그야말로 나치 총통과 완벽한 동의어였다 전쟁기 내내 라디오는 오로지 총통의 연설을 국민들에게 주입하는 매체였고 이는 정해진 채널 외의 해외 방송을 들으려는 이들을 엄격하게 검열하는 정책까지 동반함으로써 강력한 통제를 행사했다.

백남준은 포스트 파시즘 시대에 시대악을 극복하는, 이를 다스려나가는 방법이 바로 피아노(근대주의) 부수기와 과격한 행위예술 그리고 더 나아가 TV(현대주의)라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이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시대악을 예와 음악으로 극복하려고 한 공자와 거의 일맥상통한다.

앵포르멜 작가 칼 오토 괴츠 Karl Otto Götz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칼 게르스트너 Karl Gerstner 제로 그룹 Zero Group 그리고 백남준 등으로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때 루츠 쾨프닉 Lutz P Koepnick은 백남준의 독일시기 텔레비전들을 조금 더 즉각적인 역사적 맥락 즉 독일이 당면했던 현실적 조건들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쾨프닉은 백남준의 텔레비전 작업이 배태된 역사적 공간의 이슈들과 유리되지 않을 것을 촉구하면서 백남준이 포스트 파시즘 시대 텔레비전 스크린의 역할에 대한 나름의 논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같은 쾨프닉의 지적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백남준이 《음악의 전시》를 개최한 1960년대 독일에서는 과거 나치독일의 언론통제와 텔레비전 연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텔레비전을 세뇌의 도구로서 간주했는 데 대한 반작용으로 당시의 텔레비전 방송은 시청자들에 대한 교육적인 책임이 크게 강조되고 있었다.

백남준 식민지 시절 경기중고시절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은 세대다. 그의 전쟁에 대한 거부반응을 처절했다 그는 독일에 가서 그런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여유없이 노출시킨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테러리시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의 모든 Performance는 결국 전쟁악귀를 추방시키는 해방굿이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1962년의 공연 《음악에서의 네오다다 NEO DADA in der Musik 》에서도 “새로운 세계대전을 위한 전쟁선동자 빌트지<독일 당시 극우신문>”라고 적힌 쪽지를 청중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Susanne Rennert “On sunny days count the waves of the Rhine on windy days count the waves of the Rhine Nam June Paiks frühe Jahre im Rheinland 1958 1963 ” Günter Herzog ed 앞 책 p13

백남준은 포스트 파시즘 시대에 시대악을 극복하는, 이를 다스려나가는 방법이 바로 피아노(근대주의) 부수기와 과격한 행위예술 그리고 더 나아가 TV(현대주의)라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이었다 그런 면에서 백남준은 시대악을 예와 음악으로 극복하려고 한 공자와 거의 일맥상통한다

앵포르멜 작가 칼 오토 괴츠 Karl Otto Götz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 칼 게르스트너 Karl Gerstner 제로 그룹 Zero Group 그리고 백남준 등으로그 계보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때 루츠 쾨프닉 Lutz P Koepnick은 백남준의 독일시기 텔레비전들을 조금 더 즉각적인 역사적 맥락 즉 독일이 당면했던 현실적 조건들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남준 이 삽화를 보고 같은 제목(나는 원숭이를 존경한다)의 콜라주 작품을 만들다

백남준이 제작한 아래 포스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제국주의 바판이다. '나와 유미오(名和弓雄)'의 고문형벌사(拷問刑罰史) 1963 삽화로 수록된 일본 사무라이들의 고문장면들을 발췌해 전체에 걸쳐 콜라주한 것이다

이 삽화들의 양쪽으로는 1955년의 알제리 전쟁에서 사용된 고문 방법에 대한 보고서 두 장이 병치되어 있다 백남준은 고문하는 사무라이 들의 삽화와 고문 보고서들 사이로 “나는 원숭이를 숭배한다 I Admire MONKEY ” 는 문장을 반복해서 쓴 후 그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내가 인간인 것이 부끄럽다 I shame that I am a human being”

플럭서스 퍼포먼스 악보(score)> “톱으로 피아노를 세 조각으로 잘라라 첫 번째 조각을 무솔리니처럼 매달아라, 두 번째 조각을 히틀러처럼 태워버려라 변호사 없이 검사만 있는 인민재판으로, 세 번째 조각의 운명을 결정하라” - 「미국 바가텔」1962 이영철·김남수 편 백남준의 귀환 백남준아트센터 2010 p 127


[목차] Ⅰ. 서론 Ⅱ. 백남준의 정치적 경험과 전후 서독 예술계로의 이동 Ⅲ. 독일 시기 퍼포먼스(1959-1961)의 정치성 Ⅳ. 전쟁의 기억-초기 퍼포먼스들과《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1963)의 연속성 Ⅴ. 결론 참고문헌

아래 글은 백남준의 독일시기(1959-1963) 퍼포먼스와 전쟁의 기억Nam June Paik’s Performances in German Period(1959-1963) and the Memory of War 저자 (Authors) 육영신 Yook Youngshin 출처 (Source)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3, 2017.7, 215-245 (31 pages) Journal of Korean Modern & Contemporary Art History 33, 2017.7, 215-245 (31 pages)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Association of Korean Modern & Contemporary Art History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7222105 APA Style 육영신 (2017). 백남준의 독일시기(1959-1963) 퍼포먼스와 전쟁의 기억.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3, 백남준의 독일시기(1959-1963) 퍼포먼스와 전쟁의 기억 During Nam June Paik"s time in Germany(1959-1963), he encompassed an extensive trend of work, from works that combined actions and music to the television works included in the exhibition entitled Exp

<논문 영어 요약본> During Nam June Paik"s time in Germany(1959-1963), he encompassed an extensive trend of work, from works that combined actions and music to the television works included in the exhibition entitled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1963). His action music works during his early days in Germany included Hommage à John Cage: Musik für Tonbänder und Klavier(1959), Etude for Pianoforte(1960), and Simple(1961) in Karlheinz Stockhausen"s Originale.

백남준과 생각이 같았던 보이스 그는 서구문명의 위선을 파괴시켜려 했다

These works were infamous for their especially violent and extreme actions and were described as "Enfant Terrible." This behavioristic aspect of Paik"s work is narrowly in line with avant-garde musical trends through which Stockhausen and John Cage wanted to spatialize music and adopt action for compositions in the 1950s. It is broadly in line with postwar performances that emerged from reevaluating the historical avant-garde(Dadaism)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simultaneously, resisting modernistic aesthetics.

However, Paik"s performances not only applied simple artistic doctrines but also implied the need for strong political investigations in view of prevailing memories of World War II and the Cold War. Because Paik"s performances reflected political rhetoric, they were fundamentally distinguishable from Cage"s legacy; Paik shared emotions similar to those of German artists, such as Wolf Vostell and Joseph Beuys, who had been recovering suppressed memories about Nazi Germany and the Holocaust since the late 1950s.

In the 1950s, one of the most important issues for the Frankfurt School in Germany was how to express the horrors of the past war as an art form. Herbert Marcuse and Bazon Brock, who studied under Theodor Adorno, supported performances of behaviorism and considered them artistic actions that contributed to a political purpose.

Paik worked within the avant-garde circle; its members shared the same academic background as Marcuse and Brock in Cologne. In his performances, Paik displayed very aggressive behavior, as exemplified by the act of breaking down a piano in the dark, thereby creating a terrifying atmosphere that even Cage would find strange.

The German audience regarded his unpredictable and destructive performances as demonstrations of political behavior in which Paik recreated violent scenes of the war. Indeed, Paik’s political inclinations were conveyed through his performances, which resembled those expressed in the student and artist movements in West Germany. Sometimes, however, his political experiences—shaped by his personal experiences growing up under Japanese Imperialism and a conservative government—were covertly embedded.

This paper is focused on Paik"s political inclinations and strategies in his early performances in Germany, breaking away from formerly unilinear descriptions that refer to Paik"s musical performances as "iconoclastic" or legacies of Cage"s musical experiments, or that position Paik"s works as pre-Fluxus.

In 1963, after his monumental private exhibit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Paik"s identity was solidified as that of a "media artist, " and it seemed as if his works after that were completely disconnected from his earlier performances. Paik, however, compared the one-way information delivery of TV with dictatorship; these censorship and instigations by the media is inextricably linked with memories of World War II and the Cold War.

As such, interpreting Paik"s performances during his time in Germany as responses to the memories of war and political dynamics of the Cold War reveals his critical theme penetrating his two artistic genres, television and performances, that seem vastly diffe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