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ARCHISM(기존 회화의 질서를 교란하는 도전자) - 김상표 / “모든 예술 작품과 모든 철학은 유토피아라는 창문을 달고 있었으며 그것을 달고 있다.” (블로흐, 희망의 원리) // 관련 블로그 https://seulsong.tistory.com/1867
2026년 5월 23일 자하미술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부암동)에서 열린 김상표 전시 오프닝에 전시 축하를 위해 주재환(1940년 생 민중미술에 선구적 역할), 성능경, 민정기, 정복수 작가들도 참가 / 6월 13일까지 전시
[김상표] 숙고한 세계관, 격한 신체항으로 변환, 화폭에 옮기다
김상표 개인전 Destruction=Creation 자하미술관 2022.06.17-07.17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의문로5가길 46 연락처: 02-395-3222 "결국 나의 회화는 긴 사유 끝에 얻은 깨달음의 수행성으로서의 퍼포먼스에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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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무의식의 가장 깊은 층과 의식의 가장 높은 생산물(예술)을 연결시키며 꿈과 현실을 연결시킨다. 환상은 인류의 원형, 집단적이고 영구적이지만 억압되어 있는 이상, 금기시된 자유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다.”(마르쿠제, 에로스와 문명)
1. 나에게 아나키즘이란?
나를 소개할 때 참으로 난감하다. 나는 (순수한 의미의) 경영학자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면서 또 경영학자이고도 철학자이고도 예술가이고도 싶다. 늘 사건 속에서 다른 되기를 하면서 살아온 것 같고, 지금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되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자아를 묶어냈다 싶으면 여러 자아들로 이내 흩어지고 흩어지면 혼란스러워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내려 한다. 지금도 이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분열자 그 자체가 본래의 내 모습임은 부인할 수 없다. 무위진인 참 멋진 꿈이지만 현실의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언제 나는 무위인-되기를 주창하는 이정우 선생의 경지에 이를런지?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 이 두가지는 내가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동인임과 동시에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질병이다. 삶도 글도 이미지도 이 굴레를 벗어난 적이 없다. 나를 한편으로는 긍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하고, 허무주의의 포로임과 동시에 또 다르게는 넘어서고 싶은 고투, 이것이 내게 주어진 화해될 수 없는 절망적인 고통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 그래서 행복은 내게는 늘 신기루이다. 바디우 선생의 “행복의 형이상학”이 도움이 되었다. 실재에 다가서는 기쁨을 느끼려면 그 대가를 톡톡이 치러야 한다는 그 말이.

나의 유토피아적 지향성은 아나키즘이다. 그래서 이 전시의 제목을 “I AM ANARCHISM”으로 삼았다. ‘AM’은 ‘존재한다’를 뜻하는 ‘EOM’에서 유래한다. 아나키즘을 의정덩어리인 화두로 삼아 자기창조와 미적 생산의 실존적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주체적 결단이다. 그런데 아나키즘의 어원인 ‘안아르케(ANARCHE)’는 ‘AN’(없음)과 ‘ARCHE’(원리) 합성어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아나키즘은 질서를 형성하는 절대적 원리의 지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아나키즘이란 중심원리(이념, 제도 등)로 작동하는 동일자의 폭력으로부터 일탈하여 끊임없이 파괴(해체)와 생성(창조)을 반복하는 과정(경향, 힘)이다. 이정우 선생의 지적처럼, 이와 같은 차이나는 반복의 영원회귀는 억압과 해방의 영원회귀에 다름아니다. 화이트헤디안은 이것을 대비의 대비를 향한 수난의 과정이며 합생과 이행의 영원한 모험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아나키즘적 리비도에 나를 맡기고 탈주의 모험을 멈추지 않는 삶, 나는 왜 이토록 그 삶을 붙들려고 할까?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가 나를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포로로 내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원리에 의해서도 지배되고 싶지 않다. 시간 속에서 때때로 나는 나르시시즘의 지배에도, 허무주의의 지배에도 나를 내어주지만, 그 어떤 것도 지속적으로 나를 지배할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과 생명체들 역시 그런 삶의 양태를 살아간다. 배는 물결 사이에서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보여주나, 정박한 배는 그 사이에서 닻에 자신을 잠깐 의지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나키즘이다”라는 제목을 전시회에 내거는 것은 사회의 닻에 눌러앉기를 원하는 나의 얇은 존재 양식에서, 진정한 두께로서 살아가는, 즉 ‘사이’를 망각하지 않는 모습을 찾고자 하는 저항의 몸짓이다.
우리 시대의 아나키스트는 다음과 같은 긴장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아나키즘은 “사물이 지금 있는 방식과 있을 수 있는 방식 사이에, 존재와 되어감 사이에, 맑스와 니체 사이에, 권력과 합리주의의 한계 사이에, 폭력을 거부하는 것과 평화주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다. 새로운 아나키즘은 이런 긴장들을 강력한 동력으로 수용하며, 아나키스트들은 그런 긴장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숀쉬한).

이렇게 아나키즘은 정박과 탈주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아갈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탈주의 모험을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우리 삶의 버팀목인 사랑도 우정도 그것이 탈주의 모험인 한에서 수많은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걸어가는 길일 것이다. 결국 아나키스트는 능동태도 수동태도 아닌 중동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나키즘에서 탈주의 대상이 되는 중심원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이것은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조건마다 다를 수 있다. 동일성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중심원리(혹은 제도)로 나르시시즘, 가부장제, 인본주의, 국가, 자본, 종교 등을 꼽을 수 있다. 나르시시즘은 나를 중심에 놓고 모든 다른 타인들을 대상화하는 폭력이다. 가부장제는 아버지 – 가족주의를 표방하는 회사의 대표 - 초월자 아래 모든 다른 구성원들을 복속시키려 하는 체제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생태계의 지배자로 인간을 상정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자본도 종교도 중심원리로서 초월자 – 최고주권자, 자본가, 신 - 를 상정하고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고 복속시킨다. 이처럼 중심원리에 기반하여 타자를 대상화하고 지배하려는 힘으로부터, 아나키즘은 끊임없이 일탈하면서 이질적 존재들의 과정공동체를 늘 새롭게 갱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서 이질적 존재들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기계 등 우주적 생태계의 여러 존재들이 모두 포함된다.
2. 나의 아나코-페인팅(Anarcho-Painting)을 향한 모험
1) 나의 아나코-회화 형식(스타일)
나는 아나키즘 사상에 기반을 두고 그동안 어떻게 아나코-회화(Aanarcho-Painting)의 길을 모색해 왔는가? 아나코 예술은 예술의 내용과 그 미학적 형식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다. 이 긴장 속에서 내용(주제)이든 형식(스타일)이든 기존의 예술에 대한 모든 정체성과 동일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흐름이 예술의 아나키즘이다. 기존의 경향들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파괴적 혁신을 추구해왔던 아나코 예술의 저항이념을 나도 따른다.
예술가의 파괴적 충동은 창조적 충동이다. 파괴적 충동은 기질특이성이 반영되는 독창적 회화스타일의 창조를 결과한다. 하지만 이것이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회화의 스타일의 창조에는 예술가의 힘에의 의지만이 아니라 수많은 권력관계의 그물망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가의 창조적 자유는 표현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고 규제하며 명령하는 위계 관계나 타인을 억누르는 권력을 거부하는 정치학과 밀접히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사회 변화의 촉매로서의 아나키즘과 스타일의 창조로서의 아나키즘이 연결되는 접점이 형성된다. 이러한 미학적, 윤리적 전통을 이어받아, 나의 회화에서도 회화적 스타일의 새로움을 창안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몸과 정신을 옥죄는 사회적 규범들에 저항하는 아나코 예술의 미학은 살아 숨쉴 것이다.

나의 아나코-회화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논의해 보자. 먼저 나의 기질특이성이 반영된 회화의 스타일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나는 그리기 대상의 형태와 구조를 미리 확정하는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최초의 선을 긋고 색을 칠 하면서 이것과 접속하는 다른 선과 색을 찾아간다. 연이어서 특정한 선과 색은 다른 수많은 선들과 색들에 열린 채로 리좀적 접속을 계속한다. 한 획이 다른 획을 불러오고, 그 획은 연이어 또 다른 획을 불러오고 ... 물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그려진 한 획을 바꾸려 들거나 지우려 들거나 하는 등 어떤 작위도 가하고 싶지 않다. 일상에서의 인칭적 삶을 뛰어넘어 비인징적 그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서예필법과 검법이 녹아든 붓질과 열 손가락의 본능적인 할큄이 캔버스를 흩고 지나가는 가운데 선과 색이 얼기설기 얽혀서 불규칙한 흐름이 형성된다. 그러다가 이질적인 선과 색의 리듬들에 의해 형성된 패턴이 나의 공감각과 공명하는 어느 순간, 내 몸이 스스로 그리기를 멈춘다. 이처럼 리좀적 접속을 통해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사전에 설정되어 있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늘 잠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화이트헤드의 미학에서 말하는 대비의 대비 속에서 우뚝 선 ‘균형 잡힌 복합성(balanced complexity)’ 이 생겨난다. 요컨대 화가-되기 과정을 비인칭적으로 수행하는 가운데 나의 역설의 미학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 나의 회화는 회화적 수행성으로서의 퍼포먼스에 다름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 속에서만 살아 숨쉬는 일시적인 수행성의 장 그 자체일 뿐이다. 구분지어지고 정의될 수 있는 경계를 갖고 있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내 몸의 수행성 그 자체인 예술활동이 나의 미학적 관심이다. 각 그림들은 애매하고 모호한 여백을 담고 있어서 캔버스에 가해질 새로운 사건들은 언제든 수용할 수 있으며 다른 그림들과의 상호적 관계에도 개방되어 있다. 요컨대 나의 그림은 언제든 자신 스스로에게 저항하는 카오스모스이다. 이것이 나의 아나코-회화이다.
2) 나의 아나코-회화 내용(주제)
다음으로 나의 아나코-회화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우주적 생태계를 구성하는 여러 이질적 요소들 사이에서 특정한 배치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나의 초기 작업의 많은 부분들은 이들 중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10회 개인전까지의 화가-되기 과정을 편의상 세 단계로 나누어 거칠게 정리해 보자. 먼저, 자화상과 얼굴 작업의 시기는 내 안의 타인과 싸우고 화해하는 긴 반복의 시간이었다. 수백개의 얼굴 작품들 속에 이미 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흔적들이 어른거리고 이것들을 그리면서 지워가는 자기 소진의 과정을 통해, 양효실 선생의 말처럼 자기 무화를 거처 타인에 대한 자기 허여를 수행했다.
이어서 펑크와 락 음악(너바나, 섹스피스톨즈)을 작업에 끌어들이면서 춤(댄스)과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는 자아와 세계와의 만남에서 겪었던 개인적 경험을 음악 공연 속 캐릭터들과 겹쳐서 표현했다. 더 나아가 디오니소스춤, 푸른 난장, 엑스니힐로 등의 작품들을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춤은 우리의 코드화된 그리하여 경직된 삶을 풀어헤친다. 중력을 벗어난 순간의 수직적 뛰어오름이 과거와 미래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한다. 모든 존재가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자들임을 선포하면서, 자유와 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디오니소스춤이자 푸른 난장이며 엑스니힐로이다. 요컨대 춤은 “나는 아나키즘이다”를 표현하는 중요한 몸짓이자 회화적 장치인 셈이다. 춤추는 우리의 모습은 니체의 말처럼 망각을 통한 진정한 ‘되기’이다. 발작적으로 춤을 추듯 그리는 나의 퍼포먼스 회화 또한 그 특징을 공유한다.
다음은 얼굴성에서 신체성 전체로 영역을 확대해가는 시기이다. 아나키즘을 이념적 기반으로 하여 얼굴과 춤을 소재로 삼고, 에로스와 타나토스 그리고 구원을 회화의 주제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들어서 비로소 내(정상인)가 나 밖의 타인(남과 여, 장애인 등)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회화 작업으로 풀어갔다. 그 결과를 혁명가의 초상-무위당 장일순, 사랑예찬-꿈, Eros-Two dancers, 젊은날의 초상, 구원, We Exist, 통일은 비즈니스다 등의 작품들에 담아냈다. 실존적 문제의식에서 더 나아가 장애인, 전쟁, 통일 등 정치적 문제를 ‘사랑의 윤리학’ 시각에서 풀어낸 작업들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사랑, 죽음, 구원 등을 다룬 모든 작품들은 그와 연관된 사건들이 신체를 경유하거나 횡단함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나코-회화의 스타일과 주제를 풀어가는 나의 화가-되기는 몸의 수행성과 분리되지 않는 퍼포먼스 회화를 구현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그렇기에 나의 작품들은 ‘회화 아닌 회화’, ‘비회화의 회화’이다. 결과물 없는 결과이자, 몸에 기입된 권력을 지워가는 자기 극복의 과정이자, 차이와 다양성의 생성의 놀이이자, 원초적 생명으로 복귀하는 운동으로서, 다의적 의미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나의 회화이다. 이러한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 과정을 통해 나의 몸은 무거운 짐을 벗는다. 재현에 포박되어 있는 그림-기계이기를 거부하고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는 삶의 기계임을 선포한다. 들뢰즈의 말처럼 “항상 문제는 삶을 그것이 갇혀 있는 곳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나는 창조적 무이다(I AM THE CREATIVE NOTHING).
3. 인간과 비인간(자연) 간의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되기
이제까지 내 안과 밖의 타자들과의 관계성을 다룬 그림들에는 ‘자연과 문명(도시)’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적 맥락이 명시적으로는 빠져 있다. 물론 이전에도 남녀가 춤을 추거나 장애인이 시위하는 장면들은 도시 공간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번 그림들에는 도시가 화폭에 전면적으로 혹은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특히 자연 자체 혹은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은 처음으로 출품된다. 자연과 문명이 이전의 소재나 주제들과 버무려지면, 회화가 풍요로워지는 맛과 멋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 전에 자연과 문명에 대한 더욱 철저한 관점의 정립이 화가-되기의 과정에서 내게 요구된다. 앞으로 더 끌고가기 위해서는 이 둘을 바라보는 문제틀에 대한 사유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자연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중심의 원리로 세계를 바라보는 인본주의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불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그리하여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한다. 생명으로서 자연은 도구적 합리성을 구현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기껏해야 위로(힐링)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나는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연속적인 신체로 상정하고 무위당 장일순(혁명가의 초상: 무위당 장일순)처럼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는 전일적 세계관을 선택한다.
인간과 자연의 미메시스적 관계 맺음,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우정과 유사하지 않은가? 자연은 나(나아가 인간)와 연속적인 신체성을 담지한 존재로서 함께 서로를 호흡하고 서로에게 입맞추는 사이가 되기를 희구한다. 일시적으로나마 순수한 사랑에서 내가 너와 분리할 수 없는 연인이 되듯,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자연과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 놓이기도 하지 않은가? 연인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가끔 나이면서 그럼에도 나 아닌 타자(연인)가 되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와 동일한 유비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가능한다. 숲의 정령들이 내게 쏟아져 들어오는 매혹에 사로잡힐 때 인간은 인간이면서 인간 아닌 자연이 되는 선물을 경험할 때가 있다. 자연과의 사이에 식별불가능한 지대로 끌려들어가는 매혹을 느끼는 순간이 그러하다. 어쩌면 이러한 순간이 인간과 인간 간의 사랑과 우애의 관계가 확장된 ‘인간과 비인간(자연) 간의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되기’를 구현하는 사건이 아닐까?
인간과 자연을 그저 이성과 연장이라는 하나의 실체(혹은 속성)로만 환원할 게 아니라, 되기의 사건으로 포착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무도 흐르고, 잡초도 흐르고, 피라미드도 흐르고, 자동차도, 거리도 흐르고, 나의 몸도 흐른다. 이러한 무수한 흐름들 속에서 구성되는 사건들의 ‘접촉과 매개(배치)’를 인간과 비인간의 사랑과 우정의 이름으로 구현해볼 수 없을까? 감히 이런 주장을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버리고 포스트휴먼적 사유를 경유해야 하는 지난함이 뒤따라야만 한다. 인간과 자연 그 사이에서 미메시스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사실은 ‘너머’의 어떤 지각불가능한 지대로 우리가 끌려들어가야 하는 모험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회화적 모험도 마찬가지로 …
사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연과의 호흡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죽는 순간 자연 속에 누이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삶과 죽음 모두 자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간-되기는 동물-되기와 식물-되기와 함께 이루어지는 마주침의 사건이자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함께 되기, 상호 감응, 상호 파악을 기반으로 한 결합체(리좀?)-되기인 셈이다. 이때 시간의 정원에서 시간의 종합을 이루는 응축된 순간이 열리고, 피안과 차안의 세계가 뒤섞이며 법열을 느끼는 최고의 기쁨을 경험하지 않을까? 유한자가 무한의 담지자가 되는 유토피아적 꿈(혹은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구현되는 이 순간이 동물-되기와 식물-되기와 함께 이루어지는 인간-되기가 아닐까? 이러한 유토피아적 꿈을 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화폭에 담아내야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꿈을 좌절시키는 조건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내 회화의 결과물은 이와 같은 여러 차원의 문제들에 대한 응답이 되어야 한다. 자연과 미메시스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아나키스트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미학적 책무인 셈이다.
이상의 다양한 질문들에 화가로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지점이 바로 이번에 출품한 ‘시간의 정원’, ‘자연-되기’, ‘영원의 시간_피안화’ 등의 작품들이다. ‘혁명가의 초상: 무위당 장일순’ 전에 출품했던 얼굴을 난초처럼 그린 몇몇 작품들에도 동일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이번 작품들은 존재의 충만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만나는 순간을 그림에 담은 첫번째 시도이다. 자연-되기와 인간-되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뒤얽힘 속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되기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되기’에 다름아니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 자연과 인간의 서로 되기를 좌절시키는 수많은 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눈먼자들의 폭력’이란 작품에서 이 문제를 알레고리로 다루긴 했지만, 다양한 방식의 회화적 형상화가 더욱 진행되어야 한다. 자연과 인간의 서로 되기는 자연과 문명이 어떻게 타협해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과도 닿아 있는 아포리아이다. 나는 이 순간 이 아포리아가 주는 긴장과 함께 둘 사이에서 부유하고 의심하며 살아가는 (무력하지만 여전히 꿈꾸는) 아나키스트이다.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들뢰즈가 존경했던 유일한 과정철학의 선구자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삶은 약탈이다”.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진정 동물-되기 및 식물-되기와 함께 동시에 인간-되기를 해내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 삶의 실존적 한계 때문에 자연과 인간 사이의 감응 공동체에 대한 나의 주장에 대해 머뭇거리며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을 남겨둔다. 들뢰즈의 ‘내재성의 평면’에 대한 주장으로 …
“이 지대들에서 존재는 일의적이며, 평등하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자들은, 각각이 첫 번째 원인 근방역에서 그 본래적인 역량을 효과화한다는 의미에 따라 평등하게 존재한다. 먼 원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돌들, 꽃들, 동물들, 그리고 인간들은 동등하게 일종의 왕관을 쓴 아나키(an-archie couronnée)(필자 강조) 안에서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4. 문명의 불만과 실재의 귀환
1) 문명의 불만: 에로스적 충동인 사랑과 우정에 대한 억압 장치
이제 두번째 맥락인 문명 속으로 들어간다. 동시대의 문명은 문명화된 도시를 일컫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이드는 ‘문명의 불만’에서 문명은 원초적 본능인 리비도(라캉에게는 에로스적 충동)의 억압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재(?)의 귀환을 얘기하려면, ‘에로스와 문명’의 문제에 대한 논쟁의 출발점을 제공하는 책 ‘문명의 불만’을 좀더 꼼꼼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드는 리비도를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체로 파악하는데, 그 한 축을 형성하는 에로스를 성애를 허용하는 에로스와 목적달성이 금지된 에로스 두 가지로 분류하고 그것들이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각각 사랑과 우애(우정)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성애에 바탕을 둔 에로스적 사랑의 경우에 쾌락원칙에 대한 현실원칙의 지배는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금지한 사회적 규범 및 관습, 그리고 자유로운 연인관계 형성을 방해하는 사회적 장벽(가족, 계층 등)에 의해 성립된다. 이런 식으로 형성된 개인적 초자아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 형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거나 억압하고 방해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달성이 금지된 우애마저도 문명화의 과정에서 개개의 인간을 통합한 공동체에서 억압된 채 작동하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개인이 행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공동체와 결합되지만 인간공동체 그 스스로 자기보존의 욕망을 위해 공동체의 초자아 – 예를 들어, 기업의 비전, 전략, 미션, 규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 를 개인들에게 내재화하여 동일성을 강요한다. 결과적으로 개인적 초자아와 공동체의 초자아는, 인류의 문명화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과된, 우리에게 해결을 요구하는 이중적 억압기제이자 우리 스스로 풀어야 할 난제이다.

2) 문명화된 도시에서 실재의 귀환은 가능한가?
프로이드에 의하면, 문명화의 과정은 “인간을 자연에서 보호해 주고 인간의 상호관계를 조정해 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는 규제와 성취의 총량”을 가리킨다.‘자연의 지배를 확립하는 과정’은 사실‘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제도들이 확립되는 과정’과 동시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우리는 아도르노의 논의에 주목한다. 그의 명저‘계몽의 변증법’을 문명화의 과정과 그 효과를 살펴보는 준거로 삼을 만하다.
‘본능을 억압하는 도구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성(도구적 이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문명화를 지향하는 계몽은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교환가능성 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혼란을 제거하고 거대한(아울러 촘촘한) 질서 체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모든 조직이 관료적 장치들로 변하고, 모든 관계가 시장논리에 포섭되고, 모든 욕망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홈파인 수로를 통해 흘러간다.
장용순 선생이 최근에 출간한 도시의 정신분석 3부작, ‘과잉도시’, ‘환상도시’, ‘사건도시’를 비판적으로 독해하고 그것이 나의 삶과 맺는 구체적인 연관성을 고민한 후에야 비로소, 현대 도시에 대한 논의를 더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거칠게만 스케치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문명화된 도시에서 자연과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모든 제도와 시설은 (잠재적 생명으로서?) 실재가 곧장 범람하는 것을 방어하고 지연시키는 장치이다. 한편으로는 홈파인 수로를 통해 충동과 실재를 방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분적으로 새어나오게 함으로써 혁명적 방식으로 분출하는 것을 지연시킨다. 최근에 기업이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 발현을 성과체계와 결합시켜 활용하는 것은 통제된 자유(controlled freedom)의 적절한 예이다. 도시의 광장이나 숲, 축제, 희생제의, 어쩌면 예술까지도 억압된 원초적 힘을 가끔씩 흘려보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것들이 실재에 대한 대리만족 기제로 작동함으로써 (전격적인)실재의 귀환을 어렵게 한다.

문명화된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세계는 탈마법화되고 탈신비화되었지만, 그 주인공인 인간 스스로는 자연적 몸과 내면의 자연(에로스적 충동, 심미적 상상력 등)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몰락하고 말았다. 우리의 몸은 공동체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조직의 규율화된 리듬을 내재화한 몸이 되고 말았다. 우리 내면의 자연은 문명화를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상징계의 장치들에 의해 사회화되어 원초적 리비도는 순치되고 말았다. 우리의 아나키즘적 리비도는 거대 도시라는 촘촘히 짜여진 제도와 공간(시설?) 속에서 때때로 제한된 일탈이 허용되지만 예측가능하고 계산가능한 방식으로 홈파인 수로를 통해 흘러간다.
일상적 삶에서는 그러할지라도, 누구나 실재의 흔적을 공백으로 간직하고 있고 그 흔적은 언제든 강력한 유령으로 출몰할 수 있다. 아나키즘적 리비도가 해일처럼 거대한 힘으로 출몰하여 홈파인 수로를 넘쳐나며 그 수로마저 파괴할 수 있다. ‘사랑의 전율 속에서 남녀가 입맞춤하거나 춤을 추는 순간’, ‘축제나 광장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고 춤추며 공동성을 만들어내는 순간’, ‘펑크와 록 음악을 부르며 남녀가 뒤섞여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기는 순간’, ‘세월호와 이태원의 아픔에 공감하며 펼쳐내는 촛불시위의 순간’ 등과 같은 것이 유령이 실재의 공백으로 출현하는 사건일 것이다. 그것이 진리-사건이 되어 우리의 잠재성의 영역을 열어젖히며 당사자의 삶을 송두리 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감각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하게 됨으로써 불복종과 저항의 아방가르드로.
우리는 무한한 생명력과 잠재력의 원천인 실재의 귀환을 꿈꿀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현대 도시에서 실재에 다가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거대 도시에서의 탈주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저 낭만주의자의 일탈로 남지 않으면서 … 아나키스트의 혁명적 탈주로 이어지려면 … ????? 거대 도시의 내부자인 내가, 누구 못지 않게 그 수혜자인 내가 그곳의 ‘악과 꽃’을 구분하고,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미학을 지금 이곳에서 포스트모던한 회화 문법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을까? 억압되어 있는 아나키즘적 리비도 - 혹은 에로스적 충동, 무의식적 욕망 등으로도 부를 수 있다 - 를 해방시켜 ‘계몽의 계몽’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 유토피아적 모습은 어떤 것일까? 자연스레 많은 질문들이 던져진다. 수행성으로서 화가-되기를 더 끌고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경우하고 사유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우리의 신체와 내적 자연의 무한한 잠재력의 해방이라는 유토피아적 꿈에 미학적 상상력을 입혀 몇몇 작품을 제작했다. ‘입맞춤은 사건이다’, ‘탈주의 꿈’, ‘악의 꽃’ 작품들이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출품한 3점의 작품에서 도시는 배경으로만 등장하나 ‘악의 꽃’ 작품은 도시가 화폭 전체를 지배한다. 감상자들에게 이성의 억압적 지배로부터 감각(감성, 감응)의 해방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기억 속에 억압된 형태로 내장된, 그럼에도 불러내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흔적인,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유토피악적 꿈을 상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보들레르처럼 ‘도시 산책자’가 되어 장소(공원, 광장, 홈리스거주지 등)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세세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이후 더 진행해야 할 숙제로 남겨둔다.
자연과 미메시스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에로스적 충동을 억압하지 않는 문명은 가능할까? …. 이 의문은 내게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미래를 향해 열어 둔 채 닫아야 한다. 사랑의 윤리학에 대한 작업노트를 마무리할 때와 똑같은 심정이 반복된다. 우리는 함께 다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되기’. 불모의 땅, 그러나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아나키즘의 예술, 예술의 아나키즘을 향한 나의 모험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I AM ANARCHISM.
생성론적 ‘춤’과 공동윤리의 재구성 ㅡ“신은 전선미에 관한 자신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애정 어린 인내심을 갖고 있는, 세계의 시인이다.”(화이트헤드) 임동확(시인)
자기 그림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해명할 수 있는 화가는 과연 불행한가? 행복한가?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와 ‘생성철학자’ 들뢰즈 이론으로 무장한 감상표의 화론과 그림 사이 역학 관계를 단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정밀한 자기만의 화론이 있다고 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는 작가는 없는 까닭이다. 특히 대부분 작가들의 경우 한자리에 매이거나 정체되지 않거나 계속해서 변모해 나가도록 화가를 추동하는 이율배반적인 매개체가 바로 화론이고 작품들인 까닭이기도 하다.

그런 김상표를 지탱하는 유일한 ‘주의(ism)’가 있다면, 일체의 권력 집단과 관료제 혁파를 통하여 제 국가의 해체를 겨냥하는 아나키즘이다. 하지만 근대국가의 허울뿐인 국민국가라는 공동체의 붕괴와 직결되어 있는 아나키즘 자체가 어떤 ‘주의’나 이념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그마저도 곧바로 부정당할 상황에 직면한다. 그의 말대로 아나키즘의 본질 자체가 ‘모든 주의와 주장에 대한 판단중지’를 의미하는 반권력적이고 반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일목요연하게 하나의 틀로 붙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틀 없는 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의 회화 세계가 그 증거다. 그는 고정되거나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락 없이 이른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 마치 김수영 시인처럼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는, 철저한 자기부정과 혁명적 쇄신을 영구혁명론자의 정신을 닮아있다. 특히 과연 그래서일까. 그의 회화는 과거나 현재의 시공간에 붙잡혀 있지 않다. 끊임없는 실험과 모험을 통해 미래로 열려 있거나 미래를 열어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한낱 기존의 ‘핑거 페인팅’이나 ‘지두화指頭畵’을 넘어 주로 손가락과 손바닥을 붓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지장화(指掌畵)’라고 해야 마땅할 그의 회화적 세계는 그런 점에서 ‘그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그림들은 기존의 회화적 재현을 답습하는 ‘그린다’고 하기보다 눈과 비 또는 천둥이나 번개가 세차게 일어나거나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자동사인 ‘친다’가 더 어울린다. 아니, ‘친다’의 ‘비슷한 말’인 타동사 ‘치다’가 보여주는 다양한 의미처럼 그의 회회 세계는 때로 두드리고, 타격하고, 휘젓고, 보고, 베어내고, 긋고, 셈하고, 뿌리고, 넣고, 펴고, 쌓고, 기르고, 번식하고, 엮는다.
최면 같고 마법 같은 다이나마이트의 조각이 내장된 듯 기운생동한 그의 회화들이 그 결실이다. 검도 수련 20년, 태극권 15년의 수련과 내공에서 저절로 배어나올 법한 긴장과 이완의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톱 등 신체의 일부 또는 온몸을 사용하는 그의 그림 세계는 ‘친다’와 ‘치다’라는 자동사와 타동사를 종합하고 넘어서는 ‘춤’에 가깝다. 아니, 그의 춤은 명사적 ‘춤’이 아니라 ‘춤춘다’는 동사적 사건이 더 정확하다. 마치 아원자의 세계에서 본 우주처럼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춤이다. 그의 다양한 형상들은 그런 춤의 유동 속에서 어쩌면 환상(maya)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그림 세계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 리듬이다. 자신마저 예측하거나 통제 불가능한 그의 그림 세계는 마치 만물의 변화와 생성처럼 ‘춤’의 리듬을 타고 이뤄진다. 그러면서 이렇듯 ‘춤추는’ 그의 리듬은 맥박이 뛰거나 어떤 알 수 없는 자연적인 원인으로 지면(地面)이 맥박치듯 진동하는 주기적 운동으로서 맥동(脈動)의 형태를 띤다. 동시에 마치 전자 내부에 에너지를 가하는 반복운동처럼 진동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보통의 상태에서 흥분의 상태로 감정 고조와 공명현상으로 이어진다. 곧 내달리듯 빠르고 세차게 흐르는 물 또는 물줄기 같은 어떤 신명의 분류(奔流) 또는 광활한 여백의 울림이 확인시켜 주는 게 그의 회화 세계다.
그의 그림들이 구체적인 사물보다 하나의 전체 흐름(holoflux)의 형태를 취하거나 행여 식별가능한 개별사물들이 소용돌이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거의 흐릿하거나 뭉개져 있는, 물론 그렇다고 그 자취마저 알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닌 그의 그림들 속에서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건들이 서로 생성자가 되고 파동자가 되어 무형유적(無形有跡)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거나 이어질 듯 끊어지는 형상과 흔적, 창조와 피조가 동시체를 이루면서 모든 것들은 연쇄 파동자로서 서로가 서로의 창조자이자 피조물이 되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김상표의 생성론적 작업은 이처럼 그 어떤 한계 경험을 통한 초월적 돌파를 기조로 새로운 지각과 개념, 새로운 몸과 관계, 사회적 장치와 기술적 장치를 만들면서 스스로 그것들을 경험하는 일에 속한다. 동시에 실험과 경험이라는 재귀적 수행의 과정을 통해 상호작용과 형질전환의 새로운 운동을 구성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본질의 구현이 아니라 잠재성의 현재화와 더불어 또 다른 사회적 경험형식을 구성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건의 연쇄파동으로서 세계의 생성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 마주침과 헤어짐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성의 공동체는 무수한 사건을 낳고 낳게 할 뿐 그 사건들의 선악과 시비에 무관하다.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이자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 또는 구원의 문제는 결국 윤리적 문제지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영역이 아니다. 특히 그것들은 통일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않은 사건의 연쇄 파동과는 다르다.
김상표의 작가적 고민은 이 지점에 놓여 있다. 현대 철학의 중심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본질상 우연이기에 우연의 예측 불가능한 작용 없이 독특한 상황을 예견할 수도, 연역될 수도 없다. 오직 사건의 실존에 대한 최종심의 명명과 진리에의 충실성을 통해서만 사무적으로 살아남는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폭력과 전쟁의 위협에 죽어가거나 상처받고 있는 무수한 무구한 생명들에 대한 윤리적 과제에 무기력한 게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문명과 비문명, 장애인과 비장애인,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놓인 이러한 공동 윤리의 모색과 창출은 필연적으로 역설적 상황에 직면한다. 일체의 특권적이고 공식적인 것들을 거부하거나 단절을 꾀하는 아나키즘과 공동 영역으로서 윤리 세계의 추구 사이엔 넘어설 수 없는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아나키스트로서 작가의 목표가 결코 보편적인 관념에 포착되지 않는 절대 타자를 옹호하는 데 있는 것이라면, 행여 섣부른 윤리화는 본의 아니게 전체주의적인 폭력으로 귀결되거나 의심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김상표는 그러한 작가적 난제나 작품적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하고 있는가. 흔히 주로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드러내는 게 주목적인 수많은 ‘자화상’ 또는 그의 ‘얼굴성’ 탐구가 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다. 즉 그는 필시 경영학계의 뛰어난 학자에서 전문 화가로의 전격적인 전향에서 오는 불안과 고뇌의 시기를 거쳐 이제 어느 정도 성공적이고 힘찬 일련의 ‘얼굴’ 그림들을 통해, 단지 자신의 외모와 심리적 구성, 그리고 회화적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그에게 자화상이나 타인의 얼굴들은 단지 예술적 자기표현의 주요 수단이 아니다.
온통 ‘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김상표 자신의 의지나 의도와 달리, 그것들은 ‘나’의 어떤 관념이나 이성에도 종속되지 않는 공동의 존재 양태 또는 공동의 존재 방식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얼핏 오직 내면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자신도 모르게 실상 외부의 공간으로 열리는 탈존(ex-sistance) 사태를 보여준다. 또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외부의 타인으로 열리는 사건으로서 외존(ex-position)의 사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 고백의 성격을 띤다.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강제하는 외부적 요소는, 다름 아닌 바로 매 순간 예고 없이 침입하여 자신의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사유방식을 뒤흔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강제하는 이러한 자신의 타자로서 바로 ‘자화상’이고 ‘얼굴성’탐구였던 셈이다.

김상표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 역시 그렇다. 근본적으로 에로티시즘이 자신의 몸을 통해 타자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거기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실상 그 자신의 근거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나아가, 좁은 의미의 남녀관계를 넘어 예술작품을 통한 정념의 표현과 소통을 의미하는 에로티시즘은, 실상 자신이 뭔가를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무엇인가에 내맡겨진 자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자신의 존재가 일정한 문화체계에서 관념적으로 규정된 관념의 존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연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본의 아니게 폭로하고 있는 에로시티즘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작업에서 그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주체성이라고 할까. 무한하게 지속하고 생성하는 자연의 생기 과정 그 자체에 대한 본질 인식을 바탕으로 도시와 문명을 배제하기보다 그것들과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찾고자 하는 그의 노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그것들은 물리적 자연이 품고 있는 거대한 역동(逆動)과 유동하는 세계의 생기적 사건을 자신의 예술적이고 정신적인 동력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안과 밖, 주체와 타자의 구분이 분명한 자기 동일적인 몸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연적인 생명들이 스스로 주장하도록 내버려 두려는 행위에 속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김상표에게 세계는 이성적 사유로 짜여진 개념들의 구조가 아니다. 조화의 기운을 일으키는 힘으로서, 마음과 그 마음의 집으로서 몸이다. 한편으로 휴머니즘의 본래적 회복을 통한 형이상학적 세계의 극복은 그것의 근거인 피지스(physis)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까닭에 김상표는 이성의 대립 개념인 감성 혹은 동물성에 이성을 해소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 들지 않는다. 감성 역시 인간적이며 특히 이성이 그 속에 해소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성을 본질로 하는 니체적인 초인성 또한 또 다른 의미의 플라톤적 사유의 변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존재를 가치화하는 사유야말로 <존재>에게서 그 본연의 존엄성을 약탈하거나 살해하는 최대의 타격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그는 정작 자신이 앞으로 어떤 그림을 펼쳐나갈지 ‘잘 모른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가적 태도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각보다 풍요롭고 복잡하며 역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동시에 모호하고 부분적이고 추상적이며 무엇보다도 명약관화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도 참된 새로움은 ‘모호함’과 ‘혼돈’ 속에서 도래하며, 그때 예술가는 참된 새로움의 실존을 인정하고 공표할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기반한다.
주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 철학을 내면화하고 있는 김상표의 미학적 거점이자 작가적 생명력의 분출지는 바로 여기다. 그에게 작품의 과정이 곧 작품의 실재화다. 특히 그 가운데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물음이 하나의 과정을 대신하고 있다. 그의 회화 세계는 ‘물음이 실재고, 실재가 바로 물음’인 하나의 과정이자 상황이다. 그의 창조력은 인간의 목적론에 조율되지 않는 배음(背音, 背陰)으로서 이러한 과정과 물음에서 온다. 그리고 서로 어긋나거나 방해되지 않는 세계, 그러나 이상과 의미의 과다한 포만 상태에서 이탈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김상표의 작품들은 완성의 단계에서조차도 변화를 끝내지 못한다. 반복적으로 다시 시작의 원점으로 복귀하는 듯한 형상과 동작을 취한다. 때와 자리의 변동과 함께 끊임없이 자기 갱신(self-renewing)을 이루어 가는 과정적 존재를 지향한다. 상대적 완전은 없는 절대적 완성의 예술세계 속에서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자기 성찰만을 통한 ‘상대적 완전’을 추구해 가려는 노력이다. 생성의 맥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生生不息] 가운데 비평형의 역동적 균형, 곧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다. 그의 움직일 수 없는 작가적 개성은 무질서한 상태에서 에너지를 교환하는 개방계가 자기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질서로 변환되는 이러한 비가역적 산일 구조(Dissipative Structure)에서 나온다.
작가 김상표는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겪은 어떤 상처로 한때 혐오하기까지 했던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지극히 우발적이었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래서 자꾸 반복적으로 되물어 볼 수밖에 없는 ‘운명’의 결과다. 언젠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맞이한 자신만의 ‘운명’이다. 동시에 자유로운 존재로서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매순간 자유로운 선택과 결단의 결과로서 ‘운명’이다. 그리고 이때 ‘운명’은 단지 미구에 들이닥칠 어떤 사건을 넘어선 이상한 힘이 아니다. 정작 한 실존적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자유의 기반이며, 작품 창작과의 완성과 개인적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결단력 또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를 뜻한다.

솔직히 우리들에게 평온한 감상을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되레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김상표의 그림 세계에 거는 기대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는 비판과 부정의 대상에 자신을 기꺼이 포함시키면서 그 비판과 부정을 오히려 타자에 대한 사랑과 구원, 자유와 운명을 하나로 통합시켜 간다. 나는 그 속에서 그가 자기 작품이 지닌 한계와 맹점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성찰이 먼저인 믿음직한 철학자 김상표와 예술가 김상표를 동시에 만난다. 행여 불안과 실패 같은 타자의 부정적인 면까지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거듭 갱신되는 김상표의 전복적 상상력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있는 중이라고 할 것이다.
김 상 표ㆍ1964년 7월 12일 전라남도 영암 출생ㆍ경상국립대학교 경영학과 명예교수ㆍ전공: 조직이론ㆍ작업실: 서울시 양천구 신월로 291 삼화빌딩 3층 304호ㆍ핸드폰: 010-9559-8590ㆍE-mail : balongtree@gmail.com, tao@gnu.ac.kr
| 학력 | 1987 경영학 학사 연세대학교 1989 경영학 석사 연세대학교 1998 경영학 박사 연세대학교
| 경력 | 2000~2001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 2001~2020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2007~2008 University of Maryland Visiting Scholar 2011 사회적 기업 ㈜수다지안 창업 2012~2014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창업대학원 대학원장 2012~2016 한국창업학회와 한국인적자원관리학회 부회장 2015~2017 기획재정부 협동조합심의위원회 위원 2015~2018 한국인사조직학회와 한국인사관리학회 상임이사
| 저서 | 2019 『경영은 관념의 모험이다』, 생각나눔 2020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경영철학』, 솔과학(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얼굴성: 회화의 진리를 묻다』, 솔과학 2021 『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솔과학
| 개인전 | 2018 《Amor Fati》, 윤갤러리, 서울 《존재론적 물음으로서 얼굴성 Ⅰ》, 윤갤러리, 서울 《존재론적 물음으로서 얼굴성 Ⅱ》, 윤갤러리, 서울 《NIRVANA》, 윤갤러리, 서울 2020 《NARCISSUS CANTATA》, 갤러리이즈, 서울 《나의 실존은 오직 미적 현상으로만 정당화된다》, 갤러리 파레시아 & 삼화빌딩, 서울 《나는 아나키즘이다: 회화의 해방, 몸의 자유》, 삼례문화예술촌, 완주 2021 《혁명가의 초상: 무위당 장일순》, 치악예술관, 원주 2022 《Destruction=Creation》, 자하미술관, 서울 《사랑의 윤리학: 몸, 에로스, 그리고 타자》, 한벽원미술관, 서울 2026 《I AM ANARCHISM》, 자하미술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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