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데우스 로팍 서울] 케이 이마즈, 김주리, 임노식, 마리아 타니구치

<거리의 윤리(Distancing)>기획: 김해나(타데우스 로팍 서울 전시 팀장)
2026년 2월 24일—5월 2일 타데우스 로팍 서울 (서울시 용산구 독서당로 122-1, 2층)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026년 첫 전시로 한국, 일본, 필리핀 출신의 작가 4인의 신작을 선보이는 단체전 《거리의 윤리》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이미지와 물질 그리고 인식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경험되는지를 탐구하는 케이 이마즈(Kei Imazu), 김주리, 임노식, 마리아 타니구치(Maria Taniguchi)의 신작 회화 19 점과 조각 1 점을 소개한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021년 개관 이후 《지금 우리의 신화》(2023),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2024)와 같은 기획 단체전을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과 국제적 담론이 만나는 장을 지속적으로 탐색해왔으며, 본 전시는 그 흐름을 아시아 전반으로 확장하는 시도이다.
《거리의 윤리》는 서로 다른 밀도를 지닌 네 작가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따라가도록 구성된다. 한 걸음 떨어져 감각하고 두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기를 제안하는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작품을 ‘읽기’보다 ‘통과’하며 이동하게 된다. 물질에서 신체로, 지각에서 시간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이동 속에서 감각은 서서히 조율되고, 작품은 빠른 해석보다 지속되는 관찰의 과정 속에서 다른 상태로 드러난다. 전시는 이 지연의 과정이 반복, 변화, 층위, 병치라는 서로 다른 형식 안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간다.
전시의 시작에서 마주하는 마리아 타니구치의 작업은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거리감’과 ‘머무름’을 가장 절제된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작가는 2008년부터 벽돌 회화를 전개하며 반복과 노동의 축적을 통해 시간의 흐름이 화면에 남는 방식을 탐구해 왔다. 반복되는 벽돌 형상으로 구성된 〈무제 (Untitled)〉(2026)는 특정한 이미지나 서사를 앞세우기보다 명료하게 그려진 끊임없는 격자무늬 안에서 축적되는 행위의 밀도와 그로 인해 생기는 미세한 편차를 드러낸다. 그에게 회화는 시간, 노동 그리고 신체의 개입이 중첩된 물리적 상태로 존재하며, 표면에 남는 불규칙과 요철은 반복이 누적시키는 시간성과 작업의 과정을 환기한다. 이 지점에서 반복은 명상이나 성찰의 은유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결과를 예측하지 않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관객은 화면 앞에서 끊임없이 거리를 조정하며 초점을 맞추고, 거대한 의미 해독보다는 머무름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타니구치의 작업이 관객의 몸과 시선을 조율하는 기준점으로 작동한다면, 이어지는 김주리의 작업은 물질과 신체 그리고 공간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호출한다. 작가는 젖음에서 응고로, 생성에서 퇴적으로 흘러가는 흙(earth)의 변화를 주축에 두고, 주변 환경과 감응하며 유지되는 조각 〈모습 某濕_202602 (Wet Matter_202602)〉(2026)과 균열과 퇴적의 흔적을 평면에 응축한 회화 연작 〈desert〉를 선보인다. 작가에게 흙은 고정된 조형재료라기보다 시간과 조건 속에서 상태를 달리하는 물질이며, 그는 두 작업을 병치해 보임으로써 순환의 장면을 그려낸다. 〈모습 某濕_202602〉이 수분을 머금은 흙의 현재를 공간에 펼쳐 놓는다면, 〈desert〉는 인간의 흔적이 다시 물질로 돌아가며 형태를 바꾸는 순환의 장면으로 살핀다. 폐벽돌과 부서진 흙, 암석 등을 채집해 분해하고, 가루로 만들고, 켜켜이 쌓아 올리는 일련의 제작 과정은 생성 이후 잔해와 퇴적의 단계를 작업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방식이자 물질이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시간을 화면에 고정하는 절차로 작동한다.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사건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삼는 임노식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기류와 변화를 관계의 상태로 포착한다. 그는 대상을 그린 뒤 오일 파스텔로 투명한 층을 덧입히며, 지우기보다는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화면을 구축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다뤄온 거리의 감각을 또 다른 국면으로 이동시킨다. 이전의 회화가 비교적 원경에 머물렀다면, 〈여주 - 풍경 49 (Yeoju - Landscape 49)〉(2026)에서는 한 발짝 다가선 위치가 감지된다. 화면 속 형상들은 서로 침투하고 밀어내며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경계는 흐려지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채 작동하는 상태로 남는다. 대상이 서로 겹치고 스며들수록 화면에는 다가가거나 물러서는 시점의 문제를 넘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거리와 관계의 밀도가 형성된다. 부드러운 색면과 번짐 속에 잠복한 날카로운 긴장 앞에 관객은 한 번에 장면을 읽기보다는 끝없이 시점을 옮기며 화면 안팎을 더듬게 된다.

케이 이마즈는 신화와 민담의 도상, 역사적 이미지에서 건져 올린 파편들을 한 화면 위에 겹쳐 배치하며 서로 다른 시간과 서사가 공존하는 회화적 장을 구축한다. 전쟁의 잔해, 신화적 조각, 일상의 몸짓, 제도적 구조가 맞물리는 그의 회화는 역사를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침전된 시간의 상태로 드러낸다. 각각 다른 시간과 서사에서 건너온 형상들은 한 장면 안에서 충돌하기보다 서로를 지우지 않게 하는 완충의 거리 속에 놓인다. 반투명한 면 캔버스의 〈화로와 난파 (Hearth and Wreck)〉(2026)에서 이미지는 표면 아래로 가라앉고, 〈밟는 이, 그녀 (She Who Treads)〉 (2026)에서는 전면으로 떠오른다. 투명함과 불투명함, 침식과 고정, 방치와 관리의 결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의 회화는 무엇이 표면에 남고 또 무엇이 흐려지며 잊혀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고요하면서도 소란한 차이가 현재의 감각을 어떻게 흔드는지를 주목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 ‘지금’과 접속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작업 앞에서 관객은 익숙한 ‘선후’의 질서를 잠시 보류한 채, 봉합되지 않은 시간의 층위를 일정한 거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된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듯, 지각은 대상을 마주한 뒤에야 덧붙여지는 결론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삶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과정이다. 즉, 우리는 바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그 안에 서서 ‘겪는’ 존재라는 것이다. 《거리의 윤리》는 그렇게 가까워진 세계로부터 잠시 물러서서, 감각이 다시 제 속도를 찾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참여 작가 소개
케이 이마즈(Kei Imazu, 1980년생, 일본 출생, 인도네시아 거주)는 회화, 설치,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디지털 시대의 시각적 과잉 속에서 이미지, 역사, 신화가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탐구한다. 작가는 서로 다른 출처에서 비롯된 이미지의 단편을 수집해 병치하고 중첩함으로써, 하나의 장면이 단일한 의미로 닫히기보다 복수의 시간과 서사를 동시에 품도록 화면을 조직한다. 그 결과 그의 작업에서 역사는 사건의 직선적 서술이 아니라, 여러 층위로 침전된 기억이 현재의 감각과 맞닿는 상태로 제시된다. 신화나 민담의 도상 또한 순수한 이상이 아닌 동시대의 조건 속에서 새롭게 읽히고 충돌하는 이미지로 작동한다. 작가는 최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위치한 MACAN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The Sea is Barely Wrinkled》(2025)를 선보였으며, 이외에도 태국 방콕 아트 비엔날레(2024), 독일 카셀에서 개최된 《도큐멘타 15》(2022), 일본 모리미술관(2019), 요코하마 미술관(2019) 등 유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김주리(1980년생, 한국 출생 및 거주) 는 흙(earth)을 주축으로 벽돌이나 파편, 암석 등 다양한 물질을 다루며, 물질이 겪는 ‘젖음–응고–균열–퇴적’의 변화를 시간 기반 설치, 조각, 평면 작업으로 전개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물질은 완결된 형태로 고정되기보다, 주변 환경과 조건에 반응하며 상태를 달리하는 과정적 물질로 제시된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남기는 표면의 흔적과 구조의 변형을 통해 시간이 물질에 새겨지는 방식을 드러내고, 생성과 소멸을 대립항이 아닌 연속된 흐름으로 다룬다. 또한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소 경험과 지리적 조건이 작업의 언어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방식을 살핀다. 작가는 서울 캔파운데이션(2025), TINC(2022), 송은 아트스페이스(2020)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2026),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2023), 이탈리아 로마 국립현대미술관(2022),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2022) 등 국내외 주요 기관 전시에 참여했다.
임노식(1989년생, 한국 출생 및 거주)은 주변에서 포착한 사건과 감각을 출발점으로, 가시와 비가시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관계의 상태를 회화로 구축한다. 캔버스 위에 대상을 그린 뒤 오일 파스텔의 층위를 덧입히는 작가는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방식으로 화면의 밀도와 거리감을 조정한다. 이때 이미지의 선명함은 단일한 초점으로 수렴하기보다 겹침과 침투 속에서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며 화면 내부의 긴장을 형성한다. 작가는 캔버스를 외부 현실과 내적 인식이 교차하는 장으로 설정하고, 그 교차가 남기는 잔여와 편차를 회화의 구조로 다룬다. 작가는 윌링앤딜링(2025), 금호미술관(2023),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23)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최근 광주 문화예술상 허백련미술상을 수상한 그는 2023년 《제23회 송은미술대상전》 최종 20인에 선정되었으며, 이외에도SeMA 신진미술인(2024), 금호영아티스트(2022), OCI 영 크리에이티브스(2015)로 선정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마리아 타니구치(Maria Taniguchi, 1981년생, 필리핀 출생 및 거주)는 반복과 노동의 축적을 통해 화면에 시간의 단위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회화를 주축으로 조각,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는 기하학적 구조를 고정된 도식이 아닌 미세한 편차가 스며드는 ‘작동하는 프레임’으로 다룬다. 더해서, 그는 화면의 구조와 구성 자체를 핵심 언어로 삼아, 화자로써의 이미지와 더불어 어떻게 조직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 반복과 노동의 축적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방법론으로, 형태가 단번에 완성되기보다 누적되는 행위와 시간의 흔적을 통해 형성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2015년 휴고 보스 아시아 아트 어워드를 수상한 그는 최근 필리핀 마닐라 소재의 MCAD 미술관에서 개인전 《maria taniguchi: body of work》(2024)를 선보였으며, 이외에도 싱가포르 미술관(2024),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2024),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KADIST(2024), 대만의 타이페이시립미술관(2021), 제12회 광주비엔날레(2018)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최된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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