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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90 아시아미술] "예기치 않는 공명 일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 

-2019년 1월 31일(목)부터 5월 6일(월)까지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3개국 100명의 작가 179여점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 담당자: 배명지 학예연구사 

일본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 아시아(1960-1990)지역은 식민-독재-탄압-극심한 빈부차-저임금 고성장-민중항쟁 등등 전반적으로 공동적 경험을 하다. 여기에서 "예상치 못한 공명"이 일어나다.

[MMCA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 개최 2019년 1월 31일(목)부터 5월 6일(월)까지 담당자: 배명지 학예연구사.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3개국 100명의 작가 179여점이 소개된다. 아시아 현대미술(60-90년대)을 사회 관계 속에서 조망하는 국제기획전 * 아시아가 역사의 미몽을 벗어나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뜨다. 


자신들 정체성을 찾아가다. 가장 돋보이는 작가는 역시 김구림이다. 모든 분야에서 선구적이다 올 5월에 영국에서 초대받다 전위영화가 주제. 해프닝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이벤트 전위예술 실험예술 등에서 [해프닝과 이벤트의 차이는 뭔가? 전자는 비예측(우연성작동) 후자는 의도적 기획으로 이뤄진다 -김구림작가설명]


인사말 하는 박위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직무대리 


[1] 김구림, 하르소노, 레나토, 아블란, F.X 등 13개국 100명 작가 170여 점 작품 소개한다 [2] 국립현대미술관,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일본국제교류기금 아시아센터 공동 주최이다 [3] 1월 31일(목)부터 5월 6일(월)까지 MMCA 과천 [4] 과천 전시 이후,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순회 예정이다.


"빛은 동방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서구의 한 통계학회의 자료에 의하면 15세기까지 아시아가 돈을 75% 가지고 있었다고. 그러나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유럽이 전 세계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히라타 미노루 일본 작가 1964


이탈리아의 문화민주화(르네상스), 독일의 종교민주화(종교개혁), 네덜란드의 과학 혁명(과학의 민주화 )영국의 산업혁명(경제민주화) , 프랑스의 계몽기를 거친 후 정치민주화(프랑스대혁명) 등과 근대화 등을 통해 20세기 초반까지는 유럽이 통해 2 세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 미술 각성과 계몽을 넘어 새로운 세계에 눈뜨다


이 시기 유럽 강대국 사이 전쟁이 났고 마침내 2차 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등장 많은 유태인 중심으로 전반적으로 많은 지식인과 철학자와 과학자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되었고 2차 대전에 개입해 승리함으로써 20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 주도권을 잡게 된다.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중국 등의 부상으로 아시아가 전 세계에서 돈이 가장 많은 지역이 되었다. 이제 아시아는 다시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세상에 눈뜨다 전은 시기 적절한 것 같다. 홍콩 바젤 등 아시아 미술시장도 활성화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작가 F.X. 하르소노(1949~) I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1977-2018/ 크래커, 나무 탁자, 의자, 책, 펜, 지시문, 가변 크기. 


작가가 전시장에 놓은 크래커로 만들어진 핑크색 총의 더미는 부지불식간에 일상에 잠입한 폭력성을 은유한다. [미술관 해설] 1965년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통치가 시작된 후 1966년을 기점으로 신질서(New Order)가 표방되었고, 사회, 정치적으로 관여하는 예술과 미디어는 검열의 대상이었다. 이에 젊은 예술가들은 1975년 신미술운동를 시작하였으며 주요 멤버였던 하르소노도 이전 세대들과는 달리 사회적 이슈에 대한 넓은 개념을 보여주었다. 신미술운동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설치, 레디 메이드, 해프닝, 오브제 등 이전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다양한 예술실험을 추구하다.


〈만약 이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는 F.X. 하르소노가 1977년 신미술운동 전시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권총 모양의 크래커 더미와 함께 “만약 이 권총 크래커가 진짜 총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라는 문구를 전시장에 배치한 작업이다. 이러한 문장을 통해 그는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자발적으로 그들의 반응을 적도록 유도했다. 이 당시 작가는 일상에서 가져온 시각적인 요소들로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추구하며 사회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다퉁 다장(Datong Dazhang) 1997년 전반기 작업 '심야의 심호흡' 등등


레나토 아블란 (필리핀 작가 1953-) I '민족의 드라마'/캔버스에 유채 /213.4×152.4cm. 1982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소장. 그리고 오른쪽 신학철 1989년 한국근대사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민중화가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 해설] 1972년 9월부터 1981년 1월까지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시행함으로써 독재 정권을 선언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내걸었다. 레나토 아블란은 1976년 설립된 필리핀의 젊은 미술 운동가 단체 카이사한의 창립멤버였으며, 그는 민중의 삶 속에서 예술이 함께한다는 믿음으로 루손(Luzon) 지역 원주민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


평소 노동자 중심의 연극 단체 결성이나 연극에 관심 갖고 있던 레나토 아블란의 〈민족의 드라마〉는 무대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극적 효과가 있다. 상단에는 마르코스 독재 시기 억압으로 고통 받거나 죽은 민중의 모습이, 중간에는 노동자들의 고난이 묘사되어 있고, 하단에는 민중운동을 하고 있는 군중의 모습이 등장한다. 하단 왼편에는 폭력의 희생자들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항의하는 사람으로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레나토 아블란은 소외계층, 경제적 불균형, 정치 사회적인 주제를 주로 그려왔다.


S. 프리얀토 인도네시아 작가(1955–2000) I '프랑스산 모자' 1976. 벽에 선 드로잉. 가변 크기.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소장 


<미술에 대한 기존 정의 자체를 의심하다> 구조를 의심하다 중 미술의 해석에 대한 경계를 확장하다. [미술관해] 1960년대 이후 다른 아시아 국가와 유사하게 인도네시아 역시 거국적인 반식민주의 운동, 학생운동, 군사정권과 같은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역사 현장에서 S. 프리얀토는 인도네시아의 신미술운동에 참여했다. 〈프랑스산 모자〉는 프로젝터로 비춘 영상 이미지를 따라 벽에 그린 드로잉이다. 전시 기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이 작품은 물리적인 존재성을 담보로 하는 미술의 정의 자체를 의문시한다. 동시에 예술가의 정체성을 풍자하는 의미를 지닌다.


탕다우 (싱가포르작가 1941-) I '도랑과 커튼' 천에 잉크, 무기 안료 .303×144 cm, 277×134 cm, 236×122 cm, 217×110 cm, 170×105 cm, 138×94 cm, 135×89 cm 1979년 작품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소장. 탕다우의 동의로 재수록 이미지


<자연의 시간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 작업과정은 이렇다. 천 조각이 땅에 닿는 부분을 잉크로 표시한 다음 7개의 천 조각을 열흘 동안 도랑 속에 묻어두었다> 
[미술관 해설] 작가는 싱가포르 아티스트 빌리지의 설립자이다. 1979년 제작된 <도랑과 커튼>은 작가 자신이 살던 동네가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되자 그 땅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된 작품이다. 


그는 땅을 갈라지게 만든 자연 요소를 관찰한 후 가장 넓은 도랑 안에 흰 천 조각 일곱 개를 매달았다. 천 조각이 땅에 닿는 부분을 잉크로 표시한 다음 일곱 개의 천 조각을 열흘 동안 도랑 속에 묻어두었다. 천 조각에 흙이나 빗물이 스며든 자국이 남게 하는 등, 탕다우는 날씨와 지형에 의해 완성되는 작품을 제시하였다. 작가는 이 작업에 관해 “나는 재료를 완전히 지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재료와 내가 관계를 맺는 데 관심이 있다”라고 말했다.


탕다우 (싱가포르작가 1941-) I ''그들은 코뿔소를 포획하고 , 그 뿔을 채취하여, 이 음료를 만들었다' 1989 코뿔소 모양의 리넨 , 플라스틱 음료수병 , 도끼, 가변 크기,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소장, 싱가포르국립미술관의 퍼포먼스 기록 , 1989. 퍼포먼스 © 탕다우 탕다우의 동의 하에 재수록된 기록 이미지


싱가포르 아티스트 빌리지의 설립자인 탕다우(1943)1989, 퍼포먼스 <그들을 코뿔소를 포획하고, 그 뿔을 채취하여, 이 음료를 만들었다>를 실행한다. 설치와 퍼포먼스를 혼용하고 중국문화적 전통에서 나온 제의적 요소와 사회적 내러티브를 결합하면서 당대 소비문화가 야기한 환경문제를 환기시킨다

작품의 내용은 중국문화에서 코뿔소의 뿔이 가지는 주술적 믿음(열을 막는 치료적 가치가 있다는)과 이것이 야기한 무분별한 밀렵 및 동물 멸종에 기반한다. 뿔이 사라진 채 누워있는 거대한 코뿔소 형태의 조각을 따라 그 뿔들의 성분으로 만들어진 듯한 음료수의 병들이 나선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탕다우는 사라진 뿔 옆에 제단을 만들고 동물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을 표현한 제의적 제스처를 보여준다. 이후 그는 훼손된 뿔을 사용하면서 도살 당한 코뿔소들을 암시하는 병들의 나선형 패턴을 도끼로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이우환 I '관계항' 시리즈 철과 솜. 1969-1988. 차가운 철을 따뜻한 솜으로 녹이는 것 같다.


이번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우환의 작품은 근대성의 허구와 싸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존의 물성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바탕으로 사물의 다중개념을 구성하고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오노 요코 I '컷 피스' 1964-1965 16mm 필름 흑백 사운드 8분 27초 


<매체로서의 신체(body as a media)> 플럭스서 회원은 요코는 기존의 질서와 경계에 저항하기 위해서 찢어버리는 포퍼먼스를 많이 한 셈이다. 전복과 저항의 정신이 그 내면에 깔려있다. 여성의 신체와 남성의 시선에 대한 페미니스트 담론의 역시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주제인 세상에 눈뜨다와 통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과 편견을 찢어야 하고 깨져야 하고 부셔야 하고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2015년 모마에서 본 오노 요코 회고전은 내가 본 가장 유명한 작가의 전시였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전시하기 힘든 내용이 많았다 당연히 18금이죠. 지금 미국에서 요코는 백남준 급으로 평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명비평가적 철학자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기존의 룰과 틀을 여지없게 파괴시켰기 때문이다 몸의 무화를 시도하다.



[장자오탕 작가(타이완)] I '판챠오' 1962 /젤라틴 실버 프린트 /36×36 cm /작가 소장 


[미술관 해설] 타이완 사진작가인 장자오탕(1943–)은 1960년대 초 초현실주의 기법의 신체 사진으로 존재론적 소외와 상실을 묘사했다. 장자오탕의 초기 사진들은 젊은 세대가 공통으로 느끼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사회적 소외를 다루었다. 하지만 1960년대 타이완의 사회 상황으로 보면, 그의 작품들은 장제스 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언론 통제가 심한 당시의 암울한 정치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오탕을 대표하는 ‘머리 없는’ 사진은 1962년 그의 집 옥상에서 시작되었다. 해가 질 무렵 그는 벽에 생긴 자신의 머리 없는 그림자를 셀프타이머로 사진을 찍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자신의 뒷모습을 촬영하였는데, 역시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 장자오탕에 따르면, 이러한 ‘머리 없는’ 사진은 공허, 혼란, 분노를 몸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후에도 장자오탕은 고향인 판차오의 마을과 논밭을 배경으로 머리가 없는 신체, 비닐로 씌운 얼굴, 흐릿한 얼굴, 양 손으로 압박된 얼굴 등을 흑백사진으로 촬영하였다



박불똥 I '코화카염콜병라' 1988/2018 피그먼트 프린트 소비자본주의를 비판하다 


소비자본주의 섹션의 설명글


[미술관] 

1960년대 이후 진보를 향하여 내달린 근대화과정에 따라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자본을 모든 가치 우위에 두는 소비 자본주의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였다. 예술가들은 새롭게 등장한 도시 문화의 역동성과 스펙터클한 시각문화에 매혹되는 한편, 소비 자본주의의 역기능-환경 문제, 인간 소외, 여성 상품화, 전통파괴 등-을 비판적 시각으로 표현하며 사회의식을 담아냈다. 

특히 냉전 이데올로기가 흥망성쇠 하는 격동의 시기에 아시아예술가들은 서구를 중심으로 순회하던 소비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오랜 전통을 훼손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등과 맞물려 급속한 근대화를 추동한 당시 지배권력에 대한 ‘대항 담론’을 만들어냈고, 이는 예술을 사회관계 속에서 폭넓게 통찰하려는 자각을 이끌었다.


탕다우 (싱가포르작가] I '그들은 코뿔소를 포획하고 , 그 뿔을 채취하여, 이 음료를 만들었다' /1989 /코뿔소 모양의 리넨 , 플라스틱 음료수병 , 도끼 /가변 크기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소장 / 싱가포르국립미술관의 퍼포먼스 1989. 퍼포먼스 


탕다우의 동의 하에 재수록 [해설] 싱가포르 아티스트 빌리지의 설립자인 탕다우는 1989년, 퍼포먼스 <그들을 코뿔소를 포획하고, 그 뿔을 채취하여, 이 음료를 만들었다>를 실행한다. 설치와 퍼포먼스를 혼용하고 중국문화적 전통에서 나온 제의적 요소와 사회적 내러티브를 결합하면서 당대 소비문화가 야기한 환경문제를 환기시킨다.


작품의 내용은 중국문화에서 코뿔소의 뿔이 가지는 주술적 믿음(열을 막는 치료적 가치가 있다는)과 이것이 야기한 무분별한 밀렵 및 동물 멸종에 기반한다. 뿔이 사라진 채 누워있는 거대한 코뿔소 형태의 조각을 따라 그 뿔들의 성분으로 만들어진 듯한 음료수의 병들이 나선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탕다우는 사라진 뿔 옆에 제단을 만들고 동물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을 표현한 제의적 제스처를 보여준다. 이후 그는 훼손된 뿔을 사용하면서 도살당한 코뿔소들을 암시하는 병들의 나선형 패턴을 도끼로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행한다.


쿠도 테츠미(일본작가) I '당신의 우상' 혼합재료 1962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소장


[윤진섭 미술평론가] <한강변의 타살 강국진, 정강자, 전창승>과 문화 테러리즘과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그리고 ‘제4집단’ 기존문화에 대단 처절한 저주를 하다 ‘문화 사기꾼’, ‘문화실명자’, ‘문화기피자’, ‘문화부정축재자’, ‘문화곡예사라고 부르면서 그들은 사람을 매장하고 그 위에 물을 끼얹는 행위를 통해 사회에서 부정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식(儀式)을 집전한 것이다. 1968년 10 17일 오후 4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 세 명의 작가는 제2한강교 아래에서 <한강변의 타살>이란 제목의 해프닝을 선보였다. 


행위자들은 자신의 몸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판 다음, 색 비닐을 목을 제외한 몸에 감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행위자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자 밖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삽으로 흙을 구덩이 속에 밀어 넣어 색 비닐을 목에 두른 행위자의 목만 남기고 구덩이를 채웠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관객들이 이들의 머리 위로 양동이에 가득 든 물을 쏟아 부었다. 얼마 후, 행위자들은 구덩이에서 땅으로 나와 중앙에 머리가 들어가게끔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색 비닐을 썼다. 그것은 몸의 앞뒤로 길게 늘어져 그 안에 글을 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세 사람의 행위자는 비닐 위에 ‘문화 사기꾼’, ‘문화실명자’, ‘문화기피자’, ‘문화부정축재자’, ‘문화곡예사’ 등의 문구를 흰색의 페인트로 서로 써주었다. 서로 다른 문구를 쓴 행위자들은 그것을 읽은 다음 모아 태우는 화형식을 갖고 나서 땅에 파묻었다.31) 여기서 보이는 ‘문화사기꾼’은 사이비 작가를, ‘문화실명자’는 문명공포증 환자를, ‘문화기피자’는 관념론자인 19세기적 현대인을, ‘문화부정축재자’는 사이비 대가를, ‘문화곡예사’는 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왔다 갔다 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의 의미를 지닌다. 


한강변의 타살 강국진,정강자, 전찬승 1968  디지털 프린트 


당시 해프닝을 통해 이들이 보인 행태는 정국을 비판하는 정치적 내용이라기보다는 문화예 술에 초점을 둔 문화비판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볼 때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이 거리에서 행한 가두시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의 손에 들린 피켓의 내용이 미술을 둘러싼 문화행정에 대한 비판에 치중했던 것처럼 이들 역시 당대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하는데 주력했다.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삼엄한 공안정국의 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속을 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오히려 미술인들이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등 소위 퇴폐풍조 등의 조성을 이유로 경범죄 처벌을 받을지언정 작품의 내용으로 구속되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당시 해프닝을 주도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행위는 당시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면 급진적으로 보였지만, 문학의 래디컬리즘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70년대 초반에 이미 참여문학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33) 국전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된 미술계는 체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프닝이 주류미술에 포함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행위미술은 제도권 밖에서 벌어진 일과성 해프닝 정도로 치부되는 가운데 극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김구림을 비롯하여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은 행위미술의 1세대로 척박했던 당시의 예술 환경에서 행위미술을 주도한 작가들이다.


이건용 작가 포퍼먼스 1976


<한강변의 타살>은 정치적 내지는 사회적 데먼스트레이션이라기보다는 타성에 젖어 그릇된 행태를 보이고 있던 기성 미술계를 겨냥한 문화비판적 성격이 짙은 시위였다. 아마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합당한 수식어는 ‘문화 테러리스트’일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급진적이다. 비록 공격의 목표가 국전을 겨냥한 것이긴 했지만, ‘사기꾼’, ‘기피자’, ‘부정축재자’ 등등 그들이 사용한 단어의 이면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군대 기피자를 비롯하여 경제 사기꾼, 정치적 부정축재자와 같은 사회의 기생충을 환유하는 사회적 비판의 형식을 띤다. 문화부정축제자의 정체는 국전심사를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사이비 대가’일 수 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정치적 힘을 빌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부정축재자에 대한 풍자인 동시에 고발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매장하고 그 위에 물을 끼얹는 행위를 통해 사회에서 부정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식(儀式)을 집전한 것이다. 그들은 앞서 인용한 문장들이 적힌 비닐을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부정부패를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자신들의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해프닝은 그런 그들의 의도를 대중에게 보주기에는 지나치게 난해한 예술적 형식이었다. 


“바람 부는 한강다리 밑에서 비닐에 불을 지르곤 “죽이고 싶다. 모두!”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실험미술가들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34)는 한 신문의 보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행위미술과 대중 사이에 여전히 괴리감이 존재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 '제로 지겐(Zero Jigen)' 1970년 : 이 운동은 나고야에서 결성되었다. '요시히로와 신이치' 등이 주도하다. 일본의 고도의 경제성장기에 급진적인 누드로 일본 사회의 무의식을 깨우다 벌거벗은 몸으로 우리는 도시를 강탈(강간)한다.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과 '제4집단' 1970년 8월 15일 오전, ‘기성문화를 장례 지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일단의 젊은이들이 광복 25주년을 맞아 사직공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히피 스타일의 복장에 긴 머리의 정찬승과 손일광, ‘제4집단’의 대표(통령)인 김구림, 그리고 정강자 등이었다.


‘제4집단’의 대표(통령)인 김구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는 미국의 팝송을 비롯한 외래문화가 범람하여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던 때라 이에 대한 민족적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누군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문화적 자존심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제4집단’이 나서기로 결의를 한 것이다.35)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이라 이름 붙여진 이것은 이보다 약 두 달 앞선 6월 20일, 당시 을지로에 있는 소림다방에서 결성대회를 가진 <제4집단>이 첫 번째로 마련한 행사였다. 


이들은 비록 외세에 의한 타율적 해방이긴 했지만 ‘8. 15 해방’이 지닌 의의를 높이 사 이 날 사직공원에서 행사를 갖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들은 태극기, ‘무체사상’을 의미하는 백기와 함께 관 1개와 생화를 준비하였다. 이율곡동상이 있는 행사장 주변에는 ‘제4집단’의 회원들은 물론 마침 광복절을 맞이하여 공원에 놀러 나온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준비를 마치자 이들은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고 ‘제4집단’의 강령을 복창한 다음 ‘문화예술의 장례를 위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윽고 행사를 마친 이들은 관에 선언문을 넣고 모래를 채운 뒤 그 위에 꽃과 태극기를 덮은 다음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태극기와 흰 깃발을 든 정강자가 앞장을 섰고 그 뒤를 김구림이 흰 깃발을 들고 따랐다. 관을 든 손일광과 정찬승이 바로 김구림의 뒤를 이었으며, 그 뒤를 ‘제4집단’의 회원들과 호기심을 느낀 시민들 일부가 따라갔다. 


그러나 행렬은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행렬이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 근처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렀을 때,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경찰관이 이들을 불러 세웠다. 이들은 애초에 한강에 가서 관을 땅에 묻기로 계획을 세웠지만,36) 중도에 그만 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평로파출소로 연행된 그들은 얼마 후 다시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영등포구치소로 넘겨졌다. 이들은 거기서 즉결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은 ‘통행방해’와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제4집단’의 거리 포퍼먼스


김구림에 의하면 원래 이 행사의 계획은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과 용산을 지나 제1한강교 밑 백사장으로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관을 땅에 묻으면 오랜 세월이 지나 지형이 변하게 되는데 그리되면 오염된 문화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 당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문화적 데먼스트레이션은 중도에 행위자들이 연행돼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지닌 문화적 함의이다. 관을 든 행렬이 광화문 근처를 지나갈 때, 행인들의 비난과 야유를 들었다는 정강자의 증언은 당시의 해프닝이 대중에게 예술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일종의 ‘미친 짓거리’ 쯤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대중과 아방가르드 예술과의 괴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eet)가 밝힌 것처럼, 전위예술에 대한 대중의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에 기인한다. 


오르테가에 의하면 전위예술39)의 특징은 비통속성인 바, 이는 그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본질적 숙명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전위예술이 표방하는 새로운 형식과 기법은 대중이 보기에 매우 낯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화되기까지에는 일정한 검증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예술가와 대중 간에는 이해가 맞지 않는 데서 오는 마찰과 오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어떤 작품에 대해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과 비통속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못을 박는다. 


1950-60년대 일본 르포르타주 작품의 대표작 야마시카 키쿠브 '발사각 캠페인 5월 26일' 1960


방가르드의 낯선 예술 형식은 대중을 당혹케 한다.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행위미술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길거리에서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저 사람들의 특이한 복장과 행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제4집단’의 행렬을 막은 경찰관이 보인 반응은 이의 한 예다. 이를 상상하여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장면이 될 것이다.


경 찰:“(행렬 가운데 대표인 가장 괴상해 보이는 정찬승을 보며) 여보쇼. 이게 대체 뭐하는 거요?'정찬승:“왜 그러십니까? 이건 해프닝인데요.”경 찰:“해프닝? 해프닝이 대체 뭐 하는 거요?”정찬승:“해프닝이란 말이죠. 그러니깐 뭐랄까, 일상공간에서 어떤 계획된 사건을 통해 사물 의 존재감을 새롭게 드러내자는 건데.......”경 찰:“(좀 듣다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관을 발로 툭 차며) 여보, 제발 웃기지 마쇼.“ 


경찰이 보낸 이 야유는 오르테가 지적처럼 전위예술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혐오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위예술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모종의 모멸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모멸감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아방가르드 예술의 심리학은 집단의 심리학이기 때문에 문학적, 문화적, 예술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이라고 한 포지올리의 말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전위예술과 대중, 곧 사회와의 관계는 오르테가가 일찍이 통찰한 것처럼 전위예술이 ‘대중이라는 적’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들 간의 마찰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데데 에리 수프리아(Dede Eri Supria 인도네시아) I '미궁' 캔버스에 유채 1987-1988



[MMCA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 개최 2019년 1월 31일(목)부터 5월 6일(월)까지 담당자: 배명지 학예연구사.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3개국 100명의 작가 179여점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 관련 연표와 자료전시장이 제1전시장과 제2 전시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오윤 (한국)] I '원귀도' 캔버스에 유채, 69×462cm, 198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술관해설] 오윤(1946–1986)은 한국의 민중미술그룹인 ‘현실과 발언’의 주요 멤버이다. 1969년 그는 비평가 김윤수, 시인 김지하 등과 함께 ‘현실(現實)동인’ 을 결성하면서 사회비판적 미술을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1979년 창립된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민중미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두루마리 형식의 대작 <원귀도>는 미완성 작품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민중의 ‘한’을 파노라마 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학혁명, 한국전쟁, 5.18 민주화 항쟁 등 한국 역사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희생된 민중의 모습이 한을 품고 죽은 귀신들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윤석남(Yun Suknam) I '어머니2_딸과 아들' 1992, 나무에 채색, 한지에 사진 복사, 가변 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아시아 젠더와 사회 필리핀에는 여성미술 연대 ‘카시불란’가 있다> 재료의 독창성만으로도 만점을 줄 수 있다 <윤석남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한국근대사의 모든 질곡과 고통을 온 몸에 담고 사는 어머니를 주제로 했다고 전한다> 여성의 삶과 현실을 주체적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여성주의 미술은 민주화 운동과 함께 사회 정치적 기능을 재인식하였던 1980년대 새로운 미술 운동으로부터 출현하였다.


 ‘시월모임’, ‘여성미술연구회’ 등 여성미술 연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 운동,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저항과 함께 가부장 사회의 전통적 여성상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필리핀 여성미술 연대 ‘카시불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신체 및 섹슈얼리티 표상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모성, 여성의 노동 등에 주목하며 젠더와 사회라는 광범위한 관점에 접근하였다.


위 '어머니 2-딸과 아들' 은 한국여성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윤석남 작품이다. 1985년 김인순, 김진숙 등과 함께 ‘시월모임’을 결성하여 여성미술운동을 시작하였다. 작가는 초기에 평면 작업을 주로 해오다가 1990년대 초 유학시절 방문한 브롱스 미술관에서 본 젊은 남미 작가의 나무판 작품에서 받은 감명과 강릉의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 후 그곳에서 발견한 감나무 가지에서 느낀 감흥을 계기로 버려진 나무를 이용한 입체조각 작업을 시작하였다. 


1992년에는 폐목에 아크릴 물감을 이용하여 6점의 ‘어머니 연작’을 제작하였다. 19살에서 노년에 이르는 어머니의 개인사를 소재로 한 ‘어머니 연작’을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모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연대기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보편적인 여성의 삶을 다룬다. ‘어머니 연작’ 중 하나인 <어머니 2-딸과 아들>은 어머니의 가족 사진 열 장을 배경으로 나무 위에 채색한 등신대 크기의 어머니와 딸, 아들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김 구림 선생님 올 5월에 영국 런던 한 극장에서 그의 69년도 실험영화작품을 재현하는 행사에 초대 받았다고 전하네요 김구림 선생, 백남준을 만났을 때 그가 하는 말이 이랬다고 한다 "선생님 같이 아방가르드미술 하시는 분은 인정을 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부디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한마디 하시네요 그럽게 곱던 사모님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얼굴이 편하지 않다. 김구림 선생 역시 외국에서는 대환영인데 한국에서는 그만 못하군요


파블로 바엔스 산토스 (필리핀작가)] I '매니페스토' 1985-1987, 캔버스에 유채, 157.6×254.3cm,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소장 <필리핀의 민중미술>


<중남미 민중미술의 영향이 보인다> 파블로 바엔스 산토스(1943–)는 1976년에 형성된 필리핀의 사회적 리얼리즘 그룹 카이사한의 창립 멤버이다. ‘연대’를 의미하는 카이사한은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였던 마르코스 독재 정권과 미국 문화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문화 운동을 이끌었다. 


파블로 바엔스 산토스는 필리핀의 신문 마닐라 타임즈의 삽화가이기도 하였는데,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이미지를 주로 작품에 사용하였다. 대표작 <매니페스토>는 민중의 힘이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을 때의 역사적 순간을 과장되고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중앙의 인물은 발에 걸린 미국 국기와 동물들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자국의 민중들이 군집해 있는 필리핀 국기를 향해 나아간다.


'태국의 민중미술': 태국예술가연합전선 (뜨라꾼 리라삐라빤) (태국)> [제목 없음] /1976 / 2003 /보드에 아크릴릭 /120×250 cm / 10월 14일 재단 소장 


[미술관 해설] 태국예술가연합전선은 1973년 10월 군사독재가 실각한 바로 다음해인 1974년에 형성되었다. 태국예술가연합전선은 권력과 대기업의 통제 아래, 자본주의를 위해 생산되는 예술에 반대하고, 대신 일반 노동자와 농민 등 모든 태국인에게 의미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1년 후인 1975년 10월 <태국예술가연합전선>은 1973년 군사정권의 붕괴에 앞장선 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라자담넌 거리에 1,000개 이상의 회화 작품과 포스터를 전시하는 대규모 전시를 조직했다. 작가와 공동체가 함께 제작한 빌보드에서 이름을 따서 진행한 《빌보드 컷아웃》전은 공공 공간에 전시함으로써 갤러리 전시에 도전했다. 


《빌보드 컷아웃》은 작가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참여한 공공 전시였으며, 예술을 퍼포먼스적 행위로 보았다. 태국예술가연합전선은 빌보드를 들고, 주요 시위 집결지였던 민주주의 기념비로부터 태국인이 존경하는 왕의 거주지인 왕궁까지 행진했다. 이후 빌보드는 주요 거리 및 빌딩 옥상에 설치됐다. 당시 사용된 빌보드는 2003년 재제작되었다 


노원희 작가 I '한길' 유채 130*162cm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