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대부,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직무대리 박종달)은 《김구림》전을 8월 25일(금)~2024년 2월 12일(월) 서울관에서 열린다.
[포인트 하나]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대규모 개인전: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 230여 점/ 1950년대 후반 평면 추상부터 2020년대 <음과 양> 연작까지 총망라/ 8월 25일(금)부터 2024년 2월 12일(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포인트 둘] 영화-무용-음악-연극으로 구성된 종합 공연으로 총체 예술가 김구림 재조명 / 9월 7일(목) 오후 2시 MMCA다원공간에서 상연할 예정이다 <미완성 작성 중>
오마이뉴스 김구림전 https://omn.kr/25oey
김구림 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걸린 대형 포스터 전시 홍보물
부잣집 금수저 출신 김구림 서울 홍대 같은 대학을 안 가고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대 등 천막 치고 공부를 하다) 경주 계림예술대학 들어가 교수들에게 대단한 칭찬을 받고 인상파 같은 그림 그렇지만 문제 제기를 싫어하는 권위적 교수들 때문에 대학에서 튕겨 나왔다. 질문을 많이 해 학교에서 교수들에게 찍힌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때려치우고 // 어떻게 공부하나 고민중 책을 좋아해 항상 헌책방을 맨도는데 어느날 보니 영어로만 된 무슨 잡지 쪼가리 같은 것 발견 그게 바로 <라이프>지였다고 거기에는 미술만 아니라 연극, 음악, 무용, 문학 등 별 게 다 나오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미국 부대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다니고 // 그리고 <타임>지도 보게 되고 거기서 처음으로 전위 무용가 <머스 커닝햄(백남준 절친)> 알게 되고 그는 춤을 추는데 "고압선 주변을 뱅뱅 돌면서 이것이 현대무용이다"라고 해 당황했다고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손으로 물감 뿌리는 <잭슨 폴록>도 그 때 알게 된 것이라고
어느 정도 부자였나?
내가 이상한 아들이 된 것은 어려서 외동아들에다가 너무나 부자로 자라 // 집에서 안 해 준 것이 없어서 // 짚신이나 고무신 시대 '맞춤 구두'를 신고 // 외국제 장남감 예를 들면 총 거기에 돌을 넣으면 총알이 나가는 // 아이들이 부러워하면서 그래서 오히려 왕따도 많이 당했어요 // 집에 시계가 없는 시대 // 어린애가 시계를 차고 그러다 보니 // 내가 내 멋대로 살았고 그래서 외로웠어요. // 한번은 여자들이 우르르 버선발로 내려와 나를 뺏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기생집이었어요
<김구림(3대가 의사집안 당시는 한의사 할아버지 중국에 가서도 치료를 할 정도) // 일제시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나다 // 중고시절 6가지(1) 외과 의사(초기 동물 해부 취미로 하다), 2) 과학자(우주), 3) 발명가 4) 영화감독 5) 소설가(세계문학전집 다 읽다), 6) 작곡하는 음악가(자택에 가면 대단한 규모의 음향시설이 되어 있다)를 해보고 드디어 결국 7) 혼자할 수 있고 번역이 필요 없는 화가되기를 결심하다> <아래 은관문화훈장 수상 때 사진>
서정걸 질문: 그 후에 중·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다니시게 되었네요.
김구림 대답: 예 그래서 (대구에서) 다녔는데 그러다가 처음에는 사실은 내가 미술쪽에 잘 그리기는 잘 그렸지만 화가가 되리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의사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과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가지고 개구리고 뭐고 전부 다 닥치는 대로 잡아다가 유리관에다 넣어놓고 말이지이런 짓도 하고 하다 보니까 맨날 비린내가 나서 못 견디겠는 거야. 그래서그걸 치우고 그 다음에는 이제 뭐 과학자가 되겠다고… 집에 있는 기계고 뭐고 유성기부터 해가지고 시계고, 동네 있는 사람들 차, 다니면서 그런 거는 다 떼다가 새로 조립도 해보고 별짓을 다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이제 그 당시에 그걸 하려니까 과학자로는 성공하기 힘들겠더라고. 시대가 그런 거를 공부할 수도 없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래서 예술을 한번 해볼까 하면서 예술을 하는데 처음에는 영화감독을 한번 해보고 싶어가지고 영화공부를 좀 해볼까 해서 그 당시에는 책도 없었지만 기초적인 용어도 보고 혼자 책을 보고 했어요. 하다가 보니까 그것도 좋은 게 못 될 거 같더라고. 주연을 거기에 맞는 걸 써야지. 또 여러 가지 제작자가 있어야 하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처지가 못 되는 거야. // 그러면 혼자 할 수 있는 거를 찾으니까 소설가가 되는 거더라고. 그래서 어느 날 소설이란 소설은 전부 다 머리맡에 쌓아놓고 밤을 새워가면서 엄청나게 읽었어요. 그때 이미 17살 때, 18살 때 세계문학전집을 다 뗐습니다. 내가. 그러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한참 쓰다가 보니까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이게 '아, 이거 가지고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는 힘들구나' 내가 번역을 하면 100% 반영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번역도 안하고 그런 게 뭐가 있을까 했더니 음악이더라고요. 음악은 그냥 들려주면, 서양 사람이고 동양 사람이고 들려주면 되거든요. 근데 음악을 좀 하다 보니까 그것도 난관이 있어요. 외국에 가서 발표하려면 내가 직접 가야 되잖아요. 그러면 예술 쪽에서 내가 가지도 않고, 통역도 필요 없고, 번역도 필요 없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그게 뭔가 했더니 그림이더라고요. 그거는 내가 안 가고 부치도 되고, 그게 무슨 번역도 필요 없고, 통역도 필요 없고, 누구의 간섭도 안 받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림이더라고요. 그러면은 '내가 화가가 되자' 그래가지고 그림 쪽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김구림은 1950년대부터 다양한 매체, 장르, 주제를 넘나들며 예술의 최전선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실험미술의 선구자이다.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퍼포먼스, 회화 등 미술의 범주에서뿐만 아니라 무용, 연극,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이자 총체 예술가로서 김구림의 미술사적 성과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담론과 연구를 지속 생성하는 현재진행형 작가로서 그의 행보를 살펴보고자 한다.
작가가 직접 설명하는 24분의 1초:<1/24초의 의미(국현 소장품/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소장품/런던 테이트 모던 소장품)의 내용과 메시지>에 대해서 서정걸(미술기획자)과 김구림 대담 // 이 작품은 세계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 실험 예술영화. 한국 같은 저개발국의 산업화 초기에 발생하는 대혼란을 다룬 이런 영화가 구미에도 없다(?)
[서정걸]: 그러면 선생님 1/24초의 의미> 콘티를 짜시고 다 하셨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구림]: 왜 제목을 <1/24초의 의미>라고 붙였느냐면, 이게 필름에 보면 움직임이나 올 때 커트(cut)가 말이죠, 1초에 24장이 '탁탁탁탁'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그게 움직임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1/24초의 의미라는 제목을 그렇게 달아가지고 붙인 거예요. 그 자체를 다른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런데 이제 내용에 보면 처음에 고가도로가 나옵니다. 처음에 고가도로에서 촬영할 때 택시를 타고, 택시를 빌려가지고 바깥의 고가도로 난간을 꽉 촬영하면서 그 풍경들이 보이도록 해놨거든요. 그래가지고 꽉 나갔다가 딱 끊기면서 그 다음부터는 이제 1초마다 24컷이 돌아가잖아요. 24컷마다 장면을 끊어버렸어요. 그래서 어떤 장면은 집 장면이 나오다가 갑자기 시계가 딱 나왔다가, 또 사람이 나왔다가, 동물이 나왔다가 하듯이. 24장 됐을 때 편집할 때 다 끊어가지고 새로 또 연결하고, 연결하고 이랬습니다. 그래 가지고는 그 당시의, 어떤우리 서울의 상황, 돌아가는 사회상의 상황을 그 속에다가 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작품을 보면 고가도로가, 난간이 보이면서 천천히 흐르다가 탁 끊어지면서 덜컥덜컥 덜컥덜컥 다른 장면이 팍팍팍팍 막 그런 식으로 꽉 나가는 거죠. 그러다가 갑자기 딱 끊어지면서 실내가 나타납니다. 실내가 나타나면서 샤워기 꼭대기만 나와요. 그러면 거기서 물이 촤르르 흐르는 장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다시 고가도로가 꽉 전개되면서 또 그 다음에 다른 커트들이 말이지. 상점에 무슨 일하는 장면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또 계속돼오는… 그 다음에는 또 거울을 보면서 담배 연기가 확 피어오르는 실내가 나와서 정찬승이가 그런 장면부터 해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이제 이런 게 다섯 번 전개가 됩니다. 그런 장면이 그러면서 샤워기에서는 샤워가 나오고 물이 그냥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이런 장면부터 해가지고. 아주 막 긴장감 있게 사건을 말이죠. 1초마다 막 다른걸로 전개되어 가다가 꽉조용해지고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이 작품은 그 당시의 어떤 우리나라 생활상이라든가 어떤 하나의 룸펜(Lumpen)이 하루종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취직도 안 되고. 그러한 상을 다 그리는 거죠. 그러한 작품이었습니다
김구림(1936)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미술대학을 중퇴하고, 1959년 대구 공회당화랑에서《김구림 유화개인전》을 개최하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는 섬유회사에서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며 영화, 연극, 무용 등에 관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60년대 말에는 ‘회화 68’, ‘AG’, ‘제4집단’등 예술집단 활동을 주도하며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메일 아트, 실험영화, 대지미술, 해프닝 등을 발표했다.
이후 1973-1975년 일본에 머물며 사물과 시간의 관계성을 오브제와 설치작품, 판화 등을 통해 탐구하였다. 1970년대 전위적인 작품들은 제7회 파리비엔날레(1971), 제12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73), 《김구림전》(도쿄 시로타 화랑, 1973), 제2회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스위스 로잔, 1974) 등 해외 전시에서도 활발하게 소개되었다. 이후 1984년부터 미국에 머물며 상호모순적인 두 상태를 대비시키고, 나아가 합일에 이르게 하는‘음과 양’연작을 지속해서 선보여왔다.
<한국작가 최고의 작품을 프리즈 행사로 한국을 방문한 외국미술계 인사들에게 한국 국립미술관에서 이렇게 수준 높은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점에 탄복할 최고의 선물을 보여줄 기회를 놓친 셈이다> 이 사건은 풍경과 대지 품는 세계적 미술가 크리스토 설치 포장 실험 예술정신에도 배치된다>
출처 : 서울파이낸스(http://www.seoulfn.com) "24일 오전 심장박동기를 달고 기자간담회에 나타난 김 작가는 “아방가르드 작가라 하는데 그런 작품은 없다. 파격이 없다. 미안하고 죄송하다. 고리타분한 것만 보여드려서”라며 “오늘 설치 자체도 하지 못하고 문체부(문화체육관광부)에서 연락도 없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을 광목으로 묶어 구태의연한 미술계에 쓴 소리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미술관 측은 등록문화재여서 어려움이 있고 구현된다 해도 시간상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구림 작가, 9순을 내다보는 나이에 오늘 발언을 들어보니 김구림 작가다웠다. 그는 피카소처럼 평생 10대 소년의 그 마음을, 20대 청년의 그 패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립근대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내가 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이번에 국현을 광목으로 싸는 퍼포먼스(1970년 국현을 광목을 묶는 해프닝 아트를 다시 재현)만 했다면 이번 9월에 오는 프리즈에 오는 전 세계적 미술 인사들이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저런 전시를 하는구나 한국 미술의 높은 수준을 전 세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김구림 2012년 갑자기 전화가 왔다 테이트 모던 브루스 나우먼 외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쿠사마 아요이, 앤디 워홀 등이 참가하는 세계적 대가 구룹전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테이트 모던, 2012)에서 초대를 받은 것이다. 김구림 부부를 초대하고 완전히 영국 귀족처럼 대접을 받았다 사모님과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그때 김구림의 죽음의 태양(1964년 작품)이 전시되고 이 작품이 런던 테이트에 소장되었다. 이에 대한 해설은 뉴욕타임스 기사를 다룰 때 설명했다
<태양의 죽음> 작가의 직접설명 " 여기 작품(태양의 죽음 영국 테이트 미술관 소장품 작가의 손작업이 들어가지 않는 방법 추구)에다가. '손의 의미성을 안 넣고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물질 자체부터 바꾸자'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게 캔버스가 아니라 베니어판을 샀어요. 베니어판을 사가지고는거기다가 이제 시장에 가가지고 그 당시에 비닐이 나왔었을 때입니다.비닐을 갖다가 거기다가 발랐어요. 그래가지고 이제 내가 드로잉해가지고
어떤 부분에다가 석유를 갖다놓고 마당에 떨쳐놓고 석유를 뿌려 가지고 불을지르고, 그 다음에 옆에 담요를 준비해놨다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어떤부분만 내가 해놨기 때문에 그 부분만 타오르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불올라왔을 때 담요가지고 탁 끄고, 그래서 이 작품이 뭐냐면 행위가 합쳐진작품이에요 이게. 행위가 벌써 그때 퍼포먼스가 나오기 시작한 거야 내가.그래가지고는 만든 작품인데 그 이야기를, 그걸 알고 데이트 모던에서 환영을한 거야. 야... 벌써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이런 일이 없었는데행위를 결합시킨 작품을 했구나. 그런데 그 당시에 뭐냐 하면 그런 것을 하는사람은 잭슨 폴록이라든가 캔버스 위를 빙빙 돌아다니면서 막 뿌리는 것.
이런 건 진짜 많이 행위와 완전히 결합한 작품이구나 내가 거기서 굉장히높이 산거야. 이거는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세계 역사에 없으면 안 된다하고는 자기들이 이걸 바로 사놓은 겁니다. 테이트 모던에다가 이 작품을그런 작품이에요.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60년대 초 작품이죠
태양의 죽음(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영구 소장품 이 작품 안에 회화. 조각. 콜라주. 아상블라주. 파피에 콜레, 등 다장르의 요소와 작품의 다종류의 재료 예컨대 비닐부터 종이에서 유화에서 연탄재 오브제 등등 모든 것이 총망라하다) 이 작품을 만들게 된 동기 // 뉴욕타임스에게 이렇게 밝히다 // 1956년 군 복무 중 // 그는 다른 군악대원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해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 그 이유는 같은 동료 밴드 요원들이 김구림만 예외으로 밴드 리더의 총애를 받는 것을 질투을 심하기 했기 때문이라고 // 당시에 프렌치 호른의 유일한 연주자였다.
그리고 그는 전쟁이 끝난 후라 한국은 몇 년 동안 병원 상황이 열악했고, // 다시 요양을 하는 과정에서 몇몇 남자들이 영양실조나 약물 부족으로 사망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 그런 자신과 고통과 주변 사람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태양의 죽음'의 창작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 이 작품은 2016년 런던 테이트 모던이 구입하여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While doing his required military service in 1956, he was hospitalized for several months after a severe beating from a gang of other members of the military band who were, he said, jealous that he was favored by the bandleader for his excepti-onal playing of the French horn. The hospital conditions were brutal in the years after the war, he said, and in the slow process of regaining his strength he saw several men die from malnutrition or a lack of medicine. That suffering became a driving force behind one of his most famous works, “Death of Sun,” which was purchased by the Tate Modern in London in 2016 for its permanent collection. - New York Times
<김구림은 그림을 그릴 때 마다 창작을 할 때 마다 새로운 룰을 만드고 동시에 그 룰을 없앤다. 다시 말해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유동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끊임잆이 시대 정신에 맞춰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작품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플럭서스의 정신을 닮았다 플럭서스는 Flow라는 뜻이다. 물이 흐른다의 정신에 투철한 작가다. 그런 면에서 동시대 박서보 화백과 다른 길을 걸어간 셈이다>
김구림은 “삶의 반대되는 요소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다. “나는 혼돈의 시대의 욕망을 그리고 싶었고, 혼돈은 내가 평생 경험한 모든 모순에서 비롯된다.” - 뉴욕 타임스
2022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 김구림 전시 전문 By David Belcher
June 15, 2022 // A Founding Father of Korean Multimedia Comes to Maastricht // Paintings by Kim Kulim, 85, will be shown at TEFAF by Gana Art, a gallery in Seoul. The artist says he aims to “depict desire in the
<그는 한국실험미술의 선구자로 정신적 아버지로 앞으로 한국미술에서 이런 작가가 다시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970년 당시 한국미술과 국립현대미술관(위치 경복궁)을 광목에 싸서 길에다 내다 버렸지만 그것은 한국미술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반대로 한국미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살려내기 위한 일생일대의 불가피한 몸부림이자 어쩔 수 없는 승부수로 마지막으로 던진 도박이었다> 오늘이 김구림 선생님 생일이네요!! 축하드립니다 !!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아래는 2022년 김구림 선생님 관련 뉴욕타임스 기사] At 85 the Korean avant-garde artist KIM Kulim debuts at TEFAF(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 있는 세계적인 미술 컬렉션 회사 TEFAF: Established in 1988, The European Fine Art Foundation is widely regarded as the world's pre-eminent organization for fine art, antiques etc)
김구림은 “삶의 반대되는 요소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다. “나는 혼돈의 시대의 욕망을 그리고 싶었고, 혼돈은 내가 평생 경험한 모든 모순에서 비롯된다.”김구림 작가는 미술상보다 // 무용상을 먼저 받았다 // 그런 정도로 토탈 아티스트다(총체 예술가다) // 패션 실험 영화 전자 아트 메일 아트 대지미술 해프닝 그리고 판화 이론가(10년간 대학에서 강의) 및 판화 저서도 내고 그가 관여하지 않는 예술영역은 없다 // 재미있는 점은 그의 행각이 너무나 특이해 // 그가 하는 모든 이상한 해프닝은 // 일반 신문에 나오지 않고 // 당시 선데이 서울의 특필이 되었고 // 김구림 괴상한 행동은 //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 그런데 영국의 테이트모던에서 // 김구림의 작가의 천재성을 발굴한 이후에는 // 선데이 서울에 나온 김구림 기사를 // 다 아카이브로 만들어 모아놓았다 // 한국에는 없는 선데이 서울 김구림 기사가 // 영국 테이트 모던에 가면 다 볼 수 있다 // 이것은 한국과 영국이 미술을 보는 관점이 // 얼마나 다른가를 엿볼 수 있다
김구림은 // 1970년대 기존 한국 미술이 // 타성과 깊은 수렁에 빠지자 // 이를 질타하면서 // 2개의 신개념과 시대정신이 담긴 단어에 발굴한다. // 바로 '현상'과 '흔적'이라는 말 // <현상에서 흔적으로> 현상은 본질을 앞선다는 소리이고. // 이것은 사르트르의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말도 연상키시고, 영원히 보존하는 예술이 아니라는 개념은 // 19세기 보들레르가 현대성을 <일시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으로 잡았는데 // 그런 관점도 엿볼 수 있다. // 순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 예술이라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개념을 // 한국 미술계에 도입하면서 // 목마른 한국 미술의 시원한 샘물을 퍼 올리는 // 작업을 한 셈이다. //
그 중 하나가 바로 1970년 국현을 광목을 묶어 갔다 버리는 퍼포먼스를 벌리고 // 잔디를 불태우는 대지 미술로 시도하기도 했다 // 한국 미술을 불타고 있는가?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 이런 한국미술의 혁신을 가장 먼저 추구한 작가가 바로 김구림이다 // 그런 정신은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요구되는 실험 정신이다 // 얼음은 순간이고 그것을 바로 물로 변하는 현상 세계를 // 가시적으로 보여주다.
<1970년 '현상에서 흔적으로' 국현은 불타고 있는가? 김구림 당시 국현(경복궁)을 900백만 원에 경매에 붙이다> 큐레이터와 미술관은 인큐베이터이다 //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도 있어야 한다 // 그게 그 장소와 그 사람이 있는 이유이다 // 그 본래의 역할이다 // 행정에 치우치면 애(작가의 창조적 상상력)가 죽을 수도 있다 // 미술관과 큐레이터는 작가 때문에 먹고 살고 작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 좋은 전시는 그럴듯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 좋은 전시는 한번도 없었던 해프닝을 창조하는 것이고 // 미술사에 기록이 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 서양에서는 제만(스위스 큐레이터)이 그런 역할을 했다 // 문화적 시위이고 창조적 파괴이다 //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것이다 //
백남준 1963년 독일에서 첫 전시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머리를 걸고 전시장 앞에 건 것은 // 백남준이 이제 내가 서양미술의 목을 치겠다는 상징이지만 // 그래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는 있지만 // 물리적으로 피해를 주거나 폭력이거나 파괴행위는 아니다 // 아무도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시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 그는 그래서 세계 미술의 90% 차지하는 서구중심미술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 서양과 동양의 미술의 위상을 50 대 50으로 만드는 데 대전환점이 된 것이다 // 서양 유화 미술에 비디오 미술은 50대 50으로 뒤섞어버린 것이다 // 지금 우리가 서양에 가서 당당하게 작품을 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맞이한 셈이다 //
김구림 서울전도 그런 면에서 새롭게 해석이 되어야 한다 // 전시의 의의를 찾아야 한다 // 1970년(1969년) 김구림 국현(경복궁) 광목에 싸서 버리는 아니 묶는 퍼포먼스를 한 것도 그런 의미다 // 한국미술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했을 것이다 // 균형감이 없는 틀에 박힌 한국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한 것이다.
<김구림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전시도 참으로 어렵게 작고 한지 15년만에 열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큰 작가임이 이번에 드러났다. 1970년에도 이게 국립미술관 수준이냐며 국립현대미술관(당시는 경복궁에 있었다)을 광목을 싸가지도 던져버린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번에 또 그런 사건이 재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정말 안타깝다 김구림 전시를 받기에는 국립미술관 포용적 자세가 너무 좁은 것 아닌가 최근 심장수술까지 받은 구순을 바라보는 작가가 원하는 것을 못 받아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이제 수주높은 기반 시설과 설비와 넓은 전시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서도 말이다>
국내적으로 은관 문화 훈장을 받고 국제적으로 영국 테이트모던과 구겐하임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 작품이 소장될 정도로 한국 일본 미국에서 맹활약을 한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선 보이는 87세에 여는 회고전 코앞에 앞두고 임명 받은 지 1달도 안된 행정관이 관여(?) 삼척동자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주 불길한 기운이 든다. 젊은 작가도 아니고 이제 구순을 맞이하는 돈이 아니라 평생 명예와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노 작가에 대한 국가의 예가 아니다. 프리즈 등 세계적 미술 행사를 앞두고 너무나 창피한 일이다. 미술관과 작가 사이에 설치작품은 이미 6개월 전에 확정되어야 하는 문제인데 전시 코앞에 두고 이제 와서 문제를 삼다니 이해할 수 없다 미술관이 생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작가의 뜻과 의도대로 전시를 못하게 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김구림 작가는 이 문제가 한작가에게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이러한 폐단은 없애야 하는 문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구림은 그림을 그릴 때 마다 창작을 할 때 마다 새로운 룰을 만드고 동시에 그 룰을 없앤다. 다시 말해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유동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끊임잆이 시대 정신에 맞춰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작품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플럭서스의 정신을 닮았다 플럭서스는 Flow라는 뜻이다. 물이 흐른다의 정신에 투철한 작가다. 그런 면에서 동시대 박서보 화백과 다른 길을 걸어간 셈이다>
2022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 김구림 전시 전문 By David Belcher
June 15, 2022 // A Founding Father of Korean Multimedia Comes to Maastricht // Paintings by Kim Kulim, 85, will be shown at TEFAF by Gana Art, a gallery in Seoul. The artist says he aims to “depict desire in the age of chaos.”
구림 작가가 문체부 문화정책실장 유병채 씨에게 보낸 글이다 / 87세 작가에게는 자존심에 치명타를 주고 크게 생채기를 낼 수 있는 조치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구림'이라고 합니다. 이번 국현에서 24일부터 개인전을 하는 화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국현에는 관장과 학예실장이 공석이라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연락을 드립니다. 몇 십년간 작품 활동을 해 오면서 이때까지 일반 화랑과 시립미술관에서도 작품을 발표해 오면서 작품에 대해 아무런 제약을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일을 처음 당해봐서 알고자 해서 문의해 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익을 위해 안 되는 것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어 작가를 도와주어야 하는 기관이며 특히 세계적으로 널리 홍보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기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구림(1936년 상주 출생 87세) 화백님 전시 개막식 많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 최근 갑자기 생사를 다투는 심각한 몸 이상 현상이 와 긴급 심장 수술을 하시고 지금은 회복하고 계시다고 들었다. // 백남준이 4년 후배인 김구림 선생에게 뉴욕에서 같이 활동할 때 "실험 미술 하시는 선생님은 오래 사셔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봅니다"라고 덕담을 했다고 하는데 // 정말 건강하시길 빕니다. // 1970년 김구림 한국미술의 기존의 잔디밭을 불태우면서 "한국 미술의 죽음을 선언하다. 이제 한국미술은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고 경고하다.
1김구림 신작 미디어 시대의 풍물
구순에 다 되어 신작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번에 독일의 세계적 미디어아티스트 슈타이얼 그 이상 수준의 미디어 세상을 상징화한 작품을 발표하다. 증권 회사의 주가 오르고 내리는 화면부터 다양한 지구촌의 모습을 선보이다. 주변은 거울을 장치하여 공간의 착시와 확장을 현란하게 보여주다.
1986년 영국 테이트 모던의 초대를 받아,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과 함께 《Artistic License》(갤러리 뉴욕, 1986) 등의 전시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이후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초대전 《현존과 흔적》을 개최하며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도‘음과 양’은 김구림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로 현재까지 지속해 나가고 있는 개념이다.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테이트 모던, 2012)에서 잭슨 폴록, 이브 클라인, 쿠사마 아요이, 앤디 워홀 등과 함께 그룹전에 참여하였고, 그의 1960-1970년대 전위예술의 선구적인 작품들은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 테이트 라이브러리 스페셜 컬렉션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울관 6, 7전시실에 작가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하는 230여 점의 작품과 60여 점의 아카이브 자료가 전시되며 총체 예술가 김구림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 공연도 마련된다.
6전시실에서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품어온 ‘현전과 현상’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초반 비닐, 불, 천 등을 이용해 제작한 추상 회화, 1960년대 말 ‘회화 68’의 구성원으로 옵아트를 접하며 제작한 일렉트릭 아트, ‘AG’활동기에 선보인 얼음을 주재료로 사용한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한국 실험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 <1/24초의 의미>(1969),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머물며 제작한 설치작 등을 소개한다.
7전시실에서는 김구림이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자연’에 집중하면서 제작한 작품들로 시작한다. 이 시기 작가는 나뭇가지 등을 화면에 부착해 자연과 인공의 관계를 탐구하고, 1990년대 접어들면서는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제작한 콜라주 기법의 <음과 양> 평면 작업, 2000년대 중반 이후 물질문명의 부산물을 이용해 제작한 <음과 양> 오브제까지 두루 선보인다. 7전시실에서는 주변 환경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회화, 판화, 오브제, 설치 등을 넘나들며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의 자유분방함과 새로운 방법론을 끝없이 발굴하는 작가의 왕성한 호기심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삽 1974
작가로서 외부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해 온 김구림의 ‘현재’를 확인하고, 그가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는 신작 2점이 이번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첫 번째 작품 <음과 양: 자동차> 설치에서 작가는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재해를 비판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두 번째 작품 <음과 양> 설치는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는 역사의 순간들이 반복 송출되는 비디오 조각 작품이다. 김구림은 언뜻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시간, 지역, 사건 등의 요소들을 충돌, 증폭시키는 가운데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총체 예술가 김구림의 공연은 MMCA다원공간에서 2023년 9월 7일 오후 2시 상연되어 공연예술가로서의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공연은 김구림의 영화-무용-음악-연극 등 총 4개 파트로 구성된다. 한국 실험영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1/24초의 의미>(1969), <문명, 여자, 돈>(1969) 영화 상영을 시작으로 1969년에 시나리오, 안무, 작곡을 한 <무제>(무용), <대합창>(음악), <모르는 사람들>(연극)이 각 15분간 차례로 선보인다. 무용-음악-연극에는 70여 명의 출연자가 참여할 예정이다. 관람객은 이 작품들을 통해 1969년부터 공연을 제작하며 비언어적 소통의 방식을 추구했던 김구림의 실험성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전시실과 7전시실을 잇는 복도 공간에는 김구림의 다채로운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세 영역으로 나누어 보여준다. 첫 번째 <불가해의 예술>(1970)은 김구림이 1970년 5월호『공간』지에 발표한 포토콜라주 작업의 일부이다. 작가는 1969년 미국 잡지『라이프』에 삽입된 이미지 등을 변용하여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예술을 가시화하였다. 두 번째는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의 기록 사진이다. 1970년 4월 11일 한강변 언덕의 잔디를 불로 태워 흔적을 남긴 것으로 김구림이 최초로 실험했던 한국의 역사적 대지미술 프로젝트이다. 세 번째는 1980년대 김구림이 참여했던 대형 공연작품 <이상의 날개>(세종문화회관, 1981), <살풀이 8>(호암아트홀, 1988)의 기록 사진으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의 70여 년에 걸친 예술세계를 총망라한 전시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를 통해 한국 주요 작가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개진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 6전시실> 6전시실은 작품 활동 초기에 해당하는 195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을 전개한 1970년대 김구림의 작품으로 구성했다.
전시실에 들어선 관객이 처음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김구림이 1950년대 후반에 작업한 추상 평면 작품들이다. 김구림은 1959년 대구에서 제1회 개인전 《김구림 유화 개인전》(대구 공회당화랑, 1959)을 개최한 이후, 앵포르멜 추상 작업을 본격화하며 한국화단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구의 한 섬유회사에서 근무하며 발견한 공업 재료에 대한 관심과 전쟁, 국가 재건, 급속한 산업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작가는 비닐을 태우거나 산업 오브제를 부착한 독창적인 기법의 추상 연작을 전개해 나갔다. 핵, 죽음, 묘비, 무덤과 같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해당 시기 작품들은 전후 시대의 실존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었다.
이어지는 전시 공간은 김구림의 기민한 시대 감성과 새로운 매체에 대한 실험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일렉트릭 아트 작업과 영화, 비디오 작업을 중심으로 꾸며진다. 김구림은 1960년대 가속화되는 전기의 보급과 기술의 발전에 영감을 받아 1969년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작품을 제작했으며, 영화 매체를 통해 급속하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를 포착하고 성찰하고자 했다. 이러한 선구적인 행보와 함께 동시기 작가는 시간성을 얼음을 이용한 설치미술로 시각화한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를 발표하고, 김차섭과 함께 최초의 메일 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을 시행했으며, TV를 통해 <바디페인팅>(1969)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등 독보적인 활동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회화68’,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제4집단’ 등 한국 미술계의 주요 예술집단의 창립과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국내화단에 김구림이란 작가의 뚜렷한 존재감을 각인시키게 된다.
그러나 김구림은 정주하지 않고 1973년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욱 확장하고자 일본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그는 1973년 도쿄 시로타화랑, 1974년 도쿄 니레노기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1974)와 《오늘의 방법》(교토시립미술관, 1975)에 참여하는 등의 성과를 이뤄낸다. 6전시실의 <빗자루>(1973), <걸레>(비디오 아트, 1974), <스탠드>(1979) 등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이 시기 작가는 매체적으로는 오브제와 비디오, 판화를 주로 탐구했으며, 주제적으로는 현존, 시간성과 같은 존재론적 개념에 천착했다. 채색과 마모 등을 통해 오브제의 시간과 상황을 인위적으로 재설정하는 김구림의 작품에 대해 당시 이우환은“장래를 앞당겨 시각화”함으로써 “산다는 표현 자체의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증표”로 설명한 바 있다. 1975년 귀국한 후에도 작가의 이러한 개념적인 작업 경향은 지속, 발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김구림의 1960년대 추상 작품은 크게 흑색조 또는 백색조 화면으로 나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핵1-62>, <태양의 죽음>(1964)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질-62>는 백색조의 배경이 특징적인 작품이다. 작가는 <질-62>를 통해 유화 물감과 불을 붙인 비닐이라는 생경한 재료의 조합으로 독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화면 구성을 선보였다. 특히 연소 과정에서 그을리고 수축된 비닐의 임의적이고 비정형적인 마띠에르가 돋보인다. 비닐은 조형을 위한 재료에 그치지 않고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다층화한다. 본 작업 당시 작가가 비닐을 “문명의 산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표출된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의 전조를 찾아볼 수 있다. | |
김구림, <질-62>, 1962, 캔버스에 비닐, 유화, 180 x 88.5 cm. 개인 소장. |
《제1회 AG전: 확장과 환원의 역학》(중앙공보관, 1970)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다. 작가는 붉은 플라스틱 통 3개에 각기 다른 크기의 얼음을 넣고, 얼음 위로 트레싱지를 덮어두었다. 이후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물 위로 트레싱지가 떠 있다가 그 물마저 증발하면 어그러진 종이만 남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김구림은 “있음은 곧 없음의 상대적이며, 이 세상의 존재물은 태어났다 사라지고,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연에 순응하며 공의 세계와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존재와 시간의 관계성을 <현상에서 흔적으로>라는 제목 속에 압축시켰다. | |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플라스틱 상자, 얼음, 투명지, 170 x 120 x 20 cm (3). 작가 소장. |
김구림은 1968년 서울대학교 출신의 곽훈, 김차섭, 이자경 등과 함께 ‘회화68’을 결성하고 창립전(신문회관화랑, 1968)에 옵아트를 조형적으로 해석해 낸 작품 <공간구조>를 선보였다. <공간구조>는 구멍이 난 플라스틱 반구를 화면 위에 부착하여 질서정연함 속에 반복적인 리듬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1968년 3월 27일 자 경향신문에서는 이 작품에 대해 “공학적인 입체면의 옵아트”라 평했다. <공간구조>는 이듬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한국청년작가 11인전》(솔리드 아리다드 갤러리, 1969)에서 반구의 구멍 사이로 전기 빛이 새어 나오는 <전자예술 A>, <전자예술 B>로 새롭게 탄생했다.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로 일컬어지지만, 1969년 전시 직후 판매된 두 원작의 소재는 현재 확인이 불가능하다. 1968년 남긴 드로잉을 바탕으로 2013년 개인전 《SeMa Green 김구림展: 잘 알지도 못하면서》(서울시립미술관, 2013)에서 재제작되었다. | |
김구림, <전자예술 A>, 1969 (2013년 재제작), 패널에 플라스틱, 전구, 181.6 x 181.6 x 17 cm. 작가 소장. |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 플라스틱 상자, 얼음, 투명지, 170 x 120 x 20 cm. <작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김구림, <1/24초의 의미>, 1969,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10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문명, 여자, 돈>은 실제로 <1/24초의 의미> 보다 앞서 제작된 작가의 첫 실험영화다. 8mm 필름으로 제작된 이 비디오 작품은 상경한 한 여인이 무직의 고단함과 권태를 달래고자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는 작품을 통해 당대 주요 이슈였던 도시 집중화 현상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을 다루고자 했다. 김구림 특유의 영화 스타일에 따라 작품은 대사 없이 배우의 행동과 미장센에 기반한다. 허름한 실내 공간과 무기력하게 일상을 견디는 여인, 그 위로 몽롱하게 중첩되는 입술과 지폐 등의 화면 구성은 한국 사회의 성장이 개인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의 단면을 표현한다. | |
김구림, <문명, 여자, 돈>, 필름: 1969, 영상: 1969-2016,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2분 10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김구림은 1970년대에 일본과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시간성에 천착한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1974년 제작된 <걸레>는 시간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일례다. 《제2회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스위스 로잔, 1974)에 출품되기도 했던 이 비디오 작업은 때가 묻은 탁자를 닦음으로써 흰 천이 걸레가 되고 종국에는 천이 닳아 걸레 조각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의 경과와 그 흔적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킨다. 시간과 변화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걸레>는 잔디를 태우고 새로운 잔디가 돋아나는 과정을 작품으로 제시한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1970)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현상에서 흔적으로>가 물리적으로 소요되는 시간을 온전히 작품으로 옮긴 경우라면, <걸레>는 비디오 매체의 특성을 이용해 실제 걸레가 낡아 해어지기까지 걸리는 몇 달, 몇 년의 시간을 2분 7초라는 짧은 재생 시간으로 압축하여 제시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 |
김구림, <걸레>, 1974, 단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2분 7초, 작가 소장. |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김구림은 일본에 오가며 사물과 시간의 관계성에 대해 더욱 깊이 탐구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일본은 사물의 즉자적, 상황적 존재를 중시하는 모노파(物派)의 영향권 아래 있었는데, 현상학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는 모노파 작가들은 나무, 돌, 철판, 종이, 거울 등의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김구림은 이런 환경 속에서 빗자루, 걸레, 양동이, 전구 등 기성품에 채색하거나 사포를 이용해 표면을 마모시켰다. <빗자루> 역시 갓 구입한 실물 빗자루에 유화 물감을 덧대어 오래된 사물처럼 보이도록 만든 작품이다.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보내는” 그의 방법론은 <현상에서 흔적으로>와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은 현상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실제(오브제)와 이미지의 간극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있다. | |
김구림, <빗자루>, 1973, 오브제에 채색, 130 x 90 cm. 작가 소장. |
1970년대 일본에 머물며 판화에 대한 이해를 넓힌 김구림은 일본판화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활동하며 현지에서 다수의 판화 작품을 제작했다. <걸레> 역시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 1974)에 출품되기도 했다. 백화점에서 구매한 식탁보 위에 걸레와 물의 흔적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완성한 작품으로, 그는 대량공산품인 식탁보에 유일본인 실크프린트를 찍음으로써 판화는 복제를 위한 제작방식이라는 관념을 전복하고 판화의 정의를 재고하고자 했다. 《제3회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국립현대미술관, 1981)에 본 작품과 비슷한 제작방식으로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판화의 범주에 대한 이견으로 운영위원회가 반발하면서 출품이 거부되기도 했다. | |
김구림, <걸레>, 1974, 식탁보에 실크스크린, 74 x 120 x 70 cm. 작가 소장. |
<7전시실> 7전시실에서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하며 발표한 오브제를 활용한 평면 작업과 2000년대 귀국 이후 선보인 <음과 양> 오브제 작품을 두루 선보인다.
1984년 김구림은 현대미술의 최전선인 뉴욕으로 활동 공간을 옮긴다. 마천루가 즐비한 뉴욕에서 작가는 역설적으로 ‘자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자연은 문명 발생 이전의 원형의 상태이자 서구와 대비되는 동양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작가의 작업에는 나무 모티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때 나무는 시원의 상징이자 수직적인 뉴욕의 고층빌딩에 상응하는 자연의 기표였다. 동시에 작가는 한 화면 위에 이미지와 실제 나무 오브제를 조합해 실재, 가상, 현존과 같은 철학적 물음을 궁구하고자 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철학적 탐구는 음양 사상에 대한 관심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음과 양> 연작으로 발전하게 된다.
김구림은 열정적 영화 <1/24초의 의미>(1969)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의 일상을 단편적으로 기록했다. - 뉴욕타임스
1초당 24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는 영화 구조에 기반해 제작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김구림이 직접 제작, 감독, 편집, 디자인을 맡았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1/24초의 의미>는 삼일고가도로, 세운상가, 고층빌딩, 육교, 옥외광고판, 방직공장 등 빠르게 변모하던 서울의 모습을 속도감 있게 담고 있다. 한편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의 하루는 하품과 흡연 등 일상적 행위로 채워져 있으며 그의 동작은 매우 느리게 표현된다. 영화는 1초 간격으로 바뀌는 무빙 이미지들을 조합해 통제 불가능한 현대 도시와 그 속도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현대판 룸펜의 모습을 병치시킨다. 영화 속 상관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흑백과 컬러 이미지의 조합은 현대인이 경험할 비선형적인 시간성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김구림과 6살 아래 후배 정찬승 1969년> 세계 미술사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고 국내 최초의 실험 예술영화로 일컬어지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를 촬영 중이다. 영화 1초에 24개 스틸컷들이 돌아가기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60년대의 산업화로 엄청 빠른 속도가 붙은 시대의 동시에 오는 박진감과 권태 그리고 엄격한 군부 통치가 지배하던 모순된 시대상을 포괄할 영화다. 김구림(1936~) 작가가 연출을 맡았고, 김구림 6년 후배 정찬승(1942~94) 작가가 주연을 맡았다. 두 작가는 영화를 촬영을 하면서 의견을 나누다. 서로 형 아우 하는 사이 - 사진저작권 김구림
이 작품은 1969년 7월 21일 서울 아카데미 음악실에서 처음 상영될 계획이었으나 기술상의 문제로 <무제>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로 선보였다. 김구림과 정강자가 흰 타이츠를 입고 ‘움직이는 스크린’이 되었고 그 위로 영화에서 추출한 컷으로 만든 슬라이드 이미지들이 투사되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미국의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과 영국의 테이트 모던에서 본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김구림의 한국 최초 실험영화 英 '테이트모던'에서 상영 / 2015.09.10 [뉴시스] 빅현주 기자 // “영화인을 제치고 미술인의 작품이 한국 첫 전위영화의 타이틀로 세계무대에서 공인받는 것입니다”
<이 영화 런던 테이트모던과 프랑스 릴 3000 축제에 초대받다> ‘24분의 1초의 의미’가 오는 2015년 9월 18일부터 3일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스타오디토리움극장에서 상영된다. //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로 기록돼 있는 이 작품은 프랑스 릴의 ‘릴3000페스티벌’에서 오는 10월16일부터 3일간 서울이라는 도시를 집중 조명하는 행사에도 초대됐다.
‘1/24초의 의미’ 라는 작품 제목은 영화에서 1초에 24개 스틸컷들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1960년대의 한국의 군부통치 시절, 산업화가 시작되고 엄격한 질서와 통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상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차 안에서 보는 고가도로의 난간’ ‘샤워하는 남자’, ‘행위예술가 정찬승이 하품하는 모습’, ‘피어오르는 연기’ 등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의 시간에 담아낼 수 있는 일상들이 연관성 없는 수 백 개의 장면으로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으며, 산업사회를 바쁘게 살았던 1960년대의 편린들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권태를 동반한 삶의 시간과 당대의 역사를 읽어 볼 수 있다.
'1/24초의 의미'는 1969년 처음 공개 상영 후, 원본이 유실됐던 비디오 테이프를 16mm 필름으로 복원했다. 지난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김구림의 대형 회고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품되어 당시 화제가 되었다. 아라리오갤러리의 소장품이기도 한 이 작품은 현재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상영 중이다.
《Artistic License》(갤러리 뉴욕, 1986)을 통해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을 비롯한 세계적인 미술가들과 함께 전시를 선보이는 등 뉴욕에서 고무적인 행보를 이어가던 김구림은 1989년 산타아나 현대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에 이어 개인전 초청을 받고, LA로 작업실을 옮기기로 한다. 이곳에서 그는 <음과 양> 평면, 설치 작업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7전시실의 <음과 양 91-L 13>(1991)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작가는 커다란 캔버스를 분할하거나 복수의 캔버스를 조합해 대형 화면을 만들었고 평면과 오브제를 조합하는 등의 방법으로 음양 사상과 시사적 문제를 다루어 나갔다. 이러한 작품 경향은 그의 개인전 《Ku-Lim Kim》(The Modern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산타아나, 미국, 1991)과 단체전 《세 가지 제안: 김구림, 백남준 그리고 임충섭》(LACA 갤러리, 1991) 등에서 큰 호평을 끌어냈다.
김구림 작가의 는 모든 우주의 원리를 음양론으로 보면 그래선가 그의 작품에 대한 작명을 음양론으로 거의 통일 시키다. 다만 장소와 시대별로 구분해서 제목을 붙였다. 그에게 음과 양은 하나이다. 서구의 이원론과 다르게 일원론이다 . 그에게는 시간과 공간, 있음과 없음. 음과 양 남성과 여성 실제와 가상이 결국은 하나로 만난다고 본다./경향신문 도재기 미술부 베테랑 기자, 김구림 작가에게 집중 질문
아래 사진 설명 <김구림과 6살 아래 후배 정찬승 1969년> 세계 미술사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고 국내 최초의 실험 예술영화로 일컬어지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를 촬영 중이다. 영화 1초에 24개 스틸컷들이 돌아가기에 이런 제목이 붙었다. 60년대의 산업화로 엄청 빠른 속도가 붙은 시대의 동시에 오는 박진감과 권태 그리고 엄격한 군부 통치가 지배하던 모순된 시대상을 포괄할 영화다. 김구림(1936~) 작가가 연출을 맡았고, 김구림 6년 후배 정찬승(1942~94) 작가가 주연을 맡았다. 두 작가는 영화를 촬영을 하면서 의견을 나누다. 서로 형 아우 하는 사이 - 사진저작권 김구림
<김구림 그의 동료와 후배들 중 가장 인상적인 작가는 바로 정찬승이다> 서정걸: 그런데 정찬승 선생도 사실은 이제 퍼포먼스에서 상당히 중요한 // 김구림: 내가 알 때는 정찬승이가 홍대 4학년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알게됐냐 하면 내가 <회화68그룹전>에 그런 것을 하고 하니까 호기심이 있어가지고 내가 알게 됐는데 나하고 대화를 하게 됐죠. 대화를 했더니 자기들이 홍대 교수들한테 배우지 못한 이야기를 막 하거든. 나는 이미 <타임> 지라든가 <라이프>지에서 전부 다 외국 소식을 다 알고 있었거든. 그렇게 얘기했더니 그때부터 나를 너무 좋아하게 됐다고 이 사람이. "야, 김구림한테서 배울게 너무 많구나" 하고 그래서 매일 만났어요. 만나면서 뭐 묻고 하면 내가 그렇게 해주고 그래 가지고 주위에 이제 그런 젊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몰려오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이제 졸업하고 난 다음에 4집단도 만들고 같이 하는데 이제 합류하게 된 거죠 모두. // [서정걸] 그분에 대해서..… 선생님이 그분을 많이 봤잖아요. // [김구림] 그렇죠. 늘 같이 있었죠. // [서정걸] 정찬승 선생님에 대해서 좀 평가랄지, 어떤 분이었는지 말씀해주세요 // [김구림] 그런데 사람이 참 호인이야. 사람도 호인이고 술을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참 뉴욕에도 같이 있었어요. 있었는데 가끔 자기가 작품을 해 놓으면 부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뉴욕에서도. 나보고 늘 작품을 봐 달라고 했어요. (뉴욕) 브루클린 그린포인트(Green Point)라는 데, 거기서 전시를 할 때 내가 꼭 나갔어요. 하여간 그는 미국에서도 히피와 비슷한 생활을 했어요. 남긴 흔적과 작품이 별로 없어요.
전시의 마지막은 <음과 양> 오브제 연작으로 채워진다. 200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김구림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며 2000년대 중반부터 오브제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잡지, 폐기물 등 문명의 부산물을 해체, 조합하여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제작 과정에 대해 작가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이자 “생명을 부여하고 새롭게 태어나게”하는 새로운 존재물의 탄생 과정이라 설명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시 편집한 김구림 작품을 50여년 만에 다시 상영, 김구림 10대 걸작 중 하나이다. 주제는 삶의 권태와 돈 없는 인간의 무기력] 김구림 1969년 작품 <문명, 돈, 여자> 주제 : 그 당시에 사회상을 그리기 위해서 한 젊은 여자가 취직도 하기 힘들고 그러니까 아니면 그 종삼(三)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 [질문] 서정건 / 아까 (1/24초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시기 전에 하나 또 만드신 게 있었다고 했잖아요.
[대답] 김구림 / <아! 문명, 돈, 여자>, 그건 8mm (필름) 가지고 했죠. 어떻게 됐냐 하면 그거는 여자... 출연자가 여자 한 명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주 젊은 여자인데 완전히 올 누드(all nude)로,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친 그러한 상태로 출연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디에서 하나 구했어요. 그런 여자를. 그런데 이제 이게 무슨 일이냐면 그 당시에 사회상을 그리기 위해서 한 여자가 젊은 여자가 취직도 하기 힘들고 그러니까 아니면 그 종삼(三)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종삼이라는 것은 사창가죠. 그길밖에없었다고요. 그렇게힘든 시기였었는데 이 여자가 밖에 나가면 이제 외출하면 차비도 있어야되고, 뭐 사 먹기도 해야 되고, 돈이 없으니까 방 안에만 시간을 보내고 있는거예요. 그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죠. 심심하니까 이 여자가 앉아가지고 낮잠도 잤다가 옷을 벗어봤다가 입었다가 그러니까 발가벗는 거지. 그러다가앉아가지고는 혼자 있으니까 손톱에다가 메니큐어도 해봤다가, 화장도 해봤다가 이렇게 해가지고 24시간의 여자가 행위하는 건 전부 다 거기다 담은 거죠. 담았는데 촬영을 하다가 이 여자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발가벗고 여기까지 다 보이잖아요. 발가벗고 하는 '이게 나중에 발표되면 어떻게 할까?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아이고, 작품이 끝나기 전에 어디로 달아나더니나타나지를 않는 거야 찾을 도리가 없는 거야. 그래 가지고 그걸 완성을 못 시켰어요. 그래 가지고 그게 증거가 남은 게 그 당시에 편집도 못하고 (필름) \ 쪼가리가 내가 어쩌다가 정리하다 보니까 나왔어요. 그래 가지고 그 증거가 된 거지. 그마저도 없으면 내가 그런 거 했다 해봤자 거짓말로 다 아는 거예요.그런데 이거 외에도 다른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증거 없는 것을 이야기)하면 내가 거짓말쟁이 될까 싶어서 얘기를 안 하는 거예요, 더 이상은 여러 가지 많아요. 퍼포먼스도 많고 그런데 그런 어떤 물증이 있는 것만 내가 이야기하는 거지. 그런 적이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뉴욕에서 체류할 당시 작가는 맨해튼 빌딩 숲에서 오히려 자연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품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나무와 풍경을 모티프로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작가는 주로 화면에 오브제와 이미지를 혼합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실제와 인식에 대한 질문을 이어 나갔다. 1987년에 제작된 <풍경>은 실제 나뭇가지를 덧붙인 캔버스 위에 풍경을 그려 완성한 작품이다. 의도적으로 나뭇가지를 풍경화의 일부로 채색하여 실재하는 자연물이 가상의 이미지에 흡수되는 화면을 연출했으며, 풍경화에 실체를 가진 나뭇가지의 그림자를 그려 넣음으로써 실재를 가상의 공간에 편입시켰다. 실재와 가상이라는 두 이질적인 속성의 심원한 관계성을 탐구한 <풍경>은 향후 김구림의 예술세계의 중추가 되는 음양 사상, 즉 대립적이고 이질적인 대상들이 모여 만물을 이룬다는 작가의 철학의 전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 |
김구림, <풍경>, 1987, 캔버스, 나뭇가지에 채색, 142 x 174 cm. 작가 소장. |
1989년 뉴욕에서 LA로 작업실을 옮긴 김구림은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이고 오브제를 도입하여 재현의 방식을 달리하거나 상반된 개념을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문명에 대한 통찰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김구림이 LA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제작한 <음과 양 91-L 13>은 두 개의 캔버스와 낚싯대, 물통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불타오르는 사실적인 고층빌딩 옆에 나란히 위치한 주황색 캔버스는 화재의 긴박함을 더욱 고조시킨다. 오브제인 낚싯대와 양동이는 평면이 가진 불의 이미지와 반대로 물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화재를 진압하기에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짐짓 여유롭기까지한 물의 이미지가 건물을 집어삼킬 듯한 일촉즉발의 불의 이미지와 만나 서로 부딪히며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이러한 상반된 속성의 대비는 작가가 1980년대부터 이론적 바탕으로 삼고 있는 음양 사상에서 비롯한다. 대립하는 양극이 세계의 일부로 공존하는 음양의 이치를 평면과 오브제, 불과 물의 대비를 통해 시각화하고자 했다. | |
김구림, <음과 양 91-L 13>, 1991, 캔버스 위에 아크릴, 낚싯대, 양동이, 213 x 335 cm. 개인 소장. |
김구림 지금 젊은 작가도 따라갈 수 없는 매우 감각적이면서 상슈얼한 오브제 아트를 가지고 있다. 형태를 괴상하게 변형시키는 놀라운 재주가 돋보인다. 짙은 검은 색조가 특히 독특하다. 낯설고 에로틱하고 강력하다. 리듬감 넘치는 음악적 향취도 느껴진다. 뒤샹과는 판이하게 다른 오브제아트다. 장난기와 재미 유머와 기발한 아이디어로 넘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양이나 형태가 다채롭다. 찌그러진 진주처럼 바로크 시대의 고전적 분위기도 느껴진다
김구림은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기민하게 반응해 왔다. 2000년대 이후 작가는 대중매체를 통해 순환하는 통속적인 이미지를 콜라주하거나 해체, 재조합하여 ‘현재’를 새롭게 구축하는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음과 양 4-S 368>은 플렉시 글라스 위에 출처가 다른 이미지를 콜라주함으로써 새로운 조형감각과 의미를 생성한 작업이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속 비탄에 잠긴 여성들의 이미지를 추출하고 그 주변으로 지구본과 잡지에서 가져온 상업 광고의 이미지를 배치했다. 본래의 문맥을 고려할 때, 화면의 각 구성 요소는 연대적으로도 주제적으로도 미미한 관련성을 갖는다. 그러나 한 화면에 병존함으로써 이미지들은 서로와 관계하고 새로운 시각적 효과와 더불어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창출해낸다. | |
김구림, <음과 양 4-S 368>, 2004, 혼합 재료, 20 x 15 x 5 cm. 작가 소장. |
2000년대 이후 김구림은 해골, 석가모니 등 이질적으로 보이는 도상이나 폐기물을 이용해 오브제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모든 것이 엉켜 하나의 덩어리로,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재탄생” 시키는 과정은 무질서와 부조화를 넘어선 합일에 가깝다. <음과 양 14-S 16>을 통해 알 수 있듯 작가가 창조한 서류 가방 안의 소우주는 죽음과 탄생, 생성과 소멸, 선과 악, 자연과 문명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카오스적인 공존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오브제 작업은 삶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과 함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감각적인 단상들로 무거움을 덜어낸 것이 특징이다. | |
김구림, <음과 양 14-S 16>, 2013, 혼합 매체, 59 x 34 x 20 cm. 작가 소장. |
■ 복도 공간
김구림이 최초로 실험하였던 한국의 역사적 대지미술 프로젝트이다. 1970년 4월 11일 발표 당시 제목은 <현상에서 흔적으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였다. 김구림은 한양대학교 앞 강나루 건너편 살곶이 다리 옆으로 100여 미터 경사면에 종이노끈과 못을 이용해 7개의 삼각형을 만들고 잔디에 불을 놓았다. 작가는 대보름에 논과 밭을 태우는 쥐불놀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같은 물질과 상황에서 다른 현상을 볼 수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7개의 삼각형 속 잔디는 본디 같은 물질이었으나 태우는 행위를 통해 불타버린 잔디는 푸르른 잔디와는 다른 ‘현상’으로 사람들에게 보인다. 검은 잔디는 시간이 흘러 새싹이 돋아나도 본래의 잔디와는 다른 색을 띠며 불의 ‘흔적’이 흐릿하게나마 남게 된다. 이 작품은 《과천 30년 기념 퍼포먼스: 김구림의 현상에서 흔적으로》(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공원, 2016)에서 재연된 바 있다. 푸른 삼각형과 검은 삼각형은 삶과 죽음, 음과 양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김구림의 1960년대 초반 탐구했던 실존적 문제뿐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이후 선보인 <음과 양> 연작의 방법론-자연과 문명의 대비, 이질적인 것의 병치-와도 연결된다. | |
김구림, <현상에서 흔적으로>, 1970 (2023년 인화), 대지미술. 작가 소장. |
더군다나 이번 아트 프리즈와 키아프 아트페어가 열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어째서 내 어름 작품과 가스 작품, 미술관을 묶는 작품을 못하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스도 같은 화가는 퐁피두미술관 등 세계 유명한 건물을 감싼 작품은 너무나 유명하지 않습니까? 현재 이 전시는 국립현대 전시과장이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꼭 회답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국익을 위해 노력했다고 은관문화훈장도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나 한사람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꼭 이러한 폐단은 없애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작품도 신작이다 21세 문명사회에 대한 풍자다. 속도에 치여 종이처럼 구겨진 대형 자동자의 현대인의 모습을 너무 닮았다. 작가는 무엇보다 감각이 있어야 한다 20대 젊은 작가 보다 센스 있는 색감과 디자인 감각은 여전하다. 이름만 가리면 젊은 팝아트 작가로 볼 수 밖에 없다 버려진 신발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차의 뒤 꽁무니는 완전히 찌그러져 있다.
김구림이 1970년 5월호 『공간』지 지면에 발표한 포토콜라주 <불가해의 예술> 4점 중 하나이다. 미국공보관에서 해외 잡지를 탐독하곤 했던 작가는 1969년 11월 7일 자 『라이프』지에 실린 “쓰레기통 위기(The Garbage Can Crisis)”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작품의 영감을 발견한다. 작가는 미국 도시의 쓰레기 과다 배출 문제를 다룬 해당 기사의 사진에서 고층 건물과 폐기물의 이미지를 가져와 정체불명의 한 교량 사진과 조합함으로써 폐기물로 인해 기능이 중단된 기이한 모습의 도시를 만들어냈다. 다른 포토콜라주에서 그는 “입산 금지” 푯말이 꽂혀 있는 달의 표면이나 건물 안에서 자라난 나무와 같은 실현 불가한 화면을 선보이며 무분별한 인공 환경과 문명의 병폐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 |
김구림, <불가해의 예술>, 1970(2023년 인화), 포토콜라주. 작가 소장. |
1969년 성애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피아노 위에서의 정사) 김구림의 연출로 처음 열리다. 정부의 간섭으로 1회로 끝났다. 작곡: 백남준 // 기획: 당시 강석희 교수(서울대 작곡) <백남준과 김구림>의 첫 합작 해트닝 아트다.
1969년 작곡가 강석희 전 서울대 음대교수는 서울에서 '제1회 국제현대음악제'를 주최했다. 한국에서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든 가장 아방가르드한 음악적 사건이었다. 강석희는 이 행사에 백남준을 위촉하고 그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백남준은 의뢰를 받은 지 며칠 지난 후에 노래악보를 강석희에게 보냈다. 제목은 '콤포지션' 이 작품은 1969년 세계 최초로 초연되었다. 남녀가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 드러누워서 연애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액션 뮤직이었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1967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한국판이다. 당시 명동극장은 초만원 이 공연 후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주최 측은 대처안이 의논되었고 결국 단발로 끝나고 말았다. 백남준과 강석희의 인연과 우정은 이렇게 무르익어갔다.
[전시 연관 공연] 김구림 총감독, 연출, 작곡: 2023년 9월 7일 // 서울예술대학 공연연기 학과 / 성균관 대학교 연기 예술학과 / 한양 대학교 예술무용학과 출연 // 아래 왼쪽 전자 오브제 장면이 완벽한 춤사위를 연출하다 / 오른쪽 '피아노 위에서의 정사' 만큼 스릴 넘칠 것 같다 // '프리즈 아트페어'보다 여기가 훨씬 더 재미있겠다
관련기사(한국대학신문) 하나 // 연기전공 학생, ‘실험미술 선구자’ 김구림 전시 전에서 퍼포먼스
“한국 실험미술 역사, 융·복합예술에 대한 이해 넓히는 계기” // 서울예대 학생들은 이번 공연에서 김구림 작가 1969년에 쓴 시나리오, 안무, 작곡을 한 ‘무제’(무용), ‘대합창’(음악), ‘모르는 사람들’(연극)을 각 15분간 선보였다 // 김지영 서울예대 연기전공 교수는 “50년 전의 작품을 복구해 2023년 관객에게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뜻 깊은 작업에 학생들이 참여해 매우 기쁘다”며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의 역량뿐만 아니라 한국 실험미술의 역사와 융복합예술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서울문화투데이) 둘 김구림은 1969년에 이미 신의 죽음(니체가 말한)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미셸 푸코가 말한)을 노래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 태양의 죽음처럼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다시 꿈틀거리며 하나씩 일어나서 다시 움직이고 그러다가 또 죽는다. 그의 죽음은 죽음만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하면서도 또 다시 이어지는 죽음의 행진 속에 죽음과 부활 음과 양의 끝이 없는 반복과 순환 속에 놓여 있음을 고백한다. 김구림 그의 연극 <모르는 사람들(1969년 작 2023년 재연출)> 무대에 올라 이 세상에서 고립된 자신의 절대 고독을 절규하듯 이렇게 조용히 외친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작가 소개 김구림(1936~) [학력]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 미국(수학) [주요 수상] 2017 은관문화훈장 수훈 / 2014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 / 2006 이인성 미술상 수상 / 1983 대한민국 무용제 무대미술상 [저서] 2014 『서양판화가 100인과 판화감상』(파주: 미진사) 2007 『판화 Collection』(서울: 서문당)
김구림(1936년생)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실험미술의 선구자로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기존 가치와 관습에 대한 부정의 정신을 견지한 그는 회화와 판화, 조각, 설치미술을 비롯하여, 퍼포먼스, 대지미술, 비디오아트, 메일 아트에 이르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지속해 왔으며, 실험연극, 실험영화, 음악, 무용에도 종횡무진 개입해 왔다. 1959년 대구 공회당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화단에 두각을 나타낸 김구림은 1969년에는 한국 최초의 메일 아트라 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선보였고, 한국실험영화사에서 주요한 <1/24초의 의미>를 제작하였다. 또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주요 창립 멤버였으며, AG 활동을 통해 개념과 과정을 강조하는 전위적인 미술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70년에는 다양한 분야의 젊은 예술인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전위예술집단인 제4집단을 결성하여 미술, 연극, 영화, 패션, 음악 등을 종합한 총체 예술을 추구하였다. 1970년대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판화와 비디오아트를 본격적으로 실험하였고, 1980년대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작업의 변화를 추구하며 <음과 양> 시리즈를 시작하였고, 2000년대 이후에는 동일 제목의 오브제 작업 등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주요 전시 및 퍼포먼스로는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경기도 미술관, 2010), 《SeMa Green 김구림展: 잘 알지도 못하면서》(서울시립미술관, 2013),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테이트 모던, 2012), 《Postwar: Art Between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1945-1965》(하우스데어 쿤스트, 2016),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2023), 《Victor Wang: Curators’ Series 11 - Institute of Asian Performance Art》(Roberts Institute of Art, 런던, 2018) <마음속의 노래, 시속의 울림>(실험 음악 연주, 런던, 1969년 작곡/ 2019년 재연) 등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영상자료원, 미국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영국 테이트 모던 등 30여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주요 개인전 및 단체전, 퍼포먼스]
2023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뉴욕, 미국 / 2022 《매체에 재조명, 동아시아 영상 예술의 부상》, 베이징민생현대미술관, 베이징, 중국 / 2019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한국 비디오 아트 7090: 시간 이미지 장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 일본; 싱가포르국립미술관, 싱가포르 / 2018 《제64회 오버하우젠 국제 단편 영화제》, 오버하우젠, 독일 ‘Performance Histories’, SOAS University of London 특강, 런던, 영국 / 2016 과천 30년 기념 퍼포먼스 <현상에서 흔적으로-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 <도>(1970) 퍼포먼스 재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Postwar: Art Between the Pacific and the Atlantic, 1945-1965》, 하우스데어 쿤스트, 뮌헨, 독일 / 2015 《거대한 초생달: 1960년대 예술과 동요-일본, 한국, 타이완》, 모리미술관, 도쿄, 일본 ‘Embeddedness: Artist Films and Videos from Korea 1960s to Now’, 테이트 모던, 런던, 영국 / 2013 《SeMA Green 김구림展: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 2012 《A Bigger Splash: Painting after Performance》, 테이트 모던, 런던, 영국 / 2010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 경기도미술관, 안산 / 2008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페스티벌: NOW JUMP!》, 백남준아트센터, 용인 《퍼포밍 더 시티: 60, 70년대 도시공간의 예술행동주의》, Lothringer13, 뮌헨, 독일; Palazzo delle Art Napoli, 나폴리, 이탈리아; Centro Cultural São Paulo, 상파울로, 브라질; Institut National d'histoire de l'art, 파리, 프랑스 /
2007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0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 2000 《김구림: 현존과 흔적》, 한국현대미술기획초대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서울 / 1992 《Discontinuities: Nam June Paik and Kulim Kim》, 찰스위처치갤러리, 헌팅턴비치, 미국 / 1991 《Ku-Lim Kim》, The Modern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산타아나, 미국 《The 3 Suggestions: Kulim Kim, Nam June Paik and Choong Sup Lim》, LACA갤러리, LA, 미국 / 1988 《제1회 국제 소형 판화 트리엔날레》, 오베르뉴, 프랑스 / 1986 《Artistic License: Bruce Nauman & 7 Artists》, 갤러리뉴욕, 뉴욕, 미국 / 1984 개인전, 아마노갤러리, 오사카, 일본 / 1981 퍼포먼스 <손톱과 시> (김구림, 조정권), 공간사랑, 서울 창작무용 <이상의 날개> 연출, 안무, 의상, 무대미술, 세종문화회관, 서울 ‘구림판화공방’ 개설, 신영동, 서울 《Korean Drawing Now》, 브루클린미술관, 뉴욕, 미국 《제3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서울 / 1978 판토마임 <돼지들의 산책>, 극단 에저또, 공간사랑 소극장, 서울 / 1977 대한민국 연극제 <참새와 기관차> 참여, 극단 에저또, 무대미술, 세실극장, 서울 / 1976 《제5회 International Open Encounter on Video》, 앤트워프, 벨기에 / 1975 《제7회 꺄니으-슈흐-메흐 국제 회화제》, 꺄니으-슈흐-메흐, 프랑스 《제4회 국제오픈 비디오 예술제 International Open Encounter on Video》,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Rencontre International Ouverte de Video》, Espace Cardin 극장, 파리, 프랑스 / 1974 《제2회 국제 임팩트 아트 비디오-74》, 로잔, 스위스 《제9회 도쿄국제판화비엔날레》, 도쿄국립근대미술관, 도쿄, 일본 / 1973 《제12회 상파울로비엔날레》, 상파울로, 브라질 개인전, 시로타 화랑, 도쿄, 일본 / 1972 《제3회 AG전: 탈·관념의 세계》, 경복궁 현대미술관, 서울 /
1971 《제2회 AG전: 현실과 실현》, 경복궁 현대미술관, 서울 《제7회 파리비엔날레》, 파리시립현대미술관, 파리, 프랑스 /
1970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 <피아노 위의 정사> 연출, 국립극장, 서울 제4집단 결성식, 을지로 소림다방, 서울 <도> 퍼포먼스, 경복궁 현대미술관, 서울 《제1회 AG전: 확장과 환원의 역학》, 국립중앙공보관, 서울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퍼포먼스, 한양대학교 앞 살곶이 다리 둑방, 서울
1969 실험영화 8mm <문명, 여자, 돈>, 제작. 감독. 연출 실험영화 16mm <1/24초의 의미>, 제작, 감독, 연출 퍼포먼스 <바디 페인팅> 발표, TBC 방영, 서울 한국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 발표, 서울 전역 《한국청년작가 11인전》, 솔리드아리다드갤러리, 마닐라, 필리핀 한국 최초의 일레트릭 아트 <공간구조> 발표 오태석의 <웨딩드레스> 연출, 시츄아숑 극단 앵글 562, 대구문화회관, 대구
1968 《회화68》, 신문회관, 서울 (<공간구조 A>, <공간구조 B> 발표) / 1967 개인전, 부산공보관화랑, 부산, / 1965 《신작가 협회 창립전》, 신문회관, 서울, 1964 <태양의 죽음> 시리즈 발표 /
1963 《앙그리 창립전》, 경북 공보관화랑, 대구//김구림 대구에서 1958(1959?)년 데뷔 전시회(대구 미국공보관 내 공회당 화랑에서)를 열고 화가로 활동하는데 이중섭 전시(1958년 대구에 있는 미국 공보관에서 전시)에 가서 도와드리기도 하고 했지만 그보다 그는 당시 미술인들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으로 갈라져 대립이 있었고 홍대파 서울대파 마찬가지 그래서 홍대파 사람 서울대 사람 양 진영작가들 만나 화합할 수 있고 협력할 수 있는 제3의 미술단체를 김구림 주도해서 만들다 // 처음에는 영어로 앵그리(Angry)로 결정했다고 다시 프랑스어 식 발음으로 <앙그리>로 바꿨다고 한다. 당시는 프랑스가 미술의 나라이기에 // 이 단체에 홍대 나온 박창용 작가(김구림보다 3살 위)가 첫 회장으로 선출되었다고 2-3대 회장은 김구림이 맡다//1963년 앙그리 창립전 열리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 단체 분쟁이 이어져 김구림은 대구에서 활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에 올라가 '하인두' '김상대' '이종학'과 함께 활동하다가 김구림을 생존 문제로 다시 대구로 내려가고 거기 섬유회사 직장을 가지고 되었다 / 1962 개인전, U.S.I.S 화랑, 대구, 1959 제1회 개인전, 대구공회당화랑, 대구
<무용평론가이자 백남준 연구가인 김남수선생과 김구림 작가 인터뷰 10년 전인 2013년. 수준 있는 대담이 오갔다 // 전체 내용은 아래 댓글 칸에 있다 // 김구림 작가 사모님은 전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의 미술대학 동기다. 같이 공부했다고 한다>
김남수 : 제가 보니, 선생님 예술세계에 대한 초점이 너무 초기에만 맞춰져 있어요. 선생님께서 요즘 그리시는 음양 시리즈에 대해 어느 미술 평론가가 적극적인 해석으로 ‘이것은 암각화다’라는 해석을 해 놓았던데요. 저는 그 해석이 너무 좋아서 작품을 봤는데, 흥미진진하더라고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제 4집단> 때 ‘무체(無體)’라는 말을 쓰셨잖아요. 그것에 대해 말씀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구림 : 이상한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꽉 차있는 것은 바로 없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음과 양에 있어서 하늘과 땅을 전연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늘만 존재할 수도 없고 땅만 존재할 수도 없듯이 그것은 바로 하나다. 이런 의미로서 ‘무체’에 대해 생각했어요.
김남수 : 기가 막힌 말이네요. ‘체(體)’라는 것은 사실 사람의 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있다’라고 하는 것이 너무 명백한데, 거기 앞에 ‘무(無)’자를 갖다 붙이셨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무체가 노자의 세계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저는 집에 돌아가면서 계속 무체라는 말의 오묘함에 대해 생각을 했어요. 함이 없다, 무위, 쓸모가 없다. 무용, 이런 것은 가능한데 ‘몸이 없다는 것’은 기가 막힌 발상의 전환이죠. 노자도 깜짝 놀랐을 것 같아요. 굉장히 레디컬한 발상이시거든요.
김구림 : 발상은 노자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좀 다른 식으로 해석했죠. 내가 한때 노자에 빠진 적도 있고.
김남수 : 노자의 도덕경에 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잖아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든가. 제일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말이지요. 젊으셨을 때 노트해 두신 도큐먼트 같은 것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김구림 : 그게 전부 없어졌어요. 나는 이혼할 성격의 사람이 못 되는데 쫓겨났습니다. 전 처가 자료를 불살라버렸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어요. 두 번째 미국 간 건 그렇게 해서 떠나게 된 거에요. 그 후로 내가 집에 못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안무노트나 기록이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미국에 와서 혼자 살겠다 결심을 했죠.
그러다 지금 아내와 만나게 된 동기가 참 신기해요. 내가 절대 결혼은 안 하려 했거든요. 우연히 지금의 아내를 한인타운에서 다른 한국 화가들하고 같이 만났어요. 제게 명함을 주더라고요. 주소를 보니 샌디에고와 LA중간 정도에 직장이 있었어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샌디에고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LA로 돌아가는데 너무 피곤한 거에요. 쉬다가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명함이 보여요. 연락을 했더니 같이 저녁이나 들자고 하길래 만나서 저녁을 먹었죠. 그러고서 LA로 돌아간다 말 했더니 폭동이 벌어졌다고 하는 거에요. 믿기지 않아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봤죠. 아내 집은 가까운 아파트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LA가 불바다가 된 거에요. 그래서 근처 모텔이나 호텔을 찾아보니 그것도 없더라고요. 난감하게 됐죠. 내가 소파에서 잘 테니 선생님은 침대에서 주무세요. 이렇게 된 거지. 나중에 임신을 한 걸 알았어요. 10개월이 다 되어갈 때 내가 전화를 해서 물었더니 병원하고 날짜를 알려주더라고. 달력에 적어놓고 나중에 병원을 찾아갔어요. 그때 마침 아내가 애를 안고 있었어요. 그 애랑 눈이 마주치는데 마음이 저릿한 거야. 내가 이렇게 지내면 죄인이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죄인이기 싫다, 나랑 같이 살자. 이렇게 아내를 만나서 지금까지 살게 된 거야. 이건 완전히 운명이야.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이런 말까지 합니다 하하. 내 인생이 이렇습니다.
김남수 : 여성은 생산하고 남자는 창작한다는 얘기 있잖아요. 두 분이 작품활동처럼 태어났네요.
김구림 : 맞습니다. 그때 전람회를 하고 나니 여기저기 돈이 들어와서 굉장히 호화로운 생활을 했었어요. 그랬는데 결혼하고 애가 크니 차부터 팔아 없앴죠. 그때부터 고생길로 들어선 거야. 나는 아무리 그래도 책임은 지는 성격이에요.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오니 팔천 만원 있더라고. 이 정도면 뭔가 하겠다 하고 왔더니 전세도 못 얻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마누라가 조그마한 2층 집을 보여주면서 어떠냐고 묻는 거에요. 영어나 미술학원을 하겠다고 하길래 당장 그만두라고 했죠. 내가 노동판에 나가도 너는 먹여 살릴 거라고. 그래서 아내는 지금까지 애들 돌보는 일만 했어요. 오래 살다 보니 아내는 내 성격을 알게 된 거지, 가정에 대해서는 철저하구나.
김남수 : 의외인데요? 일본의 한 작가가 ‘현대의 진정한 혁명은 가정을 갖는 것이다’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물 위에 기름이 뜬 것처럼 뭔가 그러하네요. 선생님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김구림 : 나는 계획이라는 게 없어요. 살다 보면 계획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겨요. 이 시대 이런 작품을 해야겠다는 것, 이게 절실하겠다. 이러면 거기서 영감을 받는 것이지, 계획을 세워 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김남수 : 그래도 이번 회고전이 선생님께 예술가로서 중요한 지점은 되지 않습니까? 젊은 작가들이 김구림 선생님이 갖고 있는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체로서 선생님을 마주하게 된 것 아닙니까. 가까운 양아치작가도 많이 하고 다니는 이야기가 ‘전기 전자 없는 미디어 아트’인데요, 선생님의 예전 작업을 보고 ‘김구림 선생님이 다 하셨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동시대 작가들에게는 시기질투가 있었을지언정 한 두 세대 이후의 작가들에게는 선생님이 또 다른 이정표가 될 수 있거든요. 젊은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김구림 : 이번 전시를 통해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작품을 내 보이게 된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젊은 작가들에게 할 말이라기 보다는 내가 내 작품도 있고 하니 아트페어는 한번씩 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학교 졸업하자마자 옥션에서 뜨고 싶어하고 작품을 파는 데 집중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작품에 역력히 드러나요. 좀 진지할 수는 없나? 그래야 좀 더 무게 있고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김남수 : 선생님께서는 60-70년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셨잖아요. 그때 비교하면 젊은 작가들의 패기가 부족하지 않나요?
김구림 : 그렇죠. 나는 재료에 구애를 받지 않아요. 진정한 작가는 종이가 있으면 이것을 찢어서도 작품을 만들 수 있지. 그게 진정한 작가입니다. 아까 돈이 없어 작품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역사에 남기고 싶은 큰 작품을 이야기 해요. 별의별 움직임도 있고 이런 걸 이야기 하는 것이지. 내가 집에 있는 작품을 몇몇 사람한테 보여준 적이 있어요. 큰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면 언제 이런 것들을 전부 꺼내어 보여줄 거에요. 이제껏 이야기 했듯이 재료에 구애되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낸 작품들이에요.
김남수 : 너무 많이 보여주진 마세요. 저는 진짜 깜짝 놀라고 싶거든요. 저는 ≪선데이 서울≫이나 주간 잡지에 선생님 어록들이 실려 있는 게 너무 재미있습니다. 명동에 <제 4집단>이 가서 퍼포먼스를 하는데, 기사 제목이 ‘인체를 그려놓고 무체라니!’에요. 인체가 출현하는 데 어찌 이에 대해 무체라고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논평을 하더라고요. 저는 사실 한국 사회가 선생님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른다거나 엉뚱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늘 너무 논리가 분명한 내용만 말씀 해주셨어요. 즐거웠습니다.
[출처] [김남수가 간다①] 김구림 / 김남수 | 작성자 똑똑
전시 기간 중 이건용의 <달팽이 걸음>(10.13-14.), 성능경의 <신문읽기>(11.17-18.), 김구림의 <생성에서 소멸로>(12.1-2.) 퍼포먼스가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는 서울과 뉴욕에 이어 2024년 2월 11일부터는 LA 해머미술관을 순회할 예정이다. 일반인 전화문의: 02-3701-950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대표번호)
<2023년 8월 24일 김구림 개막전에서> 김구림 작가의 따님 Jess Beige KIM은 미술 전공(대학은 골드스미스 퍼포먼스 아트 전공 그리고 런던 왕립예술학교 대학원 졸업)인데 요즘 음악에 몰입한다고 동양악기와 서양악기를 동시에 연주하는 부친의 총체아티스트 기질을 그대로 받았군요. 전위음악 작곡도 한다고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직무대리 박종달)은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관장 직무대리 나오미 벡위스)이 공동기획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전이 9월 1일(금)부터 내년 1월 7일(일)까지(현지 시각)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이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최된다.
<아래 김구림 구겐하임 광목으로 묶기 퍼포먼스 드로잉 작품 // 과연 이 작품이 성사가 될까? 이 작품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성사시켜려 하다가 좌절되다 // 미술관을 광목으로 '묶기 퍼포먼스'는 이제 미술관도 시대 정신에 맞게 자신을 죽이고(갱신하고) 새롭고 거둡나 진정한 현대미술관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온 것이다 // 김구림 왈 "구겐하임에 가보면 미술관이 너무 후지다(Terrible old style)며 이제는 뭔가 대 변화가 와야 한다"고 // 지난번 서울관 기자간담회(8월 24일)에서 밝히다>
김구림의 1970년 작품 전 세계미술관 광목으로 묶기 퍼포먼스, 앞으로 계속 추진해야 할 것 같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미술관도 생명체처럼 항상 죽음과 부활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혁신을 해야 살아남는다. // 이번에 서울관 김구림 실험미술의 선구자 전시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예술적 실험 정신을 발휘하지 못하다. 어처구니없게도 오히려 방해를 하다.
<이 전시에 대한 뉴욕타임스 기사 중 전반부>
Ephemeral but Unforgettable: Korean Experimental Art Is Having a Star Turn
A Guggenheim exhibition shines a light on a remarkable but lesser-known art scene in South Korea that thrived in the tumult of the 1960s and 1970s.//Headshots of a young man in three stages of biting an apple, with the fruit outlined by a black marker pen.
Sung Neung Kyung’s “Apple,” 1976 (detail), in which the artist photographed himself eating the fruit and traced its changing shape with a marker pen. It is part of the exhibition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at the Guggenheim Museum.Credit...via Sung Neung Kyung and Daejeon Museum of Art, photo Jang Junho By Andrew Russeth Reporting from Seoul // Published Aug. 31, 2023 Updated Sept. 1, 2023, 1:51 p.m. ET
The 1960s and 1970s were tumultuous in South Korea, with a military dictatorship pushing breakneck economic growth and suppressing civil rights. In the midst of this upheaval, young artists pursued radical projects.
Rejecting the expressive abstract painting in vogue in the 1950s, they embraced performance, video and photography, and favored unusual materials (neon, barbed wire, cigarettes). They had been born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lived through the Korean War; some looked to the past, taking inspiration from Korean folk forms. They forged collectives, holding shows, translating art texts from abroad (travel was restricted) and staging performances along rivers and in theaters. Kim Kulim recorded snippets of daily life in a fast-changing Seoul in his frenetic film “The Meaning of 1/24 Second” (1969). Their genre-defying efforts have come to be categorized as “silheom misul,” experimental art.
<뉴욕에서 한국 실험미술의 높은 수준을 과시할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셈이다> 이번 구겐하임 전시에서 김구림의 미술관 광목으로 묶기 설치 작품이 성사가 되었다면 정말 한국미술의 위상이 높아졌을 텐데 서울처럼 결국 이뤄지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미국미술도 살고 한국미술도 살고 한국실험미술가들도 더 큰 명성을 얻었을 텐데 아쉽다. 이건 무기력한 한국 문화 외교의 커다란 프로젝트 실패다. 국내에서 이런 묶기 설치 작품을 못했으니 뉴욕에서 할 리가 없다.
이번 전시는 성공적인 서울 개최에 이어, 연간 65만여 명이(2022년 기준) 방문하는 구겐하임미술관을 순회하는 것으로 한국의 실험미술과 그 주역들이 글로벌 미술계에 최초로 소개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이는 한국미술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더욱 증폭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전시가 뉴욕 구겐하임이라는 장소의 변경으로 작품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디스플레이가 중요함을 엿볼 수 있다. 장소의 공간적 특징을 살려 작품을 제대로 전시하면 작가의 예술적 의도가 더 잘 보일 수 있다. 이번 한국실험미술만이 미국 공공미술관에서 처음 열렸다. 그 이유는 미술사에서 이런 실험미술이 경쟁력이 있고, 아주 가치가 높다는 소리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에게 엄청난 변화와 성장의 시기였다. 주요 개혁은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가 주도했다. 산업 및 기술 개발, 수출 및 도시화에 대한 전례 없는 투자로 이어졌다.
9월에는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 실험미술) 을 주제로 한 미국에서 첫 전시다 . 한국의 실험미술, 1960년대~1970년대 (2023년 9월 1일~2024년 1월 7일)는 구겐하임 아시아 미술부 큐레이터 안휘경과 강수정 국립 현대미술관(MMCA) 수석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했다.
한국의 실험미술이 꽃 피웠던 1960년대 냉전을 배경으로 미국은 68혁명, 반전 평화운동, 페미니즘 등 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하였고, 한국은 압축적 근대화와 산업화의 급속한 사회 변화와 ‘인식의 전환’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전시는 이 시기 한국의 청년작가들이 서구의 언어를 대안 언어로 받아들여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당대 한국미술의 면모를 새롭게 한 점을 중시하였다. 또 이들이 예술과 사회의 소통을 주장, 보수화된 기성세대의 형식주의에 반발하며, 기존의 회화, 조각의 영역을 벗어나 입체미술, 해프닝, 이벤트, 영화 등 다양한 매체들을 전위적‘실험미술’의 이름으로 포괄하며 역동적인 사회 현상을 반영한 점, 파리비엔날레 등 국제 흐름에 동참하여 마침내 세계 미술계의 일원으로 그 실천의 영역을 확장한 점등을 주목하였다. 특히, 구겐하임미술관은 재료와 과정에 대한 한국 작가 공통의 급진적인 접근 방식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아방가르드 실천 중 하나를 만들어 내었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구겐하임미술관에서도 MMCA서울 전시와 동일한 규모와 내용으로 총 29명 작가의 작품 약 80여 점, 자료 30여 점이 타워갤러리의 3개 층인 2, 4, 5 및 탄하우저(Thannhauser) 전시장에서 선보인다.
다양한 글로벌 관람객들에게 한국 실험미술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작품의 이미지들을 통한 서사구조를 만들어 직관적인 감상이 되도록 하였다. 동시에 전시 주제 및 그룹, 연표 등의 설명문들을 제공하여 보다 풍부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아카이브도 소실된 작품들과 작가들의 활동을 사진 자료로 구성하여 이 시대를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전문가들을 위해서는 국/영문 도록에 한국 실험미술의 담론형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자들의 에세이, 당대 작가 글, 비평글 등을 충실히 수록했다. MMCA 전시에서 국문 도록이 배포된 것과 같이 뉴욕 전시 개막에 맞추어 영문 도록이 전 세계에 배포되어 한국 실험미술이 세계 전위미술사의 층위를 다양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역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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