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다큐영화] 그의 예술혼, 화면에 '팔만대장경'처럼 펼쳐지다 백남준 최고의 '영상 교과서'
시간은 큰 사기이고 공간은 여백으로 침투하는 연금술이다. 비디오는 예술의 민주주의를 자극하는
기존의 세상 가치를 전복시키는 반문화 매체이기에 역설적으로 막힌 민주주의 소통을 확 뚫어 준다. 내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나를 만든다. 관객이 예술가다. feedback 이건 댓글 상징, 쌍방 소통을 말하다
[이번 백남준 다큐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기 시작] 백남준 작품에는 위대한 매력과 유머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무게가 있는 주제에 대한 그의 통찰과 재능, 그리고 미래를 향한 예측이 토대가 되어 있다. - 스크린 인터내셔널 There’s a great deal of charm and humour to Paik’s work, and to this film, but it’s anchored by his perceptiveness and ability to contemplate weighty themes - and, yes, to anticipate the future. / Amanda Kim(영화감독) makes excellent use of what footage she has uncovered to frame Paik’s life and recover a time whose effects still reverberate today 그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백남준 예술 세계를 복구하다 영화 메인 목소리(Narration) 출연: Steven Yuen(아래)이 맡았다.
이번에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 관장 백남준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시사회를 열면서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와 이에 대한 감격을 감사와 환영의 말로 대신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눈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소름 끼치는 전율과 감격의 파도가 몰려왔다. 이 영화가 빨리 대중에게 공개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가 잘 모르는 백남준 생의 끊어진 부분 부분에 그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생겼다. 백남준의 지난한 삶과 불굴의 예술혼이 화면에 팔만대장경처럼 유감없이 펼쳐졌다. 그 난관이 많은 생애 속에서도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다만 미국에서 만든 영화라 그의 예술의 핵심 중 하나인 샤머니즘에 대한 인류학적 관점이 반영되지 않는 점은 아쉬웠다
울산시립미술관(관장 서진석)은 미술관이 소장한 백남준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의 시사회를 3월 29일(수) 5시부터 7시까지 이화여대 예술영화 상영관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었다. [1] 백남준 다큐 영화감독 : 아만다 킴(Amanda Kim) [2] 제작자(Producer): 전 구겐하임미술관 이사장인 '제니퍼 스톡만(Jennifer Stockman)'과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로(David Koh)' [3] 나레이션: 영화 <미나리>, <버닝>의 주연을 맡은 배우 '스티븐 연(Steven Yeun)'이 참여, [4] 총 상영시간: 107분
울산시립미술관의 신(新) 소장품이 된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는 아만다 킴(Amanda Kim)이 감독을 맡았다. 영화 제작에는 전 구겐하임미술관 이사장인 '제니퍼 스톡만(Jennifer tockman)'과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로(David Koh)'가 메인 프로듀싱을 맡았다.
데이비드 코는 쿠사마 야오이(Kusama Yayoi),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등 현대미술 작가들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내레이션에는 영화 <미나리>, <버닝>의 주연을 맡은 배우 스티븐 연(Steven Yeun)이 참여하여 작품의 대중성을 높였다. 작품의 총 상영시간은 107분이다.
세계적으로 획기적인 예술가인 백남준의 다큐 영화 Moon Is the Oldest TV가 <Amanda Kim> 감독의 새로운 관점으로 이번에 소개되었다 // 1984년 새해 첫날, 백남준 작가는 뉴욕과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공영 TV를 통해 생방송으로 <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방송했다.그의 소설 1984 1984년 조지 오웰의 암울한 텔레비전 묘사에 대한 반응으로 , 백남준의 거친 방송은 팝 뮤직 비디오, 경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 비디오 아트, 댄스를 특징으로 하며 다양한 아티스트의 라이브 및 녹화된 기여를 성사되다. 백남준은 그것들 중 많은 것을 방송하면서 전자적으로 조작했다. 로리 앤더슨 , 피터 가브리엘, 앨런 긴즈버그 , 존 케이지,샬럿 무어먼이 모두 참가했고 머스 커닝햄비디오 특수 효과를 통해 "자신과 함께 춤을". 저자 George Plimpton과 다른 사람들은 뉴스 캐스터로 활동하면서 끊임없는 중단에 시달린 자유분방 프로그램을 주재했습니다. 이 다국적 사치품은 전 세계적으로 2,500만 명 이상의 시청자에게 도달했으며 주류 텔레비전을 백남준이 "위성 예술"이라고 부른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전 세계적인 상호 연결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세계를 포용했다.
상영될 작품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고(故) 백남준의 일생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로, 그의 작품 활동과 미술인과의 교류를 다루고 있다. 고인이 된 백남준을 추억하는 문화·예술계의 주요 인사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영화에는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받은 존 케이지(John Cage)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연주 퍼포먼스로 유명한 샬롯 무어만(Charlotte Moorman), 그 밖에도 오노 요코(Ono Yoko), 알렌 긴즈버그(Allen Ginsberg), 앤디 워홀(Andy Warhol),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등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
이번 행사는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의 후원으로, 백남준문화재단 이 사진, 미술 기관 및 학계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울산시립미술관 소장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시사회 이후 4월 6일부터 8일까지 울산시립미술관에서도 스크리닝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할 예정이다.
울산시립미술관 서진석 관장은 "울산시립미술관은 백남준 다큐멘터리 영화의 소장으로 완벽한 백남준 컬렉션을 구성했다고 자부한다. 많은 관심과 호응 부탁드린다"라고 언급했다.
[감상평] 백남준 다큐 영화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감독인 '아만다 킴(Amenda KIM)' 영화 시사회에 앞서 영상으로 인사말을 하다 이 다큐 영화를 찍고 편집하고 연출하기 위해서 수백 명의 영환 관계자가 이 동원된 것 같다. 미국에서 제작된 연고로 백남준 미학의 핵심이 백남준의 인류학적인 접근이 몽골코드와 샤머니즘은 언급하지 않는 점은 아쉽다.
영화를 보면서 기억나는 생각들 1) 예술가는 큰 사기라 할 수 있는 시간을 창조적 창작물로 바꾸는 사기꾼일 수 있다 2) 베를린 장벽 무너지고 한반도 분단에 저항 3) 비디오를 쌍방형 민주매체 사회전복매체로 보다 4) 그의 예술을 전자 연금술 5) 백남준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교과서 6) 백남준 1984년 귀국을 꺼린 것은 그가 맑시스트라는 점도 있었다 7) 1965년 민주주의가 말대꾸하는 것이라는 언급을 하면서 댓글(talk back)을 창안하다. 8) 백남준 첫 전시에 관객이 바로 예술가라고 선언하다. 참여를 촉구하다. 9) 내가 아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트가 나를 만든다는 말을 했다
10) 예술신 뉴욕에 입성하 이런 제목은 인상적이다 11) 음악과 섹스를 결합하는 예술을 하고 싶다 이런 내용도 나온다. 12) 그는 예술을 정보생산을 위한 침투와 침략으로 보다 13) 백남준이 1967년 샬럿 무어먼과 섹스오페라 공경은 하다가 미국 경찰에 조사를 받게 되는 데 이것이 한국언론에도 보도되어 한국가족들이 많은 걱정을 하다. 가문에 욕되게 했다고 불편한 심기도 드러내아 14) 백남준에게 back 중요하다 댓글(talk back)이나이나 feed back 이런 개념을 민주주의 개념을 쌍방소통을 뜻한 등등 반응과 전반적 참여와 무한대의 자유와 전복과 저항 정신을 중시하다
<백남준의 연대기는 바로 동서 지구촌 문화예술의 혁명과 과학발전과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남준이라는 한 개인을 통해서 전 세계사를 조명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사생활의 역사관(아날로그 학파)'라고도 한다> 백남준의 다큐영화를 보면 한국의 해방전후사, 유럽 50년대 문화변동사 독일 60년대 68 전후의 혁명사 그리고 미국의 60~70년대 흑인민권운동, 반문화(히피)와 반전평화운동과 비틀스의 등장 팝아트 앤디 워홀과 낙서화 바스키아 등장하고 그리고 TV 대중 매체가 나오면서 격변하는 엔터테인먼트 발전사 그리고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현상을 읽을 수 있다.
아래는 완전히 폐허가 된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한국은 제로 그라우드에서 다시 시작한 나라라고 사진 한 장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아래 자막처럼 "한국은 새로운 모든 것에 대한 갈증이 강력했다" 이런 시대에 백남준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전쟁세대(태평앙 전쟁,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오일 머니 관련된 중동 전쟁 등등)로 그가 평생 반전을 주제로 한 예술을 한 이유다.
이번 다큐에서는 백남준의 식민시기와 전후 해방사와 한국전쟁 시기의 내용이 많이 다뤄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사상의 해방공간은 딱 3년 정도였다. 지금도 우리는 그런 해방공간을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다> 1945년 백남준, 수송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경기 중학교(6년제)에 입학한다.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었다. 그 당시 서울은 사상의 해방공간이었다. 백남준은 바쿠닌, 부하린, 프루동, 맑스,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 페이비언 사회주의 등 거의 환상에 가까운 선택의 목록이 넘쳤던 시기였다. 경기중학에 들어가 나름대로 독서회, 공산당 활동 등으로 분주했다고 회고했다. 1948년 8월 미국 정부의 지지로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산주의 활동이 완전히 불법화되었다. 중학교 동창인 서재웅은 극우 성향의 ‘레드 헌터(Red Hunter)’ 상급학생들로부터 백남준이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 얼굴에 피가 낭자했던 일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백남준 학교 가기를 싫어했고 학교를 쉬었던 적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1949년 ‘레드 헌터’ 사건 이후 백남준은 부친의 통역원 자격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홍콩으로 떠났는데, 곧장 귀국하지 않고 다음 해 5월까지 영국계 고등학교, 로이덴 스쿨(Royden School)에서 공부했다. 백낙승은 이승만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막내아들이 염려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10살 때부터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교양을 쌓을 수 있었나> 1940년에 한국어로 발행되는 모든 일간지가 폐간되고, 1941년에서 42년 사이에는 전쟁으로 종이가 부족해지면서 읽을거리가 사라져갔다. 이 시기에 백남준은 자신의 집 다락에서 큰 누나 백희덕(白喜得)이 결혼 전에 읽던 책들을 발견한다.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지적 호기심이 커져가던 백남준에게 그것은 “먼지 더미에서 발견한 보물”이자 “전쟁이라는 문화의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인 셈이었다. 1937년과 그 이전에 발간된 영화잡지였는데, 미국과 유럽 영화배우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폰 슈테른베르크 감독의 모로코와 쥘리앵 뒤비비에의 무도회의 수첩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진, 디아나 더빈과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의 오케스트라 소녀, 독일영화 미완성 교향곡, 레니 리펜수탈의 의지의 승리를 언급하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정도라고 회고했다. 당시 문화적으로 받았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 백남준,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26쪽
그리고 독일시대 초기 내용이 많이 나온다 백남준 쇤베르크(무조음악)와 존 케이지(무작곡)마저도 물리치다. 백남준 독일 대학에 가서 2명의 그곳에서 명성 높은 지도교수도 물리치다. 백남준 1961년 서양에는 없는 전대미문의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 작곡하다. 지금도 연주가 거의 불가능하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확정성의 음악이다. 백남준은 이것을 무음악(A-Music)이라고 했다.
백남준의 7년 독일(라인란트) 시기(1956~1963)
[1] 초기(1956~1957)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 독일에서 2명(뮌헨대학과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유명한 지도교수(음악이론가와 작곡가)를 다 물리치다. 그리고 쾰른대 철학과에 적을 두다. 전자음악 창시자 슈툭하우젠 쾰른에서 만나다. 쾰론 성당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영감을 받다
[2] 중기(1958~1961) 존 케이지와의 만남과 그 이후, 백남준이 행위음악가로 변모한 시기 1961년 쇤베르크도 물리치고 존 케이지도 물리친 전대미문의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을 작곡하다. [3] 말기(1963) 존 케이지를 넘어서, 백남준이 전자 실험TV를 매체로 하는 첫 전시를 부퍼탈에서 열다
19세기 프랑스의 선견자(Voyant) 랭보가 있었다면, 20세기 한국에는 백남준 있었다. 그는 통찰력을 가지고 지구의 앞날을 내다보면 인류가 어떻게 하면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는 1974년 전자실크로드(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를 착안하고 이 프로젝트를 백남준의 독일 친구 마리를 통해서 소개받아 미국 록펠러 재단 미디어 분야 예산 집행 담당자('하워드 클라인', 이 사람은 원래 비디오아트 증에 예산을 주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를) 설득시켜 마침내 그 기금을 받아내다. 이게 나중에 인터넷의 기초가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절친이 되다.
우리나라는 팩스도 제대로 없는 시대, 백남준 위성아트로 전 세계 방 속을100% 생방송 연결하자 한국에서도 <1984년 백남준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온 국민 월드컵 축구 결승전처럼 관심을 가지고 보다. 모든 가족이 TV 앞에 모였다.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다.
약 2천5백만 명의 TV시청자가 시청한 것으로 추산한다. 비디오아트 힘이다. 그 어떤 회화 작품도 백만 명이 보기 힘든데 비디오아트 특히 위성 아트 그런 장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성비가 높다>. 한 작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위성 아트밖에 없다. 멕시코에서 아프리카에서 유럽에서 아시아에 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1984년 1월 1일 이 작품을 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남는 예술 장사가 없다.
백남준 초기 코뮌 생활 할 때인가 아니면 신혼 때인가 그의 일상의 단면 백남준 생일(7월 20일) 백남준 극빈자로 살다가 생활이 너무 힘들어 일본에 가서 큰 형에게 아비지 유산의 일부를 받아온 후 돈이 생겨 그 돈으로 골동품 가게에서 부처를 사 오기 시작하다.
생활고에 시달린 시게코는 이에 크게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TV 부처가 나왔는데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때부터 이 작품이 팔리기 시작 뉴욕 미술계 지축을 흔들다. 그때부터 겨우 생활에 안정이 되었다. 1974년 이후다 그 이전 10년은 완전 거지였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관계자가 뉴욕에 와서 백남준 TV 부처를 사가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된 것이다. 왼쪽에 부처가 보인다.
백남준 너무 오랫동안 극빈자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이 안 좋아졌다 "의료혜택도 받지 못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예술이 비디오 아트이고, 가장 팔리지 않는 예술이 비디오 아트이다. 그런 면에서 가장 최고의 하이 아트임에도 초기 비디오아트는 저급아트(Low Art)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백남준 전시를 해 보면 가장 난해하고 가장 돈이 많이 들고 까다롭고 첨단 전자 기술을 요구한다
백남준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때로는 전기 요금이 안 나오게 트릭을 쓰기도 했었다. 뉴욕의 벨 연구소 다닐 때, 45센트가 있으면 피자 한쪽과 콜라를 사 먹을 수 있는데 이 돈마저 없어 집 골방으로 올라가 15센트 라면을 사다 끓여 먹기도 했단다. 백남준은 뉴욕 거리를 노숙인처럼 돌아다니면서 고장 난 텔레비전을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으로 실어 날랐다 하지만 남준은 초부잣집 아들이었기에 돈 공포가 없었다. 돈이 떨어져도 태평이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도움을 청했다. 반면 돈이 생기면 계산 없이 마구잡이로 썼다.
백남준 다큐 영화 <달은 가장 오래된 TV> 중 한 컷,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30대 초반 사진. 두 살 차이다. 이 다큐 영화, 우여곡절 끝에 울산시립미술관(과장 서진석) 소장품이 되다. 예술이 최고의 혁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네요. 백남준 아카이브 팔만대장경이라고 할까
이런 타이틀 인상적이다 <예술의 신, 백남준 드디어 뉴욕에 입성하다> 백남준 귀신에 홀린 듯 혼비백산 현상과 정신착란증이 오네요. 백남준 예술 혁명의 노스탤지어는 칼 맑스의 무한제곱이다. 우리가 아는 백남준은 10분 1도, 심하게 말해 100분의 1도 안 된다. 이 다큐 영화를 보면 대중도 쉽게 백남준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961년 마리와 슈톡하우젠 기획으로 마리 작업실에서 백남준 등이 함께 퍼포먼스 <괴짜들>공연하는데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몸짓과 엉뚱한 행동에 한 독일 관중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다. 왜냐하면 이것은 음악도 아니고 미술도 아니고 춤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고 포퍼먼스도 아니고 난생처음 보는 너무나 괴상망측한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스펙터클(구경거리)이었다. 모든 것도 아니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이상한 '굿' 공연이었기 때문
[백남준 다큐영화 속 한 장면] 1958년 미국의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에 독일전위음악제에 초대를 받았다 그는 모든 음 평등하며 소음과 침묵을 다 음악으로 본 작곡가다. 그의 콘서트에서 한 독일 청중이 존 케이지가 연주하는 소리가 너무 귀가 따가울 정도의 굉음이라 참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백남준은 여기서 존 케이지를 처음 만나 큰 영감과 충격을 받았다.
백남준, 뉴욕 미술명문 Pratt 대학에서 총장(학장)을 한 적이 있고 거기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학위논문을 받았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번 다큐영화에서는 백남준 독일 쾰른대학교 철학을 공부한 건 알지만 백남준이 그 대학에서 헤겔 논문으로 철학박사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난 정확하게 잘 모르겠다.
백남준 2000년 구겐하임 전시 콘셉트는 한국의 천지인 사상과 성서 속 최고 사기꾼 야곱 이야기다. 백남준=야곱을 동일시 사기꾼이라는 면에서 같다. 아래 작품은 바로 야곱의 아버지를 속이는 사기술로 이스라엘의 큰 조상이 되는 이야기를 자신에 빗댄 것인가? 꾀 많은 사람으로 어떤 난관도 뚫고 일을 성사시키는 인물의 대명사다. 성서의 부활신앙, 승천사건을 연상시킨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레이저 아트의 승리다. 미국의 최고 레어저 아티스트 Noman Ballad의 공이 컸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도움도 요청하다.
백남준 전문가이고 하버드대 교수인 D. 조슬릿(Joselit)의 말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거대 자본도 아니고, 절대 권력도 아니고, 정보와 지식도 아니고, 군사력도 아니고 바로 '이미지 메이킹'이다. 우리가 여기서 자유로울 때 무지에서 벗어난다."
소니 아날로그 비디오 레코더 Portapak은 백남준이 뉴욕으로 이주한 지 1년 후인 1965년에 출시되었다. 영화와 방송 장비를 사용하는 대신 콤팩트 카메라로 촬영할 수 있는 자유는 백남준의 창작 활동에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자율성을 가져왔다. 이 신기술을 손에 넣은 것에 대해 들뜬 마음을 쓰며 그는 그해 10월에 Cafe au Go Go에서 첫 영상을 선보이겠다고 말하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꿈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이 첫 번째 녹음기를 통해 백남준 은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푸는 평범한 제스처를 사용하여 감동적으로 단순하지만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작업인 Button Happening (아래)을 만들었다.
[문화 유목민 백남준의 글모음집(아포리즘 편지 텍스트): Niederschriften eines Kulturnomaden: Aphorismen, Briefe, Texte] 저자: Nam June Paik 편집자: Edith Decker-Phillips 발행인: DuMont, 1992 ISBN: 3770130006, 9783770130009 쪽수: 252페이지
Good Morning Mr. Orwell은 오늘날 원래 방송의 여러 편집본으로 존재하며, 그 중 4개는 Signals: How Video Transformed the World 전시회에서 제공되어 프로그램의 형태 변화 특성과 확장된 도달 범위를 전달된다. Skip Blumberg가 편집한 버전이 학자 Dieter Daniels와 Gregory Zinman, 그리고 획기적인 예술가인 Moon Is the Oldest TV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Amanda Kim의 관점과 함께 여기에 제시되었다. - Michelle Kuo, Marlene Hess 회화 및 조각 큐레이터
<2019년 백남준 글 모음집 우리는 열린 회로 속에 살고 있다> They're here! WE ARE IN OPEN CIRCUITS: WRITINGS BY NAM JUNE PAIK comes out October 1. Thanks to my wonderful co-editors John Hanhardt and Edith Decker-Phillips
백남준 글 모음집(우리는 열린 회로 속에 살고 있다) 2019년 MIT 공대 시리즈 문고 중 하나로 나왔다. 2019년부터 코로나가 시작되어 이 책은 시대에 잘 맞았다 우리는 <닫힌 코로나 시대 였지만 열린 회로 속에 살 수 있었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이 책 속에 백남준은 회갑을 맞이하여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모아 온 중국의 고전 문장 역사 시가 등을 묶어 영어(Scrutable Chinese)로 번역한 텍스트가 이 책의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다
백남준 박사(Edith)에게 백남준에 대해서 10가지를 물었다.
벡남준 서양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중국의 고전 명언집을 영어(Scrutable Chinese)로 발간하다. 놀라운 책이었다.(이것을 백남준은 고고학이라는 말로 대신하기도). 그의 60회 생일에 맞춰서 이 책이 나왔다. 그는 늘 동서가 better communication 하기를 갈망했다. 그의 예술표현 방식은 언제나 PLAYFUL 하고 PEACEFULPEACEFUL 했다 백남준(1932~2006)은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백남준 박사학위(함부르크 대학 미술사학가) 쓴 이분 논문 출처 진짜 꼼꼼하게 밝히다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임을 다양한 준거를 가지고 학문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내다. 그녀의 논문이 책(Video Paik)으로 정리해서 다시 나왔고 한국어 번역까지 그러나 절판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는 제목 그대로 백남준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출발한다. 1968년에서 1979년 사이에 백남준이 미국에서 영어로 작성한 주요 보고서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1968),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1974), 「PBS 공영 방송이 실험 비디오를 지속하는 방법」(1979)을 바탕으로 정책가 백남준을 살펴본다. 전시는 백남준의 보고서와 작품을 함께 보며 그를 새롭게 ‘발견’하기를 권하는 한편, 정부의 제도적 지원은 물론 민간 재단, 메세나 기금, 학교, 연구소, 미술관, 방송국의 지원과 협업이 그의 사회적 역할 실천에 도움이 되었다
예술기금이 얼마나 인류에게 공헌하는 것인지 백남준 1974년 증명해 냈다.. 이 기금(1974년 록펠러예술기금)이 인터넷을 발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백남준은 작가이면서 정보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여러 편의 리포트>를 10년에 걸쳐 써내다 그중 유명한 말이 "종이는 죽었다(Paperless Society)" 이에 대해서 1978년 뉴욕 모마에서 특강(아래 사진)을 하다.
백남준 1974년 록펠러재단의 예술기금을 받을 때, 처음 50년 말 독일에 온 백남준(백남준 당연히 독일에 대해서 잘 몰랐겠죠)을 두루 많이 도와준 마리의 기여가 있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래 사진은 슈톡하우젠과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부부> 원래 록펠러 재단 예술문화 분과 심사위원이 백남준과 같은 실험적 예술을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그를 설득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나중에 백남준과 그 심사위원이 절친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심사위원의 이름은 '하워드 클라인'이다. 백남준의 인간친화력은 천재적이다. 그를 보면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백남준은 그 예술기금을 받아 인류가 가장 빠르게 가장 쉽게 가장 싸게 상호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전자 실크로드 혹은 전자 초고속도로)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냈다.
[백남준 다큐영화의 한 장면] 1958년 어느 날 독일에서 전위음악 콘서트에 갔다가 백남준 쇼크를 받다. 미국 전위음악 작곡가 존 케이지가 독일에 와서 연주회를 했는데 여기서 백남준이 하고 싶어 하는 예술의 단초를 주고 대 각성을 일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모든 소리는 평등하며 모든 소음 침묵 소리가 다 음악이라는 개념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연주를 본 것은 존 케이지 연주회를 통해서 처음이기 때문이다. 동전을 던져 나오는 결과대로 연주하는 우연성 음악도 듣게 된다. 그러면서. 백남준 이런 말을 했다 "와 그렇구나! 미국에도 문화가 있구나!" 백남준은 그래서 자신의 시기를 존 케이지 이전과 전 케이지 이후로 구분한다. 존 케이지가 중국의 고전 주역을 가지고 combination과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작곡행위를 보고 백남준 많은 영감을 받았다.
유럽에서 6868 혁명이 일어난 건 이미지 메이킹이 불가능한 <생중계>라는 것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유럽의 젊은이들은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다. 즉 미디어 본색이 들통나면서 거대한 사회혁명의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혁명은 미디어에서 온다. 프랑스혁명은 백과사전파 등 책(미디어) 출간에서 왔고 앞으로 혁명도 역시 미디어 혁명에서 올 것이다. 백남준 68 혁명 이후69년 신시사이저 발명 그리고 1970년 <비디오코뮌>부터 1973년 <글로벌 그루브>가 나오기까지 수 없는 실험과 지난한 모색과 피나는 노력으로 드디어 1973년 초 '유튜브'를 발명해 낸 것이다. 1973년 '초기 유튜브' 1984년 '위성아트' 1994 '인터넷' 이렇게 발전한 것이다. 이 시기에 백남준 록펠러 재단 기금도 운 좋게 받다 <아래 1970년대 초 유튜브 생성기>
<백남준 비디오 출현을 보면서 "바로 저거야" 하고 소리치다 출시 전에 미리 주문해 비디오를 구입하다> 백남준 액션뮤직을 하다가 한계를 느껴 TV를 가지고 작업을 했는데 이것의 한계점이 바로 일방소통 그런데 1964년 비디오 일본에서 처음 출시되면서 바로 이거야 하면서 비디오를 그의 예술의 도구로 삼다 왜 그랬을까? 비디오는 수정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쌍방소통이 가능한 민주적인 매체였던 것이다 이번에 나온 백남준 다큐영화에서 보면 백남준은 민주주의가 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민주주의는 <말대꾸하는 것>이지 그랬는데, 비디오는 바로 그런 것도 가능한 매체로 본 것이다. 그래서 비디오의 편집기를 아베와 협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후 드디어 유튜브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모든 사람은 다 예술가이고 모든 사람은 1인 미디어가 될 수 있고 1인 기업가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시각예술에서 사진과 영화의 출현은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데 그 가운데 비디오발명이 있다.
<13세기 칭기즈칸은 무력의 힘으로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고 가다. 20세기 백남준은 예술의 힘으로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고 가다. 백남준 왈, 내가(만 30살에) 바로 황색 재앙이다라고 선언하다 그런데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물론 백남준도 유럽인을 겁줄 때 자신이 칭기즈칸의 후예임을 몽골반점으로 보여주다> 김선정은 백남준은 만난 이후 이전 알지 못한 세상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김선정은 백남준이 만든 세계적 큐레이터다. 백남준은 뉴욕 휘트니 미술관 관장과 절친이었다 당시 뉴욕에 거주한 김선정을 관장에서 수습 큐레이터로 써 보라고 권하자 이에 응답하게 되면서 그녀는 큐레이터로 데뷔하게 된다. 백남준에게 걸렸다 하면 다 유명인이 된다.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휘트니비엔날레-서울' 전시가 열렸을 때 김선정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처음 국내 전시에 참여하게 됐다. 어느 날 보니까 김선정 일 스타일 식사시간 줄이려고 입에다 어묵 물고 노동자 작업복에 완전 막일 스타일이다.. 김선정 학생수 100100여 명 되는 미국 미대(유럽식 교육을 하는 부자들만 들어가는 크랜부룩미술아카데미 최욱경 여기 졸업) 대학원 회화를 전공 졸업
백남준 구겐하임 미술관에 레이저 아트로 7층짜리 예쁜 초록빛 전자폭포를 만들다. 아니 야곱의 사다리를, 죽음마저 초월해 하늘로 승천하는 이미지를
힘들 때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행복하다
백남준 다큐영화 그의 생애를 보면 당시에는 백남준의 생애가 바로 그런 시대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남준이 한반도를 떠나게 된 것도 한국전쟁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도 작동한 것 같다 그는 17살에 한국을 떠나게 된다. 그가 1984년 귀국할 때도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상당히 꺼려했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부시대이기에 그 자신이 체포될 수 있다고 생각 백남준은 경기중학교 다닐 때 박정희의 형 '박상희(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일으킨 대구사건(1946년 군정 당시 대구지역이 식량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자 배고픈 시민들 일어나다) 백남준 13살 때 이 시위의 돌격대였다. 백남준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삼성가보다 더 부자인 재벌인데 아버지 걱정이 컸다. 그가 경기중학교 다니다가 홍콩 외국인 학교 적을 옮기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백남준의 연대기는 바로 동서 지구촌 문화예술의 혁명과 과학발전과 전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남준이라는 한 개인을 통해서 전 세계사를 조명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사생활의 역사관(아날로그 학파)'라고도 한다> 백남준의 다큐영화를 보면 한국의 해방전후사, 유럽 50년대 문화변동사 독일 60년대 68 전후의 혁명사 그리고 미국의 60~70년대 흑인민권운동, 반문화(히피)와 반전평화운동과 비틀스의 등장 팝아트 앤디 워홀과 낙서화 바스키아 등장하고 그리고 TV 대중 매체가 나오면서 격변하는 엔터테인먼트 발전사 그리고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현상을 읽을 수 있다 아래는 완전히 폐허가 된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한국은 제로 그라우드에서 다시 시작한 나라라고 사진 한 장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아래 자막처럼 "한국은 새로운 모든 것에 대한 갈증이 강력했다" 이런 시대에 백남준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전쟁세대(태평앙 전쟁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중동 전쟁 등등)로 그가 평생 반전을 주제로 한 예술을 한 이유다
백남준과 전자음악의 창시자 스톡하우젠 같이 활동하던 시절 장면 - 백남준 다큐영화 중에서
백남준의 비상한 현상을 예의주시(keep an eye on)하던 건축가 예를링은 백남준의 첫 전시를 자신의 갤러리 하우스(부퍼탈)에서 열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다. 그는 당대 아방가르드 예술을 이해할 정도로 사고가 열린 당대 최고 지성인이었다. 백남준 후에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다. 그러면서 제 필체가 너무 난필임을 용서해 달라는 정중한 멘트도 후기로 붙이다.
Borned 1932 in Seoul. 1953–56 studies music, history, art history and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Tokyo, where he writes a dissertation on Arnold Schönberg. Continues studies in Munich and Freiburg. In 1958 meets John Cage in Darmstadt and works with Karlheinz Stockhausen at the electronic music studio of Westdeutscher Rundfunk in Cologne. Becomes a member of the Fluxus movement. 1963 shows the first manipulated TV sets, in Wuppertal. 1964 moves to New York and becomes the first artist to make videotapes. During the 1970s and 1980s his work is widely exhibited all over the world. 1978 appointed professor at the Kunstakademie, Düsseldorf. 1987 elected to membership of the Akademie der Künste, Berlin. Lives in New York and Florida.
<나의 사랑 백남준> 구보타 시게코 구술, 남정호 지음을 읽으면 특히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의 절절한 묘사는 눈물겹다. 시게코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백남준을 20자로 요약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시게코와 기자들과 그룹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녀 말은 짧으나 매우 핵심적이고 쉽다. 두 사람의 결혼은 시게코가 의료보험이 없어 암치료를 받을 수 없었기에 가능했던 조금은 슬픈 사연이다. 시게코는 백남준도 못한 모마에서 대형전을 한 정도의 유명작가다.
백남준은 모든 생각을 할 때 항상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동양의 지혜를 서양의 문명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래서 그의 60이 되는 1992년에 그가 모아둔 중국문서의 지혜문학을 영어로 번역하여 책(Scrutable Chinese 지식의 고고학으로 '쉽게 풀어쓴 중국고전')을 출간했다. 그는 그야말로 동서문화의 매치메이커 피스메이커 즉 미디어(문화연결자)였다 한국적 표현으로 지구촌 무당 혹은 글로벌 샤먼이었다.
1932년 서울. 1953–56년 도쿄 대학교에서 음악, 역사, 미술사 및 철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Arnold Schönberg에 대한 논문을 씁니다. 뮌헨과 프라이부르크에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John Cage를 만나 쾰른의 Westdeutscher Rundfunk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Karlheinz Stockhausen과 함께 작업. Fluxus 운동의 일원. 1963년 부퍼탈에서 처음으로 조작된 TV 세트를 보여준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비디오테이프를 만드는 최초의 아티스트가 됨.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전시되었다. 1978년 뒤셀도르프의 Kunstakademie 교수로 임명되었다. 1987년 베를린의 Akademie der Künste 회원으로 선출되다.
[뉴요커 지] 백남준 다큐영화 리뷰 기사
<뉴요커>지에 백남준 다큐영화 기사화 / 60년대 후반부터 그는 찬사를 받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업은 엄청나게 비싸고 노동 집약적이었다. 백남준의 작품을 상품화할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이 만질 수 있는 오픈 소스 도구를 만드는 것이 그의 희망이었다
[버라이어티 매거진] 백남준 다큐영화 리뷰 기사
백남준의 예술에는 그의 어리석음조차 가치 있게 만든다. 한번 해보자는 정신이 있다. 그는 장난기기 많지만 우주적이다.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런 방법론에 내장되어 있다. 결국, 그는 텔레비전에서… 고급 예술을 창조하다! 그는 더 큰 비전을 모으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1996년 뇌졸중으로 육체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겪을 때까지 그의 궤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 10년 동안 그의 건강은 쇠퇴했지만 우리가 영상에서 볼 수 있는 2000년 구겐하임에서의 그의 쇼는 총체적인 놀라움이었다. 천국으로가는 계단. 그가 한 것 중 가장 감동적인 작품일지도 모른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의 끝 부분에 도착하면 그가 거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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