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과 샬롯 무어만, TV 침대 , 1972, 고양이. 백남준: Videa'n' Videology 1959-1973 , Syracuse, New York: Everson Museum of Art, 1974-Dany Bloch fonds/ 미술과 시간의 만남-테크놀러지, 글: 조광석(경기대학교)
비디오아트의 출현은 텔레비전 시대의 산물이다. 1950년대 말, 텔레비전이 가정에 대량 공급되면서 새로운 매스미디어로서, 대중적 매체로서 우리 일상과 사고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 출현한 예술형식이다. 그것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쉽게 이끌고 대중들에 대해 절대적인 지위를 획득할 때, 작가로서 비판적인 위치에서 그 미디어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보여주었던 것이 비디오아트로 발전하게 된 계기이다. 따라서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출발하여 근래에는 전혀 새로운 표현적 매체로 자리 잡은 아이러니가 함께한다.
유럽과 미국의 전위작가들은 산업사회, 대중사회에서 기계 기술의 발전과 진보적인 매체들의출현이 유토피아적 이상 실현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유럽의 플럭서스그룹과 미국의 존 케이지 등 전위작가들이 집단적으로 제시하는 비판적 행위들은 테크놀로지 문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엘리트적 이성중심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그렇지만 80년대 출현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미디어를 표현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은 엘리트의식에 충만한 모더니스트들에 비해 비디오 아트가 일반인들의구미를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는 대중적 매체이면서 현실적으로 물질문화에 대한 언어의 확장으로 보여진다. 텔레비전이 요즘같이 조형적 재료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물론 백남준의 작품들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백남준 작품의 이해는 곧 비디오아트 전체를 알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비디오아트의 출현과 발전은 그의 작품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 안에서 이루어온 작품의욕과 용해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세 개의 다른 경향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음악적 배경 속에 퍼포먼스의 실현과 자연스럽게 전자매체의 사용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텔레비전 모니터의 결합, 두번째는 인간의 형상을 모방하는 로봇의 제작과 텔레비전 모니터를 사용한 조각적 조형물의 제작, 세번째는 모니터 안에 보여지는 멀티미디어 영상의 미학적 가치의 제시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백남준 작품의 분류는 시기적으로 서로 중첩되어 있고 작품의 내용 1959)>, <머리를 위한 단순한 선(禪)(Simple Zen for Head, 1961)>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퍼포먼스의 볼거리를 조합한 이 작품은 대중매체에 스캔들을 일으킴으로써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성적 욕망을 음악에 개입시키는 이러한 퍼포먼스는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에서 비디오아트와 또다시 결합하게 된다. 무어만의 가슴에 테이프로 고정시킨 플렉시 글래스 상자안에 두 대의 텔레비전을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첼로를 연주하게 된다. 그리고 <TV 첼로(TV Cello, 1971)에서는 플렉시글래스 상자 안에 다양한 크기의 TV와 그것으로 만든 첼로를 연주하는 것이다. 이때 TV모니터에서는 변형된 영상을 상영함으로서 비디오와 퍼포먼스 음악의 결합을 보게 된다. TV와 인체의 결합, 악기와T V가 결합하게 되고, 작곡과 퍼포먼스, 텔레비전이라는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은 예술과 일상적, 삶, 기술을 합치하려는 20세기 전략적 목표이기도 하다.
1964년 백남준이 만든 <로봇 K-456>은 퍼포먼스에서 조형적 미디어로 전환을 의미한다. 원격조정되는 이 로봇은 로봇오페라, 파르나스갤러리에서 <24시간>이란 전시에서 등장한다. 그 로봇의 행위자체가 퍼포먼스와 오브제의 결합, 녹음테이프에서 나오는소리, 작곡, 텔레비전 모니터를 사용한 멀티 조형물 제작의 초기적 형식이기도 하다. 로봇은 인체의 형상을 모방하여 인체의행위와 욕망을 반영하며, 작가는 의도적으로 자동차 사고로 그 작품은 사라지게 하여 기계문명 속에 놓여진 기계의 현실을 암시한다. <TV십자가(TV Cross, 1966)>, <TV 침대(TV Bed, 1972)>와 같이 조형적 구조물의 형태를 차용하는 작품은 텔레비전 모니터로 용도가 다른 기구를 만든다. 십자가의 형태, 침대의 형태 안에 동영상적 기호를 넣음으로서 십자가와 침대, 텔레비전이 지닌 각각의 역할을 중성화시킨다.
이런 중성적 미디어는 중고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조합해서 만든 <로봇가족(Femily of Robot, 1986)>에서 재구성된다. 인간 형상과 테크놀로지 미디어의 결합으로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테크놀로지의 어색한 구조를 보여준다. 기계 제작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은 서서히 매체자체를 규정하는 조형적 형식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퍼포먼스의 볼거리를 조합한 이 작품은 대중매체에 스캔들을 일으킴으로써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제니스/유리를 보고 있는 TV(Zenith/TVLooking Glass, 1974)>는 텔레비전 내부의 전자장치, 모니터를 제거하고 모니터의 중앙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 카메라는 유리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모니터를 통해서 보는 장면은 카메라로 바라보는 좁은 시각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작품이다.또한 <TV부처(TV Buddha1974) >는 폐쇄회로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부처의 모습을 통해 자기 모습을 보는 미디어의 자율적 행위로 평가되기도 한다. <세 개의 달걀(Tree Eggs, 1981)>, <실제 물고기/생방송 물고기(Real fish/ livefish, 1982)>등 작품처럼 대상물, 카메라, 모니터의 관계를 피사체와 영상재현의 상호관계로 해석하는 다양한 설치작품으로 보인다.
한편 <TV정원(TVGarden,1974)>과같이 다른 재료, 오브제들과 무질서하게 설치하는 작품에서는 텔레비전의 내재적 영상을 외부의 시설물과 연결시킨다. <세기말 II(Fin de Siècle II, 1989)> <메가트로/매트릭스(Megatron/Matrix, 1995)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옆으로 나열한다던가 벽돌처럼 쌓아올리고 그것들을 조정하기 위해 사용한 점보 트론(Jumbo tron)과 같은 테크닉은 40개의 모니터의 이미지를 병치시키고 각각의 모니터에 서로 다른 영상을 방영하여 수백 가지 개별적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움직이는 벽화 같은 효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니터의 사용은 재현된 영상과 재현적인 도구로서 텔레비전 모니터 사이의 충돌을 만들어 테크놀로지 시스템 구성의 다양성을 확인하게 한다.
영상 이미지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은 비디오카메라의 구입에서부터 출발한다. 1965년 쏘니에서 개발한 휴대용 비디오 녹화기는 비디오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게 된다. 마그네틱 테이프에 의한 녹화방식은 영화와 다르게 직접적으로 영상을 재생할 수 있고 다양하게 복제하고 반복할 수 있게 되면서 멀티미디어로서 장점을 지니게 된다. 백남준은 뉴욕의 리버티 뮤직샵에서 비디오카메라를 샀고 그 자리에서 <단추 해프닝(Button Happening, 1965)>을 찍는다. 비디오카메라로 잡은 영상은 쉽게 녹화할 수 있고 그것들을 다시 실험적 조작과 조합으로 기술적 영상을 만들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점차 테크놀로지가 영상작업에 사용되면서 동영상 제작의 다양성으로 발전한다. 백남준은 이러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이미 다른 모니터 작업에서 다양하게 적용해왔고, 작동원리에 대한 예술적 개발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이에 대해백남준은“‘미술과 테크놀로지’에 함축된 진짜 문제는 또 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진보하는 테크놀로지와 전자매체를 어떻게 ‘인간화’하는가이다(1969)”라고 말하고 있다. 백남준은 음악, 퍼포먼스, 테크놀로지를 조합하면서 비디오 아트라는 생소하면서도 친근한 예술세계를 만들었다. 텔레비전이 사회적으로 탐구되어야 할 미디어이면서도 예술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 시각적 매체로 발전되어진 것도 그의 영감과 함께 한다. 요즈음 또 다른 테크놀로지인 컴퓨터의 개발과 그것에 의한 디지털 영상의 발전뒤에는 비디오아트의 역할도 함께하고 있다. 그 자신도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새로운 영상매체로 사용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개발은 지나간 기술을 잠식해 버리면서 과거의 기계들을 무용지물(無用之物)로 만들어 버린다. 과거에 발명되었던 다양한 기계들이 이제는 우리들이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박물관을 만들고 그곳에 모아두고 과거를 회상하기도 한다. 예술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백남준의 작품은 그러한 전통적 보존방법과 전시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적 문제들이 남아있다. 기존의 작품처럼 물리적 구성이 아니라 테크놀로지가 살아있게 만드는 기술과 영상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백남준 미술관 건립에 많은 관심을 갔고 건축에 진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 소장될 작품이 몇 년 안에 우리가 다시 볼 수 없는 고장 난 기계 덩어리가 된다면 그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만날 수 없고 우리가 책에서 보는 이미지에 불과할 것이다. 작품을 보관할 미술관 건축보다도 먼저 백남준의 작품을 연구하고 보존하면서 재현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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