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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자-사상가

김대중대통령은 책과 시련이 만든 인물

[연세대김대중도서관방문] 김대중대통령은 책과 시련이 만든 인물이다 www.kdjlibrary.org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178-9 02)320-7723-6 Kim Dae-jung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김대중도서관 대통령 영상자료 중 한 장면 


김대중(金大中 1925-2009) : 전라남도 신안(新安) 출생. 정치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김대중대통령도서관 열람실 

독서는 정독(精讀)하되, 자기 나름의 판단을 하는 사색이 꼭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저자 또는 선인의 생각을 넓고 깊게 수용할 수 있다 - 김대중 

여기에 오면 책이 그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라도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능가하기란 힘든 일이다.


김대중의 저서 <대통령과의 만남> 표지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역사나 민주화를 위해선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 - 김대중 

'김대중 리더십' 8가지  [1] 원칙과 철학의 리더십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2] 국민과 역사를 믿는 리더십 "국민과 역사 속에 영원히, 반걸음만 앞서가라" [3] 참여와 실천의 리더십 "행동하는 양심" [4]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리더십 "학자적 문제인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5] 대화와 연합의 리더십 "라이벌은 있지만 적은 없다. 자기를 버리고 크게 연대하라" [6] 관용과 용서의 리더십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7] 자율과 책임의 리더십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8] 세계인으로 사는 리더십 "세계인이 되라" 

김대중대통령의 정치역적에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료사진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공론이다. - 김대중 

40대 김대중대통령. 그는 설득력 있고 알기 쉬운 명연설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김대중(KIM DAE JUNG)대통령 저서 <새로운 시작(A NEW BEGINNING)> 영문판 

우리 모두가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 우리가 행동하는 양심이 될 때 민주주의는 우리 것이 될 것이다 - 김대중 

김대중자서전 중국어 출판을 기획한 중국의 마샤오린 보롄서(www.blshe.com) 대표에게 김대중대통령의 인상적인 말 중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영어를 배워라. 흉내도 창조적으로 하라. 하루만 참자. 경청은 최고의 대화다. 10년쯤 한 우물을 파라" 등이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전자방문록을 쓰고 있는 국민의명령 대표 문성근 

배우 문성근은 문익환목사가 사회운동을 시작한 바로 그 나이에 드디어 한국정치에 뛰어들었다. 그의 집안은 다 예술가다. 형은 서울대음대출신으로 국립오페라단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배우다. 그런데 그가 예술의 길을 잠시 접고 현실정치에 뛰어든 것을 현실이 너무 급박하고 절실한 난간에 부딪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예인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아버지의 예언자전승을 실천하기 위해 엄동설한에 길바닥에 몸을 던지고 있다.

문익환목사와 만남 김대중 1990. 김대중도서관 자료사진 

문익환(文益煥 1918년 6월 1일-1994년 1월 18일)목사는 원래 예술가가 될 사람인데 시대가 너무나 어두워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모친이 돌아갔을 때에도 고은시인과 함께 춤을 추는 광대이자 전위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여유가 없었다. 나라의 운명이라는 너무나 큰 화두가 그를 짓눌렸고 윤동주시인이 못 다한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성직자로서 역할로 대신해야만 했다. 다만 문성근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따랐다. 

그는 한신대와 프린스턴대학에서 구약을 전공한 성서학자다. 그는 시인으로 '천주교개신교' 공동번역도 펴냈다. 장준하의 죽음을 계기로 질곡의 분단사에 몸을 던져 반유신과 통일운동을 주도하다 6차례나 투옥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운 시대의 선각자다. 그는 하느님도 제대로 된 한글로 말하게 되었다며 공동번역의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수유리 한신대대학원에 있는 문익환목사시비. ⓒ 임옥상 

김대중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구상은 문익환목사의 상상력에서 큰 자극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문목사는 시인답게 아무도 하지 않는 행위예술을 상상하여 민간인으로 처음 평양을 다녀왔고 그래서 우리시대의 가장 큰 금기를 깼다. 그에게 시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신앙이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의 신앙은 제도화된 교리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빌 클린턴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 

1998년 6월10일 김대중대통령은 워싱턴 백악관 남쪽 잔디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대중대통령 성장기 홍보사진 


1924년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인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 하의도에서 한두 척의 어선을 가진 농어민 김운식과 장노도 사이에서 탄생했다. 아버지 김운식은 소작인들을 대표하여 일인들에게 항의나 진정을 내곤했다. 증조부 김태현은 헌종 때 한성부좌윤을 지냈고, 조부 김제호는 오위장을 지냈다. 

학창시절은 끼닛거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집안환경 탓에 김대중은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하의도에 학교가 들어서지 않아, 일단 그는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일년 남짓 다닌 이 서당에서 그는 장원을 두 번이나 했다. 

1936년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 본 그의 부모는 목포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진학을 위해 초등학교 4학년 때 하의도에서 목포북초등학교로 전학해 왔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다 팔면서까지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킨 것이다.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공부 뒷바라지에 나섰다. 그 뒤 목포제일보통학교를 일본인 학생들의 따돌림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학업에 전념하여 1937년 수석으로 졸업상을 받았다. 

1939년에는 당시 전국 10대 명문 안에 들었던 5년제 목포상고에 일본인 학생들까지 제치며 1등으로 합격하여 모친의 기대에 부응하다. 그는 독서광이면서 정치와 영어에 관심이 많고 작문과 역사 성적이 뛰어났으며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김대중은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면서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데다 반일작문이 문제가 돼 계속 맡아오던 반장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1948년 10월부터 1950년 10월까지 목포일보사장으로 청년사업가시절도 있었다. - 위키페디아 

1962년 이희호여사와의 결혼식장에서 입장하는 김대중대통령 

김대중대통령과 이희호여사 

이희호(李姬鎬 1922년 9월 21일 생)여사는 정치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인 김대중의 아내이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치하에서 이화여전(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46년에 서울대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했다. 이후 미국의 렘버스대학교 사회학과와 스카릿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귀국 후, 여성문제연구원간사, 이화여대강사,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영부인 이희호여사 자료사진 

1962년에 40세의 나이로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 당시에 김대중에게는 전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김홍일과 김홍업이 있었고, 결혼 후인 1963년에 김대중과의 사이에서 김홍걸을 낳았다. 1980년 사형판결을 받은 김대중의 옥바라지를 하며 주고받은 편지가 후일 출판되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98년 2월 25일부터 2003년 2월 24일까지 청와대에서 생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천주교,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신자였으나, 서로의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2009년 11월에는 자서전 동행을 발간했다. - 위키페디아 

옥중엽서(김대중대통령이 이휘호여사에게) 

옥중엽서를 보면 감동적이다. 김대중대통령은 평화시대에 태어났으면 시인이나 예술가가 되었을 사람이다. 그의 여성적 감수성과 진보적 역사관은 매우 21세기적이다. 글씨체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체취를 느낄 수 있는데 이런 글씨체라면 신뢰할만하고 세상을 꿰뚫어보는 안목과 멀리 보는 비전이 있는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내가 그에게서 가장 호감을 가지는 것을 이런 유물을 볼 때이다.   

김대중대통령의 저서들 

그의 저서가 생각보다 상당하다. 여기서 그의 저서를 열거해 본다. 나에게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다. 꼭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인권대통령이었지만 문화대통령까지는 못 갔다. 

1967년 '분노의 메아리'(삼성당) 1970년 '내가 걷는 70년대'(범우사) 1973년 '독재와 나의 투쟁' 1984년 '김대중 옥중 서신'(청사) 1985년 '행동하는 양심으로'(금문당) 1986년 '대중경제론'(청사) 1987년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일월서각) 1991년 '공화국연합제'(학민사) 1992년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청도) 1992년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청도) 1993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영사) 1994년 '나의 길 나의 사상'(한길사) 1997년 '김대중의 21세기 시민경제 이야기'(산하) '나의 삶 나의 길'(산하) '대중참여경제론'(산하) '내가 사랑한 여성' (에디터) 1997년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조선일보사) 1998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김영사)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NHK 취재반 구성, 김용운 편역 1/2 2004년 '21세기와 한민족' (돌베개) 

지팡이 등 그의 유품들 

호흡을 멈추고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에서 온 몸의 기를 모아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서예는 기법의 연습(習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정신수련을 중요시했다. 우리에게 서예는 그 예기적 능력과 함께 그 사람의 인격을 읽는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서예들은 그런 면에서 비교가 되기도 한다. 기독교의 교리와 거의 흡사한 내용이 담긴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사랑하라)'이 보이네요. 굵고 가는 붓의 종류가 참 다양하죠. 

김대중대통령의 담백하고 절제된 정서와 인품과 체취가 고스란히 정갈한 서체에 담겨 있다. 서체는 인격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식 기념사진 

한국은 서구의 민주주의와 같은 사상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에서 인내천 같은 서구의 민주주의 인권보다 더 차원이 높고 경쟁력이 있는 민본사상, 인권사상, 민주주의사상이 있다. 인내천은 '백성이 하늘이다' '국민이 대통령이다'라는 재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서구의 인권사상보다 앞선 것이다. 한국에서 기록문서에는 왕이 하늘이라는 '왕내천'사관만 있었지 백성이 하늘이라는 '인내천'사관은 기록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동학이 이를 공식 문서화하여 선포함으로써 그동안 몰랐던 한국 인권선언이 만방(전 세계)에 알려졌다. 

김대중대통령은 노벨상수상자연설에서 일일이 자세한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문맥의 내용을 발표했다.

김대중도서관 봉황이 새겨진 내부인테리어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자본주의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 김대중대통령 2009년 3월18일 마지막 일기의 한 부분 

김대중도서관 천장 인테리어 

한지로 만든 스탠드에 불어 들어오니 마치 사람의 표정에 환한 웃음이 머금은 것 같다. 


김대중대통령의 UN연설 

김대중대통령이 2000년 9월 7일 유엔본부 총회회의장에서 열린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기조연설하고 있다 


만델라 남아공대통령과 김대중대통령 

2001년 3월 12일 김대중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만델라 전 남아공대통령을 현관에서 영접하며 악수하고 있다 

<장욱진 회고담>
 갤러리현대(사간동) 장욱진 20주기 2011.01-02.27 www.galleryhyundai.com 
장욱진 미술문화센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244-2 031)283-1911 http://www.ucchinchang.org 

강운구 I '장욱진' 젤라틴 실버 프린트 22*33cm 1975 ⓒ 강운구 

"천진무구한 동심을 빌려 회화 속에 완전한 자유를 추구했던 장욱진(1918-1990)화백 5주기회고전이 호암갤러리에서 열린다. 그는 50여년 화력을 거치면서 그때그때 다양한 미술사조를 접한 흔적이 보이나 그럼에도 언제나 그만의 개성적 스타일을 통해 고유한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특징은 무엇보다 대상을 마치 어린이그림처럼 단순하게 재현한다는 점이다. 거기엔 세상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의연하고 자유로운 정신이 담겨 있다. 

말년에는 유화물감을 사용하면서도 동양화 같은 분위기를 낸다. 이는 붓과 먹의 익숙한 구세대답게 기름진 유화물감과 담백한 묵화 사이에 어떤 이질감을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모더니즘이란 서양근대미술의 정신이 그의 작품 전 과정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 1995년 장욱진전 기사 중에서-
 

호암갤러리(1995)전을 나도 봤는데 작품은 작았지만 농축된 조형미에 강력한 인상받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델피르와 친구들 사진전을 찾은 사진작가 강운구 <사진출처> 아래 
http://www.delpirekorea.co.kr/bbs/board.php?bo_table=board_07&wr_id=30 

[작가소개] 강운구(姜運求, 1941~)는 포토저널리즘과 작가주의적 영상을 개척한 우리시대 최고의 다큐사진가로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사진을 남기는 사진가로 불린다. 그는 우리 현실과 농촌, 풍경 등 삶의 거친 현장을 결코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함으로써 '삶에 밀착된 서정'을 보여준다. - 열화당 책에서 

[작가의 말] 1. 나는 무면허 작가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칭호를 부여할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작가는 '자격증(證)'이 아니라 작품으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2. 내가 일관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곧 죽어도 나는 작가다. 작가는 혼자 버텨내어야 한다'라는 신념 때문이다. 3. 우리나라에서는 삶과 풍경이 서로 배반한다. 외국 사람이라면 이런 풍경이 그 자체로 사진적 주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남이 아니기 때문에 풍경의 모순에 대한 고민 없이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장욱진 I '동산' 유화 33.4*24.2cm 1978 

나무 위에 집이라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소를 개처럼 그렇게 그리다니 놀랍다. 진짜 개는 너무 작다. 

장욱진 1939년 양정고 졸업하고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다. 사진은 1940년 서울에서 회원전이 있어 잠시 귀국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그는 양정고를 달리기선수로 특채 입학하였다고 한다. 

장욱진화백도 한때 서울대 미대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짊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는 말한다. "미술에서 가르칠 것이 뭐가 있다고 알아서 그리는 거지" 

그의 서울대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에게서 배운 것이 없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안 배웠다고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스스로 여는 방식을 배운 것이다. 가장 큰 이치를 터득한 셈이다" 

장욱진 I '공기놀이' 65*80cm 1938. 장욱진화백 회고담을 듣고 있는 관객들. 장소 갤러리현대(사간동) 

위 작품은 장욱진화백이 일제 시대 소학교 3학년 때 일본선생의 추천으로 <아동 히로시마미술전>에 출품하여 최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당시 일본, 한국, 만주에서 통틀어 응시한 대회였는데 그가 1등했다고 해요. 당시 아버지는 많이 고무되었고 상장과 상패와 상품을 받았는데 친구들이 나좀 보자 하다가 없어지고 상장과 상품만을 가지고 집에 왔다고 하는데 상품은 그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 유화물감이었단다. [...] 장욱진화백이 건강이 안 좋아 수덕사에 거처할 때 거기서 나혜숙여사를 만난 에피소드 등을 들려준다. - 장경수여사의 증언 

장욱진화백의 큰딸 장경수여사(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사). 위 부친사진의 옆모습이 너무 닮았죠. 

초기(1937-1962), 덕소시대(1963-1975), 명륜동시대(1975-1979), 수안보시대(1980-1985), 신갈시대(1986-1990) 

초기(1937-1962)시대 왼쪽 2번째 그림 '길 위에 자화상(1951)'은 625 피난시절 고향인 충남 연기에서 그린 것으로 이상세계 같은 황금보리밭 샛길 검은 우산 그리고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신사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멀리 하늘엔 까마귀가 날고 그 뒤로 검은 개 한마리가 뒤따른다. 파격적인 구도와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작가의 강력한 자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누구는 이 작품이 왠지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보리밭'이 연상된다고 말한다. 그림 이면의 죽음의 공포가 깔려있는 것도 사실이다. 

장욱진은 이 작품에 대해 "간간이 쉴 때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둘러본다. 이 그림은 대 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연하고 좌우로는 풍성한 황금의 물결이 일고 있다.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고 당시의 심경을 털어놓은 바 있다. 

'길 위에 자화상' 유화 1951 ⓒ 장욱진 갤러리현대 제공 

한국 전쟁기에 자신의 고향으로 피란을 가서 그린 장욱진의 자화상이다. 너무도 열악했던 피란시절에 그린 그림임에도 포연과 피비린내와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지옥 같은 현실과 무관하게 고고하고 이상적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누렇게 익은 논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좁은 길 위에 연미복을 입고 우산을 든 영국형 신사와 같은 작가의 모습은 좀 이질적이다. 개 한 마리가 뒤를 따르고 하늘에는 새가 날아갈 뿐이다. 땅에는 벼가 가득하다. 자연은 여전히 풍성하고 싱싱하다 [...] - 미술평론가 박영택 

박수근 I '귀로' 하드보드에 유채 23.3*14.2cm 1964년[개인소장] 

박수근그림만큼 감동을 주는 그림이 또 있을까 그의 그림은 구상이면서 추상이고 회화이면서 조각이다 그런 미술의 통합적 요소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매혹적이다. 그 단순성 소박성 자연성은 가장 한국적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서늘한 찬기 느껴지는 이 그림이 왜 마음을 이리도 포근하게 달래주는지 모르겠다 

책에 너무 빠지면 나를 잃기 쉽고, 책을 너무 멀리 하면 마음이 혼탁해진다. 고로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리뷰 남궁환전-Fort Interieur(내공)] 갤러리진선에서 2011.01.19-01.30까지 
프로젝트 " Fort Interieur" 의 소개와 더불어 2011 transmigration Series(묵점) 신작 선보이는 자리 


[작가소개] 남궁 환은 
서울대 서양화과와 파리국립미술학교(Beaux-Arts)를 졸업하고,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윤회', '전생' 혹은 '영혼의 이주'를 뜻하는 'Transmigration' 연작을 통해 인간의 정신성을 일관되고 수행적으로 작업하며 주목을 받는 추상작가다. 

남궁환의 작품과정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호흡과 정신을 가다듬으며 수행하듯이 작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묵을 찍고 숨결을 고르면서 '예술혼의 기’가 담긴 묵 점이 종이 위에서 춤추게 되고, 추상적 형태의 원형들이 표현된다. 그의 작업은 그래서 마치 묵가적 수행을 하는 갠지스 강가의 수도사와 흡사하다. 

강인규 미술애호가와 임정욱 작가 겸 갤러리스트 

"수 없이 많은 점들, 구멍들, 심연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입구들이 표면을 뒤덮고 있는 구체. 남궁 환은 해면(海綿)이나 배아(胚芽), 혹은 동물이나 식물의 다공성(多孔性) 표피를 연상시키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린다. 때로는 폭발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블랙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원형체를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마치 수행을 하는 선승처럼 매일매일 그리고 있다. [...] 

남궁 환은 2007년부터 묵점(墨點)을 이용한 이러한 드로잉 작업을 해오고 있다. 1998년부터 '숨결(souffle)'을 키워드로 삼아 작업해 왔으며, 1999년에 있은 서울대 졸업전작품을 위해 이미 '숨결의 궁전(Palais du Souffle)'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학부를 마친 후 바로 프랑스로 유학한다 

그의 그림이 단지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양태들을 가시화한 것이라면 그것은 지나치게 재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그림들은 재현적이기 보다는 훨씬 수행적(performative)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무언가를 그리거나 어떤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는 대신 그것이 그려지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행동들의 기록으로서 더욱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 

그는 작품을 그의 자화상에 비유한기도 한다. 그려진 어둠과 빛의 괴체가 얼굴처럼 둥근 모양으로 그려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표면을 덮고 있는 수많은 분열적 구멍과 불꽃들이 자아내는 정신적 양상이 작가의 의식을 닮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아가 매번 동일하면서도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회화적 연작으로 구성된 다양체(多樣體) 역시 주체의 변화하는 양상을 잘 드러낸다" <윤회하는 다양체의 포트레이트> -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 

[리뷰 신인작가지원프로그램]
 CoA is U 참여작가: 공정현, 김승열, 김스민, 서명희, 원가희, 윤태일. 갤러아트사간에서 2011.01.05-2011.01.31까지 

원가희 I 운명 2010 

초현실주의적 데페이즈망기법으로 사진의 현실에 환상과 환영을 주어 의외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윤태일 I 채취 잉크젯프린트 2010 

사랑의 시작은 체취에서 시작되는 것인가. 체취는 체질이나 의식주의 스타일과 관련이 깊을 것 같다. 

김승열 I 들여다보기 오혜숙 잉크젯 2010 

30-40대 여성의 가방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를 보면 그 사회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문화인류학적 접근이다. 

공정현 I '고민시리즈' 잉크젯 2010. 

88만원세대의 모습이 여러 양상을 보여주면서 과연 기성세대를 뭘 했는지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4대강 같은 일로 자연의 복구할 수 없을 정도고 훼손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은 원금이고 우리는 그 이자를 받는 것인데 우리의 후손들에게 너무나 개발된 자연을 유산으로 물려줄 때 이자를 못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 

김스민 I 'My breath is free and easy' lambda print 2010 


김스민작품은 몸이 개입됨으로써 소통의 새로운 장을 연다. 오브제와 통정 혹은 말걸기가 너무 아름답다. 

서명희 I '담 시리즈1' 2010 

사진의 장점은 구상인데 요즘 추상에 도전하는 시도가 보인다. 그런 모험이 없다면 현대사진은 불가능하리라. 

<쉬어가는 코너> 30년 전 1980년에 나온 제도교육을 풍자한 마자(MAJA)의 만화인데 지금도 유효하네요 

교육의 목표 어떻게 하면 (인간이 되느냐가 아니라) 부자가 되느냐 남자가 되느냐 백인이 되느냐 


학교교육의 과보호로 공부를 하면 할수록 현실을 모르게 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위계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배운다. 

Le mérite est un écran de fumée qui cache la perpetuation des privilèges - Everett Reimer 
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특권층의 이익을 영구화시키기 위해서 만든 연막전술이다 - E. 라이머 

사회엘리트가 가는 길이 공평하지 않네요. 역시 백인 남자가 가장 유리히겠죠 

제도교육이라는 공장에서 등급이 새겨져 상품처럼 생산되는 학생들 

인간위주의 학생평가보다는 테스트위주의 인간평가를 하는 것이 오늘날 교육의 현실이다. 지나치게 윤리와 예의와 형식을 강조하여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맛보는 훈련을 방해하고 있다. 지나치게 금지하는 것이 많게 되면 학생들은 자유로운 생각과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거칠고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다. 

학생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들 

1 부모의 부(고수입) 2 아이큐(IQ) 3 백인 4 남자 5 아버지의 IQ 6 어머니의 IQ 7 유산 8 아버지직업 9 학력 10 키 11 언어표현능력 12. 아버지의 예금 13 어머니의 예금 14 어머니의 유산 15 아버지의 유산 16 어머니의 견해 17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 


졸업장을 따려면 실력보다 경제력이 따라줘야 한다는 뜻인가 역시 돈이 많아야 교육에서도 큰 혜택을 받겠죠. 

위 만화 보니까 갑자기 <죽은 시인의 사회(1989)> 명장면 생각나네요 http://pann.nate.com/video/108457165

[신간소개-미각의 제국] 비빔밥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까닭은 

"먹는 즐거움은 절제 있게 섭취했을 때 피로를 동반하지 않는 유일한 쾌락이다. 먹는 즐거움은 연령과 조건을 불문하고 언제나 가능하다. 먹는 즐거움은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필연적으로 돌아오며, 하루에 두세 번 불편없이 반복될 수 있다. 먹는 즐거움은 다른 모든 쾌락과 섞일 수 있으며, 심지어 다른 쾌락들의 부재를 달래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먹음으로써 우리는 본능적 의식에서 나오는 정의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황교익은 비빔밥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조리법’이라고 비판인지 칭찬인지 모를 일야기를 먼저 꺼낸다. 

"비빔밥의 나물을 제대로 조리해 내자면 보통의 공력이 드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골국물, 콩나물, 밥, 쇠고기, 배, 청주, 마늘, 청장, 참기름, 깨소금, 잣가루, 미나리, 도라지, 고사리, 표고버섯, 애호박, 무, 고춧가루, 쑥갓, 오이, 당근, 달걀, 다시마, 고추장" 등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져 맛을 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황교익이 '난해하다'고 투덜거리는 건, 많은 경우 여기에 또 '고추장'을 듬뿍 투하하기 때문이다. 황교익은 이에 대해 "고추장은 한식 식재료 중 최강군이다. 고추장 한 숟가락이면 한 드럼의 육개장 맛도 변하게 할 정도"라며 "여리디 여린 나물들을 조물조물 무쳐 놓고 왜 이 강력한 향의 고추장으로 비벼 마무리를 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아마도 갖가지 자연 그대로의 맛이 콧속과 입속에 진하게 전해져오며 이전과 다른 맛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별 감흥이 없다면? 그럼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시라. "먹는 즐거움은 연령과 조건을 불문하고 언제나 가능하며, 또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필연적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기사출처> 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