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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2부 '다다익선' 간담회, 백남준 입담에 기자들 탄성

<2부> '다다익선' 간담회, 백남준 입담에 기자들 탄성 <작성 중>

<1> 유머의 천재 백남준 인간미 8번

백남준 예술만 아니라 유머에도 천재다 다다익선 기념 축사 중 1988.9.15. 말이 이번 3층 전시 벽면에 적혀 있다 "내 어렸을 때 별명은 헐렁이 이었다.. 헐렁이를 영어로 하면 소프트웨어다. 그 헐렁이를 삼성전자가 받아준 것이 내 작품이다" 재치가 넘치는 말이다.

그밖에도 내가 5천 시간을 들여 1분 비디오를 만들었는데 5백만 명이 봤다면 이것은 시간을 잘 유용한 것이다. 누가 당신이 대통령 되면 세계 문제 어떻게 해결? 백남준 대답: 석유를 쓸모없게 만들겠다 대신 정보(인공지능 등)를 에너지원으로 삼겠다(1980) 등등 부지기수다.

당시 다다익선 설치 기계기사'남주희'의 증언 들어보자 88년 백남준 6월 김포공항 도착 기자들 많이 모였지만 거기서 기자간담회는 안 했다  당시 테러 등 위험 등으로 그래서 바로 백남준을 모시고 과천 국립미술관으로 왔고 기자간담회는 과천에서 열렸단다.  

1988년 백남준 질문을 노리고 있던 기자들이 말을 꺼내지 못하다. 기가 팍 죽어버리다.  어떤 일이 있었나 백남준  어떤 말을 했나?. 이 과천에 있는 사무실 위층에 관장실 옆에 소회의실이 있는데, 그 소회의실에 정말 엄청 많은 기자들이 모였습니다.  백 선생님께서 물 마시고 이렇게 좌중을 둘러보시고“태고 때는 말이야, 우리 동북지방에 한 <3개월 동안> 한 번도 해가 뜨지 않고 늘 밤인 적이 있었어."라고 입을 떼셨어요.

달 인류 최초의 TV

 그러면서 “일본, 중국, 한국은 음력을 쓰고 있잖아. 그때 당시에는 해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달을 봤겠지. 달을 봤을 거야. 달을 보고 가령 예를 들어서 달무리가 서면 내일 비 오겠다, 달이 이제 그 어떤 크기에 따라서 날짜가 얼마만큼 갔다고 알 수 있는 거고.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달을 쳐다보면서 정보를 서로 공유했지. 그래서 그것이 가장 오래된 TV고 달은 인류 최초의 TV였다.”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선덕여왕

 순간적으로 그 많은 기자들 앞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기자들이 질문할 엄두도 못 냈죠. 모두들 이제 선생님 입을 쳐다보고 있는데 또 한마디를 추가했단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지었어." <선덕여왕 개구리 소리 듣고 상대 군사정보를 파악> 대단한 군사 전략가였다고 그래서 백남준은 자기가 <선덕여왕 로봇>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어오

예술은 그 시원으로부터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었으며 인쇄 매체에 대치되는 현대의 영상매체를 통해 작가 백남준은 시원적인 예술의 역할인 소통의 방식으로 돌아가려 듯싶다. 끝판으로  서양철학에서 처음으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백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종이는 죽었다. 단 화장실 종이는 빼고.” 뭐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고 좌중을 웃기기도 하고. 그날 저는 선생님의 타고난 입담, 천재성을 느꼈다고.

 백남준의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 문화를 양력을 사용하는 서양 문화보다 더 높이 쳤다. 옛날 할머니들 음력으로 사셨는데 계절의 변화를 정확 예측했다. 우리 외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백남준의 대표작 달은 인류 최초의 TV(가장 오래된 TV)는 음력을 찬미한 작품이다. 백남준 달은 인류 최초의 TV였다고 이것을 조금 바꾸더니 마침내 인터넷을 만들었다.

우리가 천문 민족이 된 것은 과거는 메소포타미아 등 많은 고대국가가 그랬지만 별을 보고 모든 정보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21세기도 유효하다. 우주 위성 첨단 기술 경쟁은 바로 그런 (군사력을 포함해서) 정보 전쟁의 연장이다. 위성이 지금도 중요한 것은 빅데이터와 AI가AI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백남준 비디오 아티스트보다 정보 아티스트라고 해야 더 정확한 규정이 될 것이다.

<2> 아카이브 기획전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재가동을 기념하여 <다다익선>의 설치 배경부터 완공, 현재까지 운영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아카이브 200여 점과 구술 인터뷰로 구성된 기획전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9 15일부터 2023 2 26일까지 과천관에서 열렸다.

이때 남긴 백남준의 명언도 또한 천재적이다.

[백남준인터뷰, 천재의 언어]

<
나는 한국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외국을 떠도는 문화상인입니다>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필요합니다>

198434년 만에 금의환향한 그가 한 인터뷰 역시 촌철살인, 천재의 언어다. "왜 조국을 나두고 외국에서만 활동합니까" -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 수출이 필요합니다. 나는 한국문화를 수출하기 위해서 외국을 떠도는 문화상인입니다 "백선생님은 예술을 왜 합니까" - 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짭짤하고 재미있게 만들려는 것이지요 [사진] 연합 1984.6.22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은 텅 빈 공간에서 시작해 백남준의 가장 대규모 비디오 설치작품인 <다다익선>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되고 현재까지 운영되는 과정을 소장 아카이브 중심으로 보여주는 첫 기획전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백남준 이미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던 세계적 스타였다.

한국으로의 여행 1984

1984년35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며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 기반을 넓혀 나갔다. 여기서는 1984년부터 1988년 작품이 집중 소기된다 미술관에 <다다익선>을 설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협업했는지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의도를 반영한다.

영상 촬영 : 폴 개린 영상 편집 : 구보타 시게코 <한국으로의 여행(Trip to Korea)> 1984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분, EAI 소장

이 특별전에 나오는 작품들을 알아보자 1984년 한국 여행, 1986년 텅 빈 가운데 유선형 공간 1988년 세계와 손잡고 인터뷰: 김원, 남중희, 유준상, 박윤행 폴 개린 안종현, 이정성 7명 구술 인터뷰 등이 있었다  백남준이 다다익선에 사용한 미디어 작품 NJP 1,2,3, '고장 난 TV'라는 코너와 그리고 백남준 사진가 이은주 선생 작품 등이 선보인다

1988, 백남준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76명이었다고 한다.

이지희 연구사

아카이브 전의 시작은 미국으로 출장 간 이지희(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백남준 살았던 아파트 5층 뉴욕 머서가 110번지 집 출장 갔다가 백남준 미국 조수 폴 게린이 촬영한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가 편집한 <한국으로의 여행 (Trip to Korea) 맨 마지막 사진(1984)을 발굴하면서 본격 시작된다. 여기저기 작품들, 백남준의 손길이 거쳐 갔을 편지와 사진, 화구와 불상, 책들 보는데 초인종이 울리고 폴이 들어온다. "이게 <다다익선>을 편집했던 순서예요" 나에게 제시했다

백남준 뉴욕 아파트 5층

 “백남준 아파트자 스튜디오 뉴욕 소호 머서가(Mercer St) 110번지 방문 오래된 건물에서 벨을 누르니, 은발의 노신사 노만 밸러드(Norman Ballard, 1950년생) 그는 한국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레이저 아트의 최고 권위자이자 2000년 백남준 뉴욕 전시 레어지 총책이었다

구보타 시게코 비디오 아트 파운데이션 널찍한 공간에 크고 작은 모니터들에서는 반짝반짝 불이 나오고, 벽에는 한자와 영어, 그림이 뒤섞인 드로잉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이 출품작은 1984<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 선풍을 일으킨 백남준 30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는 과정을 백남준이 1984년 김포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그해 6월 김포공항에 도착해 34년 만에 '금의환향'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국 땅을 밟으면서 취재진과 팬들에게 인사하고 마중 나온 가족들과 함께 선친을 모신 산소를 찾아가는 여정과 거기서 절 하는 모습을 올린 기록한 상영물이다

 <3> 이번에 '세계와 손잡고'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1988 9 11 0 30 KBS 1 TV에서 11개국을<세계와 손잡고(Wrap around the world)>>(1988)다. 

브라질 삼바

11개국 방송을 위성으로 연결한 것이다. 브라질 삼바 축제, 행위예술 시연 등이 소개된다. 동서남북 지구촌 연결 이게 백남준의 특징이다. 다양한 나라의 문화 교류와 소통으로 세계 평화를 기원하다

 1988 47분 영상을 이번에 제대로 보다 그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 규모와 내용에서 많이 업시킨 것이다.

영상에서는 각국의 문화, 예술, 스포츠와 관련된 장면, 진행자들이 위성중계기를 통해 서로 대화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었는데 이는 동양과 서양은 절대 만날 수 없고, 미디어가 개인을 통제하는 시대가 될 거라는 암울한 전망을 백남준다운 방식으로 유쾌하게 풀어낸 것이었다. 

박윤행

먼저 이 작품 <세계와 손잡고> 한국 연출 담당 KBS PD 박윤행이 백남준과 같이 이 작업을 하면 본 백남준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정도의 PD라면 당대 한국사회 최고 엘리트. 할 수 있다 위성 아트로 당시 첨단 기술로 방 속이 끊어지지 까다로운 과정이 필요한데 이런 방 속을 해본 사람은 당시에 세계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는 그 런 방송을 감당해 냈다  전 세계 방송과 네트 워킹하다>

백남준, <세계와 손잡고 > 1988

옆에서 뵌 백남준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묻자,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면서도 대단히 자상한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범접하기 어려울 그런 인물일 것 같으면서도 일단 벽을 허물면 아주 자상하기 짝이 없어요. 세심하게 마음 써 주시고 그런 부분이 아주 따뜻한 대가였다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요즘 뭐 워낙 예술적으로 탁월한 인물이 많습니다만, 주로 음악계에 많이 있죠. 그런데 이런 미술, 특히 그 예술계에서 그렇게 세계적으로 공인받고, 추앙받는 그런 인물들이 이렇게 백남준 선생님 이후에 그렇게 많지는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위, 춤 당시에는 BTS가 없었다

백남준, <세계와 손잡고>, 1988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7분, EAI 소장/그리고 이 영상에 당일 완성된 <다다익선>의 모습이 방송되었다. 백남준 TV놓고 제사 지내는 모습 그의 케첩 퍼포먼스 익살스럽다./<백남준 세계인 축제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자 흥분한 것 같다. 세계 11개국 위성을 연결 주로 춤과 노래 대중문화의 축제의 향연을 소개하다. 그야말로 다다익선이다 영국 천재적 연예인'보위'의 춤이 하이라이트이다. 당시에 BTS가 있었다면 당연 출연했을 것이다

인도 방송 중계 코끼리 축구

여기에는 거의 생중계로 당일 완성된 <다다익선>의 모습이 방송되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롭다. 인도 방송인 훈련된 코끼리가 축구공을 발로 차고 패스하는 장면을 사실 처음 본다. 그 당시에는 한국 문화, 특히 PBS 같은 주류 미국 공공방송에서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어요. 전통 한국 문화는 많이 소개되었다.

백남준 한복 퍼포먼스 1988

여기서 백남준 한복을 입고 퍼포먼스 하는 장면 나오는 이것을 본 백남준 조수 개리는백남준이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나왔기 때문에 아마 한국 문화를 처음 접했던 미국인이라면 한국인들의 유머감각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백남준이 한복을 입지만 전통적인 묘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죠. 한복을 멋지게 소화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그가 담뱃대를 문 모습을 봤어요.

<4> 인터뷰 개린 들려주는 특별한 이야기: 백남준 한국사랑 방식

개린

1984년부터 백남준 작업에 참여한 개린(Garrin)은 보는 비디오 아트란 본성을 이야기하면서 백남준 <백남준 비디오는 예를 들어 자연을 보면 강물이 흐르고, 새가 노래를 부르고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잖아요? 자연 속의 콘텐츠를 보는 게 아니라 감각을 통해 느끼는 거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역시 시각, 청각적 센세이션이고 그 콘텐츠는 의식의 흐름이에요. 백남준 작품을 보는 것이 TV를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다큐 영화도 아니죠. 라는 그의 비디오아트 해설이다.

 백남준은 평생 TV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책을 즐겼다고 책이 TV보다 정보를 더 빨리 얻는 수단으로 보다 백남준 후기에 기력 없어 할 수 없이 TV를 보았다고 늙으면 사실 독서가 많이 힘들어진다.

1995 광주비엔날레, 백남준 출품작 고인돌

1988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다다익선> 작품을 봤을 때, 소감에 대해선 저는 처음 <세계와 손잡고>를 보면서 <다다익선>을 처음 접혔고 보자마자 감탄했어요. 그리고 사물놀이는 끝내줘요. 이것이 사물놀이 퍼포먼스와 다른 것이 뒤섞인 <다다익선>에 대한 저의 첫인상이었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믿기지 않네요.

개린이 들려준 특별한 백남준 이야기 1988년 아니라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이야기<백남준 제1회 광주비엔날레 성공을 위해 너무 애쓰다가 다음 해에 쓰러진 셈이다. 돈이 든 초록 가방을 가지고 다닌 백남준은 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 참가하는 외국 작가들에게 직접 현금을 나눠주었어요 정말 대단히 기발한 아이디어 획기적 행동 퍼포먼스다.

 이건 광주비엔날레 성공적 개최를 위한 것이었어요. 그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었죠. 다행히 광주는 대성공을 거두었어요. 80만 명이 관람했어요. 그의 목적은 한국을 문화 중심지로 세계지도에 올리는 것이었어요. 한국에서 처음 열린 가장 중요한 세계적 미술축제였죠.

<5> 고장이 잦은 다다익선 그 가치를 더 높이다.

이번 아카이브 전에서 재미있는 코너가 너무 많다 '아카이브전 [고장 난 TV(Malfunction TV)] 코너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내·외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20199다다익선 보존·복원 3개년 계획을 어떻네 노력했는지 작품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되 불가피한 경우 일부 대체 가능한 디스플레이 기술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3년의 기간을 거쳐 <다다익선> 보존·복원 사업을 완료하였다.

 백남준은 작품을 제작할 때 그 시대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모니터를 사용했고, <다다익선>의 경우 모니터가 고장 나면 교체해도 좋으며, 그에 관한 전권을 테크니션에게 일임한다는 각서까지 써주었다. 그러나 작가도, 테크니션도 아닌 우리는 한 편의 명화를 대할 때처럼 작품의 원본성이 깨지길 바라지 않는다.

 <아카이브전> 백미는 다다익선 제작과 복원 과정에 관한 인터뷰다

1988년 <다다익선>의 34년 동안 상설 작품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과 테크니션 이정성, 1988년 다다익선 운영 요원으로 채용돼 오랜 시간 작품을 관리한 안종현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 번 기획적에 '고장 난 TV'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다익선은 더욱 유명하고 소중한 작품이 되었다. 앞으로 전자제품이 고장 났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 노하우를 미리 알려준다. 보석을 잘 갈고닦듯이 다다익선은 그런 종류의 작품이다. 최고의 예술품은 더 많은 돌봄과 투자와 관심과 어루만짐이 필요하다.

 이것을 LCD고치면 되는데 사정이 있는가. 하긴 고장 날 때마다 고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앞으로 다다익선을 보는 시간이 정해진다. 과천에 가도 못 볼 수 있다. 가동시간은 주 4, 하루에 2시간 정도로 예정하고 있다. 다다익선은. 다다익선은 '비디오'아트가 아니다. 미디어아트는 총산이다 다양한 콘텐츠를 통한 세계 이해오 창의적 사유를 도발하는 시청각적센시에션이고 의식의 흐름을 랜덤 하게 감상하는 것이다. <다다익선> 복원 과정을 기록한 백서도 나온다.

 <6> 백남준 사진작가 이은주 : 백남준 해맑음 캐치, 투병과정 관찰

이은주, <드로잉 하는 백남준>, 2000, 인화지에 크로모제닉 프린트. 작가 소장 이은주, <남겨진 자리>, 1999, 인화지에 크로모제닉 프린트. 작가 소장 이은주, <영상편집실>, 1997, 인화지에 크로모제닉 프린트. 작가 소장 이은주, <부퍼탈에 떠 있는 전차>, 2011, 인화지에 크로모제닉 프린트. 

아래 백남준 초상 1992 백남준의 해맑음을 주제로 사진을 찍다

 백남준의 사진가는 굿 사진과 뉴욕 세련된 분위기 사진과 그리고 이은주 사진 등등이 있다. 이은주 사진작가 백남준 관련 사진 백남준의 인간미 그 천재가 가진 인간미 해맑음을 평생 추적했다 1992년 이후 백남준의 허락을 받아 찍었다.

백남준 뉴욕 작업실

이번에는 뉴욕 작업실과 백남준 사진들 말년 뇌졸중 이후 힘든 시기 장례식 장면, 백남준은 한마디로 해맑은 사람이다> 16 이은주 선생의 다른 ((드로잉 하는 백남준 2000)도 볼 수 있다. 아래 왼쪽이 사진가 이은주 선생 /

이은주 작가에게 1992년은 각별한 해이다. 40여 년의 외길 사진인생에 에너지가 된 내 인생의 멘토세 사람을 만났다. 마더 테레사 수녀와 천경자 화백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이은주 선생 1990년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백남준 사진 촬영을 허락받았다

한국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백남준의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여럿 있지만 이은주 선생은 이렇게 회상하다 백남준 선생은 꽃밭에서 혹은 꽃밭으로 돌아가셨어요 Nam June PAIK passed away in a field of flowers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돌아가는 곳이 달라지겠죠/

<7> 다다익선 교훈과 메시지 참여 소통 공존 세계 평화

 백남준 다다익선 작업하면서 왜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라고' 했나? 그 난해한 비디오 아트를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하기도 했다. 원은 지구다. 통신은 정보다. 지구촌에 원활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비디오 아트다.. 결론으로 비디오 아트는 정보 아트다. 그가 인터넷을 착안한 이유다.

 <결론> 1961년에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이니라 단지 변화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화면의 움직임과 변화가 그 변화가 꼭 아름다움은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진정한 21세기 예술이 되려면 과학을 만나야 한다. 그때야 인간도 조물주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결국 천지인 그 사이의 소통을 구체화 원활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류는 진화한다. 백남준의 미학은 움직이는 것과 변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백남준 작품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 

백남준은 이런 말을 했다

백남준 소위 참여와 커뮤니케이션 소통이 바로 우리 시대정신 봤다 전 우주가 하나가 되는 이제는 모두가 예술가 시대 문화민주화 시대다. 우리 손에 폰만 있어도 이제는 다 시각예술가가 된다.  작품을 단지 수동적으로 감상하기보다 능동적으로 직접 만들어보는 시대가 되었다. 다만 거기에 자기만의 관점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 작가가 되지 않더라도 예술가 근처에 가 보는 일은 그의 삶을 풍족하고 아름답고 자유롭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