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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자-사상가

[자크 라캉] 루디네스코 저, '정신분석대사전' 한 항목 소개

정신분석대사전은 필자가 20년 전에 편집한 책이다. 책값이 15만원 좀 비싸다.  그 중 자크 라캉 혹은 라깡 편 소개한다. 한국의 학문이 뒤떨어지는 것이 이런 전문 사전이 없기 때문이다. 서구와 한국의 차이 심하다.

자크 라깡에 대한 <정신분석대사전> 중에서

[라깡, 자크 항목: LACAN Jacques (1901-1981, 본명: 자크 마리 Jacques-Marie) 프랑스 정신의학자, 정신분석가]
*
내 머리로 이 책 편집하다 보니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런 사전 보면 유럽과 한국의 학문수준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다.

자크 라깡>은 프로이트주의의 역사에 대한 위대한 해석자 중 유일하게 프로이트의 저작에 철학적 기반을 부여하고, 정신주의에 쏠리지 않으면서 생물학적 장치로부터 나오게 한 사람이다. 이 혁신적인 해석의 유일한 패러독스에는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서 의식적으로 분리했던 독일 철학 사상을 도입한 점이다. 이 지대한 공헌으로 라깡은 프랑스 정신분석 학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동시에 많은 적대감을 주는 원인 제공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를 맹렬히 경멸하는 몇몇 사람이 부당하다면, 그것은 복잡하게 뒤섞인 전문용어와 또 기교를 부린 문체와 모호함을 연출하는 바로크 풍 언어 때문인데 그건 이해해줄 만한 것이었다. [적어도 1970년까지] 언어로 표현된 강의의 모호성으로 비판을 받았다.

라깡은 글쓰기를 억제해야 하는 문제로 고통을 받았고 텍스트를 출판하기 위해 도움을 필요로 했으며, 1953년부터 1979년까지 대중을 상대로 강의했던 유명한 세미나를 옮겨 쓰는 것이 필요했다. 1973-1995년 사이 25개 세미나 중 9개가 사위인 자크-알랭 밀레(Jacques-Alain Miller)에 의해 완성되어 발행되었고, 1978-1979년의 26번째 세미나는 자크 라깡이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침묵에 잠겨 버렸다.

자크 라깡은 강연 전반에서 나온 50여 편의 논문을 편집하였고, 1966년 출판인 프랑수아 발(François Wahl)이 그중 가장 핵심적인 34편을 900여 페이지의 거대한 저작물로 엮었으며, <에크리(Écrits)>라는 책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1994년에는 앙젤 데 프루토스 살바도르(Angel de Frutos Salvador)다른 판(les variantes)’을 추가로 내놓았다. 1938년에 발표된 라깡의 위대한 논문을 1984년 자크-알랭 밀레(Jacques-Alain Miller)<가족 콤플렉스(Les Complexes familiaux)>*라는 제목으로 편집 출판하였고, 다른 것은 라깡이 만든 잡지 <실리세(Scilicet)>에서 얼빠진 사람(L’étourdit)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인터뷰 한 필름도 있었다. 하나는 로베르 조르쟁(Robert Georgin)이 벨기에 라디오-텔레비전(라디오 프로)에서 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ORTF, Office de radio-diffusion télévision française)의 연구 기획 필름(TV)에서 브누아 자코((Benoît Jacquot)가 기획한 자크-알랭 밀레와의 대담에 관한 것이다. 자크 라깡은 단 한 권의 저서를 썼는데 마르그리트 앙지외* 경우를 기록한 <인성과 관계에서 편집증적 정신증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의학 박사 학위 논문이었다.

다른 논문과 수많은 파리 프로이트 학파(EFP) 심포지엄에서 그가 한 발언은 다양한 잡지 속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의 편지는 거의 없어졌다시피 했는데 1993년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가 247통의 편지를 조사 발굴했다. 라깡 작품은 16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조엘 도르(Joël Dor, 1946-1999)가 출판된 책과, 미출판 된 책 제목을 종합한 가장 훌륭한 참고 문헌 목록을 만들었다. 세미나의 우수한 해석적 비평들은, 1986년 마르셀 마리니(Marcelle Marini)와 또 한편으로는 2000년 무스타파 사푸앙(Moustapha Safouan) 덕분이었다. 1993년에는 참고 자료와 원고와 텍스트를 모은 라깡 문서 보관소(Lacan-Archiv.)와 정신분석 도서관(Pschoanalytische Bibliothek)이 스위스의 독일어권에 세워졌다. 미셸 루상(Michel Roussan)에 의해 가장 우수한 필사 작업이 이루어졌다.

자크 라깡은 거의 모든 프로이트주의*와 유명한 사례[헤르베르트 그라프*, 이다 바우어*, 세르게이 콘스탄티노비치 판케예프*, 에른스트 란저*, 다니엘 파울 슈레버*]를 해석하였고, 또 그 자신의 개념론을 정신분석 자료에 추가하였다.

라깡 개념에 대한 두 개의 사전은 딜란 에반스(Dylan Evans)가 만든 영어 사전과 이냐시오 가라테(Ignacie Garate)와 호세 미겔 마리나스(José Miguel Marinas)가 쓴 에스파냐어 사전이다. 가장 아름다운 라깡 작품 해석은 루이 알튀세르(1918-1990), 자크 데리다, 크리스티앙 장베(Jambet), -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 베르나르 시셰르(Bernard Sichère) 등과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자크-마리 에밀 라깡은 보수적인 가톨릭 중산층 부르주아 출신으로, 1901414일 오를레앙 식품 제조 판매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른 형제와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에 성녀 마리아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양차 대전 사이에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점차적으로 그 이름을 없애 버렸다. 아버지 알프레드 라깡(1873-1960)은 그의 아버지인 에밀 라깡 (1839-1915)의 권위에 억눌린 허약한 남자였다. 어머니 에밀리 보드리(Émilie Baudry, 1876-1948)는 지적인 여성으로 종교에 전적으로 심취하였다. 이 평범한 가족 분위기에 젊은 라깡은 염증을 느꼈다.

그 다음으로 1903년생인 여동생 마들렌, 그 다음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레이몽과, 마르크-프랑수아가 있었는데 그는 형을 매우 좋아하였다. 마르크-프랑수아는 1929년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어 부르제 호숫가에 있는 오트콩브(Hautecomb) 수도원에 입교하였다.

스타니슬라스(Stanislas) 중고등학교(collège) 졸업 후 라깡은 가톨릭과 단절하였다. 16살에 그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윤리학>에 심취하였다. 1년 후 그는 니체에 심취하고, 얼마 동안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1868-1952)에 빠져 그의 미학주의와 언어에 대한 심미안을 차용하고, 전위(아방가르드) 문학에 흥미를 느꼈다. 알프레드 라깡은 큰아들의 사업을 물려받고 겨자 사업의 전적인 추진을 원했으나 아들의 성장 과정을 느끼지도 이해하지도 못했고, 에밀리 라깡은 종교와 부르주아 순응주의 이외에는 아들의 생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1920년대 파리에서 성공을 꿈꾸었다. 자신을 라스티냑(Rastignac)과 비교하며 아드리엔 모니에(Adrienne Monnier) 서점과 초현실주의자 사이를 드나들었다. 제임스 조이스(1882-1942)<율리시스> 대중 독해에 열심히 참석했고, 작가와 화가와 친교를 맺었다. 그는 성-안나 병원에 수련의로 친구 앙리 에이*와 함께 앙리 클로드의 제자가 되어 정신의학으로 방향을 잡았다. 가에탕 가티앙 드 클레랑보*(Gaëtan Gatian de Cléram- bault)와 조르주 뒤마(Georges Dumas, 1866-1946), 조르주 오이예(Georges Heuyer, 1884-1997)에게서 양식적인 면에서 강한 영향을 입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19326월부터 루돌프 뢰벤슈타인*(Rudolphe Loewenstein)과 교육 분석*을 시작했고, 연말에 범죄 여성[마르가리트 앙지외]의 이야기에서 자기 처벌의 편집증* 사례로 다룬 에메 사례(Le cas d’Aimée)를 그의 논문에 발표하였다.

이 저서는 프로이트주의*의 모든 영감과 1920년대의 신세대 프랑스 정신의학의 반 기관 장애론을 훌륭하게 종합한 것으로 르네 크르벨(René Crevel, 1900-1935),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1904-1892)와 폴 니장(Paul Nizan, 1905-1940)으로부터 걸작으로 즉각적인 찬사를 받았다. 특히 그들은 라깡이 여성 광기*에 대한 태도에서 보여준 학설의 권위와 환자에 대한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로마네스크(romanesque)풍의 본문 사용을 높이 평가하였다. 라깡은 다음해 잡지 <르 미노토르(Le Minotaure)>를 통해서 두 하녀[파팽 자매]가 망(Mans) 지방에서 여주인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다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그들의 지독하게 야만적인 행위에서 두 여자의 혼합된 망상과 잠재적 동성애를 보았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인공 자신에게서 벗어난 무의식적인 리얼리티를 드러내 보였다.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는 이 사건에서 하녀(Les Bonnes)라는 연극을 이끌어 냈으며, 60년 후에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의식(儀式, La Cérémonie)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

프랑스 정신분석 학계 이외에서 그는 빛나는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파리 정신분석 협회(SPP)에서 인정받지 않는 데 대해서 힘들어했다. 이 협회에서 그의 연구는 주목받지 못했고 그의 반관례추종주의는 눈에 거슬리게 했다.

6년 반 동안 뢰벤슈타인*(Loewenstein)과 함께 한 분석을 그는 실패로 끝내고 계속해서 서로 불화를 일으켰다. 결국 그는 에두아르 피숑*(Édouard Pichon)의 개입으로 1938년 분석가로 정식 임명을 받았다. 피숑*은 라깡의 재능을 인정하고, 라깡의 헤겔주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프로이트주의*프랑스식 전통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라깡은 전혀 이 권유에 복종하지 않았다.

1934년 그는 친구 실뱅 블롱댕(Sylvain Blondin, 1901-1975)의 누이이며 말루(Malou)라는 애칭을 가진 마리 루이즈 블롱드(Marie Louise Blonde, 1906-1983)와 결혼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신혼여행 중 라깡은 처음으로 로마를 발견하고 황홀해 했으며, 프로이트처럼 그 도시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고대 로마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바로크 시대의 로마보다는 덜 열정적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그는 베르니니(Bernini) 작품, 성당 건축물과 기념물 등을 감상하며 황홀경에 빠졌다.

처음부터 이 결혼은 오해로 시작되었다. 말루는 완벽한 남자하고 결혼하였다고 생각했고 부부간의 성실성이 행복한 꿈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깡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고 이후로도 절대 그렇지 못했다. 이 결혼에서 카롤린(Caroline, 1937-1973), 티보(Thibaut), 시빌(Sibylle) 등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1936년부터 자크 라깡은 세미나에서 알렉산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 1902- 1968)<정신 현상학>의 헤겔 철학을 주도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르 코이레(Alexandre Koyré, 1892-1964), 조르주 바타이유(George Bataille, 1897-1962),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 1903-1976)와 알게 되었고, <철학적 탐구>라는 잡지와 사회 과학 대학(Collège de sociologie) 모임에 드나들었다. 문화적으로 이론적으로 풍요한 이 시기에 그는 프로이트 저서가 문자 그대로 그리고 독일 철학의 전통적인 빛 아래 다시 읽혀져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36년 처음으로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 마리엔바트(Marienbad) 회의에서 국제 프로이트주의 역사와 만나게 되었다. 라깡은 거기서 거울 영상 단계에 대해 발표를 했으나 어니스트 존스*10분도 되지 않아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였다. 나치즘*의 승리는 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1938년 앙리 발롱(Henri Wallon, 1879-1962)과 뤼시엥 페브르(Lucien Febvre, 1878- 1956)의 요청으로 <프랑스 백과사전(Encyclopédie française)>의 한 항목에 부르주아 가정의 특유한 정신적 폭력에 대해 매우 암울한 내용을 썼다. 정신분석은 가부장제*의 쇠퇴에서 태어났다고 증명하며 파시즘에 의해 위협받는 세계에서 그 상징적 기능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937년부터 그는 실비아 마클레스-바타이유(Sylvia Maklès-Bataille, 1908-1993)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당시 남편인 조르주 바타이유와 별거 중이었고, 장 르느아르(1894- 1979)야외 파티라는 영화에 출연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로랑스 바타이유라는 딸이 있었고 후에 훌륭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루마니아 유대 가정에서 태어난 실비아 바타이유는 자크-베르나르 브뤼니우스(Jac- ques-Bernard Brunius), 레이몽 뷔지에르(Raymond Bussières), 조제프 코스마(Joseph Ko- sma)와 함께 즐거운 그룹인 ‘10월회(groupe Octobre)’에 속했으며 자크 프레베르(Jac- ques Prévert)와 피에르 프레베르(Pierre Prévert) 형제의 지휘 아래 10월회는 브레히트(1898-1956)와 어윈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 1893-1996)의 영향을 받아 민중 연극을 새롭게 선보이려 하였다. 실비아 언니(비안카)는 초현실주의자인 프랑켈(Theodor Frankel)과 결혼했고, 동생 로즈는 앙드레 마송(1896-1987)과 결혼했으며 셋째 동생 시몬은 잡지 <크리티크(Critique)> 사장인 장 피에르와 결혼했다.

전쟁이 터지자 실비아는 안전지대로 피신하였다. 2주마다 라깡은 그녀를 만나러 갔다. 파리에서 그는 모든 공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사적인 손님만을 받아들였다. 레지스탕스 단원이 아니면서 그는 모든 반유대주의에 대해 단호하게 적대감을 표현하였다. 그는 비시 정권과 모든 친독 행위자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냈다.

전쟁 2년 동안 그는 사생활에 몰두했으나, 19409월 라깡은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임신 8개월인 부인에게 애인인 실비아의 임신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말루는 즉시 이혼을 요구했고 1125일 우울증의 위험 속에서 딸 시빌(Sibylle)을 낳았다. 1994년 시빌은 이렇게 썼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다. 내가 임신되었을 때 아버지는 벌써 다른 곳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절망의 열매였으며 누구도 욕망의 열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8달 후 194173, 실비아는 라깡의 네 번째 아이인 쥐디트(Judith)를 낳았고, 호적에 바타이유라는 성으로 입적했으나, 1964년에야 쥐디트는 아버지 성을 갖게 되었다. 이 아버지 성의 대 이음의 불가능성이 라깡의 아버지의 이름개념 구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결정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라깡은 1941년 초부터 릴(Lille) () 5번지에 정착하였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2월 마리 루이즈 블롱댕과 이혼하였고, 실비아는 그녀의 두 딸 로랑스와 쥐디트와 함께 릴 가 3번지에 살게 되었다. 19468월 조르주 바타이유와 이혼한 실비아는 19537월 엑스--프로방스(Aix-en-Provence)에 가까운 토로네 시청에서 자크 라깡과 결혼하였다. 전 부인 말루의 요청에 따라 라깡은 오랫동안 첫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라깡 자신의 딸과 후처의 남편 바타이유의 딸이 사는 두 번째 가정을 말하지 않았다. 이 혼란은 두 가정에 드라마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자크-알랭 밀레는 라깡은 정신분석을 재창조하는 데는 전혀 목적을 두지 않았다. 반대로 가르침의 시작을 프로이트에로의 회귀(Retour à Freud)’라는 기치 아래 두었으며 정신분석에 관해서는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라고 썼다. 1950년 라깡은 헤겔 철학과 소쉬르*의 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 기대면서 프로이트에로의 회귀에 착수했다. 첫 번째로 그는 진실과 존재에 대해 그리고 존재의 베일 벗기기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지고, 두 번째로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과 시니피앙* 이론을 끌어내었고, 세 번째로 그가 위상학*[상징계-상상계-실제계(S-I-R)]에서 사용했던 상징계 개념을 축소했으며, 또한 근친상간* 금지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지닌 보편성에 따라 다시 해독하였다.

자아를 희생하고 그것(거시기, ça)*과 무의식에 가치를 다시 부여하면서, 라깡은 프로이트주의의 큰 흐름 중 하나이며, 프로이트의 옛 분석가 중 한 사람이 대표자 중 하나가 되어 프로이트주의*를 각색하고 첨가하고 해석한 에고(자아) 심리학*’을 공격하였다. 라깡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미국 정신분석이라고 불렀으며 무의식의 우위성에 집약된 프로이트주의*를 전복하는 이 학설을 페스트*라 하며 반대하였다. 라깡은 양차 대전 사이에 정신분석 집단 이외의 사람들과 강력한 관계를 맺었다. 로만 야콥슨(1896-1982),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메를로-퐁티(1908-196l), 분석가인 장 보프레(Jean Beaufret, 1907- 1982) 덕분에 그는 하이데거(1889-1976)와 만나게 되었다.

파리 정신분석 협회(SPP)에서 라깡은 그의 가르침에 매료된 수많은 학생이 모여들었고, 프랑스 제l세대의 아카데믹한 프로이트주의*와 결별하고 싶어 했다. 그는 교육가와 임상가로서 동시에 인정받기 시작했다. 광기*의 논리에 대한 예리한 감성과 정신 기재 영역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접근과 그의 재능은 프랑수아즈 돌토*와 더불어 정신의학 정신분석의 젊은 세대들에게 선호의 여지를 주었다.

1951년 라깡은 파리에서 100여 킬로 떨어진 기트랑쿠르(Guitrancourt) 지방에 위치한 프레보테(Prévôté) 시골집을 사들였다. 그는 일요일에 그곳에 연구하기 위해 칩거하며 환자를 받아들이거나 리셉션을 갖기도 했다. 그는 친구들 앞에서 코미디 연기를 즐겨 하고, 가면극과 춤, 축제를 열었고, 때때로 매력적인 옷차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집에 몇 년에 걸쳐 수많은 책을 수집해 거대한 도서관을 꾸몄으며 단순한 열람만으로도 그의 지적 작업에 대한 열정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정원을 향한 건물에 그는 수많은 예술품으로 가득한 서재를 만들었다. 앞으로 나와 있는 발코니가 있는 방에는 바타이유와 마송의 권고로 구입한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세계의 기원(L’Origine du monde)’이라는 그림을 걸어 놓았다.

모든 나라에서처럼 프랑스에 프로이트주의*가 들어온 것은 세계 2차 대전 직후 갈등과 위기와 논쟁의 시기였다. 1951년 프랑스에서 첫 분열은 정신분석의 새로운 연구소의 설립과 일반인(비의사)에 의한 분석에 관한 문제에서였다. 나흐트(Sachat Nacht) 주변의 그룹 지지자들은 의학 질서의 지지자로서, 라가슈*(Daniel Lagache) 주변에 있는 대학 자유주의자를 반대하였고, 라가슈* 지지자는 나흐트(Nacht) 권위주의에 도전한 연구소의 학생들을 지지하였다.

이 위기 동안 치료 기간의 다양한 시간[또는 짧은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 기준은 45-50분이 의무 시간이었다. 라깡은 대학 편에 섰다. 그는 일반인에 의한 분석에는 찬성했으나 임상 심리학*에 대한 라가슈*(Lagache)의 어떤 이론에도 찬성하지 않았고, 그런 심리학에 정신분석을 흡수하려는 모든 의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 문학 또는 정신의학의 공부가 분석가가 되는 교육과정에서 가장 좋은 세 가지 길로 여겼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1918년 부다페스트의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 회의 때 계획한 프로그램과 일치하는 것이다.

라깡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을 가졌고 있었던 마리 보나파르트*는 제자들의 소요에 크게 동요되었다. 그녀는 일반인(비의사)에 의한 분석*을 옹호하면서도 나흐트(Nacht) 그룹을 지지했기에 자유주의자들과 많은 제자들이 그녀를 떠나게 되었다. 라가슈*(La- gache)는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 1953-1963)를 창설했고, 거기에는 라깡, 돌토*(Dol- to), 쥘리에트(Juliette), 파베-부토니에*(Favez-Boutonier)를 비롯하여 프랑스 정신분석 3세대인 디디에 앙지외*(Didier Anzieu), 장 라플랑슈(Jean Laplanche),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Jean-Bertrand Pontalis),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e) 프랑수아 페리에*(Fran- çois Perrier), 다니엘 비트뢰허(Daniel Widlöcher), 제니 오브리*(Jenny Aubry), 옥타브 마노니*(Octave Mannoni), 모드 마노니*(Maud Mannoni), 무스타파 사푸앙(Moustapha Sa- fouan)이 포함되어 있었다. 블라디미르 그라노프*(Wladimir Granoff)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은 라깡과 분석 중이거나 지도하에 있었다. 19539월 로마에서 열린 첫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 회의에서 라깡은 특기할 만한 발언을 하였다. 정신분석에서 파롤과 랑그의 분야와 기능(‘로마의 연설’)에서 그는 구조주의 언어학과 철학과 과학에서 받은 다양한 영향에서 출발한 그의 사상 체계의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다. 그는 여러 개의 개념[주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시니피앙*] 등을 여러 해에 걸쳐 발전시키고 새로운 임상 처방 책자를 풍부하게 하면서, 수학적 논리적 표현, 가령 배제*(forclusion),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 수학인식소*(mathème), 보로메오 매듭*(nœud borroméen), 성별화 이론*(sexuation) 등의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의 친구 장 들레이*(Jean Delay) 덕분에 성-안나 병원의 계단식 강의실[대강당]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10년 동안 한 달에 두 번씩 격주 세미나를 열어 프로이트의 모든 위대한 텍스트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사상인 라깡주의*의 탄생을 가져왔다. ‘로마 연설은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 잡지인 <정신분석(La Psychanalyse)> 첫 호에 실렸다. 매년 라깡은 이 잡지에 세미나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실었으며, 이것은 각 세미나 주제 요약이었다. 그는 또한 M. 하이데거, 에밀 방브니스트, 장 이폴리트(1907- 1968) 등 다른 많은 사람의 논문도 실었다.

그래서 10년 동안 라깡의 가르침은 프랑스 프로이트주의* 공동체에 풍성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 운동의 재인식 작업을 하는 옛 전사들과 위기에 처한 이 그룹의 옛전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우리들이 보낸 가장 아름다운 시대

파리 정신분석 협회(SPP)를 떠나면서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 창시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 회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1953년부터 프랑스의 이 두 번째 그룹이 가입되도록 집행부와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 당시에 아무도 프로이트주의*의 정통성에서 배제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라깡 자신은 더욱 그러했다. 라깡에 의해 트로이카를 이룬 그라노프*(Granoff), 르클레르*(Leclaire)와 페리에*(Perrier)는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의 재가입을 협상하였다. 몇 년 동안의 대화와 의사 교환을 통해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 집행부는 라깡(Lacan)과 돌토*(Dolto)의 전문가 양성권을 거부하였다. 이 거부의 이유는 복잡하다. 그들은 라깡이 테크닉의 규칙 위반, 특히 정해진 진료 시간의 위반에 대해 비난하였다. 돌토*(Dolto)에 관해서는 아동 정신분석*을 적용하는 그의 태도의 일부분과 전문가 교육에 관해 거부하였다. 그 당시에 라포르그* (René Laforgue)의 제자들이 새로운 분석 방법을 시도하였다.

정신분석 운동의 두 번째 분열[라깡에 의하면 축출’]1963년 겨울에 일어났다. 그것은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의 르클레르*(Leclaire), 라깡(Lacan), 그라노프*(Granoff), 페리에*(Perrier) 그리고 영국 쪽인 피에르 트뤼케(Pierre Truquet) 등 협상자와 제자들이 재난을 당하는 시기였다.

1964년 프랑스 정신분석 협회(SFP)는 해체되었고 라깡은 파리 프로이트 학파(EFP)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우수한 제자들은 국제 정신분석 학회(IPA)*가 인정한 프랑스 정신분석 연합(APF)의 라가슈*(Lagache) 편에 선다. 세미나 장소를 바꿔야 했던 라깡은 루이 알튀세르 중재로 울름 가()의 파리 고등 사범학교(ENS)에서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64년 논문에서 알튀세르는 모든 뉘앙스를 담은 매우 아름다운 라깡 모습을 그려냈다. 알튀세르는 한 인간의 위대함과 실패, 그의 이론적 엄격성과 투쟁에서의 괴로움 등을 아주 잘 파악하였다. “억제된 열정으로부터, 라깡의 언어에 대한 열정적인 구속은 주의와 예방의 상태에서만 살고 살아남을 것이다. 포위된 남자의 언어, 구조의 짓누르는 권력과 공격을 앞세운 동업자, 받아들이기 전에 돌려보내는 척 하라며, 그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반대자의 용기를 꺾으면서 []’ 분석가이거나 분석수행자인 의사들에게 무의식 이론을 가르치며 라깡은 언어의 수사학에서 무의식 언어의 무언의 동격이며 궁극적 본질인 위트, 말맞추기 놀이, 메타포, 성공과 실패, 그것이 분석이든 피분석이든 그들의 치료에서 누린 경험과 동등한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고등사범학교(ENS)에서 라깡은 새로운 청중을 맞이하였다. 이들은 알튀세르가 라깡의 텍스트를 공부하도록 권유한 프랑스의 젊은 철학 세대의 한 부류였다. 그들 가운데 1966년 쥐디트 라깡과 결혼한 자크-알랭 밀레(라깡의 사위)도 있었다. 그는 장인의 <세미나>의 편집인이 되었고 1975년부터 유언 집행자로서 파리 프로이트 학파(EFP)의 내부의 신라깡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1965년 프랑수아 발(François Wahl) 권유로 라깡은 쇠이유 출판사(Éditions du Seuil)프로이트 영역 총서를 만들었고 다음 해인 19661215일에 <에크리>를 출간하였다. 이 작품은 어려운 정신적 작업의 흔적을 담고 있다. 라깡 자신의 다시 쓰기, (Wahl)의 수많은 수정, 밀레의 주석 등 라깡은 드디어 기다림과 그에 상응하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 언론에 요약문이 나가기도 전에 2주 동안 5천 부가 팔렸다. 보급판에서 5만 부가 팔렸고, 이 어려운 텍스트를 선별하여 문고판 두 권을 판매했는데 1권은 12만 부, 2권은 55천 부가 나갔다.

그 후로 라깡은 인정받고 유명해졌으며 정신분석의 스승으로 뿐만 아니라 싫든 좋든 사상의 대가로서 추앙받았고 그의 작품에 대해 미셸 푸코(1926-1984)와 질 들뢰즈(1925-1995) 등 수많은 철학자에 읽히고 해석되었다.

<거대한 작품(Opus magnum)>[즉 에크리를 두고 말함]의 출판 전에 라깡은 지라르(René Girard)와 도나토(Eugenio Donato)가 주최한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의 구조주의 심포지엄에 초대되었다. 데리다는 이렇게 썼다. “볼티모어에서 라깡은 사후에 특히 내가 이를 읽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고 [] 그가 나에게 말한 다른 걱정은 이제 출판이 막 임박한 <에크리>에 관련된 것으로 라깡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약간은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으며, 쇠이유 출판사가 볼륨이 큰 한 권의 책 속에 모두 함께 넣자고 조언하는데 [] 그는 손짓을 지으면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고 []” 라깡은 197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동부 대학가에서 일련의 강연을 하였다. 그의 작품에 대한 독해는 지식인, 페미니스트 그리고 프랑스 문학 교수에게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파리 프로이트 학파(EFP)의 거대주의(gigantisme)와 맞서 라깡은 양성 문제를 전문 분석의 새로운 접근 절차로서 언론을 통한 소개로 해결을 모색하였다. 1969년 그 적용으로 그것에 반대하는 분석가 그룹[페리에*(Perrier), 올라니에(Piera Aulagnier), 발라브레가(Jean-Paul Valabrega)]이 독립해서 새로운 학파인 프랑스어권 정신분석 기구(OPLF) 또는 제4그룹을 만들었다. 프랑스 운동의 역사에서 세 번째인 이 분열은 제도적 위기를 맞아 198015일 해체로 이어졌고 라깡주의* 운동은 20여 개의 연합으로 분산되었다.

1974년 라깡은 파리 8대학에서 1969년 세르주 르클레르*(Serge Leclair)가 만든 프로이트 영역의 강의를 맡았는데 자크-알랭 밀레가 이 일에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사상의 탄탄한 이론 형태로서 그의 사상의 발전적인 변화에 용기를 얻었고, 정신분석에서 수학인식소*의 논리성과 보로메오 매듭*(nœud borroméen) 위상학*에 기초한 정밀과학을 만들려고 혼신을 다하였다.

결장 악성종양 제거 후, 뇌의 장애와 부분적 실어증으로 뇌일리(Neuilly)의 하르트만 클리닉에서 198199일에 서거하였다.

어느 날 친구인 마리아-안토니에타 마초치(Maria-Antonietta Macciocchi)와 담소하면서 라깡은 그녀에게 비밀 이야기 방식에 대해 말하였다. “! 이탈리아 사람은 참 영리하기도 해. 내가 만일 죽을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로마에서 내 생을 마감하고 싶어요. 난 로마의 모든 길모퉁이, 모든 분수, 모든 교회를 알고 있어요. [] 만일 로마가 아니라면 베니스나 피렌체로도 좋아요. 난 이탈리아 별 아래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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