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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자-사상가

[아도르노(Adorno)] '귀와 함께 생각하기', 신음악 철학

[아도르노와 신음악의 철학] -노명우 교수
- '귀와 함께 생각하기(Denken mit den Ohren)'라는 새로운 사유 모델의 한 원형

아도르노의 음악사회학은 사회학 일반의 예증 시도가 아니라, 시각 중심주의적 서양적 사유체계 속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소리와 음악의 정당성 주장을 통해 근대를 비판하려는 거대한 기획이다.

아도르노에게 음악사는 근대와 계몽의 모순된 사실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시장이다.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에 따라 음악은 한편으로 관리되는 사회 (die verwaltete Gesellschaft)'에 의해 고통받고 구속당한 존재이다.

음악은 계몽의 전개 과정과 동형의 순환에 빠져 있기에, 음악은 사회가 강요하는 지속적인 사물화 과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진정한(authentisch)' 음악은 계몽된 사회에 저항을 한다.

'엄격한 음악은 "사회에 대해 사회적 진실(die gesellschaftliche Wahrheit)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음악이 사회에 대한 부정성(Negativität)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음악은 서양문명의 불안요소인 소리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음악적 재료의 속성은 예술 중에서도 음악을 구체적인 대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비대상적인 예술로 만든다.

음악은 비대상적이며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도 외적인 세계와 동일화될 수 없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회화와 결부된 시각에 내재한 자연 지배의 경향을 놓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모사 요청 그리고 대상화 요청을 주체에 의한 자연 지배의 경향과 결부시켜 관찰한다. 대상화의 힘을 빌려 외적인 대상을 이미지로 만들려는 시도는 존재자를 일반적인 개념의 눈을 통해 파악하려는 동일화 사고와 닮은꼴이다.

모사하고 대상화하려는 시도는 동일성의 보편적인 궤도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미지를 만들려는 인간의 자유는 이미지가 대상과 불가피한 결부성 때문에 한계가 있는 자유이다.

아도르노

자연미는 그 무엇보다도 아도르노가 제시하는 음악의 특성과 닮아있다.

음악은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자연미에 가깝다. 음악은 본래 비대상적 예술로서 외적인 대상을 모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의 난해함과 불가사의함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 데에서 설명된다.

음악이 난해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음악은 자연의 어떤 대상을 모방한 결과로 생겨나지 않고, 음악은 자연미 그 자체, 즉 자연미의 불규정성과 다의성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 안에 구체화된 것, 즉 음악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표상할 수 없고 대상적인 의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음악 속에서 조직화된 시간은 이미지의 시간처럼 동차원적인 것은 아니고 순차적인 것이다. 음악은 음악을 구성하는 부분의 시간적인 계열성 속에서 구체화된다.

음악 작품은 부분들의 시계열 속에서만 존재하며, 음악을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는 음악 전체를 시간 속에 서 펼쳐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볼 수 있는 것은 시간 속에서 경화(硬化)된다.

하지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다. 그래서 음악은 덧없음의 범주이다. 음약의 소리는 항상 불변인 채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생겨남과 동시에 사라지기 시작한다.

음악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는다. 근원 철학이 영원한 것의 지배를 지시한다면, 음악은 '덧없음', 시간의 불가역성과 되풀이될 수 없음을 지시한다. 음악은 자연의 '덧없음'을 그 내부 구조 속에 포함하고 있다.

이성은 시간을 초월하려고 한다. 하지만 '덧없음'을 내부에 포함하는 음악은 시간을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음악이 시간과 관계 맺는 방식은 이성이 시간을 취급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도르노가 음악의 시간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음악의 시간성이 서양철학 전통의 시각 중심성을 비판하는 것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시각 중심 문화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에 대한 고찰은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보는 것 중심인 서양철학의 근원을 비판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론과 철학이 본질적으로 눈의 세계에 해당된다면, 음악은 귀의 세계에 속한다. 눈은 "노동과 집중"의 기관이며 눈은 "특정한 것을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한다.

음악사회학은 하나의 예술 장르에 대한 사회학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음악사회학은 서양문명의 시각 중심을 회의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의 자명성에 대한 아도르노의 회의와 눈 지향적인 전통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음악의 정당성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미지에서 벗어난 음악적 세계는 아도르노에게는 시각적으로 지배된세계와 이론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리하여 '음악적인 것(Das Musikalische)''심미적인 것(Das Asthetische)'의 모델이 된다.

음악은 '심미적인 것'의 특성을 어느 무엇보다도 잘 보여준다. 음악이 갖는 비판적 능력의 가능성 때문에 음악은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세계관적 의미를 지닌다.

음악은 서양의 전통적 사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음악은 또한 자연 지배적인 주체의 전통적 행위 방식을 넘어서는 모델을 제공한다. 즉 음악은 '귀와 함께 생각하기(Denken mit den Ohren)'라는 새로운 사유 모델의 원형이다.

'음악적인 것' 속에는 '심미적인 것'을 지시하는 모델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예술 작품의 구조가 음악의 내적 구조에 근접해 가는 의미인 '음악화(Musikalisierung)’'심미적인 것'이 되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음악은 개념 없는 종합이지만, 음악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개념 없는 종합인 음악을 통한 인식 가능성은 바로 음악적 사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반을 이룬다.

동일성 철학에 따르면 인간이 대상을 알 수 있는 인식 방법은 개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귀로 생각하기'라는 새로운 사유 모델은 개념 없이 대상을 인식하려 한다. 음악의 정당성은 전적으로, 음악이 이 새로운 사유 모델 정립에 이바지하는가에 달려있다.

좋은 음은 음악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음악이며, 나쁜 음악은 음악의 정당성 문제를 회피한다. 아도르노의 음악사회학은 좋은 음악에 담겨 있는 음악의 적극적 정당성 주장을 시각 중심주의에 기초해 있는 계몽의 변증법 비판으로 번역하려는 시도이다.